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곡재(楚谷齋)
초곡재의 중건전의 모습(1997년발간 귀미향세지에서 옮김)
삼휴공의 묘소가 있는 영천시 고경면 초곡리 산소 아랫마을에 초곡재가 있다. 삼휴공(휘 好信18世)을 위한 재소(齋所)로 처음에는 재실을 못 짓고 일반 민가를 구입하여 수백 년간 사용해오다가 2004년에 낡은 재실을 철거하고 새로 중건을 추진하여 군위형님이 추진위원장을 맡고, 태기가 재무를 맡아 자손들이 문배전(門配錢)을 모아 새로히 중건하였다.
2.모재고택(慕齋古宅)
인구마을에 서 있었던 옛 모습의 모재고택
(1997년발간 귀미향세지에서 옮김)
성곡리에 이건 되어 구연재(龜淵齋)로 바뀌어 서있는 모재고택
통덕랑공(휘 碩升20世)의 3남으로 태어나신 모재공(휘 重喬19世)께서 귀미에서 인구마을로 살림나시어 사시던 집을 아들4형제가 힘 모아 큰집을 잘 보종하여 다행히 수몰 전까지 고가(古家)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가묘(家廟)가 집 안팎으로 두 채 있었는데 집밖은 모재공과 아드님 자언공(휘 一鉍19世) 그리고 손자 4형제분의 신주를 모셨고, 집안에는 주손(冑孫)의 4대의 신주를 모셨다.
우리 집과의 관계는 양월아지매가 양월존고모의 따님이시기에 외가가 되어 더욱 가깝게 지냈다.
대를 이어 사시던 고택이 240여 년 간 잘 보존되어 왔으나 댐건설로 수몰되기 때문에 월연의 구연공 문중에 팔리어 지금은 성곡리에 이건 되어 구연재의 현판이 걸렸다.
3.추모당(追慕堂)
모재공(휘 重喬19世)과 아드님 자언공(휘 一鉍19世) 부자분을 추모하는 집으로 옛날 명절 때는 모재공을 비롯하여 윗대어른분의 차사(茶祀)를 자손들이 모여 지냈고, 또한 평소에는 서당이 되어 자손들의 모여 공부하는 곳이어서 나 어릴 때 서당이라 불렀다.
1970년대 수몰될 때 그 건물을 새미할배 학계에 팔리어 인구마을에서 중귀미로 이건하여 현재 확은정으로 불리우고 있다.
지금은 구건물을 판 대신 월연의 서당을 사서 중귀미로 이건하여 추모당 현판을 달고 서 있다.
4.성산재(聖山齋)
이 재실은 모재공과 자언공 부자분을 위한 재실이다. 이 건물은 원래 오길댁(휘 창식29世) 주택이었으나 문중에서 매입하여 현 위치로 옮겨 성산재의 현판을 달고 묘사행사시에 자손들이 모여 점심을 먹고 담소를 하며 족의를 돈독히 하는 집이 되고 있다.
5.농와고택(農窩古宅)
농와고택이 하천에 옮기전의 인구마을에서의 사랑채 모습
(1997년발간 귀미향세지에서 옮김)
농와공(農窩公) 휘 夏澍23世께서 살림나시어 화전(火田)과 황무지에 논밭을 일구어서 알뜰히 농사지어 몇 백석(石) 지기 부농이 되셨다.
주택은 몸채 6간과 사랑채 방3간과 대청 2간이고, 대문간은 창고와 같이 지어졌다. 그르니 ‘ㄷ’ 자형의 맞배지붕 기와집이었다.
그 집에서 소대할배(휘 性休24世) 5형제, 가문이 할배(휘 裕明25世), 오금이 할배, (휘 致璇26世)형제, 한계할배(휘 鎭龜27世), 산드뱅이할배(휘 鎭禹27世), 현고할배(휘 鎭都27世) 삼형제, 강정할배(휘 淵徹28世), 거여아재(휘 冑植29世), 께서 대를 이어 210여년 간 사르셨다. 강정할배 때에 가세가 기우러져 그 집이 월연의 사의당 문중에 팔리었다가 1970년대 댐건설로 하천묘역에 이건 되어 사의당(四宜堂)과 수의헌(守宜軒)의 현판을 달고 서있다. 유형문화재 74호로 지정되었다.
6.인구초당(仁邱草堂)
농와공께서 아들 성휴(性休) 진휴(進休) 채휴(採休) 정휴(禎休) 4형제의 살림집을 똑같이 5간 맞배지붕 기와집을 지어 살림을 내주셨다. 그 집들이 수몰 전에 거동댁, 백산댁, 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기식(淇植)씨가 거동댁 집을 사서 수몰을 피해 인구마을 위쪽에 이건하여 4간으로 한간 줄려 인구초당 (仁邱草堂) 현판을 달고 서있다. 후손으로 보람된 일을 하였다.
7.확은정(確隱亭)
한말과 일제 및 해방 후에 걸쳐 많은 제자를 기르셨고, 산남의진에 참여하신 유명한 한학자 새미할배(휘 鎭韶28世)의 제자들이 학계(學稧)를 만들어 처음에 성곡리에 기와집을 사서 확은정을 만들었으나 현건물은 1970년대 수몰이 될 때 인구의 추모당을 사서 중귀미로 옮겨 확은정의 편액을 달았다.
첫댓글 무심히 지나치던 건물들의 내력을 알고나니 새롭고 친근감이 듭니다.
잘 관리해서 길이 보존되어야 할것 같습니다.
구 추모당이 확은정으로 이건되고 월연 중간에 있든 재실을 구입하여 추모당으로 이건 이유는 현 추모당이 재목이 좋아
팔고 사고해서 중귀미에서 2007년도 번와공사해서 다행이지만 성산재는 재목이 약해서 오래 본존키 힘드니 걱정입니다,
목재와 건물구조가 정자로 알맞아서 아주 잘 바구었다는 생각이 든다.
저 어릴때 보고 자라 어렴푸시 생각이 나는듯 합니다
특히 고택들의 이름은 잘 몰라도 눈에 선하게 기억들이 되살아 나네요
수몰의 상처가 이렇게 깊을줄 몰랐습니다
철없이 뛰어놀던 추억탑이 다 사라져 버린 지금
너무 안타까운 마음 절실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 합니다
편한한 밤 보내시길 빕니다^^
우리 문중 고택의 내력을 잘 정리해서 올리시니 한결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어른분들 옛날 사진까지 곁들이시니 감회가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