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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조선 오백년 역사 최근 발행 도서 독후감
이글을 쓰게된 동기는 이씨조선 개국 오백년 역사를 냉정한 시선으로 본 저자들의 깊은 뜻을 읽고 그냥 혼자 느끼고 지나쳐 버리기에는 섭섭한 기분이 들어서 독후감 형식 으로 라도 저의 주위에 가까운 분들에게 알려 드리기 위해 이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씨조선 오백년 역사는 우리에게는 가까운 역사이고 현시점에서 볼때에 생각하기 싫은 역사라도,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현대를 살아가는 것이 우리나라를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 하였습니다
저자: 청장 백 지 원 씨가 쓴 “왕을 참하라” 조선 오백년 역사서 는
당시 양반 약10%를 위해 대부분의 백성이 고통을 겪는 역사를 백성들의 입장에서 작성한 역사 기록이고
저자: 이 덕 일 씨가 쓴 “조선왕을 말하다” 에서는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와,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의 연대별 왕의 특성, 왕위를 계승한 사연 ,이씨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 1대부터 마지막 27대 순종 까지 왕의 특징을 각 연대별로 왕위을 승계하는 과정등을 기록한 조선왕조 기록 역사서 입니다
이씨 조선 왕조실록의 방대한 내용을 모두 숙지 하는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조선 오백년 역사를 논하는 기회가 있을 경우 적어도 아래 내용을 이해하면 재법 역사를 잘이해 하는 축에 들어가지 않을까 하고 생각 하며,
최소한의 내용으로 조선오백년 역사를 많이 이해할수 있도록 작성 한다고 노력 하였는데 그래도 A4용지 35쪽 정도나 되었습니다
바쁘신 분들은 저장해 두었다가 기회 있을때에 읽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제1대 태조, 이성계 (재위 1392-1398)
고려 왕조를 멸망 시키고 당시 그 왕들과 자손들을 모조리 죽인후에 이씨조선을 개국 하였으나 재위 6년만에 아들로부터 왕좌에서 내쫓겨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 갔으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지 1개월 만에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당시 방번을 12살이고, 방석은 11살 이였다
2번째 처인 강비에게 혹하여 장성한 아들들을 두고 코흘리게 어린애 한테 세자책봉을 하였으니 왕위를 둘러싼 문제는 개국초부터 잉태하고 있었다
1397년 사랑하던 처 강비가 죽은후 귀여워 하던 두 어린 자식과 사위가 자신의 아들에게 죽는, 자식들간에 죽이고 죽은 험한 꼴을 보다가 태종8년 1408년 풍토병으로 73세에 죽었다
이래서 이성계는 후세에 한국을 움직인 10대 인물에 들지 못했다
태조와 혼인한
신의 왕후의
아들 첯째, 이방우(고려왕조를 제거하고 조선왕조를 세우
는데 반대함으로서 세자책봉이 안됨) 둘째, 이방과(제2대 정종 재위 1398-1400)
셋째. 이방의
넷째, 이방간
다섯째,이방원(제3대 태종 재위 1400-1418)
여섯째,이방연
딸, 경신공주
딸, 경선공주
신덕왕후 강씨의 첯째, 이방번
둘째, 이방석
딸, 경순공주
제2대 정종(재위 1398-1400)
1378년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때 허수아비 왕으로 추대되었다 사실 정종이란 시호도 몇백년 후에 받은것이고 당시는 그냥 공정대왕 이였다
정종은 원치도 않은 왕위에 올라 이방원을 세자로 삼은뒤에 아들15명을 모조리 중을 만들어 버림으로서 왕위를 둘러사고 혈육끼리 죽고 죽이는 후환을 아예 없앴다
노골적으로 왕위를 내어 놓어라는 이방원의 압박에 굴복하여 재위 2년만에 왕자리에서 내려오고 자신은 상왕이되고, 이성계는 태상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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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태종 (재위 1400-1418)
고려 공양왕 4년에 이성계 , 정도전등 열성혁명파들은 당시 고려 충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 공양왕 4년에 이방원이 주도로 개성 선 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서 3개월후 이성계가 조선개국 시조가 되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함
태조7년 1398년 8월26일 이성계가 아파서 들어눕자 이때 정도전 일파가 한씨 소생 대군들을 대궐로 불려드려 모조리 죽인다는 첩보를 입수한 이방원 일파는 당시 은밀히 기르고 있던 사병들을 시켜 정도전 일파가 모의하고 있는 남은의 집을 급습하여 집에 불을지르고 나오는 사람들을 모조리 화살로 쏘아 죽여 버리고
이내 대궐로 들어가서 정도전 일당이 반역을 도모하여 모조리 죽였다고 이성계 에게 고하고 이복 동생들을 출궁을 해줄것을 요청하여
이성계는 보내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자신의 안위가 위험하여 할수없이 두 아들을 내 보냈는데 당시 방번은 18살, 방석은 17살이였는데 대궐문을 나서자 마자 이방원이가 패대기 쳐서 죽여 버렸다
태조는 자신의 눈앞에서 두아들이 죽는것을 보고 할수없이 이방원이 요청하는데로 둘째아들인 이방과에게 세자를 삼고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않았다
태종의 아들인 세종이 왕위를 이어받아 우리역사에 성군이라고는 하나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공신들을 제거하면서 까지 세종이 어려움없이 국정을 살필수 있도록 하므로서 세종이 성공할수 있었던 것이며 세종이 마음껏 국정을 펼칠수 있도록, 태종이 정치적인 문제(당파싸움, 공신세력의 권력다툼 등)들을 자신의 처가쪽 사람들 까지도 처형하면서 까지 혜결하므로서 세종이 소신껏 국정을 살필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였음
