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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야기 스크랩 열여섯 소년,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다
김정화 추천 0 조회 19 09.02.23 15: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취팽은 처음에 "나는 책을 한 권 쓰려고 은퇴한다"고 말했을 것이고, 다음 번에는 "나는 미로를 하나 만들려고 은퇴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걸 두 가지 일로 생각한 것입니다. 미로와 책이 같은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지요. 청고정은 아마 복잡한 정원 한 가운데에 세워졌을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물리적인 미로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을 것입니다. 취팽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분이 소유하고 있던 광활한 영지에서 미로를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혼란스러운 그 소설을 보고 그 혼란스러움이 미로라는 암시를 받았습니다. 두 가지 단서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바른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취팽이 엄격한 의미로서의 무한한 미로를 만들려고 구상하고 있었다는 자못 흥미로운 전설이고, 또 하나는 제가 발견한 편지 조각입니다." 앨버트는 일어섰다. 그는 잠시 동안 내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광택이 나는 검정 색 책상 서랍을 열더니 종이를 한 장 꺼내들고 돌아섰다. 네모난 그 종이는 원래 진홍색이었으나 지금은 빛이 바래 분홍색으로 변하고 글씨도 흐릿했다. 취팽은 확실히 명필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선조께서 세필로 적어놓은 글을 유심히 읽어보았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끝없이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을 다양한 미래(모든 미래는 아니지만)에 남기노라." 나는 잠자코 그 종이 쪽지를 돌려주었다.

 

앨버트는 말을 이었다. "이 편지를 발견하기 전에 한 권의 책이 무한해질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하고 자문해 보았습니다.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책을 쓰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은 생각할 수 없었지요. 마지막 페이지와 첫 페이지 동일한 책 말입니다. 이런 책이라면 무한히 계속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천일야화}에 나오는 어느 날 밤의 이야기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헤라자드 왕비가 천일야화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반복하기 시작하는 밤의 이야기(어쩐 일인지 필경사가 정신이 없어서 그랬지만) 말입니다. 이는 그 이야기를 했던 밤으로 다시 돌아갈 위험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끝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세습되면서 새 세대들이 각기 한 장씩을 덧붙이거나, 효성스럽게 조상들이 쓴 부분들을 수정하는 작품도 상상해보았습니다. 이러한 추측들은 재미난 것이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앞뒤가 안 맞는 장들로 구성된 취팽의 소설과 부합되기는커녕 엇비슷하게 맞지도 않았습니다. 그처럼 쩔쩔매고 있는데 옥스퍼드에서 당신이 방금 본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뭐, 당연하지만 저는 그 구절, 즉 "나는 끝없이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을 다양한 미래(모든 미래는 아니지만)에 남기노라"에서 머뭇거렸지요. "끝없이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이 그 혼란스러운 소설이라는 사실을 즉각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미래(모든 미래는 아니지만)"에서는 그것이 공간상의 분기가 아니라 시간상의 분기라는 착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작품을 재차 통독함으로써 이 이론을 확인하였습니다.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작가들은 매번 여러 가지 가능성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는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나머지들은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취팽의 소설 속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에- 선택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끝없이 증식하고 갈라지는 다양한 미래들, 다양한 시간들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 소설의 수많은 모순은 바로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황이라는 사람은 어떤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낯모르는 사람이 문을 두드립니다. 그래서 황은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결말이 가능하지요. 황이 침입자를 죽일 수도 있고, 침입자가 황을 죽일 수도 있으며, 양자 모두 살 수도 잇고, 또 양자가 모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 밖의 가능성도 있지요. 아무튼 취팽의 작품에서는 모든 결말이 다 일어나며, 각각의 결말들은 또 다른 갈림길의 출발점이 됩니다. 때때로 그 미로의 갈림길들은 한 곳에 모아지기도 합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두 갈래  오솔길이 나있는  정원>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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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게 일종의 특권이라는 걸 까맣게 몰랐다. 보르헤스를 너무나 존경했던 우리 고모는 무덤덤한 내 태도에 거의 분개하다시피 하면서 그를 만날 때마다 기록을 해두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보르헤스와 함께 지내는 저녁 시간은 특별할 게 없었고(건방진 사춘기였으니) 늘 내 것으로 여겨왔던 책의 세계와 동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다른 대화들이야말로 이질감이 들고 지루했다. 하지만 보르헤스와 나누는 대화는 내가 생각하기에 모름지기 대화란 그래야 하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책에 대해, 책의 태엽장치에 대해 그리고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가들과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들, 또는 확신 없이 직관적으로 얼핏 스쳐갔던 것들을 보르헤스의 목소리로 들으면 그 짙고도 명백한 광채 속에서 그것들은 찬란하게 반짝였다. 기록 같은 건 하지 않았는데, 그와 마주 앉은 저녁 시간이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있잖니, 눈이 멀지 않은 시늉을 하며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처럼 책을 탐독하고 싶어. 새로 나온 백과사전이 얼마나 갖고 싶은지 몰라. 지도의 강줄기를 따라가고 수많은 항목에서 놀라운 내용들을 찾아내는 상상을 한단다."

