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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소몰이 소년
2화 회색 도시
3화 달님의 슬픔
4화 고향의 설음
5화 루즈-내츄럴 캔디
6화 낯선 만남-하나 그리고 열하나
7화 그녀, 또 다른 그녀
8화 그녀의 향기, 그녀의 아픔
9화 아아, 달님
10화 벼랑의 끝자락
11화 어머니의 끝섬
12화 작은 장구벌레의 우화(羽化)
13화 아담과 이브, 만개하다
14화 꽃잎 떨어지다
끝섬(EDGE ISLAND)
<12화 > 작은 장구벌레의 우화(羽化)
폭풍주의보가 발령되었다. 폭풍은 벌써 사흘째 여객선의 발을 묶어 놓았다. 태풍은 섬 전체를 온통 삼켜 버릴 듯 미친 듯이 달려와 무섭게 비바람을 뿌렸다. 잔잔하고 황홀하기기만 했던 항구가 피항선으로 홍수를 이루고, 선박에서 내린 뱃사람들이 사흘 내내 섬마을의 술집들을 모조리 점령하였다. 나 또한 그들처럼 폭풍주의보가 해제되기 전까지는 발이 묶여 있는 처지였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동안 내 마음도 줄곧 폭풍이었다.
그 뱃사람들 중 누군가는 내 할머니와 증조할머니의 남자, 그들의 후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그 후손도 조상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나 또한 그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마음속을 할퀴었다.
가지고 온 여비도 서서히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여인숙에 처박혀 두문불출 술만 마셨다. 그렇게 술만 마시다가 쓰러져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죽어 버렸으면 싶었다. 어머니가 생각나고, 유정숙과 은애와 숙희가 생각날 때마다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내게 술을 목구멍에 쏟아 붓게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밥보다 술을 더 많이 마시는 동안 내 마음은 형편없이 피폐해져 갔다. 마음속에는 이미 서러움보다는 유 씨나 리처드를 향한 노여움이 더 많이 웃자라 있었다. 유정숙을 방관한 것은 물론 내 어머니를 수렁에 빠뜨린 유 씨가 노엽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리처드가 혐오스러웠다. 넋 놓고 땅을 빼앗겼다는 무기력했던 은애 할아버지와 산사태 후유증으로 아픈 부인을 두고 외도를 한 숙희의 아버지를 만나 숙희의 슬픔이 무엇인지도 알려야 한다고 되뇌었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수없이 노여움을 곱씹으며 사흘 내내 술과 함께 바닥에 꼬꾸라지고 또 꼬꾸라지며 지냈다.
그날 밤 늦게 술에 절어 엎어져 있을 때 교회 목사가 여인숙으로 찾아왔다. 목사는 내게 어머니의 소식을 알려주었던 여신도와 함께였다. 술에 절어 있는 내 몰골을 보고 측은했던지 여신도는 동정어린 어조로 말했다.
“젊은 양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럴수록 더 힘을 내야죠.”
고개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누구에게든 보이고 싶지 않았던 초라한 반항이었다. 그러나 굳이 목사까지 동행하며 여신도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자못 궁금해졌다.
술병으로 어지럽던 자리를 대충 정리하자 목사는 조심스레 바닥에 앉았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유언으로 남겨 놓으신 것이 있습니다.”
뜻하지 않은 소식이었다. 갑자기 술이 번쩍 깨이며 동공이 열렸다. 전부 사라지고 없을 것만 같았던 어머니의 흔적이 남아 있다니 가슴이 복받쳤다. 유언이라니, 무언가 남겨 놓았다니, 어머니가! 여신도는 어머니에 대한 어떤 비밀이 있기에 목사까지 대동하고 나를 찾아왔는지 더욱 궁금했다.
“귤 밭의 소유권을 저희에게 맡기셨습니다. 10년 동안 아드님이 안 나타나면 교회 재산으로 헌납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아드님이 찾아오셨으니 주인에게 돌려 드려야죠.”
목사는 간결하게 결론부터 말했다.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졌다. 혼란스러웠으나 가슴은 벅차올랐다. 단순히 귤 밭이어서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땀 냄새와 체취가 녹아있는 곳을 내게 남겨놓았다는 것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절명의 벼랑 끝이라도 어머니의 아련한 냄새를 호흡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있는 곳이면 족했다. 울컥 응어리진 그리움이 복받쳐 눈물로 치받혔다.
“그래도 한 가지 확인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납득이 되도록 아드님임을 증명하셔야 할 텐데 어떻게 하죠?”
목사의 말에 퍼뜩 뇌리를 스친 것이 있었다. 민기가 정성스럽게 간직했다가 돌려주었던 보따리에 들어있던 얼룩진 가족사진이었다. 거문도에 내려오면서 어머니를 만나면 그 사진을 함께 보려고 소중하게 간직해두었던 것이었다. 가방을 주섬주섬 뒤져 사진을 찾아냈다.
“오래된 사진이군요!”
사진을 받아든 목사가 이리저리 돌려보며 나를 확인했다. 목사는 여신도에게도 확인하라는 듯 사진을 건네주었다. 사진을 확인한 여신도는 아들이 틀림없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목사가 말했다.
“아드님이 맞습니다. 귤 밭은 앞으로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 처리하죠. 구천 평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든 저희와 의논하십시오.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리겠습니다. 거문도로 오시게 되면 저희 교회에도 열심히 나오시구요.”
목사와 여신도는 나를 위해 기도까지 해주는 은혜를 베풀고 돌아갔다.
아버지가 교회를 싫어하게 된 원인은 어머니와는 무관했다. 하던 일을 접고 소장수를 하게 만든 사기꾼이 지독한 교회 신봉자였다. 작은 일 하나로 비롯된 아버지의 편협한 생각은 외골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틈에서 교회라고는 문 앞에도 가지 못했던 어머니의 마지막 안식처는 교회가 되어 주었다. 거문도의 목사와 여신도가 내게 특별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고 난 뒤 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꺼이꺼이 우는데 아버지처럼 쇳소리가 목구멍으로 튀어 올라왔다. 숙희에게 진정으로 사과하고 그녀와 함께 귤 밭으로 내려올 것이다. 숙희가 동의만 한다면 어머니의 뒤를 이어 귤 밭을 가꾸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치열한 회색 도시의 초라한 둥지를 버리고 광활한 바다를 벗 삼아 행복을 가꾸리라. 어머니의 음률을 내내 호흡하며 진정한 음률의 의미를 만끽하리라. 아아, 어머니! 나는 밤새 지쳐서 잠들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설움이 진정될 때까지 얼마를 그렇게 울었는지 모른다.
