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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이후 빨랫감> 잭 콘필드, 한문화 명상수행을 해나가는 이들이 만나게 되는 어려움과 극복 과제를 수많은 인용과 일화를 통해 재미 있게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지은이 잭 콘필드는 사실 미국의 뛰어난 비파사나 명상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우선 우리에겐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시리즈 같은 수많은 서적으로 익숙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 책이야말로 그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책이 아닐까? 태국의 유명한 수도승 아잔 차 스님의 제자이지만 백인 특유의 탐구욕과 개방적 태도로 일본과 한국의 선불교는 물론 유대교와 수피교 등에 대해서도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은 인종과 종교의 박람회장임에 틀림없다. 당나라가 그랬듯이, 로마가 그랬듯이, 20세기의 패권국인 미국을 통해 문명은 융합되고 꽃을 화려하게 피우고 있다. 물론 정치경제적 측면과 역사와 문명의 부정적 영향도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튼 잭 콘필드와 같은 미국의 많은 영적 지도자들은 이런 문명사적 흐름을 타고 그 흐름 위에서 종교들이 가진 공통의 진리를 쉽고 재미나게 전해주고 있다. 깨달음 이후의 빨랫감은 곧 일상을 의미할 것이다.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큰 깨달음도 있고 작은 깨달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깨달음 이후의 빨랫감일 것이다. 깨달음을 살아가는 일일 것이다. 수행은 깨달음을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오히려 깨달음 이후의 빨랫감을 빨래하는 일인 줄도 모른다. 동의한다. 매일의 삶에서 에고 집착을 벗고 전체이고 하나인 진리에 맡긴 채 저절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 이후의 빨래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책에서 뽑은 글들을 옮긴 것이다. 모험 안전이란 십중팔구 미신이다. 자연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길게 보자면 위험을 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에 맞서려고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삶이란 ‘위험을 무릅쓴 모험’일 뿐, 그 외에 그 아무 것도 아니다. - 헬렌 캘러 공부 소크라테스는 사형 집행을 앞두고 감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동료 죄수가 시인 스테시코루스가 쓴 복잡한 노랫말을 흥얼거리고 있는 것을 들었다. 그는 동료 죄수에게 그 시의 내용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뭣 하려고?” 그 동료가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 가지라도 더 알고 죽으려고.” 이제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 사도 바울 억겁 선업을 쌓아도 일순간의 분노에 무너진다. - 산티데바 나는 절대 대중을 돌보지 않고, 개인들을 돌본다. 나는 한 번에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꼭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 마더 테레사 나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궁극적 일체성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한 사람이 영성을 얻으면 온 세계가 그것을 얻으며, 한 사람이 타락하면 온 세계가 그만큼 타락한다고 믿는다. - 간디 병들고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라. - 마더 테레사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지닌 것은 이처럼 열리고 부드러워진 가슴이다. - 초감 트룽파 지옥에 가기 싫거든, 일을 마치고 밤에 집으로 돌아오면 날마다 행주를 들고 춤을 춰라. 식구들이 잠을 깰까봐 걱정된다면 신발을 벗고 춰라. - 랍비 브랏츨라브의 나흐만 그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놓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이 세상에서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하게 될 가장 힘든 전쟁을 시작해서 그 싸움을 죽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 것을 뜻한다. - e. e. 커밍즈 삶은 수많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다. 이 작은 것들을 무시하면 삶은 아름답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견뎌내기 힘든 것이 될 것이다. - 메헤르 바바 때로는 자신이 측은하게 여겨질 때도 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위대한 바람에 실려 하늘을 가로지른다. - 오지브웨이 족 인디언 속담 가슴 속에다 ‘그 분’의 탄생을 위해 구유를 마련하면, 하나님은 또다시 지상의 아기로 태어나리라. - 앙겔루스 실레시우스 물맛 중국에 이런 우화가 있다. 