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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반석
18세기 말 여러 프리메이슨단 조직체가 널리 확산되어 갈 무럽, 소위 말하는 동방멤피스
의식서가 출현한다.
우리가 알기로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오르무스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이것은 시온수도회가
1188년에서 1307년까지 사용했던 이름이라고 한다. 동방멤피스 의식서에 따르면 오르무스는
기원 46년경 이집트의 현자로서 이교와 기독교 전설을 융합하여 장미십자단을 창시한
사람이다.
다른 18세기 ‘프리메이슨단 의식서’들에는 ‘시온의 반석’에 대한 언급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소수도원 문서에 고드프라와 보두엥 드 부용에 의해 창시된 ‘왕족의 전통’을 유럽의
다른 지배 왕족들의 것과 ‘대등하게’ 만들었다는 바로 그 ‘시온의 반석’이다. 우리는 전에
시온의 반석은 단순히 시온산 – 고드프라가 뒤에 시온수도회가 된 한 단체의 거점으로 쓰기
위해 수도원을 지었던 예루살렘 남쪽의 ‘높은 언덕’ – 을 가리킨다고 가정했었다. 그렇지만
프리메이슨단 자료들은 시온의 반석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들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열성으로 보아 그들이 성서의 한 특정 귀절을 언급하고 있다 해서 놀라울 것은 없다.
이 귀절에서 ‘시온의 반석’은 높은 언덕 이외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성전을 지을 때 빼놓고 소홀히 했던 – 도저히 그래서는 안되는데 - 한 특정한 돌이다.
이것은 그렇기 때문에 꼭 찾아내어 건물의 기초돌로 써야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편 118편을 보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기록되었고, 마태복음 21장 42절에서
예수는 특별히 이 시편 구절을 비유해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하였으며,
로마서 9장 33절에는 좀 애매하기는 하지만 또 다른 구절이 있다. [보라 내가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하였다.
또 사도행전 4장 11절에서는 시온의 반석이 예수 자신을 비유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써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에베소서 2장 20절에는 예수를 시온의 반석과 동일시하는 것이 좀 더 분명히 나타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2장 3~8절에는 이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주는 인자하시니,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와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계속하여 바로 다음 절에서 성경은 한참 후까지도 우리에게 그 의미가 분명치 않았던 한
주제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영적이고 세속적인 지배자인 선택된 왕들의 계보, 즉 제사장
왕들의 계보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 어려운 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프리메이슨단의 ‘극비’중 하나로서 특히 현저한
성전의 머릿돌, ‘시온의 반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머릿돌을 예수 자신과 명백히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시온의 반석 또는 예수 자신의 터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십자군시대 때 유럽을 지배했던 다른 왕조들과 ‘대등’했던 그 ‘왕족’은 무엇인가?
가톨릭 현대화 운동
1833년 ‘아르스날’ 도서관에 있을 때 샤를르 노디에의 제자였던 쟝 밥티스트 피토아는
문교부의 한 관리로 있었다.
그 해 문교부는 야심적인 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프랑스 역사에 관계되는 지금까지의
미공개 자료들을 출판해 내는 것이었다. 이것을 위해 두 개의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여기에는
빅토르 위고, 쥐르 미셸레, 그리고 십자군 원정의 대가인 엠마뉴엘 레이 남작도 끼어 있었다.
문교부의 후원으로 이 때 출판된 업적 가운데에는 미셰레의 기념비적인 <성당기사단의 역사>
가 있었다. 이것은 성당기사단의 재판 배심 기록들을 꼼꼼하게 편집해 놓은 것이다. 레이 남작
도 문교부의 후원으로 십자군운동과 예루살렘에서의 프랑크 왕국 역사에 관한 많은 책들을
출판했다.
여기에서 책으로는 처음으로 시온수도회를 다룬 독창적인 장(章)들이 나타난다.
어떤 곳에서는 레이가 인용한 것들이 소수도원 문서에 있는 구절들과 거의 같다.
1875년에 레이남작은 동라틴(또는 프랑크) 연구회를 만들었다. 이 연구는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야심적인 고고학 프로젝트들을 수행하였으며, 스티븐 런시먼 같은 현대의 사가들이
1차 자료로서 이용하고 있는 동라틴 회보도 발간하였다. <동라틴 회보>에는 시온수도회를
다룬 눈문들이 많이 있었다.
레이의 연구는 당시 유럽, 특히 독일에서 태동하여 기독교 교회에 심각한 위협을 주었던
새로운 역사연구 방법의 한 전형적인 것이었다. 이미 ‘다위니즘(진화론)’과 불가지론이 19세기
말 신앙의 ‘위기’를 몰고 왔는데, 이 같은 새로운 연구 방법이 위기를 더 악화시켰다. 이전까지
의 역사 연구는 대부분 신빙성이 없는 것들이었고, 무척이나 모호한 자료들 – 예를 들어 전설
이나 전통, 기인적인 기억, 이런저런 목적을 위해 과장된 사실 등 – 에 근거하고 있었다.
오늘날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권위있는 역사가는 누구나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정밀한 연구
방법은 19세기 들어서야 비로소 독일 학자들에 의해 창시되었다. 이러한 비평적 검증, 1차
자료의 검토, 정확한 현대 기술 등을 중시하는 태도가 튜튼계 학자들의 고전적인 한 전형
이었다. 비록 당시 독일학자들이 사소한 문제에만 집착해 있었기는 하지만, 그들은 연구의
한 견고한 기초를 세워 놓았다. 또한 다수의 고고학적인 발견도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을 든다면 물론 하인리히 쉴리이만의 트로이 유적 발굴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히 이러한 독일 학자들의 연구 태도가 성서에도 적용되게끔 되었다.
교리의 무조건적인 인정을 기반으로 하는 가톨릭교회는, 물론 성서가 그러한 비평적 연구를
견뎌낼 수 없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에르네 레낭의 베스트셀러이자 논란이 분분한
<예수의 생애>라는 저서는 이미 독일적 방법론은 신약성서에 적용시킨 것이었는데,
교황청에 있어 그 결과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가톨릭 현대화 운동은 원래 이러한 도전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시작된 것이다. 원래 목적은
독일적 전통으로 훈련된 교회학자들을 배출하여, 이들로 하여금 비평적인 연구 방법의 무기
로서 성서의 자구적(字句的) 사실성을 방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자해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로마교회가 젊은 성직자들을 현대 논쟁 세계의 싸움에 필요한 무기들로
무장시키려 할수록 그 성직자들은 자기들이 수행해야 할 의무들을 저버렸다. 성서의 비평적
검증 결과 로마교회의 교리에 불리한 성서 내의 상호불일치 모순점들이 노정되었다. 그래서
19세기 말경이 되면서 모더니스트들은 원래 교회가 바랬던 엘리트 타격대가 아니라 훼방자요
제일가는 이단자들이었다. 진실로 그들은 ‘마르틴 루터’ 이후 가톨릭 교회에 제일 심각한
도전을 가하였으며, 수세기 동안 전례없던 붕괴의 위기에로까지 가톨릭 교회를 몰고 갔다.
모더니스트들의 활동 본거지는 성체회의 경우처럼 파리의 생 쉴피스였다. 현대화 운동의 가장
극단적인 한 사람의 1852 ~ 1884년까지 생 쉴피스 신학교 교장으로 봉직한 사람이었다. 생
쉴피스 신학교로부터 모더니스트적 태도가 여타 프랑스 지역, 이탈리아, 스페인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그들에 의하면 성서는 의문의 여지없이 권위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특정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더니스트들은 또한 교회 권력이 점점 집중화되는
현상 – 특히 새로운 사조에 대항하기 위해 최근에 제도화된 교황무류설 – 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었다.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모드니스트적 태도는 인텔리 성직자들 뿐 아니라 저명하고 영향력 있는
학자들에게도 수용되었다. 프랑스의 로제 마르탱 두 가르, 스페인의 미구엥 드 우나무노 등이
대표적인 모더니즘의 대변자들이었다.
교회는 예상했던 열성과 분노로써 이에 맞섰다. 모더니스트들은 ‘프리메이슨단’ 이라고 단죄
되었다. 많은 모더니스트들이 파면 출교까지 당하였고 그들의 저서들은 금서목록에 올려
졌었다.
1903년 교황 레오 13세는 교황성서위원회를 조직하고 성서학자들의 연구를 감시하였다.
교황 피우스 10세는 1907년 정식으로 모더니즘을 비난했다.
그리고 1910년 9월 1일 로마교회는 성직자들에게 현대화 운동에 반대하겠다는 서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1차 대전으로 여론이 다른 곳에 돌려질 때까지 계속 유행하였다. 1914년
까지 그것은 유명한 운동이었다. 모더니스트의 대가 튀르멜 신부는 특히 짓궂은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브리타뉴에서 교수직에 있으면서 그는 14개 이상의 다른 이름으로 일련의 모더니스
트 저작들을 펴냈다. 그것들은 모두 금서목록에 올려졌는데 1929년에야 튀르멜이 그 저자라는
것이 드러났다. 두 말할 것 없이 그는 곧바로 출교 당했다.
모더니즘은 영국에도 들어가 그 곳에서 영국 성공회의 따뜻한 대접과 후원을 받았다. 후일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윌리엄 템플도 영국 성공회 교도로서 모더니즘을 지지한 사람 중 하나
였는데, 그는 [모더니즘은 많이 배운 사람들은 이미 믿고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의
동료로는 성당 참사위원 릴리가 있었다. 릴리는 어떤 신부로부터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논란의 여지없는 증거]에 관해 언급한 불경한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우리가 알기로 릴리는 파리에서 얼마동안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는 에밀 오페 신부 –
그는 소니에르가 렌느 르 샤토에서 발견된 양피지 사본을 가지고 왔던 사람이다- 와 교제하였
다. 오페는 역사와 언어, 그리고 언어학에 정통한 당대의 전형적인 젊은 모더니스트였다. 그렇
지만 그는 생 쉴피스 신학교가 아닌 로렌느의 시온신학교 – 영감의 언덕에서 교육을 받았다.
시온 선언문
우리가 발견한 것 중 시온수도회의 존재와 활동에 관한 가장 믿을만한 증거가 19세기 말에
나왔다. 문제의 증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증거로서’ 알려져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것은 지금까지 좀 사악한 일들과 관련되어졌었다. 그것은 근대사에서 악명높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맹렬한 감정과 치열한 반목, 불유쾌한 기억들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모든 학자들은 제발 이것을 손에서 놓고 싶어 한다. 이 증거가 인간들의 편견과 고통에
이바지한 공이 큰 만큼, 그와 같은 반발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증거는 나쁘게 이용되었지만, 우리는 조사 결과 이것이 대단히 잘못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 시대에 러시아 궁중에서 라스푸틴이 한 일은 어느 정도 일반
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라스푸틴 훨씬 이전에도 영향력 있고 강대한 신비주의적 결사대들
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890년대와 1900년대에 몽시에르 필립으로 알려진
인물, 그리고 가끔 페테르부르크의 왕궁을 방문한 그의 스승을 중심한 한 신비주의적 결사대가
있었다. 필립의 스승은 바로 파푸스(Papus)라 불리던 사람이었는데, 그는 프랑스의 신비주의자
로서 쥘르 드와넬 – 랑그도크에 있는 시카타리파 교회의 설립자 – 펠라당 – 예수의 무덤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사람 – 에마 칼베 그리고 클로드 드뷔시 등과 사귀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의 신비주의의 부흥]이 페테르부트크까지 퍼졌을 뿐
아니라. 그 대변자들이 러시아 왕과 왕비의 친구로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파푸스와 필립을 중심한 이 신비단체는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강자들의 심한 반대를
받았다. 예를 들면 왕 가까이에 자기의 지지자들을 보내고자 했던 엘리자베드 대공이 있다.
엘리자베드의 지지자들 중에는 후세에 세르게이 닐루스라는 익명으로 알려져 있는, 좀 천한
사람이 끼어 있었다. 닐루스는 1903년경 매우 의심스러운 한 문서를 짜르에게 보였는데,
그 문서는 어떤 한 위험한 음모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닐루스는 이 비밀을 알려줌으로써
왕이 감사해 할 줄로 기대하였지만, 그러나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짜르는 이 문서가 사악한
허구라고 선언, 그것의 사본들을 모두 폐기해 버리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닐루스는 궁중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물론 이 문서 – 그것의 사본인지도 모르지만 – 는 없어지지 않았다. 1903년 그것이 한 신문에
기고되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1905년에는 유명한 신비주의적
철학자 블라디미르 솔로비프의 한 저서의 부록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이때부터 그것은 관심을
끌기 시작하여 이후로 20세기에 가장 유명한 문서 중의 하나가 되었다.
문제의 문서는 하나의 팜플렛, 조금 정확히 말하면 사회. 정치적 프로그램이었다. 이것은 조금
씩 서로 다른 제목들로 알려져 왔는데, 가장 일반적인 제목은 ‘시온 장로들의 선언문’이다.
이 선언문은 어떤 유대인들 가운데서 나왔다고 전해졌다. 당시의 많은 반유대주의자들에게
이것은 [국제적인 유대인들의 음모]가 있다는 믿을 만한 증거가 되었다. 예를 들며 1919년에는
이 선언문들이 러시아 백군들에게 배포되었는데, 다음 두 해 동안 약 6만명의 유태인들이
1917년 혁명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백군에 의해 학살당하였다. 뒤에 독일에서 제일 가는
종족이론가요 국가사회당의 선동가였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도 1919년경 이 선언문을 유포
시키고 있었다. 히틀러도 <나의 투쟁> 가운데서 이 선언문으로 자기의 광신적인 편견의 불에
부채질하고 있으며, 그 선언문이 사실임을 의심의 여지없이 믿었다고 한다.
