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eea - 엘리트 글쓰기 논술 교실 원문보기 글쓴이: 김동석
박문옥 교수(한세대학교 교수)
Ⅰ. 서 론
우리는 어떤 다른 사람이나 혹은 어떤 예술 작품을 알게 되는 모든 과정들을, 언 제나 이 말이 갖고 있는 완전하고 중요한 의미에 있어서「만남」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말하려는 「만남」은 오히려 특정적이고 운명적인 경험을 의미 한다. 그러한 만남의 경험은 인간의 삶 속에 침입해 들어와서 지금까지의 그의 걸 음을 갑작스럽게, 그리고 대부분 고통스럽게 중단시키며, 결국은 어떠한 새로운 방 향으로 걸어가도록 인도한다. 우리가 문제시하는 만남은 교육의 영역에 있어서 교사와의 만남처럼, 인간의 삶 안에 운명적으로 들어오게 되는 어떤 다른 존재와의 만남이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위대한 예술 작품일 수도 있고, 철학 자의 저서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도 그것을 접한 인간의 삶에 어떤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경우에든지 「만남」은 "단속 적인 형식들"에 속한다. 왜냐하면 만남은 단속적인 형식들이 그렇지 않은 지속적인 삶의 과정에 갑작스럽 게 침입해 들어가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과 같은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만남」은 곧 인간의 삶을 간섭해 들어오는 실존적인 사건이다. 인간은 그 자신의 가장 내적인 핵심 안에 있어서 "만남들" 안에서 시험대에 세워 지게 된다. 이러한 만남들 안에서 그 자신에게 참된 것과 참되지 못한 것이 결정 된다. 즉 인간의 실존은 만남의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만남의 과정은 인간의 자아 형성에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삶 전체를 결정짓게 해 주는 '운명적인 만남'은 단속적 (discontinuity)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는 신앙체험을 생각할 수 있다. 신앙체험에서 의 「만남」은 인간에 마주 서서 존재하는 '생소한 현실'로 표현될 수 있다. 이 '생 소한 현실'은 '어떤 낯선 것'으로서 준엄한 엄격성을 지니고 인간에게 대면 (confrontation)해 오기 때문에 인간은 이 만남을 매우 고통스럽게 직면하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준엄하고 엄격한 현실'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인간의 실존은 만남의 과정 속에서 변형되어 가는 것이 다. 이와 같은 「만남」을 기독교 교육의 현장으로 이끌어 들이는 논리적 구조들 을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표가 된다. 볼르노우(Otto Friedrich Bollnow)는 교육에 관한 전통적 견해를 계몽주의로부터 영향받는 기계론적 교육관(Mechanische Auffassung)과 낭만주의에서 비롯된 유기 론적 교육관(Organische Auffassung)으로 구분하고 있다. 기계론적 교육관은 교육자가 의도했던 목적과 목표에 따라 그에게 맡겨진 피교육 자를 어떤 일정한 모습으로 변모시키는 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의 교육 은 「만드는 작용」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에 비해 유기론적 교육관은 인간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 자신 안에 깃들어 있는 목표를 지향하며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를 기대한다. 이 때의 교육이 갖는 의미는 「기르는 작용」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이 기계론적 교육관은 교육을 적극적 형성 작용으로 보며, 유기론적 교육 관은 교육을 자연적 성장 과정에 있어서의 소극적 보호 작용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교육적인 입장은 그 방법론에 있어서 인간이 꾸준히 지속적이며 계획적으로 성장한다는 '연속적 형성 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에 관한 전통적 시각은 교육의 단속적 성격이 무시되고 있다는 지적 과 함께 교사와 학생 사이의 '상호 관계 형성'이 경시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 다. 바로 이 문제는 세속적 교육학 이론이 기독교 교육학에서 채택될 수 없는 요 인이 되고 있다. 실존적 교육관은 이러한 점을 극복하고 있음에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Ⅱ. 키엘케골의 교육론 키엘케골(S 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은 자신의 시대적 사명을 소크라 테스에 비유하여, 당시 유럽의 사상 세계를 지배한 헤겔주의와 대중을 진리로 이해 하려는 집단주의 속에서 인간 실존의 부재를 발견하고 진실된 인간 존재란 단독자 (單獨者, the individual)가 되는 것임을 모든 개인이 자각하도록 각성시키는 데 두 었다. 인간의 본질을 이성으로 간주한 고전적 인간관은 19세기에 와서 더욱 고조되어 본질로서의 인간 이성과 하나님의 절대성을 동일시하게 되었으며 인간은 이성 스스 로의 논리 체계에 따라서 또는 그 질서에 따라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키엘케 골은 진실된 인간 모습은 구체적인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을 수행하는 주체적 개별자임을 강조한다. 키엘케골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전통적인 고리체계와 국가교회가 제정한 율법 적 윤리에 속박되어 습관적인 교회 생활에 안주하고 있음을 보고 한 사람이라도 주 체적으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진실한 기독자가 되도록 하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키엘케골에게 있어서 진정한 교육은 학습자 스스로가 자각함으로써 자기교육 (self-education)을 의미한다. 1. 실존적 인간관 고독한 단독자로서 예외자(the exception)의 삶을 살아 간 키엘케골은 이성을 본 질로 하는 보편적이고 사변적인 인간관을 거부하고 구체적 현실에 존재하는 실존하 는 개인의 모습을 규명코자 하였다. 키엘케골에게 있어서 "실존"이라는 용어는 "실 존하는 개인"(existential individual)의 줄임말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 그는 세계 정신에 의하여 짜여진 논리체계 속에서 객체로서 해소된 개인을 발견하고 하 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도록 제안하고 있다. 인간의 존재 방식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실존적 개인으로서 제각기 제나름의 색 깔과 의미와 목적을 지닌 존재이며 자기이해(self-knowledge)와 자기실현 (selffullfilment)의 주체자로서 개별적 존재이다. 절대정신, 또는 세계정신의 계획대 로 그렇게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고 변증법에 의하여 발전해야 할 결정적 존재가 아니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스스로 있어야 할 현실적이며 우연적인 존재일 것이다. 