태종은 자신이 왕위 승계할때에 자신의 이복동생인 당시 11살인 방석이 세자가 되는것을 보고 서얼법을 만들어 서자가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원천적으로 법으로 막아 버리므로서 이조 오백년 역사에서 인재 등용이 잘 안되었고
영조때에 서얼법을 철폐 하였으나 그 영향은 계속되어 왔으며 대한제국 이후에도 한동안 첩자식 이라고 하면서 손까락질 하는 분위기였다
태종과 혼인한
원경황후 민씨 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들
첯째 양녕대군
세자책봉된 이제(양녕대군)는 평소에 공부는 하지않고
성색에 몰두하여 기생, 유부녀등을 농락하고 공과 사를 구 분하지 못하고 한마디로 왕재의 자질이 없다고 판단하여
태종 재위18년 1418년에 세자를 폐위시킴
둘째 효령대군
당시 명나라와의 우호관계는 국체보존의 핵심과제인데
공부도 별로이고 술도 못해 명나라 사신을 제대로 대접못 하는 효령은 세자 순위에서 제외됨
셋째 충녕대군(제4대 세종대왕 재위 1418-1450)
충영대군을 평상시에 너무 책을 많이 읽어 태종이 책을 숨 겨두고 건강을 챙기라고 할 정도로 독서에 열중하였으며 왕을 승계할 자질이 있다고 판단하여 세자로 책봉함
넷째 성녕대군
태종은 20명이 넘는 후궁에게서 30명이 넘는 자녀를 보았다
제4대 세종대왕(재위 1418-1450)
세종이 왕위를 승계할때는 강직한 성품의 아버지 태종이 조선 왕조의 골칫거리인 당쟁과 공신들의 권력싸움, 외척들의 발호 등을 사정없이 관계자들을 처형 하므로서 세종은 평온한 분위기에서 국정을 이끌어 나갈수 있었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시고 성군이였으나 자신이 낳은 아들들은 왕위 승계를 둘러싸고 권력다툼을 하여 비정상적인 왕위 승계및 순조롭지 못한 왕위 승계로 역사에 죄를 지었으며 결과적으로 못난 후손들을 둔셈이였음
세종과 혼인한
소헌왕후 심씨 와의 사이에 아들들
문종(제5대 문종)의
아들 단종(제6대 임금)
수양대군(재7대 세조)
안평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1457년 세조에 의해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된후
단종 복위를 기도 하였으나 실패함)
평원대군
영응대군
세종은 9명의 후궁을 두었고, 다시 네사람의 궁녀를 가까이
하여 14명의 여인에게서 18남 7녀를 두었다
제5대 문종 (재위 1450-1452)
세종 아들 문종은 39세때 종기가 원인으로 단명함
문종과 혼인한
현덕왕후 사이게 아들(홍위) 한명을 두었으며
문종이 단명 하므로서 12살 어린 나이에 단종으로 즉위함
제6대 단종 (재위 1452-1455)
문종 아들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뺏기고 노산군으로
강등 되어 영월로 유배되어 있다가 사망함
제7대 세조 (재위 1455-1468)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한명희를 주축으로한 충복 들을 업고 문종및 단종시절의 김종서 ,사육신 등 충신들을 제거 하고,
동생들을 죽이고 조카인 단종을 페위 시키고 강제로 왕위를 탈취함
수양대군의 숙부이며 세종의 위로 첯째 형님인 양녕대군과 둘째형님인 효령대군이 단종이 영월로 귀양가 있는 동안에 세조의 공신들과 합세하여 자신들의 조카인 단종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함
세종은 아들 들은 7명으로 여러명을 두었으나 둘째인 세조에 의해 모두 권력핵심에서 배제 되어 생활하다가 세상을 하직함
세조가 혼인한
정희왕후 윤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들은
첯째 의경세자 (덕종)
덕종이 혼인한 소현왕후 한씨와의 사이에
월산대군 이정 과
자산군 이혈을 두었으며 이혈은 나중에 성 종이 됨(제9대 성종 재위 1469-1494)
둘째 해경대군(제8대 예종이 됨 재위1468-1469)
제8대 예종 재위 1468-1469)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19세로 요절한후, 19세에 즉위한 둘째아들
해양대군 예종이 즉위한지 겨우 1년2개월 만에 스물살도 채 못되어
요절하고 말았다
예종은 19살에 즉위 하였고 선왕인 세조가 왕권을 단종으로부터 탈취할 당시의 공을세운 공신들을 그대로 물려받은 예종은 단시일에 부왕 에게서 물려받은 공신들을 제거하고
백성들이 기대하는 정책을 펴다가 재위1년2개월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고 세조 당시의 공신들이 여전히 국권을 장악 하게됨
예종과 혼인한
장순왕후 한씨
인순왕후 한씨 와의 사이에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예종이 죽을 당시 4살이였음
당시 서열을 따진다면 당연히 월산대군이 왕이 되어야 했으나 세조비인 정희왕후 윤씨는 한명희와 짜고 둘째인 열두살 짜리 이혈로 하여금
왕위를 승게토록 하였다. 이혈의 장인이 한명희 였던 것이다
둘째를 세운 이유로는 원자 재안대군은 아직 포대기 속에 있고 월산대군은 본디 질병이 있다고 둘러 대었다
제9대 성종(재위 1469-1494)
현실에 참여 하여 활동 하는것 못지않게 때를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다
하여 성종은 때가 아닌데도 섯불리 나섰다가 불행한 종말을 맞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는 것을 갖 즉위한 성종은 어렸지만 때의 중요성 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현실이 공신 집단의 것임을 잘알고 있었다
성종은 공신집단에 맞서는 대신 때를 기다렸다 기다림 또한 정치의
일부라는 사실을 어린나이에 터득한 임금이였으나 20살에 요절하므로서 결국 실패한 임금으로 기록됨
성종이 혼인한
공혜왕후 한씨 자손이 없음
정현완후 윤씨(자순대비)가 낳은 아들이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를 승계함(제11대 중종 1506-1544)
성종과 폐비윤씨 사이에 낳은 아들 이융이 왕위를
승계함 (제10대 연산군)
제10대 연산군(재위 1494-1506)
조선 27대왕중 왕권을 마치 중국의 황제 처름 휘두른 왕은 실제로 연산군 하나뿐 이였으며 단지 왕권을 백성을 위하여 휘둘러야 하는데 자신의 향락을 위해 휘둘렸기 때문에 조선 최초로 신하들에게 쫓겨나는 왕이 된 것이다
연산군 12년에 자신의 모친인 폐비 윤씨 사망에 따른 관련자 처벌과 기타 실정등으로 폐위당하여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다가 사망함
