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하노이에서 옛 대우의 흔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한글이 그대로 적혀 있는 대우 중고버스가 시내 곳곳을 활보하는 가운데 대우자동차의 후신(後身)인 한국GM이 만든 쉐보레 캡티바(옛 윈스톰)와 스파크는 여전히 하노이 시민들에게 인기가 높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베트남을 찾는 외국 정상들의 단골 숙소로 애용되던 하노이대우호텔은 지금도 하노이 시민들의 자랑거리다.
베트남 국민들에게 김 전 회장과 대우는 국민기업이나 다름이 없다. 지난 1986년 ‘도이모이(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된 이후 발전가능성만 보고 가장 먼저 찾은 기업과 기업인이 바로 대우와 김 전 회장이었다. 지금도 김 전 회장은 베트남 사회에서 ‘체어맨 킴’(Chairman Kim)으로 통하는 유명인사다. 그는 풍부한 자원과 1억명에 가까운 인구, 한국을 뛰어넘는 높은 교육열에서 베트남의 희망을 봤다. 멈춘 세계경영의 시동을 다시 켤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베트남은 최적의 장소였다.
김 전 회장은 현재 베트남에서 다시 시작된 세계경영의 힘찬 기운이 다시 들불처럼 확산되기를 꿈꾼다. 그가 키운 인재들이 전 세계에서 엄청난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을 볼 요량으로 건강관리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엄청난 워커홀릭(일중독자)이었던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 듯 김 전 회장에게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36시간, 48시간이다.
지난 1월25일 하노이의 반찌골프클럽 클럽하우스에서 김 전 회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다음은 일문일답.
송창섭 기자 (이하 송) : 베트남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하 김) : 아니 뭐…. 하루 일과 중 70%는 학생들(글로벌YBM 학생)과 함께 지냅니다. 가끔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도 하고요. 아울러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꾸준하게 합니다.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여기 있는 한국기업 법인장들도 만나고요. 그 자리에서는 주로 우리 학생들을 많이 추천합니다. 지난 번(3기생)에는 호찌민하고 하노이에 있는 회사에 반반씩 취업을 시켰는데, 기업들의 만족도가 아주 좋습니다. 또 이따금씩 수료생들을 만나 취업 후 어려운 점이 뭐가 있는지도 듣습니다.
송 : 글로벌YBM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김 : 6년 전 몇몇 대학교수님들과 함께 며칠에 걸쳐 토론회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토론 주제는 ‘과연 우리 젊은이들을 어떻게 볼 것이냐’였죠. 대다수 교수님들이 우리 젊은이들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현장을 떠난 지 오래고 해외에 주로 머물렀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잘 몰랐어요. 그래서 시작한 겁니다.
송: 학생들을 만나면 주로 어떤 말씀을 많이 하시나요.
김: 초창기에만 해도 학생들에게 ‘5년 동안은 회사에 끈기를 갖고 근무하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걸 10년으로 늘렸어요. 회사를 창업하려면 5년 갖고는 모자라다고 본거죠. 10년쯤 지나야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고, 자기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어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열심히 일해서 펀드(특정 상품을 지칭하기보다는 일반적인 저축을 의미)도 만들라고 권합니다. 자기 월급을 받아서 저축도 하고…. 무엇보다 창업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다행히 여기(베트남)서는 창업하는 데 돈이 많이 들지 않거든요. 공장 짓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3분의 1 정도죠. 그리고 경공업이니까 시설비도 많이 들지 않고 여러모로 괜찮습니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같이 할 수도 있고, 단독으로도 할 수 있죠. 요즘 100세 시대라고 하니, 나이 50 먹어서 (창업을) 시작해도 충분합니다.
송 : 10년 후 창업이 의무사항은 아니죠?
김 : 그럼요. 좀 더 시간을 갖고 창업을 준비하라는 거지, 그게 의무사항은 아니에요. 다만 옛날에는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실패하면 자신감을 잃어버려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10년간 준비하라고 하는 겁니다. 10년 동안 준비하면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길 테니, 창업하는 데 유리할 테니까 말이죠. 물론 목돈도 생길 거고요.
송 : 어찌 보면 10년이라는 시간은 학생들에게는 기다림과 준비 기간이겠군요.
김 : 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이 친구들(글로벌YBM 학생)의 10년과 한국에 있는 대기업 신입사원의 10년은 분명 다를 거라고 말이죠. 저는 그 과정에서 도움을 주는 역할뿐이에요.
송 : 졸업한 학생들도 정기적으로 만나신다고 들었는데요.
김 : 우리가 맨 처음 40명으로 시작했어요. 1기생 인원이 그랬습니다. 그 때는 못 따라오는 학생은 (한국으로) 돌려보냈어요. 아침 5시반부터 저녁 11시까지 공부시키고 그랬죠. 예전에는 베트남어 단어를 하루 40개씩 외우게 했는데, 그마저도 요즘은 100개로 늘렸습니다. 1주일에 한 번씩 시험도 봅니다. 인재를 키운다는 게 가르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사후관리까지 신경 써야 하니 보통 힘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간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게 아니에요. 정작 그런 부분에 시간을 많이 뺐기죠.
송 : 학생들을 채용한 기업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김 :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하노이 현지를) 돌아다니면서 물어보시면 알 겁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여기저기서 사람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많습니다. 항상 모자라죠. 가령 지난 3기생은 70여 명 정도 수료했는데, 기업들이 요청한 숫자를 합치면 150명이 넘었습니다.
(동석한 장병주 세계경영연구회 회장은 “요청 온다고 해서 무조건 학생들을 보내지 않고, 회장님이 직접 찾아가 ‘이 사람(기업 CEO)이 우리 학생들을 데려가 제대로 키울 수 있는지 없는지 다 살핀다”고 전했다.)
송 : 글로벌YBM 학생들의 강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김 : 다른 프로그램의 경우 그냥 해외 교육기관에 위탁시키기만 하는데 우리는 그게 아닙니다. 현재 하노이 문화대에 현지 언어(베트남어)를 배우는 것만 신세를 질 뿐, 그 외 모든 프로그램은 우리가 짜서 우리가 시행하고 있어요. 그리고 기본원칙은 이렇습니다. 학생들이 여기서 뿌리를 내려야 하니까, 무엇보다 현지 언어, 현지 문화에 대해 이해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요. 또 앞으로 일을 해야 하니까, 고급 비즈니스 영어도 별도로 교육시키고 있죠. 직무교육도 시키고요. 마지막으로 과거 대우정신인 도전, 희생, 창조정신은 별도로 특강 같은 형식을 빌려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육프로그램이 과거 우리 대우에서 신입사원을 상대로 했던 것과 비슷한 게 많습니다.
(장병주 회장은 “우리 내부에서는 글로벌YBM을 가리켜 ‘김우중 사관학교’라고 부른다”면서 “여기서 회장님의 역할은 교장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들 방청소 상태까지 챙기는 사감(舍監) 선생까지 다양하다”고 덧붙였다.)
- 김우중 전 회장(맨 왼쪽)이 ‘글로벌 청년사업가 발굴프로젝트’ 입상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베트남 국민들에게 김 전 회장과 대우는 국민기업이나 다름이 없다. 지난 1986년 ‘도이모이(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된 이후 발전가능성만 보고 가장 먼저 찾은 기업과 기업인이 바로 대우와 김 전 회장이었다. 지금도 김 전 회장은 베트남 사회에서 ‘체어맨 킴’(Chairman Kim)으로 통하는 유명인사다. 그는 풍부한 자원과 1억명에 가까운 인구, 한국을 뛰어넘는 높은 교육열에서 베트남의 희망을 봤다. 멈춘 세계경영의 시동을 다시 켤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베트남은 최적의 장소였다.
김 전 회장은 현재 베트남에서 다시 시작된 세계경영의 힘찬 기운이 다시 들불처럼 확산되기를 꿈꾼다. 그가 키운 인재들이 전 세계에서 엄청난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을 볼 요량으로 건강관리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엄청난 워커홀릭(일중독자)이었던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 듯 김 전 회장에게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36시간, 48시간이다.
지난 1월25일 하노이의 반찌골프클럽 클럽하우스에서 김 전 회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다음은 일문일답.
송창섭 기자 (이하 송) : 베트남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하 김) : 아니 뭐…. 하루 일과 중 70%는 학생들(글로벌YBM 학생)과 함께 지냅니다. 가끔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도 하고요. 아울러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꾸준하게 합니다.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여기 있는 한국기업 법인장들도 만나고요. 그 자리에서는 주로 우리 학생들을 많이 추천합니다. 지난 번(3기생)에는 호찌민하고 하노이에 있는 회사에 반반씩 취업을 시켰는데, 기업들의 만족도가 아주 좋습니다. 또 이따금씩 수료생들을 만나 취업 후 어려운 점이 뭐가 있는지도 듣습니다.
송 : 글로벌YBM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김 : 6년 전 몇몇 대학교수님들과 함께 며칠에 걸쳐 토론회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토론 주제는 ‘과연 우리 젊은이들을 어떻게 볼 것이냐’였죠. 대다수 교수님들이 우리 젊은이들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현장을 떠난 지 오래고 해외에 주로 머물렀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잘 몰랐어요. 그래서 시작한 겁니다.
송: 학생들을 만나면 주로 어떤 말씀을 많이 하시나요.
김: 초창기에만 해도 학생들에게 ‘5년 동안은 회사에 끈기를 갖고 근무하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걸 10년으로 늘렸어요. 회사를 창업하려면 5년 갖고는 모자라다고 본거죠. 10년쯤 지나야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고, 자기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어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열심히 일해서 펀드(특정 상품을 지칭하기보다는 일반적인 저축을 의미)도 만들라고 권합니다. 자기 월급을 받아서 저축도 하고…. 무엇보다 창업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다행히 여기(베트남)서는 창업하는 데 돈이 많이 들지 않거든요. 공장 짓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3분의 1 정도죠. 그리고 경공업이니까 시설비도 많이 들지 않고 여러모로 괜찮습니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같이 할 수도 있고, 단독으로도 할 수 있죠. 요즘 100세 시대라고 하니, 나이 50 먹어서 (창업을) 시작해도 충분합니다.