인간은 단순히 인과적 자연물이 아니고 자유로 행동하는 정신이요 자기를 자유로 이 선택할 수 있는 인격의 주체이다. 또한 자유로운 정신은 외부의 자극에 보다는 인간 심연의 내면성으로서 자신을 창조해 가는 주체를 뜻한다. 정신은 고정된 본 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초월에로 실존해 감으로써 숙명주의나 결정 론의 정신적 절망을 넘어서려는 자기 초월에의 열려진 본성인것이다. 그리하여 키엘케골은 실존하는 개인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존재이고 자기 자신 과 관계함으로써 타자와 관계한다고 한 것이다. 인간의 정신을 주관과 객관, 사유와 존재, 이성과 감성, 논리와 자연을 통일시키 는 절대정신과 동일시하고 이 절대정신의 자기실현의 목적이 세계사라고 이해하였 던 헤겔의 철학에 도전하는 키엘케골의 실존적 인간은 유한과 무한, 시간성과 영원 성, 상대성과 절대성 사이에 있는 긴장의 실체이며 양극단 사이의 투쟁이며 또한 종합이다. 인간의 실존은 정 . 반 . 합의 질서체계 속에 유폐되어 있는 것이 아니 라, 지금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구체적이며 우연적인 특수한 개인의 유한한 정신으 로 이 유한한 정신의 자기 실현의 과정을 주체적 반성으로 밝히려는 의지를 갖는 다. 키엘케골이 실존을 강조한 이유는, 그가 살던 시대의 근대적 개념으로 인간이란 이성이 부여된 하나의 류(type) 또는 종(species)에 속하는 것으로 류나 종은 개인 보다 높은 존재가 되고 개인이란 단지 표본에 불과한 듯한 생각에 저항코자 했기 때문이다. 인류 혹은 사회라는 추상적 관념에 사로잡히면 개인의 존재를 무시하게 되어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사회로 타락하게 될 것을 내다본 키엘케골은 스스로 단독자가 되어 그 현상 앞에 맞서고자 하였다. 또한 나아가 모든 사람들도 각자가 인류 혹은 종족에 종속, 귀속될 수 없는 유일의 개별자, 단독자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랬다. 키엘케골은 "단독자"라는 개념을 분석하고 정의하여 어떤 체계 속에서 조직화 한 다면 이미 단독자의 본성이 사라진다고 보았기 때문에 "단독자"의 성격을 규정지으 려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단독자가 된다는 것은 생애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기 독교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키엘케골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 이며, 한 명의 단독자라도 그리스도를 선택하면 기독교는 유지 지속되는 것이다. 실존적 단독자가 보편 속에 흡수되지 아니하고 자기 깨달음(self-awarness)을 통 하여 자기 자신으로 되어가는 자라고 한다면 진정 자기를 인식한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키엘케골에 의하면 인간은 초월한 완전자, 절대자를 깨닫지 못하 고는 자기 이해란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키엘케골에게 있어서 단독자는 먼저 절대자와의 관계에서 보편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지 윤리적 인간이 됨으로써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단독자에로의 용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아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피조물인 인간은 완성된 자아가 아니고 완성의 잠재성을 지닌 자율적 자 아(autonomous self)이다. 인간을 결정된 상태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자율적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요 사랑의 표현이다. 인간에게 부여된 자율성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확신을 가질 때 삶에의 용기를 갖는다. 결국 하나 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단독자가 되는 본질적 요소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사랑 받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결과로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 게 되고 나아가서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이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이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게 됨이 「변형」의 모습이 된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만 서로 다른 존재가 동등하게 되고 그 동등화의 과정에 서 진정한 공동체가 탄생한다. 키엘케골의 단독자는 공동체로의 여정에서 나타난 만남과 변형의 과정적 존재라고 이해될 수도 있다. 2. 변형의 실존적 단계 키엘케골의 진정한 실존은 주체적 진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단독자 를 뜻한다. 여기에서 키엘케골은 단독자가 되는 심미적 . 윤리적 . 종교적인 실존 의 세범주를 제시한다. 키엘케골의 이러한 논리는 당시의 변증법적인 전개를 뒤엎 는 「도약」이 된다. 실제로 키엘케골에게 있어서 「도약」의 의미는 심미적 . 윤리적 . 종교적 단계를 점차 밟아 가든지 또는 심미적 . 윤리적 . 종교적 단계 어디에 머물든지 결단에 의 한 선택과 유기이다. 또한 이 단계라는 개념은 계층적 이해될 성질이 아니다. 그 것은 인간은 누구나 심미적 단계로부터 시작하여 윤리적, 종교적 단계로 발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인생은 가장 낮은 단계에서 평생을 머무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세 단계가 서로 혼합되어 화해의 상태를 이룰 수는 없다. 키엘케골의 삼단계 발전 개념은 인간이 심미적 . 윤리적 범주에 살든지 아니면 윤리적 . 종교적 범주에 오르든지 하는 양자 택일(either/or)의 문제로 정착된다. 심미적 . 윤리적 단계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첫부분인 「유혹자의 일기」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심미적 단계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찰나의 직접 성(immediate)속에서만 살아가는 감각적 단계이다. 감정과 심미성이 완전히 지배하 는 이 단계의 사람은 직접적인 경험의 세계에서만 살뿐이며 모든 일에 참여하기보 다는 추상적 사고로만 만족한다. 이 단계는 즉시성(찰나성)이 그 본질을 형성한다. 심미적 인간의 행복은 최대의 쾌락을 찾는 것으로 기술과 방법을 다양하게 구사 하며 쾌락을 추구하는 삶에 열심이다. 이것을 키엘케골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수확을 높이기 위하여 윤작을 하는 것처럼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윤작(rotation)을 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심미적 실존자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의 자유를 유희로 소비한다. 