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 개신교 창립 때 부터 대를 이어온 직분 가정에 태어나 목회자의 길을 마다 하고 교회 일치를 위해 회심한 저자가 쓴 세계적 으로 유명한책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교보문고, 성 바오로 서원)으ㅣ 글을 퍼 왔으니 다 읽으시고 지식에 도움 되세요
[펌]한국의 공동번역 성서에 관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이후 자모 이신 성 교회에서는 가톨릭과 그외 모든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위해 성서를 공동 으로 번역 하여 사용할 것을 권장하였으며 이를 위해 1968년에 세계 성서공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일치 사무국은 제2경전을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동번역”에 수록하도록 합의하였습니다.
그리 하여 한국 에서도 1968년 1월 ‘성서 번역 공동위원회’가 조직되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서 학자 들이 모여 1969년1월부터 번역에 착수 하여 1971년 4월 공동번역 신약 성서가 대한 성서 공회의 발행 으로 간행되었고 이어 1977년 4월 부활 대 축일을 기해 공동 번역 성서가 간행 되었 습니다.
참으로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번역을 위해 천주교의 “천주님”과 개신교의 “하나님”을 표준말에 의거한 “하느님”으로 분류하였고 “야훼”와 “여호와”는 현대의 성서 신학계에서 따르
고 있는 “야훼”라는 명칭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개신교 관주성경(영어, 한자, 일본어 성서를 구한말 식 맞춤법을 따른 번역본)의 영어식 지명과 인명 표기로 인해 원 지명과 다른 문제(예: 다마스커스/DAMASCUS - 다메섹)는 원어 표기와 사전 및 교과서의 명칭을 따르기로 하는등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위해 획기적인 시도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와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급진주의적인 개신교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쳐(하나님, 여호와 및 제2경전을 받아들이는 문제 등) 개신교에서는 오늘날까지 이를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대한성서공회에서도 공동번역을 발간하면서 천주교용과 개신교용으로 구분하여 “개신교용”에는 제2경전을 위경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한국 개신교내의 일치가 확고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교파 및 교단의 분열은 날로 심화되고 있으며 각 교단간 문제도 매우 심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공동번역에 관하여 개신교 내에서는 참으로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교회의 한 장로라는 사람이 교계 신문에 광고를 내기를 「마리아를 숭배하는 천주교 집단과 어울려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바꾸는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성서 공동번역에 참여한 자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라”」는 끔찍한 내용을 게재(揭載) 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사람은 신은 “하나”다 라고 강조하면서 “앗쌀라 무알라이꿈” 하는 기도와 함께 검지(檢指)로 하나를 가리키는 즉 “유일신” “알라”를 “하나님”으로 숭배하는(야곱이 부인4명을 거느렸다고 하여 자기들도 4명의 부인을 합법화하는) 이슬람교도도 하지 못할 이야기를 이 장로는 하고 있습니다.
또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란 신(神)은 비록 광적으로 믿는지는 몰라도 전 인류를 구속하시려고 신(神)이 하늘에서 인간이 되어 오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라는 분을 올바로 믿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이 생각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나 “하느님” 이름 때문에 저주를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 자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저는 개신교에서 크게 잘못된 교육을 받은 게 한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라 시기 보다” “나를 벌하시는 하나님” “내가 잘못한 것을 기다렸다가 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등으로 오인하도록 두분 할머니들로부터 강요되어 온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십일조를 잘 안 내도 벌” “월요일이 시험날인데도 주일에 시험 공부하면 또 벌” “주일에 장사하면 그 가게는 꼭 망하고” “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흉을 보면 벌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홍수로 쓸어버리시는 분”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는 분” “온갖 재앙을 내리시는 분” 등 그야말로 진노하시는 하나님만을 강조하셨던 게 사실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착한 사람에게 상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시는 두려우시고 정의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상한 갈대도 꺽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자비하신 분(神)”(이사 42,3)으로서 천상의 영복을 마다하시고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 인간과 같이 사시려고 비천한 인간이 되어 오시었으며 도리어 피조물인 그 인간들로부터 수많은 능욕과 고통을 당하시다가 그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하여 십자가에 당신의 목숨까지 내 놓으시면서도 못 박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루가 23,34) 라고 기도하시는 분으로서 그분의 한결같으신 사랑을 저에게 강조하고 교육시키셨어야 했었습니다.