영국에서도 <모닝 포스트>지가 그 선언문에 재빨리 신임장을 주었으며, <더 포스트>지까지도
1921년 그것을 중요하게 문제삼았다가 후일에야 잘못을 인정한 일도 있었다. 오늘날 학자들은
– 우리도 그들이 옳다고 결론짓는데 – 그 선언문이 – 적어도 오늘날 남아 있는 것만큼은 –
사악한 의도로 만들어진 위조문서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아직도 라틴 아메리카나
스페인, 또는 영국에서조차 그 선언문이 반유대주의의 선전물로 유포되고 있다.
그 선언문의 요지는 완전한 세계지배에 대한 청사진이다. 처음 읽으면 그것은 스스로 대군주가
되어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몇몇 사람들이 마키아벨리식 계획안 – 말하자면 사무실
사이에서 쓰는 메모의 한 종류 – 처럼 보일 것이다. 내용은 혼란과 무정부상태를 야기시키고
현존 지배체제를 무너뜨리며 프리메이슨단과 다른 조직들을 침투시키려는, 많은 촉수와 히드라
머리를 가진 음모를 꾸며 궁극적으로 서구의 사회. 정치. 경제적 기구들을 완전히 장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언문의 익명 저자들은 그들이 많은 세기 동안 사람들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정치적 계획에 따라 모든 민족들에게 [배역을 정해 놓았다]고 선언하였다.
지금 읽어보면 그 선언문은 스펙터(SPECTRE)같은 어떤 가공단체가 만들어 낸 것 같다. 스펙터
는 얀 플레밍의 소설에서 제임스 본드당의 적이다. 그러나 처음 나왔을 때에는 그것이 1897년
바즐에서 회동했던 국제유태인회의에서 작성된 것으로 믿어졌었다. 이러한 추정이 잘못된 것이
었음은 이미 오래 전에 밝혀졌다. 한 예로 최초의 선언문 사본들은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1897년 바즐 회의에서는 단 한 사람의 프랑스 대표도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선언문의 사본 하나가 이미 1884년에 유포되었었다고 알려졌는데, 이것은 정확히 바즐 회의가
소집되기 13년 전이었다
1884년의 사본은 한 프리메이슨 지회 멤버의 한 사람의 가지고 있었으며, 그 지회란 파푸스가
속해 있었고 후일에는 그 곳의 단장이 되었던 바로 그 지회이다. 더군다나 바로 이 지회에서
오르무스의 전설이 최초로 나왔었다. 오르무스는 이교와 기독교 전설을 융합시켜 장미십자단을
창설한 전설적인 한 이집트의 현인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출판된 형태의 그 선언문이 적어도 일부만큼은 1864년 제네바에서 저술.
출판된 한 풍자적 서적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밝혀 냈다. 그 서적은 모리스 졸리라는 사람이
나폴레옹 3세를 공격하기 위해 쓴 책인데, 그는 그 후 투옥되었다. 졸리는 장미십자단의 한
멤버였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는 빅토르 위고의 친구였으며, 졸리와 같이
나폴레옹 3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위고도 장미십자단의 단원이었었다.
이렇게 ‘선언문’이 1897년 바즐의 유대인회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증명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의문점은 그렇다면 그것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
날 학자들은 그것을, 유다이즘을 공격하려는 반유대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완전한 위조문서로
치부해 버린다. 하지만 선언문 자체가 그와 같은 결론을 강력히 부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거기에는 분명히 유대적이 아닌 이상한 말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너무나 분명하게
유대적 요소를 결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위조가가 지어 낸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조금만 영리한 반유대주의자라면 유대이즘을 공격하기 위해 그러한 말들을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아무도 이것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나왔다고는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선언문은 [33번째 계급의 시온 대표들이 서명하다]라는 말로써 끝을 맺고 있다.
반유대주의 위조가라면 무엇 때문에 이 말을 집어 넣었을까? 왜 ‘모든 유대인’이라고 하지
않고 ‘33번째 계급의 시온 대표들’에 속하는 몇 사람의 유대인들만이 서명했다고 했을까?
‘33번째 계급의 시온 대표들’은 절대 유대이즘이거나 어떤 ‘유대인들의 국제적 음모’를 암시
하는 것으로 보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있다면 그것은 아마 특별히 프리메이슨단에 관련된
어떤 것을 암시하는 듯이 보여졌을 것이다. 프리메이스단에서의 33번째 계급이라면 소위
말하는 ‘충성단(Strict Observance)’ – 훈트가 ‘알지 못하는 상관들’의 명령으로 창설한 프리메이
슨단의 한 체제, 찰즈 래드클리프가 그 ‘알지 못하는 상관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다 – 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선언문 가운데는 더욱 이상한 것들이 있다. 한 예로 ‘프리메이슨 왕국’과 이 왕국을
다스릴 ‘시온혈통의 왕’이 곧 나올 것이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미래
의 왕은 [다윗 왕조의 뿌리에서 나올 것]이며, [유대인의 왕이 진정한 교황이요 세계 교회의
대주교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선언문은 [다윗의 씨에서 나온 사람들이 왕과 그 후계
자들을 예비할 것이며……. 오직 그 왕과 그를 보좌하는 세 사람만이 미래에 올 것을 알 것이
다]는 의미심장한 투로 끝을 맺고 있다.
사실이든 또는 만들어 낸 말이든간에 이러한 말들을 어떤 유대적 사고의 표현으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성서시대 이후로 유대적 전통에서는 왕이라는 것이 없다.
왕위의 원칙 자체가 전혀 타당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오늘날뿐 아니라 1897년에도 유대인들에
게 왕이라는 개념은 전혀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문서를 위조한 사람이 이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사실 위에 인용된 말은 유대적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이다. 왜냐하면 지난 2천년 동안
[유대인들의 유일한 왕]은 예수 자신이었고,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가 [다윗왕의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문서를 위조한 사람이 이것을 유대인들의 음모로 돌리고자 했다면 왜 그와
같이 분명히 기독교적인 요소를 집어 넣었겠는가? 왜 ‘교황’ 따위의 오직 기독교적인 개념을
사용했을까?
왜 ‘세계유대인회당’이나 ‘세계성전’이라는 말 대신에 ‘세계교회’라는 말을 썼는가? 그리고
왜 [왕과 그를 보좌하는 세 사람]같은 이상한 비유를 사용했을까? 그것은 유대이즘이나 기독교
보다는 요한 발렌틴 안드레아와(샤를르 노디에)의 비밀결사체들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만약
이 선언문이 한 선동가의 반유대주의적 허구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가 그렇게 우둔하고 무지
했었다고 믿기가 무척 어렵다.
오랫동안의 조직적인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시온 장로들의 선언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1) 원래의 진짜 사본이 있었고, 출판되어 나온 선언문은 여기에 기초하여 개역한 것이다.
원래의 사본은 위조문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유대이즘이나 [유대인들의 국제적 음모]와
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원본은 어떤 프리메이슨 조직이나 또는 ‘시온’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는 프리메이슨단 비슷한 비밀단체에서 나왔다.
2) 출판된 선언문이 기초하고 있는 원래의 사본은 꼭 도전적이고 호전적인 낱말들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을 빼앗고 프리메이슨단을 침투시키며 사회, 정치. 경제기구들을
장악하기 위한 계획안은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계획안은 르네상스시대의 비밀단체들이
나 ‘성체회’, 그리고 안드레아와 노디에의 단체들과 조화를 이루는 – 즉 그러한 단체들이 했을
법한 – 것이었으리라.
3) 개역 출판된 선언문을 기초한 원래의 사본이 세르게이 닐루스의 손에 넘어갔었다. 닐루스는
처음부터 그것으로 유대이즘을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왕궁내의 신비단체 – 파푸스와
필립 그리고 문제의 비밀단체에 속했던 사람들로 이루어진 모임 – 를 공격할 목적으로 그것을
짜르에게 가져갔었다. 그런데 먼저 그는 낱말들을 바꿔 원래의 것보다 훨씬 악의에 차고 도전
적인 것으로 해 놓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짜르가 그를 힐책하자, 그는 자기가 고쳐 놓은 그
선언문을 누설. 출판되도록 했다. 그것이 파푸스와 필립을 해하려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달성
하지는 못했지만, 부차적인 목적 – 반유대주의의 고양 – 에는 아직 소용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닐루스의 가장 주요한 목표는 파푸스와 필립이었지만, 그는 동시에 유대이즘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4) 그렇기 때문에 개역 출판된 선언문이 완전히 지어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원본을 과격하게
고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고쳤음에도 불구하고 원본에 있었던 몇 개의 말들은 – 예컨대
양피지에 쓴 글씨(먼저 쓴 글씨를 지우고 그 위에 또 쓰기 때문에 먼저 쓴 글씨의 흔적이 남는
다)나 또는 성경에서처럼 – 구별해 낼 수가 있다. 왕이라든지 교황, 세계교회, 시온 따위의
이러한 말들이 닐루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들이 그가 지어낸 말은 절대
아니다. 이미 원본에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그것을 없애야 할 이유 – 그는 무식한 사람이었다
– 를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말들이 유대이즘에는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비밀단체
에는 아주 잘 맞는 말이다. 후일 우리가 안 바로는, 그러한 말들이 시온수도회에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는 것이다.
발도르의 성 제롬수도회
우리가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동안에 새로운 소수도원 문서가 계속 나타나고 있었다.
그 중 어떤 것 – ‘비밀문서’같이 한정판으로 개인이 출판한 것들 – 은 프랑스 정부에 있었던
동료들이나 국립 도서관을 통해서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 중에 19세기 후반, 특히 베랑제르 소니에르에 대한 또 다른 정보가 있었다.
그러한 ‘최근의’ 설명에 의하면, 소니에르가 그의 교회에서 그 중요한 양피지 두루마리 문서들
을 찾아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렌느 르 샤토로 그를 방문한 ‘시온수도
회’의 밀사가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어 그것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소니에르는 1916년 말 그 시온수도회의 밀사를 파면하고 그와 다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1917년 1월의 그 신부의 죽음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의미심장하
다. 죽기 열흘 전의 그의 건강상태는 여유만족스러운 것이었는데도 그의 관이 주문되었다.
1917년 1월 12일 소니에르의 절친한 친구이자 집지기였던 마리 드나르노가 그 관을 수령했다.
더욱 최근의 한 믿을 만한 소수도원 문서에는 소니에르의 이야기가 더 나와 있는데, 이것은
적어도 위에 요약된 내용이 사살이라는 점을 입증해 주는 것 같다. 여기에 의하면 소니에르는
앞잡이에 불과하며 렌느 르 샤토의 수수께끼 속에서의 그의 역할도 크게 과장된 것이라고
한다. 그 산골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제 배후인물은 소니에르의 친구요, 근처 렌느 레 뱅
지방의 신부였던 앙리 부데 신부라는 것이다.
‘부데’는 1887년에서 1915년까지 총 1300만 프랑의 돈을 소니에르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여러 가지 공공사업이나 베타니아 별장, 막달라탑을 세우는 일을 소니에르가 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렌느 르 샤토에 교회를 재건하는 일을 감독하고, 자기의 신비로운 책의 구체적
모형으로서 소니에르의 복잡한 ‘십자가의 장소’를 고안하였다고 한다.
이 최근의 소수도원 문서에 의하면, 소니에르는 자기가 고용인으로서 수행해 나갔던 그 비밀
을, 임종을 앞둔 부데가 1915년 3월 그에게 말해줄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소니에르의 집지기였던 마리 드나르노도 사실을 부데의 요원이었다고 한다. 부데는 그 여자를
통해 소니에르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또한 모든 돈이 그녀를 통하여
소니에르에게 지불 되었었다. 모든 돈이 아니라 대부분의 돈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데는
1885년에서 1901년까지 카르카손느의 사제 – 자기 비용으로 소니에르에게 양피지 문서를
들고 파리고 가게 했던 사람 – 에게 7,655,250프랑을 주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사제도 부데의 고용인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한 중요한 지방
의 사제가 보잘 것 없는 교구 신부의 돈을 받는 하수인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교구
신부가 실제 막후 인물이었을까? 부데는 누구를 위해 일하였으며, 어떤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었는가? 무엇이 그에게 교회 상관들을 고용하고 그들이 비밀을 지키도록 할 수 있는 권력을
주었을까? 그렇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거대한 재정적 자원을 그에게 제공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는가? 분명한 해답은 없다. 그러나 항상 암시되어 있기는 하다. 그것은 시온수도회인
것이다.
또 다른 저서 하나가 이 문제를 좀 더 조명해 주고 있는데, 그전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저서
도 ‘극비’자료들을 사용했던 것 같다. 문제의 저서는 쟝 뤼크 쇼메유가 1979년에 출판한 <삼각
황금의 보물>이다. 쇼메유에 따르면 렌느 르 샤토의 수수께끼에 관련된 많은 승려들 – 소니에
르, 부데, 그리고 오페, 생 쉴피스의 오페의 숙부, 카르카손느의 사제도 거기에 관련되어 있었
을 것이다 – 이 한 스코틀란드파 프리메이슨단과 연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쇼메유는 말하기를, 이 프리메이슨단은 다른 파들과는 달라서 기독교적이고 폐쇄적이며 귀족적
이라고 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여기에서는 다른 프리메이슨단처럼 자유분방한 사상가나 무신론
자들이 주요 멤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매우 종교적이면서 신비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었던 듯하여, 신성한 사회. 정치적 권력체계나 신의 질서, 우주적인 세계관 같은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쇼메유에 의하면 이 프리메이슨단의 높은 계급이 시온수도회의 낮은
계급에 있었던 인물들이었다고 한다.
