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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국민의 힘 혁신위원장을 맡았던 인요한 박사의 칼럼입니다.
자신의 의대공부를 돌아보며 한국인은 우수하며 자부심을 가져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저는 올 한해 하루도 빠짐없이 영문기사를 올린 저자신에게 칭찬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지난 한 해를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Koreans shouldn't underestimate themselves
한국인들은 자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By John Alderman Linton
John Alderman Linton, an American-Korean whose Korean name is Ihn Yo-han, is a director at Yonsei University Severance Hospital International Health Care Center.
존 앨더먼 린튼 존 앨더먼 린튼은 한국 이름이 인요한인 마국계 한국인으로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이다.
Posted : 2023-12-24 16:23 Updated : 2023-12-24 16:23
Korea Times
I joined the pre-medical program at Yonsei University in March 1980, a chaotic time on the campus marked by frequent protests. After barely passing my second year of pre-med, I advanced to Yonsei’s medical school, but my studies were extremely demanding.
1980년 3월, 나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에 입학했다. 의대 2학년을 겨우 넘긴 나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학업에 대한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Yonsei was the first Korean school I’d ever gone to. And while I was a fluent speaker of Korean, I’d never had to wrestle with the written form of the language. As a result, it was very hard to learn anatomical terms and keep up with my biochemistry class, with its focus on rote memorization.
연세대학교는 내가 처음으로 다녔던 한국학교이다. 그리고 내가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동안, 한국어의 문자형식과 씨름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해부학 용어를 배우고 암기식 생화학 수업을 따라가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Putting my nose to the grindstone, I applied myself diligently in my first year at medical school, but I ended up having to repeat the year. Other students were whispering about how “that Westerner” had failed the exams. The whole experience was humiliating and psychologically draining.
저는 의대 1학년 때 지석에 코를 박고 열심히 지원했지만, 결국 한 해를 반복해야 했다. 다른 학생들은 "그 서양인"이 어떻게 시험에 떨어졌는지에 대해 속삭였다. 그 모든 경험은 굴욕적이었고 심리적으로 진을 뺐다.
However, I was determined not to be discouraged by the setback, and I returned to the classroom to repeat the first year of medical school. After the lecture began, I was surprised to find quite a few familiar faces in the seats around me. At least 30 of the 180 students in that first year had been held back, just like me.
하지만 좌절감에 낙담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다시 교실로 돌아와 의대 1학년을 반복했다. 강의가 시작되고 나서 주변 좌석에 낯익은 얼굴들이 꽤 있어 깜짝 놀랐다. 그 1학년 학생 180명 중 적어도 30명은 저와 마찬가지로 발목이 잡힌 상태였다.
After our first day of lectures, we gathered at a pub near the school to swap stories about our failure the previous year, which kindled lasting friendships. One reason I’ve enjoyed such strong support during my 32 years at Severance is that I’ve maintained connections not only with those who were admitted with me and graduated with me but also with those who had to repeat a year with me.
첫날 강의를 마친 후, 우리는 학교 근처에 있는 호프집에 모여서 그 전 해에 있었던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는 지속적인 우정으로 이어졌다. 세브란스에서 32년 동안 이처럼 든든한 지원군을 보내준 한 가지 이유는 나와 함께 입학하고 졸업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1년을 반복해야 했던 사람들 과도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The second year of medical school brought clinical coursework along with the basic science coursework, which was a relief for me. Since many of these courses focused on conceptual understanding, rather than simple memorization, my studies grew easier.
의과대학 2학년은 기초과학 교과목과 함께 임상 교과목을 가져오게 되어 다행이었다. 이 과목들은 단순 암기가 아닌 개념 이해에 초점을 맞춘 과목들이 많아서 공부가 쉬워졌다.
Then in my fourth year, I confronted my biggest obstacle yet: the Korean medical licensing exam. The test itself wasn’t so difficult, but the medical names written in Chinese characters felt as daunting as Mount Everest.
그러다가 4학년 때, 나는 가장 큰 장애물인 한국 의사 면허 시험에 직면했다. 시험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한자로 쓰여진 의학용어는 에베레스트 산만큼이나 힘겹게 느껴졌다.
I devoted three months to memorizing the Chinese character names. Then on the day of the exam, my Korean reading speed was so slow I had to rush through the questions without enough time to recheck my answers. Luckily, I passed the exam, feeling as joyful as if ten Christmases had come all at once.
나는 한자어를 외우는 데 3개월을 바쳤다. 그러다가 시험 당일에는 한글 읽기 속도가 너무 느려서 답안을 확인할 시간도 없이 서둘러 문제를 풀어야 했다. 다행히 나는 마치 열 번의 성탄절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처럼 기뻐하며 시험에 합격했다.
But the basic science component of the U.S. medical licensing examination was scheduled to be administered just ten days later. I spent those few days cramming as much as I could, but I came in just one point shy of a passing grade.
그런데 미국 의시면허시험의 기초과학 부분은 불과 열흘 뒤에 시험이 치러질 예정이었다. 그 며칠 동안 벼락치기 공부를 할 수 있는 대로 했지만, 합격점에 딱 1점 부족했다.
So in 1987, I moved to the States to better prepare for the exam. My financial difficulties made it hard to focus on my studies, and I eventually enrolled in a Kaplan test prep school where I listened to recorded lectures to prepare me for the basic science exam. That was the toughest time in my life — I was so broke I sometimes had to make do with a sandwich for lunch.
