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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八公山下] 팔공산을 天山으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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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동편 주능선에 나타나는 돌봉우리등. 사진 왼쪽부터 토끼귀 같이 두개로 갈라져 올라간 방아덤, 위가 불룩한 노적봉, 육면체 형상을 한 농바위가 보이고, 맨 오른쪽에 관봉이 있다.
동화사골 뒷담 역할을 끝낼 즈음, 주능선은 어느덧 동서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남북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 사이 부채꼴의 호(弧)를 타고 도느라 산줄기가 ┐형으로 굽은 탓. 따라서 그 이후엔 사면도 남북사면이 아니라 동서사면으로 나타난다.
주능선이 동화사골 뒷담의 역할을 끝내는 것은, 930m봉에서 큰 산줄기가 하나 서사면(西斜面)으로 내려간 때문이라고 했다. 그 산줄기가 동화사골과 구분지어 주는 골은 느패골(골프장골)이다. 그런 다음 주능선은 잇따라 동사면으로도 줄기를 하나 내니, 그 북으로 거조암이 있는 청통면 신원리 마을, 남으로는 은해사골이 포진한다. 이 줄기의 출발점이 되는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는 것 같으나, 본래 이름이 찾아질 때까지는 일단 '운부봉'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놔 보자. 거기서 출발한 줄기가 얼마 달리지 않아 가지 줄기를 내서는 두 줄기 사이의 골 안으로 '운부암'(雲浮庵)을 품어들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두 개의 능선을 동서로 흘려 보낸 주능선은 느패재(800m)로 몸을 완전히 낮춘다. 저 멀리 파계재 이후 가장 낮은 자세. 이 재를 통해 서사면의 느패골(골프장골)과 동사면의 은해사골이 연결된다. 느패골에서 느패재를 넘으면 운부곡 안의 느패를 거쳐 은해사골 입구로 갈 수 있다. 느패재를 지난 주능선은 느패골 뒷담 산에 해당하는 882m 봉우리로 높아지면서 동쪽으로 또 한 개의 산줄기를 낸다. 은해사골 남쪽 줄기이자 와촌 갓바위골의 북편 줄기. 영천시와 경산시, 청통면과 와촌면의 경계선이 되는 줄기이기도 하다.
882m봉 일대의 풍경은 매우 특이하다. 봉우리 윗면이 상당히 넓어 마치 광장 같다. 남북 방향 주능선과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가지 산줄기가 만나 ├ 형의 완벽한 삼거리를 이뤘다. 가지 산줄기를 한참 따라 가도록 의자들이 쭉 가설돼 있어 공원 속을 걸어 다니는 것 같다. 그 높은 능선 풍경이 이러니 오히려 혼란스러울 지경.
와촌 솔뫼기(솔목) 마을의 한 어르신은 그 봉우리 이름을 '시루봉'이라 기억해 냈다. 하지만 완전한 조사가 이뤄질 때까지는 우선 '은해봉'이라는 가칭을 부여해 놔 보자. 누군가가 현장 돌 표석에 '능성재'라 새겨 놨으나, 결코 속아서는 안될 엉뚱한 일일 터.
이 지점을 지나 더 남쪽으로 가면 소위 '선본재'라는 낮은 곳이 나타나고, 뒤이어 희한하게 생긴 봉우리가 다가선다. 돌 봉우리 두 개가 토끼의 두 귀같이 솟아 있는 것. 남사면의 동네 노인들은 예부터 '방아쌀개덤'이라 불렀다고 했다. 디딜방아의 부품에 비유했을 터. 그럴 경우 더 적확한 비유어는 '방아볼씨덤'이 될 것이다. 이 시리즈에서는 부르기 쉽도록 '방아덤'으로 표기해 보자. 방아볼씨보다도 디딜방아의 두 다리 형상에 가깝기도 하다.
이 방아덤과 관봉 사이에 돌 봉우리가 두 개 나타난다. 방아덤 쪽으로 먼저 나타나는 것은 볏가리를 닮았다. '노적가리'와 같은 말로 쓰이는 볏가리는, 볏단을 한데 모아 둥그렇게 쌓아 올린 뒤 비가 내려도 스며들지 않도록 윗부분을 불룩하게 지붕처럼 만든 것이다. 이 봉우리에서 중요한 산줄기 하나가 출발한다. 서쪽으로 흘러내리며 느패골과 도장골(북지장사골)을 구분 짓는 줄기가 그것이다.
이 봉우리의 이름을 국가 공식 지도는 두 가지로 헷갈리게 표기하고 있다. 2만5천분의 1 지도는 인봉(印峰)이라 했다. 그러면서 거기서 출발한 산줄기가 한참 내려 간 지점에 있는 봉우리를 노족봉(老足峰)이라 적어 놨다. 그러나 같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만든 5천분의 1 지도는 그 두 이름을 뒤바꿔 표기했다. 위의 것을 노족봉, 아래 것을 인봉이라 써 뒀다.
답답해 현지민들을 찾아 나섰다. 먼저 도장골 쪽으로 찾아가 아래에 있는 봉우리를 물었다. 누구 없이 명백히 '인봉'이라고 했다. 동그란 도장 같이 생겨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었다. 어떤 지도에 노족봉이라 적혀 있더라고 했더니 희한한 일이라고 했다. 그럼 위쪽에 있는 봉우리의 이름은 뭘까? 이에 대해서는 와촌면 대한리 솔뫼기 마을 어르신들이 명백히 답해 줬다. 볏가리를 닮았으니 당연히 노적봉 아니냐고 했다.
어르신들은 그러면서, 방아덤과 관봉 사이의 두 돌봉우리 중 나머지 하나, 관봉 쪽에 있는 것의 전래 명칭은 '농바위'라고 가르쳐 줬다. 정확히 육면체의 형상을 해 사각 빨래비누를 연상시켰으나, 옛날 선조들은 그것에서 네 귀가 반듯한 장롱을 연상했던 모양이었다. 농바위라는 이름은 이번 취재 과정에서 더러 만날 수 있는 돌 봉우리 이름이기도 했다. 선조들의 가난했던 옛 생활에서 장롱은 매우 소중하고 몇 안되는 가구 중 하나였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농바위 이야기를 하면서 마을 노인들은 그 농바위 밑에는 농바위골이 있다고 알려 줌으로써 전래 명칭에 더 확신을 갖게 했다. "고려 말 포은 정몽주 선생이 농바위에는 옷, 노적봉에는 양식을 넣어 두고 이곳에서 공부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고도 했다.
이런 전래 명칭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는 사이에, 외지 등산객들은 '농바위'와 '노적봉'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둘 다를 노적봉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었고, 육면체의 농바위를 노적봉이라 지칭하는 경우도 흔했다. 국가 공식 지도가 혼란을 일으키는 것도 같은 연유 때문일 터.
하지만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옛 어른들이 붙인 전래 명칭은 매우 지혜로와 보였다. 장롱은 네모 반듯하지 않으면 쓸모 없을 터였다. 그런 모양으로는 만들기도 쉽잖을 일. 반대로 노적가리가 그랬다가는 비에 젖어 벼를 썩히기 십상이리라. 노적가리는 당연히 위를 불룩하게 하고 빗물이 잘 흘러내려 가도록 지붕처럼 덮어야 한다고 했다.
이제 그동안 혼란스러웠던 선본재∼관봉 사이의 돌 봉우리 이름들이 전래의 명칭을 회복하게 된 셈이다. 선본재 쪽 것에서부터 다시 정리하자면, 토끼 귀 같이 생긴 것은 '방아덤'이다. 볏가리 같이 위가 불룩하고 덩치가 큰 봉우리는 '노적봉'이다. 노적봉에서 흘러 내려간 산줄기의 북지장사 윗부분에 있는 돌 봉우리의 이름은 '인봉'(도장바위)이다. 노적봉을 지난 뒤 주능선에서 만나는 반듯한 육면체 모습의 것은 '농바위'이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관봉이다. 갓바위 부처님이 자리 해 밤낮으로 사람의 발길이 이어지고 부산·울산에서 매일 여러 대의 정기 버스가 다니는 전국적인 기도처이다.
관봉은 흔히 주능선의 마지막 봉우리로 꼽힌다. 하지만 산줄기 흐름이 거기서 멈추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점차 낮아지며 더 남쪽으로 달린다. 그러는 중에 주능선은 동쪽으로 또 한 가지를 내니, 이 줄기는 655m 봉우리를 거쳐 명마산(500m)으로 맺힌다. 줄기의 남쪽은 경산 와촌의 청통천으로 가는 박사천 계곡에 의해 파였고, 반대 방향으로는 동화천이 흐른다. 둘이 온전히 연결됐다면 주능선의 흐름은 여기서 생명을 마쳤을 터.
하지만 대왕재에서 그랬듯 주능선은 이 즈음에서 또한번 기사회생한다. 위기를 딛고 환성산으로 되살아 오르는 것. 그 뜀틀이 능성재이다. 그래서 이 재는 대왕재와 함께 팔공산에서 가장 주목받아야 할 혈(穴)이 아닐까 싶다.
동편 주능선이 팔공산 본체의 막바지에 맺어 놓은 관봉 위 갓바위 불상. 주능선은 이 관봉을 지나 능성재로 완전히 낮아졌다가 환성산으로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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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주능선 고저표(※그림을 클릭하면 원본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팔공산의 주능선은 능성재에서 끝나지 않고 남으로 더 이어 달린다. 하지만 그 흐름만 계속 따라붙기가 제법 힘겹다. 물론 앞으로도 그 길을 다시 따라 걸어야 하겠지만, 이쯤에서 잠시 숨을 골라 보자. 대충이나마 살펴 온 가산에서 관봉에 이르는 구간의 주능선을 다시 한번 돌아볼 겸 해서 말이다.
주능선 고도 그래프를 그려보면 주위 능선보다 낮은 부분들이 눈에 띈다. 산줄기를 넘어 다녀야 할 사람이 있다면 택할만한 곳일 터. 그렇게 해서 길이 되면 그것은 '재'라 불린다. 능선 중에서는 낮은 곳이지만, 계곡을 오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노정(路程)에서 가장 높은 곳. 그런 뜻에서는 '고개'라 불린다. 재와 고개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일 터.
큰 산에서 이런 재를 쉽게 분별해 내는 수단으로 새로 등장한 것이 헬기장 아닌가 싶다. 재가 될만한 곳은 대개 다소 넓은 고원 평지를 형성하고 있어 그곳에 헬기장을 닦기 때문일 것이다. 팔공산에서도 오래된 여러 재 자리 인근에는 거의 헬기장이 분포하고 있다.
팔공산 주능선의 양쪽 사면을 잇는 재의 이름으로는 가산 쪽에서부터 선돌재(690m), 한티재(700m), 파계재(800m), 마당재(948m), 미정재(963m), 느지미재(1080m), 장군메기(1128m, 생부처메기), 도마재(955m), 바른재(850m), 느패재(800m), 선본재(800m) 등등이 오르내린다.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느지미재'라는 이름은 흔히 '오도재'라 부르는 그것이다. 하지만 그 밑 마을인 용수동 사람들은 그걸 전통적으로 느지미재라 불러 왔다고 했다. 오도재란 명칭은 그 너머의 오도암에서 따 등산인들이 붙인 이름인 듯했다.
현장을 다녀 본 결과, 재는 높이가 낮다는 이유만으로 생길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주변에 오르기 쉬운 완만한 경사지가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름만 재일 뿐 실제로는 역할을 못하는 대표적 사례가 선본재 아닌가 싶었다. 선본사 안의 금당골을 따라 올라가면 주능선이 800m 수준까지 낮아지는 구간이 나타나고, 등산 지도들은 이를 선본재라 표기해 놓고 있다. 그러나 그 낮은 구간의 양쪽으로는 절벽 같은 급경사가 쏟아져 내려 사람 통행이 불가능하다. 모양만 재일 뿐인 셈이다.
