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유머'라는 테마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해학과 풍자, 기지와 아이러니 등의 용어들이 지닌 위상과 개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아미·숭고미·비장미·골계미는 흔히 미학의 기본 범주들로 일컬어진다. 이중 숭고미와 골계미는 서로 대립되는 미적 범주이다. 주체가 객체보다 높은 위치에 있을 때 그 객체가 비소하고 유한한 것으로 부정되는 골계미가 탄생되는 반면, 낮은 위치에 있을 때 그 객체가 위대하고 무한한 것으로 긍정되는 숭고미가 탄생된다. 이 골계(Komik)의 하위 범주로서 해학(Humour)과 풍자(Satire)가 존재한다. 해학과 풍자의 차이는 부정된 대상 속에 주체가 포함되느냐의 여부에 있다. 해학은 자기 부정을 포함하는 주관적 골계이나, 풍자는 자기 부정을 포함하지 않는 주관적 골계이다. 해학은 본래적 자아가 경험적 자아를 향해서 짓는 웃음이며, 부정을 통해 보다 높은 긍정의 세계를 지향한다. 반면 풍자는 주체와 대상을 분리시키고 대상을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어리석음과 악덕을 폭로하고 공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유머(Humour)와 위트(Wit)를 해학과 기지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편의상 통념에 따르기로 한다. 기지(Wit)는 해학(Humor)과 대비될 때 그 차이가 잘 드러난다. 해학은 성격적·기질적인 것인 반면, 기지는 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해학은 태도·동작·표정·말씨 등에 광범위하게 나타나지만, 기지는 언어적 표현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해학은 동료 인간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고 그 약점·실수·부족을 같이 즐겁게 시인하는 공감적인 태도이며, 기지는 서로 다른 사물에서 남이 보지 못하는 유사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경구나 격언 같은 압축되고 정리된 말로 능숙히 표현하는 지적 능력이다. 아이러니(Irony)는 겉으로 나타난 말과 실질적인 의미 사이의 괴리로부터 생겨난다. 대체로 아이러니는 언어적 아이러니와 극적인 아이러니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언어적 아이러니는 겉으로 하는 말이 내용적으로 의도된 뜻과 다른 경우에 생기는 것이고, 극적 아이러니는 작품 자체가 전체적으로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위에서 골계의 하위 범주로 해학과 풍자, 기지와 아이러니를 설정하고, 그 개념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서 풍자·아이러니·기지는 부정적인 것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해학은 이것을 완화한다. 전자의 웃음은 비정한 쾌감을 주는 반면, 후자의 웃음은 부드러우며 동정적 쾌감을 느끼게 하고 긴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해학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약점에 대해 동정적이며 침착하고 태연한 태도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골계의 하위 범주로서 풍자와 해학을 대표적인 개념으로 설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가 된다. 우리 문학에서 해학과 풍자는 가전체 소설·고대소설·판소리·시조·가사·가면극 등의 고전문학 장르들뿐 아니라 현대시와 소설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문학적 전통이 되고 있다. 풍자에 대한 이론적 고찰로서는 1930년대의 '풍자문학론'이 특기할 만하다. 최재서의 「풍자문학론」(1935)을 필두로 안중언의 「'풍자문학론' 비판」(1935), 한식의 「풍자문학에 대하여」(1936), 이기영의 「모델과 풍자소설」(1938) 등으로 이어진 이 '풍자문학론'은 문학 위기의 타개책으로 주장되었다. 이후 풍자와 해학을 중심으로 한 골계문학론은 한국 문학의 미학적 이론에 대한 탐구로서 지속되어 왔다. 현대시에 있어서의 풍자에 대한 고찰은 『하여지향』등 풍자시를 쓴 송욱의 「상상력의 이론과 실지 비평」(1936), 이유식의 「전후의 한국 풍자시론」(1963), 이재선의 「풍자시론 서설」(1963)이 대표적인 것이다. 송욱은 풍자를 오든의 상상력 이론과 결부시키고 있다. 