송 : 10년 후 창업이 의무사항은 아니죠?
김 : 그럼요. 좀 더 시간을 갖고 창업을 준비하라는 거지, 그게 의무사항은 아니에요. 다만 옛날에는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실패하면 자신감을 잃어버려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10년간 준비하라고 하는 겁니다. 10년 동안 준비하면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길 테니, 창업하는 데 유리할 테니까 말이죠. 물론 목돈도 생길 거고요.
송 : 어찌 보면 10년이라는 시간은 학생들에게는 기다림과 준비 기간이겠군요.
김 : 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이 친구들(글로벌YBM 학생)의 10년과 한국에 있는 대기업 신입사원의 10년은 분명 다를 거라고 말이죠. 저는 그 과정에서 도움을 주는 역할뿐이에요.
송 : 졸업한 학생들도 정기적으로 만나신다고 들었는데요.
김 : 우리가 맨 처음 40명으로 시작했어요. 1기생 인원이 그랬습니다. 그 때는 못 따라오는 학생은 (한국으로) 돌려보냈어요. 아침 5시반부터 저녁 11시까지 공부시키고 그랬죠. 예전에는 베트남어 단어를 하루 40개씩 외우게 했는데, 그마저도 요즘은 100개로 늘렸습니다. 1주일에 한 번씩 시험도 봅니다. 인재를 키운다는 게 가르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사후관리까지 신경 써야 하니 보통 힘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간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게 아니에요. 정작 그런 부분에 시간을 많이 뺐기죠.
송 : 학생들을 채용한 기업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김 :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하노이 현지를) 돌아다니면서 물어보시면 알 겁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여기저기서 사람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많습니다. 항상 모자라죠. 가령 지난 3기생은 70여 명 정도 수료했는데, 기업들이 요청한 숫자를 합치면 150명이 넘었습니다.
(동석한 장병주 세계경영연구회 회장은 “요청 온다고 해서 무조건 학생들을 보내지 않고, 회장님이 직접 찾아가 ‘이 사람(기업 CEO)이 우리 학생들을 데려가 제대로 키울 수 있는지 없는지 다 살핀다”고 전했다.)
송 : 글로벌YBM 학생들의 강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김 : 다른 프로그램의 경우 그냥 해외 교육기관에 위탁시키기만 하는데 우리는 그게 아닙니다. 현재 하노이 문화대에 현지 언어(베트남어)를 배우는 것만 신세를 질 뿐, 그 외 모든 프로그램은 우리가 짜서 우리가 시행하고 있어요. 그리고 기본원칙은 이렇습니다. 학생들이 여기서 뿌리를 내려야 하니까, 무엇보다 현지 언어, 현지 문화에 대해 이해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요. 또 앞으로 일을 해야 하니까, 고급 비즈니스 영어도 별도로 교육시키고 있죠. 직무교육도 시키고요. 마지막으로 과거 대우정신인 도전, 희생, 창조정신은 별도로 특강 같은 형식을 빌려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육프로그램이 과거 우리 대우에서 신입사원을 상대로 했던 것과 비슷한 게 많습니다.
(장병주 회장은 “우리 내부에서는 글로벌YBM을 가리켜 ‘김우중 사관학교’라고 부른다”면서 “여기서 회장님의 역할은 교장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들 방청소 상태까지 챙기는 사감(舍監) 선생까지 다양하다”고 덧붙였다.)

- 김우중 전 회장(맨 왼쪽)이 ‘글로벌 청년사업가 발굴프로젝트’ 입상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나는 여전히 젊은이와의 대화가 즐겁다”
지난 1989년 김 전 회장이 쓴 책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이하 세계는 넓고…)는 공전(空前)의 히트를 친 스테디셀러다.
책을 펴낸 김영사가 하루아침에 대형 출판사로 올라섰을 정도로 <세계는 넓고 …>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런데 정작 이 책의 부제(副題)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부제는 바로 ‘내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다. 교육자였던 선친(우당 김용하 선생)의 영향을 받아서였는지 현역 시절부터 김 전 회장은 젊은이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세계는 넓고…>를 집필한 목적도 젊은이들을 상대로 한 계몽(啓蒙)에 있었다. 과거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 전 회장은 “기업인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교육자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난 1999년 DJ정부 시절 교육부장관을 지낸 김덕중 서강대 명예교수(경제학)가 김 전 회장의 바로 위 친형이다.
<세계는 넓고…>의 서문 첫 문장은 이렇게 쓰여 있다.
“젊은이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두 가지 즐거움을 준다. 그들로부터 푸른 기운과 순수한 사고를 느끼게 됨이 즐거움의 첫째요, 나의 남다른 경험이 그들에게 전해주는 나눔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그래서 유난히 나는 젊은이들과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송 : 지난해 말 연세대, 아주대를 비롯해 전국 주요 대학을 돌며 강연하신 바 있습니다. 글로벌YBM 학생들을 제외하고 젊은 대학생들과는 처음 만나신 것 같은데요. 어떤 느낌이셨는지 궁금합니다.
김 : 각 대학에서 저를 잊지 않고 불러주셔서 정말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어느덧 제가 창업 1세대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입장에 서게 됐는데요. 다행히도 저는 우리나라가 경제를 일으킬 때 동반자였고, 세계를 누비며 시장을 개척할 때는 다양한 협력을 체험했습니다. 이런 저의 경험을 후배 세대인 대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주고 싶어 강연에 참석한 겁니다. 실제로 제가 만나본 대학생들은 우려와 달리 밝고 건강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부족한 강의도 잘 경청해주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도 많이 하는 것 같았죠. 그래서 학생들에게 제가 그랬습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머리가 좋고 부지런하며 승부욕도 강해서 세상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절대로 뒤지지 않을 거라고요.
송 : 예전에 쓰셨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 보니까 곳곳에서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나태하고 유약하다”고 지적하셨던데, 글로벌YBM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해보시니까 어떻습니까.
김 :요즘 학생들을 보면 해외를 많이 다녀서 그런지, 국제적 감각은 뛰어납니다. 품성도 좋고요. 그런데 자신감이 결여돼 있다는 건 좀 아쉽습니다. 자신감을 갖고 도전하면 다 되거든요. 그래서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인지 대체로 여기 와 3개월가량 지나면 학생들이 눈빛부터 달라지는 걸 느낍니다. 자기들 스스로가 변하는 것을 느끼고 자신감이 생기니까 달라질 수밖에요.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느낀 점이 우리 세대의 역할이 젊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회도 주지도 않으면서 탓할 수는 없는 거죠.
송 : 제가 알기로는 초창기 글로벌YBM 학생을 뽑으실 때 지방대생 위주로 선발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가요.
김 : 처음부터 우리는 소위 스카이(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약칭)로 대표되는 서울 유명 대학보다는 지방대 학생들을 뽑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지방 국립대를 다니는 학생들 중에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거기서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이 꽤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찾은 거죠. 저는 우리 말고도 이런 (해외취업) 프로그램이 더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지금 아세안 지역에 신흥공업국이 많이 생기고 있거든요. 여기서 활약할 인재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지금 중소기업에서는 해외 인재를 키울 여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도 다 우리 기업들을 위해서입니다. 뭐 특별히 광고를 하는 것도 아닌데, 여기에 있는 한국 기업들이 서로 학생들을 달라고 하니 열심히 노력한 보람은 있네요.
송 : 김 회장님의 ‘세계경영’은 한때 많은 젊은이와 샐러리맨들의 희망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세계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면 어떤 점을 말씀하시겠습니까.
김 : 과거 우리가 ‘한강의 기적’이라고 칭송 받았던 성과는 수출과 건설을 통해 해외시장을 개척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세계경영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에요. 해외시장의 기득권을 만드는 국가전략이자 기업전략이죠. 지금도 제 불찰로 인해 대우가 해체되고 더 이상 세계경영을 펼치지 못한 점은 국민 여러분께 아쉽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비록 저는 이제 나이가 들어 은퇴했지만, 우리의 미래를 위해 대우가 신흥시장에서 펼쳤던 세계경영의 꿈과 전략이 계승되고 발전됐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1989년 김 전 회장이 쓴 책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이하 세계는 넓고…)는 공전(空前)의 히트를 친 스테디셀러다.
책을 펴낸 김영사가 하루아침에 대형 출판사로 올라섰을 정도로 <세계는 넓고 …>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런데 정작 이 책의 부제(副題)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부제는 바로 ‘내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다. 교육자였던 선친(우당 김용하 선생)의 영향을 받아서였는지 현역 시절부터 김 전 회장은 젊은이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세계는 넓고…>를 집필한 목적도 젊은이들을 상대로 한 계몽(啓蒙)에 있었다. 과거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 전 회장은 “기업인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교육자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난 1999년 DJ정부 시절 교육부장관을 지낸 김덕중 서강대 명예교수(경제학)가 김 전 회장의 바로 위 친형이다.
<세계는 넓고…>의 서문 첫 문장은 이렇게 쓰여 있다.
“젊은이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두 가지 즐거움을 준다. 그들로부터 푸른 기운과 순수한 사고를 느끼게 됨이 즐거움의 첫째요, 나의 남다른 경험이 그들에게 전해주는 나눔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그래서 유난히 나는 젊은이들과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송 : 지난해 말 연세대, 아주대를 비롯해 전국 주요 대학을 돌며 강연하신 바 있습니다. 글로벌YBM 학생들을 제외하고 젊은 대학생들과는 처음 만나신 것 같은데요. 어떤 느낌이셨는지 궁금합니다.
