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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우의정 이상진(右議政李尙眞)
[생졸년] 1614년(광해 6)~1690년(숙종 16) / 76세
조선후기 이조판서, 대사간,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천득(天得), 호는 만암(晩庵). 부윤 이정란(李廷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준길(李遵吉)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 이영선(李榮先)이며, 어머니는 참판 민여임(閔汝任)의 딸이다.
-------------------------------------------------------------------------------------------------------------------------------------------------------우의정 이공 신도비명(右議政李公神道碑銘) - 윤증(尹拯)
금상 15년 기사년(己巳年,1689, 숙종 15) 5월에 나라가 불행하여 중궁이 폐위되어 사제(私第)에 거처하게 되었다. 전 판서 오두인(吳斗寅,1624~1689), 전 응교 박태보(朴泰輔,1654~1689) 등이 간하다가 죽으니 중외가 몹시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영중추부사 이공은 당시 나이 76세로 바야흐로 나이를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날 때였는데, 차자를 올려 극력 간언하다가 극변(極邊)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라는 명을 받았다. 가을에 사면되어 돌아왔다. 다음 해 경오년(庚午年, 1690, 숙종 16)에 부여(扶餘) 금강(琴岡)의 우사(寓舍)에서 졸하였다.
4년이 지난 갑술년(甲戌年, 1694)에 상이 뉘우쳐서 중궁을 복위시키고 오두인 등에게 관작을 추증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승지를 보내 공의 묘소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대개 폐위된 왕후가 복위된 것은 역사상 유례 없는 일로, 일월이 다시 밝아져 성덕이 더욱 빛나고 덕음(德音)이 널리 펴지며 은혜가 땅속에까지 미쳤으니 온 나라가 모두 기뻐하였다.
태학사 오공 도일(吳公道一)이 공의 행적을 매우 잘 기술하였는데, 공의 손자 우춘(宇春)이, 내가 공에게 깊이 인정을 받았다는 이유로 와서 신도비명을 부탁하니, 감히 하지 못하겠다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삼가 살피건대, 이씨의 선조는 전의(全義) 사람이다.
휘(諱) 도(棹)라는 분이 있어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일한 공로로 책훈되어 태사(太師)의 지위에 올랐으니, 이분이 시조이다. 이로부터 양반 가문이 되었고 경상(卿相)의 지위에 오른 자도 많았는데 우리 왕조에 이르러 더욱 번창하였다. 고조 휘 승효(承孝)는 홍문관 수찬이다.
증조 휘 정란(廷鸞) 또한 문과 급제하여 부윤 벼슬에 올랐고 임진년(壬辰年,1592, 선조 25) 왜변 때에 적을 물리친 공로가 있었으며 총재(冢宰)에 증직되었다. 조부 휘 준길(遵吉)은 일찍 세상을 떴는데 이상(貳相)에 증직되었다. 고(考) 휘 영선(榮先)은 지조가 있었고 사직서 참봉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삼대의 증직은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증직된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참판을 지내고 좌찬성에 증직된 여임(汝任)의 따님이다.
공의 휘는 상진(尙眞)이고 자는 천득(天得)이며, 호는 만암(晩庵)이다. 만력 갑인년(甲寅年,1614, 광해군 6) 5월 29일에 전주(全州)의 성 남쪽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진중하고 비범한 아이였고 겨우 10세에 덕과 기량이 걸출하였고 총명함이 남달랐다. 외조부에게 학업을 받아 서사(書史)를 두루 섭렵하였는데, 민공이 기특하게 여겨 항상 말하기를, “이씨 가문을 크게 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하였다.
성동(成童)에 문사(文辭)를 지었는데, 식견 있는 자가 문장에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병자년(丙子年,1636, 인조 14)에 소과(小科)와 대과(大科)에 합격하고 아직 복시(覆試)를 치르지 않았을 때 오랑캐의 변란을 만났다. 노부모를 모시고 골짜기에 들어가 적병을 피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경술(經術)에 전념하였는데 명망이 자자하여 이미 동류 중에서 빼어났다.
을유년(乙酉年, 1645)에 의정공이 병이 났는데 그때 마침 별과(別科)가 있자 공에게 응시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공은 부친을 위해 마지못해 나아갔는데, 상국(相國) 이경석(李景奭)이 공의 글을 보고 탄복하기를, “이 사람은 나라를 다스릴 인재이다.” 하였다. 드디어 병과(丙科)에 뽑혀 성균관에 분속되고 군자감 참봉에 조용되었다가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에 올랐다. 정해년(丁亥年,1647)에 비로소 검열에 제수되고 대교, 봉교에 올랐다.
경인년(庚寅年,1650, 효종 1)에 전적에 오르고 감찰, 병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정언에 제수되었으니, 이때는 바로 효종대왕 원년인데, 승지 신면(申冕)이 올린 사직 상소의 내용에 분노와 원망이 많이 들어 있기에 공이 파직하기를 논하자 상이 논조가 과격하다고 지척하고 외직으로 내보내 의흥현(義興縣)에 보임시켰다.
임진년(壬辰年,1652) 봄에 특별히 사서(司書)에 제수되었으니 이는 신면이 패망하자 상이 공을 생각한 것이다. 당시는 현종이 세자가 되어 입학하려는 때였는데, 공이 상소를 올려 윤순지(尹順之)가 박사 직임에 부적합하다고 논하였다.
곧이어 지평에 제수되어 성상의 유지를 받들어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는 예리함이 너무 드러나고 덕을 베푸심이 넓지 않아서, 뭇사람의 생각이 위로 통하지 못하고 실제의 은혜가 아래에 미치지 못합니다. 아랫사람을 가벼이 여기면서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를 자못 좋아하고 붕당을 몹시 미워하면서도 현사(賢邪)를 살피지 않으십니다.
그런즉 전대의 패망을 거울로 삼아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옛사람이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조석윤(趙錫胤)을 어찌 물러나고자 한다고 하여 죄줄 수 있겠습니까. 유계(兪棨)의 유아(儒雅)하고 박학함이 맑은 조정에서 영원히 버려지게 되었으니 몹시 애석합니다.
좌상 김육(金堉,1580~1658)은 평소 중망을 입었는데 근래 대동(大同)의 한 가지 일로 유신(儒臣)들과 불화하니 모양이 좋지 않습니다. 아, 대동을 행하고자 하는 것은 공적인 마음이고 어렵게 여겨 망설이는 것도 공적인 마음입니다. 국가의 일은 한 집안의 일이 아닌데, 어찌 그 사이에 사사로운 감정을 둘 수 있겠습니까.
전 의정 조익(趙翼,1579~1655)과 전 판서 김집(金集)은 경학과 덕망이 유림의 으뜸이고 성의와 예를 다하였으니 어찌 부를 만한 도리가 없겠습니까.” 하고, 이어 궁궐이 엄숙하지 않아 내사(內司)가 근래 연줄을 통해 농간하는 습성, 궁장(宮莊)을 넓게 차지하고 궁노(宮奴)가 자횡하는 폐단을 언급하였으며 끝에서는 다시 흉년이므로 첨정(簽丁)을 정지하고 묵은 세금을 파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렸는데, 좌상이 공의 상소로 인하여 사면하니 상이 특지로 공을 파직하였다. 좌상이 차자를 올려 도로 거두기를 청하자 상이 윤허하며 말하기를, “경의 미덕을 이루어 주노라.” 하였다. 공이 이로 인하여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겨울에 병조 좌랑에 제수되고 경기 도사로 옮겼다.
계사년(癸巳年,1653, 효종 4)에 체직되어 사서에 제수되고 직강으로 옮겼다. 갑오년(甲午年,1654)에 다시 정언에 제수되고 또 시사(時事)를 진달하기를, “전하께서 마음을 가다듬어 반성하시고 진념하여 구휼해 주시는 일이 결국 한 가지도 효과를 보는 것이 없습니다.
때 아닌 일과 긴급하지 않은 일로 하늘의 마음을 위반하고 백성들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한둘이 아니니, 하늘의 재앙과 백성들의 원망이 어느 때나 그치겠습니까. 궐내의 시비(侍婢)는 공노비로 뽑는 것이 금석지전(金石之典)인데 전하께서는 어찌 차마 사령(使令)을 뽑는 일 때문에 침해를 양민에게까지 끼쳐 조종의 법을 무너뜨리십니까. 노복을 풀어 백성을 침학한다면 백성의 부모가 된 실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는 족히 나라가 망할 하나의 징조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대신과 삼사는 함구한 채 상관없는 일처럼 보고 있습니다. 아, 전하께서 이미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기 꺼리시니, 뭇 아랫사람이 말하기를 경계하는 것이 괴이할 것 없습니다. 신은 지금 이후로 총명함이 가려서 사슴과 말의 모양이 바뀌어도 또한 감히 말하는 자가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1593~1664)가 주찬(酒饌)과 기악(妓樂)을 준비하여 영상의 집에 벌여 놓고 대신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는데 대신이 편안히 그것을 받았으니, 조정의 기강이 무너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왕이 환란을 걱정할 때는 여러모로 극진히 해야 하는데, 어좌의 지척에서 군졸에게 검을 쓰도록 명하여 서슬 퍼런 검이 빽빽이 늘어서고 부르짖는 소리가 귀에 쟁쟁하였으니, 높이 우러러보지 않는 것은 이미 말할 것도 없고 백제의 황창랑(黃昌郞)의 고사를 본보기로 삼을 만합니다.
승여(乘輿)가 빨리 달리면 재갈이 풀려 전복될 걱정이 있는데 능(陵)을 배알하는 행차에 어수(御手)로 채찍을 휘두르고 또 도중에서 어가를 멈추고 활 쏘는 것을 구경하셨으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심지어 좁은 소매와 짧은 옷, 새로 제작한 궁검은 또 무슨 일입니까. 거(莒) 땅에 있던 때를 모두 잊은 채 스스로 강해질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의복, 기계 따위를 모두 흠모하고 본받으니 이천(伊川)의 야제(野祭) 정도일 뿐이 아닙니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저도 모르게 통곡합니다.” 하였다. 그 밖에 성학(聖學)을 힘쓰고 절검을 숭상하고 인재를 구하고 번곤(藩閫)을 가려 뽑고 변방의 백성을 돌보아 주는 일 등과 같은, 무려 만여 마디의 말이 모두 당시 기휘(忌諱)를 적절히 지적한 것이었다.
상은 말이 매우 곧다고 답하였다. 영상 정공 태화(鄭公太和)가 공의 말로 인해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그 말이 광망(狂妄)하여 혹 나를 진(秦)나라 이세(二世)에게 비하고 혹 거 땅에 있던 때를 잊은 채 그 제도를 흠모한다고 곤욕을 주기도 하였는데, 일소(一笑)에 부친 것은 언로를 위해서이다.” 하였다.
공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자고로 신하가 임금에게 간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이 신하에게 곤욕을 당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논한 두 신하에 대한 일은 단지 조정의 체통을 높이고자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모두 좋다.” 하였다.
사서와 지평에 전보되었다. 당시 홍우원(洪宇遠,1605~1687)이 조 귀인(趙貴人)의 역모 사건을 논하는 중에 선군(先君)이 총애하던 여인은 이미 죽고 사랑하던 아들은 유배되었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상이 진노하였다. 연석의 신하들이 즉시 죄를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삼사를 논척하자, 공은 인피하며 말하기를, “홍우원의 상소에 나온 말이 비록 망발이기는 하나 그가 진달한 것은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니, 대번에 죄를 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헌장(憲長) 이시해(李時楷,1600~1657)가 상소하여 홍우원을 죄주기를 청하면서 공 및 조진석(趙晉錫), 서정연(徐挺然) 등이 허황된 논의를 펴서 구원하기를 주도하였다고 논척하였다. 이에 공이 또 인피하였는데 이시해는 지나치게 무함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공이 이 일로 인하여 외직을 구해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보임되었다. 다음 날 상이 하교하기를, “이상진의 죄는 조진석과 같지만 전날 진달한 말을 내가 가상히 여겨 장려하였으니 직신(直臣)을 죄줄 수 없다. 단지 현임만 체직시키라.” 하였다. 이는 조진석이 앞서 삭출을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공이 고향으로 돌아가 은신하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양호(兩湖)를 염문(廉問)하고 오라는 명을 받았다. 도중에 장악원 정에 제수되었다.
