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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肉食)에 관한 생각 / 이자랑 박사
부처님은 육식을 거부하지 않았다
올바른 인격, 청정함서 비롯됐기 때문
요즈음 웰빙, 혹은 참살이라는 말의 등장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선호하고 있다.
가정의 식탁에도 신선한 야채가 풍성하게 올려지고,
곳곳에 생긴 채식 뷔페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한때는 단백질의 중요 공급원으로서 섭취가 권장되던 고기나 생선이지만,
지나친 섭취는 건강에 해롭다는, 아니 가능하면 완전히 끊고
철저한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하는 것이 건강에 유익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제 육식은 일반사람들에게도
고민스러운 먹거리가 된 것 같다.
하물며 불교도의 경우에는 불살생이나 자비, 불성 등과 같은
불교 교리와 정면으로 맞물려 있어 육식에 대해
더 큰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육식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어떤 것일까?
불교는 육식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종교일까?
거의 우문에 가깝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불교에서 육식 문제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어
한 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대승경전을 주로 접하며 그 가르침에 익숙해진
한국의 불교도에게 있어 육식은 용납하기 어려운 행위인 한편,
초기불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스리랑카나 미얀마, 태국 등과 같은
남방 불교권에서는 육식이 허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초기불교경전에서는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육식을 명확히 금지하는 기술은 발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율장에서도 ‘세 가지 종류의 정육(淨肉)’이라 하여
보시된 고기가 자신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거나 듣거나 의심이 가는 것이 아니라면 먹어도 된다는
제한적인 규정이 보일 뿐, 적극적인 금지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그 생물의 죽음에 관여하고 있는가 아닌가가 문제이지,
육식 자체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정을 둘러싸고, 초기불교 역시 육식을 금지하는 입장이었지만,
당시 탁발이나 청식에 의존해서 식사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불교승단은 음식을 취사선택할 자유를 갖지 못했고,
그 결과 육식은 불가피했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만약 부처님께서 철저히 육식을 거부하는 입장이셨다면,
‘우리 불교수행자들은 육식을 하지 않습니다.
고기나 생선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절대 먹지 않습니다.’라고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일반사회에 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육식은 맛나고 영양가 많은 미식(美食)으로 생각되었다.
출가수행자들이 육식을 거부한다고 해서 까다롭다고
비난받을 사회 분위기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우리는 불교수행자의 육식 행위가
당시의 고행주의자들이나 일반인들,
심지어는 불교교단 내부에서조차 종종 도마에 올라
비난당하는 경우를 경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 육식을 철저히 거부하지 않으셨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숫따니빠따』의「생취경(生臭經)」에 의하면, 당시의 고행주의자들은
고기나 생선과 같은 비린내 나는 음식으로 인해 그 사람이 부정해진다고 생각하며
육식을 하는 불교도들을 비난했는데,
이에 대해 깟싸빠 부처님은 ‘산 것을 죽이고, 때리고, 자르고,
묶으며, 훔치고,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속이고, 그릇된 것을 배우고,
남의 아내와 가까이 하는 것. 이것이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니다.
거칠고 난폭하게 험담을 하고, 친구를 배신하며, 무자비하고,
몹시 오만하며, 인색하여 베풀 줄 모르는 것.
이것이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니다’라고 설하셨다고 한다.
즉, 불교는 처음부터 육식 자체를 철저히 거부하는 종교는 아니었으며,
그 배경에는 그 사람의 인격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음식물이 아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청정하고 올바른 행동이라는 강한 신념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육식, 고대 사회서 美食으로 분류
‘사치’라는 비판이 금기문화 형성
초기불교는 분명 육식을 허용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부파불교에 이르러
점차 육식에 대한 부분적인 제한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대승불교에서는 특히 여래장계의 경전을 중심으로
육식을 완전히 금지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인도불교의 역사에서 나타난
육식에 관한 이와 같은 입장 변화, 그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부파불교에서 나타난 육식 제한의 입장부터 보자.
현존하는 각 부파의 율장(律藏)을 보면,
육식에 대한 태도 변화가 흥미롭게 드러난다.
물론 이 시대는 초기불교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기본적으로 육식을 허용하는 입장이었다.
단, 여러 가지 면에서 조금씩 제한되어 가는 경향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불교승단이 당시 일반사회의 눈이나 평판을 의식한
결과라는 점에서 그 사회적 배경에 주목하게 된다.
당시의 일반사회에서 고기나 생선은 꿀이나 기름, 연유 등과
더불어 맛나고 영양가 많은 고급 음식, 즉 미식(美食)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므로 불교수행자들이 병과 같은 특별한 이유 없이
이런 미식을 먹는 것에 대해 일반인들은 사치스럽다고 비판하곤 했다.
아마도 이런 비판이 불교교단의 육식에 대한 태도 변화에
조금씩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바일제법 제39조‘색미식계(索美食戒)’는
병들지 않은 비구가 자신을 위해 미식을 구해 먹는 것을
금지하는 조문인데, 이 조문의 마지막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묘한 기술이 존재한다.