김 : 각 대학에서 저를 잊지 않고 불러주셔서 정말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어느덧 제가 창업 1세대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입장에 서게 됐는데요. 다행히도 저는 우리나라가 경제를 일으킬 때 동반자였고, 세계를 누비며 시장을 개척할 때는 다양한 협력을 체험했습니다. 이런 저의 경험을 후배 세대인 대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주고 싶어 강연에 참석한 겁니다. 실제로 제가 만나본 대학생들은 우려와 달리 밝고 건강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부족한 강의도 잘 경청해주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도 많이 하는 것 같았죠. 그래서 학생들에게 제가 그랬습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머리가 좋고 부지런하며 승부욕도 강해서 세상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절대로 뒤지지 않을 거라고요.
송 : 예전에 쓰셨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 보니까 곳곳에서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나태하고 유약하다”고 지적하셨던데, 글로벌YBM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해보시니까 어떻습니까.
김 :요즘 학생들을 보면 해외를 많이 다녀서 그런지, 국제적 감각은 뛰어납니다. 품성도 좋고요. 그런데 자신감이 결여돼 있다는 건 좀 아쉽습니다. 자신감을 갖고 도전하면 다 되거든요. 그래서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인지 대체로 여기 와 3개월가량 지나면 학생들이 눈빛부터 달라지는 걸 느낍니다. 자기들 스스로가 변하는 것을 느끼고 자신감이 생기니까 달라질 수밖에요.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느낀 점이 우리 세대의 역할이 젊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회도 주지도 않으면서 탓할 수는 없는 거죠.
송 : 제가 알기로는 초창기 글로벌YBM 학생을 뽑으실 때 지방대생 위주로 선발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가요.
김 : 처음부터 우리는 소위 스카이(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약칭)로 대표되는 서울 유명 대학보다는 지방대 학생들을 뽑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지방 국립대를 다니는 학생들 중에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거기서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이 꽤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찾은 거죠. 저는 우리 말고도 이런 (해외취업) 프로그램이 더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지금 아세안 지역에 신흥공업국이 많이 생기고 있거든요. 여기서 활약할 인재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지금 중소기업에서는 해외 인재를 키울 여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도 다 우리 기업들을 위해서입니다. 뭐 특별히 광고를 하는 것도 아닌데, 여기에 있는 한국 기업들이 서로 학생들을 달라고 하니 열심히 노력한 보람은 있네요.
송 : 김 회장님의 ‘세계경영’은 한때 많은 젊은이와 샐러리맨들의 희망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세계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면 어떤 점을 말씀하시겠습니까.
김 : 과거 우리가 ‘한강의 기적’이라고 칭송 받았던 성과는 수출과 건설을 통해 해외시장을 개척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세계경영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에요. 해외시장의 기득권을 만드는 국가전략이자 기업전략이죠. 지금도 제 불찰로 인해 대우가 해체되고 더 이상 세계경영을 펼치지 못한 점은 국민 여러분께 아쉽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비록 저는 이제 나이가 들어 은퇴했지만, 우리의 미래를 위해 대우가 신흥시장에서 펼쳤던 세계경영의 꿈과 전략이 계승되고 발전됐으면 좋겠습니다.

● 세계 유수의 기업과 맞선 대우정신
‘세계경영’은 김 전 회장과 대우그룹의 비전을 압축·설명하는 단어다. 대우의 세계경영은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보고 자본, 노동, 기술, 서비스 등을 현지 상황에 맞게 조합하는 전략을 말한다. 대우를 중심으로 전 세계 지역거점들이 수평적으로 연결되는 사업 다각화, 고도화 전략인 것이다.
지난 1993년 3월22일 창립기념일을 맞아 처음 공개된 ‘세계경영’은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막 경제성장의 엔진을 켠 한국의 기업이 국가와 국경을 뛰어넘어 세상과 맞서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미국, 유럽, 일본의 주요 기업들에게는 당돌한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 정도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대우의 세계경영 전략은 1980년대 후반 탈(脫)냉전 기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동유럽,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한때 대우그룹의 해체를 몰고 온 장본인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세계화 전략은 현대 기업 환경에서는 생존을 위한 필수요건이 되고 있다.
송 : 기업들의 세계경영은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입니다. 우리 기업들이 관심을 가져야할 지역과 올바른 진출방안은 무엇이라 보시는지요.
김 : 글로벌 협력을 발전시켜나가기 위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많겠지만, 저는 앞으로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 특히 동남아 국가들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남아 국가들은 자원도 많고 시장도 빠르게 커지고 있어서 우리가 앞으로 협력사업을 더욱 확대할 수 있는 여지가 많거든요. 우리 기업들 다수가 이 지역에 적극 진출해 활약하고 있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며 의미 있는 노력입니다. 제가 주로 머무는 베트남에서만 3700개가 넘는 우리 기업들이 진출해 활약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노력이 앞으로 더욱 폭넓게 전개될 것으로 봅니다. 특히 역량을 갖춘 우리 중소기업들이 보다 많이 해외로 진출했으면 합니다.
과거 우리 대우는 진출한 나라에 산업공단을 만들어 한국중소기업들과 동반진출을 제안하고 실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중소기업들은 혼자 해외로 나가기 힘드니 함께 기반을 만들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협력 구조가 만들어졌던 것이죠.
송 : 말씀하신 것처럼 과거 대우의 산업공단 전략은 지금 봐도 탁월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대우가 먼저 진출해 산업공단을 조성하고 중소·중견기업이 후발주자로 따라오는 전략인데요. 이것은 지금도 많은 기업들이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 : 당연합니다. 그나마 삼성 정도가 이렇게 하고 있는데, 이는 대기업, 중소기업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대우 사장 출신인 장병주 회장은 “회장님은 예전부터 ㈜대우가 취급하는 물품의 40%는 중소기업 제품으로 채우라고 지시하실 정도로 중소기업 경쟁력 향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송 : 예전 대우는 당시 한국 어떤 대기업보다도 신(新)시장 개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당시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데 있어 어떤 판단기준을 갖고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김: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어떤 부존(賦存)자원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봤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구가 제일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게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과거 기업을 경영할 때 그랬습니다. 가령 중동지역에 진출하는데, 거기 현대건설 등 우리나라 다른 건설업체가 들어와 있으면 서로 싸우지 말고 차라리 우리 기업들이 가지 않은 시장에 갈 것을 주문했어요. 새로운 시장은 찾으면 되니까요. 그렇게 해서 정한 곳이 아프리카에서는 리비아, 수단, 나이지리아였어요. 그럼 이들 나라를 왜 선택했느냐? 간단합니다. 일단 땅덩어리가 크고 자원이 많으며, 정치적으로도 안정이 됐으니까요.
- 김우중 전 회장(맨 오른쪽)이 하노이 문화대를 방문해 글로벌YBM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세계경영’은 김 전 회장과 대우그룹의 비전을 압축·설명하는 단어다. 대우의 세계경영은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보고 자본, 노동, 기술, 서비스 등을 현지 상황에 맞게 조합하는 전략을 말한다. 대우를 중심으로 전 세계 지역거점들이 수평적으로 연결되는 사업 다각화, 고도화 전략인 것이다.
지난 1993년 3월22일 창립기념일을 맞아 처음 공개된 ‘세계경영’은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막 경제성장의 엔진을 켠 한국의 기업이 국가와 국경을 뛰어넘어 세상과 맞서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미국, 유럽, 일본의 주요 기업들에게는 당돌한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 정도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대우의 세계경영 전략은 1980년대 후반 탈(脫)냉전 기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동유럽,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한때 대우그룹의 해체를 몰고 온 장본인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세계화 전략은 현대 기업 환경에서는 생존을 위한 필수요건이 되고 있다.
송 : 기업들의 세계경영은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입니다. 우리 기업들이 관심을 가져야할 지역과 올바른 진출방안은 무엇이라 보시는지요.
김 : 글로벌 협력을 발전시켜나가기 위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많겠지만, 저는 앞으로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 특히 동남아 국가들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남아 국가들은 자원도 많고 시장도 빠르게 커지고 있어서 우리가 앞으로 협력사업을 더욱 확대할 수 있는 여지가 많거든요. 우리 기업들 다수가 이 지역에 적극 진출해 활약하고 있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며 의미 있는 노력입니다. 제가 주로 머무는 베트남에서만 3700개가 넘는 우리 기업들이 진출해 활약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노력이 앞으로 더욱 폭넓게 전개될 것으로 봅니다. 특히 역량을 갖춘 우리 중소기업들이 보다 많이 해외로 진출했으면 합니다.
과거 우리 대우는 진출한 나라에 산업공단을 만들어 한국중소기업들과 동반진출을 제안하고 실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중소기업들은 혼자 해외로 나가기 힘드니 함께 기반을 만들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협력 구조가 만들어졌던 것이죠.
송 : 말씀하신 것처럼 과거 대우의 산업공단 전략은 지금 봐도 탁월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대우가 먼저 진출해 산업공단을 조성하고 중소·중견기업이 후발주자로 따라오는 전략인데요. 이것은 지금도 많은 기업들이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 : 당연합니다. 그나마 삼성 정도가 이렇게 하고 있는데, 이는 대기업, 중소기업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대우 사장 출신인 장병주 회장은 “회장님은 예전부터 ㈜대우가 취급하는 물품의 40%는 중소기업 제품으로 채우라고 지시하실 정도로 중소기업 경쟁력 향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송 : 예전 대우는 당시 한국 어떤 대기업보다도 신(新)시장 개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당시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데 있어 어떤 판단기준을 갖고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김: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어떤 부존(賦存)자원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봤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구가 제일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게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과거 기업을 경영할 때 그랬습니다. 가령 중동지역에 진출하는데, 거기 현대건설 등 우리나라 다른 건설업체가 들어와 있으면 서로 싸우지 말고 차라리 우리 기업들이 가지 않은 시장에 갈 것을 주문했어요. 새로운 시장은 찾으면 되니까요. 그렇게 해서 정한 곳이 아프리카에서는 리비아, 수단, 나이지리아였어요. 그럼 이들 나라를 왜 선택했느냐? 간단합니다. 일단 땅덩어리가 크고 자원이 많으며, 정치적으로도 안정이 됐으니까요.