폭풍 나흘째 아침을 맞았다. 바람이 조금은 힘을 잃은 듯했다. 나흘씩 바다와 섬을 유린했으니 힘이 빠질 만도 한 일이었다. 아침 8시를 기해 폭풍이 해제된다고 하여 발이 묶였던 사람들이 하나 둘 선착장으로 몰려들었다. 비록 폭풍은 해제될 예정이라지만 바람은 완전히 잦아들지 않았고 파도 또한 여전히 거칠었다. 여객선에서는 폭풍이 완전히 가라앉은 후에 항해를 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앞서 바다로 뛰어든 화물선을 보고 용기를 냈는지 출항하기로 결정되었다.
며칠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승객들이 마침내 하나 둘 승선하기 시작했다. 더러는 아직 출항하기에는 거센 바람이라며 망설였고, 더러는 바쁜 일정이 있는지 빨리 출발하자고 채근하며 수선을 떨었다. 나는 바닥난 여비도 여비였지만 하루 빨리 상경하여 숙희를 만나고 싶은 조바심으로 승선을 택했다.
여객선은 앞서 출항한 화물선처럼 이윽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파도는 예상보다 거세었다. 여객선이 섬을 벗어나자 무지막지한 파도가 옆구리를 수없이 강타하기 시작했다. 그 물기둥의 위력은 3층 높이의 배를 훌쩍 뛰어 넘어 반대편 선실 창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였다. 생각보다 거친 파도의 위력에 놀란 선장과 갑판장이 한바탕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 시작했다. 출발하지 말자던 갑판장의 의견과 출발을 결행한 선장이 서로의 잘잘못을 탓하는 수위로 보아 결코 가볍게 볼 만만한 파도가 아닌 듯싶었다. 제멋대로 출렁이던 여객선의 뱃머리가 갑자기 하늘로 솟구쳤다. 선체가 45도로 치솟으며 여객선이 파도의 끝선에 올라탔다.
육중한 여객선까지 손쉽게 밀어올린 파도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하강했다. 그 파도의 속도보다 끝선에 올라탔던 여객선의 하강 속도가 더 느렸다. 여객선과 수면 사이에 커다란 공간이 생겼다. 갑자기 생겨난 허공의 높이만큼 여객선은 수직으로 낙하했다. 여객선의 앞뒤가 다시 45도로 뒤바뀌었다. 그 충격으로 천장에 있던 형광등이 선실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박살났다.
형광등의 파열음이 귀를 찢었다. 잔뜩 웅크리고 몸을 사리던 승객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선실은 단박에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도는 여객선의 뱃머리를 치솟게 하고 수직으로 팽개치기를 반복했다. 왼쪽 구석에 모여 있던 승객들이 오른쪽 구석으로 한꺼번에 처박히면서 남녀노소가 한바탕 엉켜버렸다. 낯선 남자의 아랫배에 처박힌 여자는 부끄러워 얼굴을 바닥에 찧었다. 구석 모서리까지 굴러가 오그라든 할머니는 비명조차도 턱에 걸려 버렸다. 아장아장 걷던 어린아이는 공처럼 바닥을 굴러가 처박혔다.
나는 가까스로 잡은 기둥을 뿌리라도 뽑을 듯 매달렸지만 몸은 이리저리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위험해진 여객선의 운명에 따라 승객들은 흔들리는 짐짝에 불과했다. 선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었다. 승객들이 하나 둘 배 속에 있는 오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여객선은 죽으나 사나 앞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 배가 지그재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파도를 90도로 부딪히며 항해하다가는 뒤집힐 위험이 있어 45도 각도로 항해하며 파도의 충격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되돌아가려고 배의 방향을 틀다가는 그대로 전복되어 물고기 밥이 되기 십상이라고 했다. 적어도 다음 정착지인 초도까지는 몇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나는 이대로 죽는구나, 생각했다. 여객선이 침몰하면 수백 명의 사람이 수장되어 언론에 대서특필될 것이다. 가족들이 구조본부로 몰려와 통곡하고 생존자 수색으로 며칠 내내 바다가 시끄러울 것이다. 하늘에는 헬기가 쉴 새 없이 날아다니고 군함까지 동원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를 대신하여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곧 잊혀 지겠지. 세월은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다만 숙희가 사망자 명단의 나를 발견하고는 조금이라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려준다면 덜 외로울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기대할 수 있는 초라한 전부였다.
여객선은 참으로 오랜 시간을 요동치며 항해했다. 나는 지독한 뱃멀미에 지쳐 마치 굼벵이처럼 몸을 웅크리며 점점 쪼그라들었다. 이미 쓴 물까지 모두 입으로 튀어 올라와 배 속이 텅 비어 버렸다. 똥물까지 치미는 기나긴 항해 끝에 다행히 배는 초도 항에 닿았다. 객선이 부두에 닿자 거센 비바람을 헤집고 광주리 아주머니들이 여지없이 몰려들었다. 여객선에서 일어났던 혼돈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하나라도 팔아야 생계가 이어지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나는 지독한 뱃멀미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았지만 궁색한 주머니를 털어 이것저것 꽤 많은 주전부리를 샀다.
잠시 쉬던 여객선은 다시 육지를 향해 출발했다. 멀미에 지친 몇몇 사람은 종착지까지 가는 것을 아예 포기하고 초도에 주저앉아 버렸다. 나는 광주리 아주머니들이 맨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팔고 남은 물건을 주섬주섬 정리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의 지친 모습에서 문득 어머니가 보여 떠나온 끝섬으로 차라리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폭풍을 헤치고 지나온 어머니의 끝섬은 비안개에 파묻혀 이미 보이지가 않았다. 끝섬은 자욱한 안개 속에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꿋꿋하게 버티고 있을 터였다.
