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사랑방이라는 문학 공부 모임에서 공부한 내용중의 일부를 옮긴 것입니다.
<베르그송은 시간을 도입한 철학가입니다. 시간 속에서 변화를 하는 인간, 즉 인간의 자아가 형성되고, 정체성을 가지는 것을 철학적으로 조명하였습니다. 인간 개인을 조명한다는 것은 크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1907년에 '물질과 기억'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합니다.
베르그송
앙리-루이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1859년 10월 18일 ~ 1941년 1월 4일)은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한국에는 흔히 베르그송이라는 프랑스식 발음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그가 폴란드계 사람임을 모르고 전해진 표기이다. 실제 프랑스에서는 폴란드계임을 감안하여 '베르크손'(프랑스어: [bɛʁksɔn])이라고 부른다.
(생애)
그는 1859년 10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폴란드계 유태인인 아버지와 영국계 유태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7남매 중 둘째,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젊어서 프랑스로 이민을 온 폴란드계 유태인으로 음악가였으며 모친은 영국인이었다. 베르그송은 모친을 통해 일찍부터 영어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작곡가였으나 그렇게 신통하지는 않아서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68년, 아홉 살이 되던 해 베르그송은 프랑스에서 교육 환경이 좋기로 유명한 고등학교, 리세 보나빠르트(Lycee Bonaparte)에 입학한다. 1869년 그가 10살이 되던 해에 가족이 모두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였으며, 어린 베르그송은 혼자 파리에 남아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학생이었고 고등학교 때는 국내외의 경시대회에서 고전에서 불문학, 수학에 이르기까지 각종 분야의 상을 독차지했다.
그는 한 마디로 말해 천재였다. 프랑스 전국 학력경시대회에서 라틴어 작문, 영어, 기하학, 불작문, 수학에서 1등을 차지하였으며, 그 외 과목도 3등, 4등을 차지하는 등 전과목에서 뛰어났다. 1877년 수학 경시대회에서 제시된 그의 <파스칼의 '세 개의 원'에 대한 해법>은 다음 해 수학 연감(Nouvelles annales de mathématiques)에 실렸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집에서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고 칠판 앞에서 풀기만 하면 되는" 정도로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라슐리에의 ≪귀납의 기초에 관하여≫를 읽고 "철학에도 뭔가 '심각한sérieux' 것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고" 철학으로 진로를 선회한다.
베르그손은 19세 때 파리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에 입학한다. 고등사범학교는 인문학 분야를 공부하고 싶은 프랑스의 영재들이 모이는 곳으로 샤르트르, 자크 데리다, 장 조레스 등 수많은 명사를 배출한 곳이다. 베르그손은 당시에 수석인 장 조레스에 이어 3등으로 학교에 입학했다. 22살에 철학 교수 자격시험(Agregation)에 2등으로 합격하여(3등은 장 조레스) 앙제 고등학교에 철학 교수로 발령된다. 후에 끌레르몽-페랑, 앙리4세 고등학교에서 철학 교수를 지냈다.
33살때인 1892년, 14세 연하인 루이즈 뇌뷔르제와 결혼한다. 이듬해에 외동딸인 쟌느가 출생한다. 그는 소르본느 대학 교수직에 2번 지원했으나 실패하고, 39살 때 고등사범학교 전임강사, 41살 때에 꼴레쥬 드 프랑스의 그리스-라틴 철학 담당 교수, 1904년에는 현대철학 교수가 된다. 이후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는 등 철학 교수로서 활발히 활동을 벌이게 된다. 1917년에는 미국의 1차대전 참전을 위해 윌슨 대통령을 설득하러 외교관으로 미국에 다녀오기도 한다.
그의 저서들은 매우 유려한 문체와 이해하기 쉬운 비유로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매우 높아, 주저중 하나인 창조적 진화등의 주저들이 수십 쇄를 찍는 등 높은 판매량을 보이기도 했다.
62살 때에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이듬해에는 현 UNESCO의 전신인 국제 지적 협력 국제위원회(CICI) 회원이 되었다. 8월에는 의장에 올랐다.
그가 63살 되던 해에 아인슈타인과 시간 개념에 대한 유명한 논쟁을 벌였다. 그의 철학을 돌이켜봤을 때 과학계와는 다툼이 불가피했으리라 여겨진다. <지속과 동시성>이 그 책이다.
이어 그가 68살 때인 1928년에는 그간의 공로와 꾸준히 찬사를 받아오던 문장력을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는 죽을 때까지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다가 1941년, 81살 때에 파리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사상)
(시간을 도입한 철학자라고 한다.)