오든은 코올리지가 분류한 제1상상력과 제2상상력을 원용하여, 풍자는 제1상상력에서는 존재할 수 없고, 제2상상력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제2상상력은 능동적이고 변화를 일으키며,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을 이용할 수 있고 언어의 기능을 이용하여 신성한 존재와 세속적 존재를 대조시켜 풍자의 바탕을 마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유식은 대상에 대한 비판이 전전시와 전후시를 나누는 시정신의 변화라고 하면서, 이 비평정신을 풍자정신으로 규정한다. 그는 대상을 기준으로 인간에 대한 풍자시와 인생에 대한 풍자시로 분류하고, 전자의 전범으로 전영경의 시를, 후자의 전범으로 송욱의 시를 들고 있다. 이재선은 풍자가 존재 가능성이 있는 것과 존재하는 것과의 갭에 민감하여, 다만 존재하고 있는 것만에 편중할 것이 아니라 존재 가능성이 있는 것을 전제로 현실을 비판할 때 성립되며, 이것을 통해 현실적 난관을 창의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검토한 한국시에 있어서의 풍자와 해학에 대한 견해는 대부분 이론적 천착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시작품에 나타난 해학과 풍자, 기지와 아이러니를 정밀히 검토하고, 그것이 작품의 전체적 의미구조 및 전개 과정에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글은 김수영·김지하·황지우·김기택의 시에 나타난 골계미를 해학과 풍자와 아이러니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때 우리가 주된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웃음'의 이미지인데, 그것이 지닌 심층적 의미를 해명함으로써 개별시와 그 시적 전개 과정에 대한 더 세밀한 이해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
2. 김수영의 [풀] - 풍자와 해학의 길항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더 빨리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
김수영이 남긴 마지막 작품 「풀」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주로 '풀'과 '바람'의 정체이다. 민중주의자들은 대체로 '풀'을 민중의 상징으로, '바람'을 외세의 상징으로 간주하였다. 이처럼 '풀/바람'을 '민중/외압'이라는 대립적 상징으로 보는 견해 이외에, '풀'을 삶의 움직임의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동력으로 보는 견해( 황동규의 「시의 소리」), 자신의 본질 속에 운동성을 내포한 존재로 보는 견해( 최하림의 「문법주의자들의 성채」), 풀밭에 서 있는 사람의 웃음의 체험으로 보는 견해(김현의 「웃음의 체험」) 등이 제기되었다. 특히 김현은 이 시의 핵심을 풀의 눕고 울음을 일어남과 웃음으로 인식하고 날이 흐리고 풀이 누워도 울지 않을 수 있게 된, 풀밭에 서 있는 사람의 체험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바람'과 '풀', '눕는다'와 '일어선다', '운다'와 '웃는다'를 대립 개념으로 보지 않고 전이의 과정으로 본 점에서 중요한 해석상의 진전을 보여주었다. 김현은 그러한 해석의 근거로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의 발목과 발밑이 풀밭에 서 있는 누군가의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이 시에서 '눕는다'와 '일어선다', '운다'와 '울다'를 대립 개념이 아닌 역동적 전이의 개념으로 볼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가능케하는 동력이 '바람'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바람'은 인식과 사유의 주체인 자아의 중심으로부터 이탈한 다른 세계의 힘이며, '풀'은 이 탈주체의 잠재력으로부터 역동성의 동력을 얻는다. 김수영 시의 의미구조와 시적 전개를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나는 너무나 많은 尖端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나는 停止의 美에 너무나 等閑하였다"(「序詩」)에서 언급된 '첨단'과 '정지'이다. 그의 시에 있어서 '첨단'은 관습과 전통을 거부하고 미지의 혼돈 속으로 전진하려는 전위적 속도, 혹은 형식적 새로움과 맞닿아 있고, '정지'는 자신을 포함한 시대적 현실의 후진성을 직시하려는 명확한 인식, 혹은 현실적 내용성과 맞닿아 있다. 김수영 시의 '첨단'과 '정지'는 양극의 긴장과 극복의 과정을 통해 후기시에 이르러 '전위적 속도'와 '역사성의 인식'으로 전개되어 간다. 