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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4;36-5;11, 바나바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 2015. 5/20, 5/27
성도들에게 있어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초기 예루살렘교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교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말씀을 합니다. 밭과 집이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인데 성도들 중에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1. 바나바라 하는 요셉입니다. 바나바는 유대 백성백성들이 많이 살고 있는 구브로 출신입니다. 그리고 레위인 입니다. 요셉의 별명인 바나바는 사도들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바나바는 이 사람의 인물됨을 표현해 줍니다. 바나바는 예언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권위자,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보혜사와 같은 뜻입니다. 그가 보혜사 성령님처럼 성도들 곁에서 권면하고 위로하고 잘 도와주는 것을 보며 그에게 붙여준 별명입니다. 요셉이 이런 자질을 갖추고 있는 인격자입니다. 요셉은 말에 능한 사람으로서 그의 말은 권고의 말인 동시에 위로의 말입니다. 이런 바나바가 무엇을 했습니까요?.
11-1. 바나바는 권면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권면이란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의미는 파라(옆에서) 클레오(부르다) 곧 옆에서 부르는 사역입니다. 일본의 소학교에서 매년 청팀과 백팀으로 나뉘어 가을 운동회를 합니다. 이 날이 되면 엄마들이 도시락을 가지고 와서 응원을 합니다. 특히 달리기를 할 때 엄마들이 자기 아이의 이름을 불러가며 응원을 합니다. 바로 이 엄마들의 응원을 '파라클레시스' 권면이라고 합니다. 권투선수들이 링 안에서 격투를 벌일 때 링 밖에서 크게 떠드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로 코치들입니다. 이들은 선수들에게 순간순간 코치를 하고 격려를 하고 쉬는 시간이면 그들을 붙들고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바로 이들이 하는 것이 파라클레시스, 권면하는 것입니다. 경기장 응원과 같은 것이 파라 클레시스입니다.
행11:19-26을 보면 스데반 집사가 노방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는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 온 교인들이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는데 안디옥이라는 도시에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납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본부에 전해지자 교회는 고심 끝에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왜 바나바를 파송할까요? 그만큼 바나바는 사도들과 교인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도착해서 11:23"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파라칼레이)"라고 합니다. 바나바는 격려하고 응원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으려면 엄청난 핍박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만나는 성도들에게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만을 붙잡으십시오.”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무리가 많아지고 교회가 놀랍게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1-2. 바나바는 위로하는 사람입니다. 권위란 말뜻의 첫째는 격려이고 둘째는 위로입니다. 행15:36-40에 이런 사건이 나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 때 두 사람은 수제자로 삼기 위해 마가라는 청년을 데리고 갑니다. 마가는 패기는 있고 열정은 있었지만 지구력이 떨어지고, 경험이 부족하여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갑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서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를 다시 떠나기로 결정하고 누구를 데리고 갈 것인가를 상의합니다. 바나바는 마가에게 다시 기회를 주자고 건의했는데 바울은 도중에 포기한 사람을 데려갈 수 없다고 반대를 합니다. 청년 마가는 무척 실망하고 좌절했습니다. 본인은 실패자이고, 한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바울이 그를 데려가기를 거부했을 때 그의 마음은 심히 괴로웠습니다. 이 때 바나바는 마가를 위로합니다. 아마 이렇게 위로하지 않았을까요? "위대한 사도 베드로를 보아라.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지 않았느냐? 그럼에도 주님은 그를 용서하셨고 다시 기회를 주셨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시고 너를 위로하신다. 다시 일어나라. 너도 기필코 크게 될 날이 있을 꺼야.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나와 함께 선교를 떠나자." 결국 마가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고 바나바와 함께 선교사역을 훌륭하게 마칩니다. 이런 사건 이 후 십 여 년이 흘렀습니다. 마가는 이제 30대 중반의 나이이고 많은 신앙의 경험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그의 마지막 편지를 디모데에게 쓰면서 이런 부탁을 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하는 일에 유익하니라." 결국 마가는 바울에게도 인정과 신뢰를 받고, 교회에서는 인정을 받아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마가복음을 기록하게 됩니다. 바나바는 이렇게 부족하고 여린 사람을 향한 기대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교회의 사람으로 키워내는 사람이었습니다. 마가가 이렇게 성장하기까지에는 바나바의 위로와 권면과 돌봄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힘이 들어 시험에 들고, 생활고로 인해 좌절된 사람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바울이 어려웠을 때 바나바가 붙들어 주었고, 마가가 좌절했을 때에도 바나바가 붙들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마가를 더 잘 알고 있지만 실상 이들이 있기까지 바나바의 숨은 공로가 있었습니다. 우리교회도 권면과 위로가 필요한 성도가 있습니다. 책망이나 비난은 사람으로 좌절하게하고 주저앉게 하고 포기하게 만듭니다. 힘들어하고 시험에 들어있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바나바처럼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여러가지 은사와 달란트가진 사람들이 필요하지만 바나바같이 위로하며 격려하는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보혜사 성령의 돌보심과 힘주심이 필요하듯이 영혼 구령사역을 위해서는 꼭 바나바 같이 돌보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격려하고 위로하지만 어떤 마음에서 해야 될까요? 사람을 세우려고 할 때입니다.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비워야합니다. 우리 모두 바나바와 같이 격려하고 위로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3. 바나바는 사람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바나바에 대한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행9:26-27에 나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지냈던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후 그는 제자들과 사귀고자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를 경계하여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의 신봉자일 뿐만 아니라, 교회를 핍박하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해 살기등등해 다니던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만나려는 것은 속임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택함 받은 바울, 뛰어난 실력과 열심을 가진 훌륭한 일꾼이 주님의 사람으로 크지 못하고 주저앉아야만 했습니다. 