을미년(乙未年,1655, 효종 6) 봄에 일을 마치고 복명하자 상이 즉시 인견하여 이르기를, “듣자니 병을 얻었다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하였다. 이어 연로(沿路)에서 보고 들은 것을 물었는데, 아뢴 대로 시행된 일이 매우 많았다. 부모의 병 때문에 정고(呈告)하고 돌아가자 바로 집의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건너뛰어 승지에 제수되었다.
사직 상소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그대의 충직함은 실로 발탁하여 쓰기에 적합하다.” 하였다. 가을에 또 부모의 병 때문에 사직하니, 특별히 약물을 하사하고 직임을 띤 채 고향에 내려가도록 하였다. 체직되어 형조 참의가 되었다가 병조로 옮겼다. 또 승지에 제수되었다. 상소를 올려 인재를 구하는 도리를 진달하였는데 끝에 가서 성상의 뜻을 세우고 성상의 도량을 넓히라는 뜻을 말하였다.
이에 비답하기를, “일전에 연석에서 그대가 이런 말을 꺼냈는데 끝을 맺지 못하여 내가 다시 묻고자 하였으나 묻지 못하였다. 이번에 진달한 말이 근심하고 사랑하는 충심에서 나온 것이니 내가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노라.” 하였다. 또 부모의 병 때문에 세 번 휴가를 청하고서야 상이 비로소 돌아갈 것을 허락하고 약물을 하사하였다. 경상 감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마치고, 연이어 승지에 제수되었다. 공은 편모(偏母)가 연로한 까닭에 곁을 떠나 관직에 나아가려는 마음이 없었다. 이에 거듭 소장을 올려 사정을 진달하였는데, 모친을 모시고 올라오라는 명을 받았다. 공이 나아가 사은한 다음 봉양하는 데 편하도록 한 고을을 맡기를 청하자, 상이 연석에서 반드시 근밀한 자리에 두고 싶으니 지방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타일렀는데, 말씀이 매우 온후하였다.
대신이, 효의 정치가 행해지는 세상에 의당 사사로운 인정을 생각해 주어야 한다고 하니, 상이 비로소 윤허하여 장성 부사(長城府使)에 제수하였다. 5개월간 재임하였을 때 송공 시열(宋公時烈)의 요청으로 인해 불러들여 승지에 제수하였는데, 모친의 병을 이유로 곧장 완산(完山)으로 돌아갔다.
기해년(己亥年, 1659) 여름에 예조 참의가 되어 조정에 돌아왔다. 상이 일찍이 조신(朝臣) 가운데 함께 큰일을 할 만한 자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었는데 특별히 공의 이름을 거론하였다. 얼마 안 되어 발탁하여 우윤(右尹)에 제수하였다.
공이 상소를 올려 사직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비단 경의 재주가 발탁해서 쓰기에 적합해서일 뿐 아니라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 또한 평소에 가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였다. 공이 갑오년(甲午年, 1654, 효종 5)에 한 번 상소를 올려 숨기지 않고 직언한 일이 있었는데, 엄한 비지를 내려 뜻을 꺾으려고 하였으나 종내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상이, 공이 남보다 충성스럽고 심지가 굳음을 깊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은대(銀臺)에서 충직한 자로 뽑아 포상하였는데 전후로 곡진히 내린 하교가 다른 신하보다 특별했다. 대사간으로 옮겼다. 5월에 효종이 승하하니 공이 거처와 음식을 방상(方喪)의 예로 하여 성의를 다하였다.
공은 신하로서 스스로 극진히 할 만한 일이 산릉(山陵)에 있다고 여기고 몸소 기내(畿內)의 여러 산을 살핀 다음 네 번 상소를 올려 헌의하였다. 이에 현종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비답을 내렸다. 승문원 제조를 겸하고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국장(國葬)이 끝나자 수고하였다고 말을 하사하는 은전을 받았다.
경자년(庚子年,1660, 현종 1)에 모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병이 한참 심할 때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였고, 거상 중에 다리가 마비되는 증상을 얻었는데 마침내 평생 고질병이 되었다. 삼년상을 마치고 연이어 이조 참판, 대사간,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경상 감사에 제수되었다. 당시 대동법(大同法)이 아직 영남에 시행되지 않아서 정무가 더욱 번잡하고 바빴는데 공이 부임하여 남김없이 해결하니, 송옥(訟獄)이 차츰 없어졌다. 흉년이 들어도 백성들이 떠돌아다니거나 굶어 죽는 것을 면하였고 시절이 한가로운데도 군정(軍政)을 잘 정비하였다.
인재를 선발하고 탐관오리를 내쫓으며 완악한 아전을 통제하니 위엄이 행해지고 은혜가 베풀어졌다. 이에 정사가 이루어지고 폐단이 제거되니 한 도가 일제히 칭송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빚을 징수하려는 섬오랑캐가 있었는데 옆 사람이 편을 들어 구원해 주자 분노하여 찔러 죽였다.
공은 우선 계청하여 빚을 진 우리나라 사람을 효시한 다음 도주(島主)에게 공문을 보내 살인자를 잡아 지경(地境)에서 머리를 매달도록 하니, 왜인들이 두려워하며 굴복하고 감히 다시 금법을 범하지 못하였다. 도주가 공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연례적으로 보내는 예물 외에 별도로 더 헌납하니 공이 물리쳤다.
갑진년(甲辰年,1664, 현종 5) 여름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상소를 올려 마음을 닦아 반성하여 자신을 단속하고 밀린 옥사를 결단하며 백성들의 부역을 견감하고 군정(軍政)을 닦으라는 등의 일을 진달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665) 여름에 휴가를 청하여 고향에 내려갔다.
연이어 우윤과 간장(諫長)에 제수되었다. 누차 상소를 올려 책려하고 진작하는 방도를 말하고 거듭 민폐(民弊)를 고치고 군정을 정비하고 호적을 점검하는 일을 청하였다. 가을에, 온천 행차 뒤에 상전(賞典)이 너무 지나친 것을 논하는 중에 외척을 두둔하여 성덕에 누가 된다는 말이 있었는데 공론이 옳게 여겼다.
겨울에 뇌성의 변고로 인하여 상소를 올려, 임금이 강건한 도를 떨치고 편안히 노는 것을 경계하며 궁궐의 기강을 엄히 하고 실제의 효과에 힘씀으로써 하늘의 뜻에 부응하여 재앙을 풀며 쇠함을 일으키고 위태로움을 극복하는 터전을 만들기를 청하였다.
옥당 이민서(李敏敍,1633~1688)가 공이 앞의 상소에서 상전을 논한 내용이 억지로 구별한 점이 있다고 하여 공을 논척하였다. 공이 인피하니 옥당이 처치하여 공을 체직하였는데, 이미 동지춘추관사로서 사실(史實)을 상고하기 위해 명을 받들어 적상산성(赤裳山城)에 갔다.
다음 해 병오년(丙午年,1666) 1월에 일을 마치고 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돌아오자 바로 전일에 옥당에게 논척당했다는 이유로 상소를 올려 파직을 청하였다. 상이 경은 잘못이 없다는 내용으로 비답을 내렸는데 옥당이 또 파직시키라고 논척하였다. 당시 조정의 논의가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으므로 공은 이때에 물러갈 뜻이 더욱 굳어져서, 우윤에 제수되었으나 두 번 상소를 올려 휴가를 청하였다.
대신이 호적의 일이 급하다는 이유로 아뢰어 체직시키니, 공이 즉시 연풍(延豐)의 온정(溫井)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충주 가흥(可興)에 이르러 어떤 사람의 농가를 빌려 조양(調養)하였다. 1년을 지내고 도로 고향인 완주로 돌아갔다. 가는 곳마다 궁색하여 다른 사람들은 시름을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공은 여유 있고 한가하게 지내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대개 5년 안에 소명이 끊임없이 내렸으니, 감사가 두 번, 이조 참판이 두 번, 공조 참판이 세 번, 양사의 장관이 10여 번이었는데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사직 상소를 올릴 때마다 심회를 진달하였는데 말이 반드시 지극히 간절하였다.
신해년(辛亥年,1671, 현종 12)에 큰 기근이 들자 비국의 천망으로 수원 부사(水原府使)에 제수되었다. 공은 사직을 허락받지 못하자 말하기를, “백성들을 진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을에 부임하는 것은 옛사람도 면하지 못한 것이다.” 하고 마침내 부임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길에서 굶어 죽는 일이 잇달아 발생했는데 공이 정성을 다해 위무하고 봉급을 덜어 구제하였다. 농사짓는 자에게는 날마다 양식을 지급하여 백성들이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으므로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송덕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고 있다.
다시 경상 감사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사직하였다. 임자년(壬子年,1672)에 연이어 간장(諫長), 우윤, 예조 참판, 헌장(憲長)에 제수되었는데 성묘를 위해 휴가를 받아 남쪽으로 내려갔다. 오래지 않아 승진되어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연달아 상소를 올려 힘써 사양하였는데 끝내 허락받지 못하였다. 10월에 이조 판서로 옮겨졌는데 연달아 사직 상소를 올렸다.
계축년(癸丑年,1673)에 동지성균관사를 겸임하였다. 여름에 영릉(寧陵)을 천장(遷葬)하는 논의가 있어 공경(公卿)과 삼사(三司)에게 봉심하도록 명하였는데, 공은 각질(脚疾)로 인해 가지 못하고 면직을 청하였다. 상이 참판으로 하여금 대신 가도록 하였는데,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공이 병으로 핑계 댔다고 탄핵하고 허물을 끌어 모아 비난하였다.
대개 공이 항상 그 사람됨을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여 청망(淸望)을 막고자 했는데, 정유악이 그것을 알고 먼저 발의한 것이다. 신공 익상(申公翼相)이 옥당에 있으면서 상소를 올려 모함이 지나친 정상을 지척하니 물정(物情)이 흔쾌하게 여겼다.
공이 교외로 나가 세 번 상소를 올려 대죄하니 체차되어 좌참찬이 되었다. 여강(驪江)에 머물면서 사정을 진달하고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대사헌으로 옮기고 또 이조 판서로 옮겼다. 숭정대부에 오르고 판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
삼성(三省,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을 통틀어 이르던 말)의 옥사가 있자 상이 별유(別諭)를 내려 특별히 부르고 온화한 유지로 위로하고 타일렀다. 이에 공이 마지못해 출사하였는데, 출사하여서는 공도(公道)를 넓혀 막히고 답답한 자를 소통시키고 청탁을 근절하였다. 또 변통하여 참하관을 천승(遷陞)하도록 아뢰어 적체됨이 없게 하자 논의하는 자들이 편하게 여겼다.
갑인년(甲寅年,1674, 현종 15)에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여 6월에 국장(國葬)을 치른 뒤에 병으로 사직하니, 상이 의원을 보내고 약물을 하사하였다. 차자를 세 번 올리니 체직되어 지중추부사에 부직되었다. 또 좌참찬에 제수되었다. 당시 대왕대비의 복제를 개정(改定)하는 문제로 회의하였는데, 이 일로 대신이 유배의 처벌을 받고 예관이 나수(拿囚)되었다.
공이 아뢰기를, “예가(禮家)가 모여 논쟁하는 것은 본래 노할 일이 아닌데, 우레가 치듯 갑자기 진노하시니 분위기가 참담합니다. 바라건대 평온한 마음으로 차분히 생각하시어 속히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였다. 8월에 현종이 승하하고 금상이 계승하여 즉위하자, 다시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다.
당시 당인들이 요직을 차지하여 선왕이 대신을 죄준 뒤를 이어 예론을 빙자하여 제일 먼저 송상 시열(宋相時烈)을 공격하니 조정이 혼란스러워졌다. 공이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선왕이 전례(典禮)를 감정하여 죄가 수상에 그쳤습니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어찌 더 이상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한 송시열이 효묘께 인정을 받은 것이 어떠하였는데, 감히 조금이라도 폄하하는 뜻을 품었겠습니까. 한번 이러한 논의가 일어나고부터 옛 신하들이 거의 다 축출되었는데, 이처럼 끊임없이 한다면 반드시 위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깨달아 뉘우친다면 그나마 구제될 수 있습니다. 신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 이러한 때 죄받을 것이 두려워 함묵한다면 어떻게 선조(先朝)의 은혜에 보답하고 전하께 충성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을묘년(乙卯年,1675, 숙종1) 1월에 무지개의 변고로 인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마음을 닦고 학문을 밝히며 궁금(宮禁)을 단속하고 현사(賢邪)를 구별하며 간언을 따르고 받아들이는 것이 나라를 튼튼히 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방도입니다.” 하고, 또 차자를 올려 죄를 입은 여러 신하들을 변론하여 구원하였다.