도덕적 삶에 대한 지향성을 상실한 심미적 존재는 자신의 삶을 위협하는 사색을 포기한다. 무 한한 환상을 지니고 쾌락을 추구하며 신뢰성이나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심미적 실 존자는 인생을 배회하고 방황하는 것으로 살아간다. 결국 심미적 실존자는 향락의 추구 다음에 밀려오는 권태와 우울에 휩싸이며 마 침내는 실존 자신에 회의를 느껴 좌절하게 된다. 심미적 단계에서는 도덕적, 윤리 적 갈등도 없다. 그러나 여기에 역설이 준비되어 있다. 좌절과 절망이 심미적 생 활을 파멸로 이끌어 가고 있으나 동시에 그것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 다. 권태와 절망을 깊게 느껴본 사람만이 비로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질문하게 되 고 그 질문의 자리에서 자신과 타인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이 때 그 관계 속에서 자아(a self)를 발견하게 된다. 자아의 발견은 곧 자아에 부여된 책임을 깨닫는 것이며 다음 단계인 윤리적 실존으로 출발하는 계기가 된다. 키엘케골에게 있어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는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 의 대립 속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고 포기할 것이냐의 질문인 것이다. 윤리적 실존 이 되는데는 심미적 실존에 대한 깊은 좌절을 체험하고 열정적 결단을 해야하는 도 약이 필연적인 것이 된다. 심미적 쾌락을 추구하여 모든 방법을 구사하였던 실존 은 결국 쾌락의 노예로 전락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윤리적 실존으로 옮아가는 것이 다. 이러한 키엘케골의 도약은 훗날 프린스톤의 로더(James E, Loder)에게서 발견 된다. 심미적 단계를 지난 윤리적 단계는 감정적 직접성을 보류하고 사회와 관계되는 보편적 질서 속에서 합리적으로 자기 자신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수준이다. 이 때 인간은 인류의 한 부분임을 깨닫고 스스로 보편적 자아가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자신의 안일이나 쾌락보다는 보편적 윤리를 더 중요시 한다. 다수의 의견을 존중 하고 도덕적 가치의 우선 순위에 따라 문제 해결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 때의 보 편성을 개인과 관계없는 객관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선택하기 위한 앎'에로 의 진행인 것이다. 윤리적 단계의 과업은 결국 선택을 통하여 사회 속에서 '자기 실현'이다. 윤리적 실존은 양심을 가지고 보편적 도덕의 의무를 수행하며 사회에 대한 책임적 존재가 됨으로써 쾌락으로 일관하는 심미적 단계보다는 높은 실존이다. 윤리적 범주에 있는 인간은 자신의 삶이 과거로부터 영향받았으며 현재위에 미래 가 설정되는 역사적 자아임도 감지한다. 참으로 인간은 역사에 의하여 조건지어지 는 존재임이 분명해진다. 이제 자아(a self)는 자신의 행위에 더하여 책임을 지며, 더 이상 찰나적인 현실에 매일 수가 없다. 이러한 윤리적 단계는 유신론적인 휴머니즘이라 할 수도 있다. 인간이 자유롭 게 도덕을 실천하고 신의 율법을 지키면 영원한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는 뜻이다. 키엘케골은 영원한 나라를 얻기 위하여 "절대적 목적에는 절대적인 관계를, 상대 적 목적에는 상대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적인 삶의 현 장에서 인간 실존은 절대적인 목적에 자신을 절대적으로 결부시키고, 상대적인 목 적에 상대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식하게 된다. 오히려 인간은 상대적인 것에 절대적으로 헌신하고 절대적인 것에는 상대적으로 헌신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절대적인 존재인 하나님에게 우선권이 부여되어야 함에도 불구하 고 인간은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절대성에 헌신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결국 절대적인 것에 절대적인 관계를 맺으려면 자신의 이기적 존재가 부정되어야 한다. 이때 인간은 돌연 자신의 한계와 도덕적 이상, 윤리적 사명에 이를 수 없는 죄인으로서의 자신을 모습을 찾아낸다. 윤리적 실존의 단계에 있는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알지 못하고 절대적 목적에 도달하려 몸부림치는 모습을 키엘케골은 유머(humor)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 다. 키엘케골에 있어서 유머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절대자 앞에서 자신의 무력 함을 느끼는 비극적 감각이다. 심미적 단계에서 절망을 느끼고 윤리적 단계로 도 약했던 인간은 또 한 번의 도약을 통해 종교적 실존에 이르게 된다. 절대적 존재 의 전면적인 명령 앞에서 절망한 인간은 종교적 실존으로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 앞에 개방되어 있다. 종교적 단계에 도달한 실존은 신앙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키엘케골은 종교 를 종교성 A와 종교성 B로 구분한다. 종교성 A는 보편적 종교로서 모든 사람이 내면적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절대적 존재에게로 향하는 태도이며 이는 이교도들이 갖는 종교성이다. 이에 대해 종교성 B는 참된 기독교 신앙을 의미하며 역설적인 성육신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아의 회복의 종교성이다. 키엘케골에게 있어서 신앙의 핵심은 '역설의 수용'이다. 이 때의 인간 실존은 일 상적이고 보편적이며, 타당한 합리성에 자신을 접목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인 절대자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존재다. 절대적인 것에 절대적으로 관계 하고 모든 보편적 윤리에 대하여 목적론적 정지(a telelogical suspension of the ethical)를 하는 단계가 된 것이다. 종교적 실존은 대중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보 편을 초월하여 절대자 앞에서 개체가 된다. '보편적 윤리에 대하여 목적론적 정지'라는 키엘케골의 생각은 이삭을 번제로 드 리는 아브라함의 행동에서 떠올린 것이다(참고: 창세기 22장). 이 때의 아브라함의 행동을 신앙의 기사(the knight of faith)로 표현한다. 이는 이성으로는 이해 불가 능한 한계점에서 인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초월적 하나님의 은총을 조건 없이 받아 들이는 믿음의 수준이다. 이 단계에서 윤리적인 차원이 갖는 타당성이나 정당성이 무가치한 것이 된다. 윤리적이고 보편적인 율법을 포기하고 파라독스를 불합리한 까닭에 믿으며 선택한 다. 이성과 비이성, 보편성과 특수성, 합리성과 모순성이 갈등 속에서 공포와 전율 을 느끼는 실존 앞에 신앙의 본질이 놓여 있다. 이러한 갈등의 상황 속에서 종교 적 실존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의 행위를 전개해 나간다. 