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즐거움 또는 육체적 쾌락
만약 불안 때문에 나의 대장에 통증이 생기면, 그 때는 그 기관이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기능하는 몸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 기관은 의식과 어떤 특징 형태의 표현과 연결고리가 있는 것이다. 프로이드의 유명한 동료로서 헝가리 출신 산도르 페렌치는 몸의 여러 부분이 나름대로 ‘기관 에로티시즘’을 지닌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의 말뜻을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가 말하는 것은 각 기관이 나름대로 고유한 생명을 지니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두고 성격이 스스로의 활동에 즐거움을 누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의 대장이 편치 않을 때, 그 기관이 불평하는 것을 내가 주목할 수 있었다면, 무엇이 그것을 불편하게 즉, ‘편찮게’ 만들었는가를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몸의 이미지는 꿈속의 이미지와 같다. 나의 옆구리를 건드리면, 정글이 튀어나온다. 의사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몸에 대하여 ‘인지적 지도’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몸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하며, 병이 들면 어떤 일이 생길지에 대해서도 상상을 한다. 우리가 오로지 전문가의 견해만을 원하면서 한 목소리를 내는 의미만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실상은 전문가들의 견해도 환자들의 생각만큼이나 다분히 환상적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질병에 대한 환자의 상상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히포콘드리아라고 하는 우울증도 병든 영혼의 진정한 표현으로서 진지하게 다뤄질 수도 있다.
페렌치의 용어로서 “기관 에로티시즘”이 암시하는바, 몸의 부분들이 기능할 뿐 아니라, 그들 나름으로 활동하는 것을 동시에 즐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관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즐기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페렌치는 우리가 몸과 기관에 대한 생각과 그 신화적인 기반을 수행에서 즐거움으로 바꿀 것을 권한다. 내가 내 자신의 신장과 인터뷰하는 상상해 볼 수 있다. 긴장을 좀 풀고 쉬고 있는가? 자신의 활동을 오늘 즐기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혹시라도 신장이 의기소침해지도록 하고 있지는 않는가?
질병(disease)이란 말은 “팔꿈치가 긴장을 풀고 편히 쉴 수 있는 위치에 놓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편안’은 라틴어 ansatus에서 왔는데, “손잡이가 있다” 또는 “양손을 허리에 댄 채 팔꿈치를 펴고 있다”는 것처럼 긴장을 풀고 편안한 자세이든가 적어도 일을 하고 있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편찮음(질병)이란 팔꿈치가 없거나 팔꿈치를 놓은 자리가 없음을 뜻한다. 편안은 즐거움의 한 형태요, 편찮음은 즐거움의 상실이다. 질병 전문가는 진단할 때 즐거움의 문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삶을 즐기고 있는가? 즐겁지 않은 부위가 어딘가? 어디선가 즐거움과 다투고 있는가 아니면, 몸의 어떤 부분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는가? 철학사가 보여주는 괄목할 만한 사실이 있는데, 언제라도 영혼의 자리매김이 관심의 중심이 되면, 즐거움은 가장 탁월한 논의의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호기심이 생길 만큼 흥미로운 것은 철학자들의 글을 보면, 즐거움이 영혼에 매여 있을 때, 그것은 억제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검소한 삶을 살면서도 즐거움(쾌락)의 철학을 가르쳤다. 피치노는 젊은 시절에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명시적으로 지지하였는데, (나중에는 그대로 살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그것을 터놓고 말하지는 않았고) 여행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다른 모든 소유보다도 친구들과 책을 보물처럼 귀중히 여겼다. 그의 플로렌스 아카데미의 모토는 “현재 속의 쾌락”이라고 쓰인 깃발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편지 가운데서 에피큐리안적인 충고를 한 일이 있다. 즉, “명상이 즐거움보다 앞서 나가지도 말고, 조금이라도 처지지 않게 하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질병이 단순히 신체적 현상이 아니고 사람과 세계의 한 조건으로 봐야할 뿐 아니라 몸이 즐거움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즐거움이 반드시 감각의 만족이나 새로운 경험을 치열하게 좇는 것이나 소유나 여흥 같은 것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쾌락주의자는 영혼에 집중하면서 즐거움을 찾는 데 열중하기 때문에 그렇게 강박증적일 수는 없다. 만약에 페레치의 기관 에로티시즘과 쾌락주의적인 억제를 한데 묶어 놓는다면, 우리는 온종일 거슬리는 소리나 유선방송 같은데서 터져 나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귀가 아프도록 고통을 당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오염을 생각하면 화학적 독성을 떠올리지만, 영혼은 귀를 통하여 독이 스며들 수 있다. 우리는 향기나 방향의 가치에 대해서도 똑같이 의식할 필요도 있다. 피치노는 세계 속에 영혼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강력한 방법으로서 꽃과 양념의 고급문화를 권고하였다.
현재 우리 가운데 흔한 질병은 문화적으로 마비시키는 상황 속에서 몸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라 상상해볼 수도 있다. 위가 냉동식품이나 밀가루 음식을 즐길 수가 없다. 목뒷덜미가 폴리에스테에 대하여 불평한다. 말은 재미있는 곳에 가서 걷는 시간이 모자라서 지루해 죽을 지경이다. 뇌는 알고 보면 기껏 컴퓨터로 묘사되는 것 때문에 의기소침해지고, 심장은 펌프로 취급당하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요즘은 분풀이를 할 기회도 좀처럼 없고, 간이 더 이상은 열정의 자리가 아니다. 이 모든 고상하고, 풍부하게 시적인 기관들이 의미와 능력으로 가득 차 있는데 비하여, 기능으로만 여겨져 왔다.