또 양사면 중 한쪽으로만 길이 나서도 온전한 재라고 할 수 없을 듯했다. 재는 능선을 사이에 둔 두 고을 사람들이 통행하고 교통할 수 있어야 제대로 역할 하는 것일 터. 그러나 남쪽 사면에만 길을 갖춘 재들이 적잖았다. 제대로 평가하자면 '반(半)재'라 해야할 듯했다. 반만 재라는 이야기. 그런 것들은 대구쪽 등산객들이 산을 오르느라 만든 등산로에 불과할 뿐 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재에서 관찰되는 또 하나 특징은 그것도 영고생사(榮枯生死)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시절의 변화에 따라 묻혀 가는 재가 있는가 하면, 새롭게 떠오르는 재가 있는 것이다.
느지미재, 바른재가 위기를 맞은 듯 하고, 느패재는 사양화의 첨예한 예가 아닐까 싶었다. 동사면의 '폭포골' 끝에 있는 '바른재'는 거조암골로 통하는 길목. 하지만 늘어난 자동차에 역할을 넘겨줬는지 재 바로 너머 약수터 즈음에서부터 길이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서사면의 느패골(골프장골)과 동사면의 은해사골 및 거조암골을 이어 온 느패재는 등산이 아니라 주민의 생활에 꼭 필요한 오래된 통로였다. 위치상으로도 갓바위와 도마재 사이 5km 구간의 중간에 위치해 실용성이 더 높았을 터. 신녕향교 하 도 전교는 "군위-우보-고로-신녕 사람들이 대구로 가는 주 통로가 느패재였다"며 "그 길을 유지하기 위해 동네 일꾼이 '팔공산 길 닦으러 가이소' 하고 외고 다녀 사람을 모았었다"고 기억했다. 포항 가 소금 사서는 신녕 와 자고 느패재 넘어 대구로 팔러 가던 옛 얘기도 나왔다. 공산쪽 마을의 권오식 노인회장은 "옛날에는 선본사 물품들도 모두 느패골-느패재를 통해 운반됐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골프장 건설로 서사면의 길이 끊김으로써 이 재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음이 확실해 보였다. 골프장 쪽 길은 낙엽에 덮이고 흘러내리는 흙에 묻혀 길 줄기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동편 운부골로 난 길도 걷기가 쉽잖아, 골 안에 있다는 '느패'라는 곳을 확인하려 접근을 시도했지만 산돼지에 놀라 물러서야 했다. 이제 등산로들은 골 대신 능선을 택하고 있는 듯했다.
이런 반면 근래에 인기가 부상한 재도 있었다. 한티재는 자동차 시대로 제철을 맞았고, 장군메기는 등산 열풍으로 급부상한 것으로 관측됐다. 주봉과 미타봉(동봉) 사이에 있는 장군메기는 높이로 봐 재가 형성되기 곤란한 곳. 주민들도 "옛부터 길은 있었으나 오르기 힘들어 자주는 안다녔다"고 했다. 그런 약점까지 뛰어 넘으며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등산 붐 덕분. 남사면에서 올라가 북사면의 치산계곡으로 통하기 좋다는 것이다. 한 등산인은 "여름철엔 미타봉으로 올라갔다가 이 재를 통해 공산폭포에 내려가 목욕한 뒤 저녁녘에 돌아오기도 한다"고 전했다.
이런 부침 속에서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재 역시 있었다. 파계재와 도마재가 그것.
도마재는 영천 치산리 등의 사람들이 대구로 다니던 통로였다. 그곳 사람들은 너무도 몸에 익게 다녔던 길이라 이 길과 그 이름에 대해 한낱 의심스러워하는 바도 없었다. 치산계곡의 동애골을 타고 올라가 이 재를 넘으면 동화사 폭포골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 도마재는 북사면으로 아주 완만한 경사지까지 갖춰 이젠 등산코스로 성가를 높이고 있다.
파계재는 예부터 통행인이 많아 그런 사람들을 위한 주막촌이 부계 쪽에 형성돼 있었을 정도라 했다. 주막촌이 형성됐던 곳은 지금의 수월정사 부근, 세 집이 모여 있어 '시찌배기'로 불렸다고 했다. 대율 출신 홍상근 군위군의원은 "부계에서 대구는 흔히 50리 길이라 말해져 왔다"며 "옛날엔 한티재나 파계재를 통해 대구의 학교나 시장으로 넘어 다녔다"고 했다. 본인 역시 학생 시절 쌀과 땔감(장작)을 지고 파계재를 넘어 다녔고, 그의 자형은 하룻만에 파계재 너머 서문시장 장을 봐 오기도 했다는 것.
파계재는 이같이 매우 중요한 길목이었지만, 국가 표준 지도가 위치 표시를 잘못 하고 있었다. 2만5천분의 1 지도는 물론 심지어 5천분의 1 지도까지 나서서 파계재라 표시하고 있는 부분은 파계사 뒷부분에서 주능선이 남쪽으로 조금 불거져 나온 곳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보면 이 부분은 능선이 낮아진 곳이 아니라 오히려 급등하는 구간이다. 주능선이 장꼬방봉을 향해 치솟기 시작하고, 거저산에서 올라 온 가지능선이 치솟아 오르는 경유점이다. 높이가 무려 935m나 된다.
재라기 보다는 봉우리로 오해될 정도로 두드러진 지형인 것. 그래서 파계사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우뚝 치솟은 그것이 장꼬방봉(세칭 파계봉)이 아닌가 드물잖게 지레짐작하기도 한다. 옛 어른들이 '물불산'이라 잘못 지목했던 것도 이것 아니었나 싶다. 봉우리처럼 보이면서 물불골의 뒷담에 해당되는 것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확인한 진짜 파계재는 그보다 서쪽으로 더 나간 곳에 있었다. 일대 능선 중 가장 낮아 높이가 800m밖에 안되는 것으로 관측됐다. 그런데도 지도들이 그런 실수를 한 것은 지도 도면이 부르는 착시현상 탓인 듯 했다. 도면에서는 높낮이가 아니라 남북 위치에 따라 선이 높아졌다가 낮아졌다가 하는 것이다.
등산 붐이 일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장군메기' 재. 주봉과 미타봉(동봉) 사이로 난 이 재를 통하면 남사면의 동화사 암자골이나 수태골과 북쪽의 치산 계곡을 쉽게 연결할 수 있다. 장군메기에서는 높이가 6m나 된다는 자연 선돌에 새겨진 불상이 늘 등산객을 바라보고 있다. 흔히 만나는 불상과 달리 얼굴과 표정이 민중 속의 우리 자신을 닮았다. 계곡을 쉽게 연결할 수 있다. 장군메기에서는 높이가 6m나 된다는 자연 선돌에 새겨진 불상이 늘 등산객을 바라보고 있다. 흔히 만나는 불상과 달리 얼굴과 표정이 민중 속의 우리 자신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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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봉의 한 풍경. 외지에서 온 등산객들이 잘못된 현장 지명 표지로 혼란을 겪고 있다. 앞에 보이는 표석 윗부분에는 이곳이 '능성재'라고 씌어 있다.
앞서서 '장꼬방봉'이 '파계봉'으로, '노적봉'이 '인봉'이니 '노족봉'이니 하고 엉뚱하게 불리는 현장을 살핀 바 있지만, 잘못된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지역민들이 소홀히 하는 사이에 팔공산의 봉우리나 재 이름에 엉터리가 마구잡이 발생해 있었다. 가짜 이름들은 산기슭 사람들이 쓰던 전래의 진짜 이름을 밀어내고는 자신이 진짜인양 행세하고 있었다. 이름마저 엉터리가 되게 놔두는 판국에서 팔공산이 제대로 대접받게 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현장에서 보니, ’도마재’는 난데없이 '신녕재'로 둔갑돼 있었다. 옛날부터 이 재를 수시로 넘나들었다는 남북사면의 여러 어르신들에게 물었으나 누구 없이 "그건 도마재"라고 했다. 산성면 백학1리 노인들은 "신녕재라는 이름은 듣도보도 못했다"고 했다. 팔공산 주봉을 앞마당 같이 바라다보는 백학2동 어르신들 역시 "주능선에 신녕재라는 것은 없다"고 했다. 대구 공산쪽 어른들은 도마재라는 명칭에 이견 있음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래서이겠지만 국가 공식 지도도 도마재라 표기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도 등산 지도들은 신녕재라 적고 있었다. 대구-경북 공원관리사무소마저 현장 일대 여러 곳에 그렇게 안내해 놓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은 것일까?
느패재도 '능성재' '능선재'로 엉터리 표기되고 있었다. 대구-경북의 공원관리사무소가 곳곳에 안내판을 붙여 엉터리 이름을 널리 전파하는 선봉에 서 있었다. 더욱이 느패재는 위치 표시에서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영천 신녕과 청통 노인들은 '느패'라는 것이 주능선 동사면의 은해사 골 제일 안쪽 운부골에 있는 땅 이름이라고 했다. 주능선 바로 밑에 있으면서 여러 산줄기들에 둘러 싸여 평평하고 널따란 분지를 형성하고 있는 곳. 얼마 전까지도 몇몇 농가가 그곳에 살면서 밭을 일궜다고 전했다. 그 위에 있는 재가 바로 느패재. 이 점은 그곳으로 나무하러 다닌 적 있다는 노인들에 의해 의심의 여지없이 인정되는 공통의 사실이었다.
대구 공산쪽 어르신들은 "이 재는 느패재로 불리거나 동국여지승람에서처럼 능패령(能覇嶺)이라 불렸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느패골이라는 골도 있다고 했다. 지금 골프장이 있는 골이 그것. 이 골은 본래 백안동의 동네 산이어서, 논에 거름으로 넣을 풀을 베거나 나무를 하는 등 동네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활동 터전이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이 마을 출신 송상무씨는 "봄철에 특정한 날을 잡아 동네에서 산신제를 올린 뒤 동시에 풀베기를 시작하곤 했었다"고 기억했다.
대구 공산동 지역 어르신들이 모여 취재팀에게 전래 지명을 가르쳐 주는 모습. 취재팀은 팔공산 주변의 마을들과 경로당을 돌며 옛 지명 확인 작업을 벌이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 것은 느패라는 말의 유래에 대한 해석뿐이었다. △넓은 곳이어서 느패로 불렸을 것이라는 추측과 △늪 같은 곳이어서 그런 이름이 생겼으리라는 추측 및 △능패령에서 느패령으로 변화하면서 생겼으리라는 풀이가 제시됐다.
이 재는 주능선상의 운부봉과 은해봉이라는 두 봉우리 사이에 있다. 그 봉우리들에서 두 개의 산줄기가 출발해 그 중간을 은해사 계곡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느 산악회에서 세웠다는 현지의 돌 푯말은 재가 아닌 은해봉 봉우리를 재라 지목했고, 그것도 느패재가 아닌 '능성재'라 써 놓고 있었다.
주능선상의 지형들만 이름이 잘못돼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골의 이름이 비틀려 버린 경우도 있었다. 골과 골을 넘어 다니던 재 이름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겨 있었다. 앞으로 각 골짜기를 자세히 살필 때 검토해 나갈 예정이다.
어쨌든 이번 취재를 통해 팔공산 주능선상의 중요 재와 골, 일부 봉우리들의 전래 명칭이 드러나 혼란이 정리될 기틀이 마련된 듯하다. 하지만 주능선을 거의 다 달려 종착점을 앞둔 지금까지도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가 적잖다. '팔공산하'가 임시 명칭을 부여해 호명하고 있는 봉우리들의 본래 이름을 찾아내는 것이 그것이다.
가산과 부계를 가르는 줄기가 출발하는 부계봉, 대왕재-도덕산으로 가는 줄기의 출발점인 870m대 봉우리군, 장꼬방봉, 신녕봉, 운부봉, 은해봉 등등이 제 이름을 찾고 확정해야 할 봉우리들이다. 정상부의 서봉-주봉(중봉)-동봉은 팔공산의 상징적 지형들이란 점에서 그 이름 찾기가 특히 급한 상황. 저절로 명확한 것이 없으면 합의해서라도 확정해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지역민 모두가 애향심으로 동참하지 않고는 이뤄낼 수 없을 터. 에베레스트산 조차 그걸 측량했던 영국인의 이름을 버리고 주민들을 따라 초모렁마라 부르도록 만들고 있는 훌륭한 모범 사례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팔공산하'가 의견 교환의 장으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해 놨다. www.imaeil.com에 들어서면 '팔공산을 천산으로'라는 창이 열려 있다.
