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의 전후 배경 **
앙리 2세가 죽은 1559년은 프랑스사(史)에 한 획을 그었다.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둘러싼 합스부르크 가(家)와의 왕조전쟁은 끝나고 새로이 종교적인 내란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내의 프로테스탄티즘 운동은 독일이나 스위스에서 들어 온 것으로서 여기에 대해 역대 왕들은 대체로 박해와 탄압을 펼쳤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특히 칼뱅파는 프랑스 내의 도시민 부농 및 귀족층에 전파되어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하여 앙리 2세가 죽은 직후 파리에서 칼뱅파의 전국조직이 결성되고 곧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6세기 프랑스는 카톨릭을 믿는 프랑스와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를 국교로 하는 나바르로 양분되어 있었다. 카톨릭군은 기즈남작이 이끌고 개신군은 꼴리니 제독이 이끌어 왔다. 즉 앙리 2세의 사후 궁정세력은 두 가문에 의해 차지되었던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개신교이며 다른 하나는 카톨릭이었으므로, 정치적 경합은 곧 종교적 결합으로 될 소지가 있었다. 앙리 2세의 뒤를 이은 프랑소아 2세(1559 1560)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정권은 왕비의 가문인 기즈(Guise) 家에 의해 좌우되었다. 프랑소아 2세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 샤를르 9세(Charles Ⅸ : 1560 1574)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왕의 모후인 카트린느(Catherine de' Medici)는 섭정으로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카트린느는 편애하던 둘째아들 앙주에게 평화로운 프랑스의 국왕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했지만, 프랑스는 이 두 종교의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그래서 카트린느는 극단적으로 대립한 카톨릭과 개신교간의 싸움을 이용하여 자기 아들로 하여금 차례로 왕위를 차지하게 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카트린느의 첫 조치는 당시 위그노(Huguenots)라고 알려진 프랑스 내의 프로테스탄트에게 비록 제한된 범위 안에서였으나, 종교적 자유를 부여하는 칙령을 공포한 것이었다. 이러한 중도적(中道的) 정책은 좀 더 완전한 자유를 원하는 위그노에게나 프로테스탄트의 탄압을 바라는 카톨릭에게 다 같이 불만을 안겨 주었다. 기즈 公은 1562년 정권을 잡고 카트린느에게 칙령을 철회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도 무력에 의해 신앙을 수호하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양파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위그노 전쟁은 프랑스의 칼뱅파 교도인 위그노와 카톨릭교도 사이의 투쟁에 귀족간의 대립, 귀족과 왕실 사이의 대립, 왕위계승 문제 등이 얽혀 장기간의 복잡한 투쟁으로 발전하면서 프랑스를 거의 무정부 상태에 빠뜨렸다. 위그노 전쟁 이후 위그노와 카톨릭은 각각 영국과 스페인이라는 외국세력까지 끌어들여 격렬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1570년에는 휴전조약을 체결하여 한때 양파는 타협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조약을 굳게 하기 위해 그들은 양파 간의 혼인을 성립하게 되었다. 카트린느는 그녀의 딸인 구교도 마고(Margot, Margaret)와 나바르의 새로운 왕인 신교도 앙리(Henry)를 결혼시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카트린느의 엄청나고도 무서운 음모가 숨어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위그노 지도자들을 없앰으로써 프랑스 왕권을 안전하게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8.24)에 새벽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프로테스탄트들을 학살하게 되었다. 그 결과 비록 프로테스탄트들이 굴하지 않는 항쟁이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는 하나, 위그노의 세력은 대체로 프랑스의 일부지방에 국한된 미약한 세력이 되고 말았다. 학살 이후 앙리 3세가 즉위하였고, 기즈 公의 지시가 받기 싫증이 나서 그를 죽인 앙리 3세는 결국 기즈 公 일파의 자객 도미니꼬派 수도성직자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앙리 3세가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교도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동란 와중에 살해된 후, 앙리 4세(Henry Ⅳ : 1589 1610)가 프랑스의 왕위를 차지하면서 부르봉家 시대가 열렸다. 앙리 4세는 즉위 후 반대세력을 융화하기 위하여 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끝낸 1598년 낭트칙령(the Edict of Nantes)을 공포하여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에게도 종교적 신앙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였다. 즉 낭트칙령으로 인해 위그노들은 카톨릭교도와 같이 공직에 취임할 수 있고 대학에도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법의 보호를 받는 요새지역에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분쟁이 발발한 지 거의 4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프랑스는 종교적 관용을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위그노 전쟁은 끝나고 프랑스에 새로운 왕조가 성립하였지만, 프랑스 내의 프로테스탄트의 저항은 17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앙리 4세는 그 밖에도 독일의 신교세력과 제휴하여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에 대항하고 교황청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자료출처 : 네이버
*종교적 불관용으로, 무자비한 폭력으로, 무참한 대량학살로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앙리 4세처럼 진정으로 평화로운 방법으로 신교를 인정하고 서로 공존하는 체제 내에서 서로의 갈등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