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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의 의미는 '나'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내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이루는 것은 육체적 자아와 정신적 자아가 있는데 육체적 자아만을 갖는다면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 출처 : 남아있는 시간을 위하여 / 김형석 / 김영사
비밀글----------------------------------------------------------------------------------------------------------------------
■ 산다는 것의 의미
삶의 출발은 누구나 다 같다. 그러나 도달하는 목표는 모두가 다르다. 동일한 방향에서 앞뒤의 거리가 있는 것만이 아니다. 방향 자체도 제각기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아의 발견과 완성이라는 일차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과 같이 종류로 구별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의 개체가 인간이다. 따라서 개성이 없는 인간은 제구실을 하지 못하며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한다.
만일 내가 없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무엇이 남겠는가. 나의 무無는 그대로 세계의 공허를 가져온다. 내가 있음으로써 역사, 사회,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아는 세계 속에 살게 되어 있으며 나와의 관계성 속에서 세계의 의미를 찾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넓은 의미의 교육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가르치고 배우는 동안에 자신의 정신이 자라고 자아의식을 지니게 된다.
이때의 교육은 넓은 의미의 체험이다. 그리고 정신적 사고를 뜻한다. 여러 가지를 체험하고 많은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육은 자기를 발견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교육이 계속되는 동안 인간은 꾸준히 자아를 찾아 성장하는 것이다.
교육이 그치면 성장도 그친다. 체험이 멎으면 삶이 끝난다. 새로운 사색을 못하는 사람은 자기를 키워갈 능력을 잃는다.
그러나 자아의식을 남달리 강렬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막연하게 자아를 느낄 뿐 뚜렷한 개성과 자각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100의 자아의식과 20의 자아의식을 갖는 사람이 같다고는 볼 수가 없다.
그러면 강렬한 자아의식을 갖는 사람은 어떤 성격의 인간인가. 자아 속에 남다른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깊고 중요한 문제를 갖는 사람은 그만큼 자아의식이 뚜렷해진다. 그러나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문제로 만족하는 사람은 자아의식도 빈곤하며 그에게는 확실한 개성이나 뚜렷
한 자아성이 없다.
예술가는 예술을 통한 문제의식이 강렬하기 때문에 그만큼 자아의식도 뚜렷해진다. 사상가는 자기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남보다 다른 자아성을 지니고 산다. 이 문제는 육체나 본능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자기통일과 성장을 위해 불가피하게 찾아 누리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성격의 교육도 두 가지 책임을 가진다. 처음 과정은 자아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며 다음은 스스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끄는 노력이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중학년 때까지는 정신적인 성장을 돕는 일반적인 교육으로 그친다. 그 이상의 것은 아이들이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상급반이나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어떤 문제의식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전공의 선택이나 생의 방향 결정이라고 부른다.
만일 우리 가운데 전공과목을 내가 선택할수 없었다든지, 대학에 다니면서 남다른 문제의식 없이 세월을 보내왔다면 그것은 질적으로는 고등학교의 연장일 수는 있어도 문제의식이 뚜렷한 대학생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공과에서 기술은 습득할 수 있고, 상과에서 부기 이론은 배울 수 있어도 자신의 문제를 갖고 자기의 삶을 영위하는 인간으로는 성장할 수가 없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찾아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발견은 자아의식에서 오며 그 자아의식은 문제의식에서 싹튼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사느냐가 어떤 인간이 되느냐이며, 어떤 문제를 해결 지었는가가 어떤 생애를 살았는가와 통한다.
우리가 젊은 지성인들에게 문제의 소유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잃어감에 관하여_상실론
■ 고독에 관하여
인간은 정신적 존재이다. 정신적 존재의 특징은 사귐이 있다는 데 있다. 가족, 이웃, 친구 들이 사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나는 나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내가 나에게 묻고 내가 나에게 대답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린애들이 소꿉장난하는 것 같은 일이지만, 위대한 철학자들도 그와 같은 자신과의 대화를 해왔다. 플라톤의 대화 편들이 그렇게 생긴 것이며, 지금도 많은 사상가는 자신과 대화를 거듭하는 동안에 정신적 발전과 향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사귐, 사귐의 한 방도인 대화,
이것이 정신적 존재의 특징인 동시에 인격의 본바탕을 만드는 조건이다.