육지에 가까워질수록 위세는 약해졌지만 파도는 여전히 배를 뒤흔들었다. 여객선은 그렇게 평소보다 긴, 무려 열 시간을 파도에 시달리며 치솟고 추락하고 뒤뚱거리다가 항구에 도착했다. 여수항의 하늘은 바다와는 달리 언제 폭풍이 있었냐는 듯 질투 날 정도로 맑게 개어 있었다. 이미 태풍의 끝자락까지 육지에 상륙하여 생을 마감하고 쉴 곳을 찾아 북상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폭풍이 모든 찌꺼기를 훑고 지나간 하늘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청명했다.
나는 몸과 마음이 지쳐 부두에 내리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숙희를 생각한다면 쓰디쓴 입맛과 현기증에 비틀대더라도 여객선에서 반드시 내려야만 했다. 땅이 꺼지도록 심호흡을 하며 하선하는 승객들 틈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발끝이 땅에 닿자 예상치 못했던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신선했다. 상큼할 뿐만 아니라 박하사탕을 입에 문 것처럼 머리가 환하게 고요해졌다. 땅 냄새를 흡입하고는 거짓말처럼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에 스스로도 놀랄 뿐이었다. 마치 몸속의 엄청나던 응어리가 빠져나간 듯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지고 텅 비어 어질어질하던 몸 상태까지 갑자기 정갈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 몸속의 찌꺼기가 모두 배출되고 태초의 흙냄새로 가득 채워진 신선한 기분은 마치 하늘로 날아오를 듯 신비한 기분이었다. 에덴동산에 떨어진 아담의 기분이 이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깨를 뒤로 젖혀 맘껏 하늘을 빨아들였다. 여기저기 붙어 있는 찌꺼기를 툴툴 털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갑자기 식욕이 당기기 시작하고 갈증이 복받쳤다. 울렁이던 배 속도 잠잠해지고 정신이 맑아져 숙희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욕구마저 솟구쳤다. 비로소 그녀에게 무릎 꿇고 엉엉 통곡이라도 하며 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그녀가 용서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포용하고 편안해진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는 그녀를 기다릴 수도 기다려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압박해 왔다.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숙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 일은 족히 넘은 시간인 듯했다.
전화는 진 사장이 직접 받았다. 끈적끈적한 진 사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를 못마땅해 하는 뉘앙스였다. 그러나 숙희 앞에서 그런 일로 괘념할 이유가 없었다.
“사장님, 숙희 씨 좀 바꿔 주세요!”
내 목소리는 전과 다르게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미스터 강, 미스 정 만난 것 아니었어?”
“예에? 무슨 말씀이신지?”
“이틀 전에 자네 만나러 간다고 했네. 무슨 끝섬인가에 간다고 해서 휴가 보냈는데, 길이 어긋났나?”
내가 놀라서 물었다.
“끝섬이라뇨?”
“전국이 며칠 내내 태풍이 올라온다고 어수선했는데, 갑자기 자네 사무실을 다녀오고는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휴가를 내달라는 거야. 자네 만나러 간다고 하면서 무슨 섬이라고 했는데……. 끝섬이니 뭐니 하면서 말이야. 미스 정이 자네를 너무 사랑하는 것 같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진 사장의 말을 유추해 보면 숙희가 나를 찾아 사무실까지 갔다. 사무실을 찾아가 내 전화를 받은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끝섬으로 내려온 모양이다. 태풍 때문에 상경 일정이 늦어져 거문도에 있다는 전화를 사무실에 해 놓은 것이 그녀에게 끝섬의 위치를 알게 해준 듯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숙희의 노여움이 풀린 것 같다는 추측이었다. 그렇게 토라진 후 그녀 또한 가슴앓이를 했다는 반증이었다. 숙희가 내 사무실을 찾아가 끝섬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비로소 그동안의 체증이 명경처럼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이미 여객선을 타고 거문도로 떠났다면 길이 어긋나도 한참을 어긋나 있을 터였다. 급히 여객터미널 사무실을 찾았다. 여객선 승선자 명단 중에 숙희의 이름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게 급했다.
“아저씨, 어제나 오늘 중에 거문도로 떠난 여객선이 있었나요?”
“어제, 오늘?”
“예에, 승선자 중에 사람 좀 찾으려구요!”
“며칠째 거문도는 배가 뜨지 않았어. 거문도에서 방금 들어온 배가 하나 있는데! 미친놈들, 그 태풍에 배를 띄워. 큰일 날 뻔했어! 거문도는 태풍이 끝났으니까 내일은 배가 뜰 거야!”
터미널 사무원은 태풍을 무릅쓰고 거문도에서 출발했던 여객선이 무사히 도착한 것만이 천만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답해 주었다. 나 또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거문도행 여객선이 며칠째 뜨지 않았다면 다행히 숙희는 거문도로 떠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숙희는 지금 여수 어디쯤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연락할 길은 막연했다.
다시 진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숙희에게 전화라도 오면 내 근황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사장님, 저 미스터 강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다시 전화 드렸어요.”
“어, 미스터 강 잠깐 기다려 봐. 미스 정, 방금 전에 들어왔네. 자네들은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나 보군!”
진 사장이 숙희를 바꿔주었다. 나는 다시 또 흥분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그녀가 다시 내 전화를 받게 되었는지 어리둥절했다. 그녀와 함께 있었던 그 어느 과거보다도 가슴이 뛰었다. 내 심장은 바다를 건너온 폭풍보다도 거세게 흔들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친 듯 쉬어 있었으나 나를 몹시 기다린 목소리였다.
“왜 이렇게 늦게 전화했어, 많이 걱정 했잖아.”
숙희의 목소리는 애절했다. 그동안 있었던 반목의 과정을 모두 무시한 채 대뜸 힐책하는 목소리로 보아 그녀는 나를 아프도록 용서하는 것 같았다.
“숙희 씨, 정말 미안해!”
울컥 치미는 침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아니야, 내가 더 미안했어!”
“그런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노수 씨 만나러 사무실에 찾아갔었어. 거기서 얘기 듣고 여수까지는 갔었는데, 태풍 때문에 끝섬에는 못 갔어. 광주 집에 들렀다가 방금 올라왔어. 그런데 지금 어디야?"
“여수.”
“태풍 때문에 배가 없다던데 어떻게 나왔어?”
“태풍 뚫고 겨우겨우 나왔어. 지독한 풍랑이었어.”
“라디오 들어서 알고 있었어. 그런데 어머니는 잘 만났어?”
“…….”
“왜 무슨 일 있었어?”
“…보름 전에 돌아가셨대.”