서양 형이상학의 원조인 플라톤은 형이상학적 존재를 본질이라고 한다. 본질주의 입장에서 보면 흐르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세계는 불완전한 세계이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 현실에서 경험하는 사물들은 타자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으므로 본질의 순수성을 온전히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질이란 변화와 운동이 일어 나지 않으므로(불변이므로) 시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 아예 시간이란 없다. 본질은 자기 내부에서나 밖에서 그의 존재를 파괴할 아무런 요인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영원히 존재한다. 영원히 불변하는 본질이 이데아이다. ‘시간은 영원의 모상’이라는 플라톤의 존재론은 서양 철학사에 생성보다는 존재에, 시간보다는 영원에, 운동성보다는 부동성에 보다 높은 존재의 우위를 두는 정적 형이상학의 문을 열었다. 이것이 서구의 전통 철학이 되었다.
(앞에서 존재를 이야기하면서 대강 한 말이라서 이처럼 어려운 말로 설명하여도 이해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말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지적 훈련입니다.)
생명은 악동하며, 움직이며 진화함으로 자발성을 가지고 존재한다. 생명을 가진 인간은 가장 성공적으로 만들어진 형태이다. 베르그송은 기계론과 목적론을 배격한다. 자발성은 스스로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자발성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활동을 한다. 스스로의 활동성을 가진다. 진화의 원리에서 보면, 인간은 자발성을 가지므로 지구 위에 있는 전체적인 생명구조의 존재 근거’로 볼 수 있다. <창조적 진화>에서 우주를 ‘지속의 상태로 보았다. 베르그송은 인간과 우주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철학은 서양 철학사에 있어서 낙관론을 표방한다. 시간성의 철학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에서 오늘의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흐르면 만물은 소멸한다는 비관으로 보았다. 그러나 베르그송에 있어서 시간은 소멸과 부재의 차원이 아니라 생성과 충만, 그리고 창조의 차원이다. 이러한 그의 존재론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생명의 약동’이 ‘사랑의 약동’으로 발전함으로써 마지막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그는 인간의 생명을 가장 중시하며 '생의 철학' 을 주장하였다. (베르그송의 철학을 생(生,)철학 또는 삶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그의 철학을 창조적 진화의 철학이라고 부른다. 그는 '있다'는 것은 오직 우리들의 체험을 통한 경험이나 느낌으로만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또 현재라는 의식 속에는 과거나 미래도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변하는 현재의 시간이야말로 우주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이성보다 경험을 중시하였다.)
인간과 사회에 관한 그의 관점 또한 '시간', '변화', '운동' 에 중점을 두고 재해석한 것이다. 종교에는 고정적인 제도, 고로 폐쇄적이게 되는 종교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개방적 종교가 있다고 하여 후자가 필연적으로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도덕에 관한 관점 또한 기존의 고정되어 있는 전통적 도덕의 체계보다 시시각각 움직이고 계속 변화되어 가는 원칙을 가진 도덕이 우수하다고 옹호하였다. 사회에 대한 관점에서도 그는 고정되고 닫힌 폐쇄된 사회보다는 변화되고 움직이는 '열린사회'를 주장하였다.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열린사회'라는 용어가 그에게서 빌려온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 사회철학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이라는 그의 마지막 주저에 서술 되어 있는데, 베르그송은 이 마지막 저서를 1932년, 그의 나이 73세 때 출판 하였다. 이때는 이미 <창조적 진화>가 출판된 지 25년이나 지난 후였는데, 이 책이 출판된 후 사람들은 이미 70대인 이 노철학자의 사유의 유연함이 청년 같음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베르그송 철학에서 세계의 종심은 인간이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담론을 펼쳐왔다. 대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전제를 한다.
베르그송의 철학에서는 당연히 인간 본성을 다룬다. 베르그송은 인간 탐구에서 인격에 대한 탐구이다. 공동체 내에서 자유롭게 살면서 경험을 통하여 형성되는 인격을 탐구하였다.
첫째. 심리적 존재로서 인간 탐구
인간은 시간에 따라서 경험하고, 변화하고, 연속하면서 비가역적인 존재이다. 이 과정 을 통하여 의식이 형성된다. 이렇게 현성된 자아(인격)는 기억과 더불어 자신을 나타낸다.
(의식은 문화이므로 문화의 지배를 받는다.)
둘째, 발전 자아(발생적 자아)
인간의 자아는 시간의 지속에서 생성과 진화과정을 통하여 나타난다.
셋빼. 실천적 자아(금지, 신앙 등)
생명의 보존을 위하여 인간 세상에 여러 장치를 한다. ‘금지’가 제일 중요하다.
베르그송의 저서 중 『물질과 기억』은 특히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의 저자 한림대학교 인문한국학과 황수영 교수는 “『물질과 기억』은 『시론』에서 전개한 연속적 질적 변화인 ‘지속’의 개념을 ‘기억’ 이론 중심으로 발전시켰으며, 이어 『창조적 진화』에서는 지속, 기억에 바탕을 둔 ‘진화’의 개념이 새로 등장한다”며 “지속, 기억, 진화는 베르그송 철학의 세 가지 주요 주제들”이라고 설명했다.(* 지속, 기억, 진화)
* 지속 -- 현상의 실체는 어느 순간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고 긴 역정을 거쳐온 과정의 총 체이다. 이 지속이 기억에 저장된다.
