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Lamborghini (이탈리아)
람보르기니의 그 역사적인 탄생...
2차대전이 일어나자 공군에 들어간 '페루치오 람보르기니(Ferucio Lamborghini)'는 에게해의 로도스 섬에서 정비공으로 복무했고 전쟁이 끝나자 볼로냐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군용차량을 개조해 트랙터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솜씨 좋은 그의 손으로 만들어진 트랙터는 그를 대단한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1950년대에 트랙터로 크게 성공한 그는 그 무렵 성공한 사업가가 대부분 그렇듯이 스포츠카인 페라리를 샀다. 젊은 시절 피아트를 개조해 자동차 경주에 참가할 정도로 스피드광인 그는 가혹할 정도로 페라리를 혹사했고 때문에 페라리는 자주 말썽을 피웠다. 짜증이 난 람보르기니는 페라리를 만드는 '엔초 페라리'에게 항의를 했지만 트랙터나 만드는 사람이 스포츠카에 대해 뭘 아느냐는 식으로 무시하자 특유의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63년. 그는 페라리를 능가하는 스포츠카를 만들기 위해 자기 이름을 딴 자동차 회사인 '람보르기니(Lamborghini)'를 세웠고 불같은 추진력으로 만들어진 첫차는 최고출력 360마력, 최고 시속 265km의 350GTV. 사람들은 단시간 내에 만들어진 엄청난 차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고 다음해에 판매를 시작했다.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 Lamborghini Diablo) 의 탄생...
수퍼카 매니아들에게 있어 이탈리아는 꿈의 나라이다. 붉은 갈기를 휘날리며 수퍼카 세계의 광야를 가로질러온 페라리가 있고 야생마를 따라잡기 위해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키워낸 성난 황소 람보르기니가 있기 때문이다. 90년 카운타크의 뒤를 이어 등장한 디아블로는 람보르기니가 재정악화로 크라이슬러로 들어가 크라이슬러 산하에서 개발이 진행되었다. '악마'라는 뜻의 디아블로는 카운타크의 뒤를 잇는 한편 성능에서 포르쉐 959와 페라리 F40을 넘어서야 한다는 큰 부담을 안고 개발이 시작되었다. 스타일링 디자인은 역시 베르토네 수석 디자이너 시절 카운타크를 디자인 했던 마르첼로 간디니가 맡았다. 카운타크의 힘찬 직선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크라이슬러 측이 중간에 끼어 들어 간디니가 고집했던 특유의 억센 분위기는 많이 가라 앉아 버리고 대신 곡선을 살린 디자인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성능면에서는 분명한 진화를 보여 '악마'에 맞는 힘을 뿜어낸다. 엔진은 카운타크의 V12 5.7L DOHC에 새로운 인젝션 시스템(LIE)을 얹어 485마력의 최고 출력을 낸다. 뒷바퀴 굴림을 기본으로 슬립이 일어날 때만 앞바퀴에 최대 20%의 토크를 전달하는 4WD시스템을 얹은 디아블로 VT도 선보였다. 93년 인도네시아 메가테크로 넘어가면서 창업 30주년 기념모델 30SE를 선보였다. 출력을 525마력으로 높이고 무게를 줄였다. 이듬해 무게를 더 줄이고 천장에 흡기구를 달아 출력을 600마력까지 높인 레이싱 버전을 '이오타'라는 이름으로 내놓기도 했다. 디아블로 로드스터는 93년 데뷔했다. 거대한 V12엔진 때문에 뒷 부분이 수평을 이룬다. 프레임은 특수강과 카본 파이버를 사용했고, 실내도 외형처럼 곡선을 많이 써서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풀 타임 네 바퀴 굴림에 편의장비를 줄여 무게를 낮추었고 최고시속 335Km/h , 0-100Km/h가속 3.95초에 끝낸다. 카본 파이버제 타르가 톱은 떼어서 엔진 위에 얹는다. 디아블로 SV는 편의장비를 줄여 차 무게를 1530Kg으로 줄이고 이오타 같은 흡기구를 달아 500마력이상의 고출력을 낸다. 최종 감속비를 높여 100Km/h가속을 4초내에 끝내고 330Km/h(SV) , 350Km/h(SV-R)의 최고속력을 낸다. 레이싱 규정에 맞춘 SV-R은 서스펜션과 브레이크를 강화하고 레이싱 시트를 달았다.