내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고 그녀는 금방 침울해진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 그녀가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노수 씨, 그래도 기운을 내. 조심해서 올라 오구.”
“그래, 올라가서 바로 연락할게. 할 얘기가 많아!”
숙희는 지독한 응어리가 빠져나간 내 마음 고요한 곳에 다시 깊숙이 내려와 앉았다. 그동안 유정숙의 일로 촉발된 그녀의 마음을 나는 감히 어쩌지 못했다. 그녀는 내가 먼저 어찌하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아픈 마음에 차마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숙희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 울컥했다.
또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시도 때도 없이 울컥울컥 치밀고 올라오는 어머니의 그리움은 앞으로도 얼마간 나를 더 울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길게 그리움을 들이키고 홍역을 치르며 건너온 바다를 뒤돌아보았다. 어머니의 끝섬을 품은 남해 바다는 여전히 일렁이며 변함없이 춤추고 있었다.
저녁 8시에 여수를 출발하는 용산 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슬픈 더듬이를 한 열차는 늘 무심했다. 더듬이 하나만을 의지한 채 캄캄한 미지의 땅을 헤집고 나가는 몸짓이 오늘따라 유독 힘겨워보였다. 바다를 핥아 먹어 눈이 파랗게 변해 버린 열차는 간이역마다 승객을 모조리 삼키며 뱉어내기를 반복했다. 완행열차는 언제나처럼 사람들로 북적여 앉을 자리가 없었다. 나는 겨우 출입문 옆 의자 밑의 틈바구니를 찾아 두더지처럼 숨었다. 음산하고 컴컴한 그 틈새에 쪼그리고 누워 밤새 뒤척였다. 열차는 새벽 6시가 되어서야 겨우 용산역에 더듬이를 내려놓았다.
“아저씨, 잠깐 쉬었다 가요.”
겨드랑이에 팔짱을 낀 낯선 여자들은 처음 서울에 상경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용산역’이라는 수은등이 새벽잠이 덜 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회색 도시의 첫날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난생 처음 보았던 고층 건물의 네온사인, 버스를 기다리던 교복의 여학생, 희미해진 가로등을 떠받들고 있던 그날의 행인은 없었다. 에나멜이 벗겨진 양철 표지판은 아직도 덩그렇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숙희에게 전화를 했으나 출근 전이라는 말만 들었다. 오후에 또 숙희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역시 출근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걱정되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그녀가 지독한 몸살에 걸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숙희 씨, 많이 아픈 거야? 목소리가 왜 그래?”
“으응, 온몸이 꼼짝을 못하겠어.”
“안 되겠다. 내가 지금 집으로 갈게.”
“아니야. 여동생이 회사 안 나가고 옆에서 돌봐 주고 있어. 내일이면 좋아지겠지.”
“미안해. 나 때문에…….”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보고 싶어서 내려갔는데 뭘.”
“그동안 많이 보고 싶었어!”
“그랬으면서 왜 여태 전화는 못했어?”
“숙희 씨가 너무 화가 난 것 같아서. 화 풀릴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 염치가 없어서…….”
“바보 같기는……. 그동안 전화 많이 기다렸잖아. 내일은 출근할 테니 사무실로 전화해 줘.”
“그래, 몸 잘 추스르고 내일 봐.”
전화를 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풍이 쓸고 간 서울의 하늘은 여수의 하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숙희의 동그란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수줍은 듯 새침하게 웃고 있었다.
유 씨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대관절 어머니와 유 씨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한 가족을 수렁에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들어야 했다. 진실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혀야 했다. 또한 유정숙이 유 씨에게 하지 못하고 떠난 이야기를 모두 전해 딸이 무엇을 괴로워했는지도 말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유정숙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그녀가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미소 지어줄 것 같았다.
저녁이 되어 유 씨 집을 찾아갔다. 유 씨는 이미 술에 포로가 되어 있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흘기어 보았을 뿐 알아보지도 못했다. 유 씨의 눈두덩은 퉁퉁 부어 검게 변색되어 있었고, 초점 잃은 시선은 허공을 헤매며 맴돌고 있었다.
“아저씨, 저 알아 보시겠어요?”
유 씨는 턱을 길게 내밀며 억지로 나를 확인하려 애썼다. 그러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모르겠다고 시치미를 떼듯 나를 등지고 앉았다. 황당하여 말문이 막혀 버렸다. 유 씨는 나를 알아보고도 굳이 외면하는 것일까! 여동생이 건넛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유 씨와 더는 부딪히지 않게 하려는 의도인 듯싶었다. 여동생이 조용조용 말했다.
“요즘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술이에요. 언니가 그렇게 떠난 이후로는 더 심해졌어요. 갑자기 치매까지 왔나 봐요. 가끔 제 정신으로 돌아올 때 빼고 이제는 아들딸도 못 알아봐요. 저러다가 꼭 죽을 것만 같아 걱정이에요.”
여동생은 유 씨의 상태를 소상하게 말해 주었다. 가끔 제정신이 돌아올 때면 유정숙의 일로 몹시 괴로워한다고 여동생이 전했다. 딸의 죽음이 오로지 자신의 잘못으로 비롯된 일이라고 자책하고 있다고 했다. 유 씨만이 아니라 형제자매 모두 유정숙을 죽음으로 내몰았음을 인정한다고 했다. 언니의 희생으로 그동안 편안하게 지냈던 것이 죄스럽다며 여동생은 눈물을 보였다.
더 이상 그들에게 유정숙의 슬픔을 말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정숙이 리처드와 살면서 무엇을 괴로워했는지 이제 와서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유정숙의 슬픔은 나 혼자 간직해야 할 몫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모든 것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어야만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서러움만은 어디에서 잘못되기 시작했는지 반드시 밝혀내야 했다. 이대로 묻어둘 수는 없었다. 유 씨가 제 정신이 아니라면 유정숙의 어머니에게라도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출타 중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의문투성이인 유 씨를 뒤로 하고 집을 나와야 했다.
유 씨의 건강 상태로 보아 오늘이 유 씨와의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저씨! 다음에 또 올게요!”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맥 빠진 마음으로 방문을 닫았다. 하지만 갑자기 괴성과 함께 유 씨의 목소리가 닫힌 문틈으로 튀어나왔다.
“이 눔아, 가긴 어딜 가? 술이나 사와!”