- 김우중 전 회장(맨 오른쪽)이 하노이 문화대를 방문해 글로벌YBM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아세안과의 협력 반드시 필요해
김 전 회장은 <세계는 넓고…>에서 “세상을 살아오면서 어려운 일도 없지 않았으나 그 때마다 나는 낙관적인 생각을 버려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 학생들에게 “위기(危機)라는 글자를 잘 들여다보라. ‘위’는 위태로움, 영어로 치면 리스크(Risk)지만 ‘기’는 기회, 찬스(Chance)”라면서 “위기라는 단어가 가진 이중성에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변수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대우가 단시간 내 고도성장을 기록한 이유도 위험과 기회를 적절히 안배할 수 있어서였다. 해외시장 개척도 그 일환이다. 김 전 회장은 <이코노미조선>과 가진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한국 경제가 지금의 저성장 구조를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해외시장 개척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구체적으로 제시한 지역은 바로 아세안(ASEAN)이다. 신흥시장(Emerging Market)으로 성장하고 있는 아세안은 지리적, 정서적으로 우리가 1차 공략 대상으로 삼기에 유리하다는 게 김 전 회장의 생각이다. 김 전 회장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여 있는 샌드위치 구조를 깨기 위해서는 아세안과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 : 돌이켜보면 베트남과 남다른 인연이 있으셨던 거 같습니다. 글로벌YBM 프로그램도 베트남에서 처음 시작하셨고요. 베트남 경제에 대한 회장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김 : 제가 베트남이 대외개방하고 처음 찾은 외국기업인입니다. 제2의 고향인 셈이죠. 그래서 그런지 우리 대우가 초창기부터 베트남에서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호텔도 세우고, 고속도로도 깔고 그랬죠. 저는 베트남의 경우 앞으로 15〜20년 안에 아세안국가 중 싱가포르, 홍콩을 빼고 최고 위치에 오를 거라고 봅니다. 아마도 중국 다음 가는 나라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과는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맺어나가야 합니다. 그들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젊은이들의 일자리 기회도 확보해야죠. 미얀마도 괜찮은데, 군부 통치가 끝난 후 현재는 민정 체제이지만 실제로 군부가 영향력을 갖고있어 아직은 사업하기에 불안합니다. 제 생각에는 다음 정권에서도 군부의 영향력이 계속되리라 봅니다.아웅산 수치 여사는 아마 그 다음 번 정도나 집권이 가능할 걸로 보여요. 다만, 인도네시아는 이번에 서민 출신 대통령(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취임했으니 한결 좋아질 겁니다. 인도네시아는 인구가 2억5000만명인데다 자원이 많습니다.
송 : 이들 국가에서 바라보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어떻습니까. 가령 일본만 해도 동남아 지역에 예전부터 많은 공을 들여왔잖습니까. 중국은 화교자본 때문에 이 지역에 거점도 많이 있을 거 같은데요.
김 : 한국사람들이 워낙 성실해서 그런지 다들 좋아합니다. 중국은 화교(華僑)들이 각종 부패에 연류돼 있어서 그런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일본도 과거 동남아 국가들과의 역사적 악연 때문에 인식은 좋지 못한 거 같습니다. 교육 받은 사람들이 늘어나 그런지 다들 자기네 역사를 잘 알거든요. 여기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기업만 해도 약 3700여개가 된다고 합니다.
일본의 경우 막대한 ODA(공적개발원조) 차관을 아세안 시장에 퍼붓고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과실(果實)은 모두 일본 기업들이 가져가고 있습니다. 올해 하노이에 신공항이 들어섰는데 하다못해 에스컬레이터에도 일본 제품이 들어가 있거든요. 우리 정부도 민간기업과 함께 이런 전략을 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송 : 말씀대로라면 이대로 가만히 손 놓고 볼 수만은 없겠네요.
김 : 그런데 ODA자금을 주려고 해도 우리는 금융산업이 발달돼 있지 않아 힘듭니다. 결국 정부자금을 주든가, 아니면 다른 나라 자금을 꿔다와 줘야 하는데, 이것도 금융이 발달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지금 우리가 아세안 지역 공략이 뒤처진 이유는 정부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금융기법이 낙후돼 있어서예요. 만약 이게 힘들다면 중국, 일본과 손잡고 동아시아 3국이 아세안을 돕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대체하는 시장은 현재로선 아세안 지역밖에 없습니다.
송 : 최근 글로벌YBM 교육지역을 베트남에서 미얀마, 그리고 인도네시아로 확대하시는 걸 보면 아세안 시장에 대해 남다르게 보는 거 같습니다.
김 : 저는 예전부터 해외를 많이 돌아다녀봐서 그런지, 글로벌 경제의 흐름을 좀 빨리 파악하는 편이었어요. 그런 뜻에서 볼 때 아세안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회의 땅이에요. 중국은 물론 앞으로 인도도 아세안 시장으로 들어올 텐데, 그렇게 되면 엄청난 시장이 되는 거죠. 인구, 자원 등을 놓고 볼 때 전 세계에서 이만한 가능성을 가진 나라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구도 많지 않고, 땅덩어리도 넓지 않으니, 아세안과 손을 잡고 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아세안은 중국과 일본보다 훨씬 큰 시장이에요. 우리가 이 시장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길게 보고 멀리 봐야 합니다. 그런데 금융이 뒤따라주지 못하는 게 아쉬워요. 진짜 우리나라는 금융이 문제예요. 금융이 말이죠. 97년 말 외환위기도 따지고 보면 금융 때문에 왔잖습니까.
송 : (베트남에 이어) 미얀마를 제2의 인재양성 지역으로 정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김 : 미얀마의 경우 기회를 찾기 쉽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제재가 풀리면서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가고 있고 빠른 속도로 경제발전을 추진하고 있어요. 가능성은 매우 큰 데 반해, 한국기업들의 진출은 아쉽게도 아직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저는 곧 미얀마도 성장에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생각하며, 한국기업에게도 많은 기회가 주어지리라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시작한 미얀마 교육은 현지에 진출해 있거나, 앞으로 진출할 기업에게 큰 힘이 될 겁니다.
송 : 미얀마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나요.
김 : 그냥 1990년대 초부터 눈 여겨 봤습니다. 당시 처음 미얀마를 방문했는데, 아무것도 없었죠. 그래서 1992년 봉제공장하고 제재, 합판공장으로 처음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군인들이 군복 입고 장관할 때니까, 외국인들이 누가 투자에 나섰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대우가 투자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그 때 인연이 돼 오늘날 가스전 개발에 성공한 겁니다. 단지 우리 대우가 무너지면서 LNG 생산공장 건설이 무산되어 LNG가 한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대신 파이프라인으로 연결돼 중국으로 100% 판매되고 있는 것은 아쉽습니다.
- 글로벌YBM 4기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우중 전 회장.
김 전 회장은 <세계는 넓고…>에서 “세상을 살아오면서 어려운 일도 없지 않았으나 그 때마다 나는 낙관적인 생각을 버려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 학생들에게 “위기(危機)라는 글자를 잘 들여다보라. ‘위’는 위태로움, 영어로 치면 리스크(Risk)지만 ‘기’는 기회, 찬스(Chance)”라면서 “위기라는 단어가 가진 이중성에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변수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대우가 단시간 내 고도성장을 기록한 이유도 위험과 기회를 적절히 안배할 수 있어서였다. 해외시장 개척도 그 일환이다. 김 전 회장은 <이코노미조선>과 가진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한국 경제가 지금의 저성장 구조를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해외시장 개척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구체적으로 제시한 지역은 바로 아세안(ASEAN)이다. 신흥시장(Emerging Market)으로 성장하고 있는 아세안은 지리적, 정서적으로 우리가 1차 공략 대상으로 삼기에 유리하다는 게 김 전 회장의 생각이다. 김 전 회장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여 있는 샌드위치 구조를 깨기 위해서는 아세안과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 : 돌이켜보면 베트남과 남다른 인연이 있으셨던 거 같습니다. 글로벌YBM 프로그램도 베트남에서 처음 시작하셨고요. 베트남 경제에 대한 회장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김 : 제가 베트남이 대외개방하고 처음 찾은 외국기업인입니다. 제2의 고향인 셈이죠. 그래서 그런지 우리 대우가 초창기부터 베트남에서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호텔도 세우고, 고속도로도 깔고 그랬죠. 저는 베트남의 경우 앞으로 15〜20년 안에 아세안국가 중 싱가포르, 홍콩을 빼고 최고 위치에 오를 거라고 봅니다. 아마도 중국 다음 가는 나라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과는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맺어나가야 합니다. 그들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젊은이들의 일자리 기회도 확보해야죠. 미얀마도 괜찮은데, 군부 통치가 끝난 후 현재는 민정 체제이지만 실제로 군부가 영향력을 갖고있어 아직은 사업하기에 불안합니다. 제 생각에는 다음 정권에서도 군부의 영향력이 계속되리라 봅니다.아웅산 수치 여사는 아마 그 다음 번 정도나 집권이 가능할 걸로 보여요. 다만, 인도네시아는 이번에 서민 출신 대통령(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취임했으니 한결 좋아질 겁니다. 인도네시아는 인구가 2억5000만명인데다 자원이 많습니다.
송 : 이들 국가에서 바라보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어떻습니까. 가령 일본만 해도 동남아 지역에 예전부터 많은 공을 들여왔잖습니까. 중국은 화교자본 때문에 이 지역에 거점도 많이 있을 거 같은데요.
