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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 '다산초당,완도 보길도 여행기.
-언제:2017.10.01~03(2박3일)
-여행동선:용산역(KTX)->순천역->강진 프린스호텔(1박)
다산초당->완도 화흥포항->노화도 동천항->
보길도 예송리해변(2박)->윤선도 부용동 원림->망끝전망대
보옥리 공룡알해변->송시열 글씐바위->완도 여객터미널
지난 추석 황금연휴를 맞아 고향 가는 길에
강진 다산초당과 윤선도 원림이 있는 완도 보길도에 들렀습니다.
서울 용산역에서 비내리는 남행 열차(KTX)를 타고
순천역에 도착하니 제법 많은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세차게 내리는 가을비를 뚫고 2번 국도를 거침없이 달려
밤늦은 시간에 도착한 남도의 끝자락,고려청자의 본향이자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강진의 비내리는 밤은 고즈넉했습니다.
비내리는 밤,
소박한 강진읍내에서 제법 높은 프린스 호텔에 여장을 풀고
꼭대기층(9층)에 있는 카페에 맥주한잔 하러 올라갔다가
손학규 전,경기도지사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 강진에 머물렀다"는 그는
다산초당과 백련사가 있는 강진 만덕산 자락 토담집에서
2년여를 머물렀습니다.
노론과 안동김씨 세도 정치로 18년간 강제 유배형에 처해
강진으로 내몰린 정약용과
당 대표시절 정계에서 퇴출될 위기에 처한 친노폐족들을
끌어들여 기사회생의 길을 터줬으나 그 친노세력들에게
배신당한 자신의 처지를 다산 정약용과 비유하며
낯선 땅 강진에서 그는 스스로의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이틑날 아침,
숙소에서 나와 강진읍내 전통시장,오감통에서
짱뚱어탕 한그릇으로 아침의 허기를 달래고
다산초당이 있는 도암면 만덕산 아래 귤동마을에 도착하니
간밤에 내린 비에 젖은 코스모스가 한껏 가을 분위기를 냅니다.
만덕산 중턱에 터잡은 다산초당은
이곳에서 약 10여분이면 닿을 수 있습니다.
다산 초당으로 오르는 초입에서 만난
잎과 꽃이 한 시기에 나지 않아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한다는
상사화과에 속하는 꽃무릇이
간밤에 내린 비 탓인지 더 처연하게 붉습니다.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만
이 무렵
그래선 안 된다고
그러면 안 된다고
안간함으로 제 몸 활활 태워
세상, 끝내 살게 하는
무릇, 꽃은 이래야 한다는
무릇, 시는 이래야 한다는
- 오인태,<꽃무릇>
도암면 다산 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다산 정약용이 백련사의 혜장스님을 만나기 위해 오갔던 사색의 길로
동백나무와 차나무가 어우러진 아름답고 호젓한 길로
이 길은 다산초당을 지나 산마루를 넘어 백련사로 이어집니다.
다산 초당으로 오르는 길에는 오래된 소나무와 대나무,
동백나무 등이 울창하여 숲길에는 햇볕이 잘 들지않아
대낮에도 약간 어두웠고 길 한가운데 땅위로
고스란히 뿌리를 드러낸 나무 뿌리들이
마치 세상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강직한
선비정신을 닮았습니다.
비켜가려해도 나무뿌리들이 발에 밝혔습니다.
오르내리는 무수한 사람들의 발길과 세찬 비바람에 단련되어
잔뼈가 굵은 나무 뿌리들이 인간들의 나약함을
일깨우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연마한 고통에는 광채가 따르는 법이다"
-박완서
간밤에 내린 비 탓인지 젖은 숲에 고인 공기는 청량감을 더했고
숲은 초가을 분위기를 냈습니다.
뿌리의 길을 지나 돌계단에 올라서니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 사이로 다산 초당이 보입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관광명소지만
한때는 다산의 고단한 삶이 배어있는 거처였습니다.
다산 초당은 남향집이었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비좁은 이곳 초당 한켠에 물을 끌어들여
인공연못을 만들어 물고기를 기르고
초당 뒤편의 약천에서 물을 길러다 차를 끊이고
텃밭도 손수 일궜다고 전해집니다.