우리의 연구중에서도 이미 쇼메유가 기술하고 있는 유의 프리메이슨단이 나왔었다. 쇼메유가
기술하고 있는 것은 찰즈 래드클리프와 그의 동료들이 세웠던 스코틀란드파에 바로 적용될 수
가 있다. 래드클리프의 프리메이슨단이나 쇼메유가 말하는 프리메이슨단은, 비록 교황으로부터
는 비난을 받았지만, 18세기의 ‘제임스 2세파’나 19세기 프랑스 신부들 같은 경건한 가톨릭
교도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교황은 이 두 개를 다 적극 반대했다. 하지만 그 단원들
은 자기들이 기독교도요 가톨릭교도라고 주장했다. 또한 어떤 자료를 보면 그들은 중요한 신비
적 신앙을 체험했던 듯하며, 그럼으로써 자신들이 교황보다 더욱 참된 기독교도들이라고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좀 애매하고 산만하기는 하지만 쇼메유는 부데와 소니에르가 속해 있던 프리메이슨단이 1914
년 이전에 다른 한 비밀단체에 융합되었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만약 그의 추측대로
이 단체의 실제 배후 세력이 시온수도회라면, 이 단체가 ‘시온 장로들의 선언’속에 나오는 한
왕조에 관한 이상한 말들을 설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의 단체는 ‘발도르의 성 제롬수도회’라 불렀다. 이것은 지금까지 자주 나왔던 ‘오르발’이라
는 지명의 읍을 변형시킨 것 같다. ‘발도르의 성 제롬수도회’는 1873년경에 조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비밀정치단체의 일종이다. 이 단체는 당시의 여러 신비주의 단체들과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신성한 지세와 여러 성역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었으며,
신비한 사건의 기저에 있는 신비한 진리가 존재함을 주장했다.
또한 접신학에서와 비슷하게 인간과 종족, 언어. 상징 등의 기원을 따지는 것을 중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여러 비밀단체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적이면서 동시에 ‘유사기독교적’
이었다. 예를 들면 성심제(Sacred Heart)를 중시하면서도 그것을 기독교시대 이전의 어떤 상징
들과 연결시켜 생각하였다. 오르무스의 전설처럼. 기독교의 전설과 이교의 전설들을 융합했다.
또한 드루이드적 사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많은 오늘날의 학자들처럼 이것이 어느
정도는 피타고라스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소니에르의 친구, 앙리 부데
신부의 저술 중에 나와 있다.
연구의 목적을 위해서 ‘발도르의 성 제롬수도회’가, 쇼메유가 말하는 신비한 지리 정치학 또는
군주 세계 질서라는 것과 들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해 보았다. 조금 구체적을 말하면 이 수도회
가 세기에 새로운 신성로마제국을 세우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흥 재건
된 신성로마제국으로서 모든 민족을 통일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 정치. 경제적 기초가 아닌
영적 기초에 근거하는 세속국가이다. 비록 그 말들이 지금까지의 전통적 의미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 새로운 신성로마제국은 전과는 달리 진정으로
‘신성’하고 ‘로마적’이며 ‘제국적’일 것이라고 한다. 이 나라가 지구에 ‘천국’을 세운다는 역사의
꿈을 실현시켜 줄 것이며, 그것은 이 우주의 질서. 조화. 구조의 구체적 복제, 또는 반영이 될
것이다. 또한 [위와 마찬가지로 아래도]라는 옛 연금술의 명제를 실현해 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전혀 유토피아적이거나 소박한 공상이 아니며, 오히려 19세기 유럽의 정세로
보아 최소한 실현 가능성이 조금은 있다는 것이다.
쇼메유에 의하면 ‘발도르의 성 제롬수도회’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그 안에서는 각 나라들이 더 이상 한 지방이 아니며, 그 지배자들은 엘리트 한 사람이 다스리
는 신성한 세계정부에 봉사하는 총독에 불과하게 될, 신정국가를 세운다. 유럽에 있어 이 왕조
의 위대한 왕은 교권과 제권, 바티칸과 ‘합스부트크’가의 헤게모니를 둘 다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때 ‘합스부르크’ 가는 바티칸의 오른팔이 될 것이다.
19세기에 있어 합스부르크 가는 로렌느 가와 같다. ‘위대한 왕’이 들어서는 것은 노스트라다무
스 예언의 성취가 될 것이다. 또한 이것으로 ‘시온 장로들의 선언문’에 나타난 왕당파들의 청사
진이, 최소한 어떤 의미에서는 실현될 것이다. 동시에 이렇게 거대한 구상이 실현된다면 현존
하는 제도에 많은 변화가 야기될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면 바티칸은 당시 로마에 있던 바티칸
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며, 합스부르크 가는 국가의 제왕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즉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실질적인 제사장 왕조가 될 것이다. 또는 초대 기독교 시절 유대
인들이 고대하였던 메시아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쇼메유는 합스부르크가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이 야심적인 비밀 계획에 적극적으로 개입되었
는가 하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을 암시해 주는 듯한 증거들은
많이 있다. 한 예로 합스부르크 가의 대공작 한 사람이 렌느 르 샤토를 방문했던 것 등이다.
하지만 어떤 계획들이 진행되고 있었든간에 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합스부르크가가 권좌에서 쫒겨나 버렸다.
쇼메유가 설명한 대로, 우리가 살펴 본 내용을 볼 때 ‘발도르의 성 제로수도회’ – 또는 시온
수도회 – 의 목적들에는 어떤 논리가 있다. 그것들은 ‘시온 장로들의 선언문’을 새롭게 조명해
준다. 또한 그것들은 다른 비밀단체들 – 찰즈 래드클리프와 샤를르 노디에의 단체들을 포함
하여 – 의 목적들과 일치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수세기에 걸쳐 로렌느가에
계속되어온 정치적 야심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발도르의 성 제롬수도회’의 목적들이 논리를 가지고 있다해도 실제적인 정치적 타당성
은 없다. 우리가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어떤 근거로 합스부르크가가 제사장 왕조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압도적인 대중적 지지가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프랑스 공화국 – 당시 러시아와 독일 영국을 다스리던 왕조는 말할 것도 없고 – 에
대하여 그와 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대중적 지지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겠는가?
19세기의 정치적 상황으로 볼 때 그와 같은 계획은, 비록 일관된 논리는 있다 할지라도, 사실
상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발도르의 성 제롬수도회’를 잘못 해석했을 것이라고
결론은 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그 단원들이 멍청한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의 자료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는 이 문제를 덮어 놓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 우리는
관심을 현재로 돌려, 시온수도회가 현재도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고자 하였는데
우리는 그것이 지금도 있다는 것을 금새 알아냈다. 그 단원들은 멍청한 사람들이 아니며, 전후
20세기에 19세기 ‘발도르의 성 제로수도회’가 추구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비슷한 계획을 추진
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비밀단체
프랑스의 <관보(Journal Officiel)>는 정부의 주간 출판물로서, 프랑스에 있는 모든 그룹과
단체와 조직체는 이곳에서 신분을 밝혀야만 한다. 1956년 7월 20일자 <관보>? 167호에
다음과 같은 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1956년 6뤓 25일. ‘시온수도회’는 생 쥘리앙 앙 제느보아(Saint-Julien en Genevois)의 경찰서장
대리에게 신고함. 목적 : 연구 및 회원상호간의 협조, 주요 사무소 위치 : 수 카상 안느마스,
오트 사보아.
‘시온수도회’는 공식적으로 경찰 당국에 등록되었다. 어쨌든 여기에서 이 수도회가 우리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를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비밀단체인 그것이 이 같은 모습
을 드러내었다는 사실에서 다소 기이함을 발견하게 되긴 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결국
그다지 기이하지는 않으리라. 프랑스의 어떤 전화번호부에서도 시온수도회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주소는 너무 모호하여 특정 사무소, 거주지, 건물 또는 거리까지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경찰서장 대리 역시 그 곳을 찾은 데에 거의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경찰당국은 그곳을 찾다가 지친 수많은 문의자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당국은 더 이상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 줄 수 없었다. 그들이 아는 한, 주소는 추적해 볼 길이 없었다. 그 밖의
아무런 사실도 알 수 없다면, 우리는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특정 인물
들이 실재하지도 않는 가공의 주소를 갖고서 어떻게 용케도 경찰에 등록을 했는지가 가장
의문스러웠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명백하게도 차후의 모든 결과와 사태의 처리를 어떻게 피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경찰은 생각되는 바와 같이 실제로 그렇게 태평스럽고 무관심했던
것인가? 아니면 시온수도회는 어떻게든지 하여 경찰의 협력과 신임을 구하려고 했던 것일까?
우리들의 요청으로 경찰서장 대리는 시온수도회의 규칙이 씌어 있는 문서의 사본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21조항으로 이루어진 이 문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거나, 특별히 설명적이지도
않았다. 그 일례로써 이 문서는 시온수도회의 목적을 명확히 밝혀주지 못했다. 또한 시온수도
회의 영향이나 회원 자격, 그리고 재원에 관해서 암시하는 바가 없었다. 대체로 그것의 내용은
꽤 온건하였고, 동시에 우리들의 혼란을 더욱 증가시켰다. 예를 들면, 한 조항에, 입단자격은
언어나 출신 사회, 계급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제한받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었
다. 또 하나의 조항에서는, 21세 이상의 모든 가톨릭 교도는 후보 자격이 있음을 명기했다.
실제로 그 규칙들은 일반적으로 경건하고 열렬하기까지 한 가톨릭 제도에서 유래한 것같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온수도회의 단장들과 과거 역사는 우리들이 추적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정통가톨릭교임을 거의 입증해 주지 못했다. 그 문제에 있어서 대부분이 규약안으로서
동시에 출판된 오늘날의 소수도원 문서들까지도 방향에 있어서 가톨릭적이기보다는 신비적이
고 심지어 이단인 영지주의에 가까웠다. 그러나 시온수도회가 성당기사단과 성체회와 같이
가톨릭교 신앙을 필요 조건으로써 공개적으로 요구하지 않는 한, 그러한 모순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 듯했고, 당시 그것은 시온수도회 내에서 문제시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시온수도회는
성당기사단과 성체회와 마찬가지로 복종을 분명히 요구했는데, 그것은 그 절대적인 성격상
세속적이거나 영적인 그 밖의 모든 헌신을 포함한 것이었다. 규약한 제 7조에 의하면, [후보자
는 높은 윤리감을 지닌 사도의 직분에 헌신적으로 충성하기 위해서 자신의 개성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되어 있다.
더 나아가 그 규약안은 시온수도회가 [가톨릭의 규칙과 제도를 따르고, 독자적이며, 전통을
따르는 기사단]이라는 별칭 아래서 활동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별칭은, 규약안에 의할 때
시온수도회가 대내적으로 간행하여 그곳에 속한 회원들에게 배부하는 잡지의 명칭과 같은
[시르꾸(CIRCUIT)]로 축약된다.
그 곳의 규칙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정보는 아마도 시온수도회가 1956년 이래로 회원수를
거의 다섯 배까지 확장시켜 왔다는 점일 것이다. 1956년 이전에 인쇄된 소수도원 문서에
의하면, 시온수도회는 일곱 등급에 걸쳐서 총회원수 1.093명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구조는
전통적으로 피라미드식이었다. 최고 계층의 인물이 단장, 다른 말로 노토니에(Nautonnier)였다.
단장 아래 등급에 세 사람이 있었고-그들은 ‘노아쉬트 드 노트르담 왕자’라고 불리었다 - 그
다음 등급에 아홉 사람이 있었다- 생 쟝의 십자군이라 불리었다-여기서부터 가가 등급의 인원
은 아래로 내려 갈수록 앞의 계층의 인원의 3배씩 늘어났다. 즉 각기 28, 81, 243,729명씩이
었다. 가장 높은 세 등급-단장과 그의 직속 부하 12명-은 13인의 ‘장미십자단’을 구성했다고
한다. 물론 ‘13’이라는 수는 사단의 집회에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엔가
일치하는 것이리라.
1956년 이후의 규약안에 의하면, 시온수도회는 전체 회원수 9,841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등급
역시 7종류가 아닌 9종류에 달하게 되었다. 구조가 명료해지고 새로이 생겨난 두 등급이 그
등급제도의 밑바닥에 삽입되었을지라도, 구조 자체는 여전히 본질적으로는 같았다. 두 등급이
새로 생겨남으로써 지도자의 위치는 초심자의 거대한 그물 조직 배후에서 한층 격리되게
되었다. 단장은 여전히 노토니에라는 칭호를 지녔다. 세 사람의 ‘노아쉬트 드 노트르담 왕자’들
은 간단히 ‘세네샬(Seneschal)’이라고 불리어졌다. 기이할 정도로 불가해한 용어로 씌어진
규약안에 나타난 바로 볼 때 시온수도회의 체제는 다음과 같다.