베르그송은 연속적인 변화(『시론』에서의 ‘지속’)를 순간적으로 파악한 것을 ‘이미지’라고 불렀다. 또한 그 이미지들을 뇌라는 또 다른 이미지를 통해 포착해 형성한 것을 ‘지각’이라고 불렀다. 이런 지각에 의해 구성된 것이 바로 ‘기억’이다. 베르그송은 기억이 신체와 정신에 동시에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그 둘을 연결 짓는 매개가 된다고 생각했다. 베르그송은 이 기억을 운동능력이나 언어능력과 같이 반복된 신체 활동을 통해 습득된 습관기억과 어떠한 노력 없이 떠올려지는 이미지기억의 둘로 나눴다. 습관기억은 어떠한 삶의 유용성을 목표로 구성되는 데 반해 이미지기억은 유용성과는 관계없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는 차이가 있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널리 알려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바로 이런 이미지기억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데자뷰 현상 또한 이런 이미지기억이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상태인 순수기억의 작용인 것이다.
『물질과 기억』은 그 연구 방법에 있어서도 가치를 인정받는다. 베르그송이 활동하던 19세기는 과학주의가 널리 퍼져 있어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무조건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실어증과 같은 여러 병리적 현상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연구를 함과 동시에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인간의 직관을 통한 전체적인 사고를 강조하는 형이상학적 태도를 보였다. 황 교수는 “과학주의자들은 이미지기억이 뇌에 보존된다고 주장하지만 베르그송 철학에서의 이미지기억은 뇌에 보존되지 않고 정신의 본성을 이룬다”며 “정신은 물질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베르그송은 일종의 유심론, 정신주의적 입장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충남대학교 철학과 송영진 교수는 그의 저서 『베르그송의 생명과 정신의 형이상학』에서 ‘인구폭발과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로 생태계와 환경이 파괴돼 인류의 생존이 위협을 받는 현대사회에서 생물계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와 서구 철학에서 기원하는 과학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는 베르그송의 철학은 인류의 생존 문제나 정신적·윤리적 문제에 좋은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베르그송의 학문적 진리 추구를 향한 열정과 그의 과학과 형이상학을 아우르는 연구 방법은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베르그송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며 그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를 마칠 때 항상 했던 한 마디로 글을 마쳐본다.
(영향)
플라톤 이후 2000년 넘게 이어져왔던 물질들의 "정지"를 전제로 한 존재론 위주의 철학적 담론을, 베르그송은 당대의 최첨단의 과학 지식들을 흡수하려고 노력하여(그는 그의 저서 '물질과 기억'의 단 3페이지를 쓰기 위하여 병리학을 5년동안 공부하기도 하였다) "운동"으로 전환시켜, 이후의 철학 사조들(화이트헤드, 들뢰즈 등)의 사상적 기원이 되고 있다는 평가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학문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운동을 되도록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학문이라는 것은 일종의 분석 작업이고, '분석'이 가능하려면 동일률(자기동일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학문이 탐구할 대상은, 분석하기 이전과 이후가 동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탐구대상이 분석과정 중에 변화한다면, 분석의 의미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한, 모든 것은 매순간 계속 변하고 있고, 한순간도 정지가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면 학문은 불가능하다. 정지는 고대인들의 상식적인 경험에도 비추어 보아도 올바르게 보였고, 학문을 위해서도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플라톤 당대의 과학적 지식으로는 운동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없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정신과 물질의 잘못된 이원론을 그는 당대의 과학적 성취를 통한 근거를 통해 '정지'가 곧 인간 지성의 '영화적 메커니즘'으로,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가상적 상태(예를 들어 세슘원자는 1초에 91억 9263만 1770번 진동한다)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실재로 가정하여 '애초부터 풀 수 없게 만들어진 문제' 임을 밝히고, 이후의 철학적 주류 담론을 무려 2000년간 지속되던 하나의 환상, 곧 '정지' 에서 '운동' 으로, 또한 이것이 기반하는 인식론의 주제를 '공간' 에서 '시간' 으로, 생명현상의 파악 과정에서는 그 근거를 '양'에서 '질'로 바꿔 놓았던 것이다.
베르그송은 제자도 없도 뚜렷한 계승자도 없다. 이유는 베르그송이 강단 소속(대학)의 철학자가 아니고 일반인에게만 강의를 하는 ‘꼴레주 드 프랑스’ 교수 였기 때문이다. 직계 제자는 없었으나 들뢰즈처럼 따르는 제자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