역사성의 인식은 "傳統은 아무리 더러운 傳統이라도 좋다"(「거대한 뿌리」)에서 전통에 대한 긍정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사랑의 변주곡」)에서 미래에 대한 신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역사성에 대한 신념이 확신에 찬 진술로 나타날 때, 자기 중심적 주장과 도취로 인해 시적 진정성과 현실성을 얻지 못하고 만다. 시적 언어 속에 완전히 용해되지 못한 신념의 표출은 관념적 진술로 나타나 형상화의 한계를 노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시인은 역사성의 인식이 지닌 한계와 절망을 극복하는 가능성을 주체적 사유의 차원과는 다른 세계에서 직감하게 된다. 그것은 '전위적 속도'가 주체의 이성적 테두리를 이탈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것으로서,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救援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絶望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絶望」)에서 '바람'으로 형상화된다. 이 다른 세계의 바람이 「풀」에서 "비를 몰고 오는 동풍"으로 불어오는 것이다. 역사성의 인식이 주체의 이성적 사유에 근거한다면, 이 바람은 탈주체의 무의식성과 관련된다. 여기서 우리는 "누이야/ 諷刺가 아니면 解脫이다"(「누이야 장하고나!」)라는 시적 진술이 '풍자'와 '해탈' 중에서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양극의 긴장과 극복을 요구하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시적 발언 이후 김수영의 시는 '풍자'와 '해탈'의 양극을 두 계기로 삼아 상호 길항하며 전개되어 간다. 기존의 논의들은 김수영의 시에서 풍자의 측면만 주목하고 해탈의 측면은 간과하여왔다. 그러나 풍자의 방식만으로 현실의 어둠과 모순을 완전히 물리칠 수 없었던 김수영은 해탈을 다른 한 극으로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풀」은 '첨단'과 '정지'의 변증법이 '역사성의 인식'과 '전위적 속도', '풍자'와 '해탈'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양극의 일치를 온몸으로 밀고 나간 자리에서 생성된 작품이며, 따라서 그러한 시의식이 다른 작품과는 달리 작품 속에 내면화되고 언어 구조 속에 용해되어 스스로 하나의 공간을 획득하고 있다. 결국 '눕는다'→'일어선다', '운다'→'웃는다'의 전이를 가져오는 '풀'의 역동성은 '바람'으로부터 원동력을 얻는다. 바람의 작용 없이는 풀의 누움과 일어섬, 울음과 웃음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바람은 풀과의 대립이라는 표면적 의미 속에 주체의 이성적 차원을 벗어나는 다른 세계의 힘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시인은 「풀」에서 이성적 주체의 사유에서 이탈한 자리에서 생성된, 탈주체의 바람과 마주치는 모습을 하나의 풍경으로 보여준다. 이로써 '풀'은 '바람'이 지닌 탈자아의 무의식성으로부터 역동성의 동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주목하는 것은 '울음'과 '웃음'의 이미지이다. 일반적으로 '운다'는 '눕는다'와 함께 부정적 죽음의 의미로, '웃는다'는 '일어선다'와 함께 긍정적 생명의 의미로 이해되기 쉽다. 이러한 해석은 '풀'과 '바람'을 이항 대립적 상징으로 보는 관점과 연결되는 것인데,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그것이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역동적 전이의 개념임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눕는다'라는 움직임에는 이미 그 속에 '일어선다'라는 재생의 의미가 미래적 기약으로 내포되어 있고, '울음' 속에서 '웃음'으로의 내밀한 전이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김수영 시에서 '울음'이 "누이야/ 諷刺가 아니면 解脫이다"의 '풍자'와 맞닿아 있고, '웃음'이 '해탈' 혹은 '해학'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풀」에 나타난 '웃음'의 이미지는 '울음'을 내포하는 것으로서, 김수영 시가 견지해 온 풍자와 해탈의 양극적 지향점이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는 역동적 길항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김수영은 첨단과 정지, 해탈과 풍자, 탈주체와 주체의 긴장과 극복이라는 영원한 과정 속에서 양극의 긴장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면서 '시의 완성'이라는 이상에 끝없이 다가서려고 하였던 것이다.