그 분은 부활 승천하신 다음 우리 인간을 위해 성령을 보내시었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 교회와 인간들을 보살피도록 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부흥회나 사경회 때에만 간혹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성령님을 할머니께서 “보혜사” 라고 부르셨기에 “보혜사” 는 성령님의 고유명사로만 알고 있었고 그것이 “협력자 성령님” “변호자 성령님” 등의 의미로 쓰이는 것은 이 공동번역이 세상에 나온 이후부터였습니다. 할머니께서 보시던 개신교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한 14,16)
저는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개신교의 영어 성서를 찾아보았더니 “보혜사” 를 “Advocate” 로 표현했더군요 그래서 또 그 단어를 영한사전에서 찾아보려 했으나 우리나라 사전에는 이를 보혜사로 기록한 사전은 없었으며 아직까지도 저는 그런 사전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번역을 보면“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요한 14,16)라고 너무나 알기 쉽도록 번역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기 쉽게 번역하는 그야말로 주님의 복음선포 사업에 참여한 훌륭한 목사님들을 격려하고 칭찬해 주지는 못할망정 “저주를 받아라”는 바로 그 사람은 한 교회의 원로로써 또 남을 잘 다스려야 하는 한 교회의 장로로써 그의 혀부터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여기 개신교 신자들이 우리 주 예수님의 “친동생” 이라고 잘못 알고 제멋대로 부르고 있는 성 야고보의 편지를 먼저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 개신교 번역 관주성경 :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다.”(야고보 1,26)
- 개신교 영어성경 : “A man may think he is religious, but if he has no control over his tongue, he is deceiving himself, that man's religion is futile.”(JAMES 1,26)
- 공동번역 :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이니 그의 신앙생활은 결국 헛것이 됩니다.”(야고보 1,26) 또 “혀는 휘어잡기 어려울 만큼 악한 것이며 거기에는 사람을 죽이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내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되겠습니다. 같은 샘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이 함께 솟아나 올 수 있겠습니까? 내 형제 여러분 무화과나무에 어떻게 올리브 열매가 달릴 수 있겠습니까? 짠물에서 단물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야고보 3,8-12) 라고 하셨습니다.
이 장로는 분명 사랑의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그 입으로 남들을 저주하였고 그것도 광고매체를 통해 공개적으로 행한 것을 보면 사랑보다는 미움을 더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장로나 개신교의 극소수의 지나친 열성자들은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저주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저주한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을 냉대하는 사마리아 동네를 지나 시면서 다른 야고보 사도를 통해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불살라 버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런 제안을 한 “야고보 사도와 그 형제를 꾸짖으신 분”(루가 9,54-55)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같은 장로는 그가 다니는 교회에 기여를 많이 하여 한국 감리교회의 장로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같은 사람일수록 고맙게도 우리나라에 감리교를 맨 처음으로 전한 미국 감리교회(연합)에는 장로란 직분이 없음을 아마도 알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장로뿐 아니라 권사도 없습니다. 어떻든 한국에서 장로라고 하면 교회의 한 원로요 지도자로서 존경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입니다.
여기 비록 잘못 번역된 한국의 개신교 성경에도 “장로”는 존경받아야 한다고 하느님의 말씀인 양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 개신교 영어 성경 원문 : “Elders who do well as leaders should be reckoned worthy of a double stipend ….”(ⅠTIMOTHY 1,17)
- 공동번역 : “남을 지도하는 원로들은 갑절의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Ⅰ디모데 1,17)
- 개신교 번역 성경 :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Ⅰ디모데 1,17)
이와같은 개신교 성경에 나타나 있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 장로는 존경받기는 고사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사도 바오로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먼저 묵상해보아야 할 것 갔습니다.
즉,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전한 복음(사랑)과 다른 것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라 1,9) 라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 장로 같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일치는 고사하고 종교분쟁 또는 심하면 종교전쟁까지 일어나게 할 사람들이 많아진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또 이같은 사람이 한사람이라면 아예 할머니께 말씀드리지도 않았겠으나 문제는 이런 장로, 권사, 집사들이 지금의 개신교에는 비교적 많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과거엔 이 손자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 즉 “크리스찬(Christian)”이라는 아름다운 명칭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명칭은 세상 어떤 명칭보다 더욱 고귀한 것이며 이 명칭에는 반드시 거기에 따르는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허명(虛名)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가장 엄숙한 의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크리스찬이란 말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스승의 가르침 받들어 따르고 그분의 덕을 본받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라는 이름을 지녔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닮은 점이 없다면 이런 큰 모순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고 “하느님” 을 믿는 것도 아니라고 하면 모두들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 이나 “하느님” 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하느님” 은 오직 한국어의 보통명사일 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과 하느님” 은 수없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도 많습니다.
