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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지크프리트 폰 로엔그람, 통칭 알렉산더 1세라고도 불리는 은하제국의 제 40대 황제이자 로엔그람 왕조의 제2대 황제는 81년간 재위하여 은하제국 역사상 최장기 재위기간을 자랑하며 그의 시대는 은하제국 역사상 가장 평화로웠으며 번영한 시대로 평가된다. 그에 대해서 후세에는 골덴바움 왕조의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와 함께 이견의 여지가 없는 성군으로 평가받으며 루돌프 이래로 은하연방의 영광을 되찾지 못한 인류사회가 은하연방의 황금기를 뛰어넘는 황금기를 구가하게 만들었다고도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로엔그람 왕조의 멸망에 일조했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인류의 통치자로서는 적합했지만 왕조의 수호자로서는 실패했다는 평가로 라인하르트-힐데가르트의 통치와 본인의 통치로 인해 로엔그람 왕조를 반석위에 다질법 했지만 그의 재위 말기로 갈수록 확대된 민주공화주의 사상과 더 많은 자유에 대한 요구, 그에 비해 배출된 잘못된 후계자는 그의 사후 로엔그람 왕조를 멸망의 길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여튼 그가 왕조의 수호자로서는 뜻밖에도 실패했지만 통치자로서는 충분히 합격점이었으나 그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타고난 천재였지만 본인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알렉산더 1세는 그 간극을 엄청난 공부로 학식을 쌓고 실전경험을 통해서 실제로 써먹을 수 있게 만듦으로서 메꿔야 했고 그랬는데도 아버지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가 그렇게라도 노력했기에 그의 재위기의 로엔그람 왕조가 순탄하게 번영한 것이다.
알렉산더 1세가 즉위했을 때 그는 겨우 생후 2개월에 불과했으며 로엔그람 왕조가 건국된지는 이제 겨우 25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경우 왕조의 운명은 불보듯 뻔했고 알렉산더 1세 또한 그 운명이 에르빈 요제프 2세나 카타린 케트헨 1세와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제국의 수뇌부는 그의 어머니인 힐데가르트 섭정황태후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으며 제국의 신민들의 제국에 대한 지지는 굳건했고 페잔이나 옛 동맹의 시민들도 제국에 대한 지지가 높지는 않더라도 반제국 세력이 제국의 대안이 되기에는 모자랐으며 제국 또한 이들에게 당근을 주며 유화적으로 나왔기에 알렉산더 1세 재위 초창기는 우려와는 달리 예상보다 순탄하게 지나갔고 이로서 로엔그람 왕조는 순탄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
한편 황제의 나이가 어린고로 황제의 미래는 그 주변인물들에 따라 갈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주변인물들은 전대인 골덴바움 왕조 시기를 경험한 이들로 이들은 그 시절을 나쁜 의미로 생생하게 겪었고 다시는 그 시절이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그리고 알렉산더 1세가 즉위하자 이들은 새 황제가 골덴바움 왕조의 황제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여 황제가 성군이 되도록 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그들이 굉장히 민감하게 신경을 썼기에 황제는 어릴때부터 굉장히 빡빡하고 통제된 일정속에서 살아야 했고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너무 빡빡해서 황제가 비뚤어지지 않을까 우려하여 세부적인 부분에서 일부 수정이 있긴 했지만 큰 틀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이루어졌다.
다행히 알렉산더 1세는 이들을 만족시킬만한 자질이 있는 인물이었고 때문에 그들의 기대에 부응한 채 성장했다. 대학을 졸업할 당시 황제는 이미 학자 수준의 깊은 학문적 소양을 갖췄으며 실무에 손을 댄지 얼마 안가서 바로 친정을 시작해도 충분할 정도의 실적을 쌓았으며 여기다가 군주로서의 책임감과 자의식도 강해 그들의 노력이 헛되이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결국 우주력 828년에 드디어 힐데가르트가 완전히 정치에서 물러나고 그의 친정이 시작됨으로서 알렉산더 1세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이 올랐다. 이는 향후 40년 넘게 이어지는 그의 단독통치의 서막을 알리는 것으로 제2의 인류의 황금기의 시작이자 로엔그람 왕조의 전성기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알렉산더 1세가 친정을 시작할 무렵, 시대는 또 한번 바뀌고 있었다. 힐데가르트 섭정기 당시의 제국은 라인하르트 시절을 함께한 개국공신 세대가 정권을 주도하고 있었으며 제국의 방침은 정권의 안정화와 인류사회의 회복이었다. 쉽게 말해 1세대 인사들이 주도하였으며 제국은 제국 체제를 굳히고 또한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회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힐데가르트 시대에는 '성장'이 아닌 '안정과 회복'에 정책이 집중되어 주로 제국인, 페잔인, 동맹인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힘쓰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인문학계, 사회 시스템 등에 활력을 불어넣는데 집중하였고 민간 경제에 대한 지원은 성장이 아닌 회복이므로 대대적이지는 않았다.
