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일곱 번째 주일 – 목(木)
마태복음 7:15-20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처럼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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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구체적인 식물명으로 소개되는 나무가 총 몇 종류 정도일까요? 제가 대략 정리를 해보니 29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나무나 자주 등장하는 나무는 무화과나무, 감람나무, 포도나무, 떨기나무, 가시나무, 백향목 등이 있고 상수리나무도 자주 등장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나무’의 상징은 주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선악과로 알고 있는 ‘생명나무’는 어떤 종류의 나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고, 구체적인 식물명으로 처음 등장하는 나무는 ‘무화과나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무화과나뭇잎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에서 나오는 첫 번째 나무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나무는 노아의 방주와 관련된 나무인데 개역개정판에는 ‘고페르 나무’로 되어 있고, 공동번역에서는 ‘전나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 나무는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만난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에 환영하던 인파들이 흔들던 종려 나뭇가지는 ‘인간에게는 가려진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상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무를 깎아 우상을 만들 때에 관한 이야기 정도에 부정적으로 사용될 뿐 대부분 나무는 긍정적인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무가 맺는 열매 때문이 아닐까요? 창세기 1장 29절에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주리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흔히 우리가 식용하지 못하는 열매는 먹을거리가 아니라 생각하지만, 다양하게 사용된다는 점에서 그 또한 먹을거리입니다. 인간에게 ‘잡초’라고 분류된 것들조차도 인간이 알지 못하는 효능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필요하므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 동식물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입니다.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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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상징으로 나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합니다. 좋은 나무인지 못된 나무인지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말씀처럼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만,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나무마다 맺는 열매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며, 열매의 종류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거짓선지자 “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은 어떠냐 하면, 대체로 겉모습이 그럴듯합니다. 열매가 풍성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열매가 없거나 시원치 않습니다. 열매를 맺어도 아름다운 열매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짓선지자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나쁜 나무와 같아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포도는 포도나무에서 무화과는 무화과나무에서 열립니다. 어떤 해는 탐스러운 열매를 맺기도 하고, 어떤 해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지만, 포도나무에서는 포도 열매가 맺히고, 무화과나무에서는 무화과가 열리는 것입니다. 올해 열매를 맺지 못했어도 그들에게서는 가능성이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그 가능성이란, 포도나무에서 무화과가 열리는 가능성이 아니라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가 열릴 가능성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중에서 ‘거짓선지자’는 결국 못된 열매를 맺고, 그런 나무는 도끼에 찍혀 불에 던지어질 운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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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선지자와 참된 선지자를 구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거짓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온다고 합니다. 무엇입니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인데 겉으로는 순한 양처럼 행세한다는 것입니다. 온갖 아름다운 말과 사랑의 말이 넘치지만, 그가 노리는 것은 결국 노략질하기 위함입니다. 이단이나 사이비에 사람들이 왜 빠집니까? 그럴듯하기 때문에 빠집니다. 그런데 그들이 노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맹신하게 한 후에 물질을 노리든, 신도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느립니다. 신도들의 헌신적인 봉사는 사이비 이단 단체나 교주를 위한 것인데 마치 하나님께 드린 것처럼 착각하게 합니다. 남을 속이는 사람은 치밀합니다. 노략질하려면 치밀해야 합니다. 대충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치밀한 궤변에 속아 넘어가는 이들이 있는 한 이단, 사이비는 이 땅에서 더욱더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그 결과는 그러나 결국 가정파괴를 가져오고 인간성의 말살을 가져오며, 신앙의 장애인을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거지선지자가 판을 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명백한 이단 사이비 교주들만이 거짓선지자가 아니라 버젓이 교회 간판을 달고, 목사직을 수행하는 거짓선지자들이 판을 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외형은 아름답고 화려합니다. 교인들의 헌금으로 얻은 권력과 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재주가 뛰어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넘쳐나고 이런저런 성경공부도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최종관심은 오로지 교인의 호주머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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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무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제주도에서 목회할 때 태풍 루사가 휩쓸고 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뜰에 있는 팽나무 가지가 많이 부러졌습니다. 그래서 가지치기를 하는데 부러진 가지만 치는 것이 아니라 부러진 가지의 반대편 성한 가지들도 쳐냅니다. 이유는, 한쪽만 잘라내면 나무가 기울고, 결국에는 쓰러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무도 좌우의 균형이 맞아야 쓰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도 그러합니다. 신앙의 좌우 날개는 무엇입니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균형입니다. 어느 한 쪽만 강조되면 그 신앙은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의 균형감각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설교만 좋아하면 머리만 뜨거워집니다. 감성적인 설교만 좋아하면 가슴만 뜨거워집니다. 머리와 가슴이 동시에 뜨거워지지 않고, 어느 한 쪽만 뜨거워지면 미치게 됩니다.