3. 김지하의 「무슨」 - 풍자에서 우주적 해학으로
무슨 소리라도 한번 들려라 살포시라도
외롭구나 무슨 벌레라도 한 마리 나를 물어라 너무 외롭구나
생각하고 생각하다 생각이 막힌 곳 문득 생각하니
내 삶이란 게 간단치 않아 온갖 소리 갖은 벌레 다 살아 뜀뛰는 무슨 허허한 우주
쓴웃음이 한번
뒤이어 미소가 한번
창밖의 마른 나무에 공손히 절 한번
가랑잎 하나 무슨 종교처럼 진다 -「무슨」
시집『중심의 괴로움』에 수록된 「무슨」은 지금까지 깊이 있는 논의가 된 적이 없지만, 김지하 후기시의 특징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이 시는 김지하 시의 전개과정을 조망할 때, 초기 서정시와 중기의 담시·정치 풍자시를 거쳐 『애린』 이후의 후기 생명시로 건너가는 문턱을 바라보게 한다. 1연과 2연은 혼자된 외로움을 직설 어법으로 드러낸다. 그 외로움의 강도는 무슨 소리라도 한번 듣고 싶은 심정과, 벌레라도 한 마리 물어 달라는 심정을 통해 표현된다. 시인의 고독은 무슨 소리·무슨 벌레와도 단절된, 철저히 폐쇄된 자아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다. 외부와 단절된 자아의 폐쇄된 공간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시인의 현재적 상황이 형성된 경위를 살펴보기로 하자. 「황토길」과 「녹두꽃」으로 대표되는 초기 서정시는 고통과 회한의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압제와 폭정의 시대 속에 갇힌 채, 그 벽을 뚫고 의식의 각성을 확보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 시의식의 핵심에는 자아와 세계, 정의와 부정(不正), 생명과 죽음, 정신과 육체 등의 이원적 대립이 중층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대립과 대결의 시정신이 구체화된 시론 「풍자냐 자살이냐」에서, 김지하는 "오직 치열한 비애와 응어리진 한을 바탕으로 하고 비극적 표현을 흡수하는 한편 해학을 광범위하게 배합하면서도 강렬한 풍자를 주된 핵심으로 삼는 고양된 희극적 태도만이 새로운 폭력 표현의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말하면서, 김수영 시의 풍자가 지닌 소시민성을 비판하며 민중적 해학과 풍자의 길을 제시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비애와 한을 바탕으로 한 비극적 표현과 해학을 배합하면서 풍자를 주된 핵심으로 삼는다는 대목이다. 이론적으로 김지하의 풍자시는 비극적 요소에 해학이 가미된 양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그것을 고양된 희극적 태도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로써 김지하는 『오적』『비어』등의 풍자시를 통해 판소리·탈춤·서사민요 등의 전통 연희 양식을 현재적으로 변용함으로써 정치적 폭력에 항거하는 시적 저항의 첨예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해방과 각성을 향해 시대적 어둠을 반역의 정신으로 돌파해 나갔던 김지하는, 오랜 감옥 생활을 거친 후 80년대 들어 "캄캄한 지하실 시멘트 벽에 피로 그린/ 네 미소가/ 애린/ 네 속삭임 소리가 기억 안 난다"(「소를 찾아나서다」)라며 '애린'을 찾아 나선다. '애린'은 막연한 대로 나와 너, 풀벌레와 나무, 바람과 티끌에 이르기까지 모든 죽어간 것 속에 언제나 살아 있는, 생명이 지닌 근원적 일원성으로서의 궁극적 가치를 의미한다. 이 시세계는 초기 시의식의 근간을 이루었던 이원적 대립의 세계인식이 일원적 통일의 세계로 전이되었음을 보여준다. 붉은 빛과 흰 빛의 대립, 피와 불의 모순, 불과 물의 이원성이 내포하던 삶과 죽음, 선과 악, 밝음과 어둠. 남성과 여성 등의 이원성은 이 『애린』에서 완전히 무화된 것은 아니면서, 생명의 근원이라는 일원론적 세계에 기초하여 역동적으로 되살아나는 것이 되었다. 이는 김지하가 의지했던 동학, 민중종교 및 불교, 노장 등의 동양사상으로부터 얻어진 일원론적 융합의 세계., 혹은 화해와 순응의 세계가 시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지하가 애타게 찾는 애린은 "술병 속에 갇힌 애린…술병 속에 흔들리는 애린…술병 속에 없는 애린…수없이 많은 저 애린의 모습"(「갇힘」)에서 보듯, 현실의 구체적 존재의 표상이 아닌 궁극적 원리로서 존재하는 삶의 이상이며 목표가 된다. 