이러한 결과는 민간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전란의 시대에는 국가의 모든 투자방향의 1순위가 전쟁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인문학계나 사회에 대한 투자가 미진해져 학문, 사회, 경제 등의 발전이 더뎌졌고 끝내는 민간에서도 돈줄이 말라버리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전쟁이 끝나고 국가에서 전쟁의 상흔을 치료하기 위한 노력을 하자 민간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노력한 것이었다.
이 때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다곤 성역 회전 직전까지 활발했던 우주개척사업으로 그간 제국과 동맹의 영역에는 명목상 자국령이라고 해놓았지만 실상은 미개척지나 다름없던, 예를 들어 동맹의 에코니아 같은 곳들이 많았는데 그간 양국은 모두 이 영역들을 완전 개척해야 한다는 것에는 생각이 같았으나 서로에 대한 타도가 우선이었으므로 뒤로 미뤄두고 있었는데 이 시대가 열리자 드디어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힐데가르트 시대에는 제국 내의 미개척지들에 대한 개발이 활발했으며 특히 상대적으로 미개척지가 더 많았던 동맹에서 두드러졌다. 이에 따라 경제가 활성화되어 잠깐이지만 4~5% 고성장을 이룬적도 있었고 민간 경제에서의 활력은 곧 제국의 재정창고로 돌아왔다. 그리고 동시에 전쟁이 끝나니 죽는 사람도 줄어들고 경제가 활성화되니 애 가지는데도 부담이 덜해져서 라인하르트 사망 당시 400억이었던 제국의 인구가 힐데가르트의 섭정이 끝나갈 무렵에는 512억까지 불어났다.
그리고 알렉산더 1세의 친정이 시작될 무렵에는 제국의 방침과 제국의 세대가 바뀌고 있었다. 이즈음 들어 제국의 개국공신 세대는 최소 60대에 접어들어 슬슬 일선에서 물러나야 할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이를 대신할 신 세대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 시기에 들어 30년 가까이 국무상서로서 소임을 다해온 볼프강 미터마이어는 60세를 찍었고 초대 황제의 장인이자 현 황제의 외조부인 프란츠 폰 마린도르프 백작은 몇년 전 노환으로 사망했다.
이렇게 구세대 인사들은 사망하거나 늙어간 반면 새로이 떠오르는 세대이자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알렉산더 1세와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로 제국 전역에서 아무것도 따지지 않은 채 오직 능력과 인성만 보고 선택되어 차세대를 이끌어갈 인재로 양성하기 위해 육성한 이들로 제국 내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이들 중에서는 개국공신 집단이나 문벌귀족 출신 등 이전 시대에서 한 자리 차지한 이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소수였고 대부분은 그들과 관련이 없었으며 어디 출신이든 서로 완전히 파편화된 개인들로서 서로에 대한 애착이라면 모를까 기존 집단과의 애착이든 출신별 대립은 미약했다.
이들은 알렉산더 1세와 함께 성장하였고 그가 대학을 졸업한 후 이들도 제국의 정계, 군부, 재계, 학계 등의 각계각층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는 고속승진을 하였는데 이는 특혜라고도 할 수 있었고 일부는 특혜를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자기능력에다가 현 세대를 대체할 목적으로 양성된 이들인 만큼 그들이 은퇴를 앞둔 시점에서 속성으로 키워져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그랬을 뿐 이들은 문벌귀족 같은 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집단이었다.
그리고 30여년에 걸친 휴식기를 거치며 인류사회는 오랜 정체에서 완전히 벗어나 점진적인 성장을 거듭해 마침내 새로운 도약을 앞두게 되었고 때문에 제국에서는 서서히 기존의 회복이 아닌 성장에 초점에 맞추게 되었고 이 임무는 자연스레 새로이 친정하게 될 황제 알렉산더 1세의 몫이었다.
이는 황제가 친정을 선포한 우주력 828년부터 우주력 830년대 전기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이 시기에 신세대들은 마침내 각 분야의 상서/차관, 상급대장 이상 직위, 임원, 유명 학자 등 각 분야에서의 최고의 지위에 다다르며 구세대를 거의 완벽히 대체하는데 성공했고 제국 또한 성장을 위한 새로운 정책들을 시도하여 우주력 830년대가 끝나갈 무렵에 이르면 제국의 인구는 635억까지 불어난다.
그리고 우주력 84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제국의 황금기가 시작된다. 경험을 잔뜩 쌓은 황제와 제국의 인재들은 제국을 발전시키고 민생을 위한 온갖 정책들을 내놓았고 내놓는 정책마다 성공을 거둠으로서 제국의 성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더욱이 이 때쯤에 이르러선 기존의 제국령만으로는 개척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어지자 이제 개척의 방향은 제국령 외부로 향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국령 외부를 개척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기존까지 잘 알려진 제국령 내부에서의 개척에 비해 위험이 많이 뒤따르는 일이며 시간, 재원, 기술이 더 많이 요구되어 지원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국이 직접 지원에 나선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이미 제국의 재정은 충분하다 못해 넘쳐흐를 정도였고 이 재정을 횡령하거나 마음대로 유용한 이는 없었으므로 이런 거대한 산업에 투자할만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제국은 우주개척사업에 엄청난 재정을 쏟아부어 지원하였다. 그 결과 인류의 생활권은 다시금 넓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제국의 목표는 구 동맹령 지역의 은하계 팔(궁수자리 팔) 일대의 완전 개척을 목표로 하였다. 그런데 개척속도는 제국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였고 이 때문에 30여년 뒤인 우주력 870년대에 이르면 아얘 자유행성동맹 건국의 아버지들이 그랬듯 은하계의 또다른 팔을 향해 진출을 시도하게 된다. 이미 이 시기에 제국의 인구도 1473억에 도달했다.
