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여사와의 1박 2일-첫째 날
가제트
“어제 김여사 병원 다녀 왔다며? 어때?” “그냥 치료 받고 온거야. 아직은 괜찮은가봐”
나와 동생 간의 카톡방에 자주 등장하는 김 여사. 다름아닌 나의 자당(慈堂) 즉, 오마니이시다.
연세가 여든셋이시지만 임플란트 수술로 고생하는 아들 앞에서 자연치아를 반짝이며 이를 닦는 분이시다. 또한 스마트폰을 이용해 건강 정보를 전송하거나 7080 노래를 요즘 말로 스웨그(Swag)있게 부르시는 오마니를 우리 형제는 ‘살아있네, 김여사’ 아니면 그냥 줄여서 ‘김 여사’라 부른다.
지난 5월 말경, 쉰이 넘은 아들로부터 ‘어머니’라는 정중한 표현보다 ‘엄마’ 혹은 ‘오마니’라는 조금은 낯 간지러운 단어로불리우는 김여사와 오랜만에 둘만의 여행을 다녀왔다.
한국에 임플란트 치료 차 간 김에 마음먹고 가기로 했는데 김 여사는 아직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전라도 땅을 원하고 계셨다.
민주화의 성지인 광주를 품은 곳이지만, 나조차도 그 땅을 밟은 적은 딱 두 번 밖에 없어서 늘 목마른 곳이었다. 대학교때 제주도 무전 여행 가느라 목포에 잠깐 들린 경우와 친구 결혼식 때문에 전주에 당일로 가 본적 밖에 없었다. 모자간에다시 의기투합이 되었다. 김 여사와 나는 이런 식으로 늘 꿍짝이 잘 맞았다.
여수,순천을 1박 2일로 돌기로 하였다. 관광 상품을 검색해 봤지만 다 들 빠듯한 일정이라 여든의 김 여사에겐 무리라 판단되었다. 동생이 KTX와 호텔을 예약하고 난 어디를 돌아 볼 것인가를 검색하며 엄마 손잡고 가는 유치원 소풍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모자간의 여행을 기대하였다.
무릎이 안 좋으셔서 한 번에 20분 이상 걷는 게 무리인 김 여사를 위해, 여수는 엑스포와 케이블 카 그리고 시간이 되면여수 밤바다를, 순천에서는 순천만 생태공원과 순천 정원을 보기로 하였다.
이른 새벽, 행신역을 향하는 김여사와 나는 살짝 흥분되어 있었다. 4시간 여를 달려 도착하자 마자 아침겸 점심을 거하게 먹을 작정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전라도 정식을 잘하는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러나 기사가 자신있게 데려다준 그 곳은 오직 해산물 정식만 파는 곳이라 값은 무지하게 비싼 반면 우리가 생각하는 수십 가지 반찬으로 상다리가 휘어지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허무하게 8만원을 날렸다. 김 여사는 돌아 와서도 두고두고 그 얘기를 하면서 여수와 바가지를 한 묶음으로 묶어 버리셨다.
주머니를 단칼에 작살낸 아점을 먹고 난 후 우리는 돌산 공원으로 향했다. 돌산 공원을 구경하고 오동도를 향하는 케이블 카를 타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놀다가 다시 엑스포 공원으로 가려고 택시를 탔다. 그런데 이 택시기사 역시 우리가이방인이라고 대뜸 엑스포는 끝나서 별로 볼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고는 수족관이 오히려 볼 것이 많다며 여수 시내에서 40분 이상 택시를 몰고 가서는 바다 생태 갯벌 수족관에다 내려 놓곤 휭하니 가버리고 말았다. 김 여사는 1층에 전시된 수족관을 보다가 다시 한 번 바가지 운운하시며 구석에 있는 의자에 가서 길게 누워 버리고 말았다.
‘여행을 완전히 잡치게 만든 택시 기사를 잡아 들여서 곤장을 매우 치렸다’ 라고 명령을 내리고 싶었지만 수족관은 휑하니 비어 있었고, 일산 촌녀와 캐나다 촌놈은 짧은 수족관 방문을 마치고 하염없이 택시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20분이 지나도록 빈 택시를 잡을 수 없어 결국 시골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왔다. 버스 안에서 우리의 김 여사는 옆자리의 시골 아낙에게 계속해서 그 몹쓸 기사에 대한 얘기를 하며 화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전라도 정식에서 수족관까지택시 기사에게 2연타를 맞고 깊은 내상을 입은 우리 모자는 그 유명한 여수 밤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고 빨리호텔로 가서 쉬고 싶었다.
동생이 예약한 호텔은 다행히 바다가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객실이었다. 차례로 씻고 나서 모자는 바다가 보이는 큰 유리창 앞에 나란히 앉아, 떨어져 살며 그동안 못했던 얘기들-김여사 경로당 친구들 얘기, 아부지 얘기, 이모부가 석탑 훈장받는 얘기며 멀리는 625 때 부상 당한 이야기 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면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이런저런 이야기 와중에 팝송 이야기가 나오고 난 그 이야기를 이어 받아서 말하였다. “근데 말이야 엄마, 내가 아침에가게 문을 열고 준비를 하면서 늘 노래를 듣거든, 7080 팝송을 듣는데 어느 날, 그 왜 mother of mine하는 노래 알지? 그노래를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 지는 거야. 엄마 생각이 무지 나더라고. 손님들 들어오는 데 눈물 안보이려고 아주 혼났네…”
잠잠히 듣고 있던 김 여사 “그럼 나는 어땠을 꺼 같니, 이 엄마는…”하시면서 목이 메이셨다.
‘이 엄마는 어땠을 꺼 같니’ 아! 아들이 답할 말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목은 목대로 메었고 가슴은 가슴대로 아펐다.
떨어져 산 지 15년. 그 긴 세월, 오마니는 얼마나 아들을 그리워했을까? ‘이 에미는 어떨꺼 같니’라는 그 한마디가 모든걸 말하고 있었다.
길고 먹먹한 침묵이 흐르고 난 두 명의 택시 기사를 다시 욕하기 시작하며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노력했고 김 여사도 곧응답하며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수 밤바다는 짙고 깊어만 갔다. 두 모자의 마음 속처럼….
지금도 맴도는 ‘ 이 엄마는 어땠을 거 같니’를 되새기며 순천은 다음 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