김 : 한국사람들이 워낙 성실해서 그런지 다들 좋아합니다. 중국은 화교(華僑)들이 각종 부패에 연류돼 있어서 그런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일본도 과거 동남아 국가들과의 역사적 악연 때문에 인식은 좋지 못한 거 같습니다. 교육 받은 사람들이 늘어나 그런지 다들 자기네 역사를 잘 알거든요. 여기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기업만 해도 약 3700여개가 된다고 합니다.
일본의 경우 막대한 ODA(공적개발원조) 차관을 아세안 시장에 퍼붓고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과실(果實)은 모두 일본 기업들이 가져가고 있습니다. 올해 하노이에 신공항이 들어섰는데 하다못해 에스컬레이터에도 일본 제품이 들어가 있거든요. 우리 정부도 민간기업과 함께 이런 전략을 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송 : 말씀대로라면 이대로 가만히 손 놓고 볼 수만은 없겠네요.
김 : 그런데 ODA자금을 주려고 해도 우리는 금융산업이 발달돼 있지 않아 힘듭니다. 결국 정부자금을 주든가, 아니면 다른 나라 자금을 꿔다와 줘야 하는데, 이것도 금융이 발달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지금 우리가 아세안 지역 공략이 뒤처진 이유는 정부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금융기법이 낙후돼 있어서예요. 만약 이게 힘들다면 중국, 일본과 손잡고 동아시아 3국이 아세안을 돕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대체하는 시장은 현재로선 아세안 지역밖에 없습니다.
송 : 최근 글로벌YBM 교육지역을 베트남에서 미얀마, 그리고 인도네시아로 확대하시는 걸 보면 아세안 시장에 대해 남다르게 보는 거 같습니다.
김 : 저는 예전부터 해외를 많이 돌아다녀봐서 그런지, 글로벌 경제의 흐름을 좀 빨리 파악하는 편이었어요. 그런 뜻에서 볼 때 아세안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회의 땅이에요. 중국은 물론 앞으로 인도도 아세안 시장으로 들어올 텐데, 그렇게 되면 엄청난 시장이 되는 거죠. 인구, 자원 등을 놓고 볼 때 전 세계에서 이만한 가능성을 가진 나라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구도 많지 않고, 땅덩어리도 넓지 않으니, 아세안과 손을 잡고 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아세안은 중국과 일본보다 훨씬 큰 시장이에요. 우리가 이 시장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길게 보고 멀리 봐야 합니다. 그런데 금융이 뒤따라주지 못하는 게 아쉬워요. 진짜 우리나라는 금융이 문제예요. 금융이 말이죠. 97년 말 외환위기도 따지고 보면 금융 때문에 왔잖습니까.
송 : (베트남에 이어) 미얀마를 제2의 인재양성 지역으로 정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김 : 미얀마의 경우 기회를 찾기 쉽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제재가 풀리면서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가고 있고 빠른 속도로 경제발전을 추진하고 있어요. 가능성은 매우 큰 데 반해, 한국기업들의 진출은 아쉽게도 아직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저는 곧 미얀마도 성장에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생각하며, 한국기업에게도 많은 기회가 주어지리라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시작한 미얀마 교육은 현지에 진출해 있거나, 앞으로 진출할 기업에게 큰 힘이 될 겁니다.
송 : 미얀마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나요.
김 : 그냥 1990년대 초부터 눈 여겨 봤습니다. 당시 처음 미얀마를 방문했는데, 아무것도 없었죠. 그래서 1992년 봉제공장하고 제재, 합판공장으로 처음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군인들이 군복 입고 장관할 때니까, 외국인들이 누가 투자에 나섰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대우가 투자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그 때 인연이 돼 오늘날 가스전 개발에 성공한 겁니다. 단지 우리 대우가 무너지면서 LNG 생산공장 건설이 무산되어 LNG가 한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대신 파이프라인으로 연결돼 중국으로 100% 판매되고 있는 것은 아쉽습니다.

- 글로벌YBM 4기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우중 전 회장.
● 한국 금융산업 낙후… “제조업만이 살 길”
김 전 회장은 전형적인 제조업 육성론자다. 반대로 역대 정부의 금융산업 육성정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IMF 위환위기의 유탄(流彈)을 맞아 그룹이 해체되는 데 국내 금융당국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도 이같은 생각을 갖게 된 배경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김 전 회장은 “IMF 프로그램이 몰고 온 ‘기업가정신 후퇴’, ‘중산층 붕괴’ 등은 두고두고 한국경제의 불안요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이 대안(代案)으로 여기는 것은 제조업의 부활이다. 고부가가치 산업을 키우는 것과 동시에 수출 위주의 경제 정책을 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국내 금융산업도 소비보다는 수출을 지원해주는 조력자 역할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다.
송 :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보겠습니다. 지금 한국경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김 : 우리나라는 무엇보다 부존자원이 없기 때문에 제조시설을 자원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외환위기 당시에 제가 전경련을 통해서 조사한 바로는 그 때까지 우리가 보유한 산업시설이 1조 달러에 달했거든요. 그런 면에서 저는 외환위기 이후 잘못된 구조조정으로 제조업 투자가 위축되고, 우리 경제가 저성장의 악순환에 빠진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미 충분히 해외시장을 개척했고, 시간이 갈수록 글로벌 협력의 기회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제조업을 키운다면 반드시 국민소득 4만달러는 올 겁니다. 물론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와 기업, 그리고 국민이 컨센서스(합의)를 이뤄나가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기업들도 적극적인 투자를 시행하고, 정부 또한 금융정책과 함께 산업정책도 균형 있게 시행해나가면 우리 기업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송 : 대한민국 경제에 있어 제조업의 위기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주요 대기업들이 생산시설을 대거 해외로 이전하면서 제조업 공동화(空洞化)를 걱정하는 의견이 많은데요. 현재로서 한국경제의 제조업 부활이 가능할까요.
김 : 물론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투자를 해야죠. 작년 4분기 성장률이 0.4%였는데요. 이건 성장이 완전히 멈춘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느냐? 지난 1998년 IMF외환위기 이후 제조업에 대한 투자가 완전히 멈춰버렸기 때문이에요. 부채비율 200%를 맞추려다보니 있는 시설마저 다 내다파는 상황에서 투자는 꿈도 못 꾸는 일이었죠. 그 영향이 지금까지 오는 겁니다. 요사이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아지지 않았습니까. 결국 지금의 저성장 문제, 양극화 문제, 실업률 문제는 제조업 위기가 몰고 온 겁니다. 과거 DJ(김대중) 정부 때 벤처산업 키운다고 돈을 퍼부었지만, 결국 돈만 먹고 다 망해버리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글로벌 경제위기를 불러일으킨 미국 월스트리트의 파생상품도 결국 제조업이 없이 금융끼리 주고받으면서 상품을 만들어 생기지 않았나요.
송 : 현재 정부는 제조업 육성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지만, 기업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진 않습니까. 이러한 미스매치(불일치)가 해소될 수 있을까요?
김 : 곧 대기업들도 (제조업이 왜 중요한지) 알 겁니다. 독일만 해도 제조업에 기반을 삼고 있기 때문에 경제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너무 짧게 바라봐서 (경제가) 어렵다고 하는데 길게 보면 한국 경제나 제조업에는 여전히 도약의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머리가 좋아서 충분히 다시 도약할 수 있을 겁니다. 언제가 시발점이 될지를 알 수 없는 것뿐이지 분명 재도약할 겁니다. 그러니까 언론도 너무 짧게 보고 부정적인 말씀만 하지 마세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송 :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기업과 기업, 기업과 개인 간 대립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상생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데요. 최근 한국 사회의 이러한 갈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김 : 글쎄요.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봅니다. 아마 10년에서 20년 정도 지나면 중소기업 중에서 엄청난 중견기업들이 많이 나올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대기업도 살 수 없게 되거든요. 대기업이 전부 다 자기가 다 잘할 수 없지 않습니까. 밑에서 받쳐줘야죠. 받쳐준다는 게 자기들만 산다는 게 아닙니다. (중소기업들의) 판로를 만들어줘야죠. 지금처럼 삼성, LG 물건만 판다는 건 안 돼요. 한눈에 짧게 봐서 그런 거지, 시간이 지나면 분명 대기업들이 알 겁니다. 정부는 이 과정에서 상생(相生)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지 말고, 상생하지 않고는 안 될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게 중요한 겁니다. 어찌 보면 지금이 고비예요. 대기업들도 많이 생각을 해야 할 겁니다. 뭐가 자기들을 위해서 좋은 건지 말이죠.
송 : 작년에 발간된 <김우중과의 대화>에서도 우리나라 금융산업에 대해 많은 비판을 하셨는데요. 우리 금융산업의 문제가 뭐라고 보시나요.
김 :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는 제조업이 앞장서고, 금융은 제조업의 성공을 옆에서 도와야 한다고 주장해 왔어요. 섬유만 해도 처음에는 봉제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고부가가치 원단으로 발전하잖습니까. 제조업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가기 위해서는 금융산업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경제에서 금융산업이 가장 후진화돼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송 : 중국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크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대(對)중국시장 전략에 대한 회장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김 : 저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기 한참 전인 1980년대 중반부터 중국과 교류를 시작했어요. 양국 기업 중에서 가장 많은 교류와 협력사업을 펼쳤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중 양국은 서로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입니다.
한국은 필연적으로 경제활동에 필요한 크고 안정된 시장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내수시장이 크면 문제가 없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해외에서 시장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웃나라인 중국과의 협력은 매우 중요하며, 중국과의 관계는 앞으로 상당기간 경쟁관계보다는 상호보완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많은 제품들이 중국이 가공해서 수출하기 위한 중간재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여전히 세계의 생산공장이에요. 중국의 수출이 둔화되면 중간재 수입도 둔화될 수밖에 없고 한국의 대(對)중국 수출도 둔화될 겁니다. 더군다나 중국은 남북경제협력을 위해서도 중요한 파트너예요.