이때의 선택은 완전 한 자의의 것이다. 종교적 실존에 있어서 믿음으로 도약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자 기 자신이 되려는 실존은 항상 선택을 요구받는다. 하나의 선택은 하나의 상황에 서만 타당한 것이며 상황의 변화는 선택의 행위를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이 선택 은 객관적인 불확실성에 대한 열정적 선택이기도 하다. 따라서 종교적 실존의 단 계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계속된 선택을 해야 한다. 종교적 실존은 보편성으로서의 윤리적 율법에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단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홀로 자기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때 믿음이라는 도약을 통하여 죄인으로서 의 옛 자아가 아닌 새로운 자아가 형성된다. 키엘케골에게 있어서 새로운 자아가 되어가는 과정은 반복이며 이 반복은 그날의 양식이요 축복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매일 매일 회개와 죄사함을 토하여 정화되며 새로운 인간으로 소생한다. 절대적인 역설 자체인 하나님을 만나 그에서 성실히 관계함으로써 아무 매개도 필요없는 직접적인 하나님-인간의 관계가 완성된다. 3. 주체적 자아실현을 위한 교육 전통적인 교육관은 인간의 일정한 연속적인 형성 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키엘케골의 실존적 인간은 단속적 형식 속에서 주체적인 선택과 결단을 하 는 존재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교육관으로 키엘케골의 교육론을 이해하 기는 어려운 일이다. 키엘케골의 사상의 초점은 모든 인간이 인류라는 집단의 환상에 벗어나 유리한 개인(a single individual man)이 되는 데 있었다. 즉 모든 사람이 주체적 자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화가 개인이 달성해야 할 최고의 과제라면 주체성 성 취의 과정은 교육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키엘케골의 인간이해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고 실존적 상황에 서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의 행위로서 부단히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과정적 존재 (becoming man)였다. 이처럼 인간이란 '되어있는'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 라고 한다면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어떠한 교육행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키엘케골은 체계화된 교육목적이나 교육행위에 의존하는 것을 거부한 다. 즉 이성주의, 과학적 실증주의, 교육의 사회화 등이 부정되는 키엘케골의 교육 현장은 삶의 현장이자 자기 자신만의 본래적 삶을 찾아 살도록 하는 자기 실현 그 자체이다. 키엘케골에게 있어서 실존적 존재로서의 학습자의 최대 과제는 자신의 현존재를 알고 가능적 실존을 실현하여 진정한 자아(authentic self), 주체적 자아가 되는데 있다. 그러므로 교육은 학습자가 자기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깨닫고 (self-knowledge) 자기결정(self-determination)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는 행 위가 된다. 학습자는 언제나 자유의지로 변화해 가는 과정적 존재이므로 교육은 언제나 학습 자 개별의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학생에 대한 선입지식을 버려야 할뿐만 아니라 교사 자신이 정립한 교육체계로 학생을 인도하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학습자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 재로 언제나 개방되어 있는 존재다. 보다 엄밀히 이야기 한다면 개별적인 학습자 개개인에게 부합되는 학습과정을 어느 누구도 제공할 수가 없으며 다만 본인의 선 택에만 의존해야 된다는 것이다. 결국 키엘케골에게 있어서 교육은 학습자로 하여 금 진실된 자기 모습을 자각토록 자극을 주고 계기를 마련해 줄 뿐이다. 자각 (self-consciousness)하는 계기도 일반적인 교육이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별적인 존재가 처한 독자적인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유일한 계기인 것이다. 바로 이는 '우 연적 순간'(accidential instances)이다. 실존으로 다가오는 순간에 인간은 세계의 무의미를 느끼게 되며, 또 이 순간에 인간은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역설적 기능을 갖는다. 키엘케골은 실존적 순간에 인간은 진실에 직면하게 되고 이 때 죄의식을 갖게 되 는데 이 죄의식은 자기 각성, 또는 자기 인식의 개념과 동의어이기도 한다. 이 죄 의식을 깨닫는 순간에 인간은 비약적 성장을 할 수 있는데 이 순간적 각성이 일어 나도록 성장을 도와주는 교육을 볼르노우는 단속적 교육이라고 말한다. 볼르노우 에 의하면 이 때의 특징은 '각성'이며 그것은 잠재적으로 있는 것의 현실화이다. 또한 이 각성은 점진적으로 자라나는 유기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자극에 의하여 돌 발적으로 발생하는 단속적 사건이며, 종래의 타성에서 깨어나야 하므로 고통을 수 반하게 되며,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의 상태로 극단적 전환을 하게 되고, 또한 일회성 의 성격을 가진다. 키엘케골에 있어서 자기각성은 '메타노이아'( )와 동일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이 초월적인 신 앞에 설 때에만 자신의 왜곡된 모습과 유한한 모습을 보게 되 고 그 순간에 죄의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죄의식이 바로 각성인 것이다. 그 러므로 각성은 '메타노이아'이며 '메타노이아'는 곧 교육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교육은 자기교육(self-education)이 된다. 결국 실존주의의 교육은 자기교육이 되도 록 하는 데 목적을 둔다. 키엘케골에 있어 자기교육이 된 사람은 심미적 . 윤리적 . 종교적 단계 가운데 윤리적.종교적 단계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Ⅲ. 마틴 부버의 교육론 Technocracy의 세계에서는 검증 가능한 개념에 대해서만 그 타당성을 인정하며 믿음과 신념에 대해서는 확인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나아가 이제는 몰락해 가는 파쇼와 공산 전체주의, 도시화 현상과 산업 구조의 거대화는 인간들을 집단주 의의 무력함 속으로 몰아갔고, 숨돌릴 사이 없이 진척되는 문명의 발걸음은 인간의 실존에 두려움과 무의미함과 불안감을 누적시켜 왔다. 이러한 비극적 상황에서 부 버(Martin Buber, 1878-1965)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틈을 오가며 자신의 존엄을 상실해 버린 현대인을 본다. 무방향성과 딜렘마에 깊이 빠져 있는 현대인들은 병 든 시대(times of sickness)를 살아간다. 