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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유럽 민족의 기원과 정착의 역사]
1. 슬로베니아 민족 기원과 역사적 특징
발칸 유럽의 북서쪽 끝에 자리하며, 과거 서유럽의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동유럽 지역의 헝가리, 크로아티아 사이에서 중요한 지정학적 요충지를 차지하였던 슬로베니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동안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6개 구성 공화국 중 하나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해 왔다. 이 중 고대 남슬라브족의 일파인 슬로베니아인은 발칸반도로 이주해 내려온 후 5-7세기를 거치며 과거 이 지역을 지배해 왔던 로마인을 몰아내고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고대부터 20세기 말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슬로베니아는 자신의 독립국가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이 프랑크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 주변 남슬라브 족과의 연대 속에서 민족의 명맥을 겨우 유지해 올 수 있었다.
동유럽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1992년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슬로베니아는 21세기 현재 경제와 정치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2004년엔 EU에 가입, 그리고 얼마 뒤 2007년엔 동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유로존(Eurozone)에 가입하는 성과를 이루어 내기도 했다. 비록 민족 구성상 약 200만 명에 불과한 유럽 내에서도 매우 작은 소수 민족이자 역사적으로 계속된 외세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슬로베니아인들은 자신의 고유한 문화와 독자적인 언어를 계속해서 유지, 발전시켜 왔으며, 더불어 민족 정체성 발전을 추구하고 있는 유럽 내에서도 매우 모범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본 내용에선 슬로배니아 민족의 기원과 역사적 특징들을 슬로베니아인들의 발칸 유럽 정착 시기 때부터 슬로베니아인들의 사람과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합스부르크 제국 지배 시기 때까지를 중심으로 분석해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 중 합스부르크제국의 지배 시기는 각 특징에 따라, 16세기까지는 ‘오스만 터키의 침략 그리고 농민반란 및 종교 개혁 시기’로 묘사하였으며, 17세기는 유럽 전역에 확산되어 있던 ‘종교 개혁 vs 반(反) 종교개혁의 시기’로, 그리고 민족주의의 시기로 접어들기 직전인 18세기는 ‘계몽주의 시기’로 분류해 분석하고자 한다.
(1) 생각하기
21세기 현재, 슬로베니아에는 20세기말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한 동유럽 국가들 중 가장 안정되고 모범적인 모델 국가로 발전을 거듭해 나가고 있다.
과거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내 6개 공화국 중 가장 선진 공화국이었던 슬로베니아는 1980년 5월 티토의 사망 이후 ‘이제부터 유럽으로(Europe Now!)’라는 구호와 함께 독립국가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992년 10일 간에 걸친 연방군과 시민전쟁의 승리를 통해 역사상 최초로 독립을 이루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후 슬로베니아는 2004년 5월에 들어와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그리고 발틱 3국 등 다른 동유럽국가들과 함께 EU 가입에 성공하였고,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정치적 민주화를 토대로 자본주의로 전향한 동유럽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유로존(Eurozone, 2007년 1월)에 가입함으로써 이젠 분명한 유럽 국가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다.
슬로베니아의 위상 변화에 따라 그 국가적 이미지 또한 정치, 경제적인 면에 있어 독립국가로써의 발전과 경제적 부를 축적해 가고 있는 점이 커다란 축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역사와 사회 그리고 문화 내부적 측면에 있어서 슬로베니아인들은 그들 자신만의 독자적인 민족적, 문화적, 역사적 정체성 수립과 그 유지에 일련의 혼란과 어려움이 상존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한 이유는 인구 약 200만에 지나지 않는 유럽 내 소수 민족이라는 현실적 어려움과 더불어,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독립국가를 유지하지 못한 채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주변 외세의 지배 하에서 이들의 사회, 문화적인 영향을 받고 살아와야만 했다는 역사적인 이유에서 비롯된다 하겠다.
특히 슬로베니아가 2004년 EU 가입을 전후로, 인적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고 고급 인력의 두뇌 유출이 심각한 사회 문제들 중 하나로 대두되게 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한 일환으로 역사적 고찰과 민족의 뿌리 찾기 등 일련의 정책 필요성이 대두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슬로베니아는 다양한 자원을 토대로 슬로베니아의 민족 기원 그리고 민족, 언어 정체성 수립과 발굴에 여러 노력을 기울여 가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특히 역사, 언어, 문화 등의 학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이를 통해 현재까지 슬로베니아인들의 고유한 역사와 독자성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해 나가고 있다.