그러나 이제는 지방정부와 시민단체 등이 주도적으로 나서야 할 때가 됐다 싶기도 하다. 대구시청, 경북도청, 해당 시군구청, 산악연맹 및 지역 사랑운동 단체 등이 연대해 '지명확정위원회' 같은 것을 가동해야 할 것이다. 거기서 보다 정밀한 현장 조사를 실시하고 확인된 지명은 각각의 현장에 표지판을 세워 알려야 할 터이다.
도마재를 신령재로 잘못 안내하고 있는 대구시 공식 표지판.
특히 대구시청과 경북도청은 스스로의 과실을 바로 잡겠다는 책임감에서라도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곳곳에 표지판을 세워 결과적으로 왜곡된 지명을 널리 퍼뜨리는 주동자 역할을 한 것이 이들 지방정부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지명 조사 없이 왜 그런 엄청난 일을 시도했던 것일까? 결자해지 한다는 소명의식에서라도 전래 명칭으로 시급히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 팔공산에 지역사 박물관을 ---
지금 여기 사는 우리가 할 일은 그러나, 지명을 바로 잡는 정도에 그쳐서 될 일도 아닐 것이다. 팔공산 품안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흔적을 수렴해 놓는 일이 급해졌기 때문이다. 광복 전후사를 살아 왔던 사람들이 연로해져, 그들이 간직해 온 기억과 낡은 사진첩들이 사라져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자신의 역사를 모르는 자는 또다시 어렵고 힘든 세월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새 나라 이 땅에 새 교육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향토에 근거를 두지 않고 또는 이에서 출발하지 않고 어찌 능히 튼튼한 기반을 닦을 수 있겠는가". 광복 즈음에 당시 공산국교의 문보근 교장은 이미 그같이 일갈했었다. 그러면서 그 어렵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공산면의 역사와 당시 상황을 정리해 1950년 1월 '우리 고장'이라는 이름의 30쪽 짜리 소책자로 출판했다.
이런 선각자들이 적잖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아직도 지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거나 보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식 역시 부족하다. 이번 취재 과정에서도 몇 가지를 물으려 해당 관공서로 전화했다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당해야 했을 정도였다.
팔공산에도 그 과거를 수렴하고 미래 설계의 자료를 마련할 주체가 만들어졌으면 싶다. '팔공산 지역사 박물관'이 제격일 터. 지역민들이 팔공산을 제대로 만날 수 있도록 도울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더 좋을 것이다.
'청량산 박물관'이 좋은 전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박물관은 800여평 부지에 180여평의 전시실을 만들어 작년 6월 개관했다. 청량산을 배경으로 한 문화-자연 유산의 정리 보전, 지역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 탐방인에 대한 정보 제공 등등이 설립 취지로 제시돼 있다. 운영 주체래야 봉화군이라는 크잖은 지방정부. 대구시와 경북도라는 광역 지방정부가 맡고 있는 팔공산이 그보다 못해서야 어디 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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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성산에서 바라 본 팔공산의 이중구조. 일렬로 늘어선듯 하는 봉우리들은 왼편 세번째부터 응봉, 응해산, 도덕산 등이다. 본체와 큰 골로 갈려 전혀 딴 덩어리 같이 보이는 풍경이 매우 새롭다. 바로 앞으로 보이는 환성산 줄기는 그 오른쪽의 동화천골에 의해 또 본체와 갈려 보인다.
가산에서 관봉에 이르는 구간의 주능선에 대해 그렁저렁 얘기를 매듭지었으니, 다시 산줄기의 흐름을 따라 걷기 시작해야 할 시간이 온 셈이다. 사람들은 흔히 주능선과 거기서 발원하는 줄기들만으로 팔공산을 인식한다. 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 팔공산의 본체라고 부를 만한 부분일 뿐이다. 팔공산의 남사면(南斜面)에는 그 본체말고도 또다른 특이한 산 덩어리들이 포진하고 있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가 있는 듯 보이는 대표적인 산 덩어리는 '환성산군'(環城山群)으로 부를 수 있는 그것이다. 능성재라는 가녀린 맥을 타고 이어진 뒤 이루는 거대한 산군. 이 덩어리를 본체와 떼어놓으려 하는 것이 동화천과 박사천이다. 능성재에서 동쪽으로 출발한 박사천은 와촌에 이르기까지 큰 골을 이뤄 그 북쪽의 팔공산 본체와 남쪽의 무학산 줄기가 완전히 동떨어진 산 덩어리인 듯 보이게 만든다. 능성재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동화천 역시 백안, 미대, 공산댐, 연경동, 동서변동의 가운데로 달리면서 땅 덩이를 갈라놓는다.
도덕산군(道德山群)도 환성산군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 대왕재로 이어진 뒤 큰 덩어리를 이루는 이 산군은 그 3면을 흐르는 하천과 계곡들 때문에 팔공산 본체와는 동떨어진 듯 보인다. 서쪽으로는 대왕재에서 시작해 송림사 앞을 거쳐 동명면사무소 있는 마을까지 내리 흐르는 구덕천과 그 계곡이 그런 단절감을 형성한다. 동쪽으로도 송정천이라는 물줄기와 큰 계곡이 생겨 지묘천 넓은 골로 합류해 들어가니 그 쪽에서도 단절감이 확연히 높아진다.
그러나 환성산군이나 도덕산군은 결코 팔공산 본체에서 독립해 있는 별개의 산덩어리가 아니다. 본체와 하나로 이어진 별체의 관계에 있을 뿐이다. 먼저 산줄기의 연속성이 그것을 증명한다. 산줄기는 물에 의해 끊겨야 흐름을 마친다. 그러나 이 산군들로 가는 줄기들은 어떤 위기에도 물 흐름이 그 위를 지나가도록 허용하지는 않는다. '분수령'이라는 자존심을 절대 양보하지 않는 것이다. 한때 대왕재와 능성재에서 끊어질 듯 낮아지긴 하나, 그런 정도의 위험은 아무리 큰 산줄기 흐름이라도 드물잖게 겪어야 하는 상황일 뿐이다.
국가의 지리 인식도 이런 흐름을 인정하고 시작한다. 주능선이 능성재를 건너 환성산으로 다시 치솟았다가 금호강에 닿아서야 달리기를 멈추듯, 대구와 경북의 경계선도 이 줄기를 따라간다. 대왕재를 건너 도덕산으로 치솟았다가 금호강과 팔거천을 만나고서야 주행을 마치듯 이 부분 대구 경북의 경계선 역시 이 맥을 따라간다.
본체와 별체가 둘이 아닌 하나임은 현지인들의 인식에서도 드러나고 그들의 생활상에서도 그랬다. 미대 마을 사람들은 물 건너에 있는 문암산을 당연한 동네 앞산쯤으로 여긴다. 박사천 쪽으로 봐도 명마산 줄기의 기슭에 있는 양지마을과 무학산 줄기의 기슭에 있는 음지마을이 하나로 합쳐져 음양리가 된다. 별체 사이에서도 그런 관계가 이뤄져, 동변동(환성산군권) 없는 서변동(도덕산군권)은 생각할 수 없다. 그 둘이 모여야 온전한 하나의 골짜기를 형성한다. 골로 갈렸더라도, 그 양쪽에 있는 산줄기들은 상관없는 관계가 아니라 합세해 공동의 골짜기를 만드는 협력자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 팔공산 본체는 금호강과 팔거천에 이를 때까지 기슭을 줄곧 이어가지 못한다. 중산간 즈음에서 내려서기를 중단해 버리는 듯 하면서 그 아랫도리 역할은 이렇게 끊어질 듯 이어진 다른 땅덩어리들에 맡겨 놓고 있다. 산에 기대고 물에 잇대어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할 때, 팔공산의 물 가 자락 역할을 해 준 것은 이들 별체였다. 환성산군 자락은 대구 동변동에서 경산 하양에 이르는 금호강변 마을들이 기대어 사는 울타리였고, 도덕산군 자락은 서변동에서 조야-노곡-칠곡까지의 마을들이 금호강에 접해 살던 뒷울이었던 것이다.
본체와 자락의 관계는 아니지만, 송림사 뒷산이나 거저산 덩어리도 사정이 닮은 경우이다. 송림사 뒷산은 구덕천과 남원천에 의해 양쪽이 패여 팔공산 본체에서 떨어져 나가 있는 덩어리처럼 보인다. 그 잘록한 부분을 딛고 남원리라는 큰 마을이 형성돼 있을 정도.
거저산군의 경우, 거저산 자체부터가 '들뫼재'로 본체와 나뉘어져 거기로 도로가 나 있다. 더욱이 그 산 밑 응해산에서 출발해 왕산으로 흐르거나 혹은 응봉을 거쳐 공산터널 위로 흐르는 아랫 줄기는 열재에서 흐름이 완전히 끊긴 독립된 덩어리인 듯 보인다. 거저산에서 바로 삼마산으로 이어 가는 줄기 역시 끊길 듯 이어지는 형상이다.
본체와 별체가 동떨어진 것이 아닌데도 흔히 본체만 팔공산이라고 인식되는 것은 팔공산 남사면의 구조가 갖고 있는 이같이 특이한 이중성 때문이다. 그 이중성은 팔공산으로 하여금 중턱에 평평하고 넓은 경사면을 펼치고, 거기에 중산간 마을들이 들어앉게 하고 있기도 하다. 거기로 쉽사리 길이 날 소지를 장만함으로써, 남사면의 이중 구조는 결과적으로도 팔공산 자신의 허리가 잘리는 아픔을 자초하게 된 듯하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팔공산의 화강암괴. 이 화강암 마그마가 뚫고 들어가면서 본래 있던 퇴적암층을 옹기 같이 단단하게 구워 놔 뒷날 봉우리로 솟아 남게 만들었다.
이중 구조 왜 생겼나?
'팔공산하'는 시리즈 9회 차에서 대구 앞산과 달리 팔공산은 화강암이 치솟아 올라 생긴 산이라고 했었다. 그 때문에 희고 밝아 기품 있음도 살폈다. 하지만 '화강암 관입'은 그것으로 끝날 수 없는 또다른 여파를 지니고 있다.
또 한번 전영권 교수의 설명에 따르자면, 화강암은 그냥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열로써 본래 있던 퇴적암을 변질시켜 놓는다. 그 결과 새로 만들어진 암석이 '변성 퇴적암'이다. 이 암석은 뜨거운 열에 의해 구워진 것이어서 매우 단단하다. 본래부터 무른 성질의 화강암이나 보통 퇴적암과는 다르다.
때문에 나중에 침식이 진행되면 암석들 사이에 운명이 엇갈린다. 이 지역의 본바탕이었던 퇴적암은 물러서 빨리 침식되고 화강암도 쉽사리 닳는다. 반면 변성암은 단단히 구워진 옹기 같다 보니 쉽게 침식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면 변성암은 침식을 잘 견뎌 산봉우리로 살아 남을 터. 반대로 퇴적암은 침식돼 자꾸 낮아짐으로써 계곡이나 분지 모습이 되며 그 위에 충적층이 쌓이면 들판이 될 것이다.
팔공산 남사면의 이중 구조는 이렇게 해서 발생했다. 퇴적암들은 깊이 패여 중산간 마을들의 터전이 됐다. 반면 변성암은 남아서 팔공산 남사면의 여러 개 산봉우리들을 형성했다. 봉우리들은 가락지 같이 둥글게 팔공산을 에워싸고 있다고 해서 이들을 한데 엮어 '환상(環狀) 산맥'이라 부른다. 이 봉우리들의 암석이 특징 있다보니 수석으로 좋다고 해 그 주위를 맴도는 수집가들이 생겨나기도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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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성산군 산경도 및 주요지형 (※그림을 클릭하면 원본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팔공산의 '별체' 중 환성산군은 '능성재'를 통해 본체와 연결된다. 재가 있는 지경 마을 어르신들은 능성재라는 이름이 예부터 전해져 온 것이라 했다. 하지만 제작된 지 140여년 된 대동여지도는 그 어드매를 '향림치'(香林峙)라 지목했다. '향림'은 도동의 측백수림을 향나무 숲으로 혼동해 부르던 이름. 옛날 재 이름은 지금과 달랐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해발 320여m의 이 능성재를 넘어선 주맥은 곧바로 670m대까지 솟구쳤다가 600m로 추락하는가 하면 그 즉시 같은 높이를 회복하는 등 사납게 요동친다. 그러다 675m봉에 도달해서는 '무학산'까지 이어가는 산줄기 하나를 동쪽으로 흘려 보낸다. 북편으로 박사천을 거느리는 이 줄기의 무학산까지 가는 시간 거리는 1시간20분 전후.