무방향의 방황을 계속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영혼의 양식(soul food)을 공급하 고, 인간의 정신적 본질을 되찾아 황폐한 삶을 부흥시키기 위해 부버는 관심을 집 중했다.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비극적 상황을 극복하고 참된 관계 형 성을 위하여 부버는 「만남」(encounter)을 제시하고 있다. 부버는 오늘날 현대 문 명 속의 인간관계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인격적 주체인 「너」(thou)로 보지 않 고 도구적.수단.사물적 존재인 「그것」(It) 으로 보는 "나-그것"의 관계(I-It)로 타 락했다고 주장하면서 인간과 인간의 인격적 「만남」을 강조한다. 이처럼 부버는 관계의 개념으로 인간의 위치와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 때 부버는 현대 사회 의 비인간화 현상에 교육이 편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교육의 본래적 사 명이 사람(Menschsein)을 사람되게(Menschwerden)하는 작업이라고 본다면, 이러한 교육 현상은 미래 사회를 더욱 더 불투명하게 하는 촉진 요인이 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학교 교육의 비인간화 현상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 왔 다. 따라서 인간성 회복의 문제는 현대 교육의 당면 과제로 부각되었다. 바로 이 러한 점에서 부버의 철학과 교육론은 현대 교육의 본래적 기능을 회복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교육은 어느 한편에서의 일방적인 의도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참다운 인간관계 속에서 인격 대 인격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졌을 때 성립될 수 있 다. 또한 참된 가치는 서술된 문장 속에서나 객관화된 추상 속에서 보다는 구체적 인 삶 속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인간의 본래성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통해서 이 루어지므로 인간의 실존은 항상 만남 속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부버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고 말한다. 결국 부버가 주장한 인격적 만남에 의한 인간성 회복의 문제는 사람됨의 문제이 며, 이러한 사람됨의 문제는 곧 교육의 문제이기 때문에 현대의 비인간화의 교육현 장에서 만남은 본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오늘날의 교육이 기계문명에 편승하여 기 능화된 교육방법에 의존함으로써 '인간'을 상실하고 있다는 견해가 강하게 대두할수 록 '만남'에 관한 관심은 증폭되고 있다. 1. 인간성 회복을 위한 교육 부버는 인간세계의 두 가지 근본적인 질서를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점점 '그것'의 세계로 향하고 있다. 이같은 현 대 사회의 비극적 상황 속에서 '나-너'의 관계 회복을 통해 전체로서의 인간성을 회 복하고자 함이 부버 사상의 요점이다. 참된 인간 존재는 고립된 실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형성을 통해서 나타나며 사회적으로 실존하는 것이다. 결국 부 버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관계를 통해 그의 실존을 형성해 나가는 창조자로 파악된 다. 그러므로 부버의 교육의 중점은 자연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정신적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학습자의 인격을 계발하고 실현하는 데 있다. 부버의 철학 적 인간학은 인간의 전체성(the wholeness of man)에 관한 탐구이기 때문에 그의 교육론은 당연히 '학습자의 전체성'에 관한 탐구, 즉 전인 교육론이 된다. 부버에 의하면 우리는 모든 것, 그리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 따라서 교육현장은 어느 곳이나 가능하다. 즉 우리가 마음의 문을 개방하면 세계가 그 속 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부버는 인간의 삶과 정신의 형성에 영향을 주는 두 가지의 근본적인 요소로 프로 파간다(propaganda)와 교육(education)을 들고 있다. 프로파간다는 자신의 정신적 행위(psychic action)가 정당하고 독특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타자에게 자기의 의견 과 태도를 강요하는 것이다. 교육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정당하다고 인식하는 것을 타자의 영혼 속에서 발견하고 촉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신이 인식한 것 이 정당한 것이기 때문에 개방될 필요가 있는 하나의 잠재력(potentiality)으로서 그 리고 여러 가능성들 중의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타자 속에 살아 움직여야 한다. 이 때의 개방은 강의(instruction)를 통해서가 아니라 만남(meeting)을 통해서 개방되어 야 하며, 방향(direction)을 찾는 자와 발견한 자 사이의 실존적 교통(existential communication)을 통해 열려야 한다. 부버의 교육적 입장은 다음 다섯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아동을 무한한 가능성과 창조성을 지닌 하나의 현실(reality)로 본다. 동시 에 무한한 가치를 지닌, 역사 창조에 이바지하는 존재로 본다. 아무리 퍼내도 샘물 처럼 솟아오르는 가능성이 바로 아동이라는 현실성이다. 이같이 아동이 현실성이 기 때문에 교육은 현실성이 되어야만 한다. 현실성인 아동은 누구나 근원자적 본 능(originator instinct)을 가지게 되는 데 이는 자율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만들려고 하며, 그 과정 속에 자기 자신을 참여시키기를 갈망하고 또한 그 과정에 있어서 그 자신이 주체가 되려고 한다. 그러므로 획일화 된 교육을 지양하고, 교육은 아동의 근원자적 본능을 촉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육이란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교육이란 이러한 본능이 자 율적으로 개발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부버는 생각한다. 즉 이러한 본능을 해 방시키는 것은 교육의 힘이 아니고, 해방된 본능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교육력(educative forces)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힘은 인간의 자발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육에서는 인간의 자발성을 억압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육의 주 요 목적은 아동의 창조력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고 부버는 말한다. 