중종반정으로 쫓겨날 당시 연산군의 후손은 연산군의 왕비 신씨소생의 세자 이황은 당시 10살이였고 둘째아들 창녕대군 등이 있었고
연산군의 후궁 조씨 소생 양평군과 이돈수 2명등 연산군의 후사가 모두 4명 이였는데
중종 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세력들이 후일을 두려워 연산군의 소생을 모두 죽이자고 중종에게 건의 하니 중종이 죄없는 어린조카를 차마 죽이지 못하겠다고 하자
후일을 문제 삼으며 끝까지 죽이자고 중종 반정세력들이 주장하여 모두 사약을 내리므로서 어린아이들은 아버지 연산군을 잘못만난 덕에 영문도 모르고 어린나이에 세상을 하직 하였음
제11대 중종 (재위 1506-1544)
연산군 반정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를 승계한 당시19세의 중종이 똑똑하지도 못한데다, 성격이 우유부단하여, 거의 40년이나 왕위에 있어 면서도 밥값도 제대로 하지못한 무능한 임금이였다
또한 중종을 받들어 주던 개혁사상가 조광조를 개혁 도중 처형 하므로서 조선이 내리막길에서 반전 할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 멍청하기 짝이 없는 임금이였다
그래서 시호에 어쩡쩡한 “중”자가 들어간 것이다
중종이 혼인한
단정황후 신씨 후사가 없음
정경황후 윤씨 아들 (제12대 인종 재위 1544-1545)
문정황후 윤씨 아들 (제13대 명종 제위 1545-1567)
명종이 자신이 아들을 낳아 후대를 이으려고 하였으나
후사가 없이 병으로 죽게됨
경빈 박씨 북성군
희빈 홍씨(후사2명)금원군
봉성군
청빈안씨 영양군 과
덕흥대원군 등 2명의 후사를 둠
덕흥대원군이 결혼한 하동부대부인 정씨 사이에
태어난 이균(하성군)은,
중종의 손자뻘이 되는데 임금으로 추대되어
제14대 선조가 됨(재위 1567-1608)
제12대 인종(재위 1544-1545)
중종이 죽자 세자 이호가 30세에 인종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한지 8개월 만에 후사 없이 병사 하였다
인종은 효자였으며 학문을 좋와하고 선비를 아낀 호학애사의 군주였다
인종은 주관이 뚜렷하여 부왕 중종에게 억울하게 죽은 조광조의 신원을 명했고, 조광조의 정책이였던 현량과를 회복하도록 유언을 하고 죽었다 어쨌거나 명종보다는 백 배 나은 인물이였다
인종은 재위1년만에 왕위를 이복 동생인 명종에게 인계함
제13대 명종(재위 1545-1567)
경원대군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모친인 문정황후가 8년간 섭정을 했으며 명종은 멍청하지는 않았으나 심신이 약해 빠졌던 명종은 22년 동안 별다른 실적도 없이 왕위에 있다가 병사 했다
명종 재위 기간 내내 문정왕후등의 세력들로 인해서 사화가 그치지 않았으며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는 을사사화가 있었고, 대윤을 몰아낸 소윤도 문정황후가 죽은뒤 몰락했다
명종은 자신이 후손을 보아 후대를 이르려고 하였으나 아들을 얻지못하고 병으로 인해 제대로 후사를 정하는 유언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
당시 인순왕후와 대신 이준경의 합의하에 명종의 언질이 없는상태
에서 명종의 병이 위중하여 유언을 할수없는 상태가 되자 일방적으로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중종의 손자인 당시 16살인 하성군을 임금으로 추대 하여 제14대 임금 선조가 됨
제14대 선조 (재위1567-1608)
선조 이균은 중종의 아홉 번째 서자의 셋째 아들로 왕실족보 대로
라면 왕위는 꿈도 꿀수 없는 하찮은 신분이였다
왕위를 이은 선조의 가장 큰 약점은 방계 승통이였다. 그래서 그가
콤플렉스 때문에 다른 왕들보다 더 못되게 굴었는지 모른다
선조는 왕이 되기 전에 세자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글씨나 쓰고, 시나 지으면서 세월을 죽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재위 41년 동안 한것이 하나도 없다, 그의 재위시 망국의 당쟁이 시작 되었으며, 조일
전쟁이 발발해 나라를 말아 먹을 뻔 했다.
선조 수정실록에 보면 선조 25년 임진왜란당시 조선을 버리고 압록강
너머 요동으로 자신만 도망갈 궁리만 한 무능한 임금 이였다
선조는 머리가 특별히 나쁘지는 않았으나 간교하고 비겁 한데다, 무능하고 질투와 시기가 많아 군왕 그릇은 커녕 소인배 였다
선조대에 서인에 의해 조작된 역모인 기축옥사 즉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서 역사상 최대의 옥사가 벌어져 아까운 선비 천여병이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 되었다
이 멍청이 선조와 얼뜨기 중종, 둘의 재위 기간이 16세기 내내 100여년 가까이 되는데 아무것도 한것이 없으니 조선나라 꼴이 어떠 했겠는가, 참으로 한심한 왕 들이였다
선조와 혼인한
의인황후 박씨 (후사 없음)
공비김씨 (후사2명)임해군
광해군(세자책봉 기간16년)(제15대 재위1608-1623)
인빈김씨 (후사4명)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이 둔 아들 능양군이
(제16대 인조 재위1623-1649)
의창군
인목왕후 김씨 영창대군
(선조가 51살 되던해에 김재남의 19살 딸을 왕비로 들여
정비 소생인 영창대군을 낳자 선조가 광해군 에게서 떠나기
시작함)
선조는 광해군(세자)이 세자의 직무를 16년간이나 잘 수행해온 상태에서 당시 겨우 3살인 영창대군으로 새로이 세자책봉을 위해 전교를 내리려고 하였으나 결국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 하게됨
제15대 광해군 (재위 1608-1623)
선조가 죽자 당시 25세의 인목대비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어쩔수 없이 34세의 광해군을 지지하여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즉위후 대동법을 시행하고, 전란때 소실된 서적 간행에 힘을 기우려 “신중동국 여지승람,국조보감”등을 다시 편찬 했으며 역사상 최고의 의서인 허준의 “동의 보감”이 간행되었다
광해군은 명,청 교체기에 양대국의 눈치를 살피면서 외교솜씨를 발휘하여 당시 국제외교의 분쟁에서 한발짝 비켜날 수 있었다
국방분야 에서도 화약도감을 설치하고 영의정을 제조로 삼은뒤 화약무기 제작에 심혈을 기우렸고 , 군사의 정예화에 진력하여 국방력을 강화 하려고 노력 하였다.
