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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恭愍王
위 사진은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대원리의 화장사(華藏寺)에 있던 고려 공민왕의 초상화이다. 종묘(宗廟) 공민왕 신당(神堂)에 모셔져 있다가 얼마전 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된 '공민왕' 초상(肖像)과는 확실히 다르게 생긴 유물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중종실록' 에는 화장사(華藏寺)에 '공민왕 초상 (恭愍王 肖像)이라고 알려진 유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세 차례 나온다. 본래는 이 곳에 3개의 초상이 있었는데, 이들 중 2개의 그림이 공정대왕(恭定大王 즉, 조선 2대왕 定宗 ...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북한에 있다) 부부의 초상이라는 얘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굉장히 낡은 초상화가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고려 공민왕의 초상화라고 전해지고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공정대왕 부부의 초상화라는 그림들을 일단 예법을 갖추어 궁궐로 모셔왔으나, 이것을 진품(眞品)으로 인정하고 선정원(宣政院)에 봉안할지 여부를 놓고 토론을 벌이다가, 결국은 그 진위(眞僞)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다시 화장사(華藏寺)에 되돌려 보냈다.
이러면서 도화서(圖畵署)에서 보관하고 있던 또 다른 공민왕의 초상화를 ' 亡한 나라 임금 초상을 관청에 두어 봐야 쓸모가 없다 '는 이유로 화장사에 함께 보내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장사(華藏寺)는 6.25 한국전쟁 때 전소(全燒)되었다. 그리고서 별 기록이 없다가, 1917년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보고서에 이 초상화의 사진과 함께 아래와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공민왕 신당 恭愍王 神堂
종묘(宗廟)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들의 신주(神主)를 모신 곳으로서, 조선 왕조의 정통성(正統性)을 상징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비록 외진 곳에 위치한 자그마한 규모이기는 하지만, 특이하게 고려 왕조의 임금인 공민왕의 영정을 모신 <恭愍王 神堂>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야화(野話)에 의하면, 이곳은 1395년(태조 4년), 종묘(宗廟)를 창건할 당시에 지어졌다는데, '종묘를 지을 때 어느 날 북쪽에서 회오리 바람이 불어와 물건이 떨어져서 보니 공민왕 영정이었다. 모두들 신기하게 여겨 그 자리에 신당(神堂)을 짓고 영정(影幀)을 모셨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는 설화적인 이야기이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진 자체가 <공민왕 신당>을 조선(朝鮮) 왕조의 종묘(宗廟)에 조성해야 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와 관련하여 현존하는 역사 자료 및 기록이 없어 "공민왕 신당"이 언제, 어떠한 이유로 세워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종묘의 역사를 기록한 종묘지(宗廟誌 : 卷一)에 의하면 ' 태조(太祖)가 공민왕을 태조묘(太祖廟)에 모시기를 명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종묘(宗廟)는 조선의 정수(精髓)이다. 이성계(李成桂)도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 경복궁(景福宮) 보다도 먼저 종묘(宗廟)을 건립하였다. 조선의 왕(王)과 왕비(王妃)가 아니면 모실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 공민왕이 있다. 그리고 공민왕 곁에 노국공주(魯國公主)도 있다. 공민왕을 모시기 위해 '노국공주'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지극한 사랑은 고려가 패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곧 잘 회자되었다. 신하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그렇게 받아 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공민왕이 가는 곳에 노국공주도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은 민간신앙으로까지 만들어졌다. 세종(世宗)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도 있다.
공민왕의 마지막 행적을 기이하고, 정신병자이고, 변태 성욕자로 그리고 있지만(高麗史는 조선시대에 기술된 것임) 이는 고려의 마지막 역사가 조선에 의해 씌여진 점을 감안하여야 한다. 조선 건국(建國)의 정당성을 위해 고려와 공민왕의 말로(末路)는 이처럼 어둡게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노국공주와의 사랑만큼은 조선의 왕이나 사가(史家)들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공민왕을 폄하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랑까지는 모욕하지 못 한 것이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역사의 신화(神話)가 된 세기(世紀)의 사랑이었다.
왜 공민왕 神堂이 종묘에?
고려 왕조는 공민왕 이후 우왕(禑王), 창왕(昌王) 과 공양왕(恭讓王)까지 이어지지만,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回軍)으로 실권(實權)을 장악한 것은 우왕대(禑王代)이므로, 새로운 왕조의 명분을 위해서라도 고려의 정통성은 공민왕대에서 그쳐야 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와 조선의 건국자들은 정통성을 가진 사실상의 마지막 고려 왕이라고 보았던 공민왕을 모시고, 그의 반원자주적(反元自主的) 개혁정치의 추구와 잃어버린 북방영토를 회복하고,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는 등 커다란 업적을 그대로 계승한다는 의미를 지엄한 종묘에 담아 조선왕조가 고려왕조를 정통적(正統的)으로 계승하였다는 조선왕조의 정통성(正統性)을 표방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뜻은 태조(太祖)의 즉위교서(卽位敎書)에 ' 조선의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한다 '는 구절에서도 잘 읽을 수 있다. 여기에는 함경도 변방에서 개경으로 진출하여 새 왕조의 기틀을 세울 수 있었던 기회를 준 공민왕(恭愍王)에 대한 태조 이성계의 남다른 존경심도 그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신당(神堂) 안에 사신(使臣)의 복장을 한 공민왕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조선왕조와 고려왕조의 차별화(差別化)를 구체화하려 한 조선왕조 개국(開國) 세력들의 의지를 나타내었다고 짐작되는것이다. 따라서 국가 정통성의 명분과 새 왕조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자 한,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 했던 그들의 입장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종묘(宗廟)에서 그를 추모하고 원혼을 달래어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인하여 희생된 많은 고려인(高麗人)들의 넋을 위로함으로써 백성들에게 그의 정치적인 아량을 보여주며, 흐트러진 민심(民心)을 다독거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묘 영역에 공민왕 신당을 건립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공민왕 恭愍王
공민왕은 고려의 제3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351년부터 1374년까지 23년 동안 고려를 통치하였다. 처음 이름은 기(祺), 몽고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백안첩목아. 伯顔帖木兒)이며, 재위 중에 이름을 전(전)으로 바꾸었다. 호는 이재(怡齋), 익당(益堂)이다. 충숙왕과 명덕태후 홍씨(明德太后 洪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충혜왕의 동생이기도 하다.
비(妃)는 元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며, 그밖에 혜비 이씨(惠妃 李氏), 익비 한씨(益妃 韓氏), 정비 안씨(正妃 安씨), 신비 염씨(愼妃 廉氏)가 있다. 혈통이 분명치 않으나 아들로는 신돈(辛旽)의 비첩이었던 반야(般若)와의 사이에서 낳은 우왕(禑王)이 있다.
고려시대의 왕 중에서 태조 왕건 다음으로 잘 알려진 왕이 제31대 공민왕 (1330~1374. 在位 1351~1374)일 것이다. 그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정의하면 개혁군주(改革君主)이다. 고려 말에 元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부인인 노국공주(魯國公主)와의 애틋한사랑, 요승(妖僧)으로 알려진 신돈(辛旽)의 등용 등 여러가지 극적인 요소가 많았던 왕이기도 하였다.
바람 앞의 촛불 .. 고려 왕
공민왕이 살았던 시기는 국내외 정세가 격동하던 시절이었다. 원나라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충렬왕대 이후 고려의 국왕은 廢位와 복위가 반복되는 자리이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등 세 왕이 각각 중간에 한 차례씩 폐위되었다가 복위하였고, 충혜왕,충목왕,충정왕 등 세 왕은 각각 5년도 채 안 되어 폐위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왕조가 극심한 불안 상태로 빠져들었음을 입증하는 적신호이었다. 王室과 權臣들 간의 내분(內紛)은 그치지 않았고, 민생(民生)은 문자 그대로 도탄에 빠져 있었다. 험난한 역사의 파고가 드센 시기에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아 남아야 했던 공민왕(恭愍王), 그 앞에 놓인 운명이 곧 고려의 운명이었다.
