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엄사 각황전의 웅자,
곡선이 좋더라, 소운/박목철
여행을 다녀보면 우리나라가 산악국가임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중국은 말 할 것도 없고, 일본 만 해도 화산 분지에서 사방을 바라보면 아득히 먼 곳에 산이 아물거렸다.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도 시야에 산이 없는 곳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듯하다.
최고의 명찰이라는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바라보면, 말 그대로 만산이 겹겹이 끝없이 펼쳐져 보인다.
수도 서울만 해도 놀랄 만큼 많은 산을 품고 있다.
개운산, 개웅산, 개화산, 관악산, 구룡산, 굴봉산, 금호산, 낙산, 남산, 남한산, 노고산, 대모산, 대현산,
도봉산, 매봉산, 배봉산, 백련산, 벽오산, 봉화산, 북악산, 북한산, 불암산, 삼성산, 성산, 수락산, 아차산,
안산, 오패산, 와우산, 용마산, 용왕산, 우면산, 우장산, 응봉산, 인릉산, 인왕산, 일자산, 천마산, 처장산,
청계산, 초안산, 호암산, (같은 이름의 산은 제외) 등, 서울에 이렇게 많은 산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산 셈이다. 도시에 살면서도 맘만 먹으면 오를 수 있는 산이 바로 앞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고 살지면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은 우리의 자연적 혜택을 부러워한다고 들 한다.
이렇게 많은 산인데 산 만 덩그러니 있다면 뭔가 썰렁할 것 같다.
웬만큼 이름난 명산에는 반드시 명찰을 품고 있게 마련이다. 조선이 건국되며 기존 권력층의 종교인
불교를 억압하고 신진세력의 힘을 키우려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의해 산으로 절이 숨어들긴
했지만, 역사적 자취를 돌아보면 절이 산중에 있으며 나름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란이 발생하면 인근 산성으로 백성을 모두 대피시키고 마을을 비우는 게 우리의 방어 수단이었으니
졸지에 맨몸으로 피신한 딱한 처지에 놓인 백성의 삶은 기댈 곳이 없었을 게 뻔하다. 그런 어려운 처지에
온전한 터전을 보존한 절이야말로 난을 극복하는 기지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고 백성들의 의지처가
되었을 것이다. 예술의 맥을 잇고, 국난극복에 앞장선 절을 산에 오르면 응당 만나게 되어있다.
왕조 시대에는 왕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민간인이 집을 크게 짓는 것을 엄히 금했다.
옛 마을이 보존된 한옥촌의 집을 보면 처마가 거의 머리에 닿을 정도로 낮은 것을 보게 된다.
高家建築禁止法 이라 하여 집을 높게 짓지 못하게 했고 궁궐과 절을 빼고는 둥근 기둥도 쓰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단청도 칠하는 것을 금했다.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높은 집이나 화려한 색의 옷은 대부분
사실과 다른 허구의 설정이라는 것을 아시고 봐야 한다)
여행을 많이 다닌 분들은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의 옛 건축물들을 보며 우리 것과 비교하게 된다.
솔직히 표현하면 우리의 옛 건축물이 덜 정교하고 규모 면에서도 왜소한 것에 실망도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화는 자연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뿐더러 우리의 것은 우리의 자연에
가장 순응하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어 우리의 문화가 다시 보일 것이다.
이번 여행길에서도 여러 곳의 절을 찾았다.
선암사, 향일암, 쌍계사, 화엄사 등을 둘러보았다. 어느 곳이든 절의 산문에는 무슨 山 무슨 寺라는 현판이
걸려있게 마련이다. 반드시 무슨 산이라는 산 이름이 먼저 표기되는 것에서 보듯 명산과 명찰은 서로
각각이 아닌 하나의 인연으로 묶여 무슨 산의 무슨 사라는 것을 자랑스레 내걸고 있다.
부처님과 내가 하나라 했고, 너와 내가 하나이듯, 산과 절은 하나인 것이다.
* 선암사의 산문, 조계산 선암사로 조계산을 먼저 명시하고 있다.
절에는 여러 의미를 지닌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규모가 큰 건물은 전(殿)이라 하고 작은 것은 각(閣)이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규모가 큰, 특히 측면이 여러칸인 건물은 바닥이 마루이거나 전돌이 깔려있어 별다른 난방 시설이 없고,
난방(온돌)이 필요한 건물은 측면의 칸수가 왜소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난방 수단은 온돌이
유일하다. 온돌은 아궁이와 굴뚝이 마주해야 하고 둘 사이의 거리가 멀면 불길이 닿지 않아 난방 효과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대궐의 왕이나 왕비의 처소도 측면이 왜소한 것은 아궁이와 온돌 때문이다.