사간 김빈(金賓)이 상소하여 공을 비난하니 공이 마침내 누차 차자를 올려 체직된 다음 차자를 남겨 둔 채 도성을 떠났다. 도승지 김석주(金錫冑)가 아뢰어 별유로 불렀으나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고 아산(牙山)에 우거하였다. 연이어 지중추부사와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상이 옛 신하 대부분이 출사하지 않았다 하여 특지로 추고하게 하였다. 공이 강 건너편까지 와서 나와 대명(待命)하니, 판윤에 제수하고 곧바로 추함(推緘)으로 조율하여 고신(告身)을 빼앗았다. 겨울에 부여(扶餘)로 옮겨 우거하였으니 이는 백마강(白馬江)과 주변 산수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무오년(戊午年,1678)에 특별히 서용되어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경신년(庚申年,1680)에 조정이 새로워지자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다. 여름에 역옥(逆獄)이 있음을 듣고 즉시 명을 받들어 나아갔는데 도착하기도 전에 체직되고 좌참찬 겸 선공감제조가 되었다.
연달아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5월에 또 판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 입대(入對)하라는 명을 받고 각질(脚疾)로 인해 사양하였으나 부축을 받고 전(殿)에 오르도록 명하였다. 이후로는 출입할 때마다 그렇게 하는 것을 규례로 삼았으니 특별한 대우였다. 공이 누차 병 때문에 물러나 쉬게 해 달라고 힘써 청하였으나 온화한 말씀으로 유시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평시서 제조(平市署提調)를 겸임하였다. 당시 시전(市廛) 백성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폐단이 많이 있었는데 공이 계달하여 변혁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7월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어 누차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에 승진하여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네 번 상소를 올려 힘써 사양하였으나 비지의 내용이 갈수록 더욱 간곡해졌다. 김익훈(金益勳,1619~1689), 이사명(李師命,1647~1689) 등을 보사 공신(保社功臣)으로 추가하여 녹훈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공이 수상 김수항(金壽恒,1629~1689)과 의논이 합치되지 않아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미 녹훈 대상을 결정하였고 또 회맹(會盟)을 거쳤으니 계속 추가로 기록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이 사람들은 애초에 감정(勘定)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그 수고한 공적이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조종조에서 행하지 않던 일을 구차히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개 추록에 대한 논의는 김상 석주(金相錫胄)의 주장이었다. 이때에 수상이 단독으로 감정을 주관하였고 공은 참여하지 않았다.
6월에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누차 근시(近侍)를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8월에 나가서 정사를 보았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1536~1584)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1535~1598) 두 현신을 문묘에 종향하는 데 대해 헌의하였다. 9월에 휴가를 받아 선산에 성묘하였다. 조정에 돌아와 흉년이 들어 고달파하는 백성들의 실정을 진달하고 부역을 견감하고 비용을 절약할 것을 청하였다.
임술년(壬戌年,1682, 숙종 8) 1월에 차자를 올려 규계(規戒)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또 병을 이유로 사직하여 체차되고 판중추부사에 부직되었다. 계해년(癸亥年,1683)에 기로소(耆老所)에 참여하였다. 상소를 올려 예법대로 치사를 허락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승지를 보내 돈유하였다.
여섯 번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 응교 박태손(朴泰遜) 등이 옥사를 무고한 김익훈(金益勳,1619~1689), 김환(金煥) 등의 죄를 논하다가 서로 잇달아 견책을 받자 공이 차자를 올려 훈척 대신이라는 이유로 언관을 죄주어서는 안 된다고 진달하였다.
훈적(勳籍)을 추가로 결정한 것과 옥사를 무고한 일에 대해 부제학 조지겸(趙持謙,1639~1685), 사간 오도일(吳道一,1645~1703), 교리 한태동(韓泰東,1646~1687) 등이 매우 준열하게 논의하니, 김석주가 논척하여 멀리 좌천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에 조지겸(趙持謙,1639~1685) 등이 모두 또 죄를 받자 공이 또 차자를 올려 진달하기를, “지금 간신(諫臣)을 출척하는 일은 실로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 중요 사안입니다. 생각건대 이번에 견책을 받은 여러 신하들은 거의 모두 연소한 자들입니다.
기휘를 피하지 않고 풍헌(風憲)을 힘써 지켰는데 불행히도 김익훈과 관련된 한 가지 일이 풍파를 일으켜서 근거 없는 말이 분분히 떠돌고 사실과 다른 비방이 무리하게 보태졌습니다. 아, 세상의 도리가 날로 떨어져서 곧은 기개가 떨쳐지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에 도리어 강단 있고 과감하게 말하는 부류들을 일체 모두 논척하여 물리치니 장차 나랏일을 누구에게 맡길 것입니까.” 하였다.
이어 후사(喉司)가 나약하여 제대로 복주(覆奏)하지 못한 잘못을 논척하였는데, 말이 비록 행해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청의(淸議)를 견지하던 자들이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다. 가을에 선산에 가토(加土)하기 위해 휴가를 얻어 떠나려고 하면서 강연(講筵)에 입시하여 거듭 치사를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다.
상이 그때《심경(心經)》을 강론하고 있었는데 공이 아뢰기를, “《심경》한 책은 먼저 정일(精一)하여 경(敬)을 주장으로 삼는 것입니다. 필부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제왕이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사람 모양의 소상(塑像)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니, 그렇다면 임금이 신료와 일반 백성들에게 모두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매우 착실하다.” 하고 이어 좌우를 돌아보며 칭찬하였다. 파할 때에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 조정에 돌아오도록 유시하고 어의에게 약을 가지고 따라가도록 명하였다.
9월에 임실(任實)의 선영 아래에 머물면서 묘갈을 세우는 일을 경영하였다. 10월에 상이 두질(痘疾)을 앓는다는 말을 듣고 당일에 말을 달려 돌아가 궐문 밖에 이르렀는데 밤낮을 그곳에서 떠나지 않았다. 상의 기후가 겨우 평상으로 회복되었을 때 명성왕후(明聖王后)가 갑자기 승하하였으므로 성복(成服)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갔다.
갑자년(甲子年,1684, 숙종 10) 봄에 차자를 올려 애통함을 절제하시도록 상께 권면하고 겸하여 시정(時政)을 말하였다. 또 연이어 글을 올려 치사를 청하였다. 11월에 장렬대비(莊烈大妃)가 회갑을 맞은 경사로 인하여 인조조 시종신으로서 생존해 있는 자를 초계(抄啓)하도록 특별히 명하여 쌀을 하사하였는데 공도 그 가운데에 해당되었다. 슬픔과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하였다.
을축년(乙丑年,1685)에 또 차자를 올려 치사를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다. 공이 계해년(癸亥年,1683)부터 치사를 청하여 여러 해에 걸쳐 거듭 청한 것이 지극히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매양 송나라 사람의 “소장을 봉하여 몇 번이나 올렸는가, 시사를 매번 탄식한다.[封章凡幾上 時事每一嘆]”라는 구문을 읊었다.
9월에 강연에 입시하고 또 휴직을 청하였다. 이어 재변을 만나 마음을 가다듬어 반성하는 도리를 말하였다. 또 아뢰기를, “홍우원(洪宇遠)이 〈가인괘(家人卦)〉를 잘못 인용한 것은 그 본래 심정을 헤아려 보면 혹 용서할 만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민희(閔熙,1614~1687)가 ‘복선군(福善君)이 있다.’라고 한 말은 다른 증거가 없으며 유배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마땅히 참작해서 조처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옥당 김만길(金萬吉,1645~1673)이 관원 동료와 함께 공이 마음대로 원옥(冤獄)이라고 칭했다는 내용으로 공을 논척하였다. 공이 상소를 올려 대죄하니, 너그러운 비답으로 위유(慰諭)하였다. 응교 이이명(李頤命,1658~1722)이 김만길의 뒤를 이어 논척하면서 심지어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삼년상이 이제 겨우 끝났는데 바로 이러한 말을 한다.”라고까지 하였다.
이에 공이 상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고 그날로 나가 동작(銅雀) 촌사에 머물렀다. 이이명이 집의가 되자 정언 한성우(韓聖佑)와 함께 “공이 악독한 역적을 신구하였다.”라는 내용으로 합계하여 파직을 청하였다. 며칠 동안 연계(連啓)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정묘년(丁卯年,1687, 숙종 13) 1월에 사관을 보내어 별유(別諭)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장차 남쪽으로 돌아가려는데 또 근시를 보내 돈유하여 머물도록 권면하였다. 공이 녹봉을 사양하였으므로 월름(月廩)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가을에 장릉(長陵)을 천장하자는 논의가 있자 공에게 여러 대신과 함께 나아가 봉심하도록 명하며 이르기를, “경의 한마디를 기다려 결정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판부사가 봉심할 때에 곁에서 부축하도록 허락한다.” 하니, 공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복명(復命)하니 인견하고, 이어 접때 조정을 떠난 일을 깊이 탄식하며 간곡한 말로 만류하였는데, 공이 상소를 남겨 두고 금양(衿陽)의 우거지로 돌아갔다.
당시 천릉(遷陵)의 논의가 아직 결정되지 않아 상이 장차 친히 봉심하러 나가려고 하면서 또 공에게 유시하여 먼저 능에 나아가 어가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상이 막차에 당도하여 밤에 근시를 보내 견여(肩輿)를 타고 들어오도록 유시하고 조용히 인대(引對)하였다.
천장의 의논이 중지되고 공이 마침내 사직하고 돌아갈 것을 간곡히 청하였는데, 상이 면대하여 매우 정성스럽게 만류하는 한편 뒤에서 천천히 돌아오도록 하였다. 이에 공이 부득이 서울로 돌아왔다. 상이 창관(倉官)에게 명하여 두 해분의 녹봉을 보내도록 하였다.
공은 시골에 있을 때 이미 월름을 받았고 또 출사하지 않았으니 실로 더 받을 의리가 없다는 이유로 고사하고 받지 않았다. 누차 차자를 올려 성묘(省墓)를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한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이번에 공이 가려는 것은 영영 물러나기 위한 계획입니다.” 하였고, 대신이 이어 머물도록 권면하기를 청하니, 상이 특별히 승지를 보내 행차를 중지하도록 유시하였다. 공이 차자를 진달하여 거듭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무진년(戊辰年,1688, 숙종 14) 2월에 또 돌아가 성묘하도록 허락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우선 따뜻한 봄이 오기를 기다리라는 비답을 전에 내린 적이 있었으므로 윤허하고 이르기를, “말을 주고 의원을 보내는 것은 뜻이 우연하지 않다. 가서 지극한 정성을 펴고 하루속히 돌아와 내가 애타게 기다리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곧바로 대신과 유신이 진달하여 만류하기를 청하자 또 별유를 보내 행차를 만류하고 자제를 대신 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공이 임금 앞에서 직접 청하고자 하여 강연에 입시하였는데, 상이 그때《주역(周易)》을 강하고 있었다. 강이 끝나고 공이,〈건괘(蹇卦)〉와〈해괘(解卦)〉는 음(陰)이 많고 양(陽)이 적어서 편안하게 다스리는 형상이 아님을 아뢰고, 매양 소인을 멀리 배척하는 의리를 말하면서 상이 이 뜻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어 아직 죽기 전에 성묘하게 해 달라고 거듭 청하였다. 또 “전일에 이이명이 진달한 것은 실로 신이 죽어도 남는 죄가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이 때문에 내심 몹시 괴로워하였기에 여러 신하들은 신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의심합니다. 그러나 남쪽 고향은 임금이 계신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신이 어찌 감히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간곡히 만류하며 이르기를, “이이명의 주장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환히 알고 있으니 경은 이를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공이 또 말하기를, “신이 지금 물러가면 훗날에 다시 나오기 어렵습니다. 신이 평소 구구하나마 생각한 바가 있으니 아울러 성상께 아뢰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는 바로 나에 대한 일이었다. 대개 내가 일찍이 송상 시열(宋相時烈)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정의(情義)가 끝까지 가지 못하였다.