무학산 가는 줄기는 줄곧 600m 이상의 높이를 유지하다가 구간 최고 644m봉에서 북쪽으로 불굴사 석굴을 들어 앉힌다. 하지만 그 직후 거의 100여m나 폭락해 높이 545m의 재를 내 주니, 불굴사 계곡과 줄기 너머 환성사가 통하는 길목. 그 재를 기준해서 그 이후 구간은 무학산으로 별도 분류되는가 싶었다. 능선은 재를 지난 후 다시 587m 봉우리로 높아지긴 하지만, 그 이후엔 대체로 540m대에 머문다.
그러던 능선은 586m 높이의 무학산으로 맺힌 후 급격히 소멸한다. 덕분에 무학산에서는 동쪽과 남쪽 전망이 참으로 훤하다. 기슭에 있는 와촌면의 소재지 소월리 일대가 한 눈에 보이고 소월지 못이 그렇게 큰 줄도 거기서야 제대로 느껴진다. 하양 읍내, 대구가톨릭대, 경일대, 문천지 못을 포함한 대구대 일대, 평화롭게 굽어 흐르는 금호강 줄기가 걸림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전망 덕분에 이곳은 달맞이 해맞이의 명소가 돼 있다고 했다. 단 한 가지 답답한 것은 그 산 정상에 있는 높이 표시. 지도상 등고선으로는 586m로 읽히는데도 경산시청은 574.5m로 낮춰 표기해 놓은 것이다.
무학산 가는 줄기를 내 보낸 후 힘이 부치는지, 주맥은 675m봉 직후 40여m 가라앉으면서 '환성재'(635m)를 내 준다. 그 서편으로는 대구 진인동 '삼방골'이 깊히 패였고, 동편으로는 '환성사골'(하양읍 사기리)이 거의 산을 갈라놓을 듯 뚜렷하다. 삼방골에서 이 재를 넘어 환성사골로 가는 길은 대구 공산지역 사람들이 하양 시장을 다니던 주통로였다고 했다.
그 발길을 따라 걸어 보겠다고 공산 쪽에서 출발해 인산 마을로 들어섰다. 대구 갓바위골 입구 근처에서 반대 방향으로 들어가는 길. 골 안에는 엄청 큰 동네가 펼쳐져 있었다. 길 가에서는 감지할 수 없었던 일. 이어 삼방 마을을 거쳐 계곡을 오르자 대규모 신축 공사가 한창인 '도림사'에 이르렀다. 차를 그쯤에 세워두고 걷기 시작하니 환성재에 올라서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30여분.
환성재에서 내려설 환성사골 길은 경사가 하도 완만해 거의 평지 같이 걸을 수 있었다. 임도가 재 바로 밑까지 나 있을 정도. 그 골에는 유서 깊은 '환성사'가 있다. 현지 표지에 의하면 동화사와 같은 창건주에 의해 835년(신라 흥덕10년) 창건됐으나, 건물은 고려 말 대화재로 소실됐다가 1635년에야 중창됐다.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돼 있고, 다시 중창기를 맞은 듯 일주문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걸 지나니 누하문을 갖춘 절 앞 2층 누각 '수월관'(水月觀) 건물이 나타났다.
돌기둥만 남은 일주문 밖에서 바라 본 환성사. 최근 복원 공사가 시작된 일주문을 지나면 '수월관'이라는 매우 시적인 이름의 누각이 나오고, 이어 보물로 지정돼 있는 대웅전이 배치돼 있다. 절 뒤의 산줄기는 보는 방향 오른쪽으로 흘러 무학산으로 맺힌다.
하지만 등산이 목적이라면 환성사골로 내려서지 않고 남쪽으로 선회해 환성산 최고봉을 올라도 좋을 것이다. 환성재에서 숨을 돌린 주맥이 다시 힘을 얻어 이 산군 최고점으로 곧장 솟아오르기 때문. 꼭대기에 있는 산불감시 카메라 덕분에 멀리서도 쉽게 식별되는 이 최고봉의 높이는 811.3m로 확인됐다. 지도에 따라 표시가 사뭇 다른 경우가 있으나, 전문가는 이 높이가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최고봉의 이름에도 다소 혼란이 생겨 있는 듯 했다. 대부분의 지도나 등산 안내도들은 그 봉우리를 '환성산'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대 주민들은 그걸 '감태봉' '감태기봉'이라고 했다. 봉우리 서쪽의 평광동 어르신들과 동쪽의 대곡리 어르신들이 모두 한가지였다. 일대 최고봉이어서, 한국전쟁 때는 육군 통신대가 그곳에 주둔했었다는 기억에서도 양쪽 어르신들의 기억이 일치했다.
'감태기'는 감투의 다른 말. 표준말로 표기하자면 '감투봉'이 정확한 전래 명칭인 셈이다. 감투를 쓴 모양새로 가장 높이 솟아 있어 그렇게 불러 왔다고 했다. 어르신들은 '환성산'이란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국토지리정보원 발행 5천 분의 1 지형도도 이 봉우리의 이름을 특정하지 않고 있었다. 전래 명칭을 모르는 전쟁 당시 군인들이 그 밑의 환성사 이름에서 따 쉽게 환성산으로 부르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점쳐졌다.
이런 여러 현실을 종합해 판단한다면, 일대 산 덩어리 전체의 명칭은 환성산으로, 그 중 이 최고봉의 이름은 '감투봉'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해 보였다. 팔공산 본체에서도 전체는 팔공산으로 불리는 반면 주봉은 별도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이다.
환성산 감투봉은 대구시민들에게 결코 멀리 있는 산이 아니라고 했다. 앞산네거리에서 동쪽으로 봐도 그 모습은 너무도 우뚝이 드러난다고 산악인들은 말했다. 하지만 높이로만 따지자면 그렇게 대단한 봉우리 되기는 어려울 터. 그런데도 그 정상은 팔공산권에서 셋째 가기 서러워 할 좋은 전망대로 공인돼 있다.
북으로는 팔공산 주능선이 한눈에 훤하다. 산 사람들이 단언하기로는 팔공산 주능선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감투봉이다. 가까이 있는 노적봉은 물론이고 멀리 신녕지맥의 초입에 있는 코끼리바위마저 뚜렷이 식별된다. 남사면의 전경이 한 눈에 꿰여, 용수천골이 완전히 속을 드러내고 대구교원연수원과 부인사까지 훤하게 보인다.
남으로는 율하천골의 매여동이 선명히 짚히고, 그 너머로 경산 시가지와 진량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영남대 중앙도서관 건물과 문천지, 시지, 월드컵경기장이 뚜렷하다. 저곳에서 김유신이 군주(軍主)로 근무했으니 팔공산과의 인연은 저절로라도 생기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 즈음에서 눈을 조금 서쪽으로 돌리면 두류타워를 포함한 대구 시가지까지 일망무제. 멀리로는 비슬산 능선이 펼치는 스카이라인이 정겹다.
동쪽으로는 하양 청통 신녕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그 뒤로 있는 화산-보현산 같은 산들이 훤하다. 서쪽으로는 평광동 시량이골이 앞마당 같고 동변동 학봉까지 이어가는 산줄기가 확연하다. 그 너머로 펼쳐진 들은 아마 칠곡 지천쯤 되리라.
팔공산에서 이만큼 전망 트인 곳은 팔공산의 주봉 외에는 없을 터. 지금까지 팔공산을 밟고 다닌 취재기자의 기억에 뚜렷이 남는 그 외의 좋은 전망대는 묘봉, 시루봉, 무학산, 학봉 정도였다. 은해사골 묘봉암 뒤의 묘봉은 청통-신녕 등 팔공산 동록을 한눈에 보는데는 최고 전망대일 것이다. 시루봉은 팔공산의 북록을 보는 데 제일의 적지여서, 팔공기맥 양쪽으로 포진한 치산계곡과 백학골이 손바닥 보듯 훤해진다. 하지만 전망의 범위로야 환성산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 문득 환성산이 '팔공산의 작은 주봉'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 애호가들의 인터넷 모임 '대구 산사람들'이 지난 2일 환성산 감투봉 정상에다 표석을 세우고 있다. 그냥 환성산이라 하기 십상일 터였으나, 산사람들은 최근 확인된 '감투봉'이라는 전래 명칭을 함께 새겼다. 점차 세를 더해 가는 팔공산 지형 전래 명칭 되찾기 움직임이 거둔 첫 가시적 성과. 100kg이나 되는 무게를 몸으로 져 올린 산사람들은, 자연과 어울리는 것이어야 한다며 팔공산 치산계곡을 뒤져 "가장 팔공산스러운" 돌을 구해 자연석 그대로의 형태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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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재 고갯길을 용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모습. 학봉으로 가는 산줄기는 사진 정면으로 보이는 252m봉에서 큰 폭으로 낮아져 문을 열어주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지난 2일 환성산 정상에서 있었던 표석 설치 행사는 그 산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전래 명칭을 찾아 '감투봉'이라 새긴 돌은 정상의 화강암들과 놀라운 하모니를 이뤄 보는 이들을 감탄케 했다. 그 며칠 전부터 표석과 시멘트를 올려다 놓고 당일엔 떡과 막걸리를 장만하는 등 정성을 모은 20여명의 표정들 역시 화강암에 다름 아니게 푸근했다. 제막 후 산신에게 고해진 축문(祝文)이 그들의 깊은 마음을 말해 주는 듯 했다.
"…산을 배우고 산을 닮으며 그 속에서 하나 되고자 모인 저희가 아무쪼록 바라오니, 이 산하의 모든 생명들엔 저마다 아름다운 뜻이 있나니,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하지 않으며, 그 터전을 파괴하거나 더럽히지 않으며, 새 한 마리 다람쥐 한 마리와도 벗하고 지내며, 추한 것은 덮어 주고 아름다운 것은 그윽한 마음으로 즐기는 산 닮은 사람이 되고 싶나이다. 어려운 남을 자신보다 먼저 배려할 줄 알고 나의 어려움보다 남의 고통을 먼저 이해할 줄 아는 사람, 지친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산을 오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산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부디 바라옵건데, 이 산하를 걸을 때마다 자연의 위대함 앞에 겸손해지게 해 주소서…"
산사람들의 이런 모습과 봉우리가 펼쳐 보이는 전망에 취해 답사객이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주맥은 감투봉에서 서쪽으로 중요한 산줄기 하나를 흘려 보낸다. 동화천과 시종을 함께 하며 그 남쪽 울타리 역할을 수행하는 산줄기. 동시에 불로천골의 북편 둑 역할도 맡다가 끝내는 금호강의 북편 둑으로 변해 동변동까지 내닫는다.
이 줄기는 감투봉을 출발한지 얼마 안 돼 갈미재와 비리재로 낮아져 그 남북 사람들의 통행이 가능토록 문을 열어준다. 이 능선을 따라 가 보겠다고 대구 백안동의 웃갈미 마을을 통해 갈미재로 올라섰더니, 곧 이어 나타나는 비리재를 거쳐 학봉까지 가는 능선엔 이미 굵직한 길이 나 있었다. 등산객이 적잖다는 증거.
비리재를 지나 도달한 곳은 산불 감시 카메라가 서 있는 기산(箕山, 426m) 정상이었다. 지도들은 이 봉우리를 '문암산'이라 지목하지만, 그걸 앞산으로 삼는 미대동 어르신들은 틀렸다고 일깨웠었다. 문암산(門岩山)은 기산과 한 덩어리로 있되 엄연히 다른 산덩이라는 것. 이 동네 인천 채씨들의 종산이어서 확실히 구분하고 있다고 했다.