이런 점에서 부버의 교육은 끝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다. 둘째, 세계 자체를 하나의 교육장으로 이해한다. 하나의 개인에게 인격을 형성케 하는 것은 세계이다. 즉 자연과 사회라고 하는 환경 전체가 인간을 교육한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세계 자체가 우리의 교사가 되는 것이다. 세계는 자연으로서 혹 은 사회로서 아동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며, 아동은 이러한 여러 요소에 의해 교육 을 받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학교 교사는 아동 교육을 위한 한 요소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교사는 겸손해야 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학교 교육에 있어서 지적 교육에 치중하고 있는 교사의 비중이 절대적인 것임을 생각하면 현대 교육의 위기 를 감지하게 된다. 부버는 이러한 위기 의식에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 과 영적 존재와의 대화적 관계, 즉 "나-너"의 "만남"의 관계를 촉구하고 있으며, 이 때의 "너"는 진정한 의미의 교사가 된다. 셋째, 교육은 에로스(eros)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부버에게 있어서 에로스는 '기 호에 의해서 취해진 선택'으로 교육적 요소가 아니다. 에로스적 존재는 그가 사랑 하려는 사람, 즉 교육 대상을 취사 선택하게 되는데 이는 교육의 본래적 정신에 맞 지 않는다. 부버는 기호에 의한 선택을 배제해야 한다는 점에서 교육자는 금욕주의와 신적인 존재의 대변자적 자세가 요구되어 진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육은 에로스적인 교육 의 자세에서 탈피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인격적 존재이며 동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사가 학생을 취사 선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단지 서로 "만남"을 통해서 참다운 교육작용이 일어난다고 본다. 넷째, 포용(inclusion)으로써의 교육을 강조한다. 포용은 감정이입(empathy)과는 다른 것으로 자기 자신의 구체성을 확장하고, 삶의 현실적 상황을 충족시키고, 자기 가 참여하고 있는 현실을 완전히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포용으로서의 의미인 '상대방의 처지를 체험한다'라는 말은, 자기가 만난 타인의 입장에서 사건을 감지한 다는 뜻이다. 따라서 참된 교사는 그 자신의 직업 훈련 과정에서 학생의 입장에서 교과목의 의미를 자각하고 배움의 정황에 대한 자기편의 입장에 예민한 관찰을 하 게 된다. 포용은 강제를 회피하지만 동시에 분명하고도 단호한 리더십을 견지한다. 상호 존중의 신성함을 감지하는 학생은 교사에 대한 신뢰를 더하게 되고 교사를 통해 세 계를 신뢰하게 된다. 이러한 포용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두 사람간의 관계를 대화적 관계로 볼 수 있 다. 교육에서의 관계란 하나의 순수한 대화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대화의 관 계는 신뢰의 분위기 속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교육의 역할은 신뢰의 분위기 속에 서 학생으로 하여금 구체적인 포용의 체험을 갖도록 촉진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섯째, 성격교육(education of character)을 가치있는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인격 (personality)과 성격(character)을 구분하고 있는 부버는 인격은 본질적으로 교사의 영향력 밖에서 성장하는 것이며, 성격은 인격 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본 다. 따라서 교사의 최대의 과제는 바로 이 성격교육에 있는 것으로, 이것이 교육목 적이 되어야 한다. 위대한 성격의 소유자는 그의 행위와 태도로써 상황의 요구를 만족시키며, 그의 행위와 태도의 총체성이 책임의식을 가지고 그의 존재의 통일성을 표현하는 사람이 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우리가 바라는 인간상이다. 위대한 성격의 소유자는 틀 에 박힌 반응, 획일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틀에 박힌 반응을 함으로 써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인격적 책임으로부터 도피한다. 인격적 책임을 벗어난 삶 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교육의 과업은 결국 학생들에게 인격적 책임을 일깨워주 는 것이다. 인격의 통일(personal unity)은 인류의 통일(unity of mankind)에 대한 갈망으로 확장된다. 개인의 실현은 집단주의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 속에 존재한다. 진정한 대화 교육은 인간 공동체 속에서의 학생들의 위치를 분명히 한 다. 따라서 지나치게 "나"가 강조되고 있는 개인주의와 "너"를 "그것"으로 예속시 키는 집단주의와 소용돌이 속에서 교육은 진정한 "나"와 "너"를 발견하여 주는 일 이 그 본래적 사명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위대하고도 풍부한 관계는 부를 수 있는 성격과 응답할 수 있는 성격, 즉 대화적 성격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 문에 참다운 성격 교육은 곧 공동체를 위한 진정한 교육인 것이다. 이상에서처럼, 부버는 교육의 본질을 침해하는 것은 교육작용이 점차 비인격적 관계인 "나-그것"의 관계로 전락시키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하면서, 인간의 내재적 인 능력을 전체적인 입장에서 전반적이고도 조화롭게 계발시켜야 한다고 하는 「전 인교육론」을 피력한다. 그러므로 부버는 인간교육은 삶 그 자체를 통해 이루어져 야 함을 강조하며 이런 점에서 교사의 인격적 모범을 강조한다. 그러나 학생이 교 사의 인격적 모범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따르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교사나 학생 모두 독특한 개성적 주체이므로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삶의 방식, 즉 길을 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전체성을 강조하는 부버의 교육적 메시지는 대화적 가르침, 포용의 촉진, 리더십과 공동체를 결합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부버가 중요시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참된 관계 회복을 통한 비인간화 현상의 극복이었다. 2. 