고려 국왕의 단명(短命)은 元나라 황제들이 빈번한 교체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이 무렵 元나라는 1294년 世祖가 죽은 직후부터 황제 자리의 다툼과 권신들의 전횡이 심하였다. 반세기 동안 황제만도 11명이나 바뀌고, 공위(空位) 상태만도 3~4회씩이나 되풀이되었다. 국가는 여러모로 파탄이 난 지 오래였고, 백성은 백성대로 각종 부역과 天災, 기근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각종 만란과 함께 홍건적(紅巾賊)까지 봉기하여 원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고려 31대 공민왕은 이러한 혼란 시기에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두 번의 역경을 딛고 王이 되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며, 충혜왕의 동복 아우이다. 공민왕의 어머니는 덕비 홍씨로 원나라 공주가 아닌 고려 여성이었다. 1330년에 태어난 공민왕이 前例에 따라 볼모로 元나라 연경(燕京)에 간 것은 12살 때이었다.이후 조카인 충정왕이 폐위되어 1351년 12월에 귀국할 때까지, 약 10년을 연경에서 살아야 했다. 그 사이 두 차례의 왕위계승에서 실패하는 아픔을 겪다가, 21세 때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보타시리(寶塔實理. 노국대장공주)와 혼인하면서 왕위계승의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원나라의 내정(內政)을 환히 꿰뚫고 있었을 뿐 아니라, 대륙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원나라의 멸망이 멀지 않았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신하들의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변발(辯髮)을 풀어헤치고, 원나라의 옷을 벗는 과감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공민왕의 영토회복과 국권회복운동은 그가 변발을 풀어헤쳤을 때 이미 그 막이 오른 것이었다.
변발(辯髮)은 두발을 땋아 늘인 머리모양을 말한다 (위 사진). 유목민족 사이에서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도록 승(繩. 먹줄)과 같이 땋음으로써 얻은 명칭으로 주로 북방민족의 풍속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무용총(舞踊塚) 벽화에서 변발이 보이고, 백제의 미혼녀(未婚女)는 머리를 땋아서 뒤로 한 가닥, 출가녀(出嫁女)는 두 가닥을 늘어뜨렸다는 '주서(周書)'의 기록에서 변발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고려 말에는 개체변발(開剃辯髮)의 풍속이 있었다.
개체변발(開剃辯髮)은 몽고 특유의 풍속으로 머리의 주위를 깎고 머리카락을 정상만 남겨 땋아 묶고 늘인 것이다. 우리나라은 고려 말 원종 13년(1272), 세자 심(諶)이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변발호복(辨髮胡服)인 것으로 보고 모든 백성들이 탄식하고 울었다고 하며, 이때의 변발은 몽고풍의 개체변발이었다.세자 심(諶)은 뒷날 왕이 되어 충렬왕(忠烈王) 4년인 1277년에 개체령(開剃令)을 발표하여 나라 전체에서 시행하도록 명령하였으며, 개체변발은 공민왕 원년인 1389년 개체령 해제까지 100년 정도 계속되었다.
親元세력의 제거
원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의 제2황후 기씨(奇氏 .. 통칭, 기황후)는 고려 여인이었다. 기황후는 원래 원나라에 바쳐진 공녀(貢女)이었는데, 順帝의 눈에 들어 제왕후의 자리에 올라, 태자 애유식리달랍을 낳으면서, 일약 핵심 권력자로 부상하였다.
기황후(寄皇后)에게는 기식, 기철, 기원, 기주, 기륜 등 여러 명의 형제가 있었다. 이들은 여동생 덕분으로 고려와 원나라에서 모두 득세하여 친원(親元) 세력의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기황후의 세력을 배경으로 천하를 주름잡으며 영화를 누리던 기씨 형제들은 막강한 력을 행사하여, 왕 앞에서 "신(臣)"이라고 말하지 않을 만큼 무례하고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친원파 가운데는 기씨 형제 외에도 조일신(趙日新), 노책(盧柵), 권겸(權謙)이라는 자들이 있었다. "조일신"은 원나라 체류 시절에 교류하였던 사대부들의 후원에 힘입어 친원파의 수장 노릇을하고 있었다. "노책"은 딸을 원나라 태자비로 바치고 그 덕에 집현전 학사가 된 자이며, "권겸" 역시 딸을 원나라 황태자비로 바치고 그 덕에 태부감, 태감이 된 자이었다. 원나라의 쇠락에 용기를 얻은 공민왕은 1차로 '조일신"을 제거하고, 배원정책(排元政策)을 가속하자, 입지가 좁아진 기씨 형제들은 공민왕을 폐위하고자 시도하였다.
역모를 눈치 챈 공민왕은 1356년(공민왕 5년)에 大臣들을 위한 연회를 베푼다고 속여, 기철 일당을 대궐로 불러들였다. 공민왕의 계책을 전혀 모르고 있던 "기철"과 "권겸"은 대궐 안에 들어가자마자 철퇴에 맞아 죽었고, "노책"은 집에서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어서 "기철"의 아들 기유걸, 기완자불화 그리고 "노책"의 아들 노제, 권겸의 아들 권상화가 줄줄이 처형되면서 친원세력은 일망타진되었다. 당시 기철(奇轍)의 아들 기유걸을 공개 처형할 때 수많은 구경꾼 가운데,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단 명도 없었다고 한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고려사"의 내용을 축약한 역사서이다. "고려사"에 누락된 내용도 실려 있는데, 공민왕에 대한 일화도 첨가되어 있다. 1356년 5월 18일.. 고려사절요는 그날의 기록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그날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날이었다. 그것은 친원세력 처단의 날이었던 것이다. 기철(奇轍)과 그의 아들, 조카, 그리고 권겸(權謙) 등 대대적인 숙청이었다. 奇氏 일당은 이날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피가 궁문에 낭자하고 칼날이 길에 가득하였다. <고려사절요>. 기철 일당의 처단, 그것은 위험한 선택이었다. 기철은 원나라 기황후의 친오빠이기 때문이다. 누이가 황후에, 조카가 원나라 황태자 .. 기철은 공민왕에 대하여 스스로 臣下라고 칭하지도 않았다. 기철이 왕에게 詩를 올려 치하하였는데, 臣이라 일컫지도 않았다<고려사절요>.
그들의 오만은 도를 넘었다. 친원세력들은 고려를 원나라의 속국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운,조익청, 기철 등은 백성들을 안착시키기 위하여 고려를 원나라의 한 섬으로 만들어달라고 원나라 황제에게 상소하였다<고려사. 충혜왕 4년. 1343년>. 원나라에 속한 권문세족 즉 친원파들은 아녀자를 범하고, 돈으로 관직을 사고 팔고, 각지에 농장을 만들어서 수탈하였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그들의 딸까지 기꺼이 원나라에 조공(朝貢)하였다.
공민왕은 이들을 모두 처단한 뒤 공정한 처사이었음을 원나라에 알렸다. 기철 등이 권력을 빙자하여 임금의 통제를 벗어나, 관리의 선발을 제 기분에 따라 결정하였고, 법을 제 편의대로 운용하였다<고려사 공민왕 5년 6월>
기황후, 친원파의 반격
원나라 기황후는 자신의 일족들이 공민왕에 의해 제거되자 원한을 품고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최유(崔濡)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 崔濡 "는 원나라에 체류하고 있던 대표적인 친원파로 충정왕이 왕위에 오를 때 공을 세운 자이었다. 최유 일파가 옹립하려 한 덕흥군은 충선왕과 궁인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어려서 중이 되었다가 원나라로 건너가 있던 상태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기황후가 원나라 황제를 움직여 덕흥군을 고려의 국왕으로 정해 주자, 崔濡는 요양성의 군사를 빌려 고려로 쳐들어가려 하였다.