당시 의논이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논척하였으므로 공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특별히 밝힌 것이었다. 또 홍수주(洪受疇)가 억울하게 죄를 받은 것을 아뢰었다. 이미 물러난 다음에 또 차자를 올려 나에 대한 일을 거듭 논하였다. 판중추부사 민정중(閔鼎重)이 차자를 올려 공이 나를 두둔한 것을 논척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한 사람의 말로 흔들리거나 생각이 바뀔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또 차자를 올려 죄를 인혐하며 말하기를, “민정중의 차자에 대한 비답이 신이 직접 성상의 앞에서 받든 내용과 차이가 있습니다. 무릇 여러 처분은, 그 일이 옳다면 참으로 굳게 지켜 흔들리지 말아야 하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고치는 것이 중요하고 그대로 따라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매우 엄한 비지(批旨)가 내렸다.
간장(諫長) 이규령(李奎齡,1625~1694)이 상소를 올려 비지가 온당치 않다고 아뢰자 상이 즉시 고치도록 명하였다. 공이 또 차자를 올려 대죄하니, 비답하기를, “구사한 말이 자못 적절하지 않아서 원로대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으니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하였다.
영상 남공 구만(南公九萬,1630~1711)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상진은 충성과 고지식함 외에는 다른 뜻이 없습니다. 장차 소장을 남겨 두고 물러나 돌아가려고 하니, 온화한 비지를 내리시어 노신의 행차를 만류하소서.” 하니, 상이 특별히 별유를 내렸다. 승선(承宣)이 하루에 두 번 이르자, 공이 감히 쉽게 물러나지 못하고 서호(西湖)로 나가 머물렀다.
7월에 상이 특명으로 이조 판서 박세채(朴世采,1631~1695)를 파직하고 영상 남구만, 우상 여성제(呂聖齊,1625~1691)를 유배하였다. 이는 박공이 부름에 나아가 종실 이항(李杭)을 논죄하는 일로 성상의 뜻을 거슬렀고 두 재상은 해명해 주고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다가 거듭 상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다. 공이 연달아 세 번 차자를 올려 성명을 거두기를 청하였다.
8월에 대비가 승하하자 공은 인산(因山)을 치르기 위해 그대로 서울에 머물렀다. 기사년(己巳年,1689, 숙종 15) 1월에 또 치사하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경은 숙덕(宿德) 있는 원로대신으로서 일찍이 중망(重望)을 받았으며 여러 조정을 거쳤다. 충후하고 우직하였으며 마음 씀이 공평하였으니 경과 같은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 때문에 시끄러운 세태에 용납되지 못하여 누차 곤경을 겪었으나 나는 실로 경이 정성을 다하고 한결같아서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고 영중추부사에 올렸다.
3월에 조정이 뒤바뀌어 두 현신(賢臣)의 문묘 종향(文廟從享)이 혁파되었다.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당초 문묘에 올려 종사(從祀)할 때 신 또한 헌의하였고 성상께서도 많은 선비들의 건의를 특별히 따라 주시어 여러 선대의 조정에서 빠뜨리고 행하지 못한 전장(典章)을 쾌히 거행하였습니다. 지금까지 8년을 거행한 뒤에 갑자기 도로 축출하라고 명하시니 거조가 전도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엄한 비지를 내렸다. 이에 즉시 강 밖으로 나가 우거하였다.
4월에 중전이 폐출당하게 되자 공이 자제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라에 큰일이 있으니 다른 것은 돌아볼 것 없다. 의당 백관들과 힘써 성상의 마음을 돌리도록 간쟁해야 한다.” 하고 즉시 수레를 몰아 성 밖에 이르렀다. 이날 밤 상이 오두인(吳斗寅) 등을 친국(親鞫)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앞으로 이와 같은 소장을 올리는 자는 반역의 율문으로 다스린다.” 하였는데, 정청(庭請) 또한 이미 정지되었다.
공이 이미 정청에 참여하지 못하였고 또 소장을 올릴 수 없게 되자 물러나 강가 우사(寓舍)로 돌아왔는데 충분(忠憤)이 몹시 격해져서 스스로 억제할 수가 없었다. 5월 2일에 중전을 궁에서 폐출하라는 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죄를 진 천신(賤臣)이 늙어서도 죽지 않고 갑자기 성대한 조정에서 예사롭지 않은 지나친 처사가 있음을 들었습니다.
이는 실로 신민의 망극한 슬픔입니다. 방금 삼가 어제 비망기(備忘記)를 보니 끝내 폐출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결코 태평성세에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또한 어찌 신자로서 차마 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송나라 인종(仁宗)이 손톱자국을 분명히 보였지만 그 뒤에 유신(儒臣)이 논할 때 오히려 ‘백옥의 티’라고 지적하였고, 공도보(孔道輔)가 여이간(呂夷簡,979~1044)에게 말하기를, ‘부모가 불화하면 간하여 말려야지 어찌 아버지에게 순종하여 어머니를 내친단 말인가.’라고 하였으니, 인정과 천리(天理)로써 마땅히 이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고 난 뒤로 조금이라도 성상의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대소 신료를 막론하고 문득 위엄과 중벌(重罰)을 가하시니, 부필(富弼)이 말한 ‘한 가지 일로 두 가지를 잃는다.’라는 것이 불행히 이번 일과 근사합니다. 신은 네 조정을 거쳐 온 옛날 인물로서 세상에 드문 특별한 은혜를 치우치게 입었습니다.
일찍이 효묘(孝廟)께서 직신(直臣)이라고 장려해 주셨고, 또 성상께는 충직하고 성실하다는 칭찬을 받았는데, 이 망극한 일을 당하여서는 사전에 즉시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여 드디어 성상의 거조(擧措)가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니 곧장 죽고 싶을 뿐입니다.” 하였다.
차자가 들어가자 성상이 크게 진노하여 마침내 위리안치하라는 명을 내렸다. 공은 전지를 받들고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즉시 유배 길에 올랐다. 친척과 빈객을 비롯한, 작별하는 자리에 나와 전송하는 사람들이 수천을 헤아렸는데 눈물을 훔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처음에는 종성(鍾城)으로 정해졌다가 재상이 아뢰어 북청(北靑)으로 바뀌었다. 얼마 뒤에 철원(鐵原)으로 양이(量移)되었다. 그때 서울에서 부인의 상사가 났다. 8월에 관대한 처결로 사면을 받았다. 부인을 장사 지내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 정산(定山)에 안장하고 내처 다시 부여로 가서 우거하였다.
공은 나랏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을 항상 가슴 아파하며 탄식하다 보니 점차 병을 얻었다. 선산에 성묘하러 갔다가 돌아와서 맏아들의 상을 당하였다. 비통함에 병이 갈수록 심해져서 세상을 떠났으니, 경오년(庚午年,1690, 숙종 16) 6월 22일이었다. 죽음에 임하여 간곡히 하는 말이 모두 시국을 안타까워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것이었다. 부고가 올라오자 특별히 관작을 회복하고 상사와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12월에 임천(林川) 낙수동(樂壽洞)에 안장하고 부인의 상구를 옮겨 와서 합장하였다. 대신이 연석에서 공의 청렴한 절조를 들어 예장(禮葬)을 청하니, 상이 비로소 허락하고 다음 해 7월에 처음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갑술년(甲戌年,1694)에 중궁이 복위하니 부제학 오도일(吳道一,1645~1703)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이상진은 글로써 정도(正道)를 세웠는데 그 말이 매우 격렬하고 간절하여 한 세대의 충신과 곧은 선비들의 울분을 달래 주었습니다.
위로하는 유시를 내리는 일을 속히 거행하는 것이 도리에 합당합니다. 그리고 전에 내린 하교 가운데 ‘죄를 지었다.[負犯]’ 등의 문자도 고쳐야 합니다.” 하니, 상이 비답을 내려 참회하는 뜻을 보이고 전의 비지를 없애라고 명한 다음 치제하게 하였다.
을해년(乙亥年,1695)에 조정이 청백리(淸白吏)를 선발하였는데 공이 선발되었다. 호남 유생들이 전주(全州)에 사원(祠院)을 세웠다. 무자년(戊子年,1708)에 북청에 있는 상국(相國)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사당에 배향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또한 고을 사람들의 청을 따른 것이다. 봉상시에 시호를 의논하게 하여 ‘충정(忠貞)’의 시호를 하사하였다.
공은 인품이 충직하고 확실하며 인후(仁厚)하고 강인하였다. 기국(器局)이 크고 기모(氣貌)가 단정하였다. 생각은 평이하면서도 뜻이 분명히 서 있었다. 행신(行身)과 처사(處事)는 엄정하면서 치밀하고 관대하면서 신중하였다. 평생 꾸미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고, 일찍이 남의 의견을 맹종한 적이 없었다.
남과 말할 때는 경계를 없애고 진심을 다 털어놓았다. 일의 옳고 그름을 논하고 사람의 삿됨과 바름을 분별하는 데 이르러서는 엄절하여 뜻을 꺾어 범할 수 없었다. 비겁하게 아첨하고 기회를 엿보며 눈치나 살피는 짓을 하는 자를 보면 매우 비루하게 여기고 미워하였다.
효성이 남보다 뛰어나 어버이를 섬김에 사랑과 공경이 아울러 지극하여 곁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어버이가 편찮으시면 노쇠한 나이가 되고 지위가 높아진 뒤에도 오히려 직접 약을 달였다. 상사를 당해서는 1년간 죽을 마셨고 제사가 있으면 비록 관직에 있을 때가 아니더라도 반드시 종가(宗家)에 제수(祭需)를 보냈다.
그때 혹 멀리 있어서 참여하지 못하면 그리워하며 눈물 흘리기를 종일토록 그치지 않았다. 지방에 나가서는 먼 조상의 사묘(祠廟)에도 반드시 가서 참배하고 모두 돌을 떠내어 묘표를 세웠다. 방친(傍親) 가운데 후손이 없는 자에게도 그렇게 하였다.
동기(同氣) 8인에 대해 우애가 더욱 돈독하여 큰누이 섬기기를 어머니 섬기듯이 하였다. 막냇누이는 부모님이 유독 사랑하셨다고 여겨 연연히 사랑하고 돌보아 주기를 부모님 생존 시와 똑같이 하였다. 한 아우는 부부가 일찍 죽어 자녀가 어리고 약하므로 가르쳐 기르고 혼인시켜서 마침내 독립하여 살 수 있게 하였다.
이를 미루어 원근의 친척과도 친목을 곡진히 도모하여 혼인이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자는 공의 도움을 받아 일을 치렀다. 친구들과의 사이가 돈독하여 비록 당사자가 이미 죽었더라도 반드시 그 가족들을 도와주고 보살폈다. 비록 복(服)이 없는 친척이나 어린아이라도 그 사망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소찬을 들었다.
향당(鄕黨)과 인리(隣里)에 거처할 때는 충성스럽고 신실하였으며 겸손하고 공순하였다. 궁벽한 외진 곳에서 빈한하게 지내는 자에게는 더욱 후하게 대하였으며, 남의 단점을 말하기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남의 선행을 기뻐하였다. 비록 동복(僮僕)이나 이서(吏胥)에게라도 나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자제를 가르치고 집안 식솔들을 다스림에는 신중하고 엄숙하여 규율이 잘 잡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예로 들어 본보기로 삼았다.
정사(政事)를 행할 때에는 위엄과 은혜를 병행하고 대체(大體)를 견지하는 데에 주력하되 조리가 간명(簡明)하였으므로 오래도록 폐단이 없었다. 반드시 기강을 진작하고 풍교(風敎)를 두텁게 하며 인재를 얻고 언로(言路)를 여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반면에 과격하거나 특출한 행동을 하지 않고 자신을 엄정하게 단속하니 사람들이 감히 사적으로 청탁하지 못하였다. 지방에 보내 준 물품이 혹 조금이라도 남으면 반드시 쓴 것만 제하고 돌려보냈다.
어려서부터 집안 살림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고관이 되고서도 쌀독이 자주 비었으며 끝내 집 한 채도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구 내공(寇萊公)이 누각을 지을 땅도 없었던 데에 비유하였다. 성품이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담백한 것을 좋아하여 옷과 이부자리 등 복식은 단지 몸을 가리면 그만이었다. 창이 파손되고 자리가 해져서 다른 사람들은 차마 거처하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공은 편안히 여겼다.