절대적 가치에의 지향 현대 산업사회의 위기 속에서 인간의 가치와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 육이 당면한 커다란 문제라고 한다면 가치관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콘(Hans Kohn)은 현대인의 형이상학적 상황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즉 하나님은 인간 및 인간의 행위들과 가까이 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현 세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고, 현세와 현세 속에서의 삶은 가치에 대한 의미와 조 정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부버의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지속적인 상호관계는 존재한다. 세계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적 메시지의 구 체적 구현이며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헌신적 응답이다. 즉 세계는 신성과의 교류 (confluence of divine)를 통해서, 그리고 인간의 활동을 통해서 인간에게 구원을 제공할 목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 대화가 있다. 이러한 대화는 삶의 역사의 정수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을 걸며 인간을 부 른다. 그리고 인간은 말로써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하나님의 세계에 책임을 짐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의 부름에 복종함으 로써 응답한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에게 청원하며, 하나님은 인간의 청원을 들으시 고 응답하신다. 세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거처이고, 하나님과 인간을 위한 자료이 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이다. 즉 하나님과 인간은 세계 속에서 만난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을 행하든지 그가 봉사의 정신으로 전념한다면 그것은 곧 올 바른 방향을 향한 하나의 단계가 된다. 이처럼 부버는 하나님에게로 이르는 모든 길이 곧 참된 길이요 올바른 방향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모든 올바른 가치는 하 나님에게로 이르는 길 속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악을 야기시키는 무방향성의 격렬한 힘들(passionate powers)이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전환할 때 선의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메타노이아'의 개념이 엿보인다. 부버에 의하면 인간의 과업은 하나님을 위해 세계와 자아를 긍정하는 것이고 이 를 통해 그 양자를 '변혁'시키는 것이며 통일(reunification)을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을 방해하는 모든 힘은 구원을 방해하는 힘이므로 악의 근원이며 상대 적으로 통일의 상태는 선한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통일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 "만남"이다. 부버에게 있어서 최대의 과업은 "나-그것"의 세계를 "나-너"의 세계로 전환시키 는 것이었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나-너"의 "만남"의 계기를 통해 '절대적 가치'에 접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절대적 가치는 선으로써 곧 절대자(신)를 의미하며, 이 에 접할 수 있는 길은 "나-너"의 "만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 는 낱낱의 "너"를 통해서 영원한 "너"를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 속에서 실현되고 구체화되는 본질적인 가치 선택은 하나님에게로 이르는 길을 열어 준다는 것이다. Ⅲ. 실존주의가 열어 준 교육적 지평 키엘케골은 19세기 유럽을 지배하던 헤겔의 변증법의 자리에 실존주의를 심었다. 인간은 절대정신 또는 세계정신의 계획대로 '필연적으로 있어야'하고 변증법적 형식 에 맞추어 발전해 가는 결정적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유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유로운 선택으로 생성해 가는 존재이다. 인류라는 보편적인 종으로서 취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 사고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우연적 존재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에서 성숙해 가는 과정적 존재이며, 비존재인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나 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탐색하는 존재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실존은 존 재에로 생성되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실존의 영역이 가능성의 영역이므로 자유의지로서 선택하고 결단해야 하 는 고통의 행위를 수반해야 하기 때문에 불확실성의 모험과 불안이 따른다. 따라 서 불안은 실존의 핵심적 속성이다. 키엘케골은 불안을 절망이라는 개념으로 사용 하기도 하였는데, 이 불안과 절망은 인생에 있어서 위기임에는 틀림없으나 인간은 위기를 느끼는 순간에 역설적으로 도약하여 실존에 도달한다. 인간의 죽음, 불안, 고통, 위기 등과 같은 어두운 측면과 자유, 선택, 책임, 개성등 과 같은 주체적 측면을 부가시켜 단순히 지속적인 노력만으로는 인간을 변형케 할 수 없다는 실존주의자들의 관점은 전통적 교육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교육 형태인 단속적 교육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키엘케골의 실존은 특수한 상황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과 결단이라는 모 험적 순간을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실존이다. 키엘케골은 실존의 범주에서 심미적 단계에서 윤리적 단계로, 윤리적 단계에서 종교적 단계에로의 이동은 지속적인 발 전으로 보다는 단속적인 도약으로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특히 인간은 좌절, 실패, 우울, 권태, 죽음, 절망 등의 위기에 직면하는 순간에 질적 변형이 일어남을 강조하 였다. 인간성 속에 이같은 모험의 순간이 있다면, 교육의 본질적 성격에도 모험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부버에게 있어서 이 모험의 순간이 '만남의 장'인 것이다. 교육학에 있어서 교육 의 단속성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교사와 학생과의 만남, 학생과 작품 속의 인물, 또 는 역사적 인물과의 만남, 육체적 . 감각적인 각성, 나아가 영적인 깨우침 등을 생 각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전환이나 도약을 가능케 하는 핵심적 요소는 만남이다. 부버의 이러한 교육론은 '만남'의 사상을 근간으로 한 것이며, 그의 '만남'은 실존 주의의 단속성을 배경으로 형성되었음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이다. 