옛날 이집은 지붕이랍시고 다 말라붙은 풀더미였으며
흙벽은 허물어진 초가삼간에 비탈진 산언덕에 위치하여
마당도 매우 비좁았는데 이렇게 작고 협소한 곳에서
대학자이자 큰 스승인 다산 선생은 장장 18년에 걸친 강진 귀양살이 가운데
10년을 지내며 저 유명한 '목민심서','목민'(백성을 잘 보살피는 일)과
'심서'(그런 마음은 있으되 몸소 실행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
'경세유표' 등 수백권의 책을 집필하고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냈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썻다는 초당 현판
다산초당 내부에는 다산 정약용선생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세간 사람들이 다산 4경 가운데 '정석'을 1경으로 꼽는 데는
이처럼 다산의 흔적이 직접 드러난 유적이 없기 때문일것입니다.
다산동암
소나무 아래 동자에게 물으니
스승은 약초 캐러 갔다 하네
이 산 안에 계시긴 한데
구름 자욱해 알 수 없다네
-가도,<심은자불우>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길모퉁이에
천일각('하늘 끝 한 모퉁이')이 있습니다.
강진만의 구강포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다산 선생은 서울에 두고 온 아내와 두 아들,그리고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 형 정약전을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나무들 사이에 풀이 있듯
말하지 않아도 없는 것은 아니다
나무들 사이에 풀이 있듯
숲 사이에 오솔길이 있듯
-최승자,<중요한 것은 >중
-시집<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 지성사 2010)
다산이 걸어간 백련사 가는 길을 따라 걷습니다.
불혹의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홀로 걷던 길이라 생각하니
애달픈 마음이 먼저 길을 나섭니다.
이 오솔길을 걸으며 다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 풀잎하나,나무 한 그루에도 모두 그의 눈길이
스쳐 가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길섶의 나무와 풀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습니다.
풀잎 등에 맺히는 이슬 한 방울이 무거워진다
그 무게에 풀들은 땅으로 휘어지며 겸허해지고
땅은 씨앗들을 받아 품으며 그윽하게 깊어진다
뜨거웠던 황도(黃道)의 길도 서서히 식어가고
지구가 만든 그림자 속으로 달이 들어와 지워지듯
가을 속으로 걸어가면 세상살이 욕심도 무채색이 된다
- 정일근,<가을의 일>중
가을이
때로는 가을에게
거짓말을 하는 법이라서
어떤 여자가 떠나갔는지 가을이 다 알기 어려워도
밤이슬 툭 떨어지는 가는 풀잎에
제 얼굴을 비쳐 본 사람이라면
가을이 언제 지나가는지 알 수 있다
-김계수,<가을이 때로는 가을에게>중
곰삭은 시간을 품은 습기 가득한 숲이 뿜어내는 영기와
비릿한 향기가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길은 넓어졌다 좁아졌다를 반복하며 사색에 잠기게 했습니다.
숲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숲의 시간은 퇴적의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흐르고 쌓여서 역사를 이루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흘러가고 또 흘러오는 소멸과 신생의 순환으로서 새롭고 싱싱하다.
숲의 시간은 언제나 갓 태어난 풋것의 시간이다.
-김훈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길을 찾는 까닭입니다.
- 윤동주,<길>중
해월루
다산 선생이 백련사 혜장 스님을 만나러 수없이 걸었을
이 길을 따라 가다보면 만나는 '해월루'(바다위에 뜬 달)입니다.
사방이 훤하게 트였고,멀리 강진만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터잡았는데
혜장선사와 자주 만나 담소를 나누고 우정을 쌓았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정약용의 호는 다산(茶山)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정작 다산 자신의 공식적인 글에는 '다산'이라는 말은 찾을 수가 없다고합니다.
1808년 강진읍에서 귀양 살던 다산은
해남 윤씨들의 집성촌인 '귤동'이라는 마을의 뒷산인
야생차가 많이 서식하는 다산(茶山)에 살고있는
정약용의 호칭으로 '다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뜻이나 생각과는 관계없이 호가 다산이 되었는데
정약용은 자신이 부르고 싶고,남들이 불러주기를 바라는 호는 분명
'사암'이었다고 합니다.
오랜 귀양살이로 다시는 세상에 나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을 할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에
“이제 나는 뒷날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라는 뜻으로
'기다릴 사(俟)'라는 글자를 호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백련사의 자랑은 무엇보다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곳 동백나무숲입니다.
사적비 옆 허물어진 행호토성 너머에
아름드리 동백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서 있었는데
그 규모가 자그마치 약 3천여평에 이릅니다.
숲속은 사시사철 푸르고 두터운 잎으로 인해 대낮에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제 곧 동백꽃이 피어서 만개하면
숲은 붉게 물들어 장관을 연출할 것입니다.