한 청년이 마을의 우물가에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나무 두레박을 내려 물을 퍼서 한 손 한 손을 바꿔가며 밧줄을 천천히 끌어당겨 올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청년은 잠시 사라졌다가 도르레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는 그것을 노인에게 보여주면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가르쳐주었다. “보세요. 이렇게 밧줄을 도르레에 감고 손잡이를 당기면 쉽게 물을 길을 수가 있어요.” 노인은 그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이런 도구를 사용하면 내 마음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음에 꾀가 생기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더 이상 가슴을 쏟을 수가 없게 될 것이고, 팔목만이 그 일을 하고 있게 될 것이다. 내 온 몸과 가슴이 함께 일하지 않는다면 그 일에는 기쁨이 없을 것이다. 내 일에 기쁨이 없다면, 그 물맛은 어떠리라고 생각하느냐?” - <깨달음 이후 빨랫감> 행복 행복을 찾겠다는 노력만이 그것을 찾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것은 아무리 좇아다녀도 잡을 수 없는 무지개와도 같고, 개가 제 꼬리를 물려고 도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평화와 행복이 어떤 실제적인 사물이나 장소로서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언제나 거기에 있고 모든 순간 우리와 함께 한다.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애쓰다가 우리는 진만 다 뺀다. 꼭 쥔 손의 힘을 빼고 손바닥을 펴는 순간 무한한 공간이 거기에 있다. 그것은 열려 있고, 편안하며, 우리를 오라고 손짓한다. 이 탁 트임, 이 자유,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즐기라. 더 이상 아무 것도 찾지 말라. 이미 그대 집 안의 화덕 앞에 평화롭게 앉아 있는, 위대한 깨달음의 코끼리를 찾겠다고 무성한 밀림 속으로 들어가지 말라. - 겐둔 린포체 일상 에스키모 사냥꾼이 선교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나님이나 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라도 지옥으로 갑니까?” “아니요. 모르면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선교사가 대답했다. 그러자 에스키모는 천진하게 반문했다. “그렇다면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까?” -<깨달음 이후 빨랫감> 언제가 낮인가? 늙은 랍비가 제자들에게 거룩한 기도를 올리는 시간인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를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한 제자가 대답했다. “멀리 있는 짐승을 보고 그것이 개인지 양인지를 알 수 있을 때입니까?” “아니다.” 랍비가 대답했다. “손금을 분명히 볼 수 있게 되는 때입니까?” “멀리 있는 나무를 보고 그것이 무화과인지 배나무인지를 알 수 있는 때입니까?” “아니다.” 랍비는 번번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어떤 때입니까?” 제자가 캐물었다. “그것은 모든 남녀를 보고 그들이 너희의 형제요 자매임을 알 수 있는 때이다. 그 전까지는 여전히 밤이다.” - <깨달음 이후 빨랫감>
이 질그릇 속에 카비르 이 질그릇 속에 골짜기와 소나무 산들이, 그리고 골짜기와 소나무 산을 지은 이가 있네! 일곱 대양이 모두 그 안에 있고, 무수한 별들이 있네. 금을 시험하는 산(酸)이 있고, 보석을 감정하는 이가 있네. 또,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현(絃)에서 울려나오는 음악과, 모든 물의 원천이 있네. 그대 진실을 원한다면 내 알려주지 듣게, 친구여, 내 사랑하는 ‘거룩한 분’이 이 속에 계시다네. 대성당 한 사내가 유럽의 어느 거대한 공사장을 찾아갔다. 거기서는 많은 일꾼들이 근처에 있는 높은 건물을 지어 올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은 수백 년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그가 한 일꾼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지친 듯이 대답했다. “내 일은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서 갖다주는 일이요.” 사내는 다른 일꾼에게 가서 또 물어보았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나는 돌을 깎는 석공인데, 이 일로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있소.” 세 번째 일꾼에게 사내가 물어보자 같은 일을 하고 있던 그 일꾼은 즐거운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대성당을 짓고 있소.” 우리가 지구를 하나의 대성당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의 눈은 열리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에서 은밀한 행복을 찾아낼 수 있다. 모든 석공들이 큰 일에 기여하고 있었다. 다른 점은, 그것을 자신이 아느냐 하는 것이다. - <깨달음 이후 빨랫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