광해군 5년에 일어난 칠서의 옥을 기화로 인목대비의 부친인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재위10년에는 인목대비 까지 폐모시키므로서 큰 논란을 불러 일어켰다
광해군은 당시 백성들로 부터는 원망을 받는 처지가 아니고 오히려 인기가 있는 임금이였으나 인조 반정으로 페위가 됨
광해군은 당시 영창대군 세력이 반정을 꾀하지 않을까 하고 신경을 쓰고 감히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이 서인세력을 등에 업고 반정을 꾀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고 함
광해군은 폐위된후 제주도에 유배되어 19년이나 갇혀 지내다가 1641년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고, 광해군이 쫓겨난 직후 광해군의 아들이 탈출을 시도 하다가 발각되어 자살하였고, 며느리도 목을매 자살 했다 광해군의 부인 역시 쇼크로 죽고 말았다
별로 길지 않았던 광해군의 재위중 치적 평가 점수는 조선 왕들 서열중 3-4번째로 인정된다. 멍청이 중종, 선조 같은 선대 왕들 하고는 비교가 안된다고 평가 되는데 후세에 사가들이 페륜임금 이라고 평가 하는 바람에 광해군의 평가가 잘못된 면이 많다고 생각된다
제16대 인조 (재위1623-1649)
서인의 당파 세력들이 인조반정을 추진하여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이자신의 숙부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 임금이 됨, 서인은 당시 명나라 황제에게 불충한 신하인 광해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터무니 없는 명분을 걸고 광해군을 제거함
병자호란이후 인조의 무능함과 백성및 신하들이 인조를 인정하지 않고 당시 인조 반정 일등공신 심기원이 군사를 일으켜 인조를 축출하려고도 하였으며, 망하는 명나라를 보고 어쩔수 없이 청나라를 섬겨야 했던 인조는 청나라를 인정하려던 소현세자를 제거했다
병자호란이후 인조15년 4월 조선개국이래 최초로 인질로 청나라로 간 소현세자는 새로운 문물(서학사상과 서양 문명세게)을 보고 조선의 성리학 만이 조선이 나아갈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고 나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명실상부한 선진국임을 소현세자는 인정하였음
청나라를 인정한 세자가 청나라를 업고 소현세자가 인조자신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려고 한다고 의심을 하고 소현세자 귀국과 동시에 당시 32세 건강한 장년인 소현세자는 얼굴빛을 분별할수 없을정도로 약물에 중독된 상태로 의문의 죽음을 당함
인조와 혼인한
인렬왕후 한씨 (후사4명)
소현세자
봉림대군(제17대 효종 재위1649-1659)
인평대군
용성대군
장열왕후 조씨(지의대비) 후사없음
귀인 조씨(페훈) 승선군
동평군
제17대 효종 (재위 1649-1659)
봉림대군 이호가 소현세자와 함께 8년간의 볼모에서 풀려나 조선으로 돌아 왔을때에 년도에 나섰던 백성들은 짐바리 세 개에 너무나도 검소한 행장과 준수하게 생긴 미남형 봉림대군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소현세자의 동생이며 북벌을 꿈꾼 미남군주 효종이라는 평을 듣고
있으며 제1차 나선 정벌과 제2차 나선 정벌에 나서 국력을 일부나마
신장시킨 왕으로 평가 하고 있음
역대로 문민우위의 정책을 펴왔고, 사령관들이 문민출신으로 버티고 있는것을 효종은 바꾸어 무풍을 장려 정예군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문민 출신이 대부분인 대신및 권력핵심 세력들이 벌떼 같이 일어나 반대
하여으나
효종은 제대로 국방을 책임질 무인들을 키우고 정예병을 기르려고
노력하는 중에 재위 10년만에 병사 하고 말았다
효종의 현손이 조선조에서 마지막으로 쓸만한 왕인 정조(22대)다
효조의 독살설도 있지만 조선왕실 대대로 유전되는 농가진 이라는
피부병 이라는 설도 있다
효종과 혼인한
인선왕후 장씨 사이에 태어난 후손이
왕위를 승계함(제18현종1689-1674)
제18대 현종 (재위 1659-1674)
효종의 외아들이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15년간 재위 하였다
현종은 아버지 효종과는 달리 당쟁의 틈에서 당쟁을 해결하지 못하고 세월을 보낸 왕이라고 평하고 있으나
그래도 훈련별대를 창설하고 대동법을 호남 전역에 확대 실시 하는등
나름 대로 노력하다가 서른 네 살로 요절했다
재위중 서인에게 질린 현종은 정권을 서인 에게서 남인으로 바꾸려는
와중에 그만 죽고 말았다
당파싸움은 선조(14대)때부터 결성되어 서로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당쟁의 하일라이트는 현종(18대)대를 거쳐 숙종(19대)대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로서 서인과 남인의 당쟁을 해결하지 못하고 아들인 숙종에게 숙제를 넘겨 주었다
현종이 혼인한
명성왕후 김씨 사이에 태어난 후손(제19대 숙종) 이
왕위를 승계함
제19대 숙종( 재위1674-1720)
현종의 외아들 14세의 돈 이 숙종으로 즉위 재위 기간이 자그마치
45년 10개월을 재위 했다
영조(제21대)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긴 숙종이며, 부자지간 합하여
거의 1세기를 재위 했다
숙종은 어릴때부터 영민 했으나 병약했다. 대가 센 14살 숙종은
왕위에 오른후 대비의 섭정을 받지않고 곧바로 친정을 했으며
원상들의 도움으로 국정을 이끌어 나갔다
숙종은 자의식이 대단한 임금이였다 그의 치세동안 당쟁은 극과 극을 달려 수많은 모함과 중상모략,고변이 판을 쳤다. 숙종은 여러번의 판쓸이를 통해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을 번갈아 등용하는 정치를 하면서
왕권을 굳혀 나갔다.
그러나 정권을 뒤엎을때마다 수많은 인물들을 주륙했으며 정치적인 욕심은 대단 했으나 변덕이 죽끓듯 했다.
그래도 숙종은 여색을 탐하지 않고, 사냥을 하지 않았으니 밑에서 따져서 겨우 중간에 턱걸이를 했다.
숙종은 지방수령을 내보낼 때는 면담을 하고 경고와 격려를 했으며 그래도 안심이 안되어 암행어사 제도를 활용하여 지방수령들의 횡포를 감시 했다 숙종의 치적을 하나라도 꼽으라면 화폐경제를 정착시켰다는 것을 들수있다
숙종은 늙어 가면서 노론에 치우쳐 후계문제를 명확하지 않게 하므로서 경종(20대)의 독살의혹, 그리고 그 의혹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영조(21대)의 치세와 사도세자의 죽음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숙종과 혼인한
인경황후 김씨
인형왕후 민씨
인원왕후 민씨
희빈 장씨의 아들(20대 경종 1720-1724)
숙빈 최씨의 아들(21대 영조 1724-1776)
제20대 경종 재위1720-1724)
숙종이 죽자 세자 균 이 경종으로 즉위 했다
경조는 장희빈의 아들로 14세때 어머니의 죽음을 기켜보아야 했다.