총회는 수도회의 모든 회원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729관구(province), 27기사령(commanderie)
및 ‘키리아(Kyria)’라고 표시되는 하나의 아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아아치와 마찬가지로 각 기사령은 40명의 회원을 지녀야 하고, 각 관구는 13명의 회원을
지녀야 한다.
회원들은 정비된 두 그룹으로 나뉜다.
1) 사도의 직분을 맡은 레지옹(Legion).
2) 전통의 수호자, 팔랑쥬(Phalange).
회원들은 9계층의 교계제를 구성한다. 9계층의 교계제는 아래와 같다.
1) 729관구에서
A. 초심자(Novices) 6,561명
B. 십자군 병사(Croises) 2,187명
2) 27기사령에서
A. 용사(Preux) 729명
B. 시종(Ecuyers) 243명
C. 기사(Chevaliers) 81명
D. 영주(Commandeurs) 27명
3) 아아치 ‘키리아’에서
A. 원수(Connetables) 9명
B. 집사(Senechaux) 3명
C. 단장(Nautonnier) 1명
분명히 공무상의 관료적인 그리고 법적인 목적을 위해서, 네 사람이 ‘평의회’를 구성하는
것으로 목록에 올라 있었다. 그 중 세 사람은 우리 귀에 익숙치 않았는데, 그들은 추측상
1934년 12월 7일 출생한 피에르 본옴(Pierre Bonhomme 가명;총장)과 1931년 3월 7일 출생한
쟝 들라발(Jean Delaval 가명;부총장)과 1928년 12월 11일 출생한 피에르 드파고(Pierre
Defagot 가명;회계국장)였다. 하지만 마지막 한 사람은 앞서 언급된 피에르 플랑타르이다
그는 1920년 3월 18일에 출생했고 서기장 직위에 있었다.
다른 저자의 연구에 의하면, 플랑타르의 공식적 칭호는, ‘문헌 조사국 서기장’이었다.
이 사실은 그밖에 다른 부서도 물론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알랭 포에르
1970년대초에 이르러 시온수도회는 어떤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조심성 있게 다루어지게 되는
유명한 주제로 부각되었다. 당시 그것을 다룬 수많은 잡지 논설과 몇몇의 신문기사가 있었다.
1973년 2월 13일가 <미디 리브르>지는 시온수도회와 소니에르회, 그리고 신비의 렌느 르
샤토에 관한 긴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는 특히 시온수도회를 메로빙가 혈통의 12세기에
서의 존속과 연결시켰다. 또한 메로빙가 후예 중에 한 사람의 [진정한 프랑스 왕위 계승 주장
자]-알랭 포에르-가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특별히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알랭 포에르는 프랑스의 한 가장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그는 항쟁 공로훈장과 무공훈장을 받았다. 드골이 사임한 이후
그는 1969년 4월 28일에서 6월 19일까지 프랑스 임시 대통령을 지냈으며 조르쥬 몽피두가
사망하자 1974년 4월 2일부터 5월 27일까지 같은 직위에 있었다. <미드 리브르>지에 그 기사
가 실린 해인 1973년 포에르는 프랑스 상원의 총재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포에르는 여하간 시온수도회나 메로빙가 혈통과 자신의 관련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수도원 문서의 계보에 보면, 894년과 896년 사이에 플랑타르
가와 혼인관계를 맺은 포에르의 백작, 아르노드(Arnaud)에 관한 언급이 있다. 플랑타르 가는
추정상 다고베르 2세의 직계 후손들이다. 아르노드 드 포에르의 손자, 알랭이란 인물은 937년
에 브리타뉴의 공작이 되었다. 오늘날의 알랭 포에르씨가 시온수도회를 인정하든지 하지 않든
지 간에, 위와 같은 사실로서 시온수도회가 그를 인정하고 있음은 명확한 것 같다. 즉 그를
최소한 메로빙 가의 후예로 인정하는 것이다.
실종된 왕
한편 우리의 연구가 진행 중이고 프랑스 매스콤들이 그 전체 사건에 대하여 자주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무렵에도 새로운 소수도원 문서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책의
형태로, 어떤 것은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개인출판 팜플렛이나 기사형태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수수께끼를 더 어렵게 해줄 뿐이었다. 분명 어떤 사람이 이러한 자료들을 내놓고 있었
는데, 그들이 의도하는 바가 불분명하였다. 가끔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교묘하게 조작된
하나의 농담, 기발한 장난질로 치부해 버릴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에 걸쳐 계속해 온 장난 아닌 장난질인 것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 돈이 들어간 장난을 정말 장난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소수도원
문서의 내적 얽힘이나 전반적인 조직은 농담이 아닌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거기에는 천재성과
재치, 교묘함, 역사지식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에 버금가는 구성력 등이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핀네간스 웨이크’-소수도원 문서 중의 하나-가 하나의 우스운 이야기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그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요한 것은 소수도원 문서가 옛날의 ‘밴드차’-뒤에 가서 이익이 많은 사업이 되어 많은 이익
과 그에 따른 산출물을 창출해 내는 장사 잘되는 사업-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을
버뮤다 삼각지대에 대한 잡동사니 이야기인 폰 대니켄의 소설 <신들의 마차>, 또는 카를로스
카스테네다의 책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소수도원 문서 배후의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돈을 벌자는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였다. 만약
돈이 요인이라고 해도 그것은 사소한 것에 불과한 것 같다. 책으로 만들면 아주 이익이 많이
남는다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소수도원 문서는 아직 책으로 출판되지 않았다. 상업적 잠재성
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은 아직 개인들이 사사로이 인쇄해 내고 있을 뿐이며, 판수도 한정
되어 있고 국립도서관에 몇 부가 기증될 뿐인데, 거기서도 항상 이용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또한 전통적인 책의 형태로 나온다고 해도 그 속에 이것저것 아무 정보나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독립된 연구자들의 저술이 아니었으며, 어떤 한 근원에서 나온
것 같았다. 대부분은 매우 특별한 제보자들의 증언에 근거하고 있는데, 그들은 마치 잠적기를
가지고 하는 것처럼, 또한 어떤 사전에 준비된 계획에 따라 새로운 정보의 정확한 양을 측정해
내는 것이었다.
모든 새로운 정보는 최소한 전체 수수께끼의 하나를 풀어주면서 동시에 하나를 덧붙이는 것이
었다. 이러한 정보들 중 많은 부분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여러 작자가 있어 각자 서로의 말을 확인하고 거기에 신빙성을 부여해 주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한 일을 하는 데에 대한 그럴 듯한 동기가 딱 하나 우리에게 떠올랐다. 그것은 어떤 특정
한 문제로 일반의 관심을 끌어 모아 신뢰감을 획득하고 흥미를 유발시키며 숨을 죽이고
다음에 밝혀질 것을 초조하게 기다리게 하는 심리적 분위기를 조성해 보자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소수도원 문서는 어떤 놀라운 발표의 [길을 예비하도록] 특별히 계산된 것이라는
점이다. 발표되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이든간에 이것은 [저항력을 약화시키는]-사람들을 준비
시키는-긴 과정을 분명 지배하고 있었다. 또한 무엇이 궁극적으로 발표되어지든 거기에는 어쨌
든 메로빙 왕조와 그 가계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는 것, 그리고 비밀의 왕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시온수도회의 한 단원이 썼다고 하는 어떤 잡지의 기사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보았다. [메로빙 가문 없이 시온수도회는 존재하지 않으며, 시온수도회가 없다면
메로빙 왕조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다음의 구체적 설명은 시온수도회와 메로빙 가문간의
관계를 어느 정도 설명해 주면서도 어떤 점에서는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왕은 동시에 목자와 목사도 된다. 가끔 그는 훌륭한 사자를 그의 신하로 파견하여 권력을 주게
하고 그의 일꾼을 삼으며, 죽임을 당하는 큰 복을 누리게 한다. 그래서 르네 당주와 부르봉의
원수, 니콜라 푸케 등 수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업적을 이룬 후에 알 수 없는 치욕을 맛보았다.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높여 주거나 아니면 죽여 버려야 한다. 그래서 질르 드레, 레오나
르도 다빈치, 요셉 발사모, 네베르와 공자그의 공작들 같은 사람들이 등장할 때, 동시에 유황과
향을 섞은 마법의 향수-막달린(Magdalene)의 향수-가 수반되었던 것이다.
쟌느 다르크가 시농 왕성의 대실로 들어올 때 왕 샤를르 7세가 신하들 사이에 몸을 숨긴 것은
천한 장난을 해 보자는 것이 아니라-거기에 무슨 유우머가 있었겠는가?-그는 이미 쟌느 다르크
를 사신으로 보낸 사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우기 그는 그 앞에서 다른 신하들보다
더욱 겁에 질려 있었다. 그 여자가 그에게 은밀히 가르쳐 준 비밀은 다음 말 속에 들어 있었
다. [폐하, 그 왕의 명령으로 왔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도전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하다. 첫째는 그 왕 -아마 메로빙 가의 혈통을
가졌을 그 [실종된 왕]- 이 아직도, 그의 신분에 의해 계속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더욱 놀라운 것은 세속 주권자들이 그의 존재를 알고 그를 공경하며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세번째로는 시온수도회의 단장 또는 다른 단원이 그 [실종된 왕]과 그의 대리자들 사이
에서 사신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신들은 죽어야만 하는 것으로 간주
되었던 것 같다.
파리 국립도서관의 이상한 팜플렛들
1966년 레오 쉬들로프의 죽음을 둘러싸고 이상한 편지들이 오고갔다. 레오 쉬들로프는 당시
앙리 로비노라는 익명으로 소수도원 문서 속의 족보들을 작성했었다고 전해지는 사람이다.
<제네바 가톨릭 주보>에 나타난 첫번째 편지의 날짜는 1966년 10월 22일자로 되어 있다.
거기에는 리오넬 부루스라는 사람의 사인이 있는데, 그는 자기가 ‘스위스 기독청년회’를 대표
하여 말한다고 하였다. 부루스는 레오 쉬들로프-또는 앙리 로비노-는 비엔나에서 지난 주 10월
17일 사망했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최근의 한 로마 가톨릭교 회보에 기고되었다고 하는 야비한
공격으로부터 죽은 사람을 변호하고 있다. 부루스 씨는 이러한 공격에 분노를 표시하였다.
쉬들로프를 변호하면서 그는 쉬들로프가 로비노라는 익명으로 1956년 메로빙 왕들의 족보와
렌느 르 샤토의 사건에 대한 훌륭한 연구를 했다고 말했다.
부루스는 주장하기를 로마 가톨릭교는 이미 쉬들로프와 그의 활동을 매우 싫어하고 있었으면
서도 그가 생존해 있을 때는 감히 공격하지 못했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지금도
메로빙 가의 관심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주장을 입증하는 데 그는 좀 엉터리 같은 말들
을 하였다. 1966년 프랑스의 한 주요한 가솔린엔진 회사인 ‘앙타르’사의 문장을 예로 들면서,
이것은 메로빙 가문의 문장이고 비유적이긴 하지만 한 메로빙 가의 왕을 나타내 주고 있다고
말하였다. 또한 이 문장이 메로빙 가문의 프로파간다가 현재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며 여기에 덧붙여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프랑스 성직자라도 항상 바티칸
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레오 쉬들로프에 관해 부루스는 ‘프리메이슨단’이나
‘카타리파’의 생각과 같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위대한 항해사요 탐구가며 충성되고 선량한 사람이었던 앙리 로비노는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완벽한 스승’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그를 존경한다.
리오넬 부루스의 이 편지는 매우 이상한 데가 있으며 무척이나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더욱
흥미있는 것은 부루스가 인용하고 있는 그 로마 가톨릭교 회보의 쉬들로프에 대한 공격적
기사이다. 부루스에 의하면 이 회보는 쉬들로프가 [친소주의자요, 프랑스에 대중 왕조를 세우기
위해 열심히 길을 닦고 있는 악명높은 프리메이슨단원] 이라고 비난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이상하고 모순된 듯한 비난이다. 왜냐하면 소련은 왕조를 세우려는 노력에는 동정하지
않는다고 보통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루스가 인용한 그 회보는 더욱 알기 어려운
비난을 하고 있다.
메로빙 가의 후예들은 아리안주의로부터 가타리파와 성당기사단을 거쳐 프리메이슨단으로
이어져 내려온 모든 이단파들의 매혹에 있었다. 종교개혁 초기인 1659년 7월 추기경 마자랭은
12세기로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본거지 바르베리 성을 파괴해 버렸다.
왜냐하면 문제의 성과 가문은 언제나 로마교회에 대한 비밀 음모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부루스는 자기가 인용했다고 하는 로마 가톨릭교의 회보 이름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사실인지를 입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이것은 커다란
중요성을 갖게 된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교에서 흘러 나온 네베르 지방의 바르베리성의 파괴에
대한 독립적인 증언이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시온수도회의 존재 이유
를 암시해 주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시온수도회와 거기에 연결된 가문들이 전파에 오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러는 중에 로마교회와 계속 충돌했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위에
인용된 글을 보면 로마교회에 대한 반대가 우연히, 주변정세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일관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어떤 정책에 의한 것 같다는 점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또 다른 모순에 부딪쳤다. 왜냐하면 시온수도회의 규약안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한 견고한 가톨릭단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편지가 발표되고 얼마 안 있어 리오넬 부루스는 그 말고도 6명의 희생자가 난 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하지만 그가 죽기 바로 전, 그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그가 쓴 편지보다 더욱 이상야릇하고 도전적이었다. 이 답장은 루(S.Rowx)라는 사람에 의해
개인 인쇄 팜플렛의 형태로 출판되었다.