그리하여 이 애린을 찾아다니던 시인은 『별밭을 우러르며』에 와서, "바람만 드세게/ 내 속을 뚫고 갈 뿐"(「겨울거울5」)이라는 겨울의 공허감과, "옛 삶은 끝이 났고/ 새 삶은 시작되지 않았다"(「속2」)라는 기다림을 노래한다. 이 공허감과 기다림 속에서 김지하는 깊은 내면 성찰을 통해 "새살 돋아오는 아픔"(「목련」)을 동반한 "한줄기 희망"인 "생명"(「생명」)을 발견하게 된다. 『별밭을 우러르며』의 지배적인 테마인 공허감과 기다림, 그리고 내면 성찰에 이은 생명의 발견은 그 연장선에서 『중심의 괴로움』에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무슨」은 이러한 시상 전개를 한 몸에 담고 잇는 작품이다. 따라서 1·2연에 나타난 폐쇄된 자아의 외로움은 3연에서 "생각하고 생각하다"라는 내면 성찰의 과정과, "생각이 막힌 곳/ 문득 생각하니"라는 발상의 근본적인 전환을 거쳐 4연에서 생명의 재발견에 도달한다. 막다른 벼랑 끝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이 생명에 대한 발견은 이미 "생명/ 한 줄기 희망이다/ 캄캄 벼랑에 걸린 이 목숨/ 한 줄기 희망이다// (…)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 생명의 슬픔/ 한 줄기 희망이다"(「생명」)에서 응축된 표현을 얻은 바 있다. 이 구절은 한 줄기 희망을 생명이 지닌 슬픔에서 발견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다.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에 나타난 '울음'의 세계는 모성애의 가식 없는 운명을 통해 생명이 지닌 숭고한 의미를 일깨운다. 따라서 이 '울음'의 세계는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 간다"(「서울길」)에 나타나는 초기시의 '울음'의 세계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슨」의 4연에서 김지하는 생명에 대한 성찰을 개체적 자아의 폐쇄된 테두리를 넘어서서 우주적 공간으로 확장한다. 자신의 삶 속에 온갖 소리 갖은 벌레가 살아 뜀뛰는 허허한 우주가 존재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로서의 자신의 생명이 고갈된 연후에 그 공간에서 다시 태어나는 새 생명은, 주체의 자기 중심적 한계를 벗어버린 자리에서 싹트는 것이다. 김지하는 초기시에서 이원론적 대립의 세계인식을 통해 독자적인 개체로 인식했던 주체와 자아가, 스스로 독자성을 지니면서도 인간·자연·우주와 무한히 연결되는 유기체적 본성을 지닌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5연과 6연에 나타나는 "쓴웃음"과 "미소"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쓴웃음'은 4연의 "다 살아 뜀뛰는"과 "허허한 우주"의 상반된 이미지로부터 생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이 발견한, 우주와 상통하는 생명은 "온갖 소리 갖은 벌레 다 살아 뜀뛰는" 역동성과 충만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손에 잡히지 않는 광대한 허무의 공간이기도 하다. '쓴웃음'은 이러한 충만과 공허, 역동성과 무한성의 간극으로부터 생겨나는 상황적 아이러니의 함축된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지하는 6연의 '미소'를 통해 이 아이러니의 상황을 새로운 성찰로 역전시킨다. 이 '미소'의 성격은 뒤이어 전개되는 7·8연의 상황을 통해 유추될 수 있다. "창 밖의 마른 나무에/ 공손히 절 한번// 가랑잎 하나/ 무슨 종교처럼 진다"는 시인은 시인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존재의 독자성을 지니면서 상호 교류하고 화답하는 혈연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인간 주체와 대상, 자아와 자연이 함께 우주 만물의 공동체적 운명에 처해 있음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마른 나무의 가랑잎 지는 모습을 통해 시인은 하나의 순환적 궤도 위에서 소멸과 재생을 반복하는 자연의 운명과 상통하는 생명의 본질을 본다. 