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삼월 중순인데도 눈이 내린다. 교직에 첫발을 내딛는 햇병아리 교사를 반기는 서설이다.
이불 보따리와 자취를 할 수 있는 양은 밥솥과 그릇 몇 개 그리고 어머니가 정성 들여 만들어 주신 박바가지가 전부인 개나리 봇짐을 싣고 가는 리어카꾼의 뒤를 따라가는 길은 참으로 멀기만 하였다.
임동에서 이 십리 길이라 하더니 도랑가로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돌아 돌아 계속 높은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삼월의 해는 짧아 벌써 산그늘이 길어져 가고 음산한 기분마저 들었다. 드디어 앞뒤가 산으로 꽉 막힌 한 골짜기를 지나니 높은 산밑에 조그마한 학교가 보였다. 세 건물로 되어 있었는데 왼쪽 건물은 교실 한 칸으로 따로 지어진 것 같고, 가운데는 검은 송판으로 벽을 둘러 싼 오래된 건물이고 오른쪽에는 세 칸의 교실 정도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교실 옆에 토담으로 둘러쳐진 초가 지붕으로 지어진 사택이 있었다. 방이 네 칸으로 되어 있었는데 오른쪽 두 번째 방이 나의 거처로 정해져 있었다. 됫박 만한 방에 들어가 부엌 쪽으로 난 문을 열어보니 토담으로 둘러쳐 있기는 하나 밖이 훤히 보였다.
사글세방이었지만 대구에서 십 여년을 생활하다가 산촌 토담집 작은 방에 남폿불을 켜 놓고 앉으니 적막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산촌의 밤은 깊어 마당에 나서니 어느 새 하늘의 별들이 모두 뜨락으로 내려왔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드는 산촌 마을의 밤!
모든 지우와 격리된 것 같은 고독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서 초임 학교에서 토담집 사택 첫날밤은 몸을 뒤척이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방문이 훤해지는 것을 보니 아침이 밝아 오는 것 같았다. 마당에 나서니 산촌 공기가 맑다못해 시리도록 차가웠다. 어릴 적 고향에 온 것 같았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것에 대한 신기함으로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산촌의 까마잡잡하고 깡마른 아이들이 벌써 학교에 와 있었다. 교무실에 들어가니 작년 12월에 발령 받았다는 갓 스무살 정도인 얼굴이 동그스름하고 귀엽게 생긴 처녀 선생님이 나보다 먼저 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반겨 주었다. 조금 있으니 같이 발령 받은 동기 여선생님, 마령에서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문 선생님 그리고 교장, 교감, 교무 선생님 모두 자전거로 출근하셨다.
4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 아이들은 모두 산과 개울이 빚어내는 멋진 풍광 속에서 우리 들꽃 흐드러지게 피고 지는 아름다운 산길을 이 십여리 정도나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까만 고무신에 책보자기를 어깨에 둘러메고 학교에 오고 여학생은 허리에 책보를 동여 메고 학교에 왔다. 모두 순진하고 영롱한 눈빛이었다. 높은 산 속에서 까만 밤에 맑은 별빛을 먹고 자라 착하기 이를 데 없고 부끄러워 고개 들지 못하는 밤하늘 아기별처럼 초롱초롱한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대학 다닐 적에 배운 데로 열심히 잘 가르치겠다는 의지 하나로 나의 첫 교직생활은 산촌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어떻게 가르치면 학습 지도를 잘하는지 인성교육을 잘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말 열심히 가르쳤다.
퇴근 후 사택에 오면 밤이 이슥하도록 줄판에 원지를 놓고 시험 문제를 내어 한 장씩 등사하여 아이들에게 시험을 쳤다. 원래 악필이라 글씨가 엉망이고 등사가 깨끗하지 못해도 아이들은 매 맞을 걱정에 지레 겁을 먹고 아무 말 없이 시험을 잘 쳐주었다.
매일 목이 아플 정도로 열심히 가르쳤지만 아이들의 학력은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남학생 여학생 구분 없이 손바닥도 두들기고 엉덩이도 때리고 종아리도 줄이 서도록 두들겼다. 오직 학력을 향상시키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아이들은 나의 생각 되로 되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무섭기로 소문이 난 총각선생님이 되었고 운동장에 아이들이 놀다가도 나만 보면 모두들 도망가기에 바빴다.
토요일이 되면 고향집에 가기 위해 개울을 따라 난 길로 이 십여리 나 되는 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임동까지 한시간 반정도 걸어서 내려왔다. 온 시야가 모두 녹색으로 둘러 쌓인 산촌 작은 마을들을 지나면서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두고 온 까만 눈동자의 우리 반 아이들의 모습을 그려 갔다.