어떤 점에서 루의 글은 부루스로 하여금 편지를 쓰게 했던 쉬들로프에 대한 원래의 공격 기사
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부루스가 아직 어리고 지나치게 열중하며 무책임하고 너무
말을 많이 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부루스의 입장을 비난하면서도 루는 부루스가
말하는 사실들을 수긍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루는 레오 쉬들로프가 스위스 ‘알피나단’ - 프리메이슨단 지회로서, 이 단체의 직인이 몇몇
소수도원 문서에 나타나 있다 - 의 고위 책임자라고 주장했다. 루에 의하면 쉬들로프는
[동구 공산 블록에 대한 자기의 호의적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루스가 로마교회에
대하여 한 발언에 대해 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로마교회가 라제 가의 가계를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
후손들이 다고베르 이후 프랑스 왕실과 로마교회에 대한 비밀 음모자들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모든 이단파들의 배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메로빙 가의 후손들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면 필연적 결과로써 프랑스에 소련과 동맹한 대중왕조가 선포되고 프리메이슨단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종교의 자유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이러한 말들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루의 다음 결론은 더욱 그렇다.
프랑스에서의 메로빙 가의 선전에 관한 것이라면, 백합과 원을 들고 있는 한 메로빙 왕이 새겨
져 있는 ‘앙타르’의 가솔린엔진이 ‘메로빙’ 가문의 권좌에의 복귀를 지지하는 대중적 호소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또한 비엔나에서 죽을 때 쯤, 독일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던 그날밤에
로비노가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오스트리아
에서 프랑스와의 상호동맹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닌가? 이것이 불소동맹의
기초가 아닌가?
루의 말이 무슨 뜻인가 하여 우리가 크게 당황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조금도 못된다. 부루스가
공격했던 그 회보기사처럼 루도 소련의 헤게모니와 대중왕조같이, 광범위하고 분명 서로 조화
되지 않는 정치목표들을 서로 연계시키고 있다. 또한 루는 부루스보다 한 발 앞서 한 가솔린
엔진 회사의 문장에 대해 [알려져 있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목적을 가진 프로파간다의 한 교묘
한 형태]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에서의 철저한 변화에 대해, 그것이
다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는 식으로 암시하였다. 또한 수수께끼
같은 ‘불소동맹’에 대하여 그것이 마치 일반에게 알려져 있는 사실인 듯이 이야기하였다.
처음 루의 팜플렛을 읽으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조금 자세
히 살펴본 결과 우리는 그것이 또 하나의 교묘한 ‘소수도원 문서’ - 놀랄 만한 어떤 일을 신비
화하고 혼란되게 하며 그에 대한 암시가 되도록 주도면밀하게 계산된 - 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어쨌든 그렇게 이상한 방법으로 루의 팜플렛은 문제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했다. 만약 루가 옳다면 우리의 연구주제는 신비로운 최근의 한 기사종교단의 활동에
만 한정되지 않는다. 만약 그가 옳다면 우리의 연구주제 속에는 고도의 국제정치적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가톨릭 전통주의자
1977년에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새로운 ‘소수도원 문서’가 나타났다. 이것은 쟝 들로드라
는 인물이 기록한 6페이지의 소책자 <율리시즈의 모임>이었다. 본문 속에서 필자는 분명히
‘시온수도회’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비록 그가 보다 훨씬 오래된 자료를 개작하고 있을지라도,
그는 그 수도회에 관해서 일부 새로운 세부 자료를 제공해 준다.
1177년 3월에 보두엥은 생 레오나르 다크르에서 시온수도회 지시 하에 성당수도회의 조직을
위해 협의하고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성당수도회는 1118년에 위그 드 파엥에 의해
설립되었다.
1118년부터 1188년까지 시온수도회와 성당수도회는 동일한 단장들의 지시 아래서 활동했다. 1188년에 두 단체가 분리된 이래로, 시온수도회는 오늘날까지 27명의 단장을 갖게 되었다.
가장 최근의 인물은 다음과 같다.
샤를르 노디에 1801년부터 1844년까지
빅토릐 위고 1844년부터 1885년까지
클로드 드뷔시 1885년부터 1918년까지
장 콕토 1918년부터 1963년까지
그리고 1963년부터 새로운 질서가 나타날 때까지 대수도원장은 뒤코 부르제이다.
시온수도회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나는 알지 못하나 그것은 다가올 시대에 바티칸에
대항할 만한 세력을 대표하고 있다. 몽시에르 르페브르는 가장 적극적이고 가공할 인물로서,
[네가 나를 교황으로 추대하면 나는 너를 왕으로 추대하리라]라고까지 말할 만한 사람이다.
이 인용문에는 두 가지 중요한 새로운 정보가 들어 있다. 하나는 이른바 대주교 마르셀 르페브
르가 시온수도회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몽시에르 르페브르는 -몽시에르는 경칭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극소수의 대표자이다. 그는 교황 파울루스 6세에 대하여 소란스러울
정도로 숨김없이 비난의 말을 퍼부었다. 그는 그 교황을 심하게 무시해 버렸다.
실제로 1976년과 1977년에 그는 파문당할 위험에 직면해 있음이 분명했고, 이 위험에 대한
그의 뻔뻔스런 무시는 전면적인 교회분열을 초래할 뻔했다. 그러나 그 방향에 있어서 완전히
이단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우리가 어떻게 몽시에를 르페브르 같은 호전적인 강경노선을 취하는
자를 신비에 싸인 그 ‘수도회’의 운동에 연관시킬 수 있었겠는가?
르페브르가 ‘발도르의 성 제롬수도회’를 연상케 하는 19세기의 [프리메이슨단]의 오늘날의 대표
자가 아닌 한, 이 모순은 해명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발도르 성 제롬수도회는 감히 스스로
교황보다도 한층 더 가톨릭적이라고 자체를 내세운 [기독교의 귀족적이며 신비한 프리메이슨
단]이었다.
위의 인용문에서 두번째의 중요한 사항은 물론 당시의 시온수도회의 단장을 대수도원장 뒤코
부르제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소아 뒤코 부르제는 1897년에 태어나 생 쉴피스 신학
교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에 그는 당시의 모더니스
트 여러 명과 교제를 가졌을 것이다. 그들 중에서 특히 에밀 오페를 생각할 수 있다. 그 후에
그는 말타의 최고 군단의 프란체스코회 기관사제를 지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활약한 일로
인해서 그는 항쟁 공로훈장과 무공훈장을 받았다. 오늘나라에 그는 유명한 문인 중 한 사람으
로 인정 받고 있다. 곧 그는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이고 , 폴 클로델과 프랑소아 모리악 같은
중요한 프랑스 가톨릭 작가들의 전기 저술자이며, 의당 높이 존경 받을 만한 시인이었다.
몽시에르 르페브르와 마찬가지로 대수도원장 뒤코 부르제는 교황 파울루스 6세에 대해 호전적
으로 반대하는 자세를 취했다. 또한 르페브르롸 마찬가지로 그는 트렌트 공의회가 정한 미사
형태를 지지했다. 그리고 역시 르페브르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이 ‘전통주의자’임을 선언하고
서, 교회 개혁이나 로마 가톨릭을 현대화 시키려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완강히 반대했다.
1976년 5월 22일에 그는 고해성사나 사면을 베푸는 것을 금지 당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역시 르페브르와 마찬가지로 상관들이 자신에게 과한 금령을 과감히 무시해 버렸다.
1977년 2월 27일에 그는 천 여명의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을 인솔하여 파리에 있는 생 미콜라
뒤샤르노의 교회를 차지했다.
만일 마르셀 르페브르와 프랑소아 뒤코 부르제가 신학적으로 우파에 속한다고 하면,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마르셀 르페브르는 악숑
프랑셰즈 -독일의 민족적사회주의 - 와 공동으로 모종의 태도를 취했던 당시의 프랑스 정계의
극좌파와 관계가 있었다.
최근에 이르러 그 [반역적인 대주교]는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권을 열렬히 인정함으로써 상당히
좋지 못한 평판을 듣게 되었다. 이 같은 입장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이 실수했었
노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아르헨티나가 아닌 칠레에 대해 그 같은 입장을 취했었다고
변명했다. 프랑소아 뒤코 부르제는 그렇게까지 극단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어쨌든 그가 받은
훈장은 전쟁기간 동안의 항 독일 애국적 활동을 입증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솔리
니에 대해서 높은 존경심을 표했고, 프랑스가 [새로운 나폴레옹의 지휘 아래서 가치관을 회복
하게 되기를] 바랬다.
우리가 먼저 의심을 품고서 다루었던 가정은, 마르셀 르페브르와 프랑소아 뒤코 부르제가 사실
상 시온수도회에 전혀 가입한 적이 없었고 이론상 그들이 격렬히 반대한 바로 그러한 세력에
누군가가 그들을 연결시킴으로써 그들을 고의적으로 당황케 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가 프랑스 경찰에서 얻었던 규약안에 의하면 시온수도회의 별칭은 [가톨릭의 규칙과 제도를
따르고, 독자적이며 전통을 따르는 기사단]이었다. 그 같은 명칭을 지난 단체가 마르셀 르페브
르와 프랑소아 뒤코 부르제 같은 인물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사실이리라.
두번째로 우리는 가능성 있는 해석을 해 보았다. 이것은 분명히 무리한 해석이기는 하나 적어
도 우리 앞에 놓은 모순점을 해결해 줄 것이다. 아마도 마르셀 르페브르와 프랑소아 뒤코 부르
제는 세상에 나타난 모습만을 지닌 인물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지닌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조직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불화의 씨를 뿌리며
파울루스의 교황으로서의 지위를 위협하는 분열을 조장할 목적의 밀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책략은 샤를르 노디에에 의해 기술된 비밀단체들의 활동 및 [시온장로들의 선언문]과
일치관계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최근의 해설자들 -저널리스트 및 교회의 권위자들
- 은 대주교 르페브르가 그 밖의 어떤 곳을 위해 일하고 그곳으로부터 조종받고 있다고 공언
했다.
우리의 가정이 비록 무리일지라도, 그것 아래에는 시종일관한 논리가 깔려 있다. 만일 교황
파울루스가 적으로 간주되고, 누군가 그를 보다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만들기를 바란다
면, 어떻게 그 일을 착수하겠는가? 자유주의적인 견지에서 여론을 조성함 만으로는 불가능
하다. 그것은 오히려 교황으로 하여금 보다 확고하게 그의 보수주의에 뿌리를 내리게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교황을 무너뜨리려는 사람이 교황의 것보다 더 열광적인 보수주의적 입장
을 공공연히 받아들인다면 어떠하겠는가? 이렇게 한다면 교황은 자신의 뜻이 반대임에도 불구
하고 점차 자유주의적인 입장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바로 이것이
대주교 르페브르와 그의 동료들이 성취해 낸 것임이 확실하다. 이것은 교황을 자유주의자로
몰아 세운 전례없는 책략이었다.
우리의 결론이 타당성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대주교 르페브르는 우리의 연구에 나타난 그 밖
의 수많은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다소 중대하고 급격한 비밀에 관계하고 있음이 명백한 듯했다.
예컨대 1976년에 있던 그의 파문은 절박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 보도기관은 그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는 반복되는 철면피 같은 도전에 직면한 교황으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최후의 순간에 그 파문을 철회했다. 왜 그가
그렇게 했는지는 아직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976년 8월 30일자 <가르디언>에서
인용한 다음의 기사는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영국에서 그 대주교를 지지하는 일단의 사제들은 …… 그들의 지도자가 여전히 바티칸과의
분쟁에서 사용할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다고 믿지만 아무도 그 무기의 성격에 관해서는 암시
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리의 지도자인 신부 피터 모르간은 그것을 [근본을 흔들어
버릴 만한] 어떤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어떤 종류의 [근본을 흔들어 버릴만한 비밀 무기]가 바티칸을 위협할 수 있었을까? 전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어떤 종류의 다모클레스의 검(Damoclean sword) -디오니시우스
왕이 연석에서 다모클레스의 머리 위에 머리카락 하나로 칼을 매달아. 왕위에 있는 자는 언제
나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가르친 고사- 이 교황의 머리 위에 달려 있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지 간에, 효력이 큰 것임은 확실하다. 그것은 실제로 그 대주교에게 로마의 형벌로부터의 면제
권을 확보해 준 것처럼 보였다. 쟝 들로드의 기록에 의하면, 마르셀 르페브르는 실제로 [바티칸
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을 대표하는 듯했고, 필요하면 정면 충돌도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누구에게 [네가 나를 교황으로 추대하면 나는 너를 왕으로 추대하리라]고 장담했
고 또는 할 것인가?
1981년 총회와 콕토의 규약안
최근 들어 프랑소아 뒤코 부르제를 둘러싼 몇 가지 의문들이 밝혀진 것 같다. 이것은 1980년
말고 이듬해 초 시온수도회가 프랑스에서 갑자기 일반에게 알려졌기 때문인데, 이것으로 시온
수도회는 가구의 이름처럼 익숙한 것이 되었다.