요사이는 돈과 권력이 그리고 쾌락이 곧 하나님이란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사실 하나님과 하느님은 실제로 볼 수 없습니다. 때문에 저는 다만 보이는 “하느님” 으로 오신 예수님만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고 하신 그분의 “성부님” 을 믿습니다.
또한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신 제 3위 “성령님” 을 믿습니다. (마태 3,16-17 ; 마르코 1,9 ; 루가 3,22)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세 위께서 한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란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크리스찬의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습니다.
굳이 하나님과 하느님 중에 어느 한 분만을 꼭 믿어야 한다면 “나는 곧 나다(I Am that is who I am)”(출애 3,14) 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분만을 믿겠습니다. 혹시 “여호와” 를 “야훼” 라고 하였다 하여 또 트집을 잡고 저주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런 분들은 제가 언젠가 읽었던 개신교 신학자 김 모 교수의 “여호와” 이름에 관한 글을 읽어보았으면 합니다. 그는 결론에서 여호와는 하느님의 일종의 가명 같은 것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가명(假名)이든 진명(眞名)이든 연구한 그분도 또 저주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마디 부연한다면 요사이 세계 신학자들은 거의 모두 하느님을 야훼로 쓰고 있으며 지금도 유대인들은 학자에 따라 야훼라고 쓰든지 또는 여호와라고 쓰든지 간에 글은 그렇게 쓰지만 거룩하신 그분의 이름은 부를 때에는 “아도나이” 라고 부릅니다. 무식이 곧 용감이라고 유독 한국에서만 하나님 하느님하고 싸우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어에도 다만 GOD이라는 한 단어밖에는 없습니다.
할머니 이 손자가 우스운 이야기 하나 전해 드릴까요?
옛날 캐나다의 어느 도시에서 ‘가톨릭 신자 팀’과 ‘개신교 신자 팀’ 사이에 축구 시합이 벌어졌었다고 합니다. 많은 관중이 모여들었고 그곳에는 예수님도 일반 사람의 모습으로 응원을 했었답니다.
시합이 시작된 후 전반전 약 15분경 가톨릭 팀이 먼저 한 꼴을 넣었습니다.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환호하였고 예수님도 그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습니다.
후반전 약15분 경 마침내 개신교 팀도 드디어 한 꼴을 넣었습니다. 이때 모든 개신교 신자들은 너무 기뻐했고 예수님도 일어나셔서 큰 박수를 보냈답니다. 그런데 예수님 뒤에서 응원하던 한 노신사가 예수님인 줄 모르고 어깨를 툭툭 치며 “도대체 당신은 어느 편입니까” 하고 물었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어느 편도 아니고 그저 축구를 구경하러 왔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셨더랍니다.
이 말을 들은 그 노신사는 “아하! 이 사람은 분명 무신론자이로구먼” 하였더랍니다. 물론 가공된 이야기입니다만 세상의 종교가들은 자기가 믿는 곳으로 모든이가 와주기를 바라고 자기들만이 예수님 편이라고 속단하는 수가 많습니다.
특히, 개신교 신자들은 무조건 상대편은 마귀나 또는 이단자로서 지옥 간다는 속단과 편견을 가지고 상대방의 인격마저 모독하는 경우를 저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이와같은 일은 오히려 예수님을 슬프게 하여 드릴뿐입니다.
누가 누구를 보고 이단이라고 합니까? 심지어 심한 경우에는 가톨릭에도 성경과 찬송가(성가)가 있느냐고 질문하는데 속된말로 삶은 소머리도 웃을 지경입니다.
여기 공동번역에 참여하셨던 두분 목사님이 점심식사 중에 하신 실제로 있었던 사담 한마디를 간단히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문익환 목사님 : 공동번역을 하자니까 한가지 사실이 발견되었어 무엇인지 알아?
이현주 목사님 : ???
문익환 목사님 : 요새는 말이야 구교(Catholic)가 신교(新敎)이고 신교(Protestant)가 구교(舊敎)더라고 !!
이제는 문익환 목사님도 가시고 저의 개신교 시절 덕망 높으신 한경직 목사님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물론 할머니 시대의 손양원 목사님도 가고 안 계십니다. 그런데 그 훌륭하신 목사님들의 뒤를 이어 묵묵히 일하시는 목사님들도 많이 계시는데도 요사이는 목사님들에 대한 인식과 존경심도 점차 사라지는 듯하여 안타까울 뿐입니다. 특히 모든 것을 숫자적으로 계산하는 풍조에서는 목회자의 인격이 들어설 공간이 없음도 문제인 것 같구요. .....
