동행취재┃남한 정당·사회단체 조선노동당 55돌 기념행사 참관기
신준영
전국연합 등 정당·사회단체 대표 42명은 지난 10월 9일부터 14일까지 평양을 방문해 조선노동당 55돌 기념행사를 참관했다. 1948년 김구 선생이 북행을 단행한 지 꼭 52년 만의 일이다. 월간 『말』은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로 가는 안내장’이라 할 이번 방북을 동행취재했다.
신준영 기자
다섯 번째 방북. 그러나 어느 때보다 가슴 설레는 길이었다. 지난 1948년 김구 선생이 “38선을 베고 쓰러지더라도 가겠다”며 북행을 단행했던 남북연석회의로부터 꼭 52년 만에 남측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지난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때 취재기자가 따라갔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김구 선생을 수행했던 기자의 심정으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오종렬 의장을 위시한 총 42명의 대표단과 함께 방북길에 올랐다. 단장으로는 한완상 상지대 총장이 선출되었다.
10월 9일 오후 1시 50분 김포공항을 이륙한 고려항공 특별기는 2시 50분 평양비행장에 착륙했다. 평양비행장에는 초청 주체인 민족화해협의회의 김령성 부회장을 비롯해 직업총동맹 리진수 부위원장, 농업근로자동맹 김명철 부위원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김정호 부위원장, 조선여성협회 홍선옥 회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황병준 상무위원 등 사회단체 간부들이 출영나와 있었다. 5백여 명의 시민들은 꽃을 흔들며 ‘조국통일’ ‘환영’을 외치고 있었는데 11시부터 나와 있었다고 했다.
방북단을 태운 자동차 대열은 평양 북동쪽을 향해 달렸다. 해외방문객들이 으레 들르는 만수대 김일성 주석 동상을 방문하지 않고 가는 것이 이례적이었다. 방북단의 숙소는 평양시 강동군 봉화리에 위치한 봉화 초대소. 부총리급 이상 국빈을 위한 영빈관이라 했다. 대동강 상류 강변에 지은 빌라형 숙소였다.
단체별로 숙소에 짐을 풀고 식당에 둘러앉았다. 한완상 단장이 감격 어린 표정으로 건배를 제의했다.
“통일을 위하여!”
자기 소개와 소감 발표시간이 이어졌다. 김종유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 강원도연맹 의장이 말했다.
“강원도 철원에서 농사짓고 있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휴전선을 지켜보면서 저 너머 땅을 언제 밟아볼까 생각했는데 이제 왔습니다. 최전선에서 농사짓는 농민대표로서 통일에서도 최전선에 설 것을 약속드립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하 민가협) 남규선 총무가 말했다.
“우리 모두 이곳에 오느라 며칠 고생했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의 분단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문 목사님 이하 모든 통일운동가들의 고통을 안고 왔습니다.”
10월 10일 오전 8시 방문단은 ‘조선로동당 55돌 축하 열병식 및 군중시위’를 참관하기 위해 김일성광장에 도착했다. 방문단은 주석단 오른쪽 상단 초대석에 섰다. 외교사절 및 해외교포들을 위한 자리였다. 왼쪽은 국내인사석이었는데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은 그곳에 있었다. 광장에는 열병식에 참가할 인민군대 대오와 군중시위 참가자들이 정렬해 있었고 상공에는 조선노동당 55돌 경축 구호들을 드리운 대형기구들이 떠 있었다.
9시. 갑자기 군중들 사이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주석단에 김 국방위원장이 등장한 듯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김영춘 차수가 나와 축하연설을 했다. 단호하나 톤이 높지 않은 목소리가 의외였다. 이어 열병총지휘관인 듯한 한 장성이 총참모장에게 거수경례를 하며 외쳤다.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동지! 열병부대는 준비검열을 받기 위해 정렬하였습니다. 열병부대 총지휘관 상장 김종각!”
경례를 받은 후 김영춘 총참모장은 무개차로 정렬한 열병부대 앞을 돌면서 계속 인사를 보냈다.
“동지들! 안녕하십니까! 조선로동당 55돌을 축하합니다!”
열병부대들이 한목소리로 답했다.
“조국을 위하여 복무함!”