1364년(공민왕 14) 1월1일 덕흥군을 받든 최유는 마침내 원나라 군사 1만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였다. 공민왕은 최영(崔瑩)을 도순위사에 임명하여 안주의 관군을 모두 지휘하게 하고, 또 이성계(李成桂)에게는 정예 기마병 1천명을 주어 최영장군을 돕게 하였다. 이에 최유는 기세가 꺾여 다시 원나라로 달아났는데, 이후에도 최유는 계속해서 본국을 헐뜯으며 다시 침공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국력이 쇠퇴한 원나라는 고려와 불화를 빚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마침내 원나라 황제 順帝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공민왕의 복위를 승인하는 조서를 보냈다. 그리고 최유를 포박하여 고려로 압송시키고, 덕흥군은 영평부로 귀양보내 버렸다. 崔濡는 이해 11월에 고려에서 처형되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왕릉이라는 공민왕릉, 공민왕과 노국공주와의 사랑은 7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오늘날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게성 근교에 자리 잡은 공민왕릉은 고려 왕릉 가운데 유일한 부부 쌍릉(雙陵)이다. 죽어서도 함께 한 이들의 사랑있었지만, 그 출발은 정략결혼(政略結婚)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노국공주는 공민왕의 정치 경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생모가 고려 여인인 관계로 왕위 계승에서 번번이 낙마한 공민왕은 1349년에 정략적으로 노국공주(정싱 명칭, 魯國大長公主)와 결혼하였고, 2년 뒤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365년(공민왕 14)에 노국공주가 난산(難産)을 죽자, 그녀를 잊지 못한 공민왕은 왕비의 초상화를 벽에 걸고 밤낮으로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릴 뿐,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본래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던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살아 있을 때에도 왕비의 침소에 가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노국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한 공민왕은 왕비가 죽은 뒤, 계비(계비)를 들이기도 하고, 혹은 신돈(辛旽)과 함께 불공을 드리며 축원하기도 하였으나 후사를 얻지 못하였다.그 사이 공민왕은 신돈의 집에 자주 드나들다가 신돈의 비첩인 반야(般若)라는 미인을 보고 총애하였다. 공민왕의 사랑을 받은 般若는 1365년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공민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禑王)이다. 우왕의 어릴 적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었는데, 그를 몹시 사랑한 공민왕은 자주 장난감을 갖다주며 父情을 나타내었다.
공민왕은 太后의 반대로 牟尼奴를 세자로 삼지 못하였으나, 여전히 태후 宮에 두고 우(禑)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강녕부원대군에 봉하였다. 이듬해에는 우(禑)가 궁인 한씨의 소생이라고 발표하게 하였다. 당시 궁인 한씨는 이미 사망한 상태이었는데 우왕의 親母를 궁인 한씨라고 한 것은 生母인 般若가 辛旽의 비첩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우왕은 당시에 공민왕의 아들로 공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후 禑王은 般若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른바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우왕신씨설(禑王辛氏說)"을 내세운 이성계 일파에게 폐위되고 죽임을 당했다.
엽기적인 성행각
재위 초반 고려의 자주독립과 여러 개혁정치에 노력을 기울인 공민왕이지만, 정치가로서의 운명을 불우하였다.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 반란과 잦은 전쟁은 공민왕의 인격을 파탄내었고, 노국공주의 죽음은 그를 폐인으로 만들었다. 절제와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왕이었지만, 노국공주의 죽음과 정치적 고독감을 이기지 못해 지나치게 性的인 것만을 탐닉하는 왕이 되었다. 전대 왕들의 사치를 비판하며 백성의 생활을 걱정하던 그였지만, 말년에는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고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강행하였다.
공민왕은 신돈이 실각한 뒤로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공민왕은 김흥경(金興慶)이라는 총신(寵臣)을 사랑하였고, 김흥경을 통해 자제위(子弟衛)를 두어 나이 어린 미소년들을 뽑고는 동성애와 관음증에 빠져 지내기 일쑤이었다. 자제위는 형식상 왕의 경호를 위한 귀족 자제들의 집단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를 자제위 미소년들과 기괴한 유희를 즐겼다. 너무도 열중한 나머지 휴가도 주지 않았다.
공민왕은 太后가 우(禑)를 세자로 허락해 주지 않자, 다시 후사를 걱정하게 되었다. 급기야 홍륜(홍륜) 등 자제위들의 불만을 잠재우면서, 동시에 비빈(妃嬪)을 임신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공민왕은 홍륜(洪倫), 한안(韓安) 등 자제위 출신들과 그의 비빈들을 억지로 간음하게 하여 왕자를 얻으려는 희망을 품었으나, 정비, 혜비, 신비 등 3妃가 한사코 거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공민왕은 마지막으로 익비(益妃)를 김흥경과 홍륜, 한안등이 간음하도록 하였다. 이때 익비 역시 거부하자 공민왕은 칼로 위협하며 강제로 간음을 시켰고, 이후 益妃는 임신을 하였다.
공민왕의 최후
공민왕은 익비를 임신시킨 홍윤(洪倫)과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최만생(崔萬生)을 없애고자 하였다. 이를 알게된 두 사람은 1374년(공민왕 23) 9월21일 밤, 왕의 침전에 들어가 술에 취하여 정신없이 자고 있던 공민왕의 온몸을 마구 칼로 찔렀다. 이들이 휘두른 칼에 공민왕은 뇌수가 벽에 튀어 붙을 정도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 하였다. 이 때 공민왕의 나이 45세이었다. 그 후 최만생, 홍륜, 한안, 권진 등은 왕을 시해한 죄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그들의 나머지 친족들도 모두 잡혀 유배되거나 노비가 되었다.
고려의 등불 같은 존재이었던 공민왕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이처럼 처참하고 허무하였다. 고려의 역대 제왕은 태조 이후로 원종까지 본국 즉 고려에서 시호와 묘호를 지었으나, 원나라 간섭을 받게 된 충렬왕 이후부터는 원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았을 분, 묘호는 붙이지못하였다. 공민왕대에 明나라가 강성해지자 고려의 대외관계도 크게 바뀌어 공민왕의 시호인 "공민(恭愍)"은 명나라에서 받은것이다. 본국에서는 경효(慶孝)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그 후의 우왕과 창왕은 모두 폐시(廢弑)되어 諡號가 없고,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은 새 왕조 조선에서 추증한 것이다.
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공민왕릉은 1365~1374년에 축조되었다. 쌍릉 형식으로 병립되어 있는데, 서쪽에는 공민왕의 현릉(顯陵)이고 , 동쪽에는 노국공주(王妃)의 정릉(正陵)이다. 고분 구역은 3개의 단과 맨아래의 경사단으로 이루어졌다.
맨 윗단이 크기는 동서 약 40m, 남북 약 24m인데 그 중심에 2기의 무덤을 南向으로 나란히 안치하였다. 무덤은 석조흙무덤이다. 무덤무지의 높이는 약 6.5m이고, 병풍석의 대각직경은 13.7m이며, 두 무덤 사이의 간격은 0.5m이다. 각 무덤무지의 둘레에는 12각으로 석조병풍을 돌리고 그 밖으로 난간을 둘렀는데, 석조병풍에는 구름을 타고 있는 12지신과 연꽃무늬가 조각되어있다. 이밖에 맨 윗단에는 한 쌍의 상돌과 범과 양 조각들 그리고 한 쌍의 망주석이 있다.