1980년 8월 <본느 소아레>라는 한 프랑스 대중잡지 -<브리티쉬선데이> 증보판과 미국 <T.V
가이드>의 중간쯤 되는 잡지- 에 렌느 르 샤토의 수수께끼와 시온수도회에 관한 특별기사가
게재되었다. 여기에서는 마르셀 르페브르와 프랑소아 뒤코 부르제가 명백히 시온수도회와 관련
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두 사람은 비교적 최근 들어 시온수도회의 성지인 네베르 지방의 생트
콜롱브를 특별히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곳은 1659년 마자랭 추기경에 의해 훼파될
때까지 바르베리성의 플랑타르 가의 본거지가 있었던 곳이다.
이 때 우리는 직접 귀코 브루제 신부와 전화를 하고 서신도 띄웠었다. 그는 무척 친절한 사람
이었다. 우리들의 질문을 회피하지는 않았지만 애매모호하게 대답하였으며, 예상했던 대로
자기가 시온수도회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였다. 조금 후에 <본느 소아레>지
에 보낸 편지에서도 그는 꼭 같이 부인하였다.
1981년 1월 22일 프랑스 신문에 한 조그마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는데, 인용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21명의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실존 비밀단체 시온수도회는 1099년 고드프라 드
부용이 예루살렘에서 창립했다. 그 단장들 가운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빅토르 위고, 쟝 콕토
등도 포함되어 있다. 이 종교단이 1981년 1월 17일 브로아에서 회의를 열었다. (전 회의는
1956년 6월 5일 파리에서 열렸었다.)
이 최근의 블로아 회의에서 피레를 플랑타르 등 생 클레르가 제 3차 비밀투표에서 투표자
92명중 83명의 표를 얻어 단장에 피선되었다.
그가 단장에 피선된 것은 세상과 관련한 이 종교단의 개념, 정신의 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가 된다. 왜냐하면 시온수도회 121명의 고위 성직자들이 모두 세계 경제계와 정치. 철학계
의 [저명한 인사들(eminences grises)]이고 피에르 플랑타르는 메로빙 왕가의 직계이기 때문이
다. 그가 메로빙의 후손이라는 것은 소니에르 신부가 1891년 그의 렌느 르 샤토 교회에서
발견한 카스틸의 블랑슈 여왕의 양피지 문서에 의해 입증된다.
이 문서들은 그 신부의 질녀가 1965년 롤랑 스탕모르와 토마스 프레이저 경에게 팔아, 런던의
유럽 로이스은행 안전금고에 보관되어 있다.
이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 조금 전 우리는 필립 드 셰리세에게 편지했었다. 그와 우리는 진작
부터 접촉이 있었고 피에르 플랑타르만큼이나 그의 이름도 자주 시온수도회의 대변인으로서
언급되었었다. 우리들이 한 질문에 대하여 필립 드 셰리세는 천명하기를 프랑소와 뒤코 부르제
는 정족수의 찬성에 의하여 단장에 피선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거기에 덧붙여서 뒤코 부르제
신부는 자기가 그 종교단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고 말했다. 이 마지막
주장은 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드 셰리세가 그의 편지에서 밝힌 어떤 내용으로 볼 때 조금 수긍이 갔다.
얼마 전 우리는 생 쥘리앙의 부경감으로부터 시온수도회의 규약문을 입수하였다. 이 규약문의
사본이 1793년 한 프랑스 잡지에 발표된 적이 있다. 하지만 파리에서 우리는 이 규약문이
가짜라는 말을 쟝 뤼크 쇼메유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드 셰리세는 우리에게 보낸 편지에다
진짜 시온수도회 규약문이라고 하는 것의 사본 하나 -라틴으로부터 번역한- 를 동봉해 왔다.
여기에는 쟝 콕토의 사인이 있었는데, 아주 정교한 위조가가 위조했으면 몰라도 그 사인은
정말 그의 것이었다. 우리는 도저히 그것을 다른 콕토의 사인과 구별해 낼 수가 없었다.
이것을 기초로 우리는 이 사인이 있는 그 규약문이 진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다.
제 1조 – 이 규약에 서명하는 사람과 이후 후술하는 요건을 준수하는 사람들 사이에 기사종교
단이 조직된다. 그 관례와 관습은 부용의 공작 피우스라 불리는 고드프라 6세가 1099년
예루살렘에서 제정, 1100년에 인준된 것에 준거한다.
제 2조 – 이 종교단의 명칭은 ‘시온수도회’이다.
제 3조 – 시온수도회는 원래의 기사종교단과 그것의 가르침을 항구화하고 단원 상호간에 모든
경우에 있어 정신적. 물질적으로 원조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 4조 – 시온수도회의 존속기간은 무한정으로 한다.
제 5조 – 시온수도회의 대표기관으로 수도회에서 임명하는 수석비서관을 둔다. 시온수도회는
비밀단체가 아니다. 모든 조칙과 기록문서, 관료 임명사항은 라틴어로 일반에게 공개된다.
제 6조 – 시온수도회는 121명으로 구성된다. 이 한도 내에서 단체의 목적을 승인하고 이 규약
에 규정된 의무를 준수하는 성인이라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다. 단원으로 가입하는 데에는
성별이나 종족 또는 철학. 종교. 정치사상에 있어 차별이 없다.
제 7조 – 그러나 한 회원이 문서로써 자기의 계승자를 지목하는 경우에 수도회는 이 요청에
응해야 하며, 연소자인 경우 필요하다면 지목받은 사람에 대한 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
제 8조 – 이후로 첫째 등급에 취임하는 단원들은 자비로 끈이 달린 흰 가운을 준비하여 착용
해야 한다. 단원으로 받아들여진 때부터 그에게는 투표권이 있다. 단원으로 가입이 승인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수도회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것, 그리고 평화와 인간 생명의 존귀함을
위해 노력한다는 서약을 해야 한다.
제 9조 – 가입이 승인된 단원은 가입비를 내야 되며, 액수는 자유이다. 그는 매년 수도회에
대한 자진 헌금을 수석비서관에 납부해야 하며, 헌금액은 각자 결정한다.
제 10조 – 단원으로 가입이 승인된 사람은 출생증명서와 사인(sign)을 제출해야 된다.
제 11조 – 법을 위반함으로써 재판에 의해 형이 선고된 시온수도회 단원은 의무와 직위에서
해임되고 회원권을 박탈당할 수 있다.
제 12조 – 회원 총회는 ‘수도회(Convent)’라고 부른다. 출석 회원 81명 이하일 때에는 ‘수도회’
의 어떤 결정도 무효인 것으로 간주된다. 투표는 비밀이며 흰 공과 검은 공으로 투표한다.
모든 동의안은 81개의 흰 공을 얻어야 채택된다. 투표에서 61개의 흰 공을 얻지 못한 동의안
은 다시 제출되지 못한다.
제 13조 – 시온수도회의 ‘수도회’만이 121명의 회원 중 81명 이상의 찬성을 얻어 이 규약과
의식에 관계된 내규를 개정할 수 있다.
제 14조 – 단원 가입의 승인 여부는 모두 ‘13장미십자회’에서 결정한다. 작위와 의무는 시온
수도회 단장이 수여한다. 회원은 종신제이다. 회원의 작위는 권리로서 친자녀중 그가 지정한
1인에게 성별의 구별 없이 승계된다. 지정된 자녀는 자기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의 형제나 자매. 친척, 그 외의 어떤 사람에게도 권리를 양도할 수는 없다. 그는 시온
수도회에 재가입할 수 없다
제 15조 – 만 27일 안에 2명의 단원은 후보 단원을 접촉, 그의 동의나 거부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만일 81일간의 기간이 지난 후에도 동의하지 않으면 거부가 법적으로 확인되고 그 자리
는 궐위인 것으로 간주된다.
제 16조 – 전항들에서 규정한 승계권에 의하여 똑 같은 특권에 따라 시온수도회 단장의 의무
와 작위도 그의 계승자에게 양도된다. 단장이 궐위되고 직접 후계자가 없을 때에는 수도회에서
81일 이내에 단장을 선출해야 한다.
제 17조 – 모든 조칙은 수도회에서 투표하여 단장의 승인에 의해 효력을 갖는다. 수석비서관은
수도회에서 임명되며 임기는 3년이고 묵시적 동의에 의해 중임이 가능하다. 영주
(Commandeur)등급이 되어야만 수석비서관의 직책을 맡을 수 있으며, 그는 무보수를 재직한다.
제 18조 – 시온수도회의 서열체제는 5등급으로 되어 있다.
1등급 : 단장(Nautonnier) 인원 : 1
2등급 : 십자군(Croise) 인원 : 3
3등급 : 영주(Commandeur) 인원 : 9
4등급 : 기사(Chevalier) 인원 : 27
5등급 : 시종(Ecuyer) 인원 : 81
계 : 121
제 19조 – 용사 또는 1681년 이후로는 ‘생 빙상의 자녀들’이라 불리었던 243인의 자유회원제
를 둔다. 투표나 수도회에 참가할 수는 없지만 시온수도회는 이들에게 1681년 1월 17일의
조칙에 따라 특정한 권리와 특권을 부여한다.
제 20조 – 시온수도회의 자금은 기부금과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된다. ‘수도회의 재산’이라는
명칭의 유보금을 ‘13장미십자회’에서 관장한다. 이 유보금은 긴급 필요시나 시온수도회와
그 단원들에게 심각한 위험이 있을 때에만 사용할 수 있다.
제 21조 – 수도회는 ‘장미십자회’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수석비서관에 의해 소집된다.
제 22조 – 아무런 이유나 신상의 위험이 없는데도 명백히 공개적으로 또한 문서로써 시온수도
회의 회원권을 부인한 회원은 회원권이 박탈된다. 회원권 박탈은 수도회에서 결정한다.
이것은 원규약과 1956년 6월 5일 수도회에서의 개정안에 따른, 22개조로 된 규약이다.’
단장의 사인
‘쟝 콕토’
여러 곳에서 이 규약안은 우리가 프랑스 경찰로부터 입수했던 규약안이나 ‘소수도원 문서’
속의 ‘시온수도회’에 관련된 기록과 서로 차이가 있다. 수도회의 총 단원수를 후자는 1,093명,
전자는 9,841명으로 하였다. 위에 인용된 규약문에는 시온수도회의 단원이 ‘생 빙상의 자녀들’
243명을 포함하여 총 364명에 불과하다. 거기다 ‘소수도원 문서’에는 서열체계가 7등급으로
되어 있고 프랑스 경찰로부터 입수한 규약안에는 이것이 9개로 늘어나 있다. 위의 규약문에는
단지 5등급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각 등급의 명칭도 서로 다르다.
이러한 모순점들은 소수도원 문서가 최초로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되기 시작한 무렵인 1956년
경에 시온수도회에 어떤 내분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사실 필립 드 셰리세가 그의 최근 한 논문
에서 이러한 분열을 언급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 내분은 1956~1958년 사이에 있었으며,
시온수도회와 1188년의 성당기사단 사이에는 차이 – 이 차이는 ‘느릅나무를 꺾은’ 행위로 표시
된다 – 가 있다는 식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드 셰리세에 따르면 이 내분은 플랑타르의 외교적
수완으로 극복되었으며, 이제 시온수도회는 1981년 1월의 수도회처럼 통일된 단합체를 유지하
게 된 듯하다
프랑소아 뒤코 부르제가 과거에 시온수도회의 단장이었다고 해도 현재 단장이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드 셰리세는 그가 정족수에 의해 단장에 선출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초기 분리론자들에 의해 단장에 피선되었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가 규약안
제 22조를 위반하였는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그는 이제는 더 이상 – 과거에는
어쨌든 간에 – 시온수도회와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위의 규약안에서 프랑소아 뒤코 부르제의 지위가 분명해질 수 있을 듯하다. 어쨌든 이 규약안
에는 시온수도회 단장의 선출원칙이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왜 옛날에 5살이나 8살
먹은 단장이 있었느냐 하는 점이 수긍이 간다. 또한 단장의 지위가 한 특정 가문과 내부로
연결된 족보의 조직으로 들어왔다가 나가기도 했느냐 하는 점도 이해된다. 원칙적으로 단장은
세습되었으며, 메로빙 왕조의 후손임을 주장한 서로 연결된 가문군을 통하여 쭉 세습되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뚜렷한 후계자가 없거나, 지명된 후계자가 자기에게 부여된 직위를 거절하는
경우에는 규약안에 나와 있는 절차를 따라 피선된 다른 사람에게 단장직이 이양되었다.
레오나르도, 뉴튼, 노디에, 콕토 등은 이러한 방법으로 단장의 명단에 올랐을 것이다.
플랑타르 드 생 클레르
소수도원 문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자주 나오는 이름들 중에 플랑타르 가문이 있었다
그리고 소니에르와 렌느 르 샤토의 비밀에 관련된 이들 중에서 가장 권위있는 사람이 피에르
플랑타르-또는 그가 스스로를 표기할 때 쓰듯이 피에르 플랑타르 드 생 클레르 – 이다.
소수도원 문서의 족보에 의하면 플랑타르는 다고베르 2세와 메로빙 왕조의 직계 후손이다.