2. Ferrari (이탈리아)
'경마(race)가 종자를 개량시킨다.'는 서양 속담은 자동차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페라리'는 탄생 이전부터 자동차 경주를 통하여 다듬어지고 개선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그러한 전통은 고스란히 계승되고 있다. 1920년대 초반에는 알파 워크스 팀의 드라이버(미케닉도 겸함)로, 1929년 이후에는 자신이 창단한 스쿠데리아 페라리 팀의 드라이버로 활약하던 엔초 페라리는 1933년 아들 알프레도(디노로 더 잘 알려짐)가 태어나자 아내의 뜻에 따라 드라이버 생활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동차 경주에 대한 그의 못말리는 열정은 비록 스티어링휠은 놓았어도 식을 줄을 몰랐다. 그가 창단한 스쿠데리아 페라리 팀은 1930년부터 40년까지 343회 출전에 우승 124회, 2위 82회, 3위 68회의 기록을 남겼다. 스쿠데리아 팀은 알파의 차로 경기를 했으며 경주차에 그려진 '노란 방패 속에 앞발을 쳐든 흑마'가 있는 팀의 문장으로 알파 워크스의 차들과 구분 되었다.
1939년, 페라리는 그의 이름을 담은 차를 직접 만들어 경주를 계속한다는 계획으로 모데나에 Auto Avio Costruzioni를 설립했고 이것이 현재 페라리사의 시작이다. 양산차를 만들어 판다는 계획도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경주 자금 조달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 뿐,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결별 후 4년 동안 페라리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는 알파와의 계약으로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1940년 처음 만든 차에는 페라리라는 이름을 쓸 수 없어 815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페라리 이름의 사용을 금하는 계약은 2차 대전으로 자연히 해소되었다.
마라넬로 공장(1943년 이전)은 전쟁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인 1946년 엔초는 공장을 재건하고 자동차 생산과 경주 참여를 재개했다. 노란 방패 속에 있던 흑마는 역시 노란 바탕인 직사각형 속으로 자리를 옮겨 페라리의 배지가 되었다. 1947년 V12를 얹은 경주차인 Tipo 125S가 제작되었고 1948년에는 그들 최초의 양산차인 Tipo 160이 소개되었다. 125, 160 등의 숫자는 기통당 용적를 나타내는 것으로 한동안 페라리는 차이름에 이 방식을 사용하였다.
1948년 166 인터에서 시작되어 오늘날의 F550 마라넬로와 F550 바르께따 피닌파리나에 이르기까지 페라리의 GT카들은 세계 자동차광들의 스피드와 특별함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켜 주었다. 경주를 통해 축적된 경헙과 기술에 더해진 이탈리아 특유의 열정은 페라리가 세계 최고 수준의 차로 존재할 수 있는 바탕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들어 회사의 경영이 난국에 처하자 페라리에 맨 처음 손을 뻗친 회사는 미국의 포드였다. 하지만 포드와의 협상은 진전이 없었고 여기에 이탈리아 정부의 경제 정책이 작용하여 결국 피아트에 지분 50%를 넘기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1969년의 일이다. 여기에는 독선적이고 괴팍한 엔초의 성격도 한 몫 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의 페라리는 피아트 산하의 마제라티에 모든 지분이 넘어가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피아트사의 방침은 페라리의 전통은 존중하는 것이어서 페라리 차들은 아직도 자기 색깔을 잃지 않고 있다. 현재 엔초의 유일한 피붙이인 피에로 라르디-페라리가 - 큰아들 디노는 1956년 선천성 근육병으로 사망했다. - 회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3. McLaren F1 (영국)
영국이 자랑하는차 맥라렌F1은 Formula One GrandPrix의 Champ로써 잘알려져있다. 90년대에 들어와 맥라렌은 아일톤 세나라는 당대 최고의 드라이버와 Honda의 엔진으로 무장을 하여 90 년 91년 페라리를 제치고 거의 전승을 거두었다. 맥라렌 F1 은 Gull Wing Door 를 사용한다. 다른 슈퍼카에 비해 운전석이 가운데 위치하고 좌우에 좌석이 있어 3개의 좌석을 갖고 있는 것이 맥라렌 F1의 특징이다. 이유는 이 차를 운전 시 대부분 혼자서 탄다는 것에 착안해 무게중심을 고려하여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최고속도 375km, 생산 당시 맥라렌 F1의 가격은 차체 기본가격만 14억 정도였다고 한다.
4. Bugatti (프랑스)
레이스카와 로드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일반차와는 견줄 수 없는 성능과 스타 일로 압도하는 자동차의 일종을 수퍼카라고 칭한다면, 그 중에서도 문화 유산품 과도 같은 예술품으로 대접을 받는 수퍼카가 있다. 바로 부가티 EB110이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듯이 당시의 예술가들에게 프랑스란 곳은 좋은 예술적 환 경을 가질 수 있는 혜택 받은 나라로 알려졌기에, 부가티 가족은 자라나는 아이 들에게 이런 환경을 향유시키고자 프랑스로 이사를 갔다. 이것이 부가티가 프랑스 차로 다시 말하자면 그랑프리 부가티가 프랑스 적인 프렌치 블루의 칼라로 색 칠해진 계기가 됐는지도 모른다. 부가티자동차의 설립자인 에또레 부가티는 1881년 9월 15일 이태리 밀란에서 태 어난 사람이다. 부가티가는 예술가를 많이 배출한 명문가로 에또레의 부친 카르 로 부가티 씨도 회화는 물론 가구나 건축에도 조예가 깊은 예술가였다. 아마도 설립자인 부가티가 명문예술가 출신이었기에 그가 만든 차가 문화예술품으로서의 대접을 받게된 이유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에또레 부가티가 이태리 사람이었다는 것 외에도 부가티와 이태리를 잇는 요소 가 몇 가지 있다. 흙으로 빚은 후 구워서 만들었다는 부가티 고유의 엠블럼으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붉은 타원형 로고의 오리지널은 이태리의 디아토(Diatto)차 에서 응용된 모델이다.