- 김우중 전 회장은 “제조업 부활과 기업가 정신 고양에 한국경제 재도약의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전형적인 제조업 육성론자다. 반대로 역대 정부의 금융산업 육성정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IMF 위환위기의 유탄(流彈)을 맞아 그룹이 해체되는 데 국내 금융당국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도 이같은 생각을 갖게 된 배경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김 전 회장은 “IMF 프로그램이 몰고 온 ‘기업가정신 후퇴’, ‘중산층 붕괴’ 등은 두고두고 한국경제의 불안요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이 대안(代案)으로 여기는 것은 제조업의 부활이다. 고부가가치 산업을 키우는 것과 동시에 수출 위주의 경제 정책을 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국내 금융산업도 소비보다는 수출을 지원해주는 조력자 역할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다.
송 :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보겠습니다. 지금 한국경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김 : 우리나라는 무엇보다 부존자원이 없기 때문에 제조시설을 자원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외환위기 당시에 제가 전경련을 통해서 조사한 바로는 그 때까지 우리가 보유한 산업시설이 1조 달러에 달했거든요. 그런 면에서 저는 외환위기 이후 잘못된 구조조정으로 제조업 투자가 위축되고, 우리 경제가 저성장의 악순환에 빠진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미 충분히 해외시장을 개척했고, 시간이 갈수록 글로벌 협력의 기회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제조업을 키운다면 반드시 국민소득 4만달러는 올 겁니다. 물론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와 기업, 그리고 국민이 컨센서스(합의)를 이뤄나가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기업들도 적극적인 투자를 시행하고, 정부 또한 금융정책과 함께 산업정책도 균형 있게 시행해나가면 우리 기업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송 : 대한민국 경제에 있어 제조업의 위기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주요 대기업들이 생산시설을 대거 해외로 이전하면서 제조업 공동화(空洞化)를 걱정하는 의견이 많은데요. 현재로서 한국경제의 제조업 부활이 가능할까요.
김 : 물론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투자를 해야죠. 작년 4분기 성장률이 0.4%였는데요. 이건 성장이 완전히 멈춘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느냐? 지난 1998년 IMF외환위기 이후 제조업에 대한 투자가 완전히 멈춰버렸기 때문이에요. 부채비율 200%를 맞추려다보니 있는 시설마저 다 내다파는 상황에서 투자는 꿈도 못 꾸는 일이었죠. 그 영향이 지금까지 오는 겁니다. 요사이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아지지 않았습니까. 결국 지금의 저성장 문제, 양극화 문제, 실업률 문제는 제조업 위기가 몰고 온 겁니다. 과거 DJ(김대중) 정부 때 벤처산업 키운다고 돈을 퍼부었지만, 결국 돈만 먹고 다 망해버리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글로벌 경제위기를 불러일으킨 미국 월스트리트의 파생상품도 결국 제조업이 없이 금융끼리 주고받으면서 상품을 만들어 생기지 않았나요.
송 : 현재 정부는 제조업 육성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지만, 기업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진 않습니까. 이러한 미스매치(불일치)가 해소될 수 있을까요?
김 : 곧 대기업들도 (제조업이 왜 중요한지) 알 겁니다. 독일만 해도 제조업에 기반을 삼고 있기 때문에 경제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너무 짧게 바라봐서 (경제가) 어렵다고 하는데 길게 보면 한국 경제나 제조업에는 여전히 도약의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머리가 좋아서 충분히 다시 도약할 수 있을 겁니다. 언제가 시발점이 될지를 알 수 없는 것뿐이지 분명 재도약할 겁니다. 그러니까 언론도 너무 짧게 보고 부정적인 말씀만 하지 마세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송 :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기업과 기업, 기업과 개인 간 대립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상생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데요. 최근 한국 사회의 이러한 갈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김 : 글쎄요.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봅니다. 아마 10년에서 20년 정도 지나면 중소기업 중에서 엄청난 중견기업들이 많이 나올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대기업도 살 수 없게 되거든요. 대기업이 전부 다 자기가 다 잘할 수 없지 않습니까. 밑에서 받쳐줘야죠. 받쳐준다는 게 자기들만 산다는 게 아닙니다. (중소기업들의) 판로를 만들어줘야죠. 지금처럼 삼성, LG 물건만 판다는 건 안 돼요. 한눈에 짧게 봐서 그런 거지, 시간이 지나면 분명 대기업들이 알 겁니다. 정부는 이 과정에서 상생(相生)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지 말고, 상생하지 않고는 안 될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게 중요한 겁니다. 어찌 보면 지금이 고비예요. 대기업들도 많이 생각을 해야 할 겁니다. 뭐가 자기들을 위해서 좋은 건지 말이죠.
송 : 작년에 발간된 <김우중과의 대화>에서도 우리나라 금융산업에 대해 많은 비판을 하셨는데요. 우리 금융산업의 문제가 뭐라고 보시나요.
김 :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는 제조업이 앞장서고, 금융은 제조업의 성공을 옆에서 도와야 한다고 주장해 왔어요. 섬유만 해도 처음에는 봉제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고부가가치 원단으로 발전하잖습니까. 제조업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가기 위해서는 금융산업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경제에서 금융산업이 가장 후진화돼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송 : 중국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크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대(對)중국시장 전략에 대한 회장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김 : 저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기 한참 전인 1980년대 중반부터 중국과 교류를 시작했어요. 양국 기업 중에서 가장 많은 교류와 협력사업을 펼쳤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중 양국은 서로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입니다.
한국은 필연적으로 경제활동에 필요한 크고 안정된 시장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내수시장이 크면 문제가 없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해외에서 시장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웃나라인 중국과의 협력은 매우 중요하며, 중국과의 관계는 앞으로 상당기간 경쟁관계보다는 상호보완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많은 제품들이 중국이 가공해서 수출하기 위한 중간재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여전히 세계의 생산공장이에요. 중국의 수출이 둔화되면 중간재 수입도 둔화될 수밖에 없고 한국의 대(對)중국 수출도 둔화될 겁니다. 더군다나 중국은 남북경제협력을 위해서도 중요한 파트너예요.

- 김우중 전 회장은 “제조업 부활과 기업가 정신 고양에 한국경제 재도약의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 과거 남포산업공단 조성하는 등 대북 사업에도 적극
김 전 회장은 정치·경제적으로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제했다.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닫았다. 남북 경제협력과 관련해서도 자칫 정치적 이슈에 휘말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논평을 꺼려했다. 하지만 남북 경제협력에 있어 김 전 회장은 전도사(傳道師)나 다름없다. 지난 1996년 평안남도 남포에 공단을 조성한 것도 대우가 처음이었다. 중국 동북3성을 남과 북, 중국의 인프라를 한데 모으는 경제협력지구로 만들자고 한 구상은 그의 오랜 생각이다. “작년 초 한국 사회에 회자(膾炙)됐던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주장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는 논평하지 않았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본 바로는 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은 여전하다.
송 : 남북경제협력은 회장님의 오랜 지론입니다. 우리 경제계가 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김 : 통일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큰 시장을 갖게 됩니다. 북한뿐만 아니라 가까운 중국의 동북3성까지 시장을 확대할 수도 있어요. 이 지역을 합치면 3억명 이상의 인구가 됩니다.
통일은 민족이 하나 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그토록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겁니다. 저는 국내 경공업분야의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북한 개방을 유도하는 차원에서 중국 동북3성 지역 내 남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산업단지를 만들어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송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서 기업가정신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걱정합니다.
김 : 제가 대우를 세우고 회사를 키웠던 시절은 우리나라 경제가 활발히 성장곡선을 그리던 시기였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새로 생겨나고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이런 정신이 위축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창업 1세대에 이어 창업 2세대, 3세대가 생겨났어야 하는데, 아직 그런 용어는 잘 들리지 않거든요. 21세기 들어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기업가정신 교육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기업가정신을 가르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중요한 미래전략이 되기 때문이죠.
송 : 베이비붐 세대들의 은퇴가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도 중요하지만 현역에서 은퇴하는 이들에게 앞으로 어떤 비전을 갖고 여생을 보내야 한다고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김 : 저를 포함한 우리 세대는 여러 면에서 첫번째 세대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해방 후 처음으로 한글로 교육받은 세대였고, 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비즈니스를 시작한 첫 세대이기도 했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경제개발에 나섰을 때 해외시장을 개척한 첫 세대가 바로 우리 세대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현업에서 물러나게 됐는데, 이들이 10년 이상 일을 하지 않으면 지니고 있는 경험과 경쟁력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다행히도 이런 경험이 필요한 나라들이 지금 급성장하고 있어요. 여기 가서 기회를 찾아야죠. 젊은 사람도 나가고 고령 세대도 나가야 합니다. 해외에서 기회를 만들면 국가 경제에도 도움이 되고 정부의 복지부담도 덜 수 있어 사회도 안정되죠. 그리고 길게 보면 우리의 해외 네트워크가 강해지는 성과도 생겨날 겁니다. 중국이 개방에 나선 이래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해외 화교(華僑)들이 있어서죠. 장기적으로는 경제활동인구의 20%까지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세계는 충분히 넓고 할 일이 많습니다.