또한 같은 족보에 의하면 1960년 마자랭 추기경에 의해 파괴된 바르베리 성주의 직계 후손이
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우리는 플랑타르의 이름을 자주 대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최근 약 25년간
의 사실들이 밝혀 주는 바로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플랑타르를 통하는 것 같다. 한 예로
1960년 제라르 드 세드 씨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지조르에 감춰져 있는 한 ‘국제적 비밀’에
관해 언급했었다. 그 후 10년간 그는 드 세드가 책을 저술하는 데 지조르와 렌느 르 샤토에
관한 주된 정보원이었던 것 같다. 플랑타르의 조부는 베랑제르 소니에르의 개인적인 친구였다
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그리고 플랑타르 그 자신도 블랑슈포르를 포함하며 렌느 르 샤토와
레벵 부근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우리는 아르덴느 지방 스테내의 촌로들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옛 생 다고베르교회 자리를
플랑타르가 소유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또한 우리가 프랑스 경찰에서 입수한 규약안에는
플랑타르 씨가 시온수도회의 수석비서관으로 나와 있다
1973년 한 프랑스 잡지에서는 플랑타르와의 전화 인터뷰 기사를 게재했었다. 그가 밝힌 내용
이 별 것이 아니라 해서 놀랄 일은 못된다. 예상대로 그의 발언은 비유적이고 애매모호하며
의혹에 가득찬 것이었다. 사실 그가 대답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의문점을 불러 일으켰다. 예를
들면 메로빙 가문과 그의 왕족임을 언급하면서 그는 [프랑스의 몇몇 귀족 가문들의 기원을
조사해 보시면 어떻게 앙리 드 몽페자 같은 사람이 어느날 왕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라고 말하였다.
또한 시온수도회의 목적에 대하여 질문하자 그는 예상했던 대로 다음과 같은 회피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것은 대답할 수 없습니다. 내가 속한 단체는 아주 오래된 것입니다. 나는 일련의 과정에서
딴 사람을 승계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지키는 사람들일 뿐 공개적으로 활동
하지 않습니다,]
또한 같은 잡지에 1971년 죽은 아내 안느 레아 이즐레가 스케치한 플랑타르의 전기가 실렸다.
이 잡지에 따른다면 이 스케치는 시온수도회 회보인 <시르뀌>에 처음 게재했던 것인데,
플랑타르는 이 회보에 쉬랑이라는 익명으로 정기적인 기고를 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우리는 이 심리학자 – 플랑타르를 말함 – 가 신성법정(the Holy Vehm) 형제의 일원인 콩트
이스라엘 몽티, 장미십자회 13멤버 중의 일원인 가브리엘 트라리외 데그몽, 아틀란티스의 철학
자 폴르쿠크, 바티칸 문서국에서 일하는 오페 신부, 부르즈의 보관국 국장인 모로 등 여러
사람들과 친구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독일군 점령시에 그가 게쉬타포에 피포,
고문을 받았으며, 정치범으로 여러 해 동안 투옥되었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신비학의
권위자임으로 해서 그는 비밀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것으로 해서 여러 비밀
단체들의 명예회원이 되었다. 이러한 것 때문에 그는 특출한 인물이요, 평화의 마술사요,
자유의 사도요, 수도승이 되었으며, 그의 이상은 인류의 복지에 이바지하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세계의 위인들이 자문을 받고자 하는 유명인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놀랄 것이 있겠는가? 1947년 스위스 연방정부의 초청으로 레만호 부근에서 수년 간
체류하고 있을 때에는 온 세계의 수많은 사절단과 파견원들이 모여들었었다.
이즐레 부인의 의도는 분명히 이것을 어떤 ‘빛나는 묘사’로 만들려는 데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나타난 것은 특출한 한 개인의 생각일 뿐이다. 이즐레 부인의 말은 애매모호하며 과장되어
있다. 거기다 플랑타르의 친구들 중 유명인사로서 그녀가 들고 있는 사람들이 기껏해야 시시한
사람들뿐이다.
그러나 플랑타르 씨가 게쉬타포에 당했던 일들은 그가 독일 점령 기간 중에 적극적인 활동을
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우리는 결국 그것에 관한 증거자료들을 찾아냈다. 1941년 피에르 플랑타르는 <승리>라는
한 레지스탕스 잡지를 편집, 파리 근교에서 출판해 냈었다. 1943년 10월부터 1944년말까지
1년 여를 그는 게쉬타포에 의해 투옥생활을 했다.
플랑타르 씨의 친구들 중에는 이즐레 부인이 제시한 것보다 더 잘 알려진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앙드레 말로와 샤를르 드골도 들어 있다. 플랑타르 씨는 권력의 중심부에까지
연결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예를 들면 1958년 알제리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드골
장군이 대통령에 복귀하고자 할 때, 그는 특별히 플랑타르 씨의 도움을 구했다. 플랑타르 씨는
여기에 호응하여 앙드레 말로 등과 같이 소위 말하는 ‘공안위원회’를 동원했다고 하며,
이 위원회가 드골을 엘리제 궁으로 복귀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드골은 1958년 1월 29일 플랑타르 씨에게 도와준 것에 대해 개인적인 감사편지를 띄웠다.
그로부터 5일 후 두번째 편지에서 드골은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에 위원회를 해체시켜 달라
는 요청을 하였으며, 플랑타르는 신문과 라디오를 통한 공식담화를 통하여 위원회를 해산했다.
두 말할 것 없이 우리는 연구를 진행하는 중에 플랑타르 씨를 만나고자 무척이나 부심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럴 가망이 전혀 없는 듯했다. 플랑타르는 추적이 불가능했으며, 우리들은
어디서 그를 찾아내야 할 줄을 몰랐다. 그런데 1979년 이른 봄 우리는 BBC의 후원으로 렌느
르 샤토에 관한 필름 한 편을 제작하게 되었는데 ,BBC에서는 소장하고 있던 자료들을 우리가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BBC의 후원으로 마침내 우리는 플랑타르를 간신히 만나
시온수도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원래 연구는 파리에 거주하던 한 영국 여기자가 시작했는데, 그녀는 BBC의 여러 프로젝트에서
일한 적이 있고, 프랑스 전역에 훌륭한 연락망을 구축, 이것을 통하여 시온수도회를 추적하고
자 하였다. 처음 프리메이슨단 지부와 파리의 비밀 ‘지하문화’를 통하여 추적을 시작할 때 그는
예상했던 대로 신비와 모순의 연막에 부딪치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한 기자는 그에게, 시온수도
회를 너무 깊숙히 추적하고자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살해되고 만다는 것을 경고하였으며, 다른
기자는 시온수도회가 중세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그랑드
로지 알피나의 한 관리는 시온수도회가 현재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근대에 들어 조직되었
으며, 과거에는 전혀 없었던 단체라고 하였다.
이러한 혼돈의 와중을 헤쳐가면서, 우리 연구자는 마침내 쟝 뤼크 쇼메유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한 잡지사의 요청으로 플랑타르를 인터뷰하고 소니에르와 렌느 르 샤토 그리고 시온수도
회에 관한 광범위한 글을 썼던 사람이다. 쇼메유는 자신이 시온수도회 단원은 아니자만 플랑타
르에게 연락하여 우리와의 면담을 주선해 줄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우리의 연구자에게
그 외의 정보도 제공하여 주었다.
쇼메유 씨에 따르면, 엄격히 말해 시온수도회는 비밀단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그것의
존재나 활동사항, 회원 등을 알리지 않고자 할 뿐이라고 한다. 쇼메유는 말하기를 관보의
명부에 들어가 있는 것은 가짜이며, 수도회를 [헤치려는 어떤 회원]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쇼메유에 의하면 경찰에 등록된 규약안도 바로 그 ‘훼방꾼’이 만들어 낸 가짜라는 것이다.
쇼메유는, 시온수도회가 가까운 장래에 야심적인 정치적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우리의 의혹을
굳게 해 주었다. 그는 몇 년 안에 프랑스 정부에 극적인 변화가 초래될 것이며, 이 변화가
메로빙가의 왕이 다스리는 대중왕조의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서, 여러 세기
동안 수많은 중요한 변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변화의 배후에 시온수도회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하였다. 쇼메유에 의하면 시온수도회는 반물질주의적이며 ‘참된 가치’ – 말하자면 어떤
영적, 또는 신비적 가치 – 의 회복을 목표하고 있다고 하였다. 쇼메유 씨는 이러한 가치가,
비록 시온수도회가 기독교를 표방하고 있고 규약에 가톨릭적 요소가 강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기독교 이전의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쇼메유 씨는 당시 시온수도회의 단장이
프랑소아 뒤코 부르제라고 하였다. 어떻게 시온수도회의 가톨릭적 전통과 그러한 기독교 이전
의 가치들이 융합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하자, 쇼메유는 뒤코 부르제 신부 자신에게 물어봐
야겠다고 애매한 대답을 하였다.
쇼메유는 시온수도회가 오래 된 것이며 그 회원들이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거기에는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며, 여기에 덧붙여 수도회의 목적이 메로
빙 왕조를 부활하는 데 한정되어 있지는 않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는 우리 연구자
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시온수도회의 모든 회원이 다 유대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많지는 않을지라도 수도회 단원 몇 사람은 유대인이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어려운 모순에 휩싸이게 되었다. 규약안이 위조된 것이라 하여도, 수도회의 유대인
회원과 극단적인 가톨릭적 전통을 옹호하는 단장(뒤코 부르제를 말함) – 그의 친구들 중에는
마르셀 르페브르 같이 유명한 반유태주의자도 있다 – 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쇼메유 씨는 다른 수수께끼 같은 말도 하였다. 한 예로 메로빙 왕조의 후예이고 [따라서 그의
신성한 의무가 분명한 로렌느의 왕자]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현재 명목상으로라도
로렌느의 왕자라 알려져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 주장은 더욱 알기 어려운 것이었다. 쇼메
유는 그 왕자가 익명으로 실존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현재의 로렌느 왕자는
명목상의 로렌느 공작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이다.
전체적으로 봐서 쇼메유 씨의 답변은 답변이라기 보다는 앞으로의 연구에 대한 토대에 지나지
않았다. 준비할 시간이 조금 밖에 없었던 우리 연구자는 무슨 질문을 해야 할 지 몰랐다. 하지
만 그녀는 BBC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일을 계속해 나갔다. BBC는
영국보다 대륙에서 더 권위있고 더 매력이 있었던 이름이니만큼, BBC가 여기에 개입할 것이라
는 점을 결코 사소한 문제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프로파간다는 너무 강력한 언어이
다. 하지만 어떤 사실을 다루고 밝히는 BBC의 필름은 분명 많은 관심을 끌 것이며, 특히 영어
를 말하는 지역에서 신뢰감을 획득하고 어떤 심리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메로빙 왕조 사람들이나 시온수도회가 하나의 [역사적 기정사실]이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 – 예를 들어 해스팅스 전투나 토마스 아 베게트의 암살사건처럼 – 로
받아 들여진다면, 이것은 분명 시온수도회에 이익이 될 것이다. 분명 이러한 계산 때문에 쇼메
유 씨는 급히 플랑타르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내 1979년 3월, BBC 프로듀서 로이 데이비스와 그의 연구자의 주선으로 우리는 플랑타르
씨와 만났다. 그것은 마피아 단장들과의 면담 같았다. 회담은 BBC가 이 일을 위하여 빌린 파리
의 한 극장 ‘중립지역’에서 있었고, 각 측은 1인의 보좌관을 대동하였다.
플랑타르는 점잖고 예의바른 사람이었으며, 침착한 귀족적인 인상을 풍기고 거만하지 않으며,
우아하고 활발하나 말씨는 부드러운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박식하고 침착하였으며,
냉정하고 위트와 장난기가 있었으나 절대 가시 돋친 냉소가는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자주
재미있다는, 온화한 표정이 감돌았는데, 마치 인자한 아저씨 같았다. 온유하고 부드러운 태도
였지만 그는 동료들에게 거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뚜렷하게 금욕적이고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는 검소하고 매력적인, 그저 정장이 아닌 옷을 입고 있었는데,
야할 정도로 화려하거나 눈에 띄게 비싼 옷이 아니었다. 우리가 알아본 바로는 그는 자가용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첫번 회담에서나 그 후 두 번의 면담에서도 플랑타르 씨는 현재의 ‘시온수도회’의 활동이나
목적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대신 수도회의 과거 역사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의 어떤 질문에도 대답을 주겠노라고 제의했다. 그리고 미래에 관해서는
어떤 공개적 발언 – 예컨대 TV필름상으로라든지 – 도 하지 않았지만, 대화중에 우리는 몇
가지 암시를 얻어낼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예루살렘의 실종된 보물 – A.D. 70년에 로마
군이 빼앗은 전리품 – 을 시온수도회가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을 [적당한 때가 되면
이스라엘에 돌려 주겠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보물이 어떤 역사적. 고고학적 또는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으며, 진짜 보물은 ‘영적인’ 것이
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 ‘영적 보물’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어떤 비밀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비밀이 어떤 방법을 통하여 중요한 사회변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플랑타르
씨는 쇼메유와 같이, 머지않아 프랑스에 하나의 극적인 소용돌이가 발생할 것인데, 혁명은
아니지만 프랑스의 제도상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 왕조 부흥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이 어떤 예언자적 연극은 아니었다. 오히려 플랑타르는 나직하게, 아주 당연한 듯이,
그러나 매우 단호하게 그 점을 우리에게 확언하였다.