아, 공은 네 조정을 두루 섬겨 나라의 충신이 되었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벼슬길에 나오든 물러나든 조금도 차이 나지 않았으며, 마음을 잡고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조정에 있거나 외직에 있거나 전혀 다르지 않았다. 평소 생활하는 모습은 온순하고 삼가 마치 마음을 쓰는 바가 없는 듯하였지만 큰일을 당하여 대의(大議)를 결정할 때는 천 길 벼랑 같은 기상과 만 마리의 소가 끌어도 되돌리지 못할 지조가 있었다.
묘당에 있을 때는 은연히 교악(喬嶽)의 기세가 있어서 조정 안팎의 사람들이 의지하여 중히 여겼으며 강호에 기거할 때는 유연히 산야의 기상이 있어서 향리의 사람들이 높은 관직을 지낸 인물임을 알지 못하였다. 당시의 지식 있는 선비들이 모두 귀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은 자가 없었다.
중도에 당한 영안궁(永安宮)의 슬픔은 이미 천고(千古)에 애통한 일이었다. 그런데 세도가 괴리되어 끝내 조정에서 그 몸을 편안히 하지 못하고 그 뜻을 다 펴지 못한 채, 마침내 교야(郊野)에서 방황하다가 먼 변방으로 내쳐져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러나 그 언행과 공적은 시종 흠이 없었고 곧은 절개와 맑은 덕은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 있으니 실로 후세의 스승이 될 만하다. 사람들이 근세의 보상(輔相)을 일컬을 때 공보다 먼저 꼽는 자가 드물다. 아, 성대하도다. 공이 서사(書史)를 애당초 깊이 공부하지 않았는데 총명하고 민첩하여 배우는 즉시 통달하였다.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여러 방술에 대한 서적 또한 모두 두루 열람하여 그 내용을 이해하였다. 사한(詞翰) 같은 소기(小技)를 비록 달갑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장주(章奏)와 시문은 모두 명확하고 고고(高古)하였으니 대개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이었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연안 김씨(延安金氏)는 현령 적(迪)의 따님이다. 온화하고 정숙하며 민첩하고 신중하여 부덕(婦德)이 매우 잘 갖추어졌으며 시부모를 섬기고 형제를 대하고 제사를 받드는 데에 그 도리를 다하였으니 사람들이 여중군자(女中君子)라고 칭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부지런히 길쌈을 하면서 가난함을 편안하게 여겼다. 공이 관직에 있을 때는 노복들을 경계하여 외인들과 내통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공의 청렴한 지조 또한 내조한 덕이 많았다. 무격(巫覡), 기양(祈禳)의 술수를 단호히 경계하고 금하여 집 대문 안에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자손을 교육할 때도 반드시 효제(孝悌)와 방직(方直), 검소를 기본으로 삼았다. 봉록을 나누어 선물을 줄 경우에는 반드시 동서를 우선한 다음에 친형제에게 주었으니, 의리를 밝혀 사심에 판단이 흐려지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금상의 가례(嘉禮) 때에 내명부(內命婦)로서 궐내에 들어가 촛불 켜는 예를 행하였는데 명성대비(明聖大妃)가 매우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고 한다.
을묘년(乙卯年,1615, 광해군7)에 태어나 기사년(1689, 숙종 15) 6월에 졸하니 나이 75세였다.
2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연회(延會)는 주부(主簿)이고 차남 연보(延普)는 진사로서 군수를 지냈다. 장녀는 지평 이두악(李斗岳)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참판 이세재(李世載)에게 시집갔다.
주부는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 우춘(宇春)은 군수이고 차남 우하(宇夏)는 참봉이다. 딸은 교관 윤동수(尹東洙)에게 시집갔다. 군수는 자식이 없어 우하를 후사로 삼았다. 지평은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 세덕(世德)은 정언이고 사위는 도사 유명악(兪命岳)과 현감 신채화(申采華)이다. 참판도 자식이 없어 의룡(宜龍)을 양자로 들였다.
우춘의 아들은 진성(晉聖), 관성(觀聖), 몽성(蒙聖)이고 장녀는 오언주(吳彥胄)에게 시집갔고 나머지 두 딸은 어리다. 우하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다. 윤동수는 아들 광온(光蘊), 광겸(光謙)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딸은 어리다. 그 나머지는 다 기록할 수 없다.
아, 공은 나의 선인과 교분이 예사롭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적에 집에 들어앉아 있어서 문하에 나아가는 것이 매우 늦었는데 공이 선인을 봐서 나를 친절히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 말년에 휴가를 청할 때에는 홀로 탑전에서 이 못나고 하찮은 인물을 간곡히 변호해 주었다.
내가 숙향(叔向)과 기해(祁奚)의 의리를 생각하여 비록 감히 사적으로 사례하지 못하였지만 마음에 깊이 감동받은 것은 아직도 감히 잊을 수 없는데, 이제 묘도의 글에 이름을 붙이게 되어 다행스럽다. 다만 늙어 병들고 쇠모하니 덕업(德業)을 환히 드러내어 영원토록 전해 주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 그러나 공은 스스로 영원히 후세에 전해질 만하니 또한 환히 드러내 주기를 어찌 기다리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효묘가 즉위하여 / 孝廟撫運
성명한 뜻을 분발하시어 / 奮發聖志
내정을 닦고 외적을 물리치며 / 內修外攘
대의를 펴고자 하였다 / 欲伸大義
자나 깨나 뛰어난 인재를 얻어 / 寤寐豪英
함께 일을 도모하려고 생각했다 / 圖與共事
공은 당시 연소한 나이에 / 公時藐然
사관으로 입시하였고 / 簪筆入侍
이미 대간에 들어선 뒤에는 / 旣入臺端
직언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 讜議始吐
충성스럽고 강직함은 / 惟忠惟直
현명한 임금의 인정을 받아 / 結知明主
겉으로는 짐짓 진노하였지만 / 外試雷霆
안으로는 실로 관심을 두었기에 / 內實眷注
속히 발탁하여 / 亟加拔擢
심복을 삼아 의탁하였다 / 擬託心膂
기회를 만나 한창 일어서려는데 / 際遇甫隆
임금이 홀연 승하하셨네 / 弓劍忽遺
앞으로 보은하려는 마음은 변함없는데 / 追報如丹
세상길이 몹시 험난하도다 / 世路多巇
외지에서 떠돌다 보니 / 盤桓于外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네 / 歲月其遒
나아가도 낙이 없지만 / 進無所樂
물러간들 어찌 근심을 잊겠는가 / 退豈忘憂
늦게 다시 등용되어 / 晩被登庸
자리는 높으나 일신은 외로웠네 / 位躋形孤
군실이 편당함이 없으니 / 君實無黨
훌륭한 자들을 붙들어 세웠고 / 善類是扶
오직 왕실만 생각하여 / 一心王室
늙도록 변함이 없었다 / 老而靡渝
평생토록 지킨 청렴하고 굳은 지조는 / 氷蘗平生
공에게는 여사일 뿐이라네 / 乃公之餘
나라에 변고가 있으면 / 國有變故
큰 절개가 더욱 드러났고 / 大節益彰
늠름한 기상이 우뚝하여 / 凜然卓立
만년에 빛을 발하였네 / 暮景之光
아 이것이 공의 행적이니 / 嗟公本末
성명한 임금이 알아주셨도다 / 聖祖知臣
신령은 기미에 돌아가고 / 神歸箕尾
이름은 사책에 수없이 올랐다네 / 名溢簡編
편안한 이 언덕에 / 有樂斯丘
의관이 보관되어 있으니 / 衣冠是藏
격식대로 비석을 세워 / 維式有碑
영원히 밝히게 하노라 / 用昭無疆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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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脚註]
[주01] 신면이 패망하자 :
신면(申冕)이 김자점(金自點)의 역모 사건에 공모한 혐의로 국문을 받던 중에 죽었다.《국역 효종실록 2년 12월 13일》
[주02] 궐내의 …… 있겠습니까 :
시비(侍婢)를 뽑는다는 명목으로 별감(別監)들이 나와 양인(良人), 서리(胥吏), 의관(醫官), 역관(譯官) 등을 막론하고 여염집의
딸을 색출해 갔는데, 이 일로 생긴 폐단을 지적한 것이다.《국역 효종실록 5년 2월 10일》
[주03] 사슴과 …… 바뀌어도 :
간신이 임금의 총명함을 가리는 것을 말한다. 진(秦)나라 간신 조고(趙高)가 황제인 이세(二世)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하였
다. 이세가 의아하게 여겼지만 주위의 신하들은 조고의 뜻에 영합하느라 모두 말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史記 卷6 秦始皇本
紀》
[주04] 황창랑(黃昌郞)의 고사 :
신라의 동자 황창랑이 백제로 들어가 백제왕 앞에서 검무를 추다가 백제왕을 찔러 죽인 일을 말한다.《增補文獻備考 卷106 樂考
17》
[주05] 거(莒) 땅에 있던 때 :
중국 춘추 시대 제 환공(齊桓公)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 땅으로 망명하여 곤욕을 치렀는데, 후에 포숙아(鮑叔牙)가 제 환공에게
“거에 있던 때를 잊지 말라.”라고 충고하였다.《史記 卷32 齊太公世家》《管子 卷11 小稱32》 여기서는 효종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일 등으로 청나라에게 곤욕을 당했던 때를 말한다.
[주06] 이천(伊川)의 …… 아닙니다 :
야제(野祭)는 들에서 지내는 제사를 이른다. 주(周)나라의 대부(大夫) 신유(辛有)가 이천이란 곳을 지나다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들
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보고 “이천이 100년 안에 오랑캐 땅이 될 것이다.” 하였다.《春秋左氏傳 僖公22年》이는 나라가 망하기
에 앞서 예가 먼저 없어진다는 뜻이다.
[주07] 번곤(藩閫) :
번방의 장관으로, 관찰사와 병마 절도사, 수군 절도사를 총칭한다.
[주08] 방상(方喪) :
부모의 상을 입는 예로 임금의 상을 입는 것을 말한다.《예기(禮記)》〈단궁 상(檀弓上)〉에 “임금을 섬기는 데는 직언(直言)으로
면쟁(面爭)할 수는 있으나 숨김은 없어야 하며, 좌우에서 돌보면서 죽을힘을 다하여 복근(服勤)하고, 방상 삼년을 입는다.” 하였다.
[주09] 영릉(寧陵) :
효종의 능을 말한다. 이때 양주(楊州)에 있었다.
[주10] 당시 …… 나수(拿囚)되었다 :
갑인예송(甲寅禮訟)을 말한다.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시모(媤母)이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왕후(莊烈王
后)가 입을 복에 대해 처음에는 기년복(期年服)으로 정했다가 대공복(大功服)으로 바꾸었는데, 다시 현종이 기년복으로 고쳐 시행
하게 하였다.
그러고 당시 대공설을 주장한 영상 김수항(金壽恒)을 중도부처(中途付處)하라고 명하고 예관들을 나국하였으며 그에 동조한 육경
(六卿)과 삼사 관원들을 파직하거나 지방관으로 내보냈다.《국역 현종실록 부록 현종대왕 행장》
[주11] 추함(推緘) :
관리의 죄과를 서면으로 조사하여 기록한 서류를 이른다.
[주12] 경신년에 조정이 새로워지자 :
경신환국(庚申換局)을 말한다. 남인의 영수(領袖)인 영의정 허적(許積)의 서자인 허견(許堅)이 인평대군의 세 아들과 함께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고변으로 인해 남인들이 대거 축출되고, 김수항(金壽恒)이 영의정이 되어 서인 주도의 정권으로 바뀌게 된 일이다. 경
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주13] 훈척 대신 :
김익훈(金益勳:1619~1689)을 말한다. 김익훈은 숙종의 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종조부(從祖父)였고 경신환국 때 남인을
축출하는 데 공을 세워 보사 공신(保社功臣) 2등 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다. 이후 어영대장 등의 요직을 역임하며 훈척 세력으로
서 정권을 주도하였다.