그래서 1987년, 저는 시험을 더 잘 준비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학업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졌고, 결국 나는 기초 과학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녹음된 강의를 듣는 카플란 시험 준비 학교에 등록했다. 그 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너무 빈털터리여서 가끔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어야 했다.
Three months later, I sat for the exam at the ferry terminal in New York as one of 3,000 foreign medical graduates. Only 4% passed, just 120 of those 3,000 test takers.
그로부터 석 달 후, 저는 3,000명의 외국인 의학 졸업생 중 한 명으로 뉴욕의 페리 터미널에 시험을 보았다. 3,000명의 시험 응시자 중 단 120명, 4%만이 합격했다.
After that, I applied and interviewed at a huge number of medical residency programs. Finally, I landed a position at a program with only five positions available for 3,000 applicants. Once I was in my residency, my financial situation stabilized and life in the U.S. gradually improved, although I did spend four years in the high-crime neighborhood of Harlem.
그 후, 저는 엄청나게 많은 전공의 프로그램에 지원하고 인터뷰를 했다. 마침내, 나는 3,000명의 지원자들이 5개의 자리만 가질 수 있는 프로그램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전공의 생활을 하고 난 후, 재정 상황은 안정되었고, 범죄가 많은 할렘 지역에서 4년을 보냈지만, 미국에서의 생활은 점차 나아졌다.
Back then, none of the U.S. medical school graduates in my program knew or cared where Korea was, nor were they aware that Yonsei University was a respectable medical school. They treated me like I’d graduated from some fly-by-night school in Central or South America.
그 당시 제 프로그램에 참여한 미국 의과대학 졸업생들 중 아무도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했고,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고, 연세대학교가 훌륭한 의과대학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그들은 나를 마치 중앙 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에서 야간 비행 학교를 졸업한 것처럼 대했다.
Faced with their snobbery and prejudice, I pushed myself even harder but felt helpless to change their attitudes.
그들의 속물 근성과 편견에 직면하여, 나는 더 강하게 나자신을 밀어붙였지만 그들의 태도를 바꿀 수 있는 무력감을 느꼈다.
But then it came time for our in-service exam. A few days after the exam, the program director scrawled my name on the chalkboard. I’d gotten the top score on the evaluations.
그런데 그 때가 바로 재직 중인 시험 시간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며칠 후에 프로그램 감독님이 칠판에 제 이름을 썼다. 나는 그 평가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다.
I froze in shock the moment I saw my name up there on the chalkboard. This was the guy, you’ll recall, who had to redo his first year of medical school at Yonsei University in Korea!
나는 칠판 위에 나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이 사람이 바로 한국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1학년을 다시 해야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My first-place performance shocked all the graduates of U.S. medical schools, and I didn’t have to deal with any snobbery or prejudice from that day forward.
나의 1등 성적은 미국 의과대학 졸업생들을 모두 충격에 빠트렸고, 그 날부터 나는 속물이나 편견에 대처할 필요가 없었다.
I stepped into the bathroom as tears filled my eyes. From that point forward, I held my head up high, confident that I could hold my own against any graduates of U.S. schools. I may have flunked my first-year exams in Korea, but I’d outperformed the Americans at my residency.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바람에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 때부터 나는 미국 학교 졸업생들이라면 누구와도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에 고개를 높이 들었다. 한국에서 1학년 시험을 낙제했을 수도 있지만, 거주지에서 미국인들보다 더 앞섰다.
The tenacious effort I’m describing here is the source of Korea’s strength. When Koreans without any particular qualifications immigrate to the United States, more than 80 percent buy a new car within the year, and more than 80 percent are homeowners within five — something that Americans often struggle to do in 30 years. That’s because Koreans have an amazing capacity for working hard work on a level that immigrants from other countries can’t match.
여기서 말하는 집요한 노력이 바로 한국이 가진 힘의 원천이다. 특별한 자격이 없는 한국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올 때, 80% 이상이 1년 안에 새 차를 구입하고, 80% 이상이 5년 안에 집을 소유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인들이 30년 안에 흔히 하는 일이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타국 이민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수준에서 열심히 일하는 놀라운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I’m always amazed by the Korean people, as well as exceedingly grateful for the education I received at Severance and from my professors.
나는 세브란스에서 받은 교육과 교수님들로부터 받은 교육에 대해 매우 감사할 뿐만 아니라 한국인에 항상 놀라고 있다.
Given the unmatched excellence of the Korean nation, the question remains why do Koreans underestimate themselves so much.
한국 국가의 탁월함을 감안할 때, 왜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과소평가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다.
Human society has undergone greater changes over the past 50 years than at any time in history. And during those same years, Korea has risen up from the ashes of war to join the ranks of the world’s most advanced nations.
지난 50년 동안 인류 사회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한국은 전쟁의 잿더미에서 세계의 가장 선진적인 국가의 반열에 올랐다.
Along with great achievements in national development, Korea has greatly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humanity as a whole. That’s something Koreans should take pride in. It’s reason for us to square our shoulders, stand up straight and speak assertively. It’s reason for us to be leaders, not followers.
한국은 국가발전의 큰 성과와 함께 인류 전체의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다. 그것이 바로 한국인이 자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우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똑바로 서서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팔로워가 아닌 리더가 되는 이유이다.
Whenever I deliver a lecture, I remind Koreans to set aside their defeatist attitude and remember the excellence of the Korean people. It’s time we stopped selling ourselves short.
나는 강의를 할 때마다 한국인들에게 패배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한국인의 우수성을 기억하라고 상기시킨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공매도하는 것을 그만둬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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