(2) 슬로베니아 민족의 기원과 발전
오늘날 발칸 유럽의 주요 민족을 구성하고 있는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불가리아인과 더불어 남슬라브족의 일파로 분류되는 슬로베니아인은, 대략 기원 후 5-7세기에 걸쳐 오늘날 율리안 알프스(Julian Alps) 산악지대와 아드리아 북부 연안을 중심으로 발칸유럽 내에 자신들의 거주지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슬로베니아인을 비롯해 이러한 슬라브족들의 이동과 정착은 로마 제국의 분열 그리고 게르만족에 의한 서로마 제국의 멸망, 아시아 유목 민족들의 유럽 진출 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4세기 중엽, 카스피해 인근에 자리하고 있던 훈족(Hun)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게르만족의 일파인 흑해 북쪽 기슭의 동고트족과 두나브(Dunav, 다뉴브) 강 하류 유역의 서고트족을 압박하였고, 이것은 곧바로 로마제국 영토로의 게르만족 대이동을 낳았다. 4세기 초부터 로마 제국의 용병으로 활약하여 왔던 이들 게르만족들은 허술한 로마 국경 수비대를 쉽게 물리치고 제국 영토 깊숙이 들어오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 결과 서고트족은 남프랑스와 에스파냐 북부에, 동고트족은 이탈리아에, 반달족은 아프리카에, 부르군트와 프랑크족은 라인 강의 중하류에, 앵글로 색슨족은 브리튼 등 로마 제국의 각 지역으로 이동하여 그들만의 게르만 국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반면,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일으켰던 훈족은 한 때, 라인 강에서 카스피 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루기도 했으나, 453년 아틸라(Attila)의 사망과 이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다툼이 겹치며 결국 멸망 후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에 의해 무너진 동로마(비잔틴) 제국과 달리, 서로마 제국은 그보다 1000년 이전인 476년 게르만족의 용병 오도아케르(Odoacer, 433-493)에 의해 멸망하였고, 뒤이어 여러 게르만 국가들 중 로마인들과의 문화적 교류와 원거주지로부터 이주 거리가 비교적 짧았던 프랑크 왕국만이 살아남아 다른 게르만 지역들을 모두 통합해 가며 유럽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쇠퇴와 멸망 그리고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뒤 이은 아시아 유목민족들의 유럽 침략은 엘바 강 북쪽에서부터 카르파티아 산맥 너머 추운 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있었던 슬라브족들이 대규모로 따뜻한 남쪽으로 이주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우선, 게르만족의 이동에 따라 기존 이들 게르만족의 거주지는 슬라브족에 의해 채워지게 되었는데, 이 중 오늘날 체코와 슬로바키아 그리고 폴란드 지역에 정착한 이들은 서슬라브족으로 분류되게 된다. 이와 더불어 5세기와 6세기에 당시 아바르(Avar) 유목민족과 함께 동로마 제국 내 발칸유럽 지역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남슬라브족들은 오늘날 슬로베니아 북부 아드리아 해안으로부터 흑해 연안까지 그 거주지를 확대시켜 갈 수 있었다. 특히, 발칸 유럽 지역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남슬라브족들은 오늘날 슬로베니아 지역인 북부 아드리아 해안으로부터 흑해 연안까지 그 거주지를 확대시켜 갈 수 있었다. 특히, 발칸지역으로 이주한 남슬라브족들은 6세기 중엽에 들어와 이들 지역에서 훈족을 완전히 몰아내었고, 뒤이어 7세기 무렵에는 아바르의 지배에서 벗어난 후 동로마 제국의 허용 속에 발칸 유럽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슬로베니아인을 포함해 발칸 유럽에 정착한 초기 남슬라브족들은 그들의 원시 거주지로 추정되는 서부 러시아에서 익히 오래된 습관이나 관습을 버리고, 느리지만 매우 단단하게 그들의 정착 지역을 확산시켜 나갔다. 발칸반도의 험준한 산악지대와 아드리아 해안 지대라는 특성에 따라 남슬라브족들은 각자의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시켜 갔으며, 특히 6세기 경 오늘날 동부 알프스에 해당하는 율리안 알프스 산악 지역에 정착하게 된 슬로베니아인들은 서로의 교통과 의사소통을 막는 산악 지대 특성으로 인해 각자의 독자적인 개별 문화를 형성해 나가게 된다.