송 :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김 : 작년에 대담집(對談集)을 내고 너무 과거에 연연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도 있고 해서 출간 이후 주로 젊은이들과 만나면서 제 생각을 들려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달에 걸쳐 대학생들을 만났는데 대략 15번 정도 특강을 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정말 많은 젊은이들이 해외로 나가서 꿈을 펼쳤으면 합니다. 이런 일을 도와주면서 제 마지막 여생의 보람으로 삼을 생각입니다. 제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이 아이들이 나중에 훌륭한 기업인으로 잘 크는 겁니다. 그러려면 저도 오래 살아야죠.(웃음) 그래야 이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 전 회장은 정치·경제적으로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제했다.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닫았다. 남북 경제협력과 관련해서도 자칫 정치적 이슈에 휘말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논평을 꺼려했다. 하지만 남북 경제협력에 있어 김 전 회장은 전도사(傳道師)나 다름없다. 지난 1996년 평안남도 남포에 공단을 조성한 것도 대우가 처음이었다. 중국 동북3성을 남과 북, 중국의 인프라를 한데 모으는 경제협력지구로 만들자고 한 구상은 그의 오랜 생각이다. “작년 초 한국 사회에 회자(膾炙)됐던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주장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는 논평하지 않았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본 바로는 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은 여전하다.
송 : 남북경제협력은 회장님의 오랜 지론입니다. 우리 경제계가 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김 : 통일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큰 시장을 갖게 됩니다. 북한뿐만 아니라 가까운 중국의 동북3성까지 시장을 확대할 수도 있어요. 이 지역을 합치면 3억명 이상의 인구가 됩니다.
통일은 민족이 하나 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그토록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겁니다. 저는 국내 경공업분야의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북한 개방을 유도하는 차원에서 중국 동북3성 지역 내 남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산업단지를 만들어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송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서 기업가정신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걱정합니다.
김 : 제가 대우를 세우고 회사를 키웠던 시절은 우리나라 경제가 활발히 성장곡선을 그리던 시기였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새로 생겨나고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이런 정신이 위축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창업 1세대에 이어 창업 2세대, 3세대가 생겨났어야 하는데, 아직 그런 용어는 잘 들리지 않거든요. 21세기 들어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기업가정신 교육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기업가정신을 가르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중요한 미래전략이 되기 때문이죠.
송 : 베이비붐 세대들의 은퇴가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도 중요하지만 현역에서 은퇴하는 이들에게 앞으로 어떤 비전을 갖고 여생을 보내야 한다고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김 : 저를 포함한 우리 세대는 여러 면에서 첫번째 세대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해방 후 처음으로 한글로 교육받은 세대였고, 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비즈니스를 시작한 첫 세대이기도 했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경제개발에 나섰을 때 해외시장을 개척한 첫 세대가 바로 우리 세대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현업에서 물러나게 됐는데, 이들이 10년 이상 일을 하지 않으면 지니고 있는 경험과 경쟁력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다행히도 이런 경험이 필요한 나라들이 지금 급성장하고 있어요. 여기 가서 기회를 찾아야죠. 젊은 사람도 나가고 고령 세대도 나가야 합니다. 해외에서 기회를 만들면 국가 경제에도 도움이 되고 정부의 복지부담도 덜 수 있어 사회도 안정되죠. 그리고 길게 보면 우리의 해외 네트워크가 강해지는 성과도 생겨날 겁니다. 중국이 개방에 나선 이래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해외 화교(華僑)들이 있어서죠. 장기적으로는 경제활동인구의 20%까지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세계는 충분히 넓고 할 일이 많습니다.
송 :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김 : 작년에 대담집(對談集)을 내고 너무 과거에 연연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도 있고 해서 출간 이후 주로 젊은이들과 만나면서 제 생각을 들려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달에 걸쳐 대학생들을 만났는데 대략 15번 정도 특강을 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정말 많은 젊은이들이 해외로 나가서 꿈을 펼쳤으면 합니다. 이런 일을 도와주면서 제 마지막 여생의 보람으로 삼을 생각입니다. 제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이 아이들이 나중에 훌륭한 기업인으로 잘 크는 겁니다. 그러려면 저도 오래 살아야죠.(웃음) 그래야 이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우중 전 회장과 함께한 대학생 방문단]
우수 창업기획자 5명과 동남아 둘러봐
- 글로벌 청년사업가 발굴프로젝트 행사
<이코노미조선> 취재팀이 인터뷰를 위해 하노이 현지를 찾은 지난 1월25일, 김우중 전 회장은 대학생 5명과 함께 미얀마를 막 다녀온 직후였다. 이 행사는 한 교육전문 매체가 지난해 12월 실시한 ‘글로벌 청년사업가 발굴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참신한 창업 아이디어를 낸 대학생 5명에게는 김 전 회장과 7박8일간 미얀마와 베트남을 함께 둘러보는 것이 부상(副賞)으로 주어졌다.
양정우(한국체대 사회체육학과 3학년)씨는 “‘장사의 기본은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라는 김 전 회장의 말에 더 큰 범주의 비즈니스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김현우(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대학원 박사과정)씨는 “기업의 세계화는 불가피하기 때문에 5~10년을 내다보고 신흥시장으로 가 더 큰 기회를 찾으라는 김우중 회장님 말씀에 해외취업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연상(연세대 사회학과 4학년)씨는 “‘경제사정이 열악한 곳일수록 두려워 말라’, ‘경공업을 경험해봐야 훗날 기업을 중화학공업기업으로 키울 수 있다’는 김 전 회장의 말이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미얀마, 베트남 현지방문을 통해 이들은 한국기업들의 다양한 현지화 전략을 살펴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우수 창업기획자 5명과 동남아 둘러봐

- 글로벌 청년사업가 발굴프로젝트 행사
<이코노미조선> 취재팀이 인터뷰를 위해 하노이 현지를 찾은 지난 1월25일, 김우중 전 회장은 대학생 5명과 함께 미얀마를 막 다녀온 직후였다. 이 행사는 한 교육전문 매체가 지난해 12월 실시한 ‘글로벌 청년사업가 발굴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참신한 창업 아이디어를 낸 대학생 5명에게는 김 전 회장과 7박8일간 미얀마와 베트남을 함께 둘러보는 것이 부상(副賞)으로 주어졌다.
양정우(한국체대 사회체육학과 3학년)씨는 “‘장사의 기본은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라는 김 전 회장의 말에 더 큰 범주의 비즈니스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김현우(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대학원 박사과정)씨는 “기업의 세계화는 불가피하기 때문에 5~10년을 내다보고 신흥시장으로 가 더 큰 기회를 찾으라는 김우중 회장님 말씀에 해외취업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연상(연세대 사회학과 4학년)씨는 “‘경제사정이 열악한 곳일수록 두려워 말라’, ‘경공업을 경험해봐야 훗날 기업을 중화학공업기업으로 키울 수 있다’는 김 전 회장의 말이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미얀마, 베트남 현지방문을 통해 이들은 한국기업들의 다양한 현지화 전략을 살펴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김우중 전 회장과 관련된 풍문]
10평 남짓한 침실… 호화생활과 거리 멀어
- 베트남 하노이시(市) 인근에 위치한 드림플라스틱 공장 앞에서 김우중 전 회장(가운데)이 글로벌YBM 졸업생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김 전 회장은 그동안 국내 언론과 거리를 둬 왔다.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생활했지만, 한국 내 활동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 국한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다보니 김 전 회장과 관련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여러 풍문이 나돌았다. 막대한 추징금을 내지 않은 상황에서 베트남에서 호화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국내 한 종합편성채널은 몰래카메라를 동원해 김 전 회장이 묵고 있는 반찌(Van Tri) 골프클럽 입구부터 클럽하우스 전체를 ‘아방궁(阿房宮)’처럼 묘사해 보도했다. 하지만 <이코노미조선>이 실제 확인한 결과, 김 전 회장의 거처는 클럽하우스 2층에 위치한 내실(內室)뿐이었다. 66㎡(20평) 내외로 구성된 내실에는 거실과 침실이 각각 1개씩 자리 잡고 있었다. 김 전 회장이 쓰는 침실 크기도 육안으로 보기에 33㎡(10평)가 채 넘지 않아 보였다. 한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업 총수의 침실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소박했다. 단출한 침실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으나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관계자가 “프라이버시(사생활)를 침해한다”며 만류해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김 전 회장이 묵고 있는 반찌 골프클럽은 현재 회원제 골프장으로, 셋째 아들인 선용씨가 최대주주로 있는 옥포공영이 소유하고 있다. 반찌 골프클럽 관계자는 “대우그룹이 해체되기 전인 1990년대 초반 정상적으로 세금을 내고 증여한 돈으로 구입한 것으로, 일부에서 말하는 비자금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면서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여서 국가가 토지소유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동산 가치는 생각만큼 크지 않다”고 말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에 따르면, 현재 김 전 회장은 1년 중 70% 정도의 시간을 베트남에서 보내고 있으며 한국에는 두 달에 한번꼴로 다녀가고 있다.
10평 남짓한 침실… 호화생활과 거리 멀어

- 베트남 하노이시(市) 인근에 위치한 드림플라스틱 공장 앞에서 김우중 전 회장(가운데)이 글로벌YBM 졸업생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김 전 회장은 그동안 국내 언론과 거리를 둬 왔다.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생활했지만, 한국 내 활동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 국한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다보니 김 전 회장과 관련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여러 풍문이 나돌았다. 막대한 추징금을 내지 않은 상황에서 베트남에서 호화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국내 한 종합편성채널은 몰래카메라를 동원해 김 전 회장이 묵고 있는 반찌(Van Tri) 골프클럽 입구부터 클럽하우스 전체를 ‘아방궁(阿房宮)’처럼 묘사해 보도했다. 하지만 <이코노미조선>이 실제 확인한 결과, 김 전 회장의 거처는 클럽하우스 2층에 위치한 내실(內室)뿐이었다. 66㎡(20평) 내외로 구성된 내실에는 거실과 침실이 각각 1개씩 자리 잡고 있었다. 김 전 회장이 쓰는 침실 크기도 육안으로 보기에 33㎡(10평)가 채 넘지 않아 보였다. 한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업 총수의 침실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소박했다. 단출한 침실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으나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관계자가 “프라이버시(사생활)를 침해한다”며 만류해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김 전 회장이 묵고 있는 반찌 골프클럽은 현재 회원제 골프장으로, 셋째 아들인 선용씨가 최대주주로 있는 옥포공영이 소유하고 있다. 반찌 골프클럽 관계자는 “대우그룹이 해체되기 전인 1990년대 초반 정상적으로 세금을 내고 증여한 돈으로 구입한 것으로, 일부에서 말하는 비자금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면서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여서 국가가 토지소유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동산 가치는 생각만큼 크지 않다”고 말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에 따르면, 현재 김 전 회장은 1년 중 70% 정도의 시간을 베트남에서 보내고 있으며 한국에는 두 달에 한번꼴로 다녀가고 있다.