(일본의 저택이 칸을 여럿 덧댄 거대한 규모인 것도 난방 수단이 다다미와 고다쓰(난로)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왕이나 왕비의 처소도 실제로는 지금 웬만한 아파트 안방 규모와 비슷한 정도이다.
절에 있는 건축물을 유심히 살펴보면 직선이 거의 없다는 것에 눈이 간다.
기둥도 구불거리고 건물 내부의 서까래도 곡선이고 건물마다 모양이 다 다름을 알 수 있다.
반듯한 것은 창이나 문의 덧살이 유일하고 나머지는 다 자연 그대로의 생긴 대로의 것을 그대로 썼다.
하지만 창문의 덧살이 반듯함으로 곡선으로 구성된 건물이 바르게 보이는 중심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
* 옛 건물을 보면 창이나 문은 직선을 잘 살려 곡선으로 구성된 건물의 중심을 바르게 잡아 준다.
곡선 멋의 일미(一味) 그랭이 질
우리나라 고건축의 특징은 위에서 든 곡선 외에도 비규격화를 들 수 있겠다.
규격화 측면에서 일례를 든다면, 옛집의 대들보가 대표적 예에 속한다. 한옥의 가장 중요한 구조재인
대둘 보를 올릴 때 상양식이라 하여 입주상양(기둥을 세우고 보를 올림) 을 날짜와 함께 기록하여
올리고 제를 올리는 풍습이 있다 이렇게 중요한 대들보이지만 그 많은 가옥 중 같은 대들보는 아마 한
곳도 없을 것이다. 적당히 휜 나무를 자연 그대로 활용하기 때문에 같은 대들보는 없는 게 당연하다.
* 바른 부재를 구하기 어려운 현실을 겸허히 수용하여 있는 그대로의 미를 한껏 살리고 있다.
* 기둥의 형태는 각각이나, 창이나 문살로 전체적 균형을 잡아 시각적으로 바르게 보인다.
*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대들보는 아마도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주춧돌이다. 주춧돌로 다듬지 않은 막돌을 그대로 사용하는 탓에 같은
건물임에도 주춧돌은 제각각이다. 돌 표면의 요철에 따라 밑동을 파내 직선으로 기둥을 세우고 높이를
맞추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지붕의 무게로 건물을 지탱하는 구조에서 주춧돌과 맞물린 기둥은
구조상 대단히 안정적일 뿐 아니라 곡선으로 구성된 구조물에 자연 그대로의 주춧돌로 건물을 떠받쳐
구조적 안정과 멋스러움을 살려낸 것은 자연에 순응하는 옛 분들의 자연 친화적 지혜이다.
* 주춧돌의 모양에 따라 그랭이 질로 기둥 밑동을 맞추려면 높이 조절 등 어려움이 따르지만, 안전한 구조이다.
우리 선조는 일 년에 반 가까이 군불을 지펴야 하는 추운 땅에 삶의 터전을 잡았다.
혹독한 추위에 잘 자라지 않는 나무는 단단하긴 하지만 휘어 곡선이고 곧고 훤칠함과는 거리가 멀다.
추위를 견디려면 온돌이 필요하고 방이 커 아궁이와 굴뚝 사이가 멀면 난방 효과가 급격히 낮아진다.
왜소해 보이는 온돌방, 멋대로 휜 기둥과 서까래, 자연에 순응한 우리의 질박한 삶의 흔적을 여행길
절에서 여러 번 마주했지만 초라해 보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같은 치수로 자르면 쉬운 기둥 하나하나를 그랭이 질로 다듬어 주춧돌에 올리던 정성을 가볍게 봐서는
안될 것 같다. 창살을 곧고 반듯하게 다듬고 하얀 한지를 바르던 정성을 어찌 폄하 할 수 있는가?
둥글둥글한 산세와 구불구불한 소나무가 가득한 이 땅에, 설사 곧고 키가 큰 나무가 있다 한들,
자로 잰 듯 각이 선 절이 버티고 서 있는 산사의 풍경은 상상에서도 싫다.
- 곡선이 좋더라! -
여행길 마주한 산사에서 또 하나의 깨우침을 얻었다.
깨우침이 있으면 부처가 된다는 데, 부처는커녕 미꾸라지 붕어에도 미치지 못하니,
-南無阿彌陀佛-
* 본인은 종교가 없습니다. 따라서 불교적 표현은 문학적 측면일 뿐 종교적 의미가 없습니다.
* 옛 건물을 보면 이렇게 조각을 덧댄 것을 보게 된다. 문화재(특히 목재)는 부식하는 탓에 보수나 수리가 필수이다.
이때 원자재가 일정 비율 이상 보존되지 않으면, 신축으로 판정된다. 몇백 년 이상 된 문화재도 이런 원칙을 지키는
탓에 고려 시대 건축이니 조선조 건축이니 인정을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