여기 유수한 개신교 잡지에 공개적으로 지적한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무임목사(실업 상태에 있는 목사) 수는 약 7000 여명으로 증가 일로에 있으며 신학교는 총 270개로 그 중 220개는 무인가 신학교이며 50개만이 인가교이다. 매년 배출되는 졸업생은 6500명이나 5000명은 무인가 신학교 출신이 다. 이들은 정작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육시킬 교육 목사와 교육 부서를 인 도할 만한 자질조차 갖추지 못한 분들이 비일비재하다
- 무인가교는 대부분 강의실과 도서관이 아주 빈약하며 도서관이 아예 없 는 학교도 많다.
- 한국교회 위기는 세속적인 스타성 목사들의 맹활약이다. 이러다 보니 연합 단체는 물론 개혁 단체들조차 공명심으로 행동한다.(조직에는 회장급만도 20여명이고 부흥사 협의회는 협동 총무만도 200여명 가깝다)
- 세미나는 부흥을 갈망하는 목사들의 “요령 터득”의 현장이며 돈과 시간 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이들은 벳세다 들판의 떡을 위해 모여든 청중이다.
할머니! 여기 재미 동포 사업가 중 한 분이 개신교를 떠나며 개신교 잡지에 긴급 투고한 원고를 극히 일부 발췌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이 투고는 개신교가 반성해야겠다는 취지에서 자체 공개한 것이라고 보여지지만 그 사업가가 어디로 갔다는(개종) 말은 없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그분의 문맥으로 보아 가톨릭으로 회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의 복음정신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평신도일수록 완전한 진리에 접하면 금방이라도 회심할 수 있고 직분이 있거나 그 직분도 차츰 올라갈수록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회심하기 어려운 것이 상례이나 기묘한 방법으로 회심하신 분들을 많이 보아왔고 더욱이 강렬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십자가를 지고 응답하신 목사님들은 그야말로 자기 육신의 생명 줄인 그 모두를 버리고 오직 영원한 새 생명을 찾으시려는 노력으로 회심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 나는 왜 개신교를 떠났는가 - ( 재미사업가 황 xx)
※ 왜곡된 교회
-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왜곡되어 가고 있다. 기복 신앙은 아주 일반화되어 가고 있고 교회의 기업화는 이미 그 한계를 넘었다는 느낌이다. 교세 확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마치 제동장치가 고장난 자동차같이 달리기만 한다. 어떤 행위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있다.
-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는 일반 사회의 기준으로 보아도 조금도 나을 것이 없으며 솔직히 말해서 어떤 경우는 교회의 운명이 기업보다 훨씬 비리를 많이 갖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단의 감투에 수억원의 돈을 쓰며 공공연히 교회를 매매하기도 하면서 목사들은 이것도 모두 전도를 위한 것이니 궁극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전개한다.
- 1994년 샌프란시스코 공항 근처에 있는 한 호텔에서 한국 모 교단의 선교대회가 열린적이 있다. 한국 재벌 그룹의 간부도 여러 해 근무했던 나지만 대회 규모에 너무 놀랐다. 호텔 1층에 있는 연회실을 여러 개 터서 족히 일천명 이상이 참여할 수 있는 대규모 연회장에서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으니 수십만 달러가 소요 됐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같은 대회라면 선교 추진 본부가 있는 한국에서 개최해도 충분하지 않은가?
- S교회 담임 목사였던 A목사는 80년대 초 C장로에게서 $100.000을 무이자로 빌려 집을 샀다. 그 집의 은행 융자금은 주택 수당으로 교회가 지급했고 얼마 안 가서 그 집은 목사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만약 학교 교사가 학부형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 집을 샀다면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수년 전 자민련의 이모의원은 정덕진씨에게 무이자로 수억을 빌어 썼다가 실형을 살고 나왔다.
공직자에게는 뇌물이 되는 일이 어떻게 목사에게는 극히 칭찬 받을 일이 되는가?
- 성경 말씀이나 복음을 목사들 편한 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갖다 붙이니 신앙은 자연적으로 왜곡된다.