두 번째 단에는 두 쌍의 文人像과 한 쌍의 石燈이 있고, 세 번째 단에는 두 쌍의 武人像이 있다. 경사단의 아래에는 수년 전에 새로 원상복구된 丁字閣과 능의 원찰인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의 터와 비가 있다. 두 陵의 내부는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무덤 칸은 무덤 널길과 안채로 이루어진 외채무덤이다. 널방의 크기는 동서 2.97m, 남북 3m이며 높이는 2.29m이다. 무덤 널길은 안채 남쪽 벽 중심에 내었는데,길이 9.1m, 높이 1.82m이다. 안채의 벽면은 잘 다듬은 화강석판돌을 한 면에 하나씩 세워 축조되었으며, 펀장은 3개의 판돌을 덮어서 평천정을 하였다.
동, 서, 북 세 벽면에는 공민왕이 직접 그렸다고 전하는 12지신상(支神像 ... 높이 70~75cm) ,벽화가 각각 4개 배치되어 있다. 12지신상은 구름을 타고 손에 홀(笏)을 쥐었으며 머리에 관을 쓴 인물로 형성되었다. 관 위에는 각기 자기 방위에 해당하는 동물의 머리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하늘을 상징한 해와 北斗七星 그리고 한 쌍의 3星을 그렸다.
안채의 동벽에는 높이 43cm, 너비 38cm의 문을 새기고 그 밑에 방형의 구멍을 뚫어 노국공주의 무덤인 正陵과 통함을 나타내었다. 공민왕릉의 건축가 설계는 당시 고려사람들이 도달했던 수학 및 천문지리, 석조건축술, 조형예술 수준이 종합적으로 집성되어 있다.
공민왕은 죽어서도 함께 하고자 아내의 무덤 옆에 자신의 무덤까지 준비하여 고려 왕조에서 유일하게 쌍릉으로 축조된 공민왕릉 .. 게다가 그 내부에는 노국공주의 무덤과 연결되도록 자그마한 구멍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만들어 놓아, 영혼으로서나마 맘껏 드나들고자 했던 그 마음이 담긴 영혼의 길이었다.
神話가 된 사랑 ... 공민왕과 노국공주
노국공주는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이며, 이름은 보탑실리(寶塔實理)라고 하였다. 공민왕이 지어준 고려식 이름은 왕가진(王佳珍)이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는 그의 시호(諡號)이다. 공민왕이 대군으로 원나라에서 숙위(宿衛 .. 소위 국제적인 人質)하고 있을 때 결혼하여 승의공주(承懿公主)로 책봉되었다. 元나라의 강력한 후원으로 공민왕이 충정왕을 퇴위시키고 왕이 되자 함께 귀국하였다.
홍건적(紅巾賊)의 난으로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安東)에 피난하였다가, 1363년 3월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흥왕사의 변(興王寺의 變)이 일어나 화를 입을 뻔 하였으나, 침착하게 대응하여 공민왕이 위기를 모면하도록 하였다. 공민왕의 사랑을 받아 1365년 2월 노국공주가 임신을 하자 이례적으로 사면령을 내리고, 난산(難産)으로 병이 위중해지자 또 사면령을 내렸다. 공주가 죽자 능을 호화스럽게 꾸며 장사지내고 정릉(正陵)이라 하였다.
흥왕사의 변 興王寺의 變
1359년에ㅣ어 1361년에 홍건적(紅巾賊) 10여 만의 무리가 재차 고려를 침입하였다. 이 때 정세운(鄭世雲)이 총병관(摠兵官 .. 총사령관)이 되어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김용(金鏞), 최영(崔瑩) 등과 함께 싸워 홍건적을 물리쳤다.
이렇게 홍건적을 물리친 지 며칠이 안되어 고려의 장신(將臣) 사이에는 왕의 신임과 군공(軍功)을 시기하여 서로 싸우는 비극이 일어났다. 김용(金鏞)은 평소에 사이가 나쁜 정세운(鄭世雲)의 공을 시기한 나머지 왕지(王旨)를 위조하여 안우, 이방실, 김득배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그 죄를 뒤집어씌워 모두 죽였다.
그리고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피난갔던 공민왕이 돌아와서 흥왕사(興王寺)의 행궁(行宮)에서 거처하던 공민왕을 죽이고자 하였다. 결국 공민왕은 환자(宦者) 이강달(李剛達)의 기지로 변을 면하였으나, 공민왕과 용모가 비슷한 안도치(安都赤)가 죽음믈 당하게 되었다.
이 변(變)은 최영(崔瀛) 등이 군사를 이끌고 행궁에 이르러 토벌함으로써 끝나게 되었지만, 오히려 김용(金鏞)은 1등공신에 봉하여졌다. 그러나 곧 그 사실이 발각되자 김용(金鏞)은 그 동안의 공로가 있다고 하여 죽음은 면하였으나 밀성군(密城郡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에 귀양가게 되었다. 그후 다시 계림부(鷄林府.. 지금의 경주)로 옮긴 뒤 사지(四肢)가 잘려 전국에 돌려지고 개성에 보내져 효수(梟首)되었다.
1367년 1월 .. 공민왕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미 죽은 노국공주의 영정을 앞에 두고서. 아내가 죽은지 이미 3년 째 이지만, 왕은 여전히 공주의 죽음을 부정하고 있었다. "왕은 공주의 肖像과 마주 앉아서 음식 드는 절차를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고려사. 공민왕 16년>" 그는 요동을 정벌하고 권문세족을 숙청하였던 개혁군주이었지만, 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심질환, 정신병에 걸린 군주일 뿐이었다. 사랑을 잃은 王의 마지막은 시리고 .. 또 아팠다.
공민왕, 그는 고려의 개혁군주로 평가받는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 고려는 이미 기우러져 가고 있었지만, 그가 왕이 됨으로써 다시 한 번 화려한 전성기를 맞는다. 공민왕 뒤로 우왕, 창왕, 공양왕이 즉위하지만 고려는 사실상 공민왕으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그러한 공민왕이 정신질환을 앓았다. 공민왕의 정치적 업적과 달리 개인적으로 "정신병"이란 단어를 못박고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이 <고려사>에 자세히 실려 있다.
<고려사. 고려사>는 고려 왕에 대한 세세한 기록은 물론 열녀와 간신등 약 1,000여 명의 열전까지 실은 139권의 방대한 기록이다. 그 중 공민왕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면, 왕의 본래 모습은 왕다웠다. 왕위에 23년 있었으며, 나이는 45세이었다 .... 왕의 성격이 본래 엄격하고 신중하였으며 행동이 예의에 맞았다..... 그러나 만년에 와서 의심이 많고 조포하여 질투가 강하였다 <고려사 공민왕 23년 9월>
같은 사람이라 여겨지지 않는 급격한 변모, 그 시작은 아내의 죽음이었다. 과도하게 슬퍼한 나머지 자신의 의지를 상실한 것이다. 노국공주가 죽은 뒤로는 과도하게 슬퍼하여 의지를 상실하였다<고려사 공민왕 23년 10월>. 왕비의 죽음을 공민왕은 감당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왕이 손수 공주의 초상을 그려서 밤낮으로 마주 대하여, 밥 먹으면서 슬피 울고, 3년 동안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24년 4월>
노국공주는 몽골사람이었다. 공민왕은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몽골음악을 듣고 또 연주하였다. 공주의 영정과 마주 앉아 연회를 베풀었으며 몽골음악을 연주하였다<고려사 공민왕 21년 10월>. 시간이 흘러도 그리운 마음은 바래지 않았다. 공주의 影幀이 빗물에 상하지않을까 늘 살펴 걱정하였으며, 공주의 생일에는 연회를 베풀었고, 공주의 齋日에는 직접 제사를 지냈다. 공민왕은 생시처럼 공주의 不在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민왕 22년, 공주가 유난히 그리웠던 10월, 공민왕은 제사를 지낸 뒤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능 아래에서 밤을 보낸다. 왕이 친히 정릉(正陵 ..노국공주 무덤)에 제사를 지낸 다음 술 좌석과 음악을 베출어 놓고 그날 밤 능 밑에서 잤다 <고려사 공민왕 22년10월>. 공민왕에게 있어서 노국공주가 단순한 연인만은 아니었든 듯 하다.성스럽고, 정신적 지주이었고, 어머니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이었다.