이때 바나바가 그를 위해서 변론을 합니다(27). "내가 이 사람을 보증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다메섹에서 이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증거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장차 주님의 큰 일군이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주님의 일꾼으로 사람과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의 간절한 변론 덕분에 제자들이 바울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때 바울은 비로소 사도로서의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바나바의 변호가 없었다면 오늘의 바울이 있었겠습니까? 우리도 바나바처럼 사람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기에 실수할 때도 있고 일을 망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같다면 서로 받쳐주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좀 부족한 사람도 괜찮습니다. 실수해도 좋습니다. 좀 늦게 해도 무방합니다. 그래도 참고 기다리며 믿어주어야 합니다.
1-4. 바나바는 자기 자신을 비우는 사람입니다. 행11:19-26절을 보십시오. 스데반 집사의 순교이후, 박해를 피해 떠난 교우들이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놀랍게도 박해 속에 교회가 성장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안디옥 교회로 몰려옵니다. 이들에게 목회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이 소식을 듣고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로 바나바를 보냅니다. 바나바가 특유의 위로와 격려로써 목회하므로 구원 받는 사람의 수가 더해지고 교회가 더 왕성해 집니다. 대 교회가 되었습니다. 바나바의 인기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은사대로 심방목회와 상담목회로 성도들이 많이는 모였는데, 교회가 말씀 위에서 견고하게 서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초청해서 동역을 합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안디옥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려 집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세계선교의 중심센터로 성장합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동역자로 초청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바나바가 옹졸한 목회자였다면 바울을 데려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해 일하지 않고 주님과 교회를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교육목회, 말씀목회 쪽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바울을 불렀습니다. 그는 교회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비운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바울은 안디옥에서 너무나 커버렸습니다. 11장까지만 해도 이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올 때는 '바나바와 바울', 이렇게 바나바가 먼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후부터는 바울이 먼저 나옵니다. 13장을 경계로 '바나바와 바울'이 '바울과 바나바'로 바뀝니다. 재미있는 사실입니다. 바나바는 사람 좋은 스타일이고, 바울은 탁월한 실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서 사역이 깊어지면서 탁월한 실력의 소유자였던 바울이 두드러지게 된 것입니다. 바나바는 권위하는, 격려하며 위로하는 은사의 사람이고, 바울은 가르치는 은사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바나바가 위로와 격려의 사역을 하고, 차츰 바울이 내실을 기하면서 동역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바나바가 크게 쓰임 받고, 사역의 폭이 생기면서 차츰 바울이 크게 쓰임을 받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탁월한 사람 아닙니까?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바나바는 굉장히 서운했을 것입니다.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바울을 은근히 시기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지요? 주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목회를 위해서 바울을 이용한 것이 아니고, 주님과 안디옥 교회를 위해서 바울을 불렀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쇠하여도 좋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를 비웠습니다. 이것이 바나바의 위대한 인격입니다. 그는 주님과 교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 오늘 본문에 소개하는 또 한 가족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이들도 초대 교회의 일원이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이 이들도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고, 나름대로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상당한 열정과 헌신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보는 것처럼 자신들의 재산을 정리하여 많은 헌금을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대단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재산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중심에 이 순간 만큼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께 칭찬듣기 보다는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려고 했고 자신들의 체면과 입장을 생각했고, 명예욕에 빠져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습니다. 바나바가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여 많은 헌금을 드리자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며 존경합니다. 그런 모습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부러운 마음이 들면서 자신들도 칭찬 듣고 싶은 마음이 생겼나봅니다. 자신들도 교인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우리들 모두에게 있습니다. 아나니아처럼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사도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실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나니아는 땅을 팔았습니다. 견물생심이 일어납니다. 왜 그럴까요? 적으면 그래도 좀 쉽습니다. 많으면 어려워요. 돈을 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바라보는 순간에 사단이 그들의 마음에서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아까운 생각도 들고, 다른데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중심에서 성령이 떠나고, 물질에 대한 욕심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절반을 떼어서 숨기고 절반만 가져다가 사도들에게 바친 것입니다. 물질도 채우고, 사람들 앞에서 체면도 유지하고, 칭찬도 듣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습니다. 그리곤 정직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성령을 속인 죄로 아픔을 겪습니다.