그때 충격을 받아서 그랬는지 경종은 이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으며 자식을 두지 못했다(장희빈이 죽기직전에 아들의 고환을 당겨다는 설도 있음)
아버지 숙종때에 권력을 쥐고있던 서인 노론파가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고 숙빈 최씨의 아들 영잉군(영조)만 끼고 돌았다
한창나이인 경종을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노론들이 영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야당인 소론들이 들고 일어나고 이때
서얼출신 남인 목호룡의 고변사건(노론파에서 경종을 죽이려고 한다는)이 일어나 결국 이사건 으로 노론대신 4명과 170여명이 유배되거나
처형되어 노론 세력들을 제거 하였다
영잉군(영조)도 고변사건에 명단이 있었으나 경종은 이복동생인 영잉군을 평소에 극진히 생각하였고 영잉군이 무고함을 눈물로 호소하는 바람에 죽음을 면할수 있었다
경종은 노론을 몰아내고 2년만에 재위4년 8월25일 창경궁 환취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후사없이 세상을 떠남
그로부터 5일후에 장희빈의 연적이자 정적이던 숙빈최씨의 아들 연잉군이 인정문에서 30세의 나이로 제21대 영조로 즉위했다
당시 영조는 소론 강경파및 남인들로 부터 영조 자신이 이복 형제인 경조를 독살 했다는 영조 독살설이 끊이지 않았다
제21대 영조 (제위 1724-1776)
노론파를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하여 영조 자신의 즉위초
왕권을 강화하고, 영조를 경조 독살설의 주범으로 믿고 있는 소론강경파및 선대 경조의 충신들을 없는 죄를 씌워 처형시킴
소론 온건파 까지 적으로 돌리면 내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소론 온건파에게 정권을 넘기는 것으로 하여 소론의 불만을 수용했기에 이듬해 이인좌의 봉기를 진압할수 있었음
이인좌의 난은 한편 무신난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소론강경파와 남인들의 연합거병을 말하는 것임
조선5백년의 역사는 전체백성들중 10%밖에 안되는 양반을 위하는
세상이고 양반은 군역의무도 없고 상놈만이 군역을 담당해야 하는데 영조재위 기간에 일부 성공한 농민들이 곡식을 헌남하고 공명첩(이름을 적지 않은 관직임명장) 을 사들이면 양반 신분을 얻고 군역에서 면제되기 때문이였다
그러다 보니 군역은 돈없고 힘없는 상놈들만의 의무로 전락하였다
군역의무로 크게 민심이 소란해지자 영조는 양반들도 군포를 사도록
하였으나 양반사대부들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양반은 군포도 안내고
군역도 안하겠다는 주장을 영조가 꺾지 못하였으며
경조 독살설에 발목잡힌 영조는 사대부의 특권을 철폐할 권력도 의지도 없었다, 양반사대부의 특권속에 백성들은 계속 군역의 폐단에 시달렸다
세자는 지금을 치면 대통령 당선자와 같은 역활인데 조선5백년 역사를
보면 종종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도세자 역시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정책이 노론을 중심으로한 권력기반을 유지하고, 소론과 남인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시대상황을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가 불만을 가지면서 영조는 소론 강경파에게 겨누었던 칼끝을 사도세자에게 겨누고 결국은 자신의 친자식인 사도세자를 뒤주속에 가두어서 8일만에 죽게 만들었음
영조와 혼인한
정성왕후 서씨
정순왕후 정씨
당시 영조는 66세의 나이로 15세인 정순황후를 맞아들임 으로서
조선후기 정국에 큰 파란을 몰고왔다
정빈 이씨 와의 사이에 진종(효장세자)
영조재위 40년 (1764년)에 사조세자의 아들인 영조의
세손의 호적을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에게 입적시켜 세손의 호적을 세탁 시켰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제거에 적극적이였던 노론은 영조의 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에게 왕권이 넘어가면 노론의 미래를 보장할수 없다고 하여 세손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 을 한사코 반대 하였으나
영조는 자신의 친자식을 죽인 회한을 갚겠다는 건지는 모르지만 사도세자의 아들이고 영조에게는 손자인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결심을 함
영조 재위중 노론이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 사도세자의 아들인 영조의 세손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것을 한사코 반대 하였으나 영조가 세손에게 순감군을 수점토록 하고, 순감군(군사권)을 주어야 세손이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치함
노론 일색인 대신들이 세손의 순감군 수점에 격열하게 반발하자 영조는 임금의 경호부대인 상군과 협련군 불려드려서 대신들이 두려워 하게 하므로서 대신들이 한발 물러서도록 조치 하였고
노론 벽파는 13년전 사도세자에게 사용하였던 방법을 세손에게 사용
세손을 몰래 미행 금주령 중인데도 세손이 술을 마셨다는 소문을 펴트
리고 어떻게 하던지 간에 세손을 왕위 승계를 못하도록 모함을 하였으
나 이를 알고
이때 세손궁의 사서 홍국영과 정민지 등 세손을 지지하는 소수파에서
홍국영이 소론 출신의 행 부사직 서명선에게 노론 출신의 홍인한을
대상으로 상소를 올리게 하므로서 대세를 역전 시키게 함
세손 왕위 승계를 격렬하게 반대하는 노론 대신 홍인한 과 그의 일당
들을 대상으로 영조에게 부당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리게 하는데
이를 가상히 여긴 영조가 서명선을 불러 상소문을 읽게 한후에 서명선이 우는 소리를 들어니 강개함이 마음속에 맺혀 있음을 알수 있다고 하면서 서명선의 손을 들어 주었다
제22대 정조 (재위1776-1800)
노론대신들의 반대속에서 영조 재위 51년 1775년 12월 8일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한다는 것을 공식화 하였으나, 그해 12월 22일 세손이
양사의 여러 신하들중 대리청정 조참에 참여한자가 한사람도 없다고
비판 하였으며 이런 상황에서 영조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영조 52년
1776년 3월 3일 영조가 “전교한다 ,대보(옥쇄)를 왕세손에게 전하라”
하고 영조의 마지막 유조가 발표되었으며
사도세자와 헤빈홍씨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며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되어 있던 영조의 손자가 정조가 되어 제22대 왕위를 계승함
그러나 할아버지 영조는 세손에게 왕위와 함께 노론 일당 독재란 무거운 짐도 함께 넘겨 주었다
만 열한살 때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소년이 스물네살의
나이로 새 시대를 향해 첯발을 내디딘 것이다
정조는 24년간을 재위한후 49세로 세상을 떴다
정조는 개혁을 지향한 호학군주로서 아마 조선왕조에서 가장 뛰어난
왕 서열에서 세종에 이어 2위를 차지할만하다. 조선왕조 사상 가장
지적 이였던 두 왕은 모두 학문에 심취하여 하도 책을 많이읽는 바람에, 둘다 눈을 버릴 정도였고 백성들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정도가