그 꽃 다 지고 나서야
지름길을 알았다
그대에게 가는 길
- 김완하,<동백꽃>
만덕산 기슭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는 천년고찰 백련사는
신라 말에 창건되어 1211년 원묘대사에 의해 중창된 사찰로써
서민 불교운동이 한창이던 1236년 백련 결사 문을 발표하고
백련결사 운동을 주창한 절답게 절의 이름이
절 사(寺)자가 아닌 '모일 사(社)'를 사용하는 도량입니다.
동백꽃피는 철이 아닌 때 찾아온 여행자에게
백련사 경내에 핀 늦장미가 동백꽃을 못보는 허전함을 달래줍니다.
외로운 때일수록 벗이 그리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정약용이 좋은 벗이었던 백련사 혜장스님과 우정을 나눈
숲속 오솔길을 걸어와 도착한 백련사에서 내려다 본
강진만은 어느새 가을색이 완연합니다.
다산이 18년간 내려다본 곳이고
손학규가 2년여를 내려다 보았을 저 강진만을 보면서
나는 누군가의 뿌리가 되어준 시간이 얼마나 있었는지
살아오며 지금껏 깊은 향을 가진 소중한 인연을 소홀히 하여
잃은 적은 없었는지 성찰해보았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절집 마당에 남겨둔 채
고산 윤선도의 섬,보길도로 향합니다.
오후가 되자 잔뜩 흐렸던 날씨가 개이기 시작했습니다.
보길도로 들어가는 뱃길은 이곳 완도 화흥포항과
땅끝 여객터미널 두군데가 있습니다.
추석을 맞아 귀향객들의 자동차로 배는
가득찼습니다.
하여간 우리는 항구에서 또 어떤 항구로
떠나야만 하는 인생입니다.
앞에 보이는 섬은 횡간도입니다. 사자바위가 보이고
그 뒤로 노화도와 보길도입니다.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를 찾은 때는
저 멀리 병자호란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해남 고향집에 머물던 윤선도는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인조가 봉림대군과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보내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강화도로 향하던 중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제주도로 뱃길을 돌려 가다가
태풍을 만나 배가 표류한 섬이 바로 보길도 였습니다.
배를타고 노화도로 건너와 노화대교를 건너
제일 먼저 찾은 곳,예송리 해변입니다.
수려한 해안선을 따라 어촌이 있고 민박집들과
숙박업소들이 있습니다.
구름모자를 쓰고 있는 산봉우리는 격자봉입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바다가 있고 저마다의 파도가 있기 마련입니다.
추석 연휴에 나홀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만난
보길도 예송리 해변은 이렇듯 변함없이 잘 있었습니다.
오늘 밤
달 뜨면
또 얼마나 눈부신
그대들이겠는가
- 고은,<보길도>
그러고 보면 우리는 슬픔의 작디작은 배들이 아닌가,
어두운 가을을 헤치며 이 먹먹한 정적을 떠돌아다니는 작은 배.
- 존 밴빌,<바다>
노화도와 장사도에서 보길도를 잇는 보길대교
쇠잔해진 하루해가 산마루에 걸쳤습니다.한적한 갯마을이 고즈넉합니다.
보길도에 갈 때는 어디에 묵느냐에 따라서 그 느낌이 확연히 다릅니다.
물론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더 중요하겠지만.
나와 널 칼같이 가르는 날 선 경계선 대신
건너가 서로를 만날 수 있는 공간.
떠나고 떠나 보낼 수 있는 공간.
- 장 그르니에,<섬>에서.
보길도 선창에서 오른쪽 길로 약 15분 걸어 들어가면
부용동 동구 초입,보길초등학교 옆에 윤선도원림이 있습니다.
윤선도의 원림에 들어오려면 입장료를 받는데
추석이라 무료 입장을 했습니다.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는 세연정은
윤선도가 지은 정자입니다.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곳곳에 바위들을 스치고 계곡처럼 흐르는 이 연못이 세연지이고,
그 물길을 이어서 만든 연못이 회수담 입니다.
이 두 개의 연못 사이에 지붕을 얹은 건물이 바로 세연정입니다.
이 정원을 만드는 데만 5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들어선 인공연못 회수담입니다.
판석을 따라 자연이 만든 연못 세연지와
그 가운데 들어선 정자 세연정의 대들보 앞
한그루 소나무가 자태를 뽐냅니다.