다시 1372년 10월1일의 고려사 기록이다. 공민왕의 기묘한 버릇, 그것은 바로 여장(女裝)이었다. 항상 자신을 여자 모양으로 화장하였다 <고려사 공민왕 21년10월>. 분명 기이한 모습이다.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다 정신병을 얻은 탓이라고 역사는 판단하고 있다.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다 드디어 정신병을 얻었다<고려사 공민왕 21년 10월>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그 슬픔의 깊이가 고스란히 <고려사> 속에 스며들어 있다. 노국공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길레, 그야말로 국경을 넘어, 시간을 초월하여 영혼이 통하는 사랑이었든 듯 하다.
공민왕금 恭愍王琴
충남 예산의 수덕사(修德寺)에는 공민왕의 예술적 감수성이 남달리 풍부하였음을 보여주는 그의 유품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공민왕금(恭愍王琴)"이 있다. "공민왕금"은 修德寺의 萬空스님이 高宗의 둘째 아들 이강(의친왕)으로부터 1899년 물려받은 거문고이다. 노국공주가 죽은 뒤 밤마다 슬픔을 달래려 뜯었다고하는 거문고에는 "공민왕금"이라는 금명(琴名)이 선명하다. 거문고 바닥에는 조선시대 유학자이었던 이조묵의 詩도 새겨져 있다. "공민왕이 신령스러운 오동나무를 얻어 이 거문고를 만들었으니 ......"
고려와 원나라
그렇다면 고려 왕자이었던 공민왕과 멀고 먼 원나라의 노국공주의 사랑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당시 고려가 처하고 있었던 비극적 현실 속에 그 답이 있다. 원나라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전무후무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나라의 예술은 화려하게 발달하였다. 이때 수많은 이민족(異民族)이 유입되었고, 원나라는 그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별도로 관청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몽골족은 元나라를 건국한 후, 투항한 정권의 자제들을 인질(人質)로 삼았고, 그 인질들은 주로 원나라 황제의 호위군(宿衛)이 되었다.
1441년 12살의 어린 나이에 볼모로 끌려온 어린 공민왕, 공민왕은 황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황태자의 시중을 들었다. 그러나 12살의 공민왕은 이곳에서 단지 어머니와 생이별을 강요당한 어린아이 일뿐이었다. 외롭고 두려운 볼모생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지배는 왕자를 볼모로 잡아두는데 그치지 않았다.
원나라는 고려의 왕들을 마음대로 임명하였고 또 폐위시켰다. 공민왕의 아버지와 형은 왕위를 두 번씩 주고받는 기행까지 겪었다. 즉, 아버지인 충숙왕은 1313년부터 1330년까지 재위하다가, 원나라의 命으로 아들(공민왕의 형)에게 왕위를 물려 주어야 했다. 충혜왕이다. 그러나 원나라는 다시 아버지 충숙왕을 고려의 왕으로 임명하여 1332년부터 1339년까지 在位한다. 그러다 다시 아들 충혜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하였다. 결국 공민왕의 아버지와 형은 원나라의 의지로 두 번씩 왕위를 주고받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그것은 고려의 비극이었고, 공민왕의 개인적인 원한이었다.
정략결혼 政略結婚
몽골족은 뛰어난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하였다. 그래서 몽고족이 정복한국가는 거의 멸망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고려는 멸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 역시 국가의 독립은 보장받지 못하였다. 고려의 반란을 막기 위하여 원나라는 고려의 왕과 원나라의 공주를 혼인시켰고, 그 아들을 북경으로 데려가 인질로 삼았다. 결국 몽골 공주와 결혼한 자가 고려의 왕이 되었고, 몽골 공주의 아들 된 자가 고려의 왕이 되었다.
힘들이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방법, 자연히 모계 혈통인 원나라 사람 왕자에게 왕권은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5명의 고려 왕은 모두 7명의 몽골공주와 결혼하였다. 이들은 7명의 부인 앞에서 고려의 왕이 아닌 신하로 살았다. 심지어 쿠빌라이 칸의 딸에게 장가든 충렬왕은 부인에게 맞고 살았을 정도이었다. 충렬왕이 자기(제국대장공주)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고 욕을 하고 때리기도 하였다<고려사>.
공민왕에게 원나라 공주와의 결혼은 피하고 싶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349년 공민왕은 원나라 공주 노국공주와 결혼한다. 공민왕의 적극적인 선택이었다. 이유는무엇일까?1344년 형 충혜왕이 유배 길에 오르면서 공민왕이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조카 충목왕이 오르고, 그후에도 충목왕이 서자(庶子)가 공민왕을 제치고 충정왕이 되었다.
이렇게 공민왕은 두 차례에 걸쳐 왕위 계승에 실패하였다. 실패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한계를 느꼈을 것이고, 그 이유가 원나라 황실과 부모관계를 형성하는것이라는 것 바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국공주와의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공민왕의 어머니는 고려인이었다. 공민왕에게는 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하였다.
공민왕은 두 번에 걸쳐 왕위에 오를 기회를 빼앗긴 지 불과 5개월 후, 노국공주와의 결혼을 서두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2년 뒤 공민왕은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 反元主義者인 공민왕과 원나라 공주 노국공주의 결혼, 그것은 당연히 정략결혼이었다. 하지만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천생의 인연이 되었고, 이들은 목숨을 걸고 서로를 지키게 되었다.
역경 속에 더욱 깊어지는 두 사람의 사랑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정략결혼으로 만났지만, 감성적인 코드는 일치하였다. 그림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공민왕. 그는 고려의 다른 왕들과는 기질(氣質)이 달랐다.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대신 고려의 호방한 기질과는 거리가 멀었다.공민왕은 고려라는 나라에서 사냥을 하지 않은 유일한 왕이었다. 심지어 말도 타지 않았다. 왕은 말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려사>. 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1349년 <고려사> 기록에 나타나 있다.
신하들이 노국공주에게 후궁을 들이자는 請을 하고 있었다. 이때가 결혼 11년째 이었다. 결혼하고 10년이 지나도록 공민왕은 후궁을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부부에게 아이가 없었기에 大臣들의 청은어렵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재상들이 공주가 아들이 없으니 명문집 딸로서 아들을 낳을 만한 여자를 선택할 것을 청했다 <고려사. 공민왕 8년 4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시련을 이기며 더욱돈독하여졌다.
홍건적의 난, 경상북도 安東 그리고 더 깊어지는 사랑
원나라 말기, 몽골족의 지배를 받고있던 중국 한인(漢人)들은 점점 더 가혹해지는 몽골귀족들의 전횡으로 괴로워 하고 있었다. 漢人들은 원칙적으로 중앙정부에의 진출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력 저항 뿐이었다. 이렇게 일어난 홍건적의 난(紅巾賊之亂)은 한동안 勢를 떨쳐 화북,화중 일대를 장악하기도 하였으나, 원나라의 반격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그들의 공격을 피해 고려를 공격한다.
드디어 20만명의 홍건적이 무소운 속도로 南進하여 20여 일만에 평양이 함락되고, 두 달 후 개경까지 넘어 갔을 때,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그 피난 길은 무척 험했다. 신미일, 비와 눈이 내렸다. 왕이 이천에 머물렀는데, 옷이 젖고 몸이 얼어서 섶으로 불을 피워서 몸을 녹였다<고려사. 공민왕 10년 11월>.