결국 '미소'는 "무슨 종교처럼"에서 연상되는 종교적 각성의 차원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미소'는 일반적인 해학(Humour)의 차원을 넘어서는 종교적 해학, 혹은 우주적 해학의 차원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김지하의 시는 전체적으로 『오적』『비어』 등의 해학과 풍자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양상으로부터 후기시의 우주적 해학의 차원으로 전개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김기택의 「원자폭탄 아름다운 원자폭탄」 - 냉소적 아이러니
전속력으로 앞만 보고 질주한다 뒤에서 쫓아오는 열과 폭풍 불타는 나무를 뚫고 부서지는 집을 뚫고 투명해진 내 살도 이윽고 뚫고 뼈만 쫓아오는 방사선 길거리에 내 뼈가 노출된다 노출된 내 뼈가 더 급하게 더 악착같이 달린다 달리다가 달리다가 뜬다 날아간다 날아가는 내 해골이 찬란한 섬광을 받으며 웃는다 이를 모두 드러내고 히히히 착하게 웃는다 이빨처럼 아가리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어 결코 그칠 수 없는 웃음을 웃는다 웃다가 녹는다 희디흰 빛이 된다. - 「원자폭탄 아름다운 원자폭탄」
이 시는 원자폭탄의 열과 폭풍에 의해 나무가 불타고 집이 부서지는 상황과, 방사선에 의해 뼈가 노출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표면적으로 이 시는 원자폭탄으로 대표되는 첨단의 과학문명이 인류를 파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것이라는 경고와 비판의 주제를 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한편 방사선에 의해 뼈가 노출되는 상황은 김기택 시의 중요한 기법인 방법적 투시의 시선과도 관련성을 지닌다. 마치 뢴트겐 광선이 생명체를 투시하여 감추어진 뼈대를 흑백으로 영사하듯, 시인의 눈은 존재의 움직임 내부에 숨어 있는 실체를 냉정하게 인화한다. 이렇게 인화된 사진은 생소하지만 그것이 주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통해 인간적 행동과 욕망과 희노애락의 온갖 현상을 꿰뚫고 들어가 동물적 본성 및 원초적 생명력을 복원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인용시는 건강한 동물적 에너지와 원초적 생명력 대신 해골의 이빨이 보여주는 웃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아이러니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인류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될만한 상황 속에서 해골이 웃고 있는 모습은 냉소와 역설로 가득 찬 아이러니의 효과를 얻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의 '웃음'은 시인이 추구하는 원시적 생명력과 그 대립항이 되는 문명의 비극적 상황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고통스럽게 흐느끼는 '울음'이다. "히히히 착하게 웃는다"의 "착하게"는 이러한 비극적 상황 속에서 웃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빈정거리는 어조로 표현함으로써 언어적 아이러니를 구사하고 있다. 김기택의 첫 시집 『태아의 잠』에는 이러한 '웃음'의 이미지가 빈번히 나타난다. 다음의 시를 보자.
잠들기 전엔 늘 고꾸라지거나 기절하곤 하였다. 허겁지겁 달디단 꿈을 꾸곤 하였다. 오랫동안 빨다가 깨어나면 말할 수 없이 상쾌하 였다. 깨고 난 꿈에서는 간혹 피와 칼의 비린내가 풍겨 왔지만 개 의치 않았다. 큰 날개가 헤쳐온 바람은 얼마나 뻐근하고 묵직하게 겨드랑이에 붙어 있었던가. 발톱으로 움켜쥔 뱀의 꿈틀거림은 얼마 나 짜릿하게 뼈마디를 울리며 남아 있었던가. 흰 껍질을 깨고 노란 부리를 내밀면 세상 공기야 더럽건 말건 바람은 얼마나 가볍고 부 드러웠던가.