정원의 규모를 뛰어넘어 '원림'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저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가 탄생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모를 때
진정한 일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모를 때
진정한 여행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혼란을 겪어보지 않은 마음은 할 일이 없다.
흐름에 방해를 받아본 냇물만이
노래를 부를 줄 안다.
-Wendell Berry
세연정 툇마루에 앉으니 청아한 새소리와 풀벌레소리,
이따금 지나는 바람소리가 마음을 평온하게 했습니다.
가을볕이 곱게 내려앉은 연못 연잎들이 싱그러워보였습니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박노해,<가을 볕>
완도 보길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윤선도의 세연정이 있는 부용동 원림을 떠 올리는데
이 원림은 자연을 거의 손상하지 않고
최대한 순수 자연 상태를 변형하지 않고
약간의 인공을 보태 조화를 창출한 정원으로 생활공간이자
놀이공간으로 당시 대표적인 별서정원에 속합니다.
판석보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로
일명 '굴뚝다리'라 부르며,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으며,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습니다.보의 구조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회를 채워서 물이 새지 않게 한 다음
그 위에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최고의 덕목으로 간주했던 윤선도의
생각이 고스란히 예술적 감각으로 재현된 세연정은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 보는 것이 훨씬 멋스럽습니다.
한국 최고의 정원가,고산 윤선도가 조영한 원림에 담겨 있는
생태미학과 지향세계의 함의가 느껴집니다.
윤선도가 섬의 주봉인 격자봉(좌측 봉우리)에 올라
산수를 둘러보고 반한 섬 보길도,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부용동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마을 초입에 있는 부용동 마을회관
고산 윤선도의 다섯 벗을 만나는 비밀정원,부용동에 들어와
건너편 산속 동천석실을 봅니다.
고산 윤선도는 '오우가'라는 시조에서 다섯 벗을 노래했는데
물과 돌,소나무,대나무,달이 바로 그 다섯입니다.
주변의 산자락이 낙서재터를 둘러 연꽃잎처럼 피어나 있어서
부용동이라는 동네 이름을 실감케 합니다.
금빛 모래가 깔린 해변,울창한 원시림,보석처럼 예쁜 섬.
보길도의 풍경에 매료된 윤선도는 남은 생을 이곳에서 보내기로 하고
보길도를 자신만의 낙원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윤선도의 시문학이 빛을 발한 것도 바로 이때였습니다.
낙서재로 가는 길에 본 곡수당입니다.
낙서재는 윤선도가 시문을 창작하고 강론하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부용동의 경치에 감탄한 윤선도는 섬의 주봉인 격자봉 밑에 집을 짓고
그 집을 '낙서재'(글을 읽는 즐거움)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보길도에서 가장 큰 봉우리인 격자봉을 오르기 시작하는 지점에
낙서재가 있습니다.
맞은편 산 중턱에 동천석실이 보입니다.
이곳 낙서재가 삶의 공간이라면 저곳 동천석실은 현실과 자신을
저만치서 관조하는 이상의 장소였습니다.
낙서재 앞 거북 모양의 이 '귀암'은
터를 잡을 때 지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 바위는 고산 윤선도가 달을 보기 위해 즐겨 앉았다고 합니다.
낙서재는 보길도 안에서 가장 좋은 택지에 터잡았습니다.
부용동 마을 속 윤선도의 생활 공간이었던 '낙서재' 툇마루에 앉아
원림 세연정과 동천석실을 오가며 무릉도원 속 그의 발자취를 느껴봅니다.
윤선도의 자연애가 각별한 것은 자신의 산수애호 성정을
단순한 취향이나 풍류적 태도로 즐기는 정도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터전으로까지 확장시켰다는 데에 있다.
당시 대부분의 선비들이 몸은 현실세계에 둔 채
마음으로만 자연을 희구하는 식의 소극적이고 관념적인 수준에 머물렀음에 반해,
고산은 직접 산수간의 절승을 찾아내고,
그곳에다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여 살면서 정자를 짓고
물을 가두어 연못을 만드는 등 적극적인 조원 행위를 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학문과 예술적 세계를 펼치고자 한 것이다.
- 성종상,지음,<고산 윤선도 원림을 읽다> - 18쪽
앞산에 보이는 동천석실은
주자가 말한 신선이 사는 선계세상을 표현한 영역입니다.
동천석실은 해발 100여 미터 안산 중턱에 윤선도가 세운 일종의 공부방입니다.
