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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세 번째 까미노, '아마폴라의 유혹'
a, 시작과 동시에...
그래도 까미노의 출발을 하까 알베르게에서 자고 오는 것보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이라, 커다란 불만은 없었다.
다음 날(4. 27)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두 사람은 첫날 일정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동행이 있어선지 혼자일 때보다는 무엇보다도 상대방의 사진을 찍는 게 훨씬 편하고 수월했다.
그런데, 출발한지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에겐, 뜻하지 않은 악재 하나가 급습해왔는데......
피레네 산맥의 오솔길이었다.
가파른 내리막길인데다 그 전날 진눈깨비까지 내려서 보통 미끄러운 게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 신경을 곤두세운 채 조심스럽게 산길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비록 쌀쌀하긴 했지만 4월도 하순이라, 여기저기 이름모를 수많은 꽃들이 어울어져 아름다운 산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나라 벚꽃 종류의 꽃들도 여기저기 피어있었는데, 기후가 달라서인지... 화려하진 않았다.
걸음을 시작한 지 고작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그들은 이 길을 걸으며 사람들과 통화를 하기 위해(특히 Wh는 가족들과..), 미리 바르셀로나에서 휴대전화를 한 대 빌려갔었다.)
그 소리가 무척 컸는데, 순간... 인야에겐 뭔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전화를 받은 Wh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아 보였고, 그 옆에 있던 인야도 바짝 긴장하게 되었는데......
꽤나 긴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은 Wh는,
“한국에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하는 것이었다. 사표까지 내고 떠나왔던 그 회사 일이, 뭔가 잘못 되어 가고 있는데, 자신이 있어야 만이 그 일이 해결될 거라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말을 했던 Wh도 인야도, 어이가 없는 듯... 한 참을 정신 빠진 사람처럼 멍- 하게 서 있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걷고서 이런 일이 벌어졌더라도,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걷기 시작한지 두 시간이 지났을까 말까 하던 참인데......
'이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어떻게 준비해서 떠나온 여행인데(더구나 친구에겐)......'
인야는 속으로만 생각했지만, 김이 팍 새고 말았다.
그렇지만 현실은, 두 사람이 당장 비행기를 타야 할 바르셀로나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들은 지금 피레네 산중에 있었던 데다, 어찌어찌 해서 당장 바르셀로나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즉시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를 타게 될 수 있는 보장도 없었다. 하필이면 서양 최대의 황금연휴인 '부활절' 주간이라 비행기 표를 바꾸는 일은 더더욱 꼬여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둘이는 울며 겨자 먹기로 첫날 종착지인 하까(Jaca)까지 걸어가기로 하고, 걷기만 했다.
인야는 친구의 눈치를 보느라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고, Wh는 이따금 한숨만 쉬곤 했다.
일단 하까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고, 두 사람은 저녁을 먹으면서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거기서 인야가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다.
"어차피 우리가 바르셀로나에 돌아가더라도, 그게 언제일지는 몰라도... 서울행 비행기 표 일정이 잡힐 때까지는, 우중충한 모습으로 호텔 방에서 죽치고 있어야만 할 거야. 그럴 바엔, 이건 내 생각인데... 차라리 그 시간에 이렇게 확 트인 자연산천을 조금이라도 걸으며, 바람이라도 쐬는 것이... 여러 모로 좋을 거 같은데......"
사실, 그런 상황에서 그 길을 걷고 싶었을 리 없던 Wh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둘이는 하까로 오는 길에 이미 국제전화를 걸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서울로 돌아갈 수 있게 비행일정 변경요청은 해 놓은 상태였다. 그 것 역시, 예상했던 대로... 좋든 싫든 며칠 정도는 여행사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게 두 사람은 출발한 날부터,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그러면서 결코 즐겁지도 않은 불안한 도보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자 Wh는 혼잣말로,
“이건 정말, 고행(?)이군......” 했다.
이튿날 아침, 알베르게를 나서 한참을 걷던 인야는 시계를 두고 온 걸 알아챘다.
친구에게 기다리라며 되짚어 뛰어갔지만, 이미 문이 잠긴 뒤였다. 인야의 이런 자잘한 실수는 여행지에서도 여전했다. 더구나 무거운 얼굴의 친구에게 그런 모습마저 보이는 게 미안해, 인야는 별말 없이 다시 길을 걸었다.
