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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역문첨록
진산 군수 윤공 묘지명 병서(珍山郡守尹公墓誌銘 幷序)
우리 국가는 병정년(丙丁年) 이후로 관(冠)과 신발의 도치됨이 지극하였다. 우암 송 선생이 첫 번째로 춘추(春秋)의 대의를 선창하여 한 세상을 계도하니, 선비들의 취향이 이 때문에 크게 변하였다. 이에 일소재(一笑齋) 윤공(尹公)이 절의를 지킨 가문의 자손으로 일어나 선생을 도우니, 사람들이 공을 바라보기를 동경(東京)의 고준(顧俊)과 같이하여, 아는 이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모두 체원(體元)을 칭송하였으니, 체원은 공의 자이다.
이윽고 소장(消長)과 왕복이 한결같지 아니하여 선생이 끝내 화를 당하고, 공 또한 장독(瘴毒)이 있는 바닷가 지방으로 멀리 귀양갔다.
그러다가 세도(世道)가 깨끗해지자 급히 다시 부름을 받으니, 사우들은 날마다 공의 옴을 더디게 여겼는데, 오다가 중도에서 갑자기 별세하니, 아, 군자의 불행함이 마침내 이에 이른단 말인가.
공은 남원(南原) 사람이니, 휘는 이건(以健)이다. 증조 섬(暹)은 홍문관 교리로 임진왜란에 순절하였으니 시호가 문열(文烈)이다. 조고 형갑(衡甲)은 현감인데 광해군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였으나 현달하지 못하였고, 세 아들을 두었다. 장자 계(棨)는 홍문관 응교로 병자년 오랑캐 난리에 남양(南陽)을 지키다가 죽으니 시호가 충간(忠簡)이며, 둘째 아들 집(集)은 홍문관 교리로 오랑캐와의 화친을 배척하다가 오랑캐의 뜰에서 죽으니 시호가 충정(忠貞)이다.
효종은 일찍이 감탄하기를,
“윤씨의 세 절개는 귀하게 여길 만하다.”
하였다.
막내 유(柔)는 명나라를 위하여 뜻을 지키고 자취를 감췄으며 스스로 ‘농아(聾啞)’라 호하였는데, 우뚝한 행실로 특별히 장령(掌令)에 추증되니, 공은 바로 이분의 장자이시다. 공은 숭정(崇禎) 경진년(1640, 인조 18)에 출생하였다. 분만하려 할 적에 큰 호랑이가 문 밖에 엎드려 있었는데, 태어나자 영특함이 특별하였다. 5세에 부친을 잃었는데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해서 문채가 찬란하였다.
일곱 살에 청음(淸陰) 김 선생[김상헌(金尙憲)]을 뵙자, 선생은 기특히 여기고 사랑하여 농아공의 자를 부르며 말씀하기를,
“강백(剛伯)이 훌륭한 아들을 두었다.”
하였다.
이어서 여러 유명한 분을 두루 배알하고 마침내 우암을 사사하니, 우암이 한번 보고는 장려하고 인정하여 국사(國士)로 대우하였다.
공은 이로부터 이름과 행실을 더욱 갈고 닦아 구차하고 나약한 습관을 힘써 제거하였으며, 언론이 통쾌하여 세상의 비굴하고 나약한 자들을 보면 무시하였다.
16세에 태학(성균관)의 장의(掌議)가 되었는데, 이때 청음을 지목하여 간사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사론(士論)들이 놀라고 분개하여 그 사람에게 벌을 내리자, 그의 도당들이 그를 풀어주고자 하여 공의 한마디 말씀을 요구하였다.
공이 그 요구를 내치며 큰소리로 말하기를,
“오랑캐는 개돼지들인데도 선생의 절개를 공경하고 심복하였는데, 이 사람은 개돼지만도 못하다.”
하니, 그 의논이 마침내 저지되었다.
효종은 큰 뜻을 품고 충의에 죽은 집안사람들을 은밀히 수소문하였는데, 공의 행실이 특별히 출중하여 내심 좋게 여겼다. 그러나 마침 성상이 승하하여 미처 임용되지 못하였다. 현종 때에 민중(閩中) 사람들이 표류하여 제주도에 왔는데, 한(漢)나라 의식(儀式)을 바꾸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오랑캐들을 두려워하여 이들을 포박하여 오랑캐에게 넘겨주려 하였는데, 공은 항거하는 상소문을 올려 이의 불가함을 말씀하였는바, 의리로 분변함이 격렬하니, 사람들은 이것을 교리공(校理公)의 〈척화소(斥和疏)〉에 비하였다.
계축년(癸丑年, 1673, 현종 14) 상사(上舍)에 올라 즉시 동궁(세자시강원)의 세마(洗馬)에 제수되니, 이는 엄선된 선발이었다. 이어서 시직(侍直)으로 승진하였으며, 숙종이 즉위하자 지난날 동궁의 관리라 하여 준례에 따라 6품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윤휴(尹鑴)라는 자가 헛된 명성을 도둑질하여 정초(旌招)에 응하였는데, 공과 같은 집안이었으므로 한번은 공을 초청하였다.