이러한 사귐과 대화가 끊어졌을 때 느끼는 마음 상태를 우리는 고독이라 부른다.
쉽게 말해 고독은 홀로 있는 마음 상태이다. 이때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또는 정신이 홀로 있는 상태가 고독이라는 것이다. 육체가 혼자 앉아 있다고 해서 그대로 고독인 것은 아니다. 자신과 대화가 가능한 때는 고독을 느끼지 않는 법이다. 사색을 하든가, 음악을 듣든가, 그림을 보는 때, 이런 때는 내가 혼자 있는 것 같아도 어떤 사상, 예술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때이므로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 물론 그 대화가 끊어지면 고독을 느끼게 되지만….
정신생활이 빈약한 사람들은 혼자만 있게 되면 곧 고독을 느낀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생활이 풍부한 사람은 언제든지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 항상 자신과 대화의 시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대화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정신력이 빈약한 반면 생리적인 자아가 강하기 때문에 또 하나의 육체를 가진 타자를 찾아 스스로의 고독을 메우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많은 거리로 나가보든가 친지들과 모여 앉아 공연히 떠들어대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에 자기의 고독을 해소시키는 것이다. 철드는 소녀들이 자주 고독을 호소한다. 생리적인 고립감을 가장 많이 느끼기 때문이다. 아직 정신적 대화를 하기에는 모자라며 육체적인 고립감은 누구보다도 강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은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을 피한다. 또 결코 오랜 시간을 군중 속에서 보내지 못한다. 대중 속에서는 정신적으로 깊이 있는 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가나 실업가는 대중 속으로 들어가지만 학자나 사상가가 그렇지 못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요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깊은 사상은 정신적 대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정신적 대화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육체가 없는 곳에 인간이 없으며, 생리적인 고독 역시 대인 관계에서 풀릴 수밖에 없다. 위대한 천재도 소녀와 담화를 즐기며 훌륭한 철학자도 어린애들과 사귀게 된다.
고독이 마음의 상태라는 말 속에서 마음은 인간적인 내용의 표현이며 따라서 모든 고독은 인간적인 것이다.
■ 무소유의 삶을 생각한다
오래전 일이다. 부산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었다. 나와 마주한 사람은 수도복을 입은 사십 대 후반쯤의 남자였다. 중간 복도를 지나가던 승무원이 가벼운 점심거리를 권하면서 식당칸이 없으니 필요하면 사라는 것이었다.
수도사는 빵과 사이다를 사면서 2인분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대금을 내려고 했더니 그는 꼭 자기가 사고 싶다면서 돈을 지급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면서 “수도사님은 돈이 없으실 텐데…”라고 했다.
“아닙니다. 오늘 같은 경우에는 필요한 돈을 수도원에서 받아서 나옵니다. 돌아가서는 무엇을 위해 어디에 썼다는 내용만 보고하면 됩니다. 얼마 안 되지만 선생님과 식사를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요”라는 것이었다.
나는 사이다를 마시면서, 역시 수도사님들은 소유가 없이 사는 것을 서약하고 지키시지요?
라고 물었다.
“저희는 세 가지 규정은 엄밀히 지키기로 되어 있습니다. 재물을 갖지 않기로 되어 있고, 여성과의 만남이 없습니다. 그리고 수도원 안에서는 말을 하지 않기로 되어 있으니까 자연히 바깥세상에 나와도 가급적 침묵을 지키게 됩니다. 어제는 제 부친의 장례식이 있어서 허락을 받고 다녀가는 길입니다”라는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기차가 왜관역에 멎었을 때 수도사는 조용히 인사를 하고 열차에서 내렸다.