아주 비슷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영조, 정조 시절에 여전히 잘살지 못했는데 중기이후 썩어버린 조정은 18세기 이후 들어서도 사정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정조는 재위기간 동안 조선왕조 사상 가장 많은 암행어사를 파견한 임금이였다. 재위 24년간 60회에 걸쳐서 암행어사를 파견했는데, 1798년
경기도 영평 현령으로 나간 박제가 가 정조에게 올린 장계를 보면
“산골 고을 백성들이 화전을 일구고 나무를 하느라 열손가락 모두 못이 박혀 있었지만 옷은 십년묵은 헤진 낡은 솜옷이고, 집은 허리를 구부려야 들어갈수 있는 움막 이였습니다
연기가 가득하고 벽도 바르지 않았는데, 그 먹는 것은 께진 주발에 담긴 밥과 간도 하지 않은 배추 뿐 이였습니다. 부엌에는 나무젓가락만 있었고 아궁이 위에는 항아리로 만든 솥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무쇠솥과 놋수저는 몇차례 꿔다 먹은 곡식값으로 이미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부역에 대해 묻자 노비가 아니면 군보의 신분이라 250전-260전을 관에 납부 한다고 했습니다. 국가의 경비가 나오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측은한 마음에 베를 짤 마음도 나지않는 홀어미처름 탄식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법을 바꾸지 않으면 지금의 풍속 아래서는 하루 아침도 살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이 고을 하나만 그런것이
아니라 모든 고을이 다 그렇고 , 나라가 모두 그렇습니다“
이것이 조선 백성들의 평균 삶이였다. 정약용이 시로 표현한 동네도 위와 별다를게 없고 그래도 위에 언급한 것은 정상적인 지방관이
다스리는 지역의 경우이고, 탐관오리가 지방관인 지역은 그 참상이 말로 할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잘 살고 잘 쳐먹는 인간들은 전인구의 10%도 안되는 양반
계층 뿐이였다, 그런데 조선왕조 실록에 이런 내용들이 세세하게 밝혀지는 않는 이유는 왜그런지 모를 일이다
조선왕조 실록을 작성한 사가들은 궁중역사서를 기록하는것에 중점을 두었지 백성들의 고난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역사서를 별로 없으니 딱할 노릇이다
“2009년 2월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에 의하여 공개된 정조의 299통의 서한들은 보물급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인간 정조의 평가에 귀중한 자료이다, 서한의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 그리고 정조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에서도 찿아볼수없는 내용들이 들어있다
정조가 당시 노론벽파의 영수이자 우의정이던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알려진 지적이자 문약한 군주 정조의 모습이 아닌 호탕하고도 격정적인 무인풍의 군주 정조의 모습이 표출되어 있다
편지 내용을 간단히 보면 “호종자(호로새끼, 조청전쟁때 청군에게 강간 당했거나 포로로 끌려갔던 여인들이 낳은 사생아를 지칭하는말)”
라는 말을 서슴없이 쓸 정도로 정조는 화통한 성격을 겸한 문무를 겸한 군주였던 것이다
정조의 마지막 편지는 정조가 죽기전 13일전에 쓰여졌는데 자신이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는 내용과 약을 복용하고 있는 내용들이 있었다
2009년 2월에 발견한 정조의 299통 서신들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학술원 관계자들에 의해 추후에 연구결과가 나오리라고 사료된다“
정조가 임종할때에 자리를 지킨것은 정순왕후 였는데 그바람에 정순왕후의 독살설이 광범위 하게 퍼진 것이다.
당시 어의들은 내외하는 법도 때문에 정순왕후와 함께 있을수 없어 모두 밖으로 나갔던 것이다
결국 정순왕후는 정조가 죽은뒤 정조가 이루어낸 개혁들을 모조리 무위로 돌려버리고 정조의 총애를 받던 신하들을 싸그리 살해한, 조선의 숨통을 끊어버린 참으로 요망한 여편네 였다
또 조선 당쟁사 200여 년간 나라를 망치는데 일조한 노론 벽파 세력들은 조선이 멸망한 후 친일파로 변신해서 그 후로도 잘먹고 살 살았다
참으로 그지 같은 시대였다
정조와 혼인한
효의 왕후 김씨
선빈 김씨가
수빈 박씨 의 아들인
문효세자는 어릴때 죽고,
둘째아들인 열한살 짜리 “공“이가
제23대 순조로 즉위
제23대 순조 (재위1800-1834)
1800년 정조가 재위24년만에 49세로 죽자 정조의 둘째 아들인 열한살짜리 꼬마 “공“ 이 순조로 즉위함
정조의 큰아들 문효세자는 어릴때에 죽었다 정조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던 순조의 증조 할머니 이자 영조비인 정순왕후가 쟤깍 수렴청정을
시작 하였으며, 정순왕후 계열인 노론 벽파가 당당하게 앞에 나서게
되었다
순조의 할머니이자 정순왕후의 며느리인 정순왕후보다 열한살 위의 혜경궁 홍씨가 살아 있었으나 정식 왕비가 아니어서 수렴청정을 할수 없었다 정순왕후는 단3년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조가 시도 했던 모든 개혁을 몽땅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
순조의 증조 할아버지 영조가 66세때에 15세의 왕비로 들어온 정순왕후는 조선의 숨통을 막아버린 요망한 암탉 정순왕후로 인식되어 오고 있으며 순조는 허수아비로 왕권을 추락시킨 왕으로 인식되고 있고
정순왕후의 3년가량 수렴청정시 정조시절에 있던 정조의 친인척과 정조와 관련있는 인물들, 대신들 모두가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싹쓸이를 당한 것이다 정순왕후가 섭정을 하면동안 상호협조하던, 노론벽파 영수는 심환지 인데 정순황후가 섭정을 끝낸 이듬해에 덜컥 죽었으며, 심환지도 1802년에 죽었다
정순왕후가 죽자 순조의 외척 문벌들인 반남 박씨. 안동 김씨.풍양
조씨등이 노론벽파에 대한 연합공격을 하여 노론벽파의 핵심들은 모조리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사건이 1806년에 일어난 “병인 경화”이다
노론 벽파가 몰락하자 노론 시파인 김조순이 득세하여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60년을 열게된다 국구 김조순이 권력을 잡아 전횡을 일삼으며
순조 재위 십년이 지나자 안동김씨 세력의 전횡을 계속 보면서 순조가 울화병이 도져 국사를 돌보지 못하는 지경에 도달하였다
김조순의 문별정치는 181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세기 동안 안동김씨 일문과 민비쪽의 여흥 민씨 척촉 두 가문이 80년 동안을 악랄하게 해먹는 바람에 조선말기에 아주 재기가 안될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져 벼렸다
조정은 온통 김씨 천지가 되었으며, 지방수령에도 자파인물 들을 파견했다. 이렇게 시작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순조, 현종, 철종 등의 세 왕비를 가문에서 내 가며 고종 즉위때 까지 이어진다
순조가 안동 김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고 ,1827년 19세가 된 효명세자를 내세워 대리청정을 시도 했으나, 그나마 효명세자가 잘 하다가 대리청정 3년만에 요절하자 순조는 새로운 외척세력을 탄생시키는 악수로 바뀌고 말았다
순조와 혼인한
순원왕후 김씨 사이에 태어난 효명세자
익종(효명세자는 아들(현종)을 두고 요절함)이 혼인 한 신정황후 조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순조의 손자가 제24대 현종으로 왕위를 승계함