그러나 부버는 키엘케골로부터 싸르트르에 이르는 실존주의자들과는 달리 인간을 고립된 실존으로 보지 않고,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 자 한다. 부버는 인간이 단독자로서는 불완전하다는 것, 즉 고립된 존재는 인간일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고립된 개인을 강조하던 종래의 실존주의를 극복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키엘케골과부버의 실존주의와 교육에 대한 관심을 통하여 신앙 체험에서의 변형 사건을 논리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프린스톤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의 로더(James E. Loder) 교수의 '변형'의 논리가 바로 그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Ⅳ. 결 론 인류사와 함께 흘러온 인간의 정신사적 투쟁은 실존적 경험으로 불어닥치는 불안 과의 싸움이었다. 그 불안은 언제나 존재론적인 고독과 허무의식으로 표출되어 오 기도 했다. 그러한 표출은 실존적 공백(existential vaccum)으로 나타나고 그것에 항거하려는 인간 의지의 표현 앞에 극복되는 듯한 경향을 보이나 그러한 시도는 또 다시 새로운 갈등요소를 배태한다. 불안을 극복하려는 인간 의지는 항상 인간의 행복은 밖으로부터 누군가에 의하여 주어지는 조건의 부여에 달려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조건부여가 첨가되 면 될수록 인간이 경험하는 실존적 허무 의식은 더욱 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 러한 것이 기독교 교육의 한계 상황이며, 동시에 기독교 교육의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이기도 한다. 은준관은 인간실존의 불안과 소외의 심연을 "공동체적 접근"을 통하여 해결하려 는 관심을 보인다. 공동체적 접근이란 "관계"의 설정이고 "참여"의 예술이며, 동시 에 "공동의 창조"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기독교 교육적으로는 "만남"이고 "대화"이 고 "종교적 사회화"(religlous socialization)라는 차원에서 모색되는 양식인 것이다. 기독교 교육은 개인과 집단을 중요한 구성 요소로 수용하지만, 개인과 집단 사이 를 하나로 통합하는 양식을 "공동체", 특히 진정한 뜻에서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비로소 소외와 단절이 극복되는 새로운 가능성 이 추구된다. 기독교 교육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성숙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간 행위의 변혁을 위한 의도적인 과정을 의미한다면, 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한 인간실존의 근원적인 변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변형이란 앞에서도 언급된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존재양 식, 삶의 태도, 가치체계를 갖게됨을 뜻한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기 독교 교육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실존에 대하여 자아의 깊은 곳에서 삶의 무의미, 갈등, 곤궁 등을 깊이 깨닫도록 도와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원사건 을 통하여 우리에게 대면해 오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도 와주는 것이다. 또한 그 만남을 통하여 전인적인 변형이 일어나도록 도와주고 이 끌어 주는 것이다. 로더에 있어서는 이러한 변형을 가져다 주는 사건 발생이 곧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하는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이며 변형의 순간이야말로 영 적인 문제에 관련하여 중요한 새로운 근거를 제공해주며, 실재(reality)의 본질에 빛 을 비춰주며, 피조물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나타나심을 깨닫도록 하여 주 는 것이다. 즉 변형을 통하여 종교적인 실현(religious realization)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결국 실제적인 삶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이 성숙할 수 있도 록 돕는 일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의 모든 교육 행위는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서에 근거하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성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실존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타락한 인간은 근원적이고도 총체적인 변형이 없이는 원래 창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라든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과 같은 말씀은 인간의 적극적인 변형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존재의 변형을 전제로 하지 않고, 다만 진 화론적으로 또는 교육의 힘만으로 인간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논하는 것은 무의 미하다. 기독교 교육은 인간이 자신의 절망적인 실존 상황을 깨닫도록 도와주며, 그러한 인간에게 계시로 다가오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 응답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존재양식, 삶의 태도, 가치체계 등이 변형되어 신앙 안에서 성숙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이와같은 의미에서 갈등으로부터 시작하여 변형의 논리체계를 거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남을 통하여 완성되는 로더의 '인 간변형'은 우리의 관심사가 된다. 성경은 변형의 사례로「엠마오」의 제자들을 보여주고 있다. 엠마오를 향하던 제자들의 발걸음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선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로 인하여 실망한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져 어두움 속에서도 예루살렘을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누가복음 24:32). 거룩하신 분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제자들은 아가페 사랑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 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 "확증"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