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15장입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이 등장합니다. 지금 욥이나 세 친구들의
말은 그야말로 막상막하입니다. 다 이치에 합당하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욥42장에 가면 하나님의 책망을 듣습니다.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하다’
중요한 점은 세 친구가 욥을 정죄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욥은 이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 결과로 욥은 그들의 심판자로 등장합니다.
세 친구들에게 하나님께서 ‘욥에게 가서 대속의 제사를 드려라’하십니다.
죄와 정죄의 관계는 죄는 어떤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근데 정죄는 그 사람에게
죄인이라는 이름을 붙여버립니다. 예를 들면 도박은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하지만
그로 인해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도박꾼이라는 딱지가 붙어버립니다. 주홍글씨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세리, 창기는 나쁜 놈들이라는 딱지가 붙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아무도 정죄할 자격이 없고, 오직 심판 때에만 정죄를 받고 불 못으로 갑니다.
죄인들은 피의자요 정죄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도 회개하면 구원입니다.
분명히 피의자와 죄수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도 대법원 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가기 까지는 재판을 받고 있는 피의자일 뿐입니다.
욥기서에서 세 친구는 끊임없이 욥을 정죄 하려고 합니다. 그게 그들의 죕니다.
세 친구의 주장은 ‘넌 분명히 죄인이다’ 욥은 ‘나는 결코 아니다’ 라고 주장합니다.
상황윤리라는 말을 하는데 어떤 영화에 만년설 위에 비행기가 추락을 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배가 고파 죽은 동료의 시체를 먹습니다. 나중에 다 살아 돌아옵니다.
그와 같은 극한 상황은 초법적인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괴로워했습니다.
그때는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게 바로 상황윤리입니다.
이런 의식이 기독교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정죄를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차입니다. 극단적인 예지만 어느 교회에서 자매가 오빠를 공부시키기 위해 몸을
팔았다고 합니다. 교인들에 의해 발설되고 난 다음 그 사실을 안 오빠가 자살을 합니다.
그 다음에 그 여동생이 따라서 자살했습니다. 이게 세상의 인심입니다. 사람들 중에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고 나는 맞고 너는 틀린다는 미묘한 심리가 비등합니다.
죄와 정죄와 심판의 관계를 추적해 보면 처음에는 자신들의 죄 문제만 다루다가
결국은 정죄하고 심판하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까지 발전합니다.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듯이 감정이 비등하게 됩니다. 지금 욥과 세 친구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일을 가지고 신앙적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 1억 원을
사기를 쳤다면 이건 세상의 법에 의해 죄가 되는 겁니다, 신앙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상제물이다 교리문제이다 하는 것은 교회법입니다. 교회에서 다뤄야죠.
그런데 요즘 교회의 법은 전부 감정싸움입니다. 반대파를 척결하는 데 사용합니다.
교회 안에서 다뤄야 할 문제를 세상 법정에 끌고 갑니다. 욥의 세 친구보다 못합니다.
욥15장의 엘리바스의 발언내용은 이렇습니다.
4절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5절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6절 “너는 정죄한 것을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
논쟁이 가열되다 보니 감정이 튀어 나와서 정죄를 하고 맙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상대의 죄를 지적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열을 받으면 하나님도 안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진리를 가진 신앙은 어떤 상황이나 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압축시켜 속에 가득 넣어둬야 합니다. 그리고 입 곧 말로
털어대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개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속에 가득 모아두고 쌓아둬야 합니다. 어느 정도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과거 최권능 목사님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자동으로 ‘예수천당’하고
반응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분의 하나님의 말씀의 밀도는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예수천당만큼은 그 목사님에게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일본 순사가 시험해 보려고 목사님 이제 집에 가세요 해도 예수천당 외쳤다고 합니다.
다이아몬드가 숯이나 연필심과 같은 탄소이지만 밀도의 차입니다. 압축의 정도입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말한 헛된 지식이나 동풍은 바람과 같은 지식입니다(욥15:2) 만일
우리가 가진 성경지식이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체화되지 않으면 엘리바스급의 비판자들이
당신들의 동풍과 같은 헛된 지식으로 그 뱃속을 채울 수가 있겠어요 하고 비난할 겁니다.
욥기서의 특징은 왠 말이 그렇게 많으냐 하는 점입니다. 입을 다물게 할 실력이 없습니다.
욥이 자기의 의를 주장하니 세 친구의 속에 있는 것이 총동원되어 튀어 나옵니다.
도무지 서로 결판이 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도움 되지 않는 무익한 말입니다(3절)
5절은 네 속에 죄악이 말하도록 하고 있잖아 하고 지적합니다.
7절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한 마디로 말해서 너만 잘났냐 하는 힐난입니다.
8절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지혜가 너의 전매특허냐 하고 따집니다. 지식을 적용해 보고 나온 결과가 지혜입니다.
따라서 입으로 말하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가 함축된 신비한 몸짓 언어가 중요합니다.
9절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10절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
이건 말재주 밖에 아닙니다. 이처럼 상대방을 말로서 이기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악한 사람은 상대를 말로 공격하면서 화를 내지 않고 슬슬 건드립니다.
백전백승입니다. 빗나간 말 같지만 여자 분들은 좌뇌의 구조이기 때문에 논리성이
있어 남편들에게 조리 있게 따지고 약을 올리다가 그만 안수(?)를 받는 겁니다.
요즘은 가정폭력이라고 해서 그런 경우는 없지만 옛날에는 왕왕 있었지요.
14절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15절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16절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 과연 인간적으로 이 말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요?
이치에 딱 들어맞으므로 욥기를 통해 인생의 교훈으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이 욥의 트랩(trap)에 걸렸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속죄의 제물로 삼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대제사장으로 앉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안다면 이런 건 개똥철학이며 개똥신학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말풍선일 뿐입니다.
첫댓글 아멘 입니다.
진리를 가진 신앙은 어떤 상황이나 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에 "한표" 입니다.
몇일전 회원수가 만명이 넘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목사님과 상담아닌 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그만 욥의 세 친구처럼 진리의 지식이 짧다보니 위로는 커녕 마음에 짜증만 나더군요. 따라서 진리의 지식을 따라 성령께서 영의 생명으로 제 심령에 전달.운반한 것만이 진정한 나의 양식이 된다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지식과 양식의 차입니다.
이 시대는 교육학에 의한 지식이 난무합니다.
바울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복음에 섞지 않겠다고 말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하노라 말한 것은 영의 양식을 얻는 길은
그길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양식을 채워주시길 바라며 마음의 잔을 들게 하신 주를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