한 달 뒤 12월, 마침내 공민왕 일행은 安東에 도착하였다. 영호루(映湖樓)는 안동의 대표적 亭子이다. 고려 말 유학자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유학의 대학자인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의 편액이 걸려 있다. 안동에 머물던 공민왕도 영호루에 편액을 내렸다. 영호루의 편액은 공민왕의 안동 피난 시절 공민왕이 직접 쓴 것이다. 왕이 서연에 참가하셔서 "영호루"세 글자를 써서 내렸다(映湖樓 三字). <고려사 공민왕 10년 12월>
안동의 엣 이름을 딴 읍지(邑誌)인 "영가지(永嘉誌)"에는 공민왕이 安東을 도읍지로 승격시킨 이유가 기술되어 있다. 왕이 피난하여 안동에 머물 때 고을 사람들이 지극정성으로 공손하였으며, 개성을 다시 되찾는데도 안동 주민들의 도움에 크게 의지하여 왕은 안동을 다시 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공민왕이 안동을 떠날 때 " 안동이 나를 중흥시켰다 "고 이야기하고, 복주목(福州牧)을 대도호부로 승격시켰을 뿐만 아니라, 안동도호부에 대하여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이곳에는 공민왕이 안동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하사한 유물들이 남아 있다. 색실로 복숭아 꽃, 나리꽃, 무궁화, 모란 등의 꽃무늬를 수 놓은 비단, 모란꽃으로 장식한 금대(金帶)인 허리띠, 금대를 포함한 두 대의 혁과대는 관직(官職)에 많이 등용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또한 공민왕이 직접 사용하였던 은식기도 남아 있다. 은식기와 은수저는 안동 백성들의 식복(食福)을 축원하는 의미이었다. 노국공주가 사용했던 부채도 있다. 부채살이 없는 특이한 모양의 부채이다.
공민왕 일행은 안동에서 70여 일을 머물렀다. 머무는 동안 안동 사람들은 노국공주를 극진히 대접하였고, 공민왕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安東은 해마다 노국공주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며 잔치를 베풀고 있다.
그때부터 안동에 전해져 오는 "놋다리 밟기"가 있다. 놋다리밟기는 실감기, 실풀기, 놋다리의 세 가지 춤으로 구성된다. 포로나 다름없는 공민왕이 그 신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실감기와 실풀기이며, 그리고 노국공주가 안동 주민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길을 가는 것이 놋다리이다.그 유래는 이러하다. 안동에 도착한 노국공주는 개울을 건너게 되었는데, 마을의 부녀자들이 등을굽히고 무사히 건너게 했다는 것이다.
안동 피난 생활이라는 시련의 시기에 사랑은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깊어졌다. 노국공주는 안동에서 공민왕을 설득하여 말 타는 연습을 시키기도 하였다. 공민왕은 예술적감성이 풍부한 반면 고려 왕들 중 유일하게 사냥을 하지 않은 왕이 었다. 왕과 공주는 밤이면 후원에 나가서 말타기연습을하였다 <고려사>
노국공주의 죽음
노국공주와의 사랑과 거침 없는고려의 개혁, 하지만 행복한시간은 거기까지이었다. 공민왕의 末路에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1365년2월, 16년만에 첫 임신, 그러나 공주는 難産으로 인하여 위중하였다. 공주의 병이 위독하였으므로 일급 죄인까지 사면하였다(고려사>. 산달이 되면서 병이 더욱 위급해지자 공민왕은 죄인까지 사면하여 공주의 무탈(無脫)을 빌었다. 그러나 공주는 죽었다. 왕은 분향하며 단정히 앉아서 잠시도 공주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공주는 이내 죽었다. 왕은 비통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고려사. 후비열전>.... 나라를 가지고 가정을 가지는데 배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이렇게 내조의 공을 세운 이에 대해서는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노국공주 덕에 우리나라가 오늘까지 존속하게 되었다.영원히 국가를 지키고 함께 살아야 할 터인데 그만 세상을 떠났구나! 슬픈 마음은 더욱 깊어만 간다<고려사. 후비열전>
개성시 개풍군에 노국공주의 정릉이 있다. 그리고 그 곁에 공민왕의 현릉도있다. 고려시대에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유일한 쌍릉이다. 노국공주의 무덤을 조성할 때 공민왕은 쌍릉을 계획하였다. 공민왕은 陵을 지으며 또한 한 켠에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진행시켰다. 공주의 초상화를 걸어둘 전각을 짓기 위해서이다.
고려의 개혁군주로 23년, 노국공주의 남편으로 16년, 그리고 그리움에서 벗어나오지 못한 9년, 마흔 다섯 왕의 죽음은 너무 허무하였다. 공민왕은 생전의 바램대로 노국공주 곁에 잠들었다. 고려의 능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陵으로 평가받는 공민왕 무덤의 내부,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도록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쌍릉은 특별한 구조로 되어 있다. 작은 구멍이 그것...공민왕의 현릉과 노국공주의 정릉을 연결하는 통로가 있다. 두 왕릉 사이, 영혼을 연결하는 길인 것이다.
노국공주가 죽은 이후,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등용시켜 정사를 돌보았다. 신돈을 통하여 개혁정치를 이어가고자 하였으나, 신돈은 곧 타락하였다. 공민왕이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할수록 신돈의 권력은 막강해졌다. 백관들은 궁궐로 가지 않고 신돈의 집으로 출근하였고, 결국 공민왕은 신돈을 주살하였다.
공민왕이 마지막으로 의지하였던 신돈의 사망 직후, 공민왕은 자제위(自弟衛)를 설치하고, 미소년들로 이루어진 경호집단을 곁에 두었다. 공민왕은 자제위를 늘 곁에 두고, 새로 맞은 왕비조차 가까이 하지 않았다.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이 생겼다.<고려사. 공민왕 21년>
신돈 辛旽
자제위 子弟衛
자제위는 고려 후기 공민왕 때 왕의 신변에 대한 호위 겸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뜻에서 설치한 관청이다. 1372년 10월 공민왕은 공신 및 고위 관직자의 자제를 선발하여 배속시키고, 대언(代言) 김흥경(金興慶)으로 하여금 총관하게 하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뒤, 미소년을 뽑아 유희를 즐겼으며, 후사를 얻기 위하여 이들에게 자신의 비빈(妃嬪)들을 통간(通姦)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자제위를 설치한 실제 목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공민왕은 국내외의 불안한 정정으로 혼미가 거듭되던 가운데, 결국 자신이 설치한 자제위 소속 홍륜(洪倫) 등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고려사 세가 43 공민왕 21년10월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자제위를 두어 나이 어린 미소년들을 뽑아 이에 예속시켰다. 왕의 천성이 色을 즐겨하지 않았고, 또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므로, 노국공주의 생시에도 행차함이 드물었다. 공주가 죽자 비록 여러 비(妃)를 맞이하여 이들을 별궁에 두었으나 가까이 하지 못하고 밤낮으로 슬피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심질(心疾)을 이루었다. 항상 스스로 화장하여 부인의 모양을 하고, 먼저 내비(內婢) 중 나이 어린 자를 방안에 들어오게 하여 보자기로 그 얼굴을 덮고는 金興慶 및 洪倫의 무리를 불러 亂行하게 하였다. 왕은 옆방에서 구멍으로 들여다 보다가 은근히 마음이 동하게 되면 곧 홍륜 등을 데리고 왕의 침실로 들어가 왕에게 淫幸을 하기를 남녀간에 하듯이 하여, 번갈아 數十人을 치루고서야 그치곤 하였다.