공의 어머니 파평 윤씨는 어진 덕이 있었는데, 공에게 말씀하기를,
“너의 아버지께서 일찍이 이 사람과 친하게 지내시다가 뒤에 그가 바르지 못함을 깨닫고 절교하셨으니, 부디 가지 말아라.”
하였다.
공이 마침내 응하지 않으니, 윤휴는 노여운 마음을 품었으나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윤휴가 권세를 얻어 갑자기 귀해지고 사헌부의 장관이 되어 사화를 일으킬 적에, 우암을 화란의 우두머리로 여기고는, 공이 우암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하여 공을 사헌부에 가두고 심문하고자 하였는데, 관리가 말하기를,
“조정의 선비를 사헌부에 가두는 것은 전례가 없다.”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
경신년(庚申年, 1680, 숙종 6)에 윤휴가 실패하여 죽고 그 무리들이 물러나자, 우암이 조정으로 돌아오니, 재신(宰臣)과 유신(儒臣)들이 서로 공을 천거하여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에 제수되었다. 금성 현령(金城縣令)으로 나갔다가 체직하고 인의(引儀)와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며, 승진하여 진산 군수(珍山郡守)가 되었다.
공은 외지로 부임하여 고을을 다스릴 적에 엄격하고 분명함을 숭상하니, 간사하고 교활한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였다. 금성에 부임했을 적에 어떤 사람이 죽음을 당하여 시신이 길가에 가로 놓여 있었는데, 살인한 흉적을 잡지 못하였다. 공은 곧 시신을 묶어놓은 끈을 풀어 몰래 가지고 오면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얼굴 모습이 수상한 자를 살펴서 은밀히 기억해 두었다.
공은 가까운 마을 민가에 이르러서 벽 위에 노끈이 있는 것을 보고는 앞서 푼 끈을 갖다가 맞춰보니, 조금도 틀리지 않기에 그 주인의 이름을 물어보니, 바로 앞서 살펴 기억해 두었던 자였다. 즉시 그를 조사하자 모든 죄를 자백하니, 온 경내가 크게 놀라 ‘신명(神明)’이라고 칭하였다.
안찰사(按察使)가 공의 고과(考課)를 올리기를,
“재주는 큰데 고을이 작으니,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습니까.”
하였다.
진산은 고을이 산골에 위치해 있어서 토질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모두 가난하였다. 공은 재량을 잘하여 공사 간에 궁핍함이 없었으며, 시를 읊조리면서 스스로 유유자적하여 일찍이 일이 있는 것 같지 않았으나 조리가 질서정연하여 본디 미칠 수가 없으니, 후일에 이 고을을 다스리는 자들이 공보다 뛰어나지 못하였다.
공은 평소 세상의 중망(重望)을 받고 있었는데, 작은 고을로 시험하는데도 명성과 행적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당시 명망이 더욱 높아져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미관말직은 공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
하여, 장차 대성(臺省)의 자리를 비워놓고 공을 머물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나이 젊은 사람들이 스스로 한 당을 이루어 우암을 배반하니, 공은 이로부터 행적이 세상과 어긋나서 마침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 윤휴의 잔당이 다시 권력을 잡고 첫 번째로 공을 김해(金海)에 귀양 보냈으나, 공은 뜻과 기개가 더욱 드높아서 끝내 좌절하는 뜻이 없었다.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 20) 정국이 바뀌어 죄가 풀려 돌아오는데, 청주성 밖에 이르러 5월 21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55세였다. 6월 10일 김포 동림촌(東林村)의 선영으로 돌아와 장례하였다.
공에게 이성(以性)이란 아우가 있었는데, 자가 복원(復元)으로 공보다 네 살이 적었다. 또한 훌륭한 행실과 지절(志節)이 있어서 공과 백중이었는데, 공보다 7년 전에 별세하고 관직은 참외(參外)를 벗어나지 못하니, 세상에서는 모두 애석히 여겼다.
공은 지극한 성품과 순수한 행실이 있어서 선대의 아름다움을 잘 계승하였다. 어머니를 섬길 적에 효성을 다하여,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상을 당하자 너무 슬퍼하여 몸을 훼손하기를 상례보다도 더하여 몰골이 삐쩍 말라 뼈만 앙상하니, 우암이 감탄하기를,
“체원(體元) 형제는 지금 세상의 이련(二連)이다.”
하였다.
스스로 일찍 부친을 잃은 것을 애통하여 종신토록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으며, 남쪽(왜국)과 북쪽(청나라)에 모두 대대로의 원수가 있다 하여 두 나라의 물건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제사에 공경을 다하여 음식을 조리하고 세척하는 것을 노비들에게 맡기지 않았으며, 제사 날을 당해서는 슬피 흐느끼다 기절해서 한결같이 초상 때와 같이하였다.