- 한국 사람들은 신분 의식이 매우 강하다. 남의 집 머슴을 살아도 명함만은 커야 한다. 교회에 와서도 집사니 권사니 장로니 하는 “계급” 을 받는 것을 좋아하며 목사들은 헌금을 유도하기 위해 이를 적극 활용하여 “진급 심사” 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교포들은 별달리 사회적 지위가 없다 보니 교회의 직분에 더 집착하는 것 같다. L씨는 S교회로 온지 1년만에 부부가 다 권사로 진급했고 K장로는 S교회에 온지 1년만에 다른 사람은 20년 다녀도 되기 힘든 장로를 월 $4000정도의 헌금으로 간단히 진급했다.
- 감사 헌금을 위해서는 추수감사절과 심지어 맥추 감사절도 있다.
내 친구 K목사가 미국 유학 후 귀국 준비하며 한말에 의하면 “분당에서 교회를 하는 친구가 교인이 70명 정도 강단과 의자, 전세금 등을 합하여 그 교회를 약 8000만원에 팔려고 하며 그 돈으로 유학을 하려 한다.......”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교회 매매이다. 한국에서 교회 매매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 오늘날의 한국개신교는 중병에 걸린 환자 같다. 너무나 깊이 병이 들어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조차 느낄 수 없는 정도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교회가 기업화되고 타락했다면 모든 교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싫든 좋든 교회의 지도자는 목사들이다. 때문에 그 주된 책임은 곧 목사들에게 있다. 오늘날 골목골목마다 세워진 개신교가 진정 올바른 복음 위에 기초했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 우리 주위의 목사 자제로서 유학 온 사람들을 많이 본다. 목사의 자제라고 유학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70-80년대 초까지 유학이란 여간한 경제력 없이는 엄두도 못 내었다. 그러나 어떻게 목사의 봉급으로 유학을 시킬 수 있는가? 만일 공무원이 그랬다면 그 재산은 의심해 볼 것이다.
- 모 목사는 아들이 이곳 북가주에서 사업하기 때문에 자주 온다. 이분은 아들을 유학시켰을 뿐 아니라 사업 자금까지 대 준 것이다. 언젠가 설교에서 아들의 사업 자금을 충분히 대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교회는 목회자에 대해 더 좋은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때문에 “십일조는 최소의 의무이고 그 이상 소득의 20% 또는 30% 정도는 헌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에서는 아들 사업 자금을 위해서 또 한국에서는 상류층 운동인 골프도 즐기기 위해서 평신도로부터 20-30%의 헌금을 거둔다면 한참 지나친 일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 내가 한국에 있을 때 나의 상관이었던 B전무는 장로교회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가 한탄하는 것은 대 그룹의 전무로서 아버지를 노회장 한번 시켜 드릴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용은 1억5천만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수원의 25평 아파트를 1600만원에 샀으니까 대략 이 아파트 값 9채 값이었다.(1982년도) 이 목사는 B전무가 사장이 되어서야 비로소 노회장이 되었다. 이 목사는 그래도 잘난 아들 덕분에 노회장이 되었지만 다른 노회장들이나 감독들은 모두 잘난 아들 덕분에 출세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할머니! 더 이상은 누워서 침 뱉기라고 생각하여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그러나 꼭 한 말씀은 목회자들에게 물어 보아야겠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쫒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마태 7,22) 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태 7,23) 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당신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는 전혀 생각해 보시지 않으셨는지요? 한번쯤은 꼭 바로 당신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야고 4,14)
할머니, 여기 물질을 초월한 주님의 사랑만을 전하다 주님 품에 안긴 한 가톨릭 사제의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벨지움의 트레머루” 태생인 성 다미안 신부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브렌느러콩트 대학에서 공부한 후 1860년 예수와 마리아 성심회(The Father of the Sacred Hearts of Jesus and Mary “The pie pus Fathers”)에 입회하여 “다미안” 이란 수도 명을 받고 “호놀루루” 에서 사제로 서품 되었습니다(1864). 그후 그는 9년 동안 “푸노와 코알라” 주민들의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하다가 1873년 “몰로카이” 나환자촌에 파견을 자원하여 여생을 나환자들과 함께 살며 주님의 말씀을 온몸과 마음으로 실행하였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이 나환자 수용소 “몰로카이” 섬에 갔을 때 그곳은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서로 싸우고 온통 절망에 빠져 자살하는 환자도 많았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의 헌신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코웃음만 쳤습니다.