물론 알렉산더 1세의 업적은 이러한 고도성장에만 있지 않았다. 고도성장에만 신경쓰고 분배에는 무관심할 경우 고도성장의 혜택은 일부 소수의 사람에게 몰리기 마련이고 이는 빈부격차를 유발하기 마련이며 고도성장을 미끼로 독재체제를 정당화한다면 고도성장은 정치화되어 시간이 갈수록 폐해를 낳기 마련이다. 특히나 제국은 라인하르트 체제 하에서 빈부격차가 놀라울 정도로 감소한 것을 겪은만큼 더욱 그랬다.
만일 알렉산더 1세의 수준이 평범한 수준에 그쳤다면 이를 짚어내지 못하거나 짚어내더라도 막지 못했겠지만 알렉산더 1세는 이를 짚어내고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물론 급속한 경제성장 속 빈부격차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황제와 제국의 수뇌부는 이를 어떻게든 완화하고 부의 분배가 최대한 고르게 돌아가도록 애를 썼기에 적어도 부가 극소수 사람들에게 쏠리는 현상이든 수많은 이들이 거리에 나앉아 빈민들이 발생하는 현상이든 어느쪽이든 벌어지지 않았다.
또한 전제군주제 황제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 1세는 어머니 못지않게 민주공화주의에 온건한 편이었다. 어머니가 구 동맹령 지역에 취한 조치들을 모두 이어갔고 민주공화주의 성향의 출판물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검열만을 행했고 때문에 이 시기의 공화주의자들의 검열을 회피하는 수법은 민주공화주의를 역설하면서 말미에 '언젠가는 실현되어야 한다' 라는 말미로 끝내는 것으로 말장난이지만 그래도 '언젠가' 라는 애매한 문구를 썼지 '지금 당장' 이라고 하지 않았으므로 검열에서 통과되었다.
이는 알렉산더 1세가 은하제국의 지존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영원불멸함을 믿지 않았고 골덴바움 왕조가 그랬듯 로엔그람 왕조 또한 언젠가 사라질 것이고 그 때의 대안으로서 생각한 것 중 하나가 민주공화주의였기에 민주공화주의의 확산을 사실상 묵인한 것이었다. 물론 그 자신은 민주공화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아직은 민주공화주의는 시기상조라고 여겼기에 민주공화주의 성향의 시위나 폭동은 가차없이 진압하였다.(온건하게 처리하긴 했지만) 하지만 결국 민주공화주의에 대한 온건한 대처는 그의 사후 무능한 후계자가 나온 것과 맞물려 제국을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는 평가를 받게 한다.
물론 통치에 있어서 민주공화주의의 방식을 조금 도입하기는 했다. 예를 들어 황제를 대신해 각 행성들을 직접 통치할 인물들은 자신이 임명했지만 그 행성들의 대표들은 현지 주민들이 직접 뽑도록 하여 사실상의 지역 의회의 설립이 이뤄진 것이나 당시까지만 해도 실권은 약해서 독자적인 권한이 있는게 아닌 보조하는 역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큰 성과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전체적인 통치방식도 유연하고 너그러운 편이라서 전대 왕조인 골덴바움 왕조때만 해도 황제는 마치 신과 같은 존재이며 적어도 대놓고 정면에서 조금이라도 불경의 요소로 해석될 수 있는 행위를 한다면 설령 대귀족이라도 예외없이 불경죄가 적용되었지만 이 시대에는 조금이라도 불경의 요소로 해석될 수 없는 요소가 있다면 불경죄가 적용되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골덴바움 왕조나 라인하르트 치세가 비교적 혼란기였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의 치세에는 정치범의 숫자가 급감하였고 급진적 공화주의자 아닌 이상 대부분의 정치범은 소멸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꽤나 자유로운 그의 통치방식은 지역을 가리지 않아 황제와 제국에 대한 지지도를 조사하면 항상 90% 넘게 나왔다. 후세에 이는 과장된 것으로 평가받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허구는 아니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알렉산더 1세를 후세에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비단 그의 성공적인 통치만이 아니었다. 그의 사생활과 특히 펠릭스와의 기이한 우정 또한 그를 유명하게 만들고 단순히 나라를 발전시킨 일반인으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성인이자 성군이 아닌 인간적인 면 또한 매우 많고 성군의 이면에는 고된 면 또한 있었음을 상기하게 만들어주는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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