그때 채씨 어르신들은 손가락으로 여러 번 가리켜 보였지만, 기자에게 기산과 문암산은 도저히 분간되지 않았었다. 지도를 봐도 거기엔 별개의 산으로 불릴만한 봉우리가 나타나 있지 않았다. 어느 날엔 갓바위 쪽에서 대구시내 쪽으로 차를 몰며 살폈었다. 그랬더니 기산의 옆구리에 '오름' 같이 붙은 것이 보였다. 공산댐 쪽으로 디밀고 튀어나와 별도 봉우리 같은 느낌을 주는 산더미. 그것이 문암산 아닐까 짐작해 두면서 현지에 가 보면 확연히 구분되려나 기대했으나, 산에 올라 이리저리 다녀봐도 역시 성과는 없었다.
기산을 지나자 능선이 170여m나 폭락했다가 다시 329m봉으로 솟아올랐다. 두 개의 높은 봉우리 사이에 나지막한 252m봉이 끼여 있는 것. 마치 산줄기가 잠깐 큰 대문을 열어준 것 같은 느낌을 줬다. 옛날 어른들이 문암산이란 명칭을 붙였던 진짜 봉우리가 혹 이 252m봉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52m봉을 둘러 '다리재'로 길이 나 있고, 남쪽으로는 평평한 용암산 정상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다시 솟아 오른 329m봉에서 산줄기는 잠깐 변덕을 부려 남서쪽으로 '까마귀재'라는 맥을 통해 잔줄기를 하나 떨궈 놓는다. 북쪽 강동마을 뒷골과 남쪽 도동 뒷골에서 파고드는 계곡을 이 재로 이겨낸 잔줄기는, 그 후 둥그런 반원형으로 퍼져 흘러 봉무동 자연마을들을 만든다. 반원의 한복판에 단산못과 단산마을이 들어앉았고 그 북쪽에는 강동마을, 남쪽 기슭으로는 고분군과 불로동이 자리했다.
반원형 산줄기에서 까마귀재를 거쳐 329m봉으로 거꾸로 걷는 길은 봉무공원 쪽에서 올라가는 운동객들로 매우 북적였다. 특히 단산지 못 뒷 둑 같은 반원형 산줄기 능선은 '만보 산책길'이란 명찰이 붙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은지 바닥이 반질반질 닳아 있었다.
단산못 밑 단산마을에서 강동마을로 가는 산기슭에도 특이한 풍경이 있었다. 무슨 용도로 뚫었는지 굴이 17개나 파여져 있었다. 주민들은 일제 강점기의 아픈 상처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방공호가 이렇게 많이 밀집했다면 이 또한 후대를 위한 역사 자료로 챙겨 둬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복잡한 잔줄기를 하나 뿌려 놓은 산줄기는, 329m봉을 지나자 해발 100m 미만의 파군재로 낮아졌다가 136m봉으로 되살아나면서 또 야산 하나를 남쪽으로 떨궈 놓는다. 크기래야 겨우 큰 왕릉 만하고 높이 역시 78m에 불과한 산덩이. 이 야산이 연결돼 나오는 맥도 매우 가녀리다. 서쪽 금호강 가 위남 마을, 동쪽 파군재 밑 독암 마을 등이 들어앉은 골이 맥을 거의 끊어 놓을 듯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 하지만 이 야산은 역사적으로 매우 뜻깊은 산덩이이다. 그 윗부분에 봉무토성이 있고 허리에 '봉무정'이 있으며 그 밑 갯가에는 왕건의 전설이 깃든 '독좌암'이 있는 것이다.
136m봉에 이어 비슷한 높이의 봉우리를 연달아 지난 능선은 95m 정도로 낮아지며 재를 형성한 뒤 166m봉으로 올라서면서 그 북사면에 70여m 높이의 긴 절벽을 선보인다. 166m봉으로 올라서는 길목에서는 전망도 탁월해, 동화천 건너 지묘동의 신숭겸 장군 유적지 일대는 물론 그 뒤로 팔공산 주봉 모습이 훤하다. 그 후 능선은 높아지기를 계속해 186m봉까지 솟기도 하지만 또다시 135m 높이의 재로 추락한다. 봉우리 건너 다니기가 매우 아기자기하다는 이야기.
드디어 도달하는 이 구간의 최고봉은 278m 높이의 '학봉'이다. 그리고는 금호강을 만나물가에 '화담'이라는 특이한 마을 하나를 낳아 두고, 산줄기는 동변동에서 수명을 마친다. 파군재∼학봉 사이는 쉬엄쉬엄 걸어야 2시간 거리. 학봉에서 동변동 마을까지 내려오는데는 30여분이 걸렸다.
5천분의 1 지형도가 표시한 학봉의 높이는 겨우 278.3m였으나, 거기서 만나는 전망은 특별했다. 이 나지막한 봉우리에 그런 전망을 가능케 한 것은 칡넝쿨인 듯 했다. 그것이 덮어 정상의 나무들을 거의 다 죽여 놓음으로써 시야가 확보된 것이다. 이곳 칡은 옛날부터 특별했던지, 봉우리가 이미 갈봉(葛峰)으로 불려 오기도 했다고 설명돼 있었다.
일년 반쯤 전 세웠다는 정상의 표석은 또다른 이름으로 가남봉(柯南峰)을 들기도 했고, 지금 주민들은 주로 가람봉(柯覽峰)으로 부른다고 했다. 인근 무태 마을들에 대단위 아파트촌이 형성된 덕분에 이 봉우리를 찾는 운동객이 폭증하고, 좋은 전망 덕분에 애호단체들도 적잖이 생긴 듯 했다.
이렇게 산줄기를 따라 걷다 보니, 어떤 가문이 일대에 터잡고 살아 왔는지가 느껴질 듯 했다. "무태 다리 건너 있는 것만도 50여 개나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골골이 재실이고, 산줄기의 양지 바른 곳마다 유수한 성씨들의 큰 묘원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 동변동에서는 능성(綾城) 구씨(具氏)가 큰 가문을 이루며 살아 왔다는 얘기가 들렸다. 아파트촌으로 변하기 직전 이 마을 총 80여 가구 중 80여%가 이 성씨였었다고도 했다.
구씨 문중 관계자에 따르면, 동변동 입향조는 계암(溪岩) 구회신(具懷愼)이었다. 의성에 살던 중 임진왜란이 나자 창의해 대구 공산으로 참전했던 그가 전쟁이 끝난 후 이곳에 정착했다는 것. 그의 손자 대에 지었다는 '화수정'(花樹亭)이 학봉 밑에 서 있고, 이웃 서변동의 서변초등학교 옆에는 1659년에 세운 '송계당'(松溪堂)이 있었다. 그 인근에는 '모선당'(慕先堂)도 있는 바, 이것은 대구.경북 일원에 사는 더 큰 단위의 문중에서 선조들을 모시기 위해 근세에 지은 것이라 했다. 이런 곳에서는 봄을 맞아 4월 중에 향사가 잇따른다고 했다.
’가람봉’이라 표기된 학봉 정상의 모습. 그 너머로 연경동 및 도덕동 골짜기 마을들이 보인다. 낮은 봉우리이지만 사방 전망이 탁 트인 명소. 주변에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선 후 없어서는 안될 등산 명소가 됐다.
임진왜란 이후 대구 동변동을 세거지로 삼아 온 능성 구씨들의 ’송계당’. 이 성씨는 그 외에도 ’화수정’을 학봉 밑에 갖고 있고, 근년 들어 서변동에도 ’모선당’을 세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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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투봉에서 초례봉으로 가는 환성산 능선 모습. 맨 왼쪽의 높은 봉우리가 감투봉이고, 그 다음 낮아진 곳에 새미기재가 있다. 그 앞으로 나아오는 것은 용암산 가는 산줄기. 650m대 봉우리 3개가 어울려 독수리의 머리와 두 어깨 형상을 구성하는 '독수리 삼봉'이 사진 정면으로 선명하다. 오른쪽 끝에 두 개 솟아 있는 봉우리가 초례봉이다.
감투봉에서 학봉을 향해 서쪽으로 달리는 산줄기를 살폈지만, 감투봉에서는 동시에 동쪽으로 가는 줄기도 하나 낸다. 무학산 가는 줄기와 평행해 달리며 그 사이에 환성사골을 형성하고 남쪽으로는 대곡골(하양 대곡리)을 낳는 산줄기. 두 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조산천'으로 모여 하양 시장 일대를 돌아 나간다.
이렇게 감투봉에서 동서로 출발한 두 산줄기가 만들어 낸 평광동 불로천골과 하양 대곡골은 '새미기재'라는 재에서 거의 이어질 듯 근접한다. 감투봉으로 811m까지 높아졌던 능선이 540m까지 급작스레 낮아진 곳. 대구쪽 불로동 도동 평광동 사람들이 하양 시장을 보러 다니던 길목이었으리라.
그 길을 뒤따라 밟아 보겠다고 평광동의 시량이 마을을 출발해 쭉 골을 따라 올랐더니 지금도 재까지 줄곧 길이 살아 있었다. 걸린 시간은 40분 정도. 재의 하양 쪽 내리막 골 길이는 7.5km 정도로 측정됐다. 윗한실, 아래한실, 서사리 등의 마을을 거쳐 하양 초입에 이르는 구간. 이 길에는 임도가 놓여져 있어 하양을 출발할 경우 재 꼭대기까지 차가 올라간다.
이 재의 이름에도 문제가 생겨 있었다. 지도들은 거의가 이 재를 '성령'(城嶺)이라 표기했다. 그러나 평광동과 대곡동 어른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재 양쪽 마을 어르신들은 공히 그 이름으로 '새미기재'를 들었다.
이 재에서는 북쪽으로 길을 택할 경우 3, 40분이면 감투봉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고도가 270m 가까이 급등하는 구간이어서 만만치는 않은 오르막. 반면 남쪽 산길을 택할 경우에는 5분 정도면 전망 훤한 610m봉에 올라서게 된다. 산줄기는 610m봉에서도 서쪽으로 줄기를 하나 내려보내나, 그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회차에서 별도로 살피도록 하자.
항공사진으로 본 환성산군 (제공= Geo C&I)
610m봉을 거친 주맥은 남쪽으로 달리기를 계속하니, 이것이 초례봉 가는 맥이다. 그 후 '최종분기점'이라 불러도 될만한 651m봉에 도달할 때까지 610m 이상의 봉우리만 13개를 이어 간다. 10여m씩, 심할 경우 몇십m까지도 오르내리길 반복하는 봉우리들이 아기자기 연결된다. 덕분에 이 구간 걷기는 참으로 즐겁다. 환한 화강암들이 마음을 편하게 하고 마사토 밟는 느낌이 아삭아삭하다. 그 능선은 대구-경북의 구역 경계선이기도 하다.
그 중간 즈음에 655, 656, 653m 등 650m대의 봉우리 3개가 잇따라 솟았다. 새미기재 이후 최고 높이의 봉우리군. 그걸 보고 등산객들은 '낙타봉'이라 불렀지만, 인근 마을 사람들은 '독수리 형상'이라 했다. 꼭 독수리의 머리와 두 어깨 같이 보인다는 것. 대구 둔산동 토골 위의 대암봉, 소동골 뒤의 요령봉에 올라 보니 독수리의 느낌이 더 생생히 잡혔다. '독수리 삼봉'이라 불러둬도 좋을 듯 했다.
드디어 도달하는 '최종분기점' 651m봉을 마지막으로 산줄기는 100여m나 급격히 낮아져, 위풍 당당하던 주맥으로서의 기운이 소멸돼 갈 것임을 예감케 한다. 그리고는 스스로도 서남행-동남행의 두 갈래로 찢어져 버린다. 그 두 갈래 사이에 있는 골이 숙천골. 그 최상류, 651m봉의 바로 아래에 40년 역사를 자랑하고 적잖은 지역인들에게 추억의 장소가 된 '청천다락원'이 있다. '숙천'이라 불리는 물줄기는 이어 내곡동, 숙천동을 거치며 흐른다.