둔탁한 쇠망치로 얻어맞아 머리가 띵해진 기분이었다. 유 씨의 치매 증세는 가끔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 아들딸을 알아본다고 했다. 소리친 것을 보면 유 씨는 분명 나를 알아보고도 외면했을 뿐이지 제정신임이 분명했다. 다시 방문을 열었다.
“여긴 왜 온 게야?”
유 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 씨는 아직도 내가 유정숙을 알고 지내면서도 비밀로 했던 지난날에 대한 노여움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와 유 씨의 관계를 확인해야 했다.
“끝섬으로 어머니를 찾아갔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요. 보름 전에 돌아가셨다는 말만 들었지요. 도대체 아저씨와 무슨 관계였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런 일들이 벌어진 거예요. 말씀해 주세요!”
나의 목소리는 벌써 울먹이고 있었다. 유 씨는 땅이 꺼지도록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열려진 문밖에는 여동생이 서 있었다. 여동생은 뜻밖의 대화에 놀랐는지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부모들끼리 관계가 오래 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젠 까맣게 지난 일이여. 새삼 들춰내서 뭐 해. 마음만 아픈 일이지!”
“그래도 전 알아야겠어요. 이대로는 억울하고 서러워서 도저히 못 살겠어요!”
마침내 나는 흐느끼며 울어 버렸다.
“자네 아버지하고 결혼하기 전에 어머니하고 결혼 얘기가 먼저 나온 건 나였네. 그것 뿐이여. 그것을 아버지가 알고 오해한 것이여. 니 애비 똥고집이 오죽 심하냐? 아무 일도 아닌
일이 크게 벌어진 게여. 우라질 눔의 팔자들…….”
유 씨의 목소리에는 분노까지 서려 흘렀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끝까지 함구하지 왜 그랬어요. 말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니에요!”
나는 방바닥에 엎어져 통곡하고 말았다. 온갖 서러움과 어처구니없는 분노가 복받쳐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 그건 내 실수였어. 그래도 그렇지, 그딴 일을 가지고 그 지경으로 만든 니 애비 놈이 더 못난 놈이여!”
유 씨는 오히려 아버지를 원망했다. 나는 더는 해야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잃었다. 아버지의 평소 성정으로 보아 유 씨 입장에서는 그 어떤 개입도 엄두 낼 수 없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유 씨도 아버지로 인한 피해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눔아, 울긴 왜 울어. 사내자식이……. 그래, 니 애미 무덤은 잘 있드냐?”
유 씨는 되레 어머니의 마지막 소식을 듣고 싶어 했다. 그것은 아직 어머니에 대하여 잊지 못하는 것이 남아 있는 유 씨의 연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개만을 끄덕여 물음에 답했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는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고 유 씨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안녕히 계세요. 술 좀 덜 하시고 이제 모두 잊어버리세요. 훌훌 털어버려야지 어쩌겠습니까.”
나는 오히려 유 씨를 위로하고 집을 나왔다. 미아리 산 100번지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야경은 서글플 정도로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저마다 하늘을 향해 허공으로 올려 보내는 땅 아래의 불빛이 애처로웠다. 거문도의 밤 항구도 그랬다. 아름다움이 넘쳐흘러 차라리 슬픔이었던 어머니의 밤빛도 그러했다.
말없이 대문 밖까지 나온 여동생은 고개만을 끄덕이며 물끄러미 나를 배웅했다. 터덜터덜 벼랑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내 눈 속에 유정숙 같은 여동생이 있었다. 여동생은, 아니 유정숙은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녀린 나무처럼 어둠 속에 힘겹게 버티고 서 있었다.
이튿날 짧지만 긴 휴가를 끝내고 출근을 했다. 폭풍 때문에 미리 전화를 하고 늦게 출근한 탓에 남모르는 화려한 휴가를 다녀온 것으로 여기는 직원들은 점심이라도 사라며 은근히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오후에 민기의 전화를 받았다. 민기는 며칠 동안 끝섬에 내려간 소식이 궁금해 몇 번씩 확인 전화를 했다고 했다. 폭풍 소식을 들으며 짐작은 했었지만 마냥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 어머니는 만났니?”
“못 만났어.”
“아니, 왜?”
“……보름 전에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셨어.”
어머니의 소식을 들은 민기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나를 위로했다.
“충주에 다녀가셨을 때 많이 아파 보였다더니……. 그래, 산소는 잘 모셔져 있었구?”
“귤 밭 양지쪽에.”
“다행이다. 그래도 힘내라. 이제 모든 게 확인되었으니 마음 편하게 생각해야지 어쩌겠니. 그리고 나 다음 달에 군대 간다.”
“군대?”
“응, 며칠 전에 영장 받았어!”
“사내라면 가야지.”
“너도 지난번에 같이 신검 받았으니까 아마 곧 영장 나올 것 같다. 내가 군대 가고 나면 편지 받을 사람 없으니 주소를 서울로 옮기는 게 좋겠어!”
민기의 입대라는 말에 나는 불현듯 탈출구를 생각했다. 어차피 거쳐야 할 입대라면 마음이 복잡하고 힘들 때 입대하여 정신없이 보낸다면 잊어야 할 일들도 말끔하게 잊을 수 있을 듯싶었다. 숙희가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의 힘든 마음을 추스르는 데 그만한 선택은 없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귤 밭 문제도 그렇고 숙희와 입대에 대한 의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알았어. 며칠 있다가 내려갈게. 송별회 해야지.”
나는 민기에게 송별회를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곧이어 숙희에게 전화를 걸어 퇴근 후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끝섬에서 올라와 아직 만나지 못한 탓에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갑작스런 회식이 잡혔다. 리처드의 생일에 맞춰 달님의 사건으로 우울해진 사무실 분위기를 전환해 보고자 벌이는 회식이라고 했다.
“숙희 씨, 오늘 약속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까 봐?”
“왜?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사무실에서 회식이 있다고 그러네!”
“할 수 없지 뭐. 신경 쓰지 말고 내일 전화 줘!”
