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동아시아에서 하루키를 읽다’라는 심포지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정한 작가를 중심에 두고 한·중·일 연구자들과 후학들이 모여 허심탄회하게 동아시아 문학의 현재적 의미를 타진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다 되었기 때문이다. 문학적 언어가 지향하는 자율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율성을 생산하는 기제의 다층적인 현실성이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시끄러운 소음을 바로 현장에서 목도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심포지엄의 대상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라 그 ‘소음’ 자체였는지도 모르겠다. 문학적 상상력과 응어리져 남아 있는 역사적 상흔들이 균열을 일으키는 지점에 대해 일본의 연구자들은 예리한 매스를 집어 들었고, 한국의 연구자들은 이와 더불어 1990년대 무라카미 하루키가 무상할 수밖에 없었던 문학적 환경의 변화, 다시 말해 1960년대 문화적 감수성의 발현과 하위문화적 상상력이 급부상하면서 변하기 시작한 문학적 자질에 대해서 깊이 있게 논의 했다.
고모리 요이치 교수는 ‘기억의 소거와 역사인식’에서 10년 이상이나 경제적으로 정체되고, 빈부의 격차가 확대되었던 일본 사회에서 하루키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은 몇 안 되는 일본의 자부심으로 이용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일본의 심한 경제적 위기를 포장하는 일종의 일본 문화내셔널리즘의 표상으로서 하루키가 있었다는 비판에는, 과거 일본이 저질러 왔던 동아시아에서의 폐해를 잊게 하는 동인으로 작동하고 있는 하루키 언어의 기제가 무엇인지를 적확하게 지적하고 있어, 거듭 문학적 언어의 윤리란 무엇인가를 실감하게 하였다.
특히 <해변의 카프카>에 등장하는 카프카 소년과 ‘처형기계’ 실체의 의미, 즉 죄인이 된 인간의 신체에 죄상을 인정하는 판결문을 침으로 새겨 넣고, 죄인은 자신의 몸의 상처를 해독하는 것을 강요받은 다음, 판결의 경중과는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사형시키는 행위를 결합시키면서 언어와 폭력, 인간의 죽음과 폭력을 아무런 매개 없이 결합시키는 것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은 하루키 소설에 비판적 분석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김춘미 교수는 ‘한국에서의 무라카미 하루키-그 외연과 내포’를 통해 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더 나가 하루키가 한국의 386세대와 문화적 공감을 형성하면서 만들어낸 문학적 언어의 전위적인 측면, 독자층의 특성에 따라서 다양하게 읽힐 수밖에 없는 문학적 상상력의 자율성과 특수한 ‘권리’까지 아울러 지적하였다. 그러한 논의 가운데 하루키 문학의 무국적적 상상력이나 혼종적인 미학의 기저에 깔려 있는 지배적인 사회구조나 정치적 환멸이 첨예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일본문학 연구자로서 하루키가 한국문학에서 어떻게 번역되고 소통되었는가를 보여준 보기 드문 발제였다. 박유하 교수의 상호배려 하는 질의 시간도 서로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다음 날 동경대·고려대 대학원생들이 주고받은 ‘하루키 읽기’의 결과물들은 특정한 작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 물론이거니와 한·중·일 동아시아 인문학이 나가야할 미래가 무엇인지, 또한 문화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해부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이 소통의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는 다시 강조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일본사회의 우익화 하는 풍조와 전후 일본의 중견세력이었던 베이비붐 세대의 책임에 대한 비판(고모리 요치이)에서도 사실 소통을 갈망하는 일본의 비판적 지성인에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안의 문학을 욕망하다 하루키 문학에 관한 논의를 통해 확연하게 드러난 것은 국가와 민족, 가족의 이데올로기를 비판적 지성으로 해부해보고자 한 작가의 욕망과 현실적 조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문학적 언어의 좌절, 그리고 한 시대 작가가 감당해야 하는 문학적 윤리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과 문화의 상관관계 속에서 ‘상상력’ 자체가 문학의 안과 밖을 소통시키는 매개로 등장하는 그 위대한 순간을 공유하였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글쓰기 욕망과 점차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교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서로 공감하고 있었다.
시간이 부족해서 종합토론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몹시 아쉬웠지만, 아마도 조금이라도 시간이 허락되었다면, 문학 번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문화 번역의 정치성과 근대문학을 타고 넘으면서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교양의 전위성이 무엇인지가 지난 역사적 상처를 확인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또한 기억의 ‘소거’가 아니라 기억의 ‘생성’(기념비로서의 기억이 아니라)을 통해 형성되는 문학적 언어의 욕망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논의가 오고갔을 것이다.
어느새 어두워진 건물을 빠져 나오면서 한·중·일 연구자들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말 자체를 무색하게 하는, 우리 안의 문학적인 것에 대한 욕망과 문학적 언어의 윤리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했다.
선물 받은 복분자 주를 가슴에 품고 앞서가시던 고모리 요이치 교수 일행과 환한 미소로 미래의 시간을 약속하시던 김춘미 교수 일행의 뒷모습이 아스라해질 무렵, TV 가판대에서는 제주도에서 열리고 있는 한·일 외교부 수장들의 만남, 그리고 한·미 FTA 상황이 실시간으로 보도 되고 있었다.
최성실 / 경원대·국어국문학
필자는 서강대에서 ‘1950년대 한국소설비평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근대, 다중의 나선> 등의 저서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