관광철이 지난 하까 시내는 조용했고, 문을 연 바를 찾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겨우 찾은 국도변의 바에서 보까딜료로 아침을 때운 두 사람은 다시 소로로 접어들었다.
Wh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고, 인야도 섣불리 말을 걸지 못했다.
그저 이따금 카메라를 들어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것으로, 말 대신 마음을 나눴다.
비 온 뒤 불어난 개울을 신발을 벗고 건널 때도,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그것은 미안함이 만들어낸, 말 없는 배려일 수도 있었다.
다행히 다음 마을 산타 실리아까지는 17km,
그리 힘든 길은 아니었다.
지난 겨울 이 곳에서 묵은 적이 있던 인야는 조리가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마을 수퍼에 들러 재료를 사 와, 토마토소스 볶음밥과 샐러드를 만들었다.
인야가 따뜻한 음식 만드는 것을 보면서, 부러운 듯 흘끗거리던 독일인 부인들에게... 따끈한 밥과 상추를 나눠주자, 그들은 너무 좋아했다.
저녁 무렵, 인근 수도원을 다녀왔다는 스페인 청년이 도착했고, 뒤이어 하까에서부터 함께였던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알베르게로 모여들었다.
그중 마드릳에서 온 커플의 여자 쪽 귀에는, 길에서 꺾었을 붉은 아마폴라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비에 젖은 채 도착한 그들에게 인야는 따끈한 라면 국물을 나눠주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아라곤 코스가 끝나는 일정의 날이 밝았다.
그런데 새벽부터 심상치 않은 비가 쏟아졌고, 그칠 기미가 없었다.
잠깐 밖에 나갔다 온 스페인 사람 후안이, 폭우가 내려 길 어딘가가 끊겼다는 얘기도 했고, 인야의 마음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띠에바스에 머문 사람들은, 차를 타고 다음 알베르게인 '뿌엔떼 라 레이나'까지 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차를 타고?'
사실 인야는 그러긴 싫었다. 애당초 이 길을 걸으면서는, 굳이 걸어서만이 아닌...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대처하자고 친구와 정해두었었는데, 막상 길을 걷다보니.. 그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인야가,
"아무리 비가 오더래도, 그냥 걸어서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Wh도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Wh가 반대하면 그의 뜻에 따를 생각이었던 인야는, 고개를 갸웃하긴 했지만...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를 이해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여태까지는 다 걸어서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마지막 일정을 남겨놓고 한 코스를 차를 타고 가면?'
뭔가 이가 빠져버린 기분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날 비가 좀 많이 내려서 그렇지, 거기까지 그들은 비를 아예 안 맞고 걸어왔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인야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뭔가 흐뭇함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Wh도 며칠 이 길을 걸으며, 이 길을 걸어가는 가치(?)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인정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걱정어린 시선을 뒤로 하고 비를 맞으며 나선 두 사람은, 오히려 알베르게 안에서 걱정만 하고 있을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
어쩌면 맘 속의 지고 있던 답답함과 우울함을 비를 맞아가며 걷는 것으로 풀어볼 계산도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일일수록 그렇지 않던가.
건물 안에서 비를 바라볼 때가 걱정스런 것이지, 일단 빗속으로 나온 뒤에는... 아예 포기를 한 상태라, 두려울 것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시원한 기분도 없지는 않았다. 다만, 천둥과 번개가 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
국도와 철길을 지나 인적 없는 들길로 접어들 무렵, 진흙탕이 된 오르막을 오르고 나자 비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아라곤 코스의 말미로 올수록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는데, 그날은 비가 내려서 더더욱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둘만 그 길에 있었다.
산길에 접어들면서 뒤를 돌아보니, 두 사람이 떠나왔던 띠에바스 마을은 비안개에 덮여 있었다.
그러나 마을 '에네리스'를 지날 즈음, 다시 한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마을 한 복판에서 전화를 받던 친구 Wh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뭔가, 더 안 좋은 방향으로 가는가 보구나......'
인야는 전화를 받는 그의 표정을 곁에서 훔쳐보면서,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를 끊은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는 것이었다.
사실, Wh가 한국에 팩스를 보낸 이후 그 전날까지... 그가 돌아간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다만 비행 스케줄을 확인하는 정도에서, 혹시나 한국 자체에서 일을 해결하게 되면... 굳이 돌아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간절히 그러길 바라고 있었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기대를 더이상 연장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밝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 전화를 받고나면서... 분위기는 더 굳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비록 170 여 km였지만... '아라곤 코스'는 거의 다 끝내고 있던 상황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마을의 바에 들어가 마지막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Wh는 거듭 강조했다.