공은 형제간에 우애하고 공경하기를 매우 돈독히 하여 형제들이 집을 연해 살았는데, 날마다 화합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칭찬을 받았다. 친족들을 은혜롭게 대하고 집안의 무리를 다스림에 이르러도 각각 그 도리를 다하였다.
평소 청렴과 검약함으로 자신을 단속하여, 지방의 고을에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올 적에 행장(行裝)이 쓸쓸하였다. 인품이 의리를 좋아하여 한번 허락하면 반드시 지켰으며, 사람의 어려움을 급히 구제하고 자신의 사사로움을 계산하지 않아서, 옛날 열사(烈士)와 호협(豪俠)의 기풍이 있었다.
교유한 분이 모두 한때의 어질고 호걸스러운 장자였다. 속마음을 활짝 열어 간격을 두지 않았으나 높은 의표로 자신을 게시하고, 말씀과 얼굴빛을 좋게 하여 남을 따르지 않았다. 매번 수염을 쓰다듬고 높이 담론하며 해학을 뒤섞었으며, 말소리가 분명하고 높으며 생각과 운치가 높고 깨끗하니, 비록 나약하여 여지(蜍志)와 같은 자들도 공을 대하면 자기도 모르게 생기가 발동하였다.
공은 집안이 대대로 충의(忠義)를 지켜 백부와 중부(仲父)가 오랑캐의 난리에 절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니, 공은 항상 비분강개하였다.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군주(효종)를 만나서 군주의 위엄과 도움을 의지하여 복수할 뜻을 펴려 하였으나, 하늘이 돌아보고 돕지 아니하여 끝내 또한 어긋나니, 더욱 근심걱정이 쌓여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남쪽 고을에 있을 적에 번번이 군복을 입고 장검(長劍)을 차고는 밤중에 일어나 방황하였으며, 혹 달 밝은 밤에 약간 취하면 매번 〈청석령곡(靑石嶺曲)〉을 노래하고는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렸다. 〈청석령곡〉은 효종께서 심양(瀋陽)에 계실 때 지은 것이니, 그 깊이 의탁한 뜻을 어찌 세속 사람들이 더불어 알 수 있겠는가.
음(陰)과 양(陽), 선(善)과 악(惡)의 구분에 가장 엄격하여 마치 잘 드는 칼을 가지고 잘라내듯 결단하였다. 이 때문에 선한 사람들은 친애하여 찾아오지 않는 이가 없었고, 선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 공을 미워하였다. 석곡(石谷) 송상민(宋尙敏)이 우암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다가 지나친 형벌을 받고 죽자, 친구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조문하지 못하였다. 공은 이때 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몸소 가서 시신을 수습하고 관을 가져다가 염습하고서 떠나가니,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화의를 주도한 정승을 위하여 우암에게 화해할 것을 요구하는 자가 있자, 공은 슬피 오열하면서 실성통곡하고 그 옳지 못함을 강력히 분변하였다. 우암은 이에 용모를 바꾸고 마침내 감탄하기를,
“여기에서 이 친구의 기질과 성품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우암은 일찍이 공의 집에 있는 매화와 대나무를 읊기를,
“그대의 집 할아버지와 손자의 절의가 장차 이 매화와 대나무와 같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공을 깊이 인정한 것이었다.
아, 공은 드높고 특이한 자품으로 일찍이 우암을 만나 의귀(依歸)할 스승으로 삼으니 사론들이 의지하여 중하게 여겼으며, 공 또한 분발하고 힘써서 스스로 나타낼 것을 생각하였으나, 세상길에 갈래가 많고 간사한 말이 서로 치달려서 중화(中華)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뜻이 점점 퇴색되었다.
공은 마침내 머뭇거리고 전진하지 못하였으며, 끝내는 위적(僞籍)에 이름이 올라 도주(道州)의 걸음을 되돌리지 못해서 평소 간직한 막중한 명성이 침몰되고 굽혀서 펴지 못하였으니, 아, 애석하다.
배위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참판에 추증된 초일(楚逸)의 따님으로 부인의 도리가 있었는데, 공보다 22년 뒤에 죽어서 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다. 아들이 없고 다만 세 딸이 있어서 관찰사 이해조(李海朝), 세마(洗馬) 송일원(宋一源), 선비 이용(李容)에게 출가하였으니, 도사(都事) 이징신(李徵臣)과 숭신(崇臣), 현령 송문상(宋文相)과 정상(正相)ㆍ후상(後相), 이유경(李維慶)은 이 사위들의 아들과 양자이다.
공이 별세한 뒤에 충정공(忠貞公)의 손자인 준(浚)을 데려다가 공의 양자로 삼았다. 준은 1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하주(廈柱)이고 딸은 어유기(魚有夔)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하주는 1남을 낳았는데 또한 어리다.
나는 아홉 살에 책을 끼고 공을 따라 배웠는데, 공은 나에게 거신 기대와 허여가 매우 지극하여 나를 어린아이로 보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무릇 기거동작과 응접에 관계되는 것으로부터 사우(師友)와 논설에 이르기까지 모두 참여하여 듣게 하고, 이어서 손을 잡고 한숨을 쉬며 말씀하시기를,
“내 죽은 뒤에 장차 나의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하셨다.