여러분, 거짓말을 아십니까? 연세가 지긋하신 노인 분들은 빨리 죽어야지. 노처녀는 시집 안가요. 장사꾼은 밑지고 팝니다. 일본이야 안 그렇지만 한국의 배달 체인점, 특히 중국집 - 지금 출발했습니다. 습관적으로 정직하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미국 시카고의 신문에 이런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일리노이주의 어글스비라는 마을에서 세탁소를 경영하는 사람이 고객의 옷을 정리하다가 주머니에서 2만달러(2,100만원) 가량의 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옷을 찾으러 오지 않자, 이 세탁소의 경영주는 그 돈을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신문은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는데, 기자는 이 기사의 마지막 줄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제는 정직이 뉴스거리가 되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내용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길에서 수천만 원이 든 가방을 주워 주인에게 찾아준 사람이 대서특필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기뻐하기 보다는 “정직이 뉴스거리가 되는 사회가 되었다”고 한탄했습니다.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요즘은 그 정직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세상이 부정직하게 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초대 교회 안에 일어났던 부정직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거짓말은 전체가 거짓말이 아니라 반 정도만 거짓말입니다. 아나니아가 밭을 팔아서 생긴 돈을 교회에 바치면서 사실은 자기를 위하여 일부분을 감추어 두고 모든 것을 바친 것처럼 꾸몄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비극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2-1.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뜻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이름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개명도 합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 담임 목사님이셨던 조 용기목사님. 한 때는 조 다윗이라고 했습니다. 이름의 뜻 중요합니다. 창씨개명도 시키잖아요? 삶의 의지를 바꾸려고 강제로 했잖아요. 거기에 지조를 지키시는 분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 그말입니다. 이름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름의 뜻이 무엇일까요?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삽비라는 진주 같은 아름다움이란 뜻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은총과 진주같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미만 좋으면 무엇을 합니까? 이름값을 하고 살아야지요? 이름의 값을 못하고 사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더욱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있고 신앙과 연결이 되어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 자녀가 그렇게 못 산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작명하는 것은 한 번 생각을 해 보아야한다고 그랬습니다. 요한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 그렇다고 합니다. 이름의 뜻도 중요하지만 이름값도 중요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견물생심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2-2.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면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성도라면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의식해야 합니다. 4장 36, 37절을 보면 바나바 사건이 나옵니다. 바나바가 자기 전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쳤습니다. 자기의 전 재산을 하나님의 사역과 성도들의 필요를 위해 주님 앞에 바칠 수 있었던 바나바의 헌신은 다른 성도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5장이 나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아마도 바나바의 헌신을 보고 인간적인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도 전 재산을 바치면 주목받을 수 있겠지?”그래서 1절을 보면 그의 소유를 팔았습니다. 2절을 보면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아내도 알더라. 건전치 못한 동기가 순수하고 온전한 헌신을 유도할 수 없습니다. 아나니아의 헌신의 동기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마 6: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여러분, 고아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진 찍기’입니다. 과자 하나 주고 사진 찍어 자신을 과시하는 방문자들이 싫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보다 오히려 사람에게 보이려는 행위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외식자(가면 배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처음 신앙생활하게 되면 믿음이 없어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뻐하기도 하고, 상처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묵묵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우리의 관점은 사람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사람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시기 바랍니다.
