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교회 43 : 경북노회사(1971)
서문로교회가 모체가 된 경북노회는 그 중심에는 오랫동안 오병세 교수가 있었으며, 이 경북노회 역사도 그가 기록하였다. 서문로교회가 역사성을 가지고 있었고, 모교회였던 서문교회에서 고신을 다닌다는 이유로 신앙의 전환을 권고받았고, 이를 거부하면서 교회에서 제명되었던 여섯 명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교회를 시작하였다. 한 해 만에 건실한 교회를 이룰 정도였다. 이런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하고, 역사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오병세 교수가 몇 차례 역사를 정리한 바 있다.
제30회 노회장 재임시에 경북노회사도 그가 30회 노회를 기념하여 ‘경북노회사’를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은 화보집과 같은 형태로 구성하여 네 시찰 단위로 각 교회의 사진, 목사와 장로와 교인 혹은 제직 사진을 82면에 걸쳐 넣었고, 후반부에는 47면에 걸친 역사와 노회 촬요를 포함하고 있고, 중간에 의미있는 통계들이 나타난다. 경북노회사 발간을 위해 한학수, 박정덕, 김도윤 장로 세 사람이 편찬위원으로 봉사했다. 오병세 교수는 이 책이 나오자 부산기독교 독서실에 친필로 써 기증한 것인데, 어떻게 이 책이 내게 온 것인지는 기억이 없다.
마지막에는 교회 상황 통계표를 남기고 있어 당시 경북노회의 사정을 알게 한다. 대구, 경산, 안동, 김천, 네 시찰에 90교회, 22당회, 목사 34, 장로 45, 강도사 2, 전도사 55. 전도인 14, 장립집사 19, 서리집사 1173, 세례교인 3,265명, 학습교인 845명, 원입교인 1,659명, 주교 학생 수 7,043명, SFC 1,364명, 유아세례 840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역사 부분에서는 제1부 기독교의 유래에서 기독교의 시작(B.C. 4-AD100), 기독교의 성장(-590년), 기독교의 침체(-1517), 기독교의 각성(-1618), 기독교의 선교(-1882)로 다루었고, 제2부 한국장로교회 역사를 선교회 시대(1885-1906), 장로회 조직시대(1907-1912), 장로회 성장시대(1913-1937), 장로회 임흑시대(1938-1945), 장로회 분열시대(1945- )로 구분하였다. 우리 교단의 역사로 우리 교단의 배태(1938-1945), 장로회 재건운동(1945-1951), 신학재건운동(1946-1948), 우리 교단의 조직(1948-1959)을 정리하였고, 이어 경북노회가 설립되는 과정의 약사를 기록했다. 이 때는 경동노회가 분리된 후였기 때문에 경동노회의 초기 기록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 책 경북노회사에서는 1969년 당시의 각 교단 통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통합측이 2,302교회 목사 1,189명, 교인 569,874명, 합동측이 1,991교회, 목사 수 2,096명, 교인 수 550,790명, 고신측이 509교회, 목사 160명, 교인 113,023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기독교장로회 689교회, 453명, 194,188명으로 집계하고, 그 외에도 성경장로회(ICCC) 89교회, 독노회 51교회, 성경장로회(탈퇴) 58교회, 호헌 70교회, 개혁장로회 139교회, 벧엘장로회와 독립교단이 각 9교회씩으로 집계하고 있다. 이는 당시 발행했던 ‘기독교연감’ 같은 곳에서 나왔을 것이지만 출처를 밝히고 있지는 않다. 한국장로교단들이 오늘날 25여 개 교단으로 분리된 것은 1970년대 교회성장기와 군소신학교 난립으로 인해 1970년대 후반부터 집중되었다.
1952년 3월 6일에 모인 총로회 결의에 따라 그해 5월 19일 경북노회를 조직하고, 경주교회를 시무하던 윤봉기 목사를 초대 노회장으로 선출하였고, 오병세 교수는 1951년 9월 경남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1952년 9월 총로회가 조직될 때 회록서기로 선출되었는데, 총로회 참가회원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던 바를 몇 차례 들은 바 있는데, 경북노회 창립노회 촬요에 회원들의 이름을 적어 둔 것은 서기였던 그가 이를 특별히 유념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