두어 달 지나니 적막감이 평온한 친근감으로 바뀌고 아이들의 모습이 항상 눈언저리에 삼삼이며 아이들 사랑이 새록새록 자라나고 있었다.
산촌 마을의 총각선생님.
동네 처녀들이 저녁이면 하나 둘씩 자주 내 뜨락에서 서성거렸다. 우리 반 학모이기도 한 이웃집 아주머니는 여동생을 내게 시집 보내려고 반찬 세례로 나의 여린 가슴을 멈추게도 하였다.
대구에서 돈을 벌어가면서 대학 다닐 적에는 어려움이 참 많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산촌 마을 작은 학교의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 예쁜 처녀 선생님이 세분씩이나 같이 생활하면서 순진한 아이들과 생활하는 것은 날마다 즐겁고 기뻐 꿈결같은 날들이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같이 운동장에서 뛰기도 하고 놀기도 하면서 동심의 세계로 흠뻑 빠져들었다.
가정 방문을 가 보았다. 산촌의 아이들은 무척 순진하고 부끄러움이 많아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시니 토담집 골목 사이로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다가도 어느 사이에 숨어 버리고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가 또 다른 돌담 골목에서 어른거렸다. 온 동네가 산촌의 작은 밭과 논에서 농사를 짓는 학부모들이다. 대접할 것이 마땅하지 않으니 귀하디 귀한 생계란도 내어놓고 곶감도 내어놓았다. 어느 집 할 것 없이 모두 가난하게 살았지만 착하고 순한 산촌 사람들이었다.
온 산이 단풍으로 붉게 물든 늦가을 어느 날 육성회비를 받으러 교장선생님과 몇 분의 선생님이 함께 대곡으로 갔다. 살림살이가 오죽했으면 아이들 육성회비를 미루고 못 내었을까?
산비탈 밭을 일구어 겨우 겨우 살아가는 화전민이나 다름없는 학부모님들.
우리 아이들은 모두가 된장찌개에 보리밥 한 그릇 겨우 먹고 먼 산길과 굵직한 바위들이 얼키설키 널려있는 개울 길을 이십 여리나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깡마른 아이들의 얼굴에는 마름 버짐이 피고 무척 초라했다. 점심 시간에도 책보에 싸온 보리밥 도시락을 먹고 또 이십 여리의 산길을 걸어서 집에 가고 또 내일 학교에 와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눈물겹도록 어려운 생활이었다.
들꽃 피고 산새 울음소리 청아한 이십 여리의 산길을 육 년씩이나 잘 다녔던 우리 임동동부초등학교 아이들. 4학년과 5학년 이년을 그 곳에서 보내고 평촌초등학교로 전근 갔지만 초임교사 시절의 그 임동동부초등학교는 뇌리에서 어제처럼 생생하며 지나간 날들이 영화처럼 지나간다. 그 까까머리의 얼굴에 버짐 피고 깡마른 아이들이 이제는 불혹의 나이를 넘어 만났다.
"32년 만에 선생님 처음 뵈어요. 선생님 모습은 아직 그대로인데요." 이순을 바라보는 나를 보고 중년의 아주머니가 아니 32년 전의 열 한 살 여학생이 하는 말이었다.
대구에서, 부산에서, 울산에서 모인 임동동부초등학교 초임 제자들이 내가 올해 삼월에 교장으로 부임하여 근무하는 동해의 한적한 바닷가 양포항의 솔밭 횟집에 열 여섯 명이나 모였다.
중년의 신사들이 기어이 나를 앉히고는 건강하시라면서 큰절을 한다.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같이 나누는 소주잔이 꿀맛이며 유심히 바라다 본 중년의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얼굴에는 열 한 살 초등학생 때의 모습이 살아나고 총각선생님의 청년 시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고 온 고향이 하도 그리워, 선생님이 그리워 찾아 온 초임 제자들아. 그대들의 이마에도 주름살이, 흰 머리카락들이 보이는 것을 보면 삼십 이년이란 세월 앞에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러나 그 긴 시간들이 지났지만 생각은 그때 그 시절로 너무도 쉽게 돌아가는구나.
생활에서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그대들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그 원천은 임동동부초등학교를 둘러 싼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의 맑은 물에서 흘러 온 것이리라. 꽁보리밥에 된장 먹고 어렵게 자랐지만 마음은 항상 고향 마을의 초등학교 시절의 위동과 대곡 에 있기에 그대들의 모습이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리라.
(2003.06.08)
첫댓글 40년전 제가 임동동부 2~3학년때 4~5학년 담임 하셨던 이태석 선생님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