2-3.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서로 돕는 배필이 되지 못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부부를 ‘돕는 배필’이라고 했습니다. 바람직한 부부상은 서로 도우며 서로에게 참된 유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한쪽이 낭비벽이 심하다면 다른 한 쪽은 절약해야 합니다. 한쪽이 지나치게 급하고 거센 성격이면 다른 한 쪽은 인내해야 합니다. 한쪽이 나태하면 다른 한쪽은 근면해야 서로를 보완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믿음이 약하면 아내가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를 보완해 주어야 하는데 서로 보완하고 조화를 이루기보다 오히려 악을 행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런 경우입니다. 1절“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이 ‘더불어’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아내는 알면서 침묵을 했습니다. 더 나아가 동조를 했습니다. 여러분, 현숙하고 경건한 아내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잠언 31;31에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가니라. 그 행한 일로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현숙한 여인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남편 아나니아가 숨기려 했을 때 “여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요. 하나님께서 보고 계셔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서로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비극은 좋은 짝이 되지 못했기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무엘 서에 나오는 아비가일이 있습니다. 아비가일의 남편은 나발입니다. 그런데 나발이 마온에 양이 3000마리, 염소가 1000마리입니다. 이들이 갈멜에서 목양할 때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지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쫒겨서 힘들어 할 때 건포도 송이 와 먹을 것을 조금 요구합니다. 그런데 나발이 현실의 다윗을 보면서 거절을 하고 욕을 합니다. 그런데 이 때에 아비가일이 다윗의 청을 들어주고 남편의 잘못을 빕니다. 이 것이 돕는 배필입니다.
2-4. 마지막으로 중요한 멧세지인데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명예욕이나 탐욕, 죄에 빠질 때 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언제든지 기회를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죄를 직접적으로 지적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베드로도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나니아 부부가 땅을 판 값의 얼마를 감추고 일부를 베드로 사도에게 가져왔을 때 회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행6:3-4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로다.” 하지만 아나니아는 베드로의 긴 책망을 듣고도 아무런 뉘우침의 반응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죽습니다. 세 시간 후 그의 아내 삽비라가 남편이 죽은지도 모르고, 사도 베드로에게 와서 남편과 똑같이 말합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본문 말씀을 보면 당황스럽습니다. 그래도 너무 하지 않은가? 그 정도로 죽이기까지 하다니? 이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분명한 답을 얻질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의 피로 사신 것 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거룩할 수밖에 없습니다. 피로 사신 거니까. 그냥 피가 아니고 예수님의 피니까, 그 피를 흘려서 사신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거룩하고 성결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거룩과 성결을 더럽히면 교회의 생명은 끝이 납니다. 교회의 생명이 끝이 나면 주님의 사역이 중단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구령이 중단이 됩니다.
똑같은 상황이 구약에도 나옵니다. 여호수아 때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처음시기에 아이 성과의 전쟁에서 아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도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며 몇 가지를 자신의 집에 감추었습니다. 이러한 아간의 속임으로 여리고성을 이기며 승승장구하던 이스라엘의 전진은 방해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거룩과 성결함이 지켜져야 하는 것인데 이제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어야하는 시점에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백성을 정결케 하셔서 다시 전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처음시기에 아나니야의 성령을 속이는 이러한 일은 영적인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던 초대교회를 가로막는 하나의 큰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를 보호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부인하고 부정하기 위해 사람의 사악한 욕심을 통하여 세상적 안목과 세상적 사고를 교회에 심으려는 사탄의 계책이었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교회의 순결, 성결, 정직성을 파괴하려고 비집고 들어오는 계략이었습니다. 그래서 아간에게 단호하셨던 것처럼 아나니아에게 단호하셨습니다. 그래서 회개의 기회를 박차고 거짓과 불 회개에 빠진 아나니아 부부는 둘 다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서 혼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초기 예루살렘교회처럼 기도와 교제, 봉사와 전도, 바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께 죽도록 충성할 때 생명의 면류관을 받고 이 땅에서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초대교회에 성도들 중에는 바나바 같은 권면과 위로와 돌보는 성도들도 있었고 경건의 모양만 있는 아나니아 같은 성도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바나바가 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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