 


세계적인 저술가이자 독서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은 십대 시절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일했다. 어느 날, 국립도서관장을 지내던 전설적인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물녘에 피그말리온에 들렀다. 그러고는 소년에게 저녁에 자신의 아파트로 와서 책을 읽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거장 보르헤스는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토록 좋아하는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상태였다.


이후 몇 년 동안 망구엘은 소설가에게 책을 읽어주며 수많은 저녁을 함께 보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보르헤스가 책등을 어루만지는 것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골라내는 비범한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고, 그가 셜록 홈스와 바이킹의 전사들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와 함께 제임스 카그니가 출연하는 갱 영화를 봤으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상영되는 영화관에 함께 앉아 있기도 했다. 망구엘은 그렇게 보르헤스와 함께 지내며 조금씩 정신적으로 성장해갔다. 어두침침하고 소박한 아파트로 보르헤스를 찾아가 책을 읽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어린 망구엘의 일화를 통해 우리는 보르헤스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이를 통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보르헤스의 문학적 비밀을 엿볼 수 있다.


아무하고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갑갑함을 느끼며 책에 빠져 살던 열여섯 소년은 수업이 끝난 후에 일을 하던 한 서점에서 예순다섯의 노작가를 만나고, 노인은 소년에게 "저녁에 시간이 있으면 책을 읽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와 후에 (어쩌면 노인이 불어넣어준 크나큰 문학적 영감에 힘입어) 작가 겸 편집자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소년의 우연하고도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망구엘은 전작인 『독서일기』에서 나이가 들수록 책에서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거나 감탄에 젖는 경우는 줄어들고, 그 대신 빼곡히 들어찬 문학적 암시를 읽어내느라 바쁜 나머지 모든 책이 훨씬 어렵고 복잡해진다며 아쉬움을 토로한 바 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보르헤스가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나이에 접어든 망구엘이 굳이 열여섯 그 시절로 돌아가 보르헤스를 다시 읽어보려 했던 이유는 혹시 그 때문이 아닐까. 남김없이 분석되고 해부되어 곳곳에 꼬리표가 붙었지만 그럴수록 더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 난해한 보르헤스를 잠시 접어두고, "책에 대해, 책의 태엽장치에 대해 그리고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가들과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들, 또는 확신 없이 직관적으로 얼핏 스쳐갔던 것들을 보르헤스의 목소리로" 들으면서 느꼈던 찬란한 기쁨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균열 없이 다정했던 거인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보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므로 이 책은 다시,『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이다. 이 책은 망구엘이 '보르헤스'라고 이름 붙인 그 비밀스런 고장을 헤매는 꿈길의 기억이다. 이 책은 몇 개의 잔상, 몇 개의 낱말을 지도삼고 나침반 삼아 그 고장을 한 나절 떠돈 "기억의 기억의 기억"이다. 보르헤스는 "다른 사람들이 우주라고 부르는 무한한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알려주었고, 이제 보르헤스라는 미로 속으로 기꺼이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을 위해, 망구엘은 거울 속에 떠오르는 보르헤스의 머나먼 눈을 가만히 응시한다. 보르헤스는 망구엘에게 세계를 담아내는 한 권의 책이었고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은 망구엘이 마음을 담아 쓴 아름다운 기억의 각주이며, 눈을 감고 그려낸 한 장의 스케치이다.

"저녁에 집에 와서 책을 좀 읽어주지 않겠니?"


"몇 년 동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나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준 많은 행운아 가운데 한 명이었다."
세계적인 저술가이자 독서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은 십대 시절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국립도서관장을 지내던 전설적인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그 서점의 단골이었는데, 어느 날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물녘에 피그말리온에 들렀다. 그러고는 소년에게 아흔 줄에 접어든 어머니가 쉬이 지친다면서 달리 할 일이 없으면 저녁에 자신의 아파트로 와서 책을 읽어주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보르헤스는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토록 좋아하는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땐 그게 일종의 특권이라는 걸 까맣게 몰랐다. 보르헤스를 너무나 존경했던 우리 고모는 무덤덤한 내 태도에 거의 분개하다시피 하면서 그를 만날 때마다 기록을 해두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보르헤스와 함께 지내는 저녁 시간은 특별할 게 없었고(건방진 사춘기였으니) 늘 내 것으로 여겨왔던 책의 세계와 동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다른 대화들이야말로 이질감이 들고 지루했다."