[주14] 송나라 …… 읊었다 :
송나라 이종(理宗) 때의 문신 방악(方岳)이 지은〈독시사면추사(督視辭免樞使)〉이다. 방악은 자는 거산(巨山)이고, 호는 추애
(秋崖)이며, 저서에 《추애집(秋崖集)》이 있다. 인용된 구문은 “몇 번이나 소장 올려 물러가길 청하나 매번 시사를 생각하여 지체
하고 있네.[封章凡幾上而乞骸 時事每一思而淹滯]”이다.《翰苑新書 後集 上卷22》
[주-D015] 홍우원(洪宇遠)이 …… 것은 :
1675년(숙종1)에 숙종의 외조부인 김우명(金佑明)이 복창군(福昌君)과 복평군(福平君) 형제를 상변하여 옥사를 일으켰는데,
허목(許穆), 윤휴(尹鑴) 등 남인이 무고라고 논박하자 숙종의 모친인 명성왕후 김씨가 나서서 김우명을 두둔하였다.
이에 홍우원이 상소를 올렸는데,《주역》〈가인괘(家人卦)〉의 “여자는 안에서 그 위치를 바로 지키고 남자는 밖에서 위치를
바로 지킨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대비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비난하였다. 이 일로 홍우원은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국
역 연려실기술 권33 숙종조고사본말》
[주16] 민희(閔熙)가 …… 말은 :
1680년 역모 사건을 고변한 정원로(鄭元老)가 공사(供辭)에서 “허적이 말하기를, ‘임금의 환후(患候)가 위급하니,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자, 민희가 말하기를, ‘복선군(福善君)이 있다, 복선군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국역 숙종실록 6년 4월
12일》
[주17] 장릉(長陵) :
인조(仁祖)의 능으로, 경기도 교하(交河)에 있다.
[주18] 금양(衿陽) :
경기도 금천(衿川)의 옛 이름이다.
[주19] 대비 :
인조의 계비(繼妃)인 대왕대비 장렬왕후(莊烈王后)를 말한다.
[주20] 조정이 뒤바뀌어 :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말한다. 원자 책봉 문제로 송시열 중심의 서인(西人)들이 대거 축출되고 남인(南人)들이 조정에 들어와 정권
을 주도하게 되었다.
[주21] 두 현신(賢臣) :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말한다. 1681년(숙종7)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주22] 송나라 …… 지적하였고 :
유신(儒臣)은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을 말한다. 송나라 인종이 비(妃)인 곽 황후(郭皇后)가 자신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자 이
를 대신에게 보여 주어 결국 황후를 폐위시켰다. 사서(史書)에서 여조겸이 인종을 평한 글 말미에 “백옥의 작은 티라면 곽후를 폐위
시킨 한 가지 일이 아닐까.[白璧微瑕 其廢郭后之一事乎]” 하였다.《十八史略 卷6 宋仁宗》
[주23] 공도보(孔道輔)가 …… 하였으니 :
《송사(宋史)》권297〈공도보열전(孔道輔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공도보와 여이간(呂夷簡)은 모두 송나라 인종 때의 중신이다.
[주24] 부필(富弼)이 …… 것 :
부필은 송나라 인종 때의 중신인데, 범중엄(范仲淹)이 폐후(廢后)의 일을 간하다가 폄출되자 상언(上言)하기를, “이는 한 가지 일
로 두 가지를 잃는 것입니다. 비록 황후를 복위시킬 수는 없더라도 범중엄은 도로 복직시켜야 합니다.”하였다.《宋史 卷313 富弼
列傳》
[주25] 재상 :
당시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을 말한다.《西坡集 卷24 右議政晩菴李公諡狀, 韓國文集叢刊 152輯》
[주26] 전에 …… 문자 :
이상진의 부고를 듣고 임금이 내린 하교에 “이 사람은 죄진 것이 무겁기는 하나[此人負犯雖重] 대신의 반열에 있었으니 은전이 없
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국역 숙종실록 16년 6월 22일》
[주27] 구 내공(寇萊公) :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진 송나라 재상 구준(寇準)을 말한다. 진종(眞宗) 때 동평장사(同平章事)를 지냈고, 거란이 침입했을 때 조
정의 논의를 반대하고 거란을 칠 것을 주장하여 거란을 격퇴하고 불가침 동맹을 맺게 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평생 동안 재산
을 축적하지 않았고 조야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宋史 卷281 寇準列傳》
[주28] 중도에 …… 슬픔 :
영안궁(永安宮)은 촉한(蜀漢)의 유비(劉備)가 오(吳)나라를 정벌하러 갔다가 백제성(白帝城)에 주둔하여 지은 궁인데, 유비는 이
듬해 이곳에서 죽었고 총신인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이곳에서 한 고조의 유지(遺旨)를 받들었다.
《通鑑節要 卷24 漢紀 昭烈皇帝》이 말은《숙종실록》1년 1월 5일 조에 이상진이 찬배의 명을 받은 송시열(宋時烈)을 구호하는
상소에 나오고, 한국문집총간 154집에 수록된《명곡집(明谷集)》권34〈우의정 이공 시장(右議政李公諡狀)〉에도 ‘중도붕조(中
途崩殂)’라 하여 또한 송시열을 변호하는 상소문을 인용한 구문에 나온다.
한 고조와 제갈공명이 나눈 어수(魚水)의 관계로 효종과 송시열을 비유한 것인데, 이 글에서는 이상진을 알아주었던 효종의 죽음과
그 후 이상진의 환로가 평탄치 못하게 된 것을 말한 듯하다.
[주29] 숙향(叔向)과 …… 못하였지만 :
숙향의 아우가 난리를 꾸미다가 실패하자 숙향도 구속되었는데, 집안 식구들이 걱정하자 숙향은 “우리를 구원해줄 사람은 반드시
기 대부(祁大夫)일 것이다. 그는 밖으로 천거할 적엔 원수도 버리지 않았고 안으로 천거할 적엔 친자식을 버리지 않았으니, 나만을
버리겠는가.” 하였다.
기해(祁奚)는 치사(致仕)해 있다가 숙향의 소식을 듣고는 급히 말을 달려 집권(執權)하고 있던 범선자(范宣子)를 만나 숙향의 어짊
을 말하여 사면하게 한 다음 숙향을 만나 보지도 않고 갔으며, 숙향 역시 사례하지 않았다. 두예(杜預)의 주(注)에, 숙향이 사례하지
않은 것은 숙향 개인을 위해 한 일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21年》 1688년(숙종14)에 배사(背師) 문제로 명재에 대한 탄핵이 심해지자 당시 우의정인 이상진이 연석에 나
아가 명재의 결백을 진달하여 변호해 준 일을 말한다. 숙향이 기해의 공평무사하고 정직함을 알아서 사례하지 않은 것처럼 명재도 이
상진을 잘 안다는 뜻이다.
[주30] 군실(君實)이 편당함이 없으니 :
군실은 송나라 명신 사마광(司馬光)의 자이다.《고사비(古事比)》〈붕당(朋黨)〉에, 송나라 철종 때 낙당(洛黨), 촉당(蜀黨), 삭당
(朔黨) 등 붕당이 한창 성했는데, 오직 여대방(呂大防), 범조우(范祖禹), 사마광만이 당을 세우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상진이 편당
하지 않고, 죄를 입은 대신이나 간관들을 신구하는 상소를 많이 올렸으므로 사마광에 비유한 것이다.
[주31] 신령은 기미(箕尾)에 돌아가고 :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재상 부열(傅說)이 죽은 뒤 기미에 올라타 열성(列星)과 나란히 했다는 고사에서 연유한 것으로, 훌륭한
재상의 죽음을 뜻한다. 기미는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을 말한다.《莊子 大宗師》
ⓒ 한국고전번역원 | 오세옥 (역)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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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右議政李公神道碑銘。
上之十有五年己巳五月, 國家不幸, 中宮廢處私第。 前判書吳斗寅、前應敎朴泰輔等諫死, 中外震恐, 無敢言者。 領中樞府事李公, 時年七十有六, 方引年致事, 乃上箚極言, 命極邊圍籬安置。 秋宥還。 明年庚午, 卒于扶餘琴岡之寓舍。 越四年甲戌, 上悔悟, 復中宮位, 贈斗寅等爵, 特遣承旨致祭于公墓。 蓋廢后復位, 前史所未有也, 日月之更, 增光聖德, 德音渙發, 恩及泉壤, 擧國莫不悲喜。 太學士吳公道一狀公行甚備, 公之孫宇春, 以拯受知於公不淺, 來托神道之銘, 辭不敢, 不獲。 謹按李氏之先,全義人。 有諱棹, 佐麗祖, 策統合三韓功, 位太師, 是爲鼻祖。 自此爲簪纓族, 致卿相者亦多。 逮我朝, 尤昌大。 高祖諱承孝, 弘文修撰。 曾祖諱廷鸞, 亦文科, 官府尹, 壬辰倭變, 有却賊功, 贈冢宰。 祖諱遵吉, 早世, 贈貳相。 考諱榮先, 有志操, 社稷參奉、贈領議政。 三世之贈, 以公貴也。 妣贈貞敬夫人驪興閔氏, 參判、贈左贊成汝任之女。