제24대 헌종(재위 1834-1849)
1834년 순종이 죽자 여덞살의 어린 원손 이 왕위에 올랐으며
관례에 따라 할머니인 대왕대비 신정황후가 수렴청정을 시작 했다
대왕대비는 김씨와 조씨, 박씨문벌 인물들을 번갈아 등용했는데,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김좌근과 조병구가 권력을 나누어
대립했다
조씨 문벌은 조만영의 딸이 순조의 아들로 요절한 효명세자의 빈 이된 후부터 외척으로 실권을 잡기 시작했으며 ,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승되자 조대비가 되어 고종을 왕으로 지명하고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헌종 역시 순조와 마찬가지로 세도가들의 방해로 제대로 된 정책을
실시 할수 없었으나, 정치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하는척은 했다
그러나 원래 여색을 좋와하여 몸을 버린후 자식도 두지 못하고
스물네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현종이 혼인한
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 등의 사이에서 후사가 없어 왕위
승계를 못함
제25대 철종(재위 1949-1863)
헌종의 후계자는 김씨 문중의 강력한 후원으로 왕실과 촌수도 세기
어려운 관계에다 강화도에서 땔나무 장사하던 섬 촌놈 이원범이
정해지므로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발판은 철판같이 굳어졌다
이원범은 강화도에 유배 되었던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의 아들 전계대원군이 낳은 아들 즉 사도세자의 증손자가 이원범 이 였는데 왕실과의 촌수가 가물 가물 해서 대신중에도 그런 애가 강화도에 사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이원범의 집안은 사도세자 때부터 피박을 썼는데, 사도세자는 뒤주속에서 굶어 죽고, 강화도로 유배된 그의 아들 은언군은 천주교 박해에연루되어 정순왕후가 죽였다
은언군의 동생 은신군은 제주도에서 풍토병으로 죽고, 이원범의 할아버지 전계군과 아버지 영평군은 강화도에서 밭뙈기나 뒤지면서 세상에서 잊혀진 채 촌놈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김씨 문중의 인물
들이 허수아비 왕 후보를 찿다가 간신히 뒤져낸 인물이였다
이런 일자무식에다 착해빠진 촌놈이 왕이되자, 왕을 마음데로 주무
르게 된 김씨들은 지금까지의 세도정치를 한층더 업그래이드 해서
조씨 문중을 박살을 내고 매관매직을 일삼아 나라를 거덜내고 말았다
철종은 가난 때문에 궁궐에 들어올때 까지는 여자라고는 촌년의 손도한번 잡아보지 못했는데, 철종은 궁중에 들어오자 그냥 팔자를 고치게
된다, 잘 빠진 궁녀들이 어떻게 하면 왕의 눈에 들어 하루저녁 자 볼수 없으까 하고 줄을 섰으니, 철종이 엄청 바빠진 것이다
여색을 밝히던 헌종은 스물네살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나무꾼 이였던 철종은 처음 궁중에 들어왔을때에 삼손 보다 더 튼튼 했으나 철종은재위 내내 술과 여색속에서 헤매다가 재위 14년 만에 서른셋의 나이로 요절했다
철종이 재위 기간중 자신의 뜻대로 한것이라고는 강화도에서 가난하게
살아 갈때에 이웃집에서 쌀을 꾸어준 이시원 을 개성 유수로 임명한것이 전부였으니 얼마나 편하게 왕노릇을 한것인지 알수있다
나라가 망하려면 손이 귀해지기 마련이다 효종(제17)때부터 손이 귀해져서 아들이 겨우 하나만 있었다. 그나마 정조(제22대)의 손자 현종(제24대)이 8세에 즉위해서 23세에 요절하자 조선의 왕통은 거의 끊어지게 되었다
결국 왕손을 찿다가 보니 영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게서 난 은언군의 손자인,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일자무식 철종(제25대)이 대를 잇게 되었으니, 그기서 조선 왕조는 이미
볼장 다 본 것이였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다시 왕실 족보를 뒤져야 했다. 이번에는
사도세자의 자식인 은언군의 동생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한 남연군의
손자 익성군이 철종의 뒤를 잇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고종(제26대)
이다
이제 성만 같으면 됐지, 촌수 세기도 어렵게 된 것이다 인조(제16대)의 아들 이면서도 정적으로 몰려 자신의 아버지 인조에게 독살당해 아깝게 죽은 소현세자의 자손들이 부활하여 조선의 왕위를 잇게 되 것은
아니러니가 아닐수 없다
철종은
철인왕후 김씨와
숙의 범씨와 혼인 하였으나 후사를 얻지못함
제26대 고종(재위 1863-1907)
대원군 섭정 기간 10년 포함
고종의 재위 기간중 대원군을 쫓아낸 민씨들의 외척세력이
권력을 좌지우지 하는 기간도 상당기간 있었다
철종이 시름 시름 앓다가 서른 세 살의 나이로 죽자,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승되어 대비가 된 조대비(헌종의 모후)가 옥새
부터 챙긴다음 김병국에게 지시하였는데
이때 허수아비 철종을 세우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안동 김씨 세력
들은 권력에 취해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때에 조대비는 전광석화 같이
왕위 승계건을 처리해 벼렸다.
정원용을 원상으로 삼으며, 흥선군의 둘째아들 명복(고종)으로 대통을
잇게 한다 라고 하면서 명복이 아직 열두살 이므로 자신이 수렴청정을 한다고 선언했다
당시 끗발이 하늘 높은줄 몰랐던 김씨 성을 가진 대신들은 어이 없게도 다음 왕통을 잇게될 명복이 누군지 아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철종이 후사가 없어 불가피 하게 사도세자와 숙빈임씨 소생의 아들이며 철종의 이복 동생인 남연군(인평대군의 6대손)이 낳은 흥선대원군이 있었는데, 흥선대원군과 혼인한 부대부임 민씨 사이에 태어난 아들(명복)이며 철종의 손자뻘 되는 아들이 왕위를 승계하여 제26대 임금 고종이 되었다.
명복의 아버지인 흥선군 이하응은 사도세자의 증손자가 된다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뒤 아들이 없어서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을 양자로 들였다
이 남연군의 막내아들이 흥선군 이하응 인 것이다. 은신군과 흥선군 사이는 족보상 약15촌 정도가 되고, 철종과는 6촌쯤 된다.
이 흥선군의 막내 아들이 바로 고종으로 왕통을 이어갈 명복이다
족보도 따지기도 어려울 정도인데 아무턴 이렇게 해서 흥선군의 시대가 열렸다
열두살 어린나이에 아무 경험이 없고, 원래 똑똑 하지도 못하고 성격에 우유부단 했던 명복(고종)은 갑작히 왕으로 추대되어 궁궐에 들어와서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이내 아버지 이하응이 법에도 없는
섭정을 장기간 하게 되면서 고종은 할 일없이 궁녀들에게 둘려싸여
후손을 두는 데에 열심히 하여 후손이 아들 5명, 딸을 1명 두게됨
고종과 혼인한
명성황후 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마지막 왕인 제27대
순조가 됨
귀인 엄씨 와의 사이에 영친왕
귀인 이씨 와의 사이에 완친왕
귀인 장씨 와의 사이에 의친왕
귀인 정씨 와의 사이에 이우 공
귀인 양씨 와의 사이에 덕혜옹주
흥선군은 강한 성격과 오만한 의지의 소유자로서, 정력적이고 눈매는 매우 날카로웠다. 그는 목표를 세우면 코뿔소 같이 밀고 나가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인물이였다.