프랑스로 건너가 태어난 차로서의 최후 모델은 콜롬보가 설계한 그랑프리 T251 이지만 마지막 시판모델로는 에또레가 서거한 뒤 생산된 T101이다. 부가티의 이 름을 가진 모든 차는 그것이 어린이용 전기자동차라 해도 반드시 스타일 번호를 갖고 있다. 왕실 귀족의 어린이용으로 만들어진 베이비 부가티인 T52도 바로 이 런류의 일종이다. 단 6대만이 완성차로 탄생된 르와이알은 T41로 분류되었다. 스타일 넘버는 13이라는 숫자에서 시작되어 후반부에는 59, 64, 68, 73, 101, 251 처럼 일정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흐름으로 볼 때 새 로 제작된 부가티가 110으로 시작된 것은 최초의 시판 모델인 101로부터의 연속 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EB110과 EB112는 물론 에또레 부가티가 태어난 1881년을 기점으로 하여 각각 110년과 112년 뒤에 발표된 것이다.
1991년 9월14일 프랑스 파리의 디팡스 파르브와광장에서 정통 수퍼카의 하나인 부가티 EB110은 V12 DOHC 3450cc에서 58kg·m의 토크와 550마력의 힘을 내는 막강한 실력자로 발표되었다. 마치 육지를 나는 새와도 같은 날렵한 모습의 부가티 EB110은 앞 39%, 뒤 61% 로 무게 배분이 되었고, 전통을 중시한 실내의 계기판 등은 나무패널로 꾸며졌으 며, 스티어링 휠과 시트는 소프트한 터치감각의 가죽으로 감싸듯 부드럽게 트림 되었다. 부가티가 만들어지는 제작방식은 한편으론 예술활동 그것과도 같다. 근래의 자 동차들이 대량생산으로 코스트를 낮추고 용의주도한 마케팅연구에 힘입어 판매되 는 형태라면 부가티는 항상 그 반대의 극단적인 이론에 서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자동차란 본래 적정한 생산원가의 한계 속에서 대량생산의 공업제 품으로 만들어져 많이 팔릴 것을 바라고 또 한편으론 대중적으로 불평을 듣지 않 는 차가 베스트셀러카가 되는 지름길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그렇지만 부가티는 그 반대로 부가티를 알아보고, 알 수 있는 사람에게만 평가받아도 좋은 그런 차 인지도 모른다. 음식으로 비유한다고 치더라도 인스탄트적인 대중음식이 아닌 궁 중요리 같다고나 할까.
부가티를 또 다른 방법으로 비교해 볼 수 있다. 가령 예를 들어 1천 500만대 이 상 생산되었다는 T형 포드는 이미 대부분이 고철이 되고도 남았으며, 극히 일부 만이 오늘날의 역사적 증인으로서의 가치성 만을 지닌 채 남아있을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총 7천 500대 정도 밖에는 생산되지 않은 부가티의 대부분은 지 금도 건재하게 남아있고, 마치 예술품과도 같은 문화유산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 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문명의 이기로서만이 아닌 수퍼카로서 부가티의 또 다른 측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노력파인 부가티자동차의 설립자 에또레 부가티는 생전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은 채, 1947년 8월 21일 실의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편 또 다른 수퍼카 창시 자인 엔초 페라리는 같은 해인 47년에 페라리의 첫 모델을 세상에 내놓았다. 수퍼카의 대부인 부가티와 페라리는 공교롭게도 장과 디노라는 아들을 어려서 각각 잃었다. 사랑하는 아들이자 후계자이어야 할 아들을 잃은 아픔을 두 사람 모두 공통적으로 갖게 되었다.
한편 생전에 완벽하지 못한 브레이크에 대한 지적이 있었을 때 부가티는 "나는 차를 달리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 세우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라고 열을 올렸다는 일화가 있었던 것을 볼 때, 이와 같은 경우라면 페라리 역시도 충분히 이런 말을 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페라리가 피아트 산하로 들어갔고 이태리 수퍼카의 거장 엔초 페라리도 세상을 떠났지만 순수한 모양의 에또레 부가티가 이태리에서 재현 됐던 것은 흥미를 끌어당기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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