슬로베니아인들이 정착하기 이전까지 이 지역에서는 트리키아인(Thracians), 일리리아인(Illyrians), 켈트인(Celts), 그리고 로마인 등이 역사적 시기를 병행하며 살아 왔었다. 이곳에 들어온 초기 슬로베니아인들은 아바르 부족의 노예로 혹은 협력자로 이곳 슬로베니아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이후로 게르만족이 세운 프랑크 제국에 병합되게 된다. 역사를 통틀어 슬로베니아는 7세기 한때 사모(Samo) 공국을 수립해 자치 경험을 한 것 외에는 1992년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이전까지 독립 및 자치 국가로써의 경험이 전혀 없었다. 실제, 사모 공국 조차도 그 존재 여부에 대한 논쟁이 학자들 간에 아직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역사가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623년 프랑크 왕국 부근의 슬라브인들이(학자들 사이에 논쟁의 여지가 아직 존재하지만) 프랑크 귀족인 사모를 중심으로 아바르족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이후 627년부터 658년까지 슬로베니아인들은 사모라 불리는 약간은 신화적이고 가공의 지배자 밑에서 느슨한 정치적 공동체를 구성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사모 공국은 독일 남부지방의 작센(Saxony) 그리고 모라비아와 보헤미아에서부터 아드리아 해 연안까지 이어진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지만, 659년 사모가 사망한 후 분열하였고 이후 이들 슬로베니아인들은 독일 남부의 바바리안(Bavarian) 그리고 이후에는 프랑크 제국의 정치적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슬로베니아인들의 기독교화 과정은 다른 슬라브족들이 9-10세기 사이에 기독교화 된 것 보다는 다소 빠른 8세기 후반에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교회 하의 초기 정교회 영향력과 치릴 문자(Cirillca)의 전통은 비잔틴 제국의 국력 약화 그리고 1054년 교회 대분열 이후 점차 로마 가톨릭교회와 라틴 문자(Latinica)의 영향력으로 바뀌게 된다. [ 슬로베니아인들을 비롯해 중부 유럽 및 발칸 반도에 정착한 슬라브족들은 본 거주지에서부터 믿어왔던 내세,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믿음 그리고 천체나 자연숭배 사상이 매우 강하였다. 이들에 대한 기독교 전파는 동서 2개의 교회, 즉 콘스탄티노플 수좌대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동방 정교회와 로마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서방의 가톨릭교회 간의 상호 경쟁에 의해 오랜 시기를 거치며 전개되게 된다.] 따라서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742 - 814) 시기, 슬로베니아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특징짓는 서유럽의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제도들과 요소들을 수립해 나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슬로베니아의 중세 역사는 962년 설립된 신성로마 제국 역사의 한 부분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봉건주의 시대에 들어와 대부분의 슬로베니아인들은 비슬로베이나 출신의 영주와 귀족들의 지배하에서 농노 상태로 자신들의 삶을 꾸려나가야만 했었다.
특히 슬로베니아 역사 속에서 1382년부터 시작된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인연은 이들의 종교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회 그리고 정치, 경제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이때 이후로 대부분의 슬로베니아 영토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이러한 지배는 1918년까지 유지되게 된다. 따라서 비록 슬로베니아가 역사적 특징에 따라 전통적인 카르니올라를 중심으로 이 외에도 고리지아(Gorizia), 이스트리(Istria), 카린티아(Carinthia), 스티리아(Styria) 등으로 나뉘어졌지만, 실제 행정에 있어선 오스트리아의 한 지역에 불과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5세기 동안 쩰례(Celje)의 영주는 합스부르크로부터 상대적인 자치권을 확보받아, 적어도 예술 분야에 있어서 슬로베니아의 르네상스시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반면, 이 시기동안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력 하에 있던 아들리아 해안 지역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보다는 베네치아의 영향력을 받아야만 했었다.