플랑타르의 말에는 이상하게 서로 맞지 않은 것들이 여럿 있었다. 예를 들면 가끔 그는 시온수
도회를 지칭하는 투로 ‘우리’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자기와 시온수도회를
분리시켜, 자기만이 메로빙 왕조의 후계자로서 합법적인 왕이며 시온수도회는 자기의 동료
또는 지지자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두 개의 분명히 다른 목소리 – 언제나 서로 조화되지만은
않는 – 를 듣고 있는 듯했다. 하나는 시온수도회 수석비서관의 목소리였다. 다른 하나는 시온
수도회를 일반인들처럼 어떤 비밀단체로 간주하는, [군림하나 통치하지는 않는] 한 익명의
왕의 목소리였다. 이 두 목소리 사이의 모순은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못했으며, 플랑타르는
이 점을 해명해 주려 들지 않았다.
플랑타르 씨와 그의 보좌관들을 3번이나 만난 후에도 우리는 전보다 이렇다 하게 더 알아낸
것이 없었다. 공안위원회나 드골이 보낸 두 통의 편지 외에는 어떤 곳에서도 우리는 시온수도
회의 정치적 영향력이나 권력, 또는 우리가 만난 사람들이 프랑스의 정부와 제도를 바꾸어
놓으려는 위치에 있다는 시사를 얻어낼 수가 없었다. 또한 여러 왕조 가문들의 자기 왕국을
재건하려는 노력보다 메로빙 왕조의 가계가 왜 더욱 중요하게 취급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점에
대한 명확한 시사도 얻을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스튜어트 가문으로서, 영국 왕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최소한 근대사가들에 따르면 그들의 주장은 메로빙 왕조 사람들보다
더욱 견고한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 문제에 관해서라면 유럽의 궐위 중인 왕위를 주장
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부르봉이나 합스부르크, 호헨쫄러른, 로마노프 왕조의 후예들이
생존해 있는 것이다. 왜 그들이 메로빙 가문보다 더 권리가 없는가? ‘완전한 정통성’이나 또는
순전히 기술적인 관점에서는 메로빙 가의 주장이 더 우선권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학문적 – 예를 들면 자기가 타라의 대왕들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한 아일란드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 인 문제에 불과하다.
다시금 우리는 시온수도회를 대수롭지 않은 한 [극단적 광신집단] – 장난은 아닐지라도 – 으로
치부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우리의 연구 결과는, 시온수도회가 과거에는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고도의 국제적 중요성을 띤 문제들에 개입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오늘날에도 눈으로 볼 수 있는 이상의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온수도회
에는 어떤 영리적인 요소가 없는데, 만약 플랑타르가 원하기만 했다면 시온수도회를 아주 장사
가 잘 되는 사업 – 다른 많은 [새로운 시대의] 사교집단이나 음모단, 기구들처럼 – 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1차적 소수도원 문서는 개인이 출판해 낸 것들에 국한
되어 있으며, 시온수도회는 프리메이슨지회 식으로 조차 더 이상 신입회원을 충당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알기로 회원 수는 일정한 숫자에 엄격히 고정되어 있으며, 오직 궐위가 있을
경우에만 신입회원이 가입될 수 있다. 이러한 ‘배타성’은 무엇보다도 특별한 자신감을 의미하는
것이며, 금전을 얻거나 또는 다른 어떤 이유로도 풋나기들을 마구 끌어 모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시온수도회에는 이미 [그것을 위해 일하는 어떤 것] – 말로나 드골의 충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그 무엇 – 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로나 드골 같은 이들이
메로빙 왕조의 재건을 목표하고 있었다고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시온수도회의 정치
1973년에 <한 정치 음모의 내막>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저자는 마티유 파올리라는 한 스위
스 저널리스트인데, 시온수도회에 대한 저자의 깊이 있는 연구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와 같이
파올리도 한 시온수도회 대표 – 그가 이름을 밝히지 않으나 – 와 접촉이 있었다. 하지만 파올
리는 BBC라는 권위를 배후에 업지 않았고, 그가 만났다는 사람도 – 그의 설명에 의해 추측해
보건대 – 플랑타르보다는 낮은 지위에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그 대표자는 플랑타르가 우리에게
했던 것 만큼 많은 말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대륙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고 우리보다 기동력
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할 수 없었던 식으로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나가 ‘현장’
취재를 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결과로 그의 책은 매우 가치 있으며, 여러 가지 새로운 정보들
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 그 후편이 필요할 듯이 보일 정도로 가치가 있었으며, 우리는 왜 그가
후편을 쓰지 않는지 궁금하게 여겼다. 우리가 그에 관하여 질문했을 때, 우리는 그가 1977년
또는 1978년에 어떤 기밀들을 아랍에 팔아 넘기려 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정부의 첩자에
의해 저격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파올리가 그의 책에서 쓰고 있는 접근 방법은 여러 면에서 우리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도 런던
에 사는 레오 쉬들로프의 딸과 연락이 있었는데, 쉬들로프 양은 그에게도 역시 자기가 아는 한
아버지는 어떤 비밀단체, 프리메이슨단이나 메로빙 가문과도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우리 BBC연구자와 같이 ‘알피나단’과 접촉, 그 단체의 장과 만나 모호한 대답을 들었다.
파올리에 의하면 그 알피나단의 단장이 자기는 로비노나 쉬들로프라는 사람을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알피나단의 직인이 있는 많은 책들에 대하여 그는 그러한 것들은 없다고
단호히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피나단의 일원이었던 파올리의 친구 하나는 알피나단 도서관에서 그러한 책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파올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가능성은 다음 둘 중의 하나이다. 그 하나는 앙리 로비노가 쓴 책의 특수한 성격으로 볼 때
스위스 안이나 밖에서의 어떤 정치활동도 금지하는’ 알피나단’이 자기가 그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다른 단체가 자기의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알피나단의 이름을 빌렸다는 것이다.
국립도서관 베르사이유 별관에서 파올리는, 시온수도회 규약안에 언급되어 있는 잡지 <시르
뀌> 4권을 발견했다. 첫번째 것은 1959년 7월 1일자의 것으로서, 그 편집주간은 피에르 플랑
타르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잡지는 스스로 시온수도회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오히려 스스로 ‘프랑스 무장단’이라는 단체의 공식기구라고 선언했다. 또한 그 책에는 파올리가
그의 책에서 이용하고 있는 봉인과 다음의 데이터도 있었다.
프랑스 무장단 정기 문화 간행물
피에르 쥬에 가 116번지, 116
오네 수 보아 (센느 에 토아즈)
전화 : 929-72-49
파올리는 위의 주소를 확인해 보았는데, 거기에서 발행되는 잡지는 없었다. 전화번호도 틀린 것이었다. ‘프랑스 무장단’을 추적해 보려는 파올리의 노력은 전부 실패하고 말았다. 오늘날
까지도 그러한 단체에 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나오고 있지 않다. 하지만 ‘공안위원회’가
오네 수 보아에 있었다는 것이 결코 우연한 일로는 보여지지 않는다.
‘프랑스 무장단’은 그 위원회와 어떻게든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가정하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파올리는 <시르뀌> 제 2권에 드골이 플랑타르에게 보낸, 그의 노고에
대한 감사편지가 언급되어 있다고 하였다. 문제의 [그의 노고]는 공안위원회에서 한 일인 것
같다.
파올리에 의하면 <시르뀌>에 있는 대부분의 기사들은 신비한 문제들을 다룬 것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피에르 플랑타르 – 그 이름이나 또는 쉬랑이라는 익명으
로 – 안느 레아 이즐레 같은 사람들의 사인이 있었다. 하지만 매우 다른 기사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포도재배와 접목의 비법을 다룬 기사가 몇 개 있는데, 이것은 어떤 중대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포도나무와 포도재배를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이것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가계나 왕조적 연계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파올리에 의하면 <시르뀌>의 기사들은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면 극도로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아드리안 세크레트의 사인이 있는 한 기사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사람들이 아니면 현금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없다. 정치는 죽었다.
사람들이 이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이제 남은 유일한 문제는
경제조직이다. 하지만 독일점령시대처럼 프랑스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 있는가?
그때 애국적 레지스탕스 전사들은 싸움을 같이 하는 동료들의 정치관을 문제 삼지 않았었다.
또 파올리는 <시르뀌> 제 4권에서 다음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시르뀌 1500부가 불을 붙이는 기폭제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애국자들의 목소리가
1940년처럼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때 애국자들은 침공당한 프랑스를 떠나
자유 프랑스 지도자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무엇보다 프랑스인이며, 정화
되고 새로운 프랑스를 건설하기 위해 싸우는 전사들이다. 이것은 일치된 이념과 의지, 그리고
행동의 통일에 의해 달성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옛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말하는 바이다.
그 다음에 이어서 프랑스의 잃어버린 영화를 되찾기 위한 구체적 계획안이 제시되고 있는데,
한 예로 정부기구의 해체와 지방자치기구의 부활을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프랑스 혁명기의, 교통수단이 말이었던 당시에 맞게 임의로 조직된 것이다. 오늘날
그것은 아무것도 대변해 주지 못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지방자치는 프랑스의 생명이며, 과거
의 유산이요 우리나라를 존재하게 했던 토대이다. 지방자치에는 각자의 관습과 민요와 기념비
와 방언이 있다. 우리는 그것의 부활을 주장한다. 지방자치에는 각자의 사정에 맞게끔 독자적
인 방위와 통치기구가 있어야 한다.
파올리는 이 다음에 8페이지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의 부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방자치회의 (Council of the Provinces)
추밀원 (Council of State)
의회 (Parliamentary Council)
세무성 (Taxes)
산업성 (Work & Production)
보건성 (Medical)
문교성 (National Education)
성인국 (Age of Majority)
건설성 (Housing & Schools)
이러한 부제로써 제시된 정부계획안은 특별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며, 아마 혼란
없이도 거의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 계획안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것은
‘우파’나 ‘좌파’, 자유주의적 또는 보수주의적. 혁신적 또는 반동적 따위의 말을 붙일 수도 없다.
전체적으로 봐서 그것은 전혀 무해한 것이며, 이것이 어떻게 프랑스의 잃어버린 영화를 되찾게
해 줄지 의심스럽다. 파올리의 말대로, [이러한 제안이 …… 혁명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
은 프랑스의 현 구조에 대한 현실적 분석에 기초하고 있으며 훌륭한 통찰력이 배제되어 있다.]
하지만 <시르꾸>에 제시되어 있는 정부계획안에는 이 계획의 궁극적인 실질적 기반 – 메로빙
가의 후예가 다스리는 대중왕조의 부활 – 에 대한 언급이 없다. <시르뀌>에서 이것을 언급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저를 이루는 ‘기정사실'이요, 그 잡지에 나타나는
모든 것의 기본명제이기 때문이다. 이 잡지의 독자들에게 메로빙 왕조의 부활은 너무나도 명백
하고 당연한 목표이기 때문에 구태여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파올리는 우리를
놀라게 한 중요한 문제를 하나 던지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숨겨진 메로빙 왕조의 후예와 메로빙 가 대중왕조의 부활을 목표하는 시온수도
회라는 한 비밀단체가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이 단순히 이상한 정치적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는지 – 그렇다면 그 목표는 세상의 순진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많은 돈을 벌자는
것이다 – 아니면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파올리는 자기가 가진 자료들을 근거로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시온수도회가 강력한 연계조직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모든 단체의 창설에는 내무서의
사전승인이 필요하며, 이것은 잡지나 출판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익명으로, 주소도 틀리는 가공 출판사를 통하여 스위스나 프랑스에는 배포되지도 않는 책들을
펴낼 수가 있다. 가능성은 두 가지이다. 정부가 그 일을 하고 있거나 하고 있지 않거나,
아니면……….
파올리는 다른 한 가능성은 말하고 있지 않다. 동시에 그가 개인적으로 이 둘 중에서 후자의
가능성이 더 많은 것으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간단히 말해 파올리의 결론은, 정부 관리들
이나 수많은 다른 실력자들이 시온수도회의 단원이거나 아니면 거기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이
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시온수도회는 정말 영향력 있는 단체이다.
광범위한 연구를 거친 끝에 파올리는 메로빙 가의 정통성에 대한 주장에 만족하고 있다. 여기
까지는 시온수도회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 이상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을 고백한다. 왕위에서 쫒겨난 지 1300년이 되는 메로빙 가의 후손이 권좌에
복귀하게 되는 때는 언제인가? 그 메로빙 왕조는 현대의 다른 왕조들과는 다른 모습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다르고 왜 다른가? 메로빙 가가 특별한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주장이
정통성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현실적 타당성은 없는 것이다. 왜 현재와 과거의 그와 같이
수많은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이 거기에 연루되어 충성을 바쳤는가?
물론 우리도 똑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다. 파올리와 같이 우리도 메로빙 가의 정통성에 대한
주장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이 현대에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한 왕조의
기술적인 정통성이 정말 그렇게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될 수 있을까? 왜 20세기 후반에 왕조 –
정통적이든 아니든 – 가 출현하여 옛날의 메로빙 가가 누렸던 충성을 누리게 되는 것일까?
만약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이상한 괴짜들의 모임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손에서
놓아 버릴 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영향력 있는 조직을 다루고 있으며,
그 안에는 우리 세대의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책임있는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이 사람들은 각자의 정치. 사회. 종교관의 상이함을 뛰어 넘어 메로빙 왕조의 활을
충분히 타당한 목표라고 여기고 있는 듯하다.
그와 같이 유명하고 존경을 받은 사람들에게 1300년이 된 가문의 부활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될 듯 싶지 않다. 우리가 어떤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거나 정통성만이 메로빙 가문의 유일한 주장이 아니거나, 메로빙 가문을 다른 왕조와 구별해
주는 매우 중요한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간단히 말해 메로빙 가의 가계에는 특별한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