[김우중 전 회장과 함께 보낸 48시간]
하루 5~6곳 방문하는 강행군 소화…일중독자 기질 여전
김 전 회장과 인터뷰 일정이 잡힌 것은 지난 1월 초였다. 당시 <이코노미조선>은 대우세계경영연구회로부터 “‘글로벌 청년사업가 발굴프로젝트’ 행사가 1월25일부터 3박4일간 베트남 현지에서 열리니 이 기간을 이용해 인터뷰를 갖자”는 연락을 받았다.
1월25일 김 전 회장과의 인터뷰를 위해 반찌 골프클럽을 찾았다. 하노이 북부에 위치한 이곳은 일반 회원제 골프장 수준으로 소박했다. 경비초소가 있는 입구를 지나 클럽하우스까지 가는 도로 양쪽에는 모내기를 하는 베트남 농민들이 일손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물소의 모습도 보였다. 김 전 회장은 3박4일간 미얀마 방문 일정을 마치고 전날 밤 늦게 하노이에 도착한 터라, 여독(旅毒)이 풀리지 않을 법도 하지만, 인터뷰 동안 자신의 생각을 비교적 솔직하게 대답했다.
애초부터 이번 인터뷰는 대우그룹 해체와 관련한 대화는 철저하게 배제됐다. 인터뷰를 주선한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측은 “대우해체와 관련해서는 지난해 발간된 <김우중과의 대화>(신장섭 저, 북스코프)에서 이미 상세히 설명했으며, 더 털어놓을 이야기는 없다”고 말했다. 당일 인터뷰에서 대우그룹 해체와 관련한 질문을 던지자 김 전 회장은 “책에서 이미 다 소개를 했으며, 저쪽(김우중 회장이 당시 대우그룹 해체를 주도했다고 주장한 DJ정부 경제 관료집단)에서 어떤 반박이라도 했으면 모를까, 지금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기 때문에 뭐라고 논평하고 싶지 않다”며 선을 그었다.
올해 우리나이로 80세인 김 전 회장은 겉으로 봐선 건강에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귀에는 보청기를 끼고 있었다. 김 전 회장과의 대담은 다음날 진행된 하노이 현지 한국기업 탐방 중에도 틈틈이 진행됐다. 김 전 회장은 80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이틀 동안 김 전 회장은 ‘글로벌 청년사업가 발굴프로젝트’에 참가한 학생들과 현지 기업을 하루에 4~5곳씩 방문했다. 현지 기업을 방문해서는 마치 기업 CEO(최고경영자)처럼 ‘마진은 얼마나 되는지’, ‘판로 확보에는 어려움이 없는지’ 등을 물어봤다. 오히려 동행한 <이코노미조선> 취재팀이 지칠 정도로 강행군은 이틀 내내 계속됐다. 젊은 시절 하루 24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워커홀릭(일중독자)이었다는 게 허언(虛言)은 아닌 듯 했다.
몸은 베트남에 있었지만 김 전 회장의 관심은 여전히 한국 경제다. 매일 종합지와 경제지를 한국에서 발간되는 것보다 12시간 정도 늦게 베트남 현지에서 받아본다는 김 전 회장은 하루 일과 중 상당시간을 신문과 책을 읽는 것으로 보낸다.
김 전 회장은 여전히 언론과의 만남이 편해 보이지 않았다. 국가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 데에 대한 미안한 기색은 여전했다.
“분식회계에 대해서는 국민들이나 대우가족들에게 여전히 미안한 생각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회계규정대로 하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요. 다만 우리가 분식을 했더라도 그 돈을 비자금 등 다른 용도로 빼돌리지 않은 것, 그리고 이러한 분식회계가 당시로선 관행이었다는 점은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이 나이에 제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다. 지금 하는 이 글로벌YBM이 잘 운영돼 이들이 나중에 큰 인물로 크는 것, 그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게 제가 사랑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 경제에 보답하는 마지막 일이죠.”
김 전 회장은 저서 <세계는 넓고…>에서 유대인 종교철학자 마틴 부버의 “모든 참다운 삶은 만남에서 비롯된다”는 말을 평소 자주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글로벌YBM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아마도 김 전 회장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이런 말이 울리고 있지 않을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여전히’ 많다”고 말이다.
하루 5~6곳 방문하는 강행군 소화…일중독자 기질 여전
김 전 회장과 인터뷰 일정이 잡힌 것은 지난 1월 초였다. 당시 <이코노미조선>은 대우세계경영연구회로부터 “‘글로벌 청년사업가 발굴프로젝트’ 행사가 1월25일부터 3박4일간 베트남 현지에서 열리니 이 기간을 이용해 인터뷰를 갖자”는 연락을 받았다.
1월25일 김 전 회장과의 인터뷰를 위해 반찌 골프클럽을 찾았다. 하노이 북부에 위치한 이곳은 일반 회원제 골프장 수준으로 소박했다. 경비초소가 있는 입구를 지나 클럽하우스까지 가는 도로 양쪽에는 모내기를 하는 베트남 농민들이 일손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물소의 모습도 보였다. 김 전 회장은 3박4일간 미얀마 방문 일정을 마치고 전날 밤 늦게 하노이에 도착한 터라, 여독(旅毒)이 풀리지 않을 법도 하지만, 인터뷰 동안 자신의 생각을 비교적 솔직하게 대답했다.
애초부터 이번 인터뷰는 대우그룹 해체와 관련한 대화는 철저하게 배제됐다. 인터뷰를 주선한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측은 “대우해체와 관련해서는 지난해 발간된 <김우중과의 대화>(신장섭 저, 북스코프)에서 이미 상세히 설명했으며, 더 털어놓을 이야기는 없다”고 말했다. 당일 인터뷰에서 대우그룹 해체와 관련한 질문을 던지자 김 전 회장은 “책에서 이미 다 소개를 했으며, 저쪽(김우중 회장이 당시 대우그룹 해체를 주도했다고 주장한 DJ정부 경제 관료집단)에서 어떤 반박이라도 했으면 모를까, 지금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기 때문에 뭐라고 논평하고 싶지 않다”며 선을 그었다.
올해 우리나이로 80세인 김 전 회장은 겉으로 봐선 건강에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귀에는 보청기를 끼고 있었다. 김 전 회장과의 대담은 다음날 진행된 하노이 현지 한국기업 탐방 중에도 틈틈이 진행됐다. 김 전 회장은 80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이틀 동안 김 전 회장은 ‘글로벌 청년사업가 발굴프로젝트’에 참가한 학생들과 현지 기업을 하루에 4~5곳씩 방문했다. 현지 기업을 방문해서는 마치 기업 CEO(최고경영자)처럼 ‘마진은 얼마나 되는지’, ‘판로 확보에는 어려움이 없는지’ 등을 물어봤다. 오히려 동행한 <이코노미조선> 취재팀이 지칠 정도로 강행군은 이틀 내내 계속됐다. 젊은 시절 하루 24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워커홀릭(일중독자)이었다는 게 허언(虛言)은 아닌 듯 했다.
몸은 베트남에 있었지만 김 전 회장의 관심은 여전히 한국 경제다. 매일 종합지와 경제지를 한국에서 발간되는 것보다 12시간 정도 늦게 베트남 현지에서 받아본다는 김 전 회장은 하루 일과 중 상당시간을 신문과 책을 읽는 것으로 보낸다.
김 전 회장은 여전히 언론과의 만남이 편해 보이지 않았다. 국가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 데에 대한 미안한 기색은 여전했다.
“분식회계에 대해서는 국민들이나 대우가족들에게 여전히 미안한 생각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회계규정대로 하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요. 다만 우리가 분식을 했더라도 그 돈을 비자금 등 다른 용도로 빼돌리지 않은 것, 그리고 이러한 분식회계가 당시로선 관행이었다는 점은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이 나이에 제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다. 지금 하는 이 글로벌YBM이 잘 운영돼 이들이 나중에 큰 인물로 크는 것, 그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게 제가 사랑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 경제에 보답하는 마지막 일이죠.”
김 전 회장은 저서 <세계는 넓고…>에서 유대인 종교철학자 마틴 부버의 “모든 참다운 삶은 만남에서 비롯된다”는 말을 평소 자주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글로벌YBM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아마도 김 전 회장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이런 말이 울리고 있지 않을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여전히’ 많다”고 말이다.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
1936년 대구 출생, 56년 경기고, 60년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85년 연세대 명예경제학박사, 60년 한성실업 입사, 67년 대우실업 설립, 76년 대우실업 사장, 81년 대우그룹 회장, 88년 대한축구협회장, 98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78년 사재 50억원 출연 대우문화재단 설립, 80년 사재 200억원 사회환원, 84년 국제상업회의소(ICC) 선정 아시아 최초 ‘국제기업인상’ 수상, 87년 <포춘>지 ‘50대 기업인’에 선정.
1936년 대구 출생, 56년 경기고, 60년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85년 연세대 명예경제학박사, 60년 한성실업 입사, 67년 대우실업 설립, 76년 대우실업 사장, 81년 대우그룹 회장, 88년 대한축구협회장, 98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78년 사재 50억원 출연 대우문화재단 설립, 80년 사재 200억원 사회환원, 84년 국제상업회의소(ICC) 선정 아시아 최초 ‘국제기업인상’ 수상, 87년 <포춘>지 ‘50대 기업인’에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