아무것도 할 말이 없었다. 수갑이 채워진 손을 단정하게 무릎 위 에 올려놓고 욕과 고함 소리와 타자 소리를 들으며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을 때 할 말이 없었으므로 나는 다만 웃어주었다. 웃다 보면 백열등이 차츰 흐려져 뿌옇게 지워졌지만 따귀를 세차게 맞고 나면 그 흰 등은 욕설과 고함 소리를 비추며 다시 말개져 있었다. 잠 속 에 힘차게 딸려 들어가고 싶었지만, 끊임없이 다그쳤으므로, 눈에 힘을 주며 희미하게나마 계속 웃어주었다. - 「연쇄 살인 용의자」 부분
이 시는 의식과 무의식을 왕래하며 시인의 투시적 시선이 포착한 '꿈'과 '현실' 의 모습, 그리고 그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준다. 기절할 듯 잠에 빠져 꾸는 달디단 꿈(1연)에서 화자는 새가 된다. 큰 날개로 바람을 헤치고 발톱으로 뱀을 움켜쥐면서 뻐근하고 짜릿한 생명력의 충일감을 맛본다. 그러나 이 원시적 생명력의 발휘는 꿈에서 깨어난 현실(2연)에서 그를 연쇄 살인 용의자로 둔갑시켜 놓는다. 악랄한 족속으로 취급되어 욕과 고함소리와 타자 소리를 들으며 심문을 받는 것이다. 1연과 2연 사이에 느껴지는 거리감은 가볍고 부드러운 바람이 드나드는 '꿈'과 더러운 세상 공기의 '현실' 사이의 괴리와 상응한다. 이때 아무 할 말이 없으므로 웃어 주는 행위를 반복하는 화자의 '웃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날개와 바람의 자유, 원시적 생명력이 꿈틀대는 시원으로의 복귀라는 '꿈'과, 그것이 용납되지 않는 감시와 억압으로 막힌 벽, 도시문명의 '현실'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흐느끼는 자조적 웃음이다. "한 아이의 웃음 속에서 자라나는 증오심"과 "매가 극도로 무서워지면 울음이 마비되는, 울음 대신 간드러진 웃음이 끊이지 않고 나오는 증상"에서 알 수 있듯, 김기택 시에 출몰하는 '웃음'은 울음 섞인 자조적 웃음이며, 증오심이 자라나는 웃음이다. 이 웃음은 '꿈'과 '현실' 사이의 길항을 이루는 '잠'에서 깨어 현실과 대면할 때 생겨나는 환멸의 정서적 반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증오심이 자라는 웃음은 "웃음이 잠이 되고, 그 잠이 자라 어른이 되고, 드디어 살인이 되기까지의 긴 과정"을 밟는다. 시인은 이 웃음과 울음 사이에 빈틈을 내고 단절시킴으로써 그 긴 과정에 불협화음을 개입시킨다. 그 방식을 전경화한 것이 '딸꾹질'이다. "점점 더 많은 바람이 필요한 나의 웃음, 큰 숨을 쉬어 웃음을 넘길 때마다 목구멍에, 자꾸, 걸리는 무겁고, 딱딱한, 바람" (「연쇄 살인 용의자」)과, "이상한 새소리/ 발구르며 날갯질하며 소리쳐 웃는다(…)// 급기야 터져나오는 울음/ 아랑곳없이 규칙적으로/ 울음을 토, 딸꾹, 막토막 잘, 딸꾹, 라내는 소리"(「딸꾹질」)를 보면, 딸꾹질은 진공 상태와 공기의 순환을 사이에 두고 단절과 연결의 이중적 의미망을 형성한다. 꿈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인식한 시인은 바람의 운동성을 통해 시공을 넘나드는 생태계의 순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막히고 좌절되는 무겁고 딱딱한 진공 상태에서, 그는 겨울의 이미지로써 내부에 단단하게 웅크린 견딤의 태도를 형상화하게 된다. 웅크림과 견딤의 과정을 거쳐 나온 김기택의 두 번째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은 전체적으로 '잠'의 명상에서 깨어나 '현실'의 어둠을 직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건강한 원시적 자연으로의 시적 복원이라는 '꿈'에서 멀어지면서, 그는 도시문명의 한복판에서 폐허와 어둠에 직면하게 된다.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술해진, 바 람을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 속에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사하게 통과하게 하느라 그는 아 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과 뜨겁고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다. 고 요한 마음, 꿈 없고 생각 없는 잠이 되려고 그는 더 웅크린다. - 「바늘구멍 속의 폭풍」부분
