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단원들>
1919년 11월 9일 밤,
무력투쟁의 필요성을 느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 지린성 파호문 밖 중국인 집에서 새로운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니 이것이 바로 의열단입니다.
의열단은 신흥무관학교 출신과
김원봉․윤세주 등의 주도로 조직됩니다.
행동목포는 “5파괴 7가살”로 5파괴는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매일신보사․각 경찰서․기타 주요 식민기관
등입니다.
7가살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군부 수뇌․대만 총독․매국노․친일파 거두․적의 밀정․반민족적인 토호 등이 대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론에 반대하던 신채호는 의열단의
부산경찰서폭파사건․밀양경찰서폭파사건 등을 보면서 무쟁투쟁 노선을 분명히 하는 ‘의열단선언(일명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합니다. 실천사항인 공약
10조도 만드는데,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의열단은 공약 10조, 5파괴와 7가살을 지침으로 삼아 맹렬한
의열투쟁을 전개합니다.
●●● 의열단과
김익상
<나석주 의사>
의열단의 임무인 요인 암살이나 시설물 파괴는 엄중한 경계를
뚫어야 하고, 사제로 폭탄을 제조하다 보면 불량품이 생기기도 쉬워 실패할 가능성도 높고, 성공하더라도 강화된 경계를 뚫고 돌아오기란 힘들어
오히려 체포되거나 사살당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의열단원은 오히려 이 때문에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해 살아있는 한 자유롭게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언제나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머리를 잘 손질하고,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 사진이라고 생각하면서
찍었다고 합니다.
의열단의 의거 중 특히 유명한 활동은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 의거,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그리고 김익상 의사의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가 있습니다.
의거 후 나석주 의사는
부상을 당하고 병원에 후송 후 순국하였으며, 김상옥 의사 역시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가 자살하였습니다. 하지만 김익상 의사는 총독부를 목표로
의거를 하면서 놀라운 활약을 보입니다.
김익상은 1921년 9월 9일에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건네 받고 즉시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를 결행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양복 속에 폭탄과 권총을 감추고 9월 10일에
베이징을 떠나 11일에 서울에 도착한 김익상은 일경의 눈을 속이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가는 일본 여자와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면서 교묘히 부부
행세를 하여 기차 안에서 검문을 피하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서울에 도착 후 동생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3살짜리 딸을
데리고 살던 부인 송씨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여 마음의 준비를 시킵니다.
그리고 9월 12일, 건물수리공으로 위장하여 조선총독부 건물에 잠입한
김익상은 먼저 비서과에 폭탄을 던지고, 이어 회계과에도 폭탄을 던집니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하였으나 회계과에 던진 폭탄은
일시에 광음을 내며 폭발하자 여러 명의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올라 왔지만, 김익상은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총독부 청사를 빠져 나옵니다.
회계과에 던진 폭탄이 맹렬하게 폭발하여 15센티나 되는 깊이로
마룻바닥이 팼고, 파편은 벽과 아래층으로 튀어 응접용 탁자가 부서지고,
유리창이 깨지고 여러 개의 책상과 걸상이 파손되는 피해를 입혔습니다.
식민통치의 심장부가 공격을 당한 만큼 경계는 강화되었으나 총독부를 무사히 빠져나온 김익상은 일경의 수사망도 따돌리고 중국 베이징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위업을 보입니다.
<김익상 의사 재판 과정에 대한
보도>
김익상 의사는 이후 1922년 3월, 중국 시찰차 들어오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기 위하여 상하이 세관부두에서 의열단 동료인 오성륜·이종암과 함께 폭탄과 권총으로 거사를
꾀합니다.
하지만 다나카는 죽음을 모면하였고, 빗나간 총알을 맞고 엉뚱하게도 신혼여행 중이었던 영국인 여성이 사망합니다. 거사 직후
김익상․오성륜․이종암은 체포되었으며, 이 중 탈옥에 성공한 오성륜을 제외한 김익상과 이종암은 재판을 받습니다.
신혼여행 중 아내를 잃은 남편은 영국 기자 톰슨으로, 그의
입장에서는 죄없는 아내가 신혼여행 중에 봉변을 당하여 억울하게 죽었으니, 분노하여 경찰의 의열단원 체포까지 도왔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조국
독립을 위해 의거를 하려 한 사실을 알고는 아내의 죽음은 분명 억울한 일이지만, 김익상을 비롯한 의사들의 본의가 무고한 민간인이 아닌 조국을
침략한 원흉에 대항하고자 한 것이라는 걸 이해하고 이후엔 일본 재판정에 탄원서까지 제출하였습니다.
하지만 김익상은 사형을 선고 받고, 이종암은
징역 13년을 받은 후 복역하다가 병으로 가석방되었다가 사망합니다.
●●● 이후의
의열단
<박차정과 김원봉 부부>
의열단은 이후에도 나석주와 김상옥 의사를 비롯한 여러
단원들이 의거를 진행하지만, 거사의 성공 실패에 상관없이 단원은 대부분 죽거나 체포당합니다. 그리고 개별적인 의열투쟁만으로 한계를 느낀 김원봉은
의열단을 해산하고, 무장 독립군을 결성하기 위하여 스스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합니다. 이후 의열단은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됩니다.
김원봉의 아내 박차정 여사도 1995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독립운동가였을 정도로 가족이 함께 독립운동에 매진하여, 이후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가 이를 대한광복군과 통합하고
부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을 맞이합니다.
광복 후 김익상․나석주․김상옥 의사 등 많은 의열단원들은
건국훈장을 받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장이었던 김원봉은 해방 후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온갖 멸시와 수모를 당하는 등
또 다른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분단된 조국은 독립운동에 젊음을 송두리째 받친 그에게 ‘좌익 정치인’이라는 딱지로 탄압을 가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서 희생된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분이죠.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남북협상 때 월북을 결행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국가검열상 등에 취임합니다. 북한에서 김일성
지배체제가 공고화되는 가운데 1958년 숙청당하는 등 남북한 어디에서도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죠. 분단이 빚어낸 참담한
현실입니다.
다만 광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아내 박차정 여사는 공훈을 인정받아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의열단 같은 임무는 살아 돌아오기 힘들지만, 그것을 잘
알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임무에 나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희생은 결국 독립을 이루는데 원천이었고,
오늘의 우리 대한민국을 이룬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죠. 의열투쟁가들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와 아울러 숭고한 희생정신을 높이 선양해야할 이유도 여기에서 있습니다.
첫댓글 김익상님!
당신이 계섰기에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국충정 정신을 본 받겟습니다.
.
.
그리고 님을 사랑합니다
의열단 같은 독립투사들은 해방후 사상대립으로 곤욕을 치루거나 목슴을 잃게 되지만
친일파들은 신탁통치의 하수인으로 둔갑하여 독립투사들을 잡아 짓밟는 역사의 아이러니!
이 지구상에서 우리나라밖에는 없는 슬픈 일입니다.
가장 자랑스런 민족이면서 가장 치욕스런 민족이기도 합니다.
동감입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의열단의 맹활약!
그분들이 있어 오늘이 있습니다.
근데 헌산님! 사진이 전혀 안 보이네요!
이를 어쩌지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사진 않보이면 지적하셔요..
다시 올립니다
하하하하하하하! 역시 안 보여요!
이를 어찌하면 좋을 런지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