굽어보고 우러르는 잠깐 사이에 어느덧 50년의 세월이 흘러서 나 또한 늙어 백발이 되었다. 이제 변변치 못한 글을 가지고 공의 묘에 기록하니, 붓을 잡고 종이를 대함에 황홀하게 다시 공의 빛나는 모습을 가까이 대하는 듯하여, 더욱 구 태상(歐太常)의 감회를 이길 수 없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고룡을 관향으로 하니 / 古龍維籍
세 절의가 우뚝하고 / 三節鼎峙
농아공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니 / 聾公軼倫
유명(有明)의 진사라오 / 有明進士
이분이 훌륭한 아들 낳으시니 / 是生偉人
진실로 드높은 법칙을 따랐고 / 允廸卓軌
금옥과 같은 형제들 / 金昆玉友
짝하여 세상의 아름다움이 되었네 / 儷爲世紀
학업을 공경하고 친구들과 즐거워하기를 / 敬業樂羣
저 파수에서 하였으니 / 于彼巴水
망극한 때를 만나 / 値時罔極
올바른 의리를 지켰네 / 協持正義
슬픈 노래로 격앙하여 / 悲歌激越
깊은 수치 씻을 것을 맹세하였으나 / 誓雪深恥
말년에 머뭇거려 / 低徊晩暮
혹 떠밀려 중지하였네 / 或擠而止
영해에서 돌아오라는 명령 있었는데 / 嶺海追命
중도에 갑자기 별세하니 / 中途遽委
캄캄한 긴 밤중에 / 沈沈脩夜
기이한 뜻 답답하여라 / 鬱鬱奇意
동림의 기슭은 / 東林之麓
바로 공의 옷과 신이 묻힌 곳이니 / 寔閟衣履
아직도 영령이 있어서 / 尙有英爽
구천에 밝게 통하리라 / 映徹泉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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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01] 병정년(丙丁年) …… 지극하였다 :
병정은 인조 14년인 병자년(1636)과 그 다음 해인 정축년(1637)으로, 병자년 겨울 청군(淸軍)이 침략하여 이듬해 정월 인조가 청
나라에 항복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도치는 상하의 위치가 전도된 것을 말하는바, 조선이 패전 이후 강요에 의해 명나라와
국교를 끊고 오랑캐인 청나라를 섬기게 된 일을 가리킨다.
[주02] 동경(東京)의 고준(顧俊) :
동경은 후한(後漢)을 이르는바, 전한(前漢)은 서쪽의 장안(長安)에 도읍하였으므로 서한(西漢)이라 칭하고 후한은 낙양(洛陽)에
도읍하였으므로 동한(東漢)이라 칭하였는데, 서한을 서경(西京), 동한을 동경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고준은 ‘팔고(八顧)와 팔준(八俊)’의 줄임말로 동한 말기에 사람들이 명사(名士)들을 분류한 명칭인데, 덕행(德行)으로써 사람을
이끌 수 있는 명사〔以徳行引人者〕 8명을 팔고라 하였고, 사람 중의 뛰어난 인물〔人之英也〕 8명을 팔준이라 하였는바, 팔고는
곽임종(郭林宗)ㆍ종자(宗慈)ㆍ파숙(巴肅)ㆍ하복(夏馥)ㆍ범방(范滂)ㆍ윤훈(尹勳)ㆍ채연(蔡衍)ㆍ양척(羊陟)을 이르고, 팔준은 이
응(李膺)ㆍ순욱(荀彧)ㆍ두밀(杜密)ㆍ왕창(王暢)ㆍ유우(劉祐)ㆍ위랑(魏朗)ㆍ조전(趙典)ㆍ주우(朱㝢)를 이른다. 8명을 든 것은 옛
날 순(舜) 임금 때의 팔원(八元)과 팔개(八凱)에 견준 것이다. 《後漢書 黨錮傳序》
[주03] 소장(消長)과 …… 아니하여 :
소장과 왕복은 음과 양이 서로 상대하여 양이 성하면 음이 사라지고 음이 성하면 양이 사라지며, 양이 가면 음이 오고 음이 가면 양이
옴을 이른다.《주역》에서 음은 악으로 소인(小人)을, 양은 선으로 군자(君子)를 상징하였는바,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의 일진
일퇴를 말한 것이다.
[주04] 윤씨의 세 절개 :
임진왜란 때 순절한 윤섬(尹暹)과, 그의 증손으로 병자호란 때 죽은 계(棨)와 집(集) 형제를 가리킨 것이다.