시인은 '그'의 육체, 특히 호흡기관을 냉정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낡고 닳은 '그'의 육체가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과 폐에서 가르랑가르랑 소리"를 내는 것을 본다. 시인이 관찰하는 것은 "망가지고 허술해진" 사람의 몸이다. "찰진 분비물과 오물이 통로를 막아" "좁아진 숨구멍"은 '바늘구멍'으로 비유되고, 그것은 다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으로 비유된다. 이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은 '바람' 인데, 그것이 휘몰아치는 힘을 지닐 때 '폭풍'이 된다. '폭풍'은 시인이 희구하는, 생태계의 순환성 속에서 발휘되는 원시적 생명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픈 '그'의 낡고 닳은 육체처럼, 현대인은 생태계의 순환이 파괴된 도시문명의 폐허와 규격화된 일상의 벽에 갇혀 있다. 이럴 때 김기택의 시는 잠의 명상적 아우라 대신 엄정하고 견고한 형상화 방식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현대인의 굴욕스런 내면적 속성을 투시한다. 이것은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와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환멸의 정서적 반응이었던 '웃음' 대신 그 냉소적 아이러니의 정신을 내면화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웃음'이 지닌 환멸의 정신으로 무장하여 현실의 폐허를 폐허 그 자체로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어둠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불구의 내면 풍경을 적나라하게 인화하는 것이다.
5. 웃음과 울음의 변증법
김수영은 '첨단'과 '정지'의 긴장과 극복의 과정에서 '해탈'과 '풍자'를 얻고, 그것의 일치를 온몸으로 밀고 나간 자리에서 「풀」의 '웃음'을 얻는다. 따라서 「풀」에 나타난 '웃음'은 '울음'을 자기 갱신의 계기로서 함축하고 있는 웃음이다. 다시 말해 이 웃음은 풍자와 해학이 서로를 자신의 계기로 삼아 길항하며 역동적으로 침투하는 자리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김지하는 초기 서정시를 거쳐 『오적』『비어』등에서 비극적 표현과 해학을 배합하면서 강렬한 풍자를 핵심으로 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애린』 이후의 변모를 통해 생명의 슬픔에서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한 그는, 「무슨」에 이르러 '쓴웃음'의 아이러니를 통과한 종교적, 혹은 우주적 해학의 '미소'를 형상화한다. 이 우주적 해학의 방식은 우주 만물과 함께 하나의 생명 공동체로 호흡하는 광활한 상상력을 보여주지만, 소멸과 재생을 반복하는 순환적 궤도 속에서 자칫 풍자가 지닌 비판과 저항의 정신을 상실한 채 윤회와 해탈의 길로 빠져들 우려도 지닌다. 김기택은 「원자폭탄 아름다운 원자폭탄」에서 건강한 원시적 생명력이 고갈된 현대문명의 극단적 상황을 통해 냉소적 아이러니의 '웃음'을 보여준다. 이 '웃음'은 '꿈'과 '현실' 사이의 길항을 이루는 '잠'에서 깨어나 현실을 대면할 때 생겨나는 환멸과 자조의 정서적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바람의 운동성을 통해 생태계의 순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인은, 딸꾹질이라는 단절과 막힘을 거쳐 현실의 어둠에 갇힌 현대인의 폐허를 직시함으로써 '웃음'이 지닌 아이러니의 정신을 내면화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김수영과 김지하의 경우, 초기시의 풍자와 해학의 정신이 시적 전개 과정을 거친 후 후기시에 이르러 「풀」의 '웃음'과 「무슨」의 '미소'를 얻었다면, 김기택의 시는 초기시「원자폭탄 아름다운 원자폭탄」에서 표면화된 '웃음'의 아이러니 정신을 내면화하는 방식으로 전체적인 시적 전개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보여 준 '웃음'의 상상력은 각각 풍자와 해학의 길항, 우주적 해학, 냉소적 아이러니로 특징지울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점은 '웃음'의 상상력은 '울음'의 상상력과 끊임없이 길항하고 상호 침투할 때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이다. '울음'을 내포한 '웃음' 만이 진정한 '웃음'에 도달 할 수 있는 것이다.
첫댓글 아고 어렵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