과연 자제위는 공민왕의 변태적인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조직이었을까? 사실 고려 공민왕代 이후의 고려사 기록은 매우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공민왕 이후의 왕들인 우왕(禑王), 창왕(昌王)은 王氏의 후손이 아니라 신돈(辛旽)의 자식이라는 "비왕설(非王說)"을 기반으로 역사서가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돈의 등장 이후 고려왕들은 엽기적인 성적 방종의 타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갑작스러운 즉위 당시부터 출생의 정통성에 약점을 드러냈지만, 위화도 회군 후 일정 시점까지는 공민왕의 자식임이 의심되지 않았던 禑王은 한순간에 "잡놈의 자식"이 되어, 그에 걸맞는 수준의 패륜을 저지르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나마 우왕과 창왕의 기록들은 왕씨 출신의 정통 왕이 아니라며 고려사의 왕가편(本紀)이 아닌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나랏일은 제쳐두고 유흥과 사냥에 탐닉하고, 길을 지나다가 괜한 사람을 때려죽이는가 하면 어염집 여인들을 덮치는 등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 일정 정도 실제 사실을 바탕으로 한것으로 여겨지지만, 악의적인 왜곡과 진실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자제위의 성격에 대하여도 두 가지 입장이 있다. 첫째는 고려사의 기록에 충실한 견해이다. 공민왕의 노국공주와 후사(後嗣)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은 인간적인 미련에서 출발하여 결국 질병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즉, 자제위는 명칭상으로는 왕의 경호를 위한 귀족의 자제집단이지만, 사실은 왕의 동성애를 만족시키기 위한 기관으로 공민왕은 동성연애자이었고, 관음증과 사디즘적인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자제위에 대한 다른 견해는, 자제위는 元,明교체기의 혼란한 국제상황 하에서 왕권강화를 위한 공민왕의 후반기 개혁정치 기구로 이해하는 것이다. 당시는 辛旽정권 몰락 후 다시 권력을 장악한 무장세력은 倭寇 침입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권력기반을 강화하면서 정국을 주도하며, 공민왕의 왕권을 제약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반면 신진사대부들은 공민왕의 왕권을 뒷받침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처지이었다.이같은 정치상황 속에서 공민왕은 자제위를 설치하는 등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明나라의 새로운 압력에 대비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공민왕의 죽음
1374년 9월, 기록에 의하면 공민왕은 홍륜(洪倫), 최만생(崔萬生) 등 자제위 소속의 미소년들을 궁중에 출입하게 하여 그들과 동성애를 즐겼다는 것이다. 홍륜은 당시 공민왕의 후궁이었던 익비(翼妃)와 간통하였는데, 이를 최만생은 은밀하게 공민왕에게 보고하였다. 공민왕은 " 이 사실을 아는자를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말했다. 최만생은 자신까지 죽게될까 두려워 홍륜에게 이 일을 고해바쳤다. 결국 공민왕은 홍윤,권진,홍관,한안, 최만생에 의하여 시해당하였다.
홍윤과 최만생은 공민왕에게 수 차례 칼을 난자하여 시해하였다. 그런데 칼질을 한자들이 "밖에서 적이 들어왔다"고 부르짖었는데도, 가까이에서 호위하던 위사들은 겁을 먹고 움직이지 않았다. 재상을 비롯한 신하들도 변고를 들었음에도 들어오는 자가 없었다. 오직 내시 이강달(李剛達)만이 사실을 알았는데 그 또한 비밀에 붙였다. 李剛達은 공민왕이 죽었을 때 배관이 모두 도망갔으나, 혼자 침전에 들어가 왕이 편치 못하다고 속이고 배관의 출입을 금하였다. 새벽에 여명태후(黎明太后)가 오자 상의하여 왕명으로 재상들을 불러 형세를 바로 잡았고, 홍륜등의 체포에 기여하였다.
다음 날 임금의 명령이라 하여 이인임(이인임), 경복흥, 안사기 등을 소집하여 사태 수습을 논하였다. 이인임은 처음에는 승려인 신조(신조)를 의심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다 병풍과 최만생의 옷에 묻은 피를 보고 그를 추궁하여 사태의 진상이 드러났다. 홍륜 등 일당은 체포되어 사지가 찢겨지는 거열(車列)형을 당하고 三族이 멸해지는 극형을 받았다.
공민왕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견해
공민왕 죽음의 배경에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가 여자에 관심이 잃은공민왕이 후계 구도를 위해 자제위 소속 미소년들로 하여금 후궁과 관계를 갖게 하고, 임신을한 후 자기 아들로 속이려고 사실을 아는 관련인들을 죽이려 했는데, 내관 최만생이 이 사실을 자제위에 알려 최만생과 자제위 소속 홍륜등이 먼저 공민왕을 살해하였다는 설이다.
당시 후궁으로는 혜비, 익비, 정비, 신비가 있었는데, 공민왕이 처소를 찾지않자 후사기 끊길 위기에 처하였고, 공민왕은 자제위의 홍륜(洪倫) 등과 함께 후궁 처소에 들어가 합방을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혜비, 정비,신비는 끝까지 거절하며 지조를 지킨 반면, 翼妃는 공민왕이 칼로 위협하자 공민왕이 지켜보는가운데 자제위의 홍륜 등과 동침을하였고, 이같은 일이 반복되다 임신을 하게 된다. 그러자왕은 그아이가 자신의 아이로 하기 위하여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측근들인 내관 최만생과 자제위 잚은 소년들을 모조리 죽여 입막음을 하려 했는데, 이 사실을 눈치 챈 최만생이 자제위에 알리게 되고 자신들의 목숨을 살리고자 침소에서 자고 있는 공민왕을 시해하였다는 내용이다.
두 번째 설은 처음에는 미소년들이었던 자제위 소년들이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궐내에서 기거하며 왕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그 중 홍륜(洪倫)이라는 자가 혈기왕성하여 마침 독수공방 중이던 익비(翼妃)와 눈이 맞아서 간통을 하기에 이르렀고 익비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공민왕에게 고한 사람이 어의(御醫)와 내관 최만생이었는데, 왕이 궐내에서 후궁이 간통한 사실에 수치심으로 몸을 떨며 이 치욕스러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질까 두려워 최만생과 御醫, 자제위 소속 소년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를 눈치 챈 최만생이 자제위 소년들과 함께 공민왕을 시해하였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아마도 첫번째 설은 공민왕을 부도덕한 패륜아의 관점에서 본 것이고, 두번째 설은 좀더 공민왕의 입장에서 우호적으로 나온 설로 보인다. 어떤 것이 진실이라고 누가 말 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이미 지나갔고, 해석은 시대에 따라, 관점에 따라 바뀌는 것이다.
공민왕의 개혁, 자주독립
원나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주국가 고려를 건설하고자 하는 공민왕의 꿈은 즉위와 함께 실현되기 시작하였다. 10년만에 귀국한 공민왕은 먼저 100여 년간에 이어졌던 풍습부터 바로잡았다. 스스로 먼저 변발(변발)을 풀고 몽골복을 벗었다<고려사절요.공민왕 원년>.
풍습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우리 고유의 것으로 알고 있는 전통혼례에도 몽골풍습이 남아있다. 신부의 족도리나 연지,곤지가 그렇다. 풍속이 섞이면 정착하기 마련이다. 공민왕은 또한 원나라의 연호(年號) 사용을 금지하였다(정지정년호. 停止正年號). 그리고 고려에 설치된 원나라의 관청인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격파하고, 잃어버린 국방 영토를 되찾는 것이었다. 고려의 땅을 수복하는데 불과 두 달이 걸렸을 뿐이다. 본래 우리 영토이었는데, 고종 무오년에 원나라에 함몰된 뒤, 무려 99년만에 수복한 것이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5년7월> 북벌(北伐)에 대한 공민왕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고구려의 옛 땅까지 수복하겠다고 결심하였고, 그 각오는 마침내 요동(遼東)을 점령하게 되었다. 진습요역(進襲遼域)..<고려사절요>.요동이라고 하는 지역은 예전부터 고려의 영토라 인식되어 왔고, 元明交替期에 국제질서의 틈바구니를 공민왕은 적절하게 이용하였고 그리하여 요동지방을 정벌한 것이다.