그녀와의 재회를 가로막고 질투하는 사건들이 꽤나 번잡스럽게 내 주변에 도사리고 있었다. 회식은 비교적 화려한 호텔에서 뷔페로 진행되었다. 나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어색한 장소였다. 직원들은 모처럼만에 찾아온 포식의 기회라며 좋아했고, 흘깃 리처드를 쳐다보니 얼굴은 윤기가 흐르고 근심 하나 없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는 황소만 한 덩치에 어울리게 엄청난 양의 음식을 앞에 놓고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또한 언제 달님의 사건이 있었느냐는 듯 흥겨운 얼굴이었다. 그런 리처드가 그렇게 가증스러울 수가 없었다.
리처드를 보니 술이 당겼다. 다시 폭음을 시작했다. 끝섬에 다녀오는 동안 급격한 체력의 변화가 있었는지 취기가 빠르게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옆자리에 앉은 직원은 적당히 마시라며 나를 걱정해 주었다.
내가 술의 힘으로 괴로움을 잊으려 허우적댈 때 한 여자 손님이 뷔페에 등장했다. 훤칠한 키에 화려한 옷차림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보석 치장으로 보아 과시욕이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유정숙의 자리를 꿰차고 당당하게 회식 자리에 나타난 전화 속의 이태원 여자였다. 오래전 명동의 스탠드바에서 보았던 바로 그 여자였다. 회식 자리는 그 여자가 나타날 자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리처드와 여자의 생각은 주변의 시선이나 체면과는 무관한 듯했다. 리처드는 공공연하게 여자를 직원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 뻔뻔함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쇠똥을 치우며 땀 흘리던 뽀얀 얼굴을 화장기에 찌들게 하고, 간호사가 되고 싶다던 소박한 꿈을 자살로 얼룩지게 한, 그런 장본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희희낙락이었다. 아니, 그들의 행동으로 보아 유정숙은 이미 먼 옛날의 흘러간 작은 사건으로 사라졌을 뿐이었다. 울컥 역겨움과 함께 구토가 치받쳐 급히 화장실로 뛰어갔다. 변기에 쏟아진 호사스런 내용물은 흩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지독한 토악질은 콧물이 눈물이 되고, 눈물이 콧물이 되어 서러움과 뒤섞여 나왔다. 변기를 부여잡고 지친 몸을 지탱하며 더러운 내용물을 모두 토해내는 동안, 구토의 끝에는 여수의 흙냄새 같은 것이 기다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되도록 많이 배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비워내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한참 후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벽을 더듬고 일어섰다. 그리고 비틀대며 화장실 문을 나서자 소변보는 일을 끝낸 이들이 미간을 찡그리고 슬금슬금 내 주위를 비켜가며 조소를 보냈다. 그들 중에는 아랫도리를 잡고 소변기에 물줄기를 배설하는 리처드도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처럼 낀 리처드의 심볼을 보니 그의 침대에서 보았던 잡지가 연상되었다. 충격적이었던 체위와 사진속의 나체 환영들이 내 심볼을 일으켜 세웠다. 울컥 솟구친 증오와 함께 순식간에 불거진 심볼이 사타구니에 텐트를 쳤다.
리처드는 나의 행색을 힐끗 쳐다보고는 조소를 보냈다.
“……리처어드!”
내가 꼬부라지는 혓소리로 리처드의 이름을 불렀다. 리처드는 심볼을 털며 지퍼를 올리고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에 몇 마디 단어로는 의사소통을 했지만 정확한 대화가 통하지 않아 임 실장이나 전무가 통역을 하던 터라 리처드는 무슨 엉뚱한 일인가 싶은 표정이었다.
“리처드, 투데이 이즈 마이 스톱 컴퍼니(Today is my stop company).”
“와이?”
리처드가 내 말을 알아듣고 이유를 물었다. 회사를 그만 두겠다는 단어 조합의 뜻을 그가 알아차린 것이다.
“넥스트 먼스리 마이 솔져(Next monthly my soldier).”
리처드에게 뜬금없이 다음 달에 군대를 간다고 말했다. 민기의 입영 소식을 듣고 숙희와 의논하여 입대할 생각이었지만 나도 왜 그 말이 불쑥 튀어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것도 리처드 앞에서 다음 달에 군에 간다는 말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그것은 지친 회색 도시에서의 탈출을 꾀하는 일종의 반란이었고. 유정숙을 잊고, 어머니를 잊고, 잠시 모든 현실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리처드에게 어떤 형태로든 유정숙의 분노를 피력하고 싶었다고 하는 것이 정답인지도 몰랐다.
리처드가 잘 다녀오라는 뜻으로 악수를 청했다. 누런 털이 숭숭 엉켜 있는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었을 때 나는 또 황소를 보았다. 리처드의 손등은 언제나 우시장의 황소를 연상케 했다. 유정숙이 지긋지긋해서 도망치고 싶었던 황소, 내 손아귀를 뿌리치고 달아난 황소, 민기의 발목을 잡고 있는 우시장의 황소, 유 씨의 가슴에 묻은 비루먹은 황소, 아버지의 절규를 삼켜버린 황소…….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랫도리 사타구니로부터 솟구치는 힘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등까지 치밀어 올라온 힘은 다시 힘껏 움켜쥔 주먹으로 쏠렸다. 그리고 주먹은 리처드의 얼굴을 향해 뛰어오르며 사정없이 날아갔다. 그것은 나 자신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엄청난 힘이었다.
황소가 화장실 바닥에 쓰러졌다. 타일 바닥에 널브러진 리처드의 콧구멍에서 금방 붉은 피가 흘렀다. 붉은 피는 타일 사이의 골진 틈새로 스며들며 소변들을 보고 털다가 떨어진 오줌 방울들과 융합되었다. 날벼락을 당한 황소는 일어나려 한두 번 버둥대었지만 비틀대며 다시 쓰러지고 쉽게 일어나지를 못했다. 갑자기 벌어진 화장실의 신기한 사건 앞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내 작은 주먹에 황소 같은 리처드가 쓰러진 좀처럼 보기 힘든 진기한 광경에 사람들은 놀란 듯했다. 한편에서는 키득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뽀얀 살결에 피둥피둥 살이 찐 하마 같은 리처드가 버둥거리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기막힌 구경거리였다.
그렇게 쓰러진 리처드를 보고 내가 더 놀랐다. 평소 리처드를 혼내주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어디서부터 이 일을 수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로부터 되도록 멀리 도망치기 위해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대단한 취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쏜살같이 내달려 호텔 밖으로 빠져나왔다. 잠시 가쁜 숨을 가다듬고 거친 호흡을 허공에 뱉어 버렸다. 불안한 마음이 회오리처럼 요동쳤다. 숙희에게 공중전화를 걸었다.