[주05] 농아(聾啞)라 호하였는데 :
농아는 귀머거리와 벙어리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우암은 문열공(文烈公)의 시호를 맞이하는 글의 발문에서 “병자년
과 정축년의 호란 뒤의 거짓 연호인 숭덕(崇德 청 태종의 연호)을 듣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농아라고 스스로 호하였
다.〔丙丁亂後崇德僞號, 不欲聞不欲言, 故以此自號.〕”라고 설명하고 있다. 《宋子大全 卷146 書尹文烈公延諡圖序後》
[주06] 민중(閩中) …… 않았다. :
이 사건은《현종실록》8년 6월 21일 기사에 “전라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중국인 95명이 표류되어 제주도에 상륙하였는데 이들
은 변발하지 않고 상투를 틀어 청나라에 복속하지 않은 자들이니 묘당의 처치를 바란다.’는 장계를 올렸다.”라고 보인다.
민중은 중국 복건성(福建省)을 가리키며, 한나라의 의식은 명나라의 복장과 변발(辮髮)하지 않은 머리 모양을 말한 것이다. 청나라
는 중국을 점령한 다음 변발령을 내려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의 이마 부분을 깎고 머리는 길게 늘어뜨리는 변발과 호복(胡服)을
강요하였다.
[주07] 교리공(校理公)의 척화소(斥和疏) :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형제관계를 맺고 강화한 청(당시 후금)과 조선 간의 외교는, 1636년에 이르러 청나라가 일
방적으로 군신관계를 강요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여 악화되고, 조정에서는 척화의 기운이 팽배하였다.
이러한 기세를 타고 이해 11월 8일에 당시 부교리인 윤집이 주화파의 수장인 최명길(崔鳴吉)의 죄를 논한 상소를 올렸는데, 여기서
청나라와의 화의를 비난하고 숭명반청(崇明反淸)을 주장하였는바, 이를〈척화소〉라고 한다. 윤집은 상소 후에 바로 교리로 승차
(陞差)되었다.
[주08] 정초(旌招) :
학덕이 높은 선비를 과거를 거치지 않고 유림(儒林)의 천거로 벼슬을 제수하고 부르는 일을 이른다. 정(旌)은 꿩의 깃털을 깃대 끝에
단 기를 말하는데, 고대에 대부(大夫)를 부를 적에 정을 사용한 데서 유래하였다.《맹자》〈만장 하(萬章下)〉에, “서인은 전(旃)으
로 부르고, 사는 기(旂)로 부르고, 대부는 정(旌)으로 부른다.〔庶人以旃, 士以旂, 大夫以旌.〕”라고 보인다.
[주09] 경신년(1680)에 …… 물러나자 :
숙종 6년(1680)에 당시 집권 세력이던 남인 일파가 대거 실각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선 경신환국을 가리킨 것으로, 경신대출척이라
고도 한다. 1674년(현종 15)의 예송(禮訟) 논쟁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남인은 전횡이 심하여 점차 숙종의 신임을 잃고 있었는
데, 당시의 영의정 허적(許積)이 자신의 잔칫날 임금의 허락없이 유악(油幄)을 빌려가자,
이에 분노한 숙종이 군권(軍權)의 담당자를 남인에서 서인으로 대거 교체하였으며, 이어 서인인 김석주(金錫胄) 등이 허적의 서자
인 허견(許堅) 등의 역모를 고변하여, 종실인 복창군(福昌君) 3형제와 허견과 허적, 윤휴(尹鑴) 등이 사사되고 허목은 파직되어 문
외출송되었으며 나머지 남인도 대부분 사사되거나 유배되어, 남인이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선 사건이다.
[주10] 재주는 …… 쓰겠습니까 :
국가를 경륜할 큰 재능으로 작은 고을을 맡아서 다스림을 말한 것이다.《논어》〈양화(陽貨)〉에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
(武城)의 수령이 되어 예악(禮樂)으로 고을을 다스리는 것을 보고, 공자께서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割鷄, 焉
用牛刀.〕”라고 하였는바, 이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11] 대성(臺省) :
대간(臺諫)과 같은 말로, 사헌부와 사간원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주12] 나이 …… 배반하니 :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 숙종 6)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들 중에 우암 송시열 등은 훈척의 정치 참여를 인정하고 남인에 대해 강경
한 처벌을 주장하였고, 윤증(尹拯)과 남구만(南九萬), 박세채(朴世采) 등은 이를 반대하여 대립하였는데, 우암을 추종하는 자들은
대부분 노성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노론(老論)이라 불렀고, 윤증 등을 추종하는 자들은 대부분 신진사류들이었기 때문에 소론(少
論)이라고 하였다.
[주13] 참외(參外) :
7품 이하의 낮은 품계를 이른다. 6품 이상은 조회(朝會)에 참석하므로 6품 이상 종3품 이하를 참상(參上)이라 하고, 7품 이하는 참
석하지 못하여 참하(參下) 또는 참외라 하였다.
[주14] 이련(二連) :
중국 고대에 효성으로 이름난 형제인 소련(小連)과 대련(大連)을 이른다.《예기》〈잡기 하(雜記下)〉에 “소련과 대련이 거상(居
喪)을 잘하여 3일을 태만하지 않았으며 3개월을 게으르지 않았으며 1년을 슬퍼하였으며 3년을 근심하였으니, 동이(東夷)의 자식이
다.〔少連大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解, 期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라고 보인다.