그와 헤어진 뒤, 나는 젊었을 때 깨끗한 삶과 숭고한 정신을 위해 신부나 수도사들은 어떻게 살까 하는 가벼운 연모심 같은 심정을 느껴본 적이 있었음을 상기해보았다.
왜 신부나 수도사가 되고 스님이 되었을까.
흔히 속세를 떠나고 싶어서였다. 불필요한 상념의 노예가 되는 것도 어리석고 무의미한 소유욕에 사로잡혀 헛된 인생을 보낼 어리석음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참된 삶이 무엇인가를 찾고 인생의 숨겨진 의미가 무엇인가를 터득하고 싶었던 것이다. 영혼의 안식이 세속적 욕망보다 중하며, 무욕과 무소유의 삶은 인간적 죄악에서 구원받는 길임을 실천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적인 것을 버림으로써 인간을 초월한 성스러운 가치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성인은 되지 못하지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사라져가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삶을 초월하고 싶은 정신적 바람은 누구에게나 있고, 나도 한때는 그런 꿈을 꾸었던 것 같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볼 수도 있다.
신부나 스님이 되는 사람의 수가 적으니까 다행이지 모든 사람이 다 그 길을 택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 경제의 발전과 그 결과는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옛날부터 침묵은 웅변보다 귀하다는 말이 있으나, 정치인들의 웅변에는 거짓과 명예욕이 깔렸기 때문에 불필요한 언변보다는 침묵을 지키는 인품이 고귀하다는 판단은 옳으나 선하고 아름다운 대화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즐거운 행복으로 이끌어주지 않는가. 만일 남녀 간의 이성관계가 끊어진다면 후손들이 태어나지 못하며 종교적인 성스러움을 찾아 누릴 인간 존재 자체가 사라지지 않을까.
세속적이고 무가치해 보이더라도 인간적 삶이 존재하기 때문에 의미 있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더 귀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어떤 철학자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고의 행복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도 인간을 사랑하기로 하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니체는 신들을 찾아 성스러워 보이는 산에서 내려오면서 나는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으로 간다고 고백했다. 인간을 사랑하는 일, 그보다 더 소중하고 성스러운 가치의 삶은 없었기 때문이다. 석가도 그 뜻을 찾아 가르쳤고 예수도 십자가를 통해 그 길을 몸소 열어주었던 것이다.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길이며 이웃을 위하는 삶인 것이다. 삶 자체가 하나의 공동체이다.
살아가는 방법의 하나가 무소유일 수 있다. 그러나 무소유가 삶의 목적은 아니다.
얼마 전 김수환 추기경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베풀고 갔는데, 오래지 않아 법정 스님이 무소유의 삶을 가르쳐주고 세상을 떠났다. 소유가 인생 전부인 양 허덕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고마운 교훈을 남겨주었다. 소유가 인생의 목적이 아님을 가르쳐주었다. 소유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면 무소유도 삶의 목표가 아니다.
인간은 소유의 유무를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몸의 부분인 어떤 기관이나 세포가 홀로 존립할 수 없듯이 인간도 공동체를 떠나 홀로 살도록 되어 있지 않다. 더불어 살도록 되어 있다. 태어날 때 그러했고 죽음도 사회적 공동체를 떠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소유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나를 위해서는 적게 가지고 이웃을 위해서는 많이 주는 삶이다.
그 정도와 노력에 따라 인생이 평가받을 수도 있다. 나는 많이 갖고 이웃에게는 적게 주는 것이 잘못된 인생이다. 소유에 대한 욕망이 바로 그런 것이다.
또 무소유의 삶 속에는 소유를 필수로 삼는 본능적 욕망이 깔려 있기 때문에 그 욕망이 삶의 고통과 번뇌를 유발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가장 값있는 인생은 어떤 것인가.
사랑이 있는 고통과 고뇌,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우리가 존경하며 감사히 여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우리를 위해 사랑의 짐을 져준 사람들이다.
