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암선생문집 제21권 / 묘갈(墓碣)
무공랑 선원전 참봉 근재 이공 묘갈기(務功郞璿源殿參奉謹齋李公墓碣記) 계사년(1773년 영조 49)
공의 휘는 경홍(慶弘), 자는 백긍(伯兢), 호는 근재(謹齋)로 선계(先系)는 여흥(驪興)에서 나왔다. 문절공 휘 행(行)의 7세손이고, 금시당 좌부승지 휘 광진(光軫)의 아들이다. 모친은 숙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참봉 영미(英美)의 따님인데, 정덕(正德)경자년(1540, 중종 35)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는 가정의 가르침을 익혔고 자라서는 더욱 자신을 연마하고 가다듬어 함께 교유한 이들이 모두 고을의 명덕(名德)들이었다. 융경(隆慶) 경오년(1470, 선조 3)의 생원시에 입격하고, 만력(萬歷) 신묘년(1591, 선조 24) 봄에 효행으로 천거를 받아 선원전 참봉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칠치(漆齒)의 난이 있자 공이 북관(北關)으로부터 급히 돌아와 숙부인을 모시고 사는 곳 밀양부의 동쪽 석동(石洞)에서 왜구(倭寇)를 피하였다. 공은 산간에 지내면서 모친을 모심에 음식을 갖추어 봉양하기를 극진히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공이 세상을 마치게 되었으니, 바로 모년 2월 10일이었다.
난이 극심한 나머지 임시로 매장하고 묘소의 치장을 갖추지 못하다가, 경술년(1610, 광해군 2) 정월에 공의 여러 사위와 아들이 개장(改葬)의 의식을 갖추어 추화곡(推火谷) 선영의 임좌(壬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병화를 거친 뒤라 공의 언행을 살필 길이 없으나, 다행히 오한(聱漢) 손공 기양(孫公起陽)의 만사와 제문이 있으니 만사에서는, “우리 고을에 복이 없어 시귀(蓍龜)를 잃었으니, 후학이 누구에게 의심나는 것을 물으리오?”하였고, 또 제문에서는, “가정에서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전하였고, 행실은 효성과 우애로 드러났습니다.
다행히 공의 장구(杖屨)를 받들었으니 의리는 실로 스승과 제자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오휴(五休) 안공 신(安公㺬)이 그 족부 옥천성생(玉川先生) 여경(餘慶)의 행장을 지으면서 그 가운데, “공은 한강(寒岡) 정구(鄭逑),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존재(在齋) 곽준(郭䞭), 근재(謹齋) 이경홍(李慶弘), 대암(大菴) 박성(朴惺)과 도의로 교분을 맺고, 서로 왕래하면서 절차탁마하였다.”고 하였다.
불비하나마 이상의 기록으로 가승(家乘)에 빠진 부분을 보충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오휴(五休)는 일찍이 오한(聱漢)에게 배웠고, 오한은 또 공에게 배웠다. 두 분의 학문과 절행을 향리에서 추복(推服)하는 터인지라 두 분의 말씀이 이와 같으니, 공의 사적이 비록 민몰하여 전함이 없으나 또한 무엇을 상심할 것인가.
공의 전배(前配)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충순위 도(都)의 따님인데, 세 딸을 낳았고, 묘소는 공의 무덤 왼쪽에 부장하였다. 후배(后配)는 창원황씨(昌原黃氏)인데 자식이 없고, 묘소는 공의 무덤 동쪽 20보 거리에 있다. 장녀는 주부 신여(身膂)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현감 권응생(權應生)에게 출가하고 삼녀는 사인 최경지(崔敬止)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서 난 딸은 만호 박인립(朴仁立)에게 출가하였다. 아우 진사공의 둘째 아들 옹을 취하여 뒤를 이었는데 통덕랑이다. 그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창윤(昌胤)은 선교랑이고 딸은 사인 정야(鄭埜)에게 출가하였다. 창윤의 아들은 만종(萬種)이고, 만종의 아들은 지운(之運)이며, 지운의 네 아들은 수(洙)ㆍ섭(涉)ㆍ서ㆍ침(沈)이고, 수의 아들은 직(稙)이다. <끝>
[각주]
[주01] 정덕(正德) : 원문의 정덕은 가정(嘉靖)의 오식인 듯함. 경자년은 정덕 연간에는 없음.
[주02] 칠치(漆齒)의 난 : 임진왜란을 말함. 칠치는 이를 검게 물들이는 것을 말하는데, 옛날 왜인(倭人)의 풍습이 그렇다고 함.
[주03] 시귀(蓍龜) : 거북이와 시초. 일의 시비와 길흉을 점치는 것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의 뜻으로 쓰임.
ⓒ 한국고전번역원 | 김홍영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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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務功郞璿源殿參奉謹齋李公墓碣記 癸巳
公諱慶弘。字伯兢。號謹齋。係出驪興。文節公諱行之七世孫。今是堂左副承旨諱光軫之子。妣淑夫人密陽朴氏。參奉英美之女 。正德庚子生公。公幼習庭訓。長益淬礪。所與遊皆鄕邦名德。中隆慶庚午生貟試。萬曆辛卯春。以孝行薦。除璿源殿參奉。翌年有漆齒之亂。公自北關奔歸。奉淑夫人。避冦于所居密陽府東之石洞。公住山間奉親。盡菽水養。未幾而公卒。卽某年二月初十日也。亂棘權厝。不克備物。庚戌正月。公諸婿及繼胤敦匠改斂。遷窆于推火先塋壬坐原。兵火之餘。公之言行。無所考信。而幸有聱漢孫公起陽輓祭文。其言曰。弊鄕無祿失蓍龜。後學從何質所疑。又曰。家傳詩禮。行著孝友。幸奉杖屨。義實師生。又五休安公𤣲述其族父玉川先生餘慶狀。有曰公與鄭寒岡逑,金東岡宇顒,郭存齋䞭,李謹齋慶弘,朴大菴惺。爲道義交。更相往來。切磋琢磨。此足以補家乘之闕也。五休嘗質業于聱漢。聱漢又受學于公。二公之學問節行。爲鄕里所推服。而二公之言如是。則公之事蹟。雖沒沒無傳。亦何傷哉。公前配固城李氏。忠順衛都之女。生三女。墓祔公墓左。后配昌原黃氏無后。墓在公塋東二十步。女長適主簿辛膂。次適縣監權應生。次適士人崔敬止。側室女適萬戶朴仁立。取弟進士公次子㻾爲嗣。通德郞 。生一男一女。男昌胤宣敎郞。女適士人鄭埜。昌胤子萬種。萬種子之運。之運四子洙,涉, 氵+緖,沉。洙子稙云。<끝>
順菴先生文集卷之二十一 / 墓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