[주15] 남쪽(왜국)과 …… 있다 :
윤이건의 증조인 윤섬(尹暹)은 임진왜란 때 상주성(尙州城)에서 왜적을 막다가 전사하였고, 백부인 윤계(尹棨)와 중부(仲父)인 윤
집(尹集)은 병자호란 때 순절(殉節)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16] 속마음을 활짝 열어 :
원문의 ‘성부(城府)’는 마음속에 견고한 성을 쌓아 마음을 닫고 있는 것의 비유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번역하였다.
[주17] 여지(蜍志) :
진(晉)나라 때의 사람들인 조여(曹蜍)와 이지(李志)의 병칭으로, 재주는 있으나 인품이 용렬한 소인을 이를 때 흔히 인용된다. 《세
설신어(世說新語)》〈품조(品藻)〉에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는 비록 천 년 전에 죽었어도 사람들로 하여금 늠름한 기상을
느끼게 하여 항상 생기를 발산하는 듯하고, 조여나 이지는 비록 살아 있어도 미미하여 마치 구천 아래 있는 사람과 같다.〔亷頗藺相
如, 雖千載上, 使人懍懍, 恒如有生氣, 曹蜍李志, 雖見在, 厭厭如九泉下人.〕”라고 보인다.
여(蜍)는 조무(曹茂)의 자로 팽성(彭城) 사람이고, 이지는 자가 언도(彦道)로 양양(襄陽) 사람인데, 이들은 모두 재주가 있어 글씨
를 잘 썼고 높은 벼슬도 하였으나 인품이 용렬하였다 한다. 황정견(黃庭堅)의 우군첩(右軍帖) 후미에 “조여와 이지의 글씨는 왕희
지(王羲之)와 동등했지만 전하기에는 부족하다. 편지 한 장의 글씨라도 수백 세를 전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의 인품에 달려있
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18] 백부와 중부(仲父) :
윤계(尹棨, 1603~1636)와 윤집(尹集, 1606~1637)을 이른다. 윤계는 자가 신백(信伯), 호가 신곡(薪谷)으로 1627년(인조 5) 정
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출사하고 1636년에 남양부사가 되었는데, 이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다 청병에게 잡혀 참살되었다.
윤집은 자가 성백(成伯), 호가 임계(林溪)로 1631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출사하고, 교리로 있으면서 척화를 주도하였는
데,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나라가 화친의 조건으로 척화파를 체포하여 넘겨줄 것을 요구하자, 오달제와 함께 자청하여 청나라 심양으
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주19] 청석령곡(靑石嶺曲) :
음우호풍곡(陰雨胡風曲)으로 더 잘 알려진 시조로, 봉림대군(효종)이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심양에 볼모로 끌려갈 적에, 청석령을
지나면서 지은 작품이다. 청석령은 신의주에서 심양으로 가는 길 중간쯤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이 곡은 효종의 아우 인평대군(麟坪
大君)의 문집인 《송계집(松溪集)》에 한역(漢譯)된 글이 실려 있다.
[주20] 석곡(石谷) 송상민(宋尙敏) :
1626~1679. 석곡은 그의 호이고, 자는 자신(子愼),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송시열ㆍ송준길의 문인으로 1660년(현종1) 사마시
에 합격하고는 곧 송시열이 있는 회덕(懷德)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 전력하였다. 예송(禮訟) 논쟁으로 송시열이 덕원(德源)으로
유배가자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를 올렸다가, 당시 영의정이던 허적(許積)의 탄핵을 받고 궁궐 앞에서 장살(杖殺)되었다.
[주21] 화의를 주도한 정승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 화의를 주장한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을 가리킨 것이다.
[주22] 위적(僞籍)에 …… 못해서 :
주인공인 윤이건이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서인의 주요 인물로 꼽혀 남인에 의해 유배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위적은 위학당
(僞學黨)의 명단을 가리키며, 도주(道州)의 걸음이란 먼 곳으로 유배됨을 말한다. 남송 영종(寧宗) 때 주자가 상소하여 한탁주(韓侂
冑)의 간악함을 논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한탁주가 정권을 잡자, 당시 도학(道學)을 위학으로 배척하고 주자의 관작을
삭탈하였으며, 그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두 위학당으로 지목하여 귀양 보내거나 출사(出仕)의 길을 막았다.
이때 주자의 친구이자 제자인 채원정(蔡元定)은 도주로 귀양가면서 3천 리 길을 도보로 걸어 발이 피투성이가 된 채 적소(謫所)에
도착하였다.《宋史 卷474 韓侂冑傳》《宋史 卷434 儒林列傳 蔡元定》도곡은 윤휴 등 남인이 실권을 잡고 우암을 비롯한 서인을
축출한 일을 말하면서, 남인을 소인인 한탁주에, 서인을 주자의 도학파에 견준 것이다.
[주23] 구 태상(歐太常)의 감회 :
북송 때 태상박사(太常博士)를 지낸 구양비(歐陽棐, 1047~1113)로, 대문장가인 구양수(歐陽脩)의 아들이다. 한번은 구양비가 강
절(康節) 소옹(邵雍, 1011~1077)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는데, 소옹이 자기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자세하게 말씀해 주었다.