"나 혼자 돌아갈 테니, 인야 너는 여정을 계속해."
물론 며칠 전부터 나온 말이었지만, 인야는 선뜻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혼자 남아 이 길을 계속 걷는다는 게 Wh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썩 내키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함께 돌아가는 것도 생각해 보았는데... 그 건 더욱 이상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친구는 역으로 인야 자신에게 미안할 게 자명한 일이라, 두고두고 뭔가 찜찜함이 남을 게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인야 자신으로 돌아와, 이런 식으로 한국에 돌아간다면... 뭔가 채우지 못하고 돌아간, 후유증이 클 게 분명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조만간에 다시 와야 할 것만 같았던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인야는 그저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럴 바엔, 그럴 바엔...... 마음이 좀 불편하더라도, 나는 남는 게 낫겠다.' 하고 마음을 정리했다.
그러나 바를 나서며 말없이 앞서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멀리 에우나떼 성당이 보였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그들의 종착역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인야는 그 곳 알베르게에서 하룻밤 묵으며, 첫 번째 순례 때 인야의 발을 씻어준 여인 마리 루스와 그녀의 홀란드 인 남편 얀과 회포를 풀 생각이었다. 그 당시 그들은 '아레스'마을에 있었는데, 두 번째 길을 걸으며 보니... 이곳으로 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알베르게에서 비노라도 한 잔 마시면서(어차피 그들이 저녁 식사를 제공할 것이고, 그들은 그 부부에게 주겠다며 한국에서 고추장도 선물로 가져온 상태였다.) 회포도 풀면서 '아라곤 코스'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럴 여유도, 마음도 없었다.
더구나 현지에 도착하니, 만나고 싶던 이들도 없었다.
전해 듣기로는, 그들은 브라질로 새 삶을 위해 떠났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편이 나았는지도 몰랐다. 미련 없이 발길을 돌릴 수 있었으니까.
남은 4km를 걸어 뿌엔떼 라 레이나에 다다르기 직전, 두 사람은 들판에 멈춰 서서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너무 마음 부담 느끼지 말고, 편히 남아서 계속 걸어." Wh가 인야를 다독였다.
"그러도록 해볼게."
그러면서 인야는 카메라를 조절해, 자동으로 두 사람의 까미노에서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뿌엔떼 라 레이나가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한 코스를 끝낸다는 안심된 기분보다는, 누군가에게 화풀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의... 약이 오른 심정이었다.
마을 입구의 제법 너른 개울엔, 빨간 흙탕물이 상당히 빠르고 또 위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중에 듣기론, 이 '나바라' 지방에 집중된 어제 밤부터의 호우로 몇 개 마을을 홍수로 만들어... 인명과 재산피해가 크다고 했다.)
그렇게 수도원 건물을 끼고 오르막 길에 접어들었는데, 저기 앞쪽에.. 어젯밤 같은 알베르게에서 잤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 저 사람들, 저기 있네?"
그 순간 그들도 인야와 Wh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얼굴과 큰 소리로, 그리고 박수까지 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기들은 겁을 내고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거기에 도착했는데, 그런 빗길을 뚫고 걸어서 도착했던 두 사람에게... 반갑기도 했겠지만, 잘 했다는 의미가 더 큰 환영(?)이기도 했던 것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여기서 가까운 중간마을인 '오바노스'까지 택시를 탄 뒤 거기서부터는 걸어서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특히 Wh에게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챔피언!"이라는 것이었다.
그랬다.
떠들썩한 재회의 자리, 그러나 그 웃음 아래엔 곧 다가올 이별이 놓여 있었다.
그날 그 환대의 진짜 주인공은, 그걸 끝으로 돌아가야 하는 Wh였다.
하늘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내린 작은 선물인지도 몰랐다.
아라곤 코스를 함께 걸어온 이들과의 짧은 재회는 곧 작별로 이어졌다.
인야와 Wh는, 역시 바르셀로나로 돌아간다는 스페인 청년 후안과 셋이 되어, 빰쁠로나행 버스에 올랐다.
거기서 다시 바르셀로나행 야간열차를 탈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