대원군을 평가 할때에 경복궁을 중수하고 내정개혁을 밀어붙이고, 국력을 신장시킨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후세들 에게는 쇄국정책의 대명사로만 기억되는 것은 후손들에게 역사를 잘못 가르친 것에도 원인이 있다
이하응은 안동 김씨 세도밑에서 기를 못펴고 있던 조씨 가문의 어른
조대비에게 자신의 아들로 대통을 잇게 해달라고 은밀히 요청했다
물런 이하응의 아들이 대통을 잇게 되면 김씨 일문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것이고 조씨 일문은 그대로 뜰 것이라는 합의 제의였다
마음이 동한 조대비는 이하응의 비밀제의를 감추어 놓고 있다가 철종이 죽자 마자 바로 그대로 발표 했던 것이다
권력에 취해서 정신없이 지내던 안동 김씨 세력들은 하루 아침에 대원군이 쥔 칼자루에 의해 정리 되므로서 안동 김씨 들은 권력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것이다
대원군은 10년간 섭정을 하다가 민씨 며느리 세력에 의해 섭정에서
물러나고 있다가 ,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때에 뒷수습을 위해
한달정도 권력을 잡았다 청나라에 납치되었고,돌아와서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난후 넉달동안 권자에 있다가 일본 애들에게 쫒겨났다
대원군은 일생동안 모두 세 번에 걸쳐 최고 권력에 있었을 만큼 파란
만장한 삻을 살았다.
조선은 재수 없게도 국가 대사가 벌어질때면 이상하게도 , 무능하고 얼뜨기들이 통치하는 시대였다. 조일전쟁때 에 선조, 조청전쟁 때 인조.
을사보호 조약으로 나라가 망했을때 고종 등 이였다.
고종의 재위기간 동안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만 해도 아래와 같이 많은데 능력이 별로인 열한살 짜리 명복(고종)이 왕위를 승계하고
나서 해결할수 있으리 라고는 역사를 연구 하다 보면 누구라도 애시당초 안되는 일이라고 인정할 일이다
1,대원군의 섭정(1863)과 개혁
2,민씨 척족들의 발호
3,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4,운양호 사건과 개항(1875)
5,임오군란(1882)
6,김옥균과 갑신정변(1884)
7,동학농민 전쟁(1894)
8,청일전쟁(1894)
9,갑오경장(1894)
10,을미사변(1895, 민비시해사건)
11,아관파천((1896)
12,대한제국의 설립(1897)
13,러일전쟁(1904)
14,을사보호조약 체결(1905)
위와 같은 굵직 굵직한 사건들이 단 몇십년 사이에 모두 일어났을 만큼 고종 치세시에 눈이 핑핑 돌아가던 격변의 시대였던 것이다
고종은 3, 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 세상을 떴다
제27대 순종(재위 1907-1910)
1907년 고종이 양위하고 상왕으로 무러나자 당시 33세였던 황태자
이척이 조선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인 순종 으로 즉위해 대한제국이 멸망 할때까지 3년간 재위 했다. 순종은 즉위한후 연호를 광무에서
융휘로 고쳤다
순종은 사실 재위라고 할것도 없었다. 일본 애들이 옥새를 빼앗아가는
바람에 한일합방 때 까지 그냥 때가 되면 순순히 식사나 하시다가 그만두신 것이다. 그래서 시호가 순종이다. 결국 순종만 하다 그만 두셨는데 . 1910년 폐위된후 16년간 창덕궁에서 살다가 1926년 향년 56세로 세상을 떴다.
민비의 첯째 아들은 태어나자 마자 죽어서 둘째인 순종은 태어난 다음해 세자로 책봉 되었다 순종은 어렸을때부터 몸이 약했고 . 셩격도 유약해서 일본 애들이 뒤에서 조정하기에는 아주 그만인 왕, 아니 황제였다.
순조와 혼인한 2명의 왕후로부터 후사가 없었다
순명효왕후 민씨
순정효왕후 윤씨
순조는 후사가 없자 고종의 귀비인 엄귀비가 낳은 이복동생
이은(영친왕)을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태자로 책봉했다
1910년 한일합방과 왕실의 뒷이야기
이토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죽자, 일본 육군대신 이였던
데라우치가 새로부임하여 1910년 8월에는 서울에 계엄령이 발동한 상태에서 데라우치는 이완용과 대한제국 병합순서를 의논하고 있었다
이완용이 순종을 윽발질러 순종이 서명하고 옥새가 찍힌 위임장을
받아들고 와서 데라우치와 함께 준비된 조약문에 서명했다
조약의 내용은 대한 황제는 일체의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넘겨주고 일본 천황은 이를 승낙해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한다는 것이다
이 조칙은 1910년 8월 29일 반포 되었다
이로서 이씨조선 오백년 역사은 종지부를 찍게되고 일제 강점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는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을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으로 보냈다. 사실은 유학이 아니라 인질이였지만 ,일본으로 유학간 영친왕은 일본식 교육을 받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중장 까지 승진했다
1920년 일본 황실의 친척인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한 영친왕은 순종이 죽자 이왕의 칭호를 계승했으나 종전후에도 일본에 게속
체류하다가 56년만에 1963년 귀국 했으나 뇌혈전으로 실어증을 앓다가
1970년 창덕궁에서 숨을 거두었다
영친왕의 형뻘인 의친왕은 일본 식민지 기간에도 줄곧 모국을 떠나지
않고 있으면서 술과 여자에 탐닉하다 1955년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도 1925년 13세의 나이로 일본에 유학 갔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신경쇠약이 심해져 정신이상에 걸렸다
그녀가 결혼했던 일본인 귀족과 이혼한후 자신이 낳은 딸까지 자살
하자 귀국한후 낙선재에서 살다 쓸쓸히 죽고 말았다
♼이글을 마치면서
결국 이씨조선 오백년을 통해서 성군이라고 할수 있는 왕은 제4대
세종. 제22대 정종, 아들 세종이 국정을 잘 보살필수 있도록 당권세력과 당시의 공신세력, 국정수행에 걸림돌이 되는 친척들 모두를 처형시킨 제3대 태종
,
재위 기간은 10년으로 짧지만 국력을 신장 시키기 위해 노력한 제17대 미남 군주 문종
페륜임금 이라고 후세에 전하고 있지만 국력신장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바친 제25대 광해군, 등이라고 감히 언급 할수 있다고 보며
나머지 왕들은 저자 청장 , 백 지 원 씨가 책 제목에 붙인데로 정말 “왕을 참하라”에 해당 되는 무능한 임금들 이였습니다
아무 쪼록 이글을 읽어 보신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 입니다
2010년 8월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에서
글쓴이. 송 민 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