이에 구양비가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구양수가 “이는 필시 뜻이 있어 하신 말씀일 것이다.”라고 하며 기뻐하였다.
뒤에 구양비가 태상박사가 되었는데, 소옹이 작고하여 조정에서 시호(諡號)를 의논할 적에 그 시장(諡狀)이 구양비에게 맡겨졌다.
구양비는 그제야 비로소 깜짝 놀라며 ‘선생께서 그때에 말씀해 주신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한 것이었구나.’라고 깨닫고는, 소옹이 지난
날 해 준 말씀을 빠짐없이 서술하였다. 《宋元學案 卷9 百源学案上》
[주24] 고룡(古龍) :
남원(南原)의 고호로, 백제 시대의 명칭이다. 《世宗實錄地理志 南原都護府》
[주25] 유명(有明) :
명나라를 가리킨다. 옛날 한 글자로 된 국호(國號) 앞에 유(有)나 태(大)를 붙였는바, 이에 명나라를 ‘유명(有明)’ 또는 ‘태명(大
明)’으로 칭하였다.
[주26] 저 파수(巴水)에서 하였으니 :
파수는 송시열이 강학하던 청주(淸州)의 화양동(華陽洞 현재 괴산군 소속)을 가리키는바, 윤이건은 이곳에서 수학하였다. 우암이
은거한 화양구곡(華陽九曲)의 마지막 절경이 파곶이인데, 한자로 ‘巴串’이라고 썼기 때문에 이후 파수, 파계(巴溪) 등은 모두 우암
의 거처나 우암을 이르는 말로 쓰였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황교은 류재성 김창효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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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國家自丙、丁以後, 冠屨之倒置極矣。 尤菴宋先生首倡《春秋》大義, 以啓牖一世, 士趨爲之丕變。 於是一笑齋尹公以節義家子孫, 起而羽翼之。 人之望公如東京之顧、俊, 知與不知咸誦體元, 體元者, 公之字也。 旣而消長往復之不一, 而先生終及於禍, 公亦流竄瘴鄕。 及世道淸明, 亟蒙環召。 士友日遲其至, 而行至半道遽卒。 嗚呼! 君子之不幸乃至是耶?
公南原人, 諱以健。 曾祖暹, 弘文校理, 壬辰倭難殉節, 諡文烈。 祖衡甲, 縣監, 光海時登第, 仕不顯, 而有三子: 長棨, 弘文應敎, 丙子虜變, 守南陽死之, 諡忠簡。 仲集, 弘文校理, 以斥和死虜庭, 諡忠貞。 孝廟嘗嘆曰: “尹氏三節可貴。” 其季柔, 爲皇明守志晦跡, 自號聾啞, 以卓行特贈掌令, 公其長子也。
生於崇禎庚辰。 將娩, 有大虎伏戶外, 生而英特異常。 五歲而孤, 能自奮爲學, 文采蔚然。 七歲, 謁淸陰金先生, 先生奇愛之, 字聾啞公曰: “剛伯有子矣。” 因遍謁諸名公, 遂師事尤菴。 尤菴一見奬許, 待以國士。 公自是益砥礪名行, 務去偸懦習, 言論痛快, 其於世之卑孅熟軟者, 視之蔑如也。 十六, 掌學宮議, 時有目淸陰爲奸者。 士論駭憤, 罰其人, 其黨欲解之, 須公一言。 公大言折之曰: “胡虜, 犬豕也, 猶敬服先生節。 是人曾犬豕不若也。” 其議遂沮。 孝廟有大志, 密搜訪死義家人, 公制行特出倫比, 上內善之。 會上薨, 不及任用。 顯宗朝有閩人漂到濟州, 不改漢儀。 朝廷畏虜, 將執而與之。 公抗疏言其不可, 義辦激烈, 人比之校理公《斥和疏》。