쌍성총관부는 고려 고종 45년(1258)에 중국 원나라가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인 화주(和州) 이북을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아이다. 공민왕 5년(1356)에 동북병마사 유인우가 이끄는 고려 군대가 탈환하여 이를 폐하고 화주목(和州牧)을 두었다. 원나라 지배에 들어간지 99년만에 옛 영토를 회복한 것이다.
공민왕의 목표는 한가지이었다. "자주독립국가 고려". 노국공주에게는 자신의 조국을 배신하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공민왕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이자 조력자이었다. 공민왕의 거침없는 개혁에 대하여 기득권층의 반발은 극심하였다. 전답으로 몰수하고 조세를 징수하자 오히려 이 제도의 폐지를 요구하였다.(수기전잉추루년지조. 청파... 收其田仍追累年之租 請罷)
공민왕은 저항하는 권문세족에게 이렇게 응수하였다. 좀도둑이 밤에 다니다가 달 밝음을 미워하는 격이구나.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재위 내내 지속되었다. 무려 네 번에 걸쳐 개혁조치를 발표하였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고 백성들이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고 노비 신분을 회복시켜주는 등 파격적인 정책을 펼쳐 나갔다. 노국공주와의 사랑, 그리고 공민왕의 거침없는 고려의 개혁,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여기까지 이었다. 공민왕의 末路에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1365년 2월 노국공주가 첫 임신하고 難産 끝에 죽은 것이다.
공민왕사당(恭愍王祠堂)은 서울 마포구 창전동 산2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초, 이곳 일대에 양곡보관 창고를 지르려 할 때 동네 노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나, " 이곳은 내가 자주 찾던 곳이니 당(堂)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준다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질 것이며, 만일 이를 실천하지 않는다면매년 사고가 날 것이다 "라며 계시를 주었는데, 노인이 과연 이자리에 와보니 공민왕 부부를 그린 영정이 바위 밑 함에서 나왔으므로 그 뜻에 따라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사당을 완성한 후 매년 10월1일 밤 12시에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놨는데 혹시라도 제사를 소홀히 하거나 불경스러룰 때면 창고에 화재가 나거나, 곡식을 실은 배가 풍랑에 파손되는 등 재난이 뒤따랐다. 사당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 그리고 최영(崔瑩)장군, 그 외 왕자, 공주, 옹주의 화상이 걸려있다. 왜구(倭寇)를 매우 싫어했던 공민왕이기 때문에 사당 근처에 일본인이 얼씬거리는 것도 용서하지 못해서 개항 무렵과 대한제국 시절에는 물론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인들이 근처에 오면 반드시 해코지를 당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는 아예 근접조차 하지 않았다.
조선 강안에 전해오는 이야기
"조선 강안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쓴 일본인 토목기사 장목(長木)은 우연히 이곳 사당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창자가 뒤틀리고 온몸에서 식은 땀이 나며,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잠시 기절한 상태에 있을 때 수염을 기르고 금색을 입은 老人이 나타나 뺨을 치면서 썩 물러가라는 호통을 하는 바람에 순간 정신이 들어 사방을 살펴보니 동행하였던 한국인 보조기사들이 자신을 응급조치한 후 병원으로 데리고 가고 있었다고 한다. 병원에서 진찰 결과 과로로 인한 급성맹장염이므로 수술 후 요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急病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병원치료를 받았으나, 기절상태에서 나타난 노인의 얼굴을 잊을 수 없어 몇 달 후 다시 사당을 찾아가자 역시 똑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놀란 장목(長木)은 병원에 다시 입원한 후에야 사당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힘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주변의 일본인들에게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말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예술가, 공민왕
고려시대에는 수많은 화가가 배출되었는데, 국왕 가운데 충선왕과 공민왕이 화가로서 품격이 높았다고 한다. 공민왕이 그린 그림은 많았으나, 현존하는 것은 천산대렵도의 일부이다. 공민왕이 손수 그린 노국공주의 초상화는 조선 세종의 명령에 의해 불태워졌다.
다음은 공민왕의 그림에 대한 용재총화(庸齋叢話)의 기록이다. 물건의 형상을 묘사함에는 하늘이 준 재주가 아니면 정미할 수가 없고 한 물건에 정미하여도 모든 물건에 정미하기는 더욱 어렵다. 우리나라에는 명화가 매우 적다. 근대로부터 이것을 보면 공민왕의 화격이 매우 높다. 지금 도화서에 소장된 노국공주의 진영(眞影)과 흥덕사에 있는 석가출산상은 모두 공민왕이 손수 그린 그림이며, 간혹 큰부자집에 산수를 그린것이 있는데 비할 바 없이 뛰어나다.
천산대렵도 天山大獵圖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는 그림이다. 비단에 채색하였으며, 크기는 24.5×21.8cm이다. 백산(白山) 또는 설산(雪山)이라고도 불리는 천선(天山)에서의 수렵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곤륜산(崑崙山)의 북쪽 자락인 음산(陰山)에서의 사냥모습을 표현하였다는 뜻에서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라고도 지칭되고 있다.
본래는 옆으로 길다란 두루마리 그림이었던 것이 조각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3쪽이 전해지고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도 "수렵도(獸獵圖)" 잔편 소폭 1점이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칭(傳稱.. 누구의 작품으로 전해지는)되는 것이 전해지고 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작품들과는 솜씨가 틀려 동일인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한다.
힘차게 말을 달리는 기마인물의 모습이 가늘고 섬세하면서도 활기에 찬 선으로 기운 생동하게 묘사되어 있다. 인불들의 옷과 말장식들에 가해진 채색도 훌륭하다. 본래 수렵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 미술에서 종종 묘사되어 왔던 것인데, 고려시대에는 전통과 몽고의 영향을 받아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양도 二羊圖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二羊圖.. 즉 양 두 마리의 그림이다. 털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그렸다. 그런데 당시 羊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묘사된 형상을 추측하여 상상으로 그렸다고 한다.
영주 부석사의 또 다른 특징으로 '무량수전"이라는 편액이 중국식으로 적혀 있고, 뒷편 조사당의 편액 또한 글씨를 세로로 쓰는 중국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 편액을 공민왕이 썼다고 전해오는데, 공민왕이 원나라에서 성장하였으므로 그 양식으로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전공민왕필염제신상 傳恭愍王廉悌臣像
보물 제10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염제신(廉悌臣)은 고려말의 重臣으로 공민왕의 장인이다. 이 그림은 현존하는 예가 극히 드문 고려말의 초상화로 안향상(安珦像)이나 이제현상(李齊賢像)에서와 같은 우안묘사(右顔描寫), 평정건(平頂巾 ..모자)의 착용 등이 주목되며, 단령(團領)의 당초문(唐草紋)은 특이하고 필치가 섬세하여 작품의 품격이 뛰어나 고려시대 초상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희귀한 작품이다.
염제신은 공민왕의 친원파 숙청을 원나라에 납득시켰고, 공민왕 19년에는 오로산성 공격에 성공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이에 공민왕은 그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 하사하고, 그 딸을 비로 들였는데, 이 그림이 그 때 하사한 초상화인지는 알 수 없다.
목은문고(牧隱文藁) 권15의 염제신비명(廉悌臣碑銘)에 보이는 "공민왕이 친히 그려 하사하였다.(親圖形賜之)..현릉에서 친히 초상화를 그려주니 위대한 공덕이 단청에 빛나도다 (玄陵親圖其形豊功德煥乎丹靑)"이라는 기록이 있어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