갈라진 줄기 중 특히 동남행 줄기는 확연히 기세를 잃어, 대체로 500m대 이하의 높이로 내려앉으며 점차 더 낮아져 간다. 조산천의 남녘 울타리이기도 한 줄기는 그 남으로 많은 실가지를 쳐 경산의 청천리 남하리 은호리 부호리 같은 마을들과 경일대 가톨릭대 등을 품는다. 반면 서남행 산줄기는 다시 잠깐 100여m 치솟아 600m대 봉우리로서는 마지막인 초례봉(635.7m)을 맺는다. 각산동 신서동 동내동 등의 마을이 자리잡는 곳이 그 가지 줄기들의 자락이다.
초례봉은 주맥이 세를 잃고 쪼개진 뒤의 가지 줄기에 있고 높이에서도 앞선 봉우리들에 밀린다. 그런데도 당당히 고유한 이름을 얻고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히 유명해지기까지 했다. TV 드라마 덕분이라는 얘기가 들렸지만, 봉우리 자체가 지닌 매력도 무시돼서는 안될 터. 북쪽만 감투봉으로 가려졌을 뿐 서쪽으로는 율하천골, 동과 남으로는 멀리 평야지대까지 훤히 살펴질 정도로 좋은 전망을 갖췄다. 그래서 산 밑 마을들에서 보면 초례봉은 어느 봉우리보다 우뚝 솟아 보인다. 그 꼭대기의 풍광 역시 상당해, 품격 높은 큰바위들이 갖가지 자세로 몸매 경연을 벌이기라도 하는 듯 하다.
그래서인지, 초례봉은 '초사모'(초례봉 사랑 모임)라는 단체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이를 이끄는 김채환(47)씨는 대구 신서동에서 나 그곳에서 줄곧 살고 있다고 했다. 어릴 때 솔방울 따러 가는 일로부터 시작해 지금의 등산로 보수 일에 이르기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 김씨가 동호회를 만들고 이벤트를 주최하기 시작한 것은 4년 전이라고 했다. '태조 왕건'이라는 드라마로 초례봉이 주목받기 시작할 즈음인 모양. 무엇보다 지하철을 이용한 봉우리 접근성이 좋은 점에 착안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2001년에 그곳 특산물인 연근 축제를 겸한 초례봉 산행대회가 개최됐다. 이듬해부터는 1천여명씩이나 몰리는 초례봉 새해 맞이 행사도 주최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초례봉은 이렇게 사랑받고 있으나, 그 봉우리 이름에는 한번 되살펴 볼 점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대동여지도에도 '초례산'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일부에서는 나무꾼과 선녀의 초례 전설까지 제시하고 있지만, 현지 주민들은 공통되게 그것을 '조리봉'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봉우리 서쪽의 율하천골 매여동에서도, 동쪽의 숙천골 내곡마을에서도, 들에 붙은 남쪽 마을에서도 조리봉이라 불렀다. 봉우리가 '조리'를 닮았다는 것이다. 그건 쌀을 일 때 사용하고, 복을 담을 경우 복조리가 되는 도구. 전문가들이 나서서 한번 조사해 줬으면 싶다.
새미기재를 지난 직후 만났던 610m봉에서 이곳 초례봉(조리봉)에 이르는 산줄기는 환성산군의 등뼈로서, '율하천'이라는 큰 물줄기 계곡의 뒷담 역할도 맡고 있다. 율하천골은 그 길이가 7km 정도나 되는 깊은 골짜기. 그래서 대곡골, 불로천골과 함께 환성산군의 땅덩어리를 나누는 가장 뚜렷한 갈림이 되고 있다.
율하천골의 동편 담장 역할은 초례봉에서 각산동으로 흘러내리는 한 능선이 맡는다. 반면 서편 울타리 역할은 앞서 610m봉에서 서쪽으로 출발한다고 했던 그 산줄기가 맡고 있다. 얼마 후 남쪽으로 굽어 돈 후 '능천산'을 거쳐 옛 영천 국도의 '율하교' 지점 바로 위까지 흐르는 그것.
율하천골을 율하교 지점에서 올라가며 살피자면, 먼저 율암동이 나타나고 이어 상매동을 지날 즈음 왼쪽으로 능천산이 솟아 있다. 골 끝 마지막 동네는 매여동. 율하교에서 매여동 입구까지는 4.5km 정도 됐다. 골은 거기서 두 갈래로 갈려, 줄곧 올라 갈 경우 '큰골'이 되고 왼쪽으로는 '점동골'이 나타난다. 갈림점에서 점동골 끝까지는 2.2km 전후로 측정됐다. 골을 상류에서 내려오면서 살필 경우, 점동골 윗부분에서 율하교에 이르는 6.7km 길이의 산줄기가 율하천골의 서쪽 울타리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매여동에서는 골의 끝이라는 지리 조건이 아직도 짐이 되는 모양이었다. 하루 12회 시내버스가 들어온다지만 초등학교 분교는 폐교돼 경로당으로 변했고, 마을 규모 역시 인접 상매동과 합쳐 70여호 정도로 줄었다고 한 할아버지가 전했다.
능천산 남쪽 자락 율하천 가 들녘에 살구꽃과 복숭아꽃이 흐드러졌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를 노래한 '고향의 봄'이 저절로 흥얼거려질 정도. 부지런한 농부는 모내기할 수 있도록 벌써부터 논을 손질 중이라고 했다. 지난 7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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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골 마을 위의 대암봉에서 남쪽으로 바라 본 풍경. 가까이로 옻골 최씨 고택들이 고즈넉하고, 둔산동 들판을 거쳐 멀리로는 동대구JC에서 부산으로 달릴 대구∼부산 고속도로가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끄트머리에 희고 둥글게 서 있는 것은 대구월드컵경기장.
610m봉에서 서쪽으로 출발해 율하천골의 서편 울타리가 된다고 했던 산줄기는, 북의 불로천골(대구 평광동)과 남의 율하천골(매여동)을 갈라붙이며 달린다. 그런 중에 잔가지를 내 평광동을 시량이골과 당남리골로, 율하천골을 큰골과 점동골로 쪼개 놓은 후 330m 높이로 낮아져 '돌곡재'를 내주니, 그걸 통해 당남리와 점동골이 이어진다.
하지만 산줄기는 돌곡재를 지난 뒤엔 곧바로 492m봉으로 치솟는다. 앞으로 달릴 구간 중 최고의 봉우리. 이 봉우리를 일부 등산객들은 '능천산'으로 알고 있었고, 인근 몇 개 마을 어르신들은 '감태봉'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봉우리 바로 밑에 있는 '소동골'에 가 들은 얘기를 종합하면 '요령봉'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할 듯했다. 흔들어 소리를 내는 요령을 닮은 '요령 바위'가 꼭대기에 있어 그 이름으로 불러왔다는 것. 한때 큰 채석장이 있었다고 어르신들은 기억했다.
산줄기는 요령봉에서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해 결국엔 '용암산'으로 맺히면서 그 북쪽에 있는 평광동골의 남쪽 울타리가 된다. 동시에 남쪽으로는 여러 개의 잔줄기를 내 여러 개의 골과 마을들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용암산 가는 줄기.
용암산 가는 줄기는 먼저 출발점인 요령봉에서 남동쪽으로 높이가 300m대에 불과한 능선을 흘려 보내 율하천골의 서편 울이 되도록 함과 동시에 건너편에는 '소동골'을 들어 앉힌다. 그 줄기에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369m봉인 바, 2만5천분의 1 지형도와 인근 사람들은 이것을 '능천산'이라 지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5천분의 1 지도는 그 봉우리 북에 인접해 있는 337m봉을 능천산이라 했다. 정리가 필요할 터. 산줄기는 능천산을 거쳐 흐르다 남녘의 상매동과 부동(釜洞)에서 들판이 된다. 그 자락에 어떤 성씨의 대규모 묘원과 상매동 마을이 있었다.
요령봉에서는 능천산 가는 잔줄기가 출발한 직후 이 봉우리 밑 소동골을 둘로 쪼개는 짧은 산줄기도 하나 남쪽으로 흘러내린다. 이 줄기에는 또 하나의 높은 봉우리인 476m봉이 솟은바, 소동골 어르신들은 이 봉우리가 감태봉이라 했다. 감투같이 솟구쳤다고 해서 여기서도 이런 이름을 붙였다는 것. 그 북에 있는 요령봉은 이 봉우리에 가려져 소동골에서 보이지 않았다.
출발점인 요령봉에서부터 이렇게 잔가지를 치기 시작한 산줄기는 곧 이어 442m봉에 도달하고, 거기서도 남쪽으로 한 가지를 떨어뜨려 소동골과 '옻골'을 가르니 그 줄기에 411m 높이의 '검덕봉'이 솟았다. 다닥다닥 근접한 짧은 산줄기들에 검덕봉과 감태봉 같은 높은 봉우리들이 밀집한 형상. 그래서 일대 산세는 덩치 큰 산 못잖게 준열했다.
442m봉을 지난 뒤 산줄기는 120여m나 폭락해 높이 320m의 '옻골재'를 내줬다가 다시 솟구쳐 465m봉을 만든다. 인접 마을 어르신들의 증언을 종합해 판단한 465m봉의 적절한 이름은 ''(臺巖峰)일 듯했다. 대암은 대(臺)를 닮아 널찍하고 높다랗게 솟은 암괴라는 뜻. 이 봉우리를 옻골 마을에서는 '대암산'이라 했고, 그 밑 '토골' 마을 어르신들은 그냥 '대암'이라 호칭했다. 그 이름을 따 산밑에 있는 토골 등 마을이 전에는 '대암'으로 불렸다고 했다. 지금도 토골 안 못 이름은 '대암지'였고, 경로당도 '대암경로당'이란 이름표를 붙이고 있었다.
대암봉에서는 두 개의 가지가 또 남쪽으로 내려간다. 먼저 내려간 줄기는 '생구바위' 혹은 '생우바위'라 불리는 돌봉우리를 거치며 옻골과 토골을 구분 짓는다. 생구바위는 살아 있는 거북 바위라는 말. 한자로는 생구암(生龜岩)이라 썼으니, 평평한 대암은 거북의 등이 되고 이 생구암은 머리가 되는가 싶었다.
두 번째 빠져나간 가지는 토골로부터 '기미실골'을 구분시킨다. 그런 다음 다소 길게 이어가다가 서쪽에서 차고 오르는 계곡에 '바리재'를 내주고는 세 갈래로 갈라진다. 그 중 하나는 천연기념물 1호 측백수림이 있는 향산으로 맺히고, 다른 하나는 불로동쪽으로 향하다 해서초등학교 못미처 멈춘다. 마지막 갈래는 토골 앞산 줄기가 되니, 그 자락에 대구비행장이 있고 옛날엔 해안현(解顔縣) 치소(治所)가 있었던 듯 생각되고 있다. 해안현은 금호강 이북의 대구 동부권 땅 대부분이 속했던 행정 구역이었다.
토골의 뒷담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면 될 대암봉의 정상은 넓고 길뿐 아니라 암반 바닥이 나무를 키우지 않아 걸림 없이 뛰어난 전망을 갖고 있었다. 동으로는 환성산군 주맥이 맨모습을 드러냈고, 서로는 단산지와 금호강 물가 자락이 시원히 펼쳐지는 가운데 고속도로에 고립된 향산이 안타까웠다. 북으로는 팔공산 본체의 주능선이 막힘 없이 드러났다. 넒게 펼쳐진 평광동 마을들이 여기서야 드디어 모습을 훤히 드러내고,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에 있다는 당남마을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남으로 몸을 돌리니 생구바위 돌봉우리가 보이고 토골과 그 마을 위의 대암못이 훤했다.