癸丑, 陞上舍, 卽除東宮洗馬, 甚選也。 仍陞侍直。 肅廟卽位, 以舊宮僚例陞六品。 時有尹鑴者盜虛名, 至膺旌招, 與公同宗, 嘗有所邀請。 公母坡平尹氏有賢德, 語公曰: “而父曾與此人善, 後覺其不正而絶之, 其勿往!” 公遂不應, 鑴銜未發。 至是得勢驟貴, 爲憲長, 搆士禍, 以尤菴爲禍首。 以公游尤菴門, 欲囚府而栲訊之, 吏言朝士囚府無例, 乃止。 庚申, 鑴敗死, 其黨逬退, 尤菴還朝, 宰臣、儒臣交口薦公, 拜司僕主簿。 出爲金城縣令, 遞拜引儀、工曹佐郞, 陞爲珍山郡守。 公莅外政, 尙嚴明, 奸猾慴伏。 金城時, 有何人橫屍道傍, 賊不得。 公輒解繫屍繩藏去, 察視多人中形色異者, 陰識之。 至近村民舍, 見壁有繩, 取前解繩合之弗差。 問其主名, 卽向所察識者, 按之具服。 一境大驚, 稱爲神明。 按使上其考曰: “才大邑小, 焉用牛刀?” 珍爲邑處山峽間, 土瘠薄, 民呰窳。 公善於裁處, 公私無乏。 嘯詠自適, 若未始有事, 而條理井井, 自不可及。 後之爲治者, 莫能絶也。 公雅見重於世, 小試亦著名蹟。 時望益隆, 咸謂: “庶官末職, 非所以待公。” 方將虛臺省位處之, 而是時年少輩自成一黨, 貳於尤菴。 公自此跡與時左, 遂不果。 己巳, 鑴黨復用事, 首竄公金海。 公志氣彌厲, 終無隕穫意。 甲戌, 改紀宥還, 到淸州城外, 以五月二十日卒, 享年五十五。 以六月十日, 歸葬于金浦東林村之先兆。
公有弟以性, 字復元, 少公四歲。 行誼志節, 亦與公伯仲, 前公七年卒, 職不離參外, 世俱惜之。 公至性純行, 克承前美。 事母盡孝, 疾劇斮指。 及喪, 哀毁踰禮, 柴綴骨立。 尤菴嘆曰: “體元兄弟, 今世之二連也。” 自痛早失所怙, 終身不襲華采: 以南北俱有世讎, 不近二境物。 謹於祀享, 亨芼濯漑, 不任婢㜎: 當祭, 哀號隕絶, 一如始喪。 友悌甚篤, 昆季連門, 日與湛翕, 爲世所艶稱。 以至惠宗䣊、御家衆, 各盡其道。 平居廉約自持, 罷外邑, 行橐蕭然。 爲人嗜義, 立然諾, 急人之難, 不計己私, 有古烈、俠風。 所交游, 盡一時賢豪長者。 洞開城府, 不設崖岸, 而標高揭己, 不肯以言色徇人。 每奮髥抗談, 雜以諧謔, 辭氣激昂, 意致崷爽, 雖厭厭如蜍、志者, 對之不覺生氣之發動也。 公以家世忠義, 二父立慬虜難, 常感憤悲咤。 旣遇有爲之主, 庶幾憑仗威靈以伸復雪之志, 而天不顧佑, 竟亦緯繣, 則益伊鬱不自克。 在南郡, 輒戎衣長劍, 夜起彷徨, 或月夜微醺, 每歌《靑石嶺曲》, 爲之慷慨泣下。 《靑石嶺曲》者, 孝廟赴瀋時作也。 其托意之深, 豈俗人所與知哉! 最嚴於陰陽、淑慝之辨, 如以快刀割斷。 以是善類無不親就, 而不善者皆嫉惡之。 石谷宋尙敏訟尤菴, 被淫刑死, 知舊懼不敢問。 公方持服而躬往, 撫屍棺斂而去, 人莫不義之。 有爲主和相求解於尤菴者, 公悲咽失聲, 力辨其不然。 尤菴爲之動容, 乃嘆曰: “於此可見此友氣性矣。” 尤菴嘗詠公家梅竹曰: “君家祖與孫, 節義將無同?” 蓋深許之也。 嗚呼! 公以卓犖奇偉之姿, 早得尤翁爲之依歸, 士論倚以爲重, 公亦奮勵, 思有以自見。 而世路多岐, 邪說交騖, 尊攘之義, 漸見䵝眛。 公遂留落不前, 卒之編名僞籍, 不得返道州之行, 使其平生抱負之重, 沈屈而莫展。 嗟呼惜哉!
配昌寧成氏, 贈參判楚逸女。 有婦道。 後公二十二年卒而祔焉。 無子, 只有三女: 適觀察使李海朝、洗馬宋一源、士人李容。 而都事李徵臣・崇臣、縣令宋文相・正相・後相、李維慶, 其子與繼子也。 公沒後, 取忠貞公孫浚爲公後。 浚生一男三女: 男厦柱。 女適魚有夔, 餘幼。 厦柱生一男, 亦幼。
宜顯年九歲, 挾莢從公, 公期許甚至, 不視以童孺。 凡係起居、接應以至師友、論說, 皆使與聞, 仍執手而喟曰: “吾死後, 將以累汝矣。” 俛仰之間, 倏已五十星紀, 而宜顯亦老白首矣。 今以不腆之辭, 記公幽隧, 把筆臨紙, 恍然若復近光儀, 竊不勝歐太常之追感也。 銘曰:
古龍維籍, 三節鼎峙。 聾公軼倫, 有明進士。 是生偉人, 允迪卓軌。 金昆玉友, 儷爲世紀。 敬業樂群, 于彼巴水。
値時罔極, 協持正義。 悲歌激越, 誓雪深恥。 低徊晩暮, 或擠而止。 嶺海追命, 中途遽委。 沈沈脩夜, 鬱鬱奇意。 東林之麓, 寔閟衣履。 尙有英爽, 映徹泉隧。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