살아가는 방법의 하나가 무소유일 수 있다. 그러나 무소유가 삶의 목적은 아니다. 얼마 전 김수환 추기경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베풀고 갔는데, 오래지 않아 법정 스님이 무소유의 삶을 가르쳐주고 세상을 떠났다. 소유가 인생 전부인 양 허덕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고마운 교훈을 남겨주었다. 소유가 인생의 목적이 아님을 가르쳐주었다. 소유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면 무소유도 삶의 목표가 아니다. 인간은 소유의 유무를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_62쪽에서
■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늙는다는 것, 그 두 가지 형태
몇 해 전 읽었던 기사가 생각난다. 일본의 한 여론조사에서 ‘당신은 몇 살부터 늙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는가’라고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약간 뜻밖이었다. 이십 대 후반부터였다는 것이다.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까지는 피곤을 느낀다든지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는데 이십 대 후반부터는 피곤이 가시지 않는가 하면 체력의 한계를 느끼곤 했다는 것이다.
삼십 대가 되니까 배가 나오기 시작하고, 사십 대에는 머리카락이 희어지거나 빠지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오십을 넘기니까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되곤 했다는 조사였다. 육십이 지나면 이미 늙었으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어지고. 그렇게 일찍 노쇠 현상이 나타나는가 싶었으나 이야기를 듣고 보면 수긍이 가는 내용이기도 하다.
동양인들의 체력은 여자가 22세, 남자가 24세가 정상기라고 한다. 그 뒤부터는 서서히 체력이 하강하다가 사십 대가 되면 성인병 현상이 나타나고 ‘나는 늙었구나’ 하는 생각을 누구나 하는 것이 보통이다. 여자 농구 선수가 25세에 체력이 달려 더 못 뛰겠다고 은퇴하며, 축구 선수들의 전성기도 이십 대 후반기로 바뀌고 있다. 기술이 뒷받침하기 때문에 더 활약하기도 하나 체력은 이미 고비를 넘기고 있다.
만일 그런 신체적 조건으로 따진다면 인간은 누구나 20대 후반부터 늙어가는 것이 사실이다. 서서히 성장이 떨어져 육십을 넘기고 생로병사의 후반 과정을 밟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적 성장은 그렇지 않다. 이십 대 후반기나 삼십 대 초까지는 겨우 철들어 성장을 더해가기 시작한다.
사십 대가 되면 인간적 성장이 왕성해지며, 50대에는 기억력보다 소중한 사고력이 앞서게 된다. 그러다가 인간적 완성기는 육십이 넘으면서 가능해진다.
사람들은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말을 자주 한다. 정신적 성장과 그 완숙기는 육십부터라는 뜻이다.
나는 내 가까운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인생의 성숙기는 언제로 체험했는가를 정리해본 바가 있다. 모두의 결론은 육십 세부터 칠십오 세까지였다는 얘기였다. 중요한 저서가 쓰인 것도 칠십 대 초반이었고 자신의 사상과 정신적 위상이 형성된 것도 같은 기간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육십이 되기 전까지는 인생의 의미도 깨닫지 못했는가 하면 삶의 보람도 터득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인기를 따라 움직이지 않고 소수이기는 해도 존경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육십 이전에는 불가능했다는 것이 일생에 대한 회고담이었다.
독일에서는 오래전부터, 미국에서도 1993년 이후부터는 대학교수의 정년은 따지지 않는 것은 정신적 성장, 사상과 학문의 성숙은 오래 가능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칠십까지는 누구나 강의를 하고 더 하고 안 하는 것은 자신의 학문적 성장의 문제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문제를 제기해보는가.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은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된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 하나는
신체가 늙으면 인생 자체가 늙어버리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소중한 정신적 건강과 성장을 일찍부터 포기해버린다.
그것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실하는 일이다. 신체적 건강도 그렇다. 사십까지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머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십이 넘으면서부터는 강건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는 법이다. 육십을 넘긴 뒤부터는 더욱 그러하다.
또 하나의 잘못된 관념은 내 늙음과 성장을 주변적 환경에 맡겨버리는 일이다.