"하지만 보르헤스와 나누는 대화는 내가 생각하기에 모름지기 대화란 그래야 하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책에 대해, 책의 태엽장치에 대해 그리고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가들과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들, 또는 확신 없이 직관적으로 얼핏 스쳐갔던 것들을 보르헤스의 목소리로 들으면 그 짙고도 명백한 광채 속에서 그것들은 찬란하게 반짝였다. 기록 같은 건 하지 않았는데, 그와 마주 앉은 저녁 시간이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자, 오늘 밤엔 키플링을 읽어볼까?"


처음 찾아갔던 날 망구엘은 보르헤스의 아파트가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곧 그 장소가 보르헤스의 문학적 경험들로 이루어진 유구한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년 망구엘은 그런 독특한 공간에서 보르헤스와 함께 몇 년 동안 여러 책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보르헤스가 불러준 시를 하나씩 받아 적고, 한 구절씩 반복해 읽으며 보르헤스의 시를 함께 완성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망구엘은 보르헤스의 실명이 그의 삶과 공간을 조금씩 바꿔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서른 살부터 서서히 진행되다가 쉰여덟 번째 생일을 치른 후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그의 실명은 독특한 것이었다. 하지만 눈이 멀어 세상을 떠난 영국계 증조부와 조부에게서 약한 시력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예견된 실명이기도 했다. (..) 보르헤스는 자신의 실명을 자주 거론했는데, 주로 문학적인 차원에서였다. 자신에게 '책과 어둠'을 주신 '신의 아이러니'를 거론한 것은 유명하고, 호머나 밀턴 같은 역사 속의 유명한 장님 시인을 들먹였으며, 자신이 호세 마르몰에 이어 눈이 먼 세 번째 국립도서관장이라는 얘기를 할 때는 미신적이었다. (..) 그리고 실명과 노년이 저마다 혼자가 되는 방식이라고 말할 때의 목소리는 구슬프게 들렸다. 실명은 그를 자기만의 방에 가뒀고, 그 방에서 그는 당장 누가 옆에 있어서 구술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머릿속으로 한 줄, 한 줄 글을 써나갔다."

"있잖니, 눈이 멀지 않은 시늉을 하며 책을 탐독하고 싶어."


보르헤스의 방은 평범했다. 철제 침대와 의자 하나, 작은 책상과 나지막한 책꽂이 두 개가 전부였다. 그의 세계는 오롯이 언어로 채워졌고, 음악과 색과 형상은 좀처럼 그 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특히 그림을 보는 눈과 음악을 듣는 귀가 없었다. 브람스를 존경한다고 했지만, 그의 음악은 듣지 않았다. 탱고와 밀롱가를 흥얼거리기도 했지만, 탱고를 지나치게 예술화시킨 피아졸라는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재즈가 좋다고 했고, 영화 <사이코>를 높이 평가했다.


마찬가지로 서재도 평범했다. "우주를 도서관이라고 부르고 낙원을 '도서관의 형태로' 상상한다고 실토한 사람의 서재치고는 그 규모가 실망스러웠는데, 어떤 시에서도 말했듯이 언어란 단지 '지혜를 모사(??'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책이 넘치는 공간, 책으로 터져나갈 것 같은 책장, 원고더미가 길을 막고 빈 틈새마다 빼곡한 잉크와 종이의 정글을 기대했다. 그런데 정작 와서 보면 몇 귀퉁이에만 얌전하게 책이 꽂혀 있었다." 그러나 몇 안 되는 그 책장에는 백과사전과 각종 사전 등 보르헤스가 읽은 책의 정수가 담겨 있었고, 그것은 보르헤스의 자긍심이었다.


"있잖니, 눈이 멀지 않은 시늉을 하며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처럼 책을 탐독하고 싶어. 새로 나온 백과사전이 얼마나 갖고 싶은지 몰라. 지도의 강줄기를 따라가고 수많은 항목에서 놀라운 내용들을 찾아내는 상상을 한단다."


그는 특히 백과사전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국립도서관에 갔을 때, 우연히 펼쳐든 브리태니커 사전에서 드루이즈 성직자와 드루즈파, 드라이든에 대해 알게 되고 나서부터 "백과사전의 질서정연한 우연에 운을 맡기는 버릇"을 끝끝내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망구엘도 보르헤스에게 수없이 다양한 백과사전을 읽어주었다. 가끔은 보르헤스가 직접 책을 고르기도 했다. 보르헤스는 모형지도의 울퉁불퉁한 표면을 훑듯이 책등을 어루만지더니 분명히 눈으로는 읽을 수 없는 그 책의 제목과 이름을 판독해내곤 했다. 장인의 직관 같은 것이 그 책의 내용을 알려주는 것처럼.