순회가 끝나자 주석단 앞에 와서 선 김영춘 총참모장이 외쳤다.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 열병부대들은 열병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선두로 열병대오의 행진이 시작됐다. 대열은 두부모를 잘라놓은 것 같았다. 다리를 뻗어 40도까지 들면서 손에 무기를 들지 않은 경우 팔은 옆구리에 붙이는 특유의 자세였다. 열병 중 무기 퍼레이드는 없었다. 공격적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신경쓴 듯했다. 열병식에 대해 한국노총 유재섭 금속노조 위원장은 “군인들만이 할 수 있는 예술”이라고 했다.
“자율이 있어야 규율이 있다”
9시 35분경 주석단 맞은편 대동강 유보도(강변공원)에서 김일성 광장쪽으로 분홍꽃술 대열이 해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광장을 가득 채운 꽃술 대열들이 ‘경축 조선로동당 55돌’ 등의 글자를 만들어내는 가운데 군중시위 대열이 주석단 앞을 행진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당’ ‘불패의 당’ ‘세련된 당’이라 쓰인 당깃발을 메고 행진하는 대학생들의 대열 뒤로 시민들이 주석단을 향해 꽃술을 열광적으로 흔들면서 함성을 지르며 행진했다. ‘경제 건설에서 일대 앙양을!’ 이라는 구호 아래 유전자, 컴퓨터 프로그램, 집적회로 등의 그림판이 설치된 무대 위에서 감자 가면을 쓴 사람들이 춤을 추는 대열도 있었다. 고등중학생들은 ‘사회주의는 우리거야’라는 신세대적 구호판 아래 ‘당은 영원한 길동무’라는 구호를 들고 행진했다. ‘조국통일’ ‘북남공동선언’과 한반도 단일기의 모습도 보였다. 대열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평양 시민이 모두 나온 것 같았다. 텔레비전으로 보던 것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참가자들의 표정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모두들 열정적으로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군중시위가 끝난 10시 36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주석단 노대를 한 바퀴 돌며 활짝 웃는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아 높이 드는 인사를 보냈다. 이는 ‘친선’을 의미한다고 했다. 초대석에서 주석단 노대까지는 20m 정도. 건강하고 활력 있는 모습이었다.
연출가인 박인배 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기획실장에게 감상을 묻자 “한 수 배웠다”고 했다. 홍번 전농 조국통일위원장은 특유의 투박한 말투로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한다냐?”했다. 옆에 있던 김령성 민화협 부회장이 말했다.
“훈련만 많이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자율이 없으면 규율이 없다고 사상이 없으면 못합니다.”
김영남 상임위원장, 남측 방문단 접견
저녁 6시 인민문화궁전에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주최로 내외 인사 5백여 명이 참가한 노동당 55돌 경축연회가 있었다. 연회 시작 전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김용순 비서 등 당, 사회단체 간부들과 함께 별실에서 남측 방문단을 접견했다. 김 위원장은 남측 방문단을 환영하면서 “여러분의 평양방문은 북남공동선언이 발표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두 수뇌부의 뜻에 따라 북남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굳게 손잡고 노력하자”고 제안했다. 연회에서 남측 대표단은 각기 북측의 상대 단체 대표자들과 같은 식탁에 앉아 대화와 친교를 나누었다. 한완상 단장과 민주노동당, 전국연합은 민족화해협의회와, 민주노총, 한국노총은 직업총동맹, 전농은 농근맹, 민예총은 문예총,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은 여성동맹,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이하 평불협)는 조선불교도연맹과 합석했다.
11일, 주체탑과 개선문, 단군릉을 방문했다. 오후 7시 김일성광장에서 청년동맹 주최의 ‘로동당 55돌 경축 횃불행진’이 있었다. 어둠이 깔리는 광장에 정장과 조선옷 차림의 청춘남녀들이 수없는 작은 원을 그리며 둘러서 있었다. 맞은편의 주체탑 앞에서 축포를 쏘기 시작하자 창공에서 불꽃들이 비오듯 꽃무늬를 그리며 대동강으로 떨어져내렸다. 광장의 남녀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옹헤야에서 왈츠까지 다양했다.
왈츠곡이 나오자 김령성 부회장이 설명했다.