“흥, 하느님 사랑이 다 무슨 헛개비 소리인가? 정말 사랑하신다면 우리를 이토록 썩어 문드러지게 내버려둔다는 말인가? 그따위 ‘사랑’은 당신네 처럼 건강한 자들만이 읊어 대는 사치한 잠꼬대야!!” 라고 빈정대며 욕설을 퍼부을 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다미안 신부님은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에게도 같은 나병을 허락하시어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게 해주소서!!” 라고요. 과연 그 기도는 응답이 되어 신부님도 나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신부님은 강론(설교)때마다 “동료 나환자 여러분! 저도 여러분과 똑 같은 나환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변함없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내 몸은 비록 썩어 들어가고 있지만, 내 마음속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신부님의 진솔한 사랑에 감복되어 그 섬은 사랑과 평화의 섬으로 변했습니다. 지금도 그분의 성덕과 애덕은 수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시던 손양원 목사님은 두분 할머니 모두 돌아가신 이후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동족상잔이라는 비극 속에서 그 목사님의 두 아들(동신, 동인) 모두를 잃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의 아들이란 이유로 어떤 청년이 잔악하게 죽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바로 그 범인을 용서하고 그분의 양아들로(안재선⇒손재선으로)까지 삼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라고 하신 예수님을 그대로 따르신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오늘날의 개신교회 내에도 이같으신 목사님들이 분명 많으실 텐데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일부 빗나간 목회자들과 양적(量的)팽창에만 집중하는 소위 스타성 목사들의 그늘에 짓눌려 때로는 질식 상태에 까지 이르곤 합니다. 그리고 더욱 한심한 것은 열심하고 유명하다는 목사님들조차 설교를 위해 손목사님의 자료를 옮겨 적어 사용한 후에는 그 양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또는 그 자손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조차 태반이 모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교계에도 너무나 삭막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이 손자는 가끔 철야 기도를 통하여 이분들을 위해서도 특별히 기도합니다.
할머니! 여기 초대 박해시대때 순교하신 “성 뽈리까르보 주교” 순교자에 관한 “스미르나 교회의 편지”를 공개해야할 것 같습니다.
성 뽈리 까르보는 사도들의 제자였고 “스미르나”의 주교였으며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와 함께 로마로 가서 부활축제 문제에 관하여 제 11대 교황 아니체투스(Anicetus)와 회담도 하였습니다.
이 순교자 주교는 가톨릭 정통교리의 수호자이셨고 “사탄의 맏이” 라 부른 마라치온니즘과 바렌티아니즘을 배격하라고 역설했습니다. 또 그는 이교신에게 제물을 바치지않는다는 이유로 155년경 스미르나시내의 경기장에서 화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다음글은 순교현장을 목격한 어느 신도가 “스미르나 교회의 편지” 라는 이름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 그의 둘레에는 화형에 쓰일 물건들이 다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사형 집행인들이 그에게 쇠못을 박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키려 했을 때, 뽈리까르보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로 두시오. 나에게 불을 견딜힘을 주시는 분께서는 당신들이 못을 박지 않더라도 장작더미 위에서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서 있는 것을 허락하실 것이오.” 그래서 그들은 못박지는 않고 묶어놓기만 했습니다..... 이때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이시여,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당신을 알게된 사랑하올 복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여, 천사들과 대천사들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당신 면전에서 살고 있는 모든 의인들의 하느님이시여,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께서는 이날과 이 시간에 제가 순교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잔을 함께 나누고 성령을 통하여 불사 불멸 안에서 육신과 영혼의 새 생명에로 다시 일어나도록 마련하셨나이다. 성실하시고 거짓 없으신 하느님이신 당신께서 마련하시고 저에게 이미 보여주셨으며 이제 이루어 주신대로, 오늘 당신의 순교자들과 함께 살찌고 마음에 드는 제물로서 저를 받아주소서.
그래서 이 모든 것 때문에 영원하신 천상의 대사제이신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을 찬미하고 찬송하며 영광을 드리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과 더불어 당신께 이제와 미래에 영원토록 영광이 있으소서. 아멘.”
그가 “아멘”이라고 말하며 기도를 마쳤을 때 사형 집행인들은 불을 붙였습니다.
거센 불길이 타오를 때 우리는 한 기적을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그 기적을 보는 것이 허락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를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불은 바람을 가득 담은 배의 돛처럼 불 가마의 모양을 띠고는 그 순교자의 몸을 감싸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있는 몸은 타고 있는 육신처럼 보이지 않고 오히려 구워지고 있는 빵이나 또는 용광로에서 제련되고 있는 금이나 은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유향 냄새나 어떤 귀한 향료 같은 향기를 맡았 습니다.」
우리는 교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인 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13-14) 이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피워야 겠습니다.
출처 :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교보문고, 성 바오로 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