하지만 그 환하던 전망은 길게 이어지는 대암봉 최고점 헬기장 한쪽에 세워져 있는 표석 하나로 인해 어두워지고 말았다. '해발 368m 용암산'. 어느 산악회에서 올 1월 1일 세웠다는 표석은 465m의 이 대암봉을 368m의 용암산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하도 놀라운 일이라서, 기자의 독도법(讀圖法)이 잘못됐는지 아니면 그 표석이 잘못됐는지 지금도 혼란스러울 지경. 만약 기자의 판단이 맞다면, 해당 산악회가 나서든, 아니면 행정 당국이라도 나서서 표석을 진짜 용암산으로 옮겨다 놔야 할 듯했다.
대암봉을 거친 뒤 줄기는 340여m 높이로 또 120여m나 낮아졌다가 용암산(368.7m)으로 마지막 봉우리를 맺는다. 요령봉에서 출발한 줄기가 대암봉을 거치며 그렇게 여러 골을 갈라붙이고 새끼 줄기까지 치고야 최종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용암산 정상은 수천 평은 될 평평한 고원이었다. 그리고 전망이 좋았다. 온통 창궐한 칡넝쿨이 나무들을 못살게 해 그런 전망이 확보된 듯했다. 넓은 고원을 갖추고 이렇게 좋은 전망을 갖춘 용암산에는 삼국시대부터 산성이 들어섰다고 했다.
현지 안내문에 따르면, 이곳은 안심과 하양으로 통하는 통로인 데다 그 길목을 모두 살필 수 있는 지형상 요충지. 거기다 동서 양쪽 산록은 45도나 되는 급경사이다. 이런 좋은 조건을 활용하고 상대적으로 완만한 남사면에는 대규모 인공절벽을 구축해 둘레가 1천m나 되는 큰 산성을 만들었다. 신라 토기가 발견되는 것으로 봐 삼국시대 고분임이 확실하다고 했다.
문제는 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고원이 넓고 절벽을 갖췄어도 물이 없으면 그건 몹쓸 땅. 그 때문에 왜란 때 이 산성에 들어가 있던 주민들과 의병들이 적군의 고립 전술에 말려 위기를 맞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걸 돌파하기 위해 모두가 합심해 판 것이 '옥천'(玉泉)이라고 했다.
용암산 동록에 있는 '옥천' 유적. 임진왜란 때 이곳 산성으로 피신해 있던 의병과 주민들의 절망적이던 목마름이 이 우물 파기로 해소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취재팀은 용암산에서 요령봉을 향해 거꾸로도 걸어 봤다. 답사의 출발점은 측백수림 앞 도동. 거기서 기미실골 입구로 이동해 대구∼포항고속도 옆으로 올랐다. 용암산 정상에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은 겨우 30여분. 산성 옛터를 살핀 뒤 요령봉을 향해 걷던 중, 산성 권역을 거의 벗어난다 싶을 즈음 푹 꺼진 곳에서 '옥천' 터를 만났다. 장방형으로 주위에 돌을 쌓고 우물가도 그래 놓은 것이 마을 안의 우물을 연상케 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340여m 높이의 산길이 어느덧 가파른 오르막으로 이어졌다. 120여m나 올라가야 하는 대암봉. 봉우리를 거치자 옻골재로 낮아졌다가 다시 442m봉으로 향했고, 곧이어 이 줄기 최고봉인 요령봉에 도달했다. 출발점에서 요령봉까지 걸린 시간은 두루 살펴가며 걸어야 3시간쯤. 짧은 노정에 그만한 전망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감격스러웠다.
대암봉 남록에 만개한 참꽃 행렬. 이 풍광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평일에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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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포항 고속도로에 의해 고립돼 버린 향산의 모습이 외롭다. 그 북면에 천연기념물 1호 측백수림이 있고, 서면에는 최치원 영당이 있는 갓골이 자리 잡았다.
앞서 살펴 온 여러 산줄기들에 의해 형성된 불로천골은 참 특이하다. 입구는 좁아 있는 듯 없는 듯 하는데, 막상 들어가니 그 속은 광활한 땅, 그래서 세상이 눈치채지 못할 비장의 터라, 무릉도원이 이렇게 생겼던 것일까… 불로천을 따라 들어가다 평광동을 만나는 느낌이 꼭 그랬다.
불로천골의 형상은 금호강쪽 서편 초입부터 심상찮다. 먼저 왼쪽 구릉으로 불로고분군이 펼쳐져, 1천수백년 전 그때 벌써 이곳이 상당한 권력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곧 이어 나타나는 것은 '갓골'이라는 마을. 거기에는 경주 최씨들이 시조인 문창공 최치원의 영정을 모시는 영당(대구시 문화재자료 20호)이 있다. 본래 해안현에 '계림사'(桂林祠)라는 이름으로 있었으나 비행장 건설로 훼철돼 1912년 옮겨지었다고. 근세에 지은 듯한 웅장한 재실이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경주 최씨는 팔공산 본체의 용수동, 지묘동을 거쳐 환성산군의 봉무동 강동마을, 인근의 도동 갓골 마을, 둔산동 옻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문화재를 남기고 있다. 강동에 있는 문화재는 최씨네가 1865년에 지어 일대 소년들을 가르쳤다는 '독암서당'.
경주 최씨 중 특히 옻골파는 중근세에 크게 활약한 듯 보였다. 임란 때 3숙질이 팔공산에서 창의했음을 기리는 삼충사(三忠祠)가 지묘동에 서 있다. 옻골로 옮긴 것은 1616년. 입향조는 그 3숙질 중 태동(台洞) 최계의 아들 대암 최동집이었다. 학덕과 충절을 기려 채제공이 '숭정처사 유허비' 비문을 지었던 선비. 용수동 가루뱅이 마을에 '부인정사'를 지어 유학을 가르쳤다고도 했다.
옻골에서 터전을 더욱 공고히 한 사람은 영조 때의 백불암 최흥원(崔興遠)이었던 듯 하다. 그는 5대조인 대암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보본당'을 지었던 바, 경상감영 주도의 '반계수록' 최초 출판을 위한 교열 작업이 이곳에서 진행됐다고 했다. 또 대암이 유학을 가르치던 부인사 절 밑 '부인정사' 자리에는 백불암이 '농연정'(聾淵亭)을 지었고, 가문의 불천위가 된 자신의 집은 지금 '백불고택'이라 불리며 조선시대 대구의 대표적 상류 주택으로 꼽히는 문화재가 돼 있다.
이런 유서 깊은 마을을 옛 모습 그대로 지키기 위해 지금의 마을 사람들이 기울이는 노력도 놀라왔다. 근래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그린벨트 해제 작업이 이 마을에는 적용되지 않도록 오히려 반대 청원을 내 성사시켰으며, 마을 입구는 아예 훼손이 불가능한 공원지구로 지정 받았다고 했다.
갓골 영당 얘기를 하다가 경주 최씨 가문으로 얘기가 커졌지만, 그 영당의 뒷산은 '향산'이다. 그 100m 높이 북편 절벽에는 천연기념물 1호 측백나무 숲이 있다. 그 풍경을 서거정은 달성 10경 중 '북벽향림'이란 제목으로 읊었다. 향산 바로 앞은 도동 마을. 달성 서씨들의 오랜 세거지라 했다. 마을에 있는 '백원서원'이 그 징표인 듯 했다.
환성산 감투봉에서 바라 본 평광동. 앞으로 보이는 골짜기의 제일 가까운 곳에 시량이 마을이 있고 그 산 밑에 신숭겸 장군 영각 유허비가 서 있다. 저 멀리 골의 입구에서 갈라져 올라가는 또다른 골 안에는 단양 우씨 첨백당이 있으며 그 골 끝에 당남 마을이 있다.
도동 마을을 지나 동쪽을 향해 거슬러 오르는 불로천 골은 그야말로 협곡이다. 이 부분의 이름은 '용암골'. 그 오른편으로는 368m의 용암산이 솟았고, 왼편으로는 기산에서 흘러나와 맺힌 371m봉이 버티고 있다. 그쯤에서 하천 건너 북쪽 골로 들어서면 '다리재'를 통해 공산댐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옛 공산면 사무소가 지묘동에 있었을 때 평광동 사람들이 면사무소로 다니던 길이었다는 얘기.
동네 어른들이 가르쳐 준 대로 평광동으로 들어가다가 용암산 앞 다리골 입구에서 좌회전해 산길로 접어들자 '다리골'이라는 골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산줄기를 넘어가는 길이 꼬불꼬불 이어졌다. 포장까지 끝낸 말끔한 양상. 그 길은 기산에서 170여m를 내려서서 나지막히 엎드린 252m봉 주위를 감고 나 있었다. 지프차로 측정된 길의 전체 길이는 2.5km쯤.
하지만 길은 공산지에서 끊겼고, 그 끊어진 지점에 '도성사'라는 절이 있었다. 옛날 같으면 당연히 지묘동 쪽으로 통행로가 나 있었을 이 절은 공산댐에 막혀 지금은 재를 넘어 용암골을 통해야 세상과 연결되는 것 같았다.
좁디좁은 용암협곡을 지나 불로천을 더 따라 올라가면 드디어 평리 광리 등이 있는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그 이름들을 '평광동'으로 모았다고 했다. 입구는 삼갈래길. 줄곧 올라가면 시량이라는 큰 마을을 거친 뒤 새미기재로 올라서지만, 용암산∼능천산 줄기의 북면에 해당하는 남쪽 골로 빠져들면 골 끝에서 당남 마을을 만날 수 있다. 평광동은 이같이 사방이 산에 의해 막힌 듯 보이기 십상이나, 도보가 주 이동 수단이었던 옛날 입장에서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을 듯했다. 서쪽으로야 말할 것 없이 불로천을 따라 길이 열렸고, 동쪽 하양 가는 길도 540m 높이의 새미기재로 연결돼 있었다.
북쪽의 동화천으로 넘어가는 길은 나직한 다리재(210m) 비리재(270m) 갈미재(280m) 등으로 개척돼 있었다. 재의 이름을 두고 일부 지도들이 잘못 표기하고 있으나, 다리재 밑에는 다리못과 다리골이 있고, 비리재 올라가는 골은 비리골, 갈미재 가는 골은 갈미골로 불려 이 이름들이 정확함을 증명했다.
평광동의 남쪽 방향 경우, 옻골로는 '옻골재'(320m)로, 율하천골로는 '돌곡재'(350여m)로 길이 나 있었다. 옻골재는 평광동 사람들이 옻골 마을을 거쳐 해안(解顔) 쪽으로 다니던 중요한 통로였으나 자동차의 보급과 함께 기능을 잃었던 재.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중요한 등산 길목으로 되살아나 취재팀도 답사 중에 적잖은 등산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럿이 모여 온 아주머니들이 있었고, 홀몸으로 짬을 즐기는 직장인과도 인사를 나눴다.
옻골재의 부활이 얼마나 급작스런 일인지, 이웃 마을 어르신들은 "몇 년 전에 갔을 때도 길이 묵어 있었는데 그 사이 등산로가 났더냐"고 놀라워했다. 대구 동촌 지역에 아파트가 증가하면서 뒤따르게 된 현상인 듯 했다. 버스나 자가용 차로 옻골까지 간 뒤 산을 오르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평광동과 도동을 합친 구역을 관할하는 도평동사무소가 올해 의미 있는 사업을 하나 벌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역내 골짜기들을 전부 답사하고 이름을 조사해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는 것이다. 골들의 입구들에는 안내 표지판도 붙일 예정이라고. 전래 지명 보전에 매우 뜻깊은 일이 될 듯 해 결과가 기대된다.
평광동에는 효자 강순항 정려각, 단양 우씨 '첨백당' 등이 있다. 이 동네는 많은 사람들이 도심으로 이사 가고 지금은 150여호 남았으나 그 중 100여호가 우씨네일 정도로 단양 우씨 집성촌이라고 한 어르신이 일러줬다. 현지 비석들에 새겨져 있는 기록을 종합해 보면, 우씨 입향조는 여주에 살다가 임진왜란을 피해 이곳으로 들어 온 것으로 판단됐다. 첨백당은 그 집안의 훌륭한 선조들을 기리고 자제들의 교육장으로도 활용할 겸 해서 1896년 문중에서 세웠다고 대구시의 관련 보고서가 기록해 놨다. 5칸 집에 양측 마루를 지녔다.