"보르헤스에게 현실의 정수는 책 속에 있었다. 책을 읽고, 책을 쓰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알맹이였다. 그는 수천 년 전에 시작돼서 한 번도 끝난 적이 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했다. 책은 과거를 복원했다." 보르헤스는 엄청난 기억의 소유자였다. 그는 모든 걸 기억했다. 그래서 그의 방에는 그가 쓴 책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쓴 모든 글을 암송하고 바로잡고 고쳐 써서 듣는 사람들의 환호를 자아냈다. 옛날 탱고의 노랫말과 오래전에 죽은 시인들의 지독한 구절들, 온갖 소설들의 묘사와 수수께끼와 경구, 영어와 독일어와 스페인어도 모자라 포르투갈어와 이탈리아어로 쓴 장시들.. 그는 이 모든 것을 기억했다.


보르헤스는 서사시를 무척 좋아했다. 앵글로색슨족의 무용담, 호머의 작품, 갱 영화와 할리우드 서부극, 멜빌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암흑가에 떠도는 전설 등에서 그는 용기와 결투라는 동일한 주제를 읽어냈다. 보르헤스에게 서사의 주제는 사랑이나 행복, 또는 불운처럼 본질적인 허기였다. 또 그는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망구엘은 그에게 홈스나 바이킹 전사들 이야기를 읽어주곤 했다.

"꿈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 그런데 성공한 적이 없는 것 같아."


보르헤스는 스페인어를 새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들었고 시적 의미를 지닌 여러 겹의 풍부한 어휘와 그걸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고 간결한 문체를 개발했다. 스페인어로 글을 쓰는 금세기의 주요 작가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부터 훌리오 코르타사르, 그리고 카를로스 푸엔테스와 세베로 사르두이까지 거의 대부분 보르헤스에게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젊은 세대의 글에서도 그의 문학적 목소리가 어찌나 크게 메아리치는지 아르헨티나의 마누엘 무히카 라이네스는 이런 사행시까지 지었다.

젊은 작가에게
전진의 꿈을 품는 것은
부질없나니,
바다만큼 많은 글을 쓴다 하여도
이미 보르헤스가 썼을 테니까.

보르헤스는 문학의 개념을, 그리고 그 귀결로 문학사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 하나로 그는 보르헤스파를 만들었다. 보르헤스 독자들은 세르반테스, 단테, 셰익스피어를 보르헤스의 눈으로 읽어낸다. 그리고 그들은 도서관에 들어설 때마다 보르헤스를 떠올리고, '원형의 미로'와 같은 장소를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보르헤스가 등장하는 것만 모아도 보르헤스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첫 장에는 동물이 '황제의 소속'과 '멀리서 보면 파리를 닮은 것'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몇 가지 종류로 나뉜다는 유명한 중국백과사전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것은 보르헤스의 상상을 차용한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맹인 범죄자 사서의 이름은 호르헤 드 부르고스이고, 조지 스타이너는 번역에 대한 탁월한 책인 『바벨 이후After Babel』에서 보르헤스가 1932년에 쓴 『천일야화의 번역가들』을 자세히 언급하며 높이 평가했다. 고다르의 영화 <알파빌>에서 기계가 죽으며 하는 말은 보르헤스의 에세이 「시간의 새로운 반박」의 마지막 문장이고, 뢰그와 캄멜이 1968년도에 만들었다가 쓴맛을 본 <퍼포먼스>의 마지막 장면에는 믹 제거의 얼굴에 보르헤스의 이목구비가 겹쳐진다. 기행작가 브루스 채트윈의 『파타고니아에서In Patagonia』와 니콜라스 랜킨의 『망자의 함Dead Man's Chest』 에서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늙은 현자를 만날 수 있다. 말년에 그는 『햄릿』의 지은이로부터 기억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셰익스피어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집필했다(. 푸코부터 스타이너, 고다르와 에코, 그리고 익명의 독자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전부 보르헤스에게서 방대한 문학적 기억을 상속받은 사람들이다.

"잘 자거라. 내일까지, 응?"

 

책 읽기가 끝이 난다. 망구엘이 마지막으로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준 건 1968년이었다. 어느덧 망구엘도 스무 살에 가까워졌다. 4년 동안 거장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그는 이전보다 더 책읽기에 탐닉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성숙해졌고, 책과 글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망구엘이 자신이 지은 여러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보르헤스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중 하나였고,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으며 성장해갔던 것이다. 곧 보르헤스는 망구엘에게 인생의 멘토였다. 이 책을 읽으면 그 까다롭던 보르헤스의 문학이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보르헤스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책을 통해 20세기 거장의 문학적 비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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