“병든 자가 아플 때〔미식을〕구한 후,
건강해진 후에 먹는 것은 무죄이다.”
이것은 이 조문이 아픈 자의 병 회복이라는 문제보다,
일반사회로부터 고기를 얻을 당시 그들의 눈에
불교수행자가 어떻게 비추어질 것인가 라는 문제를
더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생육(生肉)에 관한 『사분율』의 규정으로부터도
이런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어떤 스님이 정신병에 걸려
생육을 먹고 생혈을 마셔 병을 고쳤다.
이 사실을 전해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앞으로 이런 경우에는
숨겨진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셨다고 한다.
이 기술들은 당시 불교승단을 둘러싼 일반사회가 고기를
매우 귀중한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자신들이 보시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수행자들이 스스로 구해 먹는 행위를
바람직하지 못하게 여기는 풍토였음을 암시한다.
또, 식용고기의 종류도 제한되어 간다. 사람, 말, 코끼리, 뱀,
개, 사자, 호랑이, 표범, 곰, 하이에나, 돼지 등의 고기가
다양한 이유로 금지된다.
예를 들어, 코끼리 고기는 왕의 재산이므로
만약 불교수행자들이 코끼리 고기를 먹는다면
왕이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반인들의 비판이 계기가 되었으며,
사자나 호랑이, 표범 등과 같은 맹수는
자신들의 고기 냄새를 맡게 되면 공격하는 성향이 있다고 하여
안전상 금지된다.
그런데 이 가운데 특히 흥미로운 것은
개고기의 금지에 관한 『십송률』의 기술이다.
이 율에서는“기근이 들었을 때,
신분이 낮은 천한 자들이 모두 개고기를 먹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만일 비구들이 고귀한 사람에게 가면 비난받을 행위’라며 금지하셨다”고 한다.
코끼리고기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입장이 다른 율에서 확인된다.
원래 낮은 계급 사람들과의 접촉이나 그들로부터의
고기 보시 등을 꺼리지 않던 불교승단이지만,
점차 강력해진 힌두문화의 영향으로 일반사회의 잣대를 의식하고
이로 인해 육식에 대한 입장에 동요가 발생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로부터 부파불교에 이르기까지
육식 허용이라는 기본 입장은 유지된다.
단, 당시 승단을 둘러싸고 있던 일반사회의 시선이나 평가를 의식하여
여러 가지 규정을 추가해 갈 뿐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대승불교의 발생과 더불어
전면적인 육식 금지 및 그 이론적 바탕을 제공하는 기반이 된다.
불교 육식거부, 대승불교서 비롯
자비사상-사회흐름 반영된 결과
육식에 여러 가지 제한을 가하면서도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던 부파교단과는 달리,
대승불교에서는 육식 금지를 설하는 경전들이 다수 등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열반경』, 『능가경』, 『범망경』등은
단호하게 육식 금지를 주장하는 대표 경전들이다.
『열반경』에서는 탁발한 음식에 고기가 섞여 있다면
물로 씻어 고기를 제거하고 먹어야 하며,
너무 많은 고기가 들어 있을 경우에는 받지 말아야 한다고 설한다.
이는 분명 초기불교나 부파불교의 입장과 상반되는 것으로,
육식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엿볼 수 있다.
『능가경』에서도‘성스러운 자는 보통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지 않으니,
하물며 부적당한 고기나 피로 물든 음식을 먹겠느냐’고 하며,
나아가 ‘각각의 생존에 있어 일체중생이 친족, 권속이라는 생각을 품고
일체중생을 자식처럼 생각하는 것을 수행하기 위해,
자비를 본질로 하는 보살은 모든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혹은‘모든 생류를 공포에 떨어뜨리므로
자비로운 마음을 원하는 유가행자인 보살은
모든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축생에 대한 연민과 자비로부터 육식을 삼가야 함을 설한다.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범망경』과 같은
대승계경에서는 보살이 지켜야 할 48경계 가운데 하나로
불식육계(不食肉戒)가 제정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대승경전에서 육식을 단호하게 금지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학자들은 주로 불교교단 외부로부터의 영향과
내부적 원인의 두 가지 점을 지적한다.
외부의 영향이란, 대승불교 발생 당시 인도사회가 갖고 있던
육식에 대한 생각을 불교교단이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며,
내부적 원인이란 불교교단 내부에서 발생한 교리의 발전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얽혀 있어 어느 것이
좀 더 본질적인가 판단하기 어렵지만,
이미 모든 부파의 율장에서 이른 시기부터
육식에 대한 제한을 두는 움직임이 확인되며,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일반사회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라는 점을
고려할 때,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좀 더 본질적인
방아쇠 역할을 했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대승불교의 등장을 전후로 한 시기는 힌두교가 기반을 다지며
카스트제도를 보다 확고하게 안정시켜 간 시기였다.
