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골 함성
과연 우리 사회는 정치의 완성은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나라의 정치 특성을 꼬집는다면 명분에 살고 죽는 특유의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는, 남들이 알아주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현실의 한국 정치 특성으로는 정치의 완성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 되겠다.
내가보는 정치는 단순한 정치의 욕구만으로는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안정의 욕구, 인정의 욕구, 지배의 욕구를 가진 채로는 정치의 과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경제 문제나 사회적 종교 문제, 인종문제 등은 모두 가라(假我)라는 허상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결국, 그 假我는 안정의 욕구, 인정의 욕구, 지배의 욕구를 추구하는 것이 假我이기 때문이다.
지배의 욕구는 공포를 주어서 지배하고 또 인정의 욕구는 자신만을 섬기기를 요구한다.
또한, 안정의 욕구는 자신이 버림받는 데 대한 불안으로 인해 겁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불신하는 데 대해 두려워하게 된다.
사람들이 불신을 하게 되면 자기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서 볼 때 인간 간에 대한 축복과 사랑과 교화 등이 본성이라고 본다면
오욕에서 비롯된 욕망에 빠진 타락은 지배의 욕구와 인정의 요구, 안정의 욕구로 가득 차있다.
우리는 정치 과잉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의 과잉현상은 어떻게 보면 정치의 개혁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의 현실정치는 어떠한가.
연예계나 스포츠계에나 있을법한 오빠부대를 동원한 선동정치로 말미암아
포퓰리즘의 위험을 초래하면서까지 정치혐오주의를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간의 본성 그대로라면 과잉의 현상은 분명 개혁이 수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오욕의 타락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정치의 욕구는 다분히 타인 지향적이다.
정치가 자신의 내면세계보다는 남이 알아주도록 요구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얼핏 보면 순수성과 이타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가 쉽다.
그러나 결국에는 속물적인 게임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교과서적인 이론을 앞세워 사생결단의 혈투를 벌이면서 까지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는 것은 그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보편적 의미로 말하는 정치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의 욕구만 가지고 달리고 인정만 받으면 된다는 단순논리에 편향된 정치야말로
사회적 갈등만 심화시키고 분열만 초래할 뿐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 사람들이여! 정치가들이여!
시행착오를 위하여 살지 말고 시행착오를 벗어날 수 있는 낮은 자세와 목소리를 들려줘야한다.
더 이상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지 말고 인간 본성으로 돌아가 진정한 완성을 위하여 매진하기를 바란다. (松柱)
《시론일반》
-松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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