公諱尙眞, 字天得, 號晩庵。 以萬曆甲寅五月二十九日生于全州城南里第。 幼凝重異凡兒, 甫十歲, 德器屹如, 聰睿絶人。 從外王考受業, 博涉書史,閔公奇之, 常曰 “大李門者, 必此兒也。” 及成童, 爲文辭, 識者稱以文章之才。 丙子, 中大小科解額, 未及覆試, 値虜變, 奉老避寇于峽中。 亂定, 不復赴擧, 專心經術, 聲望蔚然, 已出流輩。
乙酉, 議政公有疾, 適有別科, 命公赴。 公爲親强就,李相國景奭見公之文, 歎曰: “此, 經綸才也。” 遂擢丙科, 分隷成均, 調軍資監參奉, 陞廣興奉事。 丁亥, 始拜檢閱, 陞待敎、奉敎。 庚寅, 陞典籍, 移監察、騎省, 拜正言, 卽孝宗大王元年也。 承旨申冕因辭職疏語多憤懥, 公論罷之。 上斥以深文, 出補義興縣。 壬辰春, 特除司書, 蓋冕敗, 而上思公也。 時顯廟爲世子, 將入學, 公疏論尹順之不合博士職。 尋拜持平, 上應旨疏, 略曰 “殿下英銳太露, 執德不弘, 群情不交於上, 實惠未究於下。 輕視群下, 而頗好自用 深惡朋黨, 而不察賢邪。 前代敗亡, 可鑑戒也。 不樂仕宦, 古人美之,趙錫胤, 豈可以欲退爲罪哉?兪棨之儒雅博學, 永爲淸朝棄物, 殊可惜也。 左相金堉素負重望, 而近以大同一事, 不叶於儒臣, 爻象不佳。 噫! 欲行大同者, 公心也; 有所持難者, 亦公心也。 國家事非一家事, 則豈可有私喜怒於其間哉? 前議政趙翼、前判書金集經學、德望冠冕儒林, 殫誠盡禮, 豈無可致之道” 仍言宮禁不嚴、內司・近習之夤緣弄奸、宮莊廣占、宮奴恣橫之弊, 末復以年凶請停簽丁、罷陳稅, 上優批答之。 左相因公疏辭免, 上特罷公職。 左相箚請還收, 上允之曰 “以成卿美。” 公因辭遞。 冬, 拜兵曹佐郞, 移京畿都事。 癸巳, 遞拜司書, 移直講。 甲午, 復拜正言, 又陳時事曰 “殿下修省軫恤之擧, 終無一事之成效。 非時不急之務, 違天心而拂民情者, 不一而足, 則召災興怨, 何時而已乎? 闕內侍婢, 抄以公隷, 金石之典, 殿下忍以使令之故侵及良民, 而壞祖宗法耶縱奴虐民, 惡在其爲民父母乎此足爲亡國之一徵, 而大臣、三司銜默越視。 噫! 殿下旣厭聞逆耳之言, 則無怪乎群下之以言爲戒也。 臣恐從今以後, 聰明交蔽, 鹿馬易形, 亦無敢言者矣。 兵判元斗杓備酒饌張妓樂於領相家, 以媚悅大臣, 大臣安而受之, 可見朝綱之頹也。 帝王慮患, 靡不用極, 而御座咫尺, 命卒用劍, 劍芒森羅, 呼聲交聒, 瞻視不尊, 已不足言, 而百濟黃昌古事可鑑。 乘輿疾驅, 憂在銜橛, 拜陵之行, 御手催鞭, 駐馬觀射, 萬目驚怪。 至於狹袖短衣、新製弓劍, 又何事也? 都忘在莒, 不思自强, 而竝與其衣服、器械而慕效之, 不啻若伊川之野祭。 言念及此, 不覺痛哭。” 其餘如懋聖學、崇節儉、求人材、選藩閫、恤邊民, 亡慮萬餘言, 皆切中時諱。 上答以言甚切直。 領相鄭公太和以公言辭職, 批曰 “其言狂忘, 或比予於二世, 或以忘莒慕制困之, 而付之一笑者, 爲言路也。” 公引避曰 “自古只聞以臣諫於君, 未聞以君困於臣也。 且所論兩臣事, 只欲尊朝廷體統。” 上答曰: “爾之言皆好。” 轉司書、持平。 時洪宇遠論趙逆事, 有 “寵姬殛死, 愛子流竄”之說, 上震怒。 筵臣以不卽請罪斥三司, 公引避以爲 “宇遠疏語, 雖有妄發, 蓋其所陳, 人所難言, 不宜遽加之罪。”憲長李時楷疏請宇遠罪, 斥公及趙晉錫、徐挺然等倡浮論, 主伸救。 公又引避, 而時楷以傾陷被劾。 公因此求外, 補星州牧。 翌日上敎曰 “李某之罪, 與趙晉錫同, 而前日進言, 予所嘉奬, 不可罪直臣。 只遞見任。” 蓋趙先被削黜也。 公欲還鄕斂迹, 俄命廉問兩湖。 在途, 除掌樂正。 乙未春, 竣事復命, 卽引見曰 “聞得病, 今何如” 仍問沿路見聞, 所施行者甚多。 以親癠呈告歸, 旋除執義, 未及至, 超拜承旨, 上疏辭, 批曰 “爾之忠直, 實合擢用。” 秋, 又以親癠辭, 特賜藥物, 使帶職下鄕。 遞爲刑曹參議, 移兵曹, 又拜承旨。 疏陳求人材之道, 而歸之於立聖志恢聖量。 批曰 “日者筵席, 爾發此端而未畢, 予欲更問而未果。 今玆陳言, 出於憂愛之忠赤, 予用嘉悅。” 又以親癠三請由, 始許歸, 賜藥物。 除慶尙監司, 未赴, 丁憂。 服闋, 連除承旨。 公以偏親已老, 不欲離側從宦, 申章陳情, 命將母上來。 公赴謝, 請得一邑便養。 上於筵中諭以必欲置之近密, 不可出外郡, 天語甚溫。 大臣以爲“孝理之下, 宜念其私情”, 上始允之, 授長城府使。 居五月, 因宋公時烈請召拜承旨, 以親患徑歸完山。 己亥夏, 以禮曹參議還朝。 上嘗論朝臣中可與共大事者, 而特擧公名。 未幾, 擢拜右尹。 公陳疏辭, 批曰 “不但卿才允合擢用, 愛君之誠, 亦素嘉尙。” 蓋公甲午一疏直言不諱, 嚴旨摧壓, 而終不撓屈, 上深知公忠確過人。 銀臺之擢褒以忠直, 而前後繾綣之敎, 優異諸臣。 移大司諫。 五月,孝廟升遐, 公居處、飮食, 方喪盡誠。 且以爲臣子之所可自盡者在山陵, 躬審畿內諸山, 四疏獻議。顯廟以出於至誠答之。 兼承文提調, 拜吏曹參判。 過大葬, 以有勞蒙賜馬。 庚子, 丁母夫人憂。 方疾革, 斫指進血, 在草土, 得脚痿證, 遂爲終身之疾。 去喪, 連除吏曹參判、大司諫、大司成。 冬, 拜慶尙監司。 時大同法未行嶺南, 政務尤煩劇。 公至剖決無滯, 訟獄漸息, 歲飢而民免流殍, 時閑而軍政克修, 拔人材, 黜貪吏, 戢頑胥。 威行惠孚, 政成弊祛, 一道翕然頌之。 島夷有徵債於我人者, 怒傍人之救解, 刺殺之。 公先啓梟我人負債者, 移文島主, 使取殺人者, 懸首於境上,倭人慴伏, 不敢復犯禁。 島主憚公威嚴, 年例禮外, 別致贈獻, 公却之。 甲辰夏, 拜吏曹參判, 疏陳修省飭勵、斷滯獄、蠲民役、詰戎政等事。 乙巳夏, 請暇下鄕。 連拜右尹、諫長, 屢疏言策勵振作之道, 而申請革民瘼、釐軍政、檢戶籍之事。 秋, 論溫幸後賞典太濫, 有“護戚畹, 累聖德” 之語, 公議多之。冬, 因雷變, 疏請奮乾剛, 戒遊衍, 嚴宮禁, 務實效, 爲應天弛災、興衰持危之本。 玉堂李敏叙以公前疏論賞典, 爲强生區別, 非斥公。 公引避, 玉堂處置遞公, 而旣以同春秋爲考史, 奉命往赤裳城矣。 明年丙午正月, 竣事, 拜大司憲, 還乃以前日見斥於玉堂, 上疏乞罷。 上以卿無所失答之, 而玉堂又斥罷之。 時朝論岐貳, 公於是益有退志。 除右尹, 再疏乞浴, 大臣以戶籍事急啓遞之。 公卽往延豐溫井, 還到忠州之可興, 僦人田屋以調養焉。 居朞年, 轉歸完鄕。 到處貧窶, 人不堪憂, 而公優閑自娛。 凡五歲之內, 降召不已, 爲監司者二, 亞天官者再, 貳水部者三, 長兩司者十餘, 竝辭不赴。 而辭疏輒陳所懷, 言必切至。 辛亥, 歲大飢, 備局薦授水原府使。 公辭不得曰 “爲賑民黽勉赴郡, 古人所不免。” 遂赴任。 時道殣相望, 公竭誠撫綏, 捐俸救濟, 業農者計日給糧, 民得以全活。 至今不忘, 豎石頌德。 復除慶尙監司, 以病辭。 壬子, 連拜諫長、右尹、禮曹參判、憲長, 請暇省掃南歸。 未幾, 陞拜兵曹判書, 連章力辭, 終不許。 十月, 移判吏曹, 連疏辭。 癸丑, 兼同知成均。 夏, 有遷寧陵議, 命公卿、三司奉審。 公以脚疾不能行, 乞免職, 上令參判代行。 正言鄭維岳劾公稱疾, 捃摭醜詆。 蓋公常賤惡其爲人, 欲塞淸望,維岳知之先發。申公翼相在玉堂, 疏斥其傾陷狀, 物情快之。 公出郊三疏待罪, 遞爲左參贊。 留驪江陳情乞退, 不許。 移大司憲, 又移吏曹判書, 陞崇政, 兼判義禁。 有三省獄, 別諭特召, 溫旨慰諭。 公黽勉出仕, 恢公道, 疏滯鬱, 絶請託。 又奏變通參下遷陞, 俾無滯積, 議者便之。 甲寅, 仁宣王后升遐。 六月, 國葬, 以疾辭, 上遣醫賜藥。 箚三上, 遞付知中樞。 又拜左參贊, 時改定大王大妃服制會議, 大臣被謫, 禮官拿囚。 公以爲 “禮家取訟, 本非可怒, 雷霆遽震, 氣象愁慘。 願平心舒究, 亟收成命。” 八月,顯廟昇遐, 今上嗣服, 復拜兵判、兼金吾。 時黨人當路, 承先王罪大臣之後, 仍藉禮論, 首劾宋相時烈, 朝著波蕩。 公疏言 “先王勘定典禮, 罪止首相。 則到今豈可追論 且時烈之受知於孝廟如何, 而敢有一毫貶損之意乎一自此論之發, 舊臣之斥逐殆盡, 若此不已, 危亡必至。 趁今悔悟, 猶可及救。 臣受國厚恩, 若當此時, 畏罪含默, 則其何以報先朝而忠殿下哉” 上不答。 乙卯正月, 因虹變上箚言 “修身明學, 嚴宮禁, 辨賢邪, 從諫納言, 固國安民之道。” 又上箚論救被罪諸臣。 司諫金投疏詆公, 公遂屢箚遞職, 留疏以行。 都承旨金錫胄啓, 別諭召, 辭不赴, 僑居於牙山。 連除知中樞、工曹判書, 皆辭。 上以舊臣多不仕者, 特推之。 公進江外待命, 拜判尹, 旋因推緘勘律, 奪告身。 冬, 移寓扶餘, 蓋愛白馬江、山也。 戊午, 特敍除判中樞, 上疏辭。 庚申, 朝廷更化, 除判義禁。 夏, 聞有逆獄卽赴命, 未至, 遞爲左參贊、兼繕工提調, 連疏辭, 不許。 五月, 又兼金吾。 命入對, 以脚疾辭, 命扶掖上殿。 是後出入, 輒以爲例, 異數也。 公屢以病力請退休, 溫諭不許。 兼平市提調, 時市民多有難堪之弊, 公陳啓變革, 民大悅。 七月, 拜吏判, 屢辭, 不許。 十月, 進拜右議政, 四疏力辭, 批旨愈益勤。 有金益勳、李師命等追錄保社功之命。 公與首相金壽恒議不合, 上箚曰 “旣勘勳, 又經會盟, 不可續續追錄。 況此人等初不入於勘定, 則其勞績之有間, 可知。 豈可苟行祖宗朝所不行之事哉” 上不納。 蓋追錄之議,金相錫胄所主張也。 於是首相獨主勘定, 而公不與焉。 六月, 引疾乞免, 上屢遣近侍敦諭。 八月, 起視事, 獻文成、文簡兩賢臣文廟從享議。 九月, 受暇省先山, 還朝陳歲荒民瘠, 請蠲役、節用。 壬戌正月, 上箚箴戒, 上嘉納。 又引疾, 遞付判中樞。 癸亥, 參耆老所。 上疏請依禮致事, 遣承旨敦諭。 六箚, 不許。 時應敎朴泰遜等論金益勳、金煥等誣獄之罪, 而相繼被譴。 公箚陳不可以勳戚大臣故罪言者。 副提學趙持謙、司諫吳道一、校理韓泰東等於追勘勳籍及誣獄持議甚峻,金錫胄請斥遠之。 於是持謙等皆又得罪, 公又陳箚曰 “今者諫臣斥黜之擧, 實關國家存亡之機。 念此被譴諸臣, 率皆年少之人, 不避忌諱, 務持風裁, 不幸益勳一事轉成風波, 浮言噂沓,勒加情外之謗。 噫! 世道日下, 直氣不振, 今反使剛果敢言之流, 一皆斥退, 將置國事於何地耶” 仍斥喉司巽軟不能覆奏, 言雖不行, 而一時之持淸議者, 倚以爲重。 秋, 以先山加土受暇, 將行, 入侍講筵, 申請休致。 上方講《心經》, 公奏曰 “《心經》一書, 首以精一而敬爲之主。 匹夫尙然, 況帝王乎” 又曰: “塑像如人, 猶不可忽, 則人君之於臣僚、民庶, 皆不可忽也。” 上曰 “此言甚著實。” 仍顧左右而稱善。 臨罷, 諭以趁未寒還朝, 命太醫持藥隨之。 九月, 留任實先塋下, 營豎墓碣。 十月, 聞上患痘疾, 卽日馳還, 止闕門外, 晝夜不離。 上候纔平復, 而明聖王后遽升遐, 過成服, 始歸第。 甲子春, 上箚勉上節哀, 兼言時政, 又連章請老。 十一月, 因莊烈大妃回甲之慶, 特命抄啓仁祖朝侍從在世者賜米。 公在其中, 不勝愴感, 拜箋謝。 乙丑, 又箚請致事。 公自癸亥休致之請, 累歲申乞, 出於至懇, 而未遂。 每誦宋人“封章凡幾上, 時事每一歎”之句。 九月, 入侍講筵, 又乞休, 仍言遇災修省之道。 且曰 “洪宇遠之誤引《家人》卦者, 原其本情, 或不無可恕。閔熙‘福善在’之說, 無他證左, 竄謫已久, 宜有酌處。” 玉堂金萬吉與館僚以肆然稱冤斥公。 公陳疏待罪, 優批慰諭。 應敎李頤命繼萬吉, 至曰: “明聖王后三年甫畢, 乃有此言。” 公陳疏自劾, 卽日出住銅雀村舍。頤命爲執義, 與正言韓聖佑合啓, 謂公伸救惡逆, 請罷職。 連啓數日, 上終不允。