“숙희 씨, 나 지금 일 저질렀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무슨 일을 어떻게 저질렀는데?”
“리처드를 혼내줬어. 내 주먹에 코피가 터지고 화장실 바닥에 널브러진 것을 보고 무작정 도망 나왔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 회식 있다고 했잖아. 혼내줬다니 무슨 말이야?”
“언제 한 번 멋지게 혼내주고 싶었거든.”
“그러지 말고 지금 우리 집 근처로 와. 만나서 이야기 해.”
나는 택시를 타고 그녀의 집 근처로 갔다. 이미 퇴근한 숙희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집 앞까지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며 아프게 떠났던 그녀를 몇 달 만에 다시 만나는 만남치고는 너무도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재회였다. 숱하게 할퀴고 자책하며 꿈꾸어 왔던 재회의 그리움은 리처드를 응징하고 난 두려움에 묻혀 버렸다.
“어떻게 된 거야. 어머, 노수 씨 손에 이 피는 또 뭐야?”
그녀의 말에 손등을 보았다. 나는 그제야 손에 피가 묻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옷에도 몇 군데 핏방울이 튀어 있었다. 비록 한 방이었지만 리처드를 된통 세게 때린 모양이었다.
“회사 사장, 리처드를 혼내주고 싶었어. 괜찮을 거야. 세게 한 방 날렸지만!”
나는 용기를 내기 위해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리처드를 왜 혼내줘? 아직도 죽은 그 여자한테 미련 있는 거야?”
의외의 반응이었다. 아직 털어버리지 못한 유정숙에 대한 연민이 은연 중 드러난 것 같아 움찔 놀랐다. 유정숙에 대한 잔영이 멀어지고 작아지는 만큼 숙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었다. 변명을 하자면 유정숙의 자살 이후 숙희는 그럴 기회조차 내게 안 주지 않았던가!
“이제 잊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약속해.”
“믿을게 그럼. 우선 피부터 닦아야겠어.”
리처드의 망령을 아예 떨쳐 버려야 했다. 아니 유정숙을 먼저 지워야 하는 것인지도…….
“안 되겠어. 차라리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어. 밖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숙희가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는 물수건과 추리닝 한 벌을 가지고 나왔다.
“그런데 어디서 갈아입지?”
그녀가 불안에 떨며 말했다. 내 얼굴을 빤히 보며 말하는 동그란 눈동자가 어둠 속에 빛났다. 사방을 훑어본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눈길이 멈춰진 곳이 있었다.‘여관’이라는 네온등이 유독 커다랗게 눈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두말없이 그곳으로 두더지처럼 숨듯 뛰어갔다.
“노수 씨, 빨리 씻고 옷 갈아입어.”
숙희가 옷을 건네주었다. 욕실로 들어온 나는 목욕을 시작했다. 토악질로 뽑아 올린 알콜이 체내에서 입 밖으로 한꺼번에 빠져 나간 탓일까. 언제 술에 절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은 이미 멀쩡해져 있었다. 온몸에 비누칠을 하며 미끄러운 손이 심볼 가까이 이르자 심볼에 힘이 쏠리고 갑자기 우람해지기 시작했다. 심볼은 유정숙을 업었을 때도 우람했었고, 리처드를 혼내주었을 때도 우람했었다. 나이트클럽에서 밀착되었던 숙희의 앞가슴을 생각하던 목욕탕에서도 심볼은 역시 솟아올랐었다. 하물며 욕실 밖에 숙희가 있지 않은가! 녀석은 기회가 되면 대책 없이 불거지고 사건을 저지르며 독립군처럼 움직거렸다.
목욕을 끝내고 마침내 옷을 갈아입었다. 광주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숙희 남동생이 누나 집을 방문하면 입는 옷인 듯했다. 심볼이 가라앉기를 한참 동안 기다렸다. 녀석을 애써 진정시키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숙희는 침대 옆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씻고 나오는 나를 부끄러운 듯 외면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숙희의 반대쪽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나 그녀와 나는 갑자기 만들어진 방 안 환경이 어색하고 낯설어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꼴이 되고 말았다. 리처드에게 왜 응징을 자행했는지, 끝섬에서의 일은 어떠했는지, 군 입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귤 밭에서의 미래는 동의하는지, 그녀에게 할 말은 너무도 많았지만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그녀 또한 내 말을 억지로 유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관방이기 때문인지 쉽게 그녀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같은 마음을 서로가 느끼고 있으면서 눈치만 살피던 시간이 얼마간 흘렀다. 슬금슬금 엉덩이를 끌며 숙희에게 다가간 나는 살며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입맞춤을 했다. 내 입술이 닿는 순간 그녀의 입술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개화되기 시작했다. 포도 맛이고 능금 맛이었다. 언제나 과일 맛을 느끼게 하는 그녀의 입술은 순백의 도화지였다.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려고 준비했던 미술시간의 하얀 도화지였다. 도화지에서는 포도 맛, 능금 맛이 났다.
내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아 돌았다. 한 몸이 되었다. 또 다른 팔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밀어 넣은 혀끝의 감촉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부드러운 혀의 감촉이 이번에는 잘 익은 복숭아 맛 그대로였다. 도대체 그녀의 입술은 몇 가지 과일 향기를 품고 있는지 아찔해졌다. 포도도 능금도 복숭아도 깨물고 싶은 그녀의 향기였다.
그녀를 바닥에 뉘였다. 그녀는 아무런 저항 없이 내 손길이 가는대로 몸을 꿈틀거렸다. 이윽고 그녀의 옷이 하나씩 벗겨졌다. 하얀 목덜미가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내 입술은 그녀의 귓불을 타고 목덜미로 미끄러졌다. 짜릿한 전율이었다. 몸은 이미 전기에 감전된 지 오래였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꽃잎을 다시 한 겹 벗겼다. 숨겨놓은 뽀얀 속살이 수줍은 얼굴로 살포시 눈을 흘기었다. 그녀의 가슴은 연보라색 꽃송이 같은 브래지어 속에 부끄러운 듯 숨어 있었다. 나는 꽃을 찾는 꿀벌처럼 수국꽃송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꽃송이는 따뜻했다. 꽃송이를 한 겹 또 벗겼다. 부끄러워 잔뜩 웅크렸던, 아직은 덜 익어 탱탱한 복숭아 하나가 입술에 닿았다. 치명적인 감촉에 빨려 들어갔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전율이 오장육부사지 칠천마디에 소스라쳤다.