슬로베니아 역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초기 슬로베니아인들의 정착 지역은 현재 슬로베니아 공화국 지역보다 훨씬 넓어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남부와 이탈리아 북동부 지역을 가로지르는 영토까지 해당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웃한 신성로마 제국과 뒤 이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계속된 지배 정책에 따라 점진적인 축소 과정이 수 세기에 걸쳐 일어났고, 이에 따라 19세기 민족주의 시대가 들어선 이후로 특히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게 되면서 오늘날과 유사한 지역들로 한정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현재의 슬로베니아 영토 밖 지역들에는 초기 슬로베니아인들이 정착했다는 증거물들이 다수 확인되고 있는데, 이 중에는 우선 오스트리아의 지방명칭 중 토플리쯔(Toplitz)와 같은 지역 이름과 클라겐푸르트(Klagenfurt/Celovec), 그라쯔(Graz)와 같이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 징겨에서 조차도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일부 유명한 관습들에서 슬로베니아어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더불어 스티리아 근처 마을 등 카린티아의 남부 지역은 물론 현재 이탈리아 지역인 프리울리-베네찌아(Friuli-Venezia) 언덕과 몬팔쪼네(Monfalcone)의 해안 마을로부터 알프스에 자리한 타르비시오(Tarvisio) 지역까지 슬로베니아의 방언들이 사용되고 있음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실제, 이탈리아 트르스트(Trieste/ Trst) 근처의 해안 마을들과 이스트라 북부 지역은 오랜 시기 동안 고유의 슬로베니아어가 사용되어 왔던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외세의 지배가 계속 이어지면서 슬로베니아인들은 수세기 동안 다른 언어권의 이웃들과 함께 거주하며 살아와야 했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슬로베니아 내는 물론 인근 지역들에서 고대와 중세 슬로베니아 지명 및 방언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으며, 언어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들 지역에서의 언어적 혼용과 방언적 특성들이 자주 연구되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어가 주로 사용되는 아드리아 해안 지역과 슬로베니아어가 주류를 이루는 내륙지방 간의 차이점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이미 19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19세기 중반 패튼(Archibald Andrew Paton)이 남긴 자료에서도 이러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잇다. 그는 “트르스트 항구에서는 이글거리는 태양과 깊은 그림자가, 거리 끝 아드리아해의 강렬한 하늘과 공기의 흐름이, 볼로그나(Bologna) 소시지와 마늘의 향기 혹은 이상한 향료가 서로 강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거의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예(si)’라는 단어는 이탈리아에 인접해 있는 슬로베니아인들의 현실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도시 뒤로 펼쳐진 하얀 빌라와 녹색의 고원에 서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복장은 알프스 산에서부터 발틱(Baltic)까지 걸쳐 있는 크고 넓은 땅과 인접한 도시들에 거주하는 사람들, 즉 슬라브인들을 연상케 한다. 시장에 몰려 온 이들 카르니올라 출신의 농부들은 모두 슬라브인(Slavs)이며, 이들은 주로 슬로베니아인들의 거주지인 이스트라, 카린티아 그리고 스타리아에서 들을 수 있는 방언들을 말하고 있다.”라고 언급하면서, 이들이 오스트리아나 이탈리아 본토인과는 다른 독특한 그들만의 성격과 특징 그리고 관습들을 지니고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분석해 볼 때, 슬로베니아인들의 초기 정착이 이처럼 넓은 지역에 걸쳐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슬로베니아가 다른 남슬라브족들처럼 중세 이후로 하나의 독자적인 단일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실제, 이러한 원인들은 지정학적, 문화적, 언어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마치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자리하면서 슬로베니아의 확대와 독립국가로의 발전을 막아왔다. 지정학적으로 슬로베니아는 험준한 율리안 알프스 산악지대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서유럽 민족들의 발칸유럽으로의 진출을 위한 그리고 반대로 오스만 투르크처럼 동양 세력들의 서유럽 진출을 위한 관문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더불어, 내륙과 해안의 교차점에 자리하고 있는 전략적인 이유로, 계속해서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과 지배를 견디어야만 했었다. 그러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슬로베니아는 문화적으로도 또한 이탈리아 문화와 게르만 문화의 접합점에 자리해야 했으며, 여기에 자신들이 오랜 동안 지녀 왔던 슬라브적 문화 요소들이 다양하게 혼재되어 복잡다단한 문화적 특징들과 관습을 지니게 되었다. 언어적으로는 일반 민중들을 중심으로 슬로베니아어가 주요 언어로 사용되었지만, 지역과 지배 계층에 따라 이탈리아어와 게르만어가 또한 복잡하게 혼용되어 쓰여 오곤 했었다. 더불어, 외세의 빈번한 침략과 오랜 시기 동안의 지배는 슬로베니아인들의 정치 체제와 경제적 특징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요소들이 역사적 상황에 따라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 다른 발칸유럽의 국가들처럼 슬라브적 요소를 갖춘 그들만의 독자적 국가가 수립되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