“이 노래는 1960년 8월 옥류교가 개건됐을 때 나온 ‘옥류교 원무곡’으로 작곡가가 왈츠 선율과 장단을 도입해 원무를 할 수 있도록 작곡했습니다. 1960년대 공장노동자들이 일과를 끝낸 후에 이 곡에 맞춰 춤을 많이 추었습니다.” 한 안내원은 “부회장 선생은 예술에 조예가 깊고 춤실력도 대단하다”고 귀띔했다.
춤이 끝나자 횃불을 든 대열이 김일성광장을 가득 메웠다. 고등중학생들이라 했다. 횃불들은 ‘강성대국’ ‘결사옹위’ 등 수십 가지 형상과 글씨들을 계속 만들어냈다. 주석단 앞을 또 다른 횃불 대오들이 행진했다. 평양 시내 모든 대학이 다 나왔다고 했다. 거대한 횃불의 강물이 김일성 광장 앞을 지나 끝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식사 때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이다.”
“몇만 명이 한 사람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경탄스러우면서도 섬뜩하다.”
“진심으로 하는 것일까?”
“진심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는가? 자발성이 없이 어떻게 그런 작품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10월 12일 방문단은 아침 8시 묘향산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조성우 민화협 집행위원장이 행방불명이었는데 결국 숙소에 가서 데려왔다. 안내원은 “조성우 선생에게 오늘 일정이 잘 침투가 안 됐구만” 했다. ‘침투’라는 말 때문에 폭소가 터졌다.
국제친선전람관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전세계 정부와 사회단체 개인들로부터 받은 선물을 전시한 곳이다. 특히 최근 신설된 ‘남조선관’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현대, 삼성, 대우, LG, 민주노총, 전교조 등 각계 인사들이 보낸 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해설 강사는 “북과 남이 서로 선물도 주고받는 관계라는 것을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 너무나 기쁘다”고 했다.
묘향산 보현사의 박종철 열사 아버지
향산호텔에서 점심을 든 후 고려시대의 사찰 보현사를 방문했다. 보현사에 들어서자 평불협 법타 스님의 움직임이 갑자기 활발해졌다. 보현사 대웅전에서 남북의 스님 네 사람이 함께 독경하는 시간을 가졌다.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유가협 회장이 함께 했다. 눈을 감은 채 합장하고 반야심경을 외우는 박 회장의 얼굴이 처연했다. 비명에 간 아들의 천도를 빌었을까. 박 회장은 평양 체류기간 내내 출발 때 한총련 학생들이 준 단일기를 어깨에 메고 다녔다. 그날 밤 그에게 무엇을 빌었는가고 살짝 물었는데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꿈처럼 보현사에 와서 오랜만에 깨끗한 마음으로 빌었어…. 부처님의 법어대로 실천하며 살게 해달라고…. 하노라고 하지만 아직도 멀었어.”
박 회장은 이미 열사의 아버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운동가였다.
오후 5시 평양으로 돌아와 대동강 쑥섬에 위치한 통일전선탑을 참관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를 기념하는 사적비다. 방문단은 통일전선탑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김구 선생의 북행이 있은 지 52년. 김구 선생은 그 북행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건만 이제야 비로소 남녘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단이 그 자리에 와서 선 것이다. 너무 늦었지만 중요한 출발이기도 했다.
6시 30분 ‘로동당 창건 경축 10만명 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5·1경기장으로 갔다. 15만 명 규모의 경기장은 관중들로 꽉 차 있었다. 정각 7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정·군 간부들을 이끌고 주석단에 입장했다. 공연은 거대했다. 5·1경기장의 연꽃 모양 지붕 사이 하늘에는 거미줄같이 매달린 오색전구들이 명멸했다. 주석단 정면의 배경대에서는 2만 명의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로동당 55년사를 글씨와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카드섹션을 펼쳤다. 운동장에는 10만 명의 학생들이 교대로 등장해 배경대와 연결되는 집단체조를 보여주었다.