제주도 해안가에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많은데 모두 한 곳으로 휘어졌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다 보니 육지 쪽으로 기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균형이 맞지 않은 것 같은데 쓰러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나무뿌리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반대쪽으로 뻗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가지만큼 뿌리는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부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 드러낼 수 없는 부분도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뿌리가 얕은 신앙입니다. 뿌리 깊은 신앙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하게 버팁니다. 한쪽으로 굽은 것 같지만, 뚝심이 있습니다. 뚝심 있는 신앙을 가지십시오, 그것은 보이는 것 반, 보이지 않는 것 반입니다. 끊임없이 가지가 자라나는 만큼 뿌리도 자라나야 건강한 나무인 것처럼 지적이고 논리적인 신앙과 뜨거운 감성의 신앙을 동시에 추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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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분재한 나무를 보면 멋지지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억지로 조경사가 자기의 의지대로 자연적인 나무의 본성을 억압한 듯 보여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조경이 잘된 나무는 분재를 보는 느낌과 다릅니다. 조경은 분재와 다르게 다듬어 준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신앙을 조경해 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자라는 나무가 아니라, 적당하게 거름도 주고, 가지치기도 해줌으로써 나무를 아름답게 만들고, 그 가치를 높여주는 것처럼 신앙을 자라도록 북돋워 주고, 삐죽삐죽하게 모난 신앙을 다듬어주어 아름답게 만드는 조경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서툰 조경사가 정원을 맡게 되면 정원이 망가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한 해 두 해에는 표시가 나지 않지만, 몇 해 뒤면 쑥대밭이 되는 것이지요. 훌륭한 조경사도 한 해 두 해에는 표시가 나지 않지만, 몇 해 뒤 정원이 확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지를 쳐주면 나무는 어떠합니까?
식물의 특성상 가지를 잘라주면 그곳에서 두 개의 가지가 나옵니다. 나무가 조밀해지죠. 그리고 쓸데없이 웃자란 나뭇가지가 영양분을 빼앗아 가지 않기 때문에 실한 열매를 맺습니다. 봄이면 과수원 농부들이 가지치기하는 이유입니다. 열매는 새 가지에서 열립니다. 신앙의 열매도 새 가지에서 열립니다. 새 가지가 상징하는 바는 거듭남입니다. 한 번 거듭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봄마다 새 가지가 돋아나듯 날마다 거듭나는 신앙만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가지를 칠 때, 나무의 입장에서는 아픕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나무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함이요, 제대로 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거듭나야 하는 순간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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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나무는 겨울을 나기 위해 자기 안에 있는 물을 최소한의 것만 남기도 다 내어놓습니다.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나뭇잎을 떨구면 광합성 작용이 멈추기 때문에 뿌리가 물을 빨아들이지 않습니다. 물을 빨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제 몸에 있는 물을 최소한만 남겨두고 배출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겨울에 얼어 터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사계가 뚜렷하지 않은 열대지방 같은 곳에서 자란 나무는 무릅니다. 소나무나 전나무 같은 침엽수림이 단단한 이유는 이런 비움과 추위를 이기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신앙도 그러합니다.
마냥 채운다고 좋은 일이 아닙니다. 간혹 텅 비우는 일도 중요합니다. 지난주 관람한 ‘천안함 프로젝트’에서 어떤 분이 의심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를 불통의 사회라고 지적하면서 의심이 소통의 시작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신앙도 그러하다고 봅니다, 무조건 “믿어라!”가 아니라, “정말일까?” 의심하는 신앙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성령의 불에 덴 것 같이 뜨겁기도 하다가, 어떤 때는 차가운 신앙인이 되기도 하고, 그래서 뜨거움과 차가움을 모두 갖춘 그런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봄이 되면 나무가 물을 빨아들이는 힘이 엄청나서 청진기를 나무에 대면 물 빨아올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빨아올리면서 나무는 새순을 내고 쑥쑥 자라게 됩니다. 겨울이 없었다면, 비움이 없었다면 이런 일도 없겠지요.
오늘은 창조절 일곱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나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창조의 계절에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보며 그분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