평광동에 있는 유적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신숭겸 장군 영각 유허비 및 모영재이다. 장군의 영정은 고려 초 지묘동 '지묘사'에 모셔졌으나 절이 폐사되자 고려 말 조정이 평광동 시량이 마을에 '대비사'라는 절을 지어 옮겨 봉안했다고 했다. 하지만 1819년 한 아전이 명당이라는 대비사 자리에 자기네 묘를 쓰기 위해 절을 불태웠다는 것. 이에 신씨 가문에서 1832년 유허비를 세워 영각이 있던 곳임을 표시했고 1848년 유림에서 비각을 지었으며 1930년에는 모영재라는 맞배지붕의 4칸 짜리 재실을 그 앞에 지었다고 했다.
신숭겸 장군 영각 유허비 비각을 그 뒷산에서 바라 본 모습. 비각을 위한 재실인 모영재가 그 앞 오른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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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사진으로 본 도덕산군 (제공 = Geo C&I)
팔공산의 두 번째 큰 별체는 도덕산군이다. 이 별체를 본체와 연결해 주는 혈(穴)에 대왕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왕건과 관련된 전설 때문이라고 인접 당정마을 한 어르신이 전했다. 왕건이 파군재로 전쟁하러 가거나 패해서 돌아갈 때 이 재를 지나갔다는 것.
그러나 대왕재에서는 그 남쪽의 도덕산(660m)을 오르기가 쉽잖다. 워낙이 깎아지른 절벽이 앞을 가로막기 때문. 반면 산군의 서편에 있는 송림사 부근에서는 자동차로도 산 정상 가까이까지 접근할 수 있다. 거기에 '도덕암'이 있어 진입로가 마련된 덕분.
도덕산 정상은 아직 표석 하나 얻지 못해 헬기장으로 표지를 삼아야 할 형편이고, 밀생하는 나무들에 가려져 전망도 매우 좋잖았다. 전망이 트이는 곳은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다소 내려 선 도덕암 자리. 그곳에서는 서편으로 펼쳐지는 동명저수지 등이 훤하게 살펴졌다.
도덕산군은 동편의 지묘천과 서편의 팔거천, 남편의 금호강으로 외연을 삼는다. 대왕재가 분수령인 북편의 경우, 서쪽으로는 구덕천이 흘러 팔거천에 합류하고 동쪽으로는 송정천이 흘러 지묘천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외연이 드러난 후 산군은 도덕산에서 서남향, 동남향, 정남향 등 3개의 큰 줄기를 내 그 안으로 2개의 큰골을 만든다. 서남향 줄기와 정남향 줄기 사이에 도남동 골이 있고, 정남향 줄기와 동남향 줄기 사이에는 도덕 마을 골짜기가 있다. 동남향 줄기의 동편은 지묘천골, 서남향 줄기의 서편은 팔거천이다.
도덕산에서 서남향으로 뻗어 내리는 줄기는 대구-경북의 경계선 줄기이기도 하다. 한참 달리다 두 갈래 져 그 안으로 대구 동호동 서리골을 품는다. 동호동 끝에서부터 무려 2.3km나 파고 오르는 골짜기. 골에서는 몇몇 농가가 오이 하우스 농사를 하고 벌을 기르는 듯 했고, 골 초입쯤의 서리못은 꼭 산정호수 같았다. 이 줄기 동편의 도남동 골도 대구에 평생을 사는 사람이라도 한번 접하기 쉽잖을 또 하나의 별천지라고 해야 적절할 터. 칠곡3지구에서 산 쪽으로 붙어 들어가는 골의 초입에 국우동 마을들이 나타나고 이어 도남동과 도남지 못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덕산에서 동남향으로 흐르는 줄기는 동화천변 서원연경 마을을 동그랗게 둘러싸며 주행을 마친다. 지난 4월8일 이 마을에서 출발해 줄기를 거꾸로 올랐더니, 곳곳에 할미꽃이고 온 산에 진달래꽃이었다. 서원 마을 뒤 봉우리는 280m봉. 바로 이웃해 있는 297m봉으로 건너가자 그 서면의 '발코니형 전망대'가 속을 시원스럽게 했다. 이어 잠시 내려서는 듯 하다가는 다시 솟곤 하면서 363m봉, 350m봉, 368m봉을 건너 다니는 기분이 쏠쏠했다.
하지만 드디어 내려선 300m대의 재, 도덕동 골 안도덕 마을과 지묘천변 매골을 잇는 듯한 이 재에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 앞으로 절벽 같은 산세가 버티고 선 것. 무려 220m 높이를 순식간에 쏘아 올리는 경사를 겨우겨우 올랐더니, 평평한 헬기장이 답사객의 쉼터로 기다리고 있었다. 봉우리 높이 518.2m.
이 봉우리를 그 서편의 안도덕 마을 어르신들은 '칼등'이라 불렀다. 봉우리 동편 기슭의 상리 마을 어르신은 그 중 일부를 칼등으로 불러 왔다고 했다. 전체를 부르던 명칭은 없었다고. 여러 상황을 종합한다면, 518m봉의 유력한 전래 명칭으로는 일단 '칼등'을 비정해 놔도 큰 무리가 없을 듯 했다.
이렇게 무리해 가면서라도 전래 명칭을 비정해 둬야 하는 이유는, 국가 공식 지도가 이 봉우리 이름을 엉터리로 표기하고 있는 탓이다. 지도는 이 봉우리와 지묘천 건너 거저산군에 있는 507m봉 둘을 꼭같이 '응해산'이라 표기해 놓고 있었다. 단지 차이를 둔 것은 이 봉우리엔 한자로 '鷹蟹山'이라 써 둔 것뿐. 이상한 구분 방법이었다. 하지만 일대 어르신들은 누구 없이 거저산군의 봉우리만을 응해산, 응게산이라고 지목했다.
칼등을 지나서 산줄기는 다시 350여m 높이로 낮아졌다가 660m의 도덕산으로 치솟지만, 그 구간은 경사가 완만해 걸을 만했다. 서원연경 마을에서 칼등까지는 2시간, 칼등에서 도덕산까지는 1시간 정도면 도달할 수 있었다.
서변동 환성정 모습. 정자의 주인이었다는 태암(苔巖) 이주(李 )는 임란 때 창의해 초유사 김성일의 소모관(召募官)으로 활동했다. 해안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칠곡에서 큰 승리를 거뒀을 뿐 아니라 전라도 장수에까지 진출해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공적에도 불구하고 전후 벼슬을 거부하고 대구향교를 보수하는 등 후학 양성에 온 힘을 쏟은 선비라고 했다.
이 동남향 줄기의 서편에 있는 도덕동 골에는 안도덕, 바깥도덕, 태봉, 들연경 등 '연경동' 마을들이 분포했다. 그 중에서도 연경지 못 안 골 끝 마을 안도덕은 또 하나의 숨겨진 땅. 반면 그 골의 동화천변 들연경 마을 일대는 옛날 광활한 백사장이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지금 찻길로 이용되는 둑을 쌓고서야 백사장이 논밭으로 변했다는 것.
하지만 그 논밭도 멀잖아 다시 아파트촌으로 바뀔 모양이었다. 일대 50여만평이 아파트지구로 지정됐다는 것. 대구의 허파 같은 역할을 해 오던 이곳이 아파트 숲이 될 것이라는 소식은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도 남았다. 작년 말 그 발표가 있은 후 그곳 사람들도 "큰일났다"며 뒤숭숭해져 있었다. 곧바로 일부 형제간 이웃 간에 재산 분쟁이 시작된 것도 그 큰 일 중 하나라고 했다.
이러한 도덕동 골과 앞서 살핀 도남동 골을 양옆으로 거느리는 것은 도덕산군의 정남향 복판 줄기. 국우터널, 함지산 등을 거쳐 팔달교 들머리에 이르기까지 가장 길게 흐르고 권역도 가장 넓은 산줄기이다.
660m 높이의 도덕산을 출발한 이 줄기는 얼마 안 가 230m대의 재로 추락했다가 368m봉으로 솟아오르니, 이 구간이 줄기 중 가장 요동 심한 편이다. 그 후엔 큰 변란 없이 300수십m 높이를 유지하다 국우동 솟골 위에서부터는 200m대로 더 얌전해진다. 국우터널 통과 구간의 고도는 겨우 165m에 불과할 정도.
도덕산에서 국우터널에 이르는 이 구간의 동편으로는 도덕동 골짜기, 서편으로는 도남동 골짜기가 포진해 대칭하고 있다. 특히 368m봉 부분에서는 서쪽 도남지와 동쪽 연경지라는 두 개의 저수지까지 같은 위도로 대칭했다.
그러나 터널 구간을 넘어 더 남진하면 동서간 대칭이 달라진다. 줄기의 동편에는 서변동 택지가 개발됐고 서편에는 칠곡택지가 분포한 것. 덕분에 이 구간에는 등산객이 폭증해 산능선의 풍경도 엄청나게 변했다. 높이가 200m대로 더 낮아지는 것과 함께 실핏줄 같이 퍼져 흐르는 능선들이 닳고닳은 등산로에 의해 굵은 정맥 핏줄 같이 선명해지는 것. 서변동 뒤(서편) 273m봉에서 봐도 그렇고, 칠곡 뒤(동편) 함지산에서 봐도 그 능선들은 그렇게 뚜렷할 수가 없다.
이들 등산로군의 '중심가'는 '조야재'(160m) 부분인 듯 했다. 평일에도 도심을 연상시킬 정도로 붐비고 커피 노점까지 들어서 있는 곳. 도남동쪽 사람들이 소를 몰고 내당동 우시장에 가거나 시내 학교에 다닐 때 넘어 다녔다는 재가 이렇게 변해 있는 것이다.
서변동은 아파트단지로 변하긴 했어도 여전히 인천(仁川) 이씨(李氏)라는 큰 가문의 수백년 세거지임을 알리는 선명한 징표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성북초등학교 앞에 있는 정각들과 '환성정'(喚惺亭) 등이 그것. 이씨네는 천안 등지에 살다가 1500년쯤 대구권으로 진입해 파동을 거쳐 이곳으로 입향했으며, 임진왜란 때 창의했던 태암(苔巖) 이주(李 ) 이후 번성했다고 종친회 관계자가 알려 줬다. 단아한 '환성정'은 태암의 정자였다고 현장에 설명돼 있었다. 이런 분들을 모시기 위해 1781년 그곳에 '서계서원'(西溪書院)을 세웠었으나 훼철령으로 1868년 뜯긴 것을 애석해 하는 사적비가 환성정 앞에 서 있고, '효열각' '창렬각' '정려각' 등은 그 후대인 영조 순조 철종 때의 이씨네 효부 열부들을 기리고 있었다.
이런 많은 사연들을 품어 안은 도덕산군 복판 줄기의 꽃은 역시 함지산(285m)일 터이다. 아주 옛날부터 성(城)을 운용했고 한국전 때는 팔공산의 소야재가 뚫릴 경우 마지막으로 진을 치려 했을 정도의 대구 길목 요충지. 군사(軍事)를 모르는 기자의 눈으로도 그곳에서는 대구시내와 칠곡 길목이 한 눈에 살펴졌다. 문제는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280m대의 두 봉우리 중 어느 것이 함지산인 지 분간할 수 없다는 것. 서봉에는 헬기장이 있고 동봉에는 산불감시 카메라가 설치돼 그나마 분별 표지가 돼 줄 뿐. 옛 산성이 있던 것은 서쪽 봉우리인데도 2만5천분의 1 지형도는 동봉을 함지산이라 지목해 놨다. "인생은 하얀 뭉개구름 같으니, 마음을 태평양 같이 넓게 하라". 조야재 두 장승이 합창하는 잠언으로 그 혼란을 묻어 둬 버릴까?
함지산 덩어리의 남쪽 금호강가 기슭에는 노곡동 조야동 같은 마을들이 깃들었다.
함지산에서 본 도덕산군 능선의 등산로. 아파트촌 밀집 이후 등산객 폭증으로 능선 위의 등산로가 반질반질 닳아 정맥 핏줄 같이 뚜렷해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