연신 터지는 축포는 연꽃 모양 하늘을 불꽃으로 물들였고, 경기장을 가로지른 줄을 타고 교예배우들이 날아다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의자를 바짝 당겨앉은 채 두 손을 모아 탁자 위에 놓고 공연을 시종 관심깊게 주시했다. 가끔 사람을 불러 무엇인가 지시하는 모습도 보였다. 안내원들은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 이후 최대규모”라고 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개인이 전체에 변증법적으로 녹아들어 연출해내는 집체예술의 총화’였다.
저녁 식사시간 김용태 민예총 사무총장은 “공연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2002년 월드컵 개·폐막식 안무 때 북의 연출가 선생을 초대해서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만방에 떨쳤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백기완 선생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어떤 지도자보다 예술적 식견이 있는 지도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 밤 북측은 조미정상회담을 합의한 ‘조미공동선언’ 전문을 방문단에게 나누어주었다. 북측 관계자들은 “미국이 드디어 전쟁을 포기했다. 로동당 창당을 축하하는 최대 선물”이라며 무척 고무된 모습이었다.
10월 13일 방문단은 단체별로 북측 상대 기관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민주노동당은 사회민주당을 방문했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전교조는 직업총동맹 회관을 방문했다. 노총 방문단은 리진수 직총 부위원장 이하 3백여 명의 노동자들의 뜨거운 환영 속에 무등을 타고 회관으로 입장해 축하공연을 관람했다. 민주노총, 한국노총과 직총은 연내에 ‘노동자통일토론회’를 개최한다는 데 합의했다. 전농은 농근맹 김명철 부위원장과 회담을 갖고 비료지원, 종자교류 등의 사업추진에 합의했다.
여연은 홍선옥 조선여성협회 회장과 만나 2001년 3·8 세계 여성의날 행사를 공동개최하기로 합의했고, 민예총은 김정호 문예총 부위원장과 만났다. 홍근수 목사(향린교회, 자통협 상임대표)와 박순경 이화여대 은퇴 교수(신학)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방문했고, 김종수 천주교 주교회의 사무총장은 장충성당을 방문해 미사를 집전했으며, 평불협 법타 스님 일행은 조선불교도연맹 심상진 서기장과 환담했다. 또 민가협 대표단은 고려호텔에서 비전향장기수 선생들과 만났다.
백인숙 할머니, “기완이는 어딜 가나 대장을 했다”
특히 이날 오전 11시 30분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통일거리 단고기집 별실에서 55년 만에 해주에 사는 누나 백인숙씨(72)와 상봉했다. 늙은 오누이는 처음 마주친 순간 바로 부둥켜안은 채 10여 분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유일하게 배석해 사진을 찍었던 기자도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백 할머니는 연신 “기완아 네 얼굴이 왜 이래” 하면서 몸부림쳤고 백 선생은 “누이 왜 이렇게 늙었어” 하며 통곡했다. 열세 살, 열일곱 살에 헤어진 남매에게 서로는 영원히 소년, 소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12시 통일거리 단고기집 특실에 방문단 전체가 함께 모여 백기완 선생 오누이의 상봉을 축하했다. 장소가 단고기집이었던 것은 백 선생이 워낙 개고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안 북측이 누이와 상봉해서 좋아하는 단고기를 들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해주시 우파동에 살고 있다는 백 할머니는 “우리 기완이는 어려서부터 또리또리하고 어딜 가나 대장을 했다”고 자랑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남에서 통일운동하는 백기완이 누나라고 특별 배려를 받아 왔어요. 25년 전에 갑자기 다리에 마비가 와서 앉은뱅이가 됐는데 수령님 지시로 평양에서 의사들이 와서 치료해주어 20일 만에 다시 걷게 됐어요. 작년 재작년에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됐는데 장군님께서 백기완 선생의 하나 있는 누이 꼭 살리라고 평양에서 의사들을 보내 고쳐주셨어. 나는 아무런 공로도 없는데 다 기완이가 남에서 통일운동하느라 수고한다고 나를 배려해주신 거야.”
백 할머니 옆에는 박용길 장로가 앉아 있었다. 백 할머니는 지난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때 그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형님 동생하며 금방 친해졌다. 백 할머니는 박 장로에게 “우리 기완이 외롭잖아요. 끝까지 친척처럼 오가면서 지내주시라요. 그게 제 마지막 소원이예요” 하고 신신당부했다.