丁卯正月, 遣史官別諭召, 不赴。 將南歸, 又遣近侍敦諭勉留。 以公辭祿俸, 命賜月廩。 秋, 有長陵遷卜之議, 命公與諸大臣同詣奉審, 曰 “欲待卿一言而決。” 仍敎曰 “判府事奉審時, 許令扶掖。” 公不敢辭。 復命, 引見, 仍深歎向來去國之事, 懇敎挽留。 公留疏還衿陽寓所。 時遷陵之議尙未決, 上將親詣奉審, 又諭公先進陵下候車駕。 上到幕次, 夜遣近侍諭以肩輿入來, 從容引對。 議旣寢, 公仍懇請辭歸, 上面留至勤, 且令落後徐還。 公不得已還到京城。 上命倉官輸送兩年祿俸, 公以 “在鄕旣食月廩, 且不從仕, 實無追受之義”, 固辭不受, 屢箚乞省墓。 筵臣有言 “公之此行, 爲永退計”者, 大臣仍請勉留, 上特遣承旨諭以停行。 公陳箚申乞, 不許。 戊辰二月, 又請歸掃。 上曾有姑待春和之批, 故允許而曰 “給馬遣醫, 意匪偶然。 往伸至情, 急速回還, 無孤企望。” 旋因大臣、儒臣陳白請留, 又以別諭挽行, 有替遣子弟之命。 公欲於前席面請, 入侍講筵, 上方講《周易》。 講畢, 公奏 “《蹇》、《解》二卦, 陰多陽少, 非治泰之象”, 每言斥遠小人之義, 自上當體念此義。 仍申乞省墓於未死之前, 且陳 “前日李頤命所達, 實臣死有餘罪。 臣常以是隱痛,故諸臣疑臣不還。 而南鄕遠隔日邊, 臣何敢不還” 上懇留曰 “頤命之說, 予已洞燭, 卿無以此爲念。” 公又言 “臣今退去, 後難更進。 臣素有區區所懷, 請竝仰陳。”此卽論拯事也。 蓋拯嘗師事宋相時烈, 而情義不終。 時論斥以背師, 故公特明其不然。 又言洪受疇被罪之冤。 旣退, 又陳箚申論拯事。 判府事閔鼎重上箚斥公右拯, 批曰 “豈可以一人之言有所撓奪” 公又上箚引罪, 言 “鼎重箚批與臣所親承於前席者有異。 凡諸處分, 其事爲是, 則固當堅守不撓, 如其不然, 改之爲貴, 恐不宜因仍苟且也。” 批旨頗嚴。 諫長李奎齡疏言批旨未安, 上卽命削改。 公又箚待罪, 批曰 “遣辭頗欠稱停, 以致元老不安。 慙悔曷喩” 領相南公九萬箚言 “李某忠樸無他。 將欲留疏退歸, 請下溫旨以挽老臣之行。” 上特降別諭。 承宣日再至, 公不敢遽退, 出次西湖。 七月, 上特罷吏判朴世采, 竄領相南九萬、右相呂聖齊。 蓋朴公赴召, 有論罪宗杭事, 忤旨, 兩相欲解釋匡救, 而重觸上怒故也。 公連三箚, 請收成命。 八月, 大妃昇遐。 公爲過因山, 仍留京邸。 己巳正月, 又請致事。 傳曰 “卿以耆舊大臣夙負重望, 歷數朝中, 忠厚戇樸, 處心公平, 如卿者幾許 以是不容於囂囂之世態, 累遭顚躓。 而予則實諒卿斷斷無他。” 陞領中樞。 三月, 朝著翻換, 罷兩賢臣文廟從享。 公上箚言 “當初陞祀, 臣亦獻議, 聖上特循多士之建請, 快行累朝之闕典。 到今八年之後, 遽命還黜, 擧措顚倒。” 上下嚴旨, 卽出寓江外。 四月, 坤位將傾, 公謂子弟曰 “國有大事, 他不可顧, 宜與百僚力爭回天” 卽趣駕至城外。 是夜, 上親鞫吳斗寅等, 仍下敎 “此後如此疏章, 繩以逆律。” 而庭請亦已停矣。 公旣未參庭請, 亦不得陳章, 退還江寓, 忠憤鬱激, 不能自抑。 五月二日, 聞有中殿出宮之命, 乃上箚, 略曰 “負累賤臣老而不死,忽聞聖朝非常之過擧, 實是臣民罔極之至痛。 卽伏見昨日備忘, 終有廢黜之命。 決非聖世之所忍爲, 亦豈臣子之所忍見者乎?宋仁宗明示爪痕, 而其後儒臣之論, 猶稱白璧之瑕。孔道輔語呂夷簡曰 ‘父母不和, 可以諫止, 奈何順父黜母乎’ 人情天理, 自當若是。 而自有此擧以來, 稍有不槪於聖心, 則無論大小臣僚, 輒以嚴威重法加之,富弼所謂一擧而兩失者, 不幸近之。 臣以四朝舊物, 偏蒙曠世異數。 曾荷孝廟直臣之奬, 又被聖上戇樸之褒, 而遭此罔極之事, 未卽匡救於前, 遂使聖上擧措畢竟至此, 俯仰天地,直欲無生。” 箚入, 天怒大震, 遂有栫棘之命。 公承傳旨, 無幾微色, 卽日就途。 親戚、賓客及臨岐送行者, 以累千數, 莫不拭淚。 初定鍾城, 宰相白改北靑, 尋量移鐵原。 時夫人喪出於京裏。 八月, 因疏決蒙宥, 以夫人喪南下, 窆于定山地, 仍復寓扶餘。 公以國事至此, 常衋傷長吁, 寢以成疾。 往省先山, 歸哭長子。 悲疚疾轉劇易簀, 卽庚午六月二十二日也。 臨絶諄諄, 皆傷時憂國之語。 訃聞, 命特復官爵, 給喪葬之需。 十二月, 葬于林川樂壽洞, 而遷夫人喪合葬焉。 大臣有稱公淸操於筵中, 請禮葬者, 上始許之, 翌年七月, 始遣禮官致祭。
甲戌, 中宮復位, 副提學吳道一上疏言: “李某以尺牘扶正, 其言激烈懇惻, 有足以抆一世忠臣、直士之淚者。 慰諭之擧, 理宜亟行。 而前下敎中負犯等文字, 亦宜改下。” 上批示慙悔之意, 命刪去前旨, 而有致祭之擧。 乙亥, 朝廷選淸白吏, 公與焉。湖南章甫立祠院于全州。 戊子, 命配享北靑李相國恒福祠, 蓋亦從府人請也。 太常議諡, 賜以忠貞。 公爲人忠直確實, 仁厚弘毅。 器局宏偉, 氣貌峻整。 胸襟坦易, 而嶷然有樹立。 行己處事, 方嚴而縝密, 寬大而謹敬。 平生恥爲邊幅, 未嘗詭隨於人。 與人言, 絶畦畛, 露悃愊。 至於論事是非, 辨人邪正, 則截然不可撓犯。 見有卑諂瞻顧之態者, 甚鄙惡之。 誠孝過人, 事親愛敬備至, 左右無違。 遇親癠, 年衰位高之後, 猶親煮藥。 遭喪, 啜粥朞年 祭祀, 雖非官居之時, 必備需送之宗家。 時或在遠未參, 則思慕涕泣, 終日不已。 外遠代祠廟, 必往拜墓, 皆伐石樹表。 旁親之無後者, 亦如之。 同氣八人, 友愛尤篤, 事伯姊如事母。 以季妹爲親所鍾愛, 係戀眷顧, 一如親在時。 一弟夫妻早沒, 子女幼弱, 敎育婚娶, 卒使成立。 推以至於遠近族戚, 親睦曲備, 其不能婚嫁、葬喪者, 待公以成。 篤於朋友故舊, 雖其人已死, 必存恤其家。 雖無服之親及幼少, 聞其死, 必食素。 處鄕黨隣里, 忠信謙恭, 孤窮寒賤者, 待之愈厚。 恥言人短, 喜人有善, 雖僮僕、吏胥, 未嘗以惡言加之。 敎子弟御家衆, 訢訢肅穆, 極有方律, 人多引以爲式。 其爲政, 威惠幷行, 務存大體, 而條理簡明, 久而無弊。 必以振紀綱、惇風化、得人才、闢言路爲先務。 而亦不爲詭激特絶之習, 律己嚴正, 人不敢干以私。 外方饋遺, 或稍過, 必除還之。 自少不以家人生業嬰心, 旣貴而甔石屢空, 終無一區家舍, 人以萊公之無地起樓擬之。 性尙儉素, 喜淡泊, 衣衾服飾, 只取蔽體。 破牕弊席, 人不堪處, 而晏如也。
噫! 公歷事四朝, 爲國家藎臣。 愛君憂國, 不以進退而少間; 秉心持己, 不以內外而或貳。 平居恂恂, 若無所用其心, 而及其臨大事決大議, 則有壁立千仞、萬牛難回之操。 居廟堂, 則隱然有喬嶽之勢, 中外倚之以爲重; 處江湖, 則悠然有山野之象, 鄕里不知其達官。 一時有識之士, 莫不歸心焉。永安中途之痛, 旣爲千載之於悒。 而世途乖離, 終不能安其身於朝廷之上, 不得盡展其志, 卒至棲遑郊野, 擯斥遐荒以歿。 然其言行、功績, 本末無玷 直節、淸德, 在人耳目, 實可爲後來師法。 人稱近世輔相, 鮮有居公之先者。 吁其盛矣哉 公於書史, 初不熟講, 而聰明贍達, 觸處通暢。 外家諸藝, 亦皆周覽而知其說。 詞翰小技, 雖非屑爲, 而章奏、詩文皆明切高古, 蓋其得於天賦者然也。 貞敬夫人延安金氏, 縣令迪之女。 和淑敏愼, 婦德甚備。 事舅姑, 處兄弟, 奉祭祀, 皆盡其道, 人稱女中君子。 在家勤於女紅, 而安於貧窶。 在官戒婢僕, 不得交關外人, 公之氷蘖之操, 亦內助爲多。 巫覡祈禳之術, 戒禁截然, 不令入於門庭。 育子孫, 亦必以孝悌、方直、儉素爲本。 如分俸饋遺之時, 必先妯娌而後私親, 其明義理而不蔽於私如此。 今上嘉禮時, 以命婦入闕內, 行燃燭禮,明聖大妃亟加敬重云。 生於乙卯, 卒於己巳六月, 壽七十五。 二男二女 男長延會, 主簿; 次延普, 進士, 郡守。 女長適持平李斗岳, 次適參判李世載。 主簿二男一女 男長宇春, 郡守; 次宇夏, 參奉。 女適尹東洙, 敎官。 郡守無子, 以宇夏爲後。 持平一男二女 男世德, 正言。 女壻曰兪命岳, 都事 申采華, 縣監。 參判亦無子, 有繼後子宜龍。宇春男曰晉聖、觀聖、蒙聖。 女長適吳彦胄, 餘二女幼。宇夏一女, 幼。尹東洙男光蘊、光謙, 一女幼。 其餘不能盡記。
嗚呼! 公與我先人交誼不泛。拯自少屛蟄, 登門甚晩, 而公以先人之故, 辱爲之傾倒。 末年告休之日, 乃獨以不肖微物, 惓惓於榻前。拯以叔向、祈奚之義, 雖不敢致私謝, 而中心之感, 尙不敢忘。 今於墓道之文, 託名爲幸。 而唯老病衰耗, 不能發揮德業, 傳示久遠是懼。 然公自久遠, 亦何待於發揮也 銘曰。
孝廟撫運, 奮發聖志。 內修外攘, 欲伸大義。 寤寐豪英, 圖與共事。 公時藐然, 簪筆入侍。 旣入臺端, 讜議始吐。 惟忠惟直, 結知明主。
外試雷霆, 內實眷注。 亟加拔擢, 擬托心膂。 際遇甫隆, 弓劍忽遺。 追報如丹, 世路多巇。 盤桓于外, 歲月其遒。 進無所樂, 退豈忘憂晩被登庸, 位躋形孤。 君實無黨, 善類是扶。 一心王室, 老而靡渝。 氷蘗平生, 乃公之餘。 國有變故, 大節益彰。 凜然卓立, 暮景之光。 嗟公本末, 聖祖知臣。 神歸箕尾, 名溢簡編。 有樂斯丘, 衣冠是藏。 維式有碑, 用昭無疆。<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