최근에는 일찍 직장을 떠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직장을 떠나 일거리를 잃게 되면 나는 할 일이 없어졌다고 해서 스스로 의욕과 성장을 포기하기 쉽다. 직장을 떠난다고 해서 일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은 찾으면 얼마든지 있다. 일이 없어졌다고 해서 내 시간과 삶까지도 빼앗길 필요는 없다. 자신의 정신적 성장은 선택과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다.
옛날부터 우리는 육십, 즉 회갑 관념에 붙잡혀 살았다. 육십은 이미 늙어버린 나이이며 칠십은 고희古稀라는 잠재 관념 때문에 회갑만 지나면 나 자신도 늙었다고 생각하며 칠십이 지났는데 누가 나를 인정하며 받아주겠는가 하는 생각을 스스로 해버리곤 한다.
육십이라고 해서 늙으라는 법도 없으며 칠십을 지냈다고 해서 나 자신을 늙은이로 자인할 필요도 없다. 인생은 육십부터이며 칠십은 완숙기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때때로 사회 지도층에 있던 사람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곤 한다. 그럴 때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늙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고 체념한다. 그러나 10년의 세월이 지났다고 모두가 늙으라는 법은 없다. 사십 대도 공부하지 않고 일을 중단하면 녹슨 기계와 같아서 노쇠해진다. 그러나 육십이 되어서도 공부하며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은 젊은 활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운명적으로 주어져 있는 신체적 늙음 속에 어떻게 강력한 정신적 활력을 충당시켜 인간적 보람과 젊음을 유지하는가에 달려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랜 세월을 공동체 안에서 살아온 노인들이 욕심의 노예가 되면 그 삶은 심히 추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나이 들면서 가장 삼가야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노욕에 빠지지 않는 일이다. 불행하게도 인생의 지혜를 상실한 노인들이 노욕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_81쪽에서
나이 들면 공적인 일은 배후에서, 개인적인 일은 계속해서 진행시키는 자세가 꼭 필요하다. 그 어느 것에도 참여하지 못할 때는 취미 활동에서 삶의 보람을 이어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인간은 일을 통해 봉사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면 늙었다고 해서 그 가능성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_90쪽에서
젊었을 때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가 만용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적 판단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용기가 없는 젊은이는 큰 뜻을 펴지 못한다. 장년기가 되면 일에 대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_91쪽에서
저자 김형석
철학자, 수필가,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1920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나 평안남도 대동군 송산리에서 자랐다.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제3공립중학교를 졸업했으며, 일본 조치上智 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고향에서 해방을 맞이했고, 1947년 탈북, 이후 7년간 서울 중앙중고등학교의 교사와 교감으로 일했다. 1954년부터 31년간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봉직하며 한국 철학계의 기초를 다지며 후학을 양성했다. 1985년 퇴직한 뒤 백수白壽를 앞둔 지금까지 줄곧 강연과 저술활동을 통해 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철학 개론》 《철학 입문》 《윤리학》 《역사철학》 《종교의 철학적 이해》 같은 철학서 외에도 《예수》 《어떻게 믿을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와 같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성찰을 담은 책,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백 년을 살아보니》와 같은 에세이집을 펴냈다. 특히 첫 수필집인 《고독이라는 병》은 피천득의 《인연》의 뒤를 잇는 수필문학의 명작으로 평가받았으며, 이태 뒤에 나온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혼란스러운 시대, 고뇌와 고독에 싸인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등대가 되어주며 사색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로 독자의 마음에 남았고, 당시 60만 부 판매를 넘기며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12년 강원도 양구군에서는 그와 그의 오랜 벗 고故 안병욱 교수의 학문적 성과를 기려 양구인문학박물관 ‘철학의 집’을 개관했다.
도서소개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2018-02-08
Chapter 5. #5. 조금, 오래된 이야기들_책 속 수필선: 길과 구름과 실존
Chapter 6. #6. 조금, 오래된 이야기들_책 속 수필선: 선비 정신과 돈
Chapter 7. #7. 조금, 오래된 이야기들_책 속 수필선: 정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