그날 저녁 백 선생은 누이와 함께 지냈다. 마침 아버지의 기일이었기에 더욱 뜻깊은 만남이었다. 뒤에 백 선생은 누님의 첫인상을 “밟혀도 밟혀도 다시 일어나 기어이 꽃을 피우는 질경이 같았다”고 했다.
오후에는 애국열사릉을 방문했다. 방문단들은 제각기 김규식, 허 헌, 홍명희, 최동오, 엄항섭 등 낯익은 남쪽 출신 인사들의 묘비 앞에서 경건하게 머리를 숙였다.
다음 참관지는 만경대소년학생궁전이었다. 가야금, 아코디언, 서예, 수예 소조실 등을 돌아보았다. 박인배 민예총 기획실장은 “아코디언을 가르칠 때도 민족 장단을 함께 가르친다. 그것이 저력이다”라고 지적했다.
이후 소년학생궁전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소년예술단 공연 때 서울에 와서 청중들을 매료시켰던 타악기의 리진혁, 장구재주의 김철도 나왔다. 일곱 살 소녀이면서 어른 같은 굵은 목소리로 웃음을 자아냈던 리주향은 이번에는 ‘대홍단 감자’를 불렀다. 일곱 살 소녀가 공연한 ‘패랭이춤’과 창작무용 ‘씨름놀이’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저녁 7시 옥류관에서 민족화해협의회 주최의 환송연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김영대 민족화해협의회 회장을 비롯해 안경호 조국통일평화위원회 서기국장, 려원구 조국전선 의장 및 각 사회단체 간부들이 참석했다. 김영대 회장은 “통일만이 살 길”이라면서 “이를 위해 정당·사회단체 각계인사들의 내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완상 단장은 답사에서 그동안의 환대에 감사를 표하면서 “어떤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는 자신의 지론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한 부총리의 주도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취임사를 통해 선언되었던 이 명제가 7년 동안의 우여곡절을 거쳐 현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날 밤 방문단은 봉화초대소에서 김령성 민화협 부회장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내온 선물을 전달받았다. 특히 폐암 말기의 몸으로 방북한 이옥순 전국연합 대외협력위원장(비전향장기수 권낙기 선생 부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별지시에 따라 방북기간중 북측 의료기관에서 제반 검사를 받았고 이날 밤 장명 등 북의 암 특효약과 한약재들을 전달받았다. 박정기 유가협 회장에게는 박종철 열사의 김일성종합대학 명예졸업장이 전달되었다.
조미공동선언,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등을 함께 축하하며 5박6일간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단의 평양방문 일정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번 방북에서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북의 사진화보잡지 『등대』지와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 평양지사의 협조였다. 이번 방북에 사진기자가 동행하지 못함에 따라 기자는 방북 첫날 『등대』지와 『조선신보』 평양특파원에게 사진제공을 부탁했는데, 이들의 협조로 노동당 55돌 행사의 생생한 장면들을 『말』 지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지평선으로 내려온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사실 이번 정당·사회단체들의 방북을 허가하면서 우리 정부 내에서는 상당한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 방북이 진행된 결과 모든 우려들은 불식되었다. 방문단 중 일부에서는 “북에 온 이상 금수산기념궁전을 방문해야 예의가 아닌가”하는 의견도 나왔지만 북측은 “말씀은 고마우나 이번 방북으로 여러분이 어떤 피해를 입는 것도 원치 않는다”면서 완곡하게 사양했다. 이번 초청이 통일전선 전술의 일환이라는 남측 일각의 비판에 대해 북측의 한 관계자는 “통일전선 전술이라면 우리가 한나라당까지 초청했겠는가”라며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번 정당·사회단체들의 방북은 통일로 가는 길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도진순 교수(창원대, 현대사)는 “이번 방북을 통해 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지평선으로 내려왔다”고 평가했다. 통일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양 정부간의 협력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기복이 없을 수 없으며 이를 안정화시키는 가장 혁신적인 대안은 민간 라인, 즉 정당·사회단체들간의 지속적인 교류와 협력이다. 이번 방북으로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로 가는 이정표가 세워졌다고 할 것이다. 이제 그 길을 걷는 일이 남아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