윤선도는 저곳에서 책을 읽으며 사색을 즐겼다고 합니다.
윤선도는 이곳에 머물며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등 수많은 시조를 지으며
시인묵객의 삶을 살았습니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데도 낙서재에 가만히 앉아있으니
과연 이곳이 남다른 엄마 품속 같은 위안이 드는 이유를
저절로 알 수 있었습니다.
낙서재 아래 곡수당입니다.
저곳은 고산의 아들 학관이 거주했던 곳입니다.
곡수당에서 본 동천석실
격자봉에서 흘러내리는 유려한 산능선이
낙서재와 곡수당을 포근히 감싸고 있습니다.
추자도와 한라산도이 육안으로 보이는 망끝전망대.
걸어서
더는 갈 수 없는 곳에
바다가 있었습니다
날개로
더는 날 수 없는 곳에
하늘이 있었습니다.
꿈으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세월이 있었습니다
아,나의 세월로
다가갈 수 없는 곳에
내일이 있었습니다
- 조병화,<더는 갈 수 없는 세월>
보길도 서쪽 끝자락에 있는 보옥리 공룡알 해변입니다.
이곳은 용이 살다가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보옥리라고 했다는데
그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해변에는 여의주를 닮은
돌들이 가득했습니다.
바로 앞의 섬은 '치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룡알 해변의 크고작은 동그란 돌들이 파도에 부서지며
맑고 청아한 소리를 냈습니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러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김기림<길>중
중리 해수욕장을 지나 보길도 섬의 동쪽 끝자락으로 가면
제주도로 귀양 가던 우암 송시열이 시 한 수를 지어 새겼다는
'송시열의 글씐바위' 앞에 다다릅니다.
바위 앞에 서서 바라보는 바다 색감이 오래 기억될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요즘에도 제주도로 가는 여객선이 이곳 바다를 지나간다고 합니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인데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분으로
당시에는 서인과 남인으로 나뉘어 당파싸움이 거셌는데
공교롭게도 송시열은 서인의 중심에서,
윤선도는 남인의 중심에서 서로 뜻을 달리 했습니다.
그 옛날 윤선도가 송시열이 배를 타고 지났을 저 바다는
더없이 잔잔했습니다.
숙적이었던 두 거두는 말년에 수 십 년간 쌓아 놓은 인생의 짐들을
이 섬에서 내려놓을 수 있었을까,문득 궁금해집니다.
고요한 물결만이 햇빛에 찰랑였습니다.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젊은 들꽃이 되어
이 바다 앞에 서면
나는 긴 열병 끝에 온
어지러움을 일으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 마종기,<연가>
보길도에서 배를 타고 뭍으로 나와 완도여객터미널 위
땅끝전망대에서 올랐습니다.
이제 막 청산도로 들어가는 여객선 한척이
섬에서 나오는 사람들과 섬으로 들어 가는 사람들이 교차하는
항구를 뒤로하고 뱃고동을 울립니다.
보길도를 1박2일에 여행한다는 것은 역시 역부족이었습니다.
격자봉에 올라 부용동을 내려다보지 못한것과
낙서재에서 우연히 만난 도보 여행자와 동행하느라 동선이 흐트러져
동천석실에 올라가보지 못한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어느 이른 봄날 세연정에 동백꽃이 흐드러질때
홀연히 또 보길도행 배에 올라 있을것 같습니다.
시간은 늘 빠르게, 빠르게만 갑니다.
그래서 여행만은 느리게 더,느리게 조용하고 고즈넉한 곳을 찾아
시간마저 느리게 간다는 착각을 느끼는 여행을 매양 꿈꾸지만
2017년은 바쁘다는 핑계로 스스로에게 순수하게 다가가는 쉼이 되는 여행,
지친 마음을 달래고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 여행을 게을리해서
삶이 많이 남루했던 한해였습니다.
2018년 새해에는
더 많이 더 자주 떠나야겠습니다.
"바다가 오염되기 전에,삶이 제 아름다운 깃털을 잃기 전에,
모든 장미가 회색이 되기 전에."
-로맹 가리,장편소설,<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중.
사진,글:윤선한
"삶이라는 극지
그대라는 대륙
목표도 없이,계획도 없이 그대를 여행하는 것이 이번 생을 횡단하는
나의 본질적 계획이었네"
-박정대의 시<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부분
배경음악: Toute Une Vie / Jean-Philippe Audin
첫댓글 어딘가로 항상 떠날 생각을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