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이 그녀를 찍었다, 그녀는 말갛게 웃으며 신나게 찍었다

[평화]

 

	5000만원으로 찍은 초저예산 영화 ‘옥희의 영화’ 주연 정유미. 그는 “중요한 건 영화의 규모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현장에서 좋은 에너지와 기운을 얻어갈 수 있느냐인 것 같다”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

배우 정유미(27)의 이름은 아직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주연을 맡은 것도 최근이다. 데뷔 24년 박중훈의 관록에 눌리지 않는, 당찬 취업지망생의 면모를 보여줬던 ‘내 깡패같은 애인’이 본격적인 첫 주연작이었다.

하지만 이 배우의 필모그래피는 은근히 실속 있다. 2005년 ‘사랑니’로 출발해 ‘가족의 탄생’ ‘좋지 아니한가’ ‘10억’ ‘차우’ ‘내 깡패같은 애인’을 거쳐 16일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열한번째 작품 ‘옥희의 영화’까지. 배우들이 한 번쯤 ‘체험’해보고 싶어한다는 홍 감독의 영화에도 벌써 세번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첩첩산중’에 이어서다.

아마도 해말간 피부에 꾸밈없는 웃음, 물 스며들듯 자연스러운 느낌이 쓰임새를 넓혔으리란 짐작이 간다. 그렇다고 ‘청순미’로 단정짓기엔 좀 복합적인 이미지다. 각각 독립된 듯 이어져있는 네 편이 옴니버스로 묶인 ‘옥희의 영화’에서 그가 맡은 영화학도 옥희의 경우도 그렇다. 같은 과 학생 진구(이선균)와 사귀지만, 유부남 송교수(문성근)와의 비밀스런 관계도 있다. 까칠한 듯 발랄한 옥희가 “학교에 무슨 약 탔나봐? 요새 다들 나 좋다고 난리다, 난리”라며 생기있게 얘기하는 장면은 정유미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 속에 꾹꾹 눌러박는다.

홍 감독의 영화는 촬영 당일 아침에 대본을 나눠주는 이른바 ‘즉흥촬영’. 캐스팅도 느닷없다. 정유미도 그랬다. 하루 전날 갑자기 ‘내일부터 시작인데 나오라’는 홍감독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차피 촬영 없을 땐 쉴 거잖아? 그러는데 어어, 하다가 하게 됐어요.(웃음)” 당일 대본, 당일 촬영이라니, 어지간한 배우들에게도 긴장 상황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땐 겁이 많이 났었어요. 대본이 촬영날 아침에 나오는데, 대사도 어찌나 긴지! ‘옥희의 영화’는 한겨울에 찍어서 연기를 어떻게 해야겠단 계획보다 그저 추워죽겠단 생각 밖에 없었어요. 다 찍고 나니 참 재미있고 신기한 경험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조각조각 리얼타임으로 찍었던 그 순간들이 하나로 붙어서 영화가 된 거죠. 이런 거였어? 이렇게 되는 거였구나, 했죠. 진짜 영화란 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었어요.”

“연기하지 않을 땐 아직 배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그를 보면 쑥쑥 커나갈 게 분명한 튼실한 묘목을 보는 듯하다. “배우로 불리는 게 아직은 쑥스럽고 민망해요. 해외 나갈 적에 출입국신고서 직업란에 ‘actress(배우)’라고 적게 된 지도 얼마 안 됐어요. 계속 ‘student(학생)’라고 썼죠. 연기할 때만 배우로, 그렇지 않을 때는 자연인 정유미로 살려고 해요. 다양한 연기, 진폭 있는 연기를 하려면 눈과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잖아요. 만일 제가 갇혀있는 스타의 생활을 해야 한다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싶어요.”

마지막으로, 연기를 하는 이유를 물었다. “좋은 배우와 감독들로부터 좋은 에너지를 받는 게 즐거워서요.” ‘그저 즐겁게 찍었다’는 얘기가 진심으로 다가왔다. 스크린에서 이미 그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글=기선민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