육식은 부정하다는 생각과 함께 바라문들은 육식을 기피하고
채식을 선호했으며, 고기를 만지거나 먹는 사람들은
주로 불가촉민인 챤달라와 같은 낮은 계급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바라문들은 부정하다는 이유로 그들과의 접촉을 꺼렸다.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하물며
출가자들이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사회적 비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대승불교도들은 이런 사회적 흐름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그 결과 전면적인 육식 금지를 주장하고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율장에 등장하는 삼종정육(三種淨肉)이라는 표현은 물론이거니와,
『열반경』에서 고기를 물로 씻어 제거한다는 등의 내용이
당시 힌두교가 갖고 있던 정(淨)·부정(不淨)이라는 관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이미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이다.
이런 움직임과 더불어, 불교교단 내부에서는
대승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다양한 교리가 발전하게 된다.
『열반경』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즉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존재한다는 가르침이 등장했고,
『능가경』에서는 생류에 대한 적극적인 자비의 마음이 강조된다.
그리고『범망경』에서는 육식을 하는 자는
대자비의 불성종자(佛性種子)를 끊는 것이며
한량없는 죄를 짓는 일이라고 하여, 불식육계가 제정된다.
중생 구제를 최대의 목표로 삼고 정진하는 대승불교도에게 있어
대사회적으로나 교단 내부에서나, 기존의 전통승단이 지니고 있던
육식 허용이라는 입장을 더 이상 고수하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극단적 육식 부정은 오히려 비불교적
중도 관점서 스스로 절제할 줄 알아야
한국 불교교단에서 육식 문제가 곧잘 논쟁거리로 떠오르는 것을 보며,
예나 지금이나 육식은 불교도들에게 있어
큰 화두거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3회에 걸쳐 살펴 본 바와 같이,
육식은 인도불교의 역사에서만도 매우 복잡한 변화 과정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육식이라는 행위가 그 만큼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면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불교도들은
육식을 해야 하는 것일까 말아야 하는 것일까?
가능하다면 육식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가축류가
어떤 환경에서 길러지고 있는지 관심 있게 들여다본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심으로 육식을 피하고 싶어질 것이다.
좁은 새장 안에서 평생 날개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한 채
서로 얽히고설켜 각종 항생제로 고통 받으며 살다가 죽어가는 닭들,
근육이 생겨 질긴 고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평생 좁은 우리 안에 갇혀 살며, 풀은 커녕 성장속도를 높이는
약물이 잔뜩 섞인 수입배합사료를 먹다
결국 잔인하게 최악의 공포 속에서 도살당하는 소들,
이어 도살당할 소들은 그 과정을 뒤에서 지켜보며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생명의 존엄성 같은 것은 논할 여지도 없는 상황이다.
이런 환경에서 길러지다 죽어가는 가축들은
상상을 초월한 분노와 한을 몸속에 축적하게 되고,
이것은 이들을 먹는 인간의 몸으로 고스란히 전달될 것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최근에는 소의 트림이 지구 온난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지적되고 있다.
위가 4개나 되는 소는 먹은 것을 위를 통해 계속 분해하고
다시 입으로 되새김질하며 소화시키게 되는데,
이때 장 속에 있는 미생물들이 음식물을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이상 단백질 분해를 일으켜 메탄가스가 가득한
방귀와 트림을 하게 된다고 한다.
대량 사육되어지는 소가 내뿜는 메탄가스가
지구 온난화의 원인 중 20%를 차지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대량으로 사육되는 가축의 문제는 이제 인류의 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은 수준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 동안 자신의 미각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분별하게 육식을 탐하며
자연의 섭리를 무시해 온 인간들에게
이제 거대한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시점에서 어찌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주장하고,
모든 생물에 대한 자비와 불성을 외치는 불교도가
육식에 탐닉할 수 있겠는가.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반드시 지켜야 할 불살생계는
다른 생명에 대한 연민과 자비를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진정한 실천이 이루어진다.
미각의 즐거움에 빠져 무분별하게 입속으로 집어넣는
고기 덩어리에 맺힌 그 가축의 고통과 한을 떠올리며
측은함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미 육식을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고민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것이다.
한편, 부처님께서 육식을 적극적으로 금지하지 않으셨던 이유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초기경전을 통해 보는 한,
부처님께서는 물론 육식을 장려하지도 않으셨지만,
또 적극적으로 금지하지도 않으셨다.
이것은 극단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중도(中道)적 삶을 살아갈 것을
최상으로 여기신 부처님으로서는 당연한 가르침이다.
육식에 대한 지나친 죄악감, 이것은 또 하나의 집착인 것이다.
집착은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초래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절제된 몸과 마음이다.
계의 정신을 올바르게 알고 이를 잘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육식을 자신의 입을 만족시키고 배를 채우는
일종의 먹거리로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의 행복을 위해 적절하고도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쿄대 외국인 특별연구원
2007. 9. 5.
출처: 화엄경보현행원(부사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