모르긴 하지만, 몸을 이토록 상상력의 빈곤으로 간주하는 문화는 아마 우리가 유일할 것이다. 또한 우리 자신의 역사를 보더라도, 우리가 사는 시대가 몸과 질병의 표현 양태로부터 미스테리를 쫓아내버린 유일한 시대일 것이다. 16세기에 파라셀소스는 의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였다. 즉, “의사는 모름지기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의 지식에 속해야 마땅하고, 그는 질병들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의사가 아닐지라도 증상을 보고 인정할 수 있는 것과 똑같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의사가 되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의사가 되는 것은 오로지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형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영향을 끼치고 있는 질병을 알 때이다.”
이와 같은 파라셀소스의 말은 현대 의학의 상황에 적용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영향을 끼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현미경이나 X-레이로 보이기 때문이다. 의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문자로 나타내며 해석한다. 현대의학은 현미경이 질병의 뿌리를 드러내준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미경은 내부적으로 더 깊숙이 들여다보지 못한다. 파라셀소스적인 의사라면, 감성, 생각, 개인사, 관계, 그리움, 두려움, 욕망 등등,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질병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요인들을 고려해야 한다. 호머의 일리아드 제 5권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 속으로 깊숙이 우리를 끌어들이는 상처에 대한 묘사를 찾아 볼 수 있다. 격렬한 정쟁의 와중에서는, 심지어 신들도 상처를 입는다. 아프로디테는 손을 얻어맞고, 헤라의 가슴은 촉이 세 개짜리의 화살을 맞고, 하데스 또한 화살을 맞는다. 이 책은 때로 “상처받은 신들의 노래”로 불린다.
신이 상처를 입었을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흔히 인용되는 것처럼 융은 말하기를 우리가 병을 앓게 되면, 그 신들이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이 말을 바꿔서 신들이 스스로 우리의 상처를 아파하며 겪는다고 표현하겠다.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강박충동의 짐을 져주고, 질병은 그들의 고통과 상처의 표현이다. 의학계에서 우리의 하이테크 언어는 상처 입은 신들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뭔가’가 되기 위하여, 인생이 멋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행복을 찾기 위하여 영웅적인 투쟁을 하려면, 우리가 하는 일들을 ‘나’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뭔가 에다 상처를 입히는 것인지 모른다. 바로 그 실존의 터전이 영향을 받을 수 있고, 따라서 질병이나 질환은 뭔가 깊고 미스테리적인 곳에서부터, 다분히 신적인 출현처럼 발생한다.
질병은 상당한 만큼 영원한 원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기독교의 원죄설과 불교의 사정도가 가르치는 것은 인생이 본성 안에서 상처를 입었고, 고난이 사물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인생에 참여함으로써, 아담과 하와(이브)의 자녀가 됨으로 해서 상처를 입는다. 적절하고 자연스런 상태는 상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망상이다. 어떤 의학이라도 상처받은 상태를 없앤다는 환타지에 사로잡혀 동기부여가 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조건을 회피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이처럼, 더 큰 차원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삶을 검토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 우리의 행동이 우리 실존의 뿌리를 공격하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기모순과 자기 소외를 찾아볼 수도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의 증상에 대하여 개인적인 죄의식을 갖자는 뜻은 아니고, 다만 우리의 신체적인 문제들을 보면서 우리의 삶과 본성, 즉 신화적으로 말하자면, 신들의 뜻과 일직선으로 맞추는데 안내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을 암시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런 일을 사회적으로도 그리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담배를 피우는 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을 죽이고 있다면, 우리가 이런 활동을 통하여 성취하려고 하는 것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만약 암이 세포 성장이 광포해진 것이라 한다면, 그렇다면 성장에 대한 우리의 경제적, 기술적 열광주의 때문에 치욕을 당한 성장의 신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의 활동 속에 깊이 박힌 신성한 권리를 분별함으로써 우리는 질병의 ‘치료’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르친 바에 의하면, 병을 고쳐주는 신이 먼저 질병을 가져다준 똑같은 신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질병의 신화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종교적 관점에서 질병을 고려할 수 있다. 이 생각은 종교를 고난에다 끌어대기보다는 고난이 종교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보자는 것이 더 크다. 우리가 질병 때문에 이끌리어 바로 실존의 바탕에 대한 경이를 찾게 된다면, 그 때에는 우리의 영성이 강화된다. 우리가 상처받았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우리의 관심이 오로지 상처를 극복하기만 바라면 이를 수 없는 경지 즉, 전혀 다른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질병의 미스테리적인 출현에 대하여 응답하게 될 때, 우리는 운명에 대하여 책임감 있게 살 수 있다.
만약 신들이 우리의 질병 속에 나타난다면, 그리고 신들이 우리의 일리아드적인 전쟁(인생의 전쟁)에서 상처를 입는다면, 그런 상처를 피하기 위하여 인생을 회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우리는 마조키스트적으로 질병에 빠져들지 않으면서도, 새롭고도 깊은 가치를 질병 속에서 찾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인생의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살아야 한다. 우리의 심리적인 삶에 있어서도, 고난을 더는 데 필요한 완화제나 기술을 충분히 멀리할 수도 있다. 그 결과로 공격당한 신을 찾고, 그 신과의 관계 속에서 조화를 회복할 수도 있다. 질병은 우리가 종교를 바르게 찾아갈 길을 열어 주고, 이런 일은 운명과 실존의 가장 심층적인 수준에 참여하는 데서 직접적으로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