그녀가 몸을 비틀고 돌아누우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우리, 결혼하고 이러면 안 돼?”
그녀의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가느다란 입술의 떨림이 내 심장 깊은 심연까지 전해졌다. 그래, 그래야만 했다. 누구보다도 내가 먼저 그녀를 아끼고 지켜주어야 할 일이었다. 그 마음이 나를 받아들이려 하는 마음보다 더 예뻤다. 그녀에게 옷을 입혀주었다. 그리고 여러 번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는 다시 꼭 껴안아 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껴안고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늦었는데 집에 들어가자. 내가 집까지 바래다주고 올게.”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숙희가 옷차림을 여미며 머리를 가다듬었다. 그녀는 피 묻은 내 옷을 빨겠다며 주섬주섬 챙기고 다소곳이 나를 따라 나섰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통행금지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지나는 행인들과 차량들도 거의 제 둥지로 들어갔는지 거리는 공허할 정도로 한산해져 있었다.
“오늘, 지켜줘서, 고마워.”
그녀가 내 손을 살며시 잡고 말의 마디마디를 끊으며 말했다. 그녀의 몸과 마음을 존중하므로 얻어진 값진 신뢰의 표현이었다. 그녀에게 심어준 믿음도 믿음이었지만 쉽지않은 사내의 본능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나 스스로에게도 감동적이었다. 그녀의 손은 아직도 따뜻했다. 그녀와의 지난 시간들 중 그 어느 순간보다도 뿌듯한 온기였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갑자기 잊고 있었던 귤 밭이 생각났다.
“참, 정신이 없어서 아직 말하지 못한 게 있어.”
“무슨 일인데?”
“끝섬에 어머니가 남겨 놓은 귤 밭이 있어.”
“어머니 일은 정말 안됐어. 그런데 귤 밭이라니 무슨 귤 밭?”
“응,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남기신다고 유언을 하셨어.”
숙희는 많이 놀랐는지 한동안 말을 잊은 듯했다. 나는 어머니가 남겨 놓은 귤 밭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숙희는 다소곳이 듣고는 일간 함께 끝섬에 내려가자고 했다. 그리고 끝섬을 다녀오는 길에 그녀의 아버지에게 인사도 드릴 겸 광주에도 들리자고 했다. 근래에 부쩍 학생운동 가담이 잦아진 남동생이 걱정 된다던 아버지의 전화를 받아 염려스럽다고 했다. 그런 마음씨가 또 한 번 나를 감동하게 만들었다. 숙희가 사랑스러웠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웠다. 진정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 위에만 머물다가 마음 깊숙이 상처만 남았다. 그것은 어쩌면 어머니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의 산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숙희가 있었다. 명랑하던 그녀에게서 다소곳한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모습에서는 이제 유정숙도 김은애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모습이 교차되며 숙희 그대로의 소박한 아름다움만이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이제는 목말랐던 세월을 묻고 귀한 만남으로 이어가리라. 누구든 사랑하지 못할 것 같아 차라리 서러움이었던 고통을 가다듬고 비밀보다 진한 사랑을 엮어 가리라. 그리하여 꿈꾸기만 했던 은빛 날개를 단 미래를 항해하리라. 마음이 가난했던 슬픔에서 혼자 치열했던 그리움 또한 맘껏 토해내리라.
나는 그녀의 허리를 더욱 힘껏 얼싸안았다. 그리고 마침내 프러포즈를 했다.
“사실 난 숙희 씨와 끝섬에 가서 살고 싶어.”
숙희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의 의미를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침묵은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숙희 씨, 사랑해! 정말 보고 싶었어!”
“나도, 노수 씨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열심히 노력할게.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을게!”
“나도.”
“이제는, 정말 숙희 씨만 사랑할게!”
숙희는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따뜻한 온기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녀의 온기는 물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빠르게 스며들며 번져갔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공습경보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를 활보했다. 자동차는 물론 사람도 모두 숨어버린 16차선 넓은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나갔다. 활주로처럼 곧게 뻗은 드넓은 도로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세상은 온통 우리 것이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두팔을 벌리고 통쾌하게 함성을 질렀다. 그녀도 따라서 통쾌한 고함을 질렀다. 최대한 크고 멋지게 소리를 지르며 이어서 나의 18번 "고향역"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내 고햐앙~역~' 그녀도 뒤따라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거침없는 "고향역"은 만물이 통행금지된 고요한 거리로, 공포의 대상이었던 회색 도시로, 은하수 빛 밤하늘로 우화(羽化)되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후련함을 마음껏 가슴으로 마시고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우리만이 공유하는 장구벌레의 날갯짓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장구벌레에 대하여 배운 게 생각났다. 장구벌레는 세상에 태어나서 며칠을 살기 위해 시궁창에서 숱한 시간 동안 탈피를 거듭한다고 했다. 온갖 고통이나 어려움도 단지 며칠의 일생을 위해 이겨내야만 한다고 배웠다. 그렇게 자란 장구벌레에게 주어지는 최대의 축복은 날개가 돋으며 시궁창을 박차고 뛰어오르면서 공중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 화려한 결혼식을 위해 장구벌레는 시궁창에서 수차례 껍질을 벗으며 인내하고 탈피하며 살아야 한다고……. 나는 우화를 기다리며 탈피를 거듭하던 장구벌레였다.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몸을 쉴 새 없이 흔들며 물고기나 곤충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 애쓰기를 얼마였던가. 성충이 될 때까지 껍질을 벗으며 감내했던 고통은 또 얼마였던가. 나는 비로소 장구벌레처럼 공중결혼식을 위해 하늘 높이 날아오를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손전등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성방가를 서슴없이 토해내는 우리들을, 통행금지를 비웃으며 활보하는 그녀와 나를, 경찰서로 끌고 갈 단속원의 손전등 불빛이었다. 그러나 그 불빛은 오히려 장구벌레의 공중결혼식을 축복하는 불빛으로 보였다. 불빛은 도망갈 생각도 잊은 채 노래하며 춤추고 있는 우리를 향해 카다란 원을 그리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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