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간식 한상을 차려 놓은 총무가 손뼉을 치며 휴식시간을 알린다. 연습하던 곡을 끝내려다 성화에 못 이겨 아코디언을 내려놓고 찻상을 빙 둘러 선다. 오늘도 자기 컵을 들고 온 사람은 4명 뿐. 여기저기서 종이컵을 구하노라 총무가 부산하다. 두 시간 수업시간 중간 티타임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우리 아코디언 반은 14명이 고정 멤버다. 2년 정도를 함께 해서 이제는 모두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는 편이다. 아코디언이 너무 무겁고, 회원들이 대부분 어르신 교통카드를 받은 나이여서 중간에 쉬지 않으면 너무 힘이 든다. 그래서 티타임은 꼭 필요하다. 시작 당시 우리 반에 두 여자 중 가장 젊은이(그러나 그도 60이 가깝다)가 자천타천으로 총무를 맡아 온갖 심부름을 도맡아 한다. 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챙기는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일은 종이컵을 조달하는 것이다. 성당에서 아주 열렬하게 환경운동을 하는 그녀는 신부님이 일회용 컵을 쓰지 말라고 해서 늘 자기 컵을 가지고 다닌다. 나랑 코드가 잘 맞는다. 고민하는 그녀를 보다 못해 어느 날 입바른 소리를 했다.
“지구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차 마실 때 필요한 컵을 개인이 준비해서 가지고 다닙시다. 그리고 총무님. 종이컵을 가져오지 마세요.”
남자 회원들이 모두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친다. 왕년에 모두들 한가닥 하셨다는 분들. 마눌님들의 내조 덕에 손에 물 묻혀 본적이 없다고 자랑하시는 분들이니 내 말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내가 한 술 더 떴다.
“컵이 없으면 차를 못 마십니다. 다음부터 총무님이 제공하는 종이컵이 없습니다.”
그 다음 주 총무와 나 둘만 컵을 들고 왔다. 전전긍긍하는 총무에게 모른척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각자 어디 가서 컵들을 구해와 차를 마신다. 나중에는 귀찮다고 차를 안 마신단다. 자신이 임무수행을 잘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해 진 총무가 ‘납작하게 접어지는 등산용 컵이 있는데 회비에서 이를 사서 하나씩 나누어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안을 냈다. 만장일치로 통과. 다음 시간에 컵을 하나씩 받았다. 등산용이어서 고리도 있어서 어디나 매달기 좋게 되어있다. 아코디언 가방에 달으라고 코치를 했더니 남성 회원님들 왈 “이 나이에 달랑달랑 컵 달고 다니게 생겼냐”고. 마음대로 하시라고 했다. 한 회원은 체면상 죽어도 못할 일이니 기대하지 말란다.
한동안은 그런대로 잘 실행되었다. 물만 끓여 놓으면 각자 차 마시고 자기 컵 갈무리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회원들이 늘어 동수의 구성이 되었다. 그러자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컵을 들고 오는 회원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게 얼마나 한다고 그 편한 종이컵을 쓰지 않느냐고 하면서 자진하여 종이컵을 가져오겠다는 여성회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집에 많단다. 얼마든지 가져 올 수 있단다.
입바른 소리 담당인 내가 나섰다. 한 번의 편함이 지구상에 미치는 현상을 한창 설명 중인데 한 남성회원이 한 말씀 하신다. “내가 공직에 있을 때 나무를 많이 심어서 나는 종이컵을 써도 되요.” 맞장구치는 여성회원 “아 그럼요, 그럼요. 저희 집에 많아요 얼마든지 가져올게요. 편하게 삽시다.”
아~ 어떻게 할까? 아~ 어떻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