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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DO 금호지구에 건축된 ‘금호성당’의 정면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소속 간호수녀들이 남측 병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 해방 전 평양 상수구리 성모수녀원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는 수녀들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 현재 생존하고 있는 평양 상수구리 성모수녀원 출신의 원로수녀들. [사진제공 - 최재영] |
수녀들의 방북 여정 코스
경수로 의무실 간호사겸 금호성당 사역자로 부름을 받고 파송식을 마친 성모수녀회 소속 수녀들은 방북 준비를 서둘렀으나 막상 KEDO 금호지구를 가기 위한 여정은 생각보다 힘들고 복잡했다. 당시 금호지구를 방문하려면 우선 세 가지 증명서가 필요했다. 뉴욕의 KEDO 본부가 발행한 ‘증명서(Certificate)’와 남측 통일부의 ‘방북 허가서’, 또한 북경을 경유해 귀국과 출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정식으로 ‘중국비자’를 발급 받고 여권에 첨부해야 했다. 마침내 이 서류들을 손에 쥔 수녀들은 1998년 3월,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고 방북 길에 올랐다.
통상 일반 기술자들과 근로자들은 선박 편으로 신포를 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 속초에서 3시간 30여분이 소요되는 쾌속정을 타고 신포의 양화항에 도착해 입북 절차를 밟은 뒤 차량을 타고 간다. 또한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 KEDO 요원들이나 VIP들이 방북하는 경우에는 북측이 직접 보낸 특별기를 타고 강원도 양양공항에서 출발해 함흥의 선덕공항으로 직항한다. 그러나 VIP가 아니거나 평범한 근로자들은 북경을 경유해 들어가야 했다. 의무실 간호사 신분으로 방북해야하는 수녀들은 서울서 북경을 경유해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 순안공항에 내린 다음 다시 그곳에서 함흥 인근의 선덕공항으로 출발하는 여객기로 갈아타는 방법으로 방북해야 했다.
중국을 경유하거나 남에서 북으로 직항하거나 상관없이 종착지는 모두가 함흥 인근의 선덕공항이다. 선덕공항에 내리면 경수로 건설 현장까지 버스를 타고 122㎞가 되는 거리를 4시간 동안 달려야 한다.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동안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설렘과 기대감에 사로잡힌 수녀들은 의무실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육적인 업무와는 별도로 근로자들을 영적으로 돌봐야 하는 사명감 때문에 매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KEDO 경수로 관련 전 지역에서는 다행스럽게 외교적으로 배타적 지배권이 보장되는 치외법권 지대여서 신변보장과 안전은 확보됐으며 오히려 북한 근로자들이나 관료들도 금호지구를 출입하려면 KEDO측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공사 초창기라서 그런지 도착해 보니 생활관 부지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여기저기 건물들을 짓는 중이었다. 당시 300명 정도의 근로자들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점차 인원이 증가되더니 나중에는 1500명으로 늘어났으며 근로자들의 생필품들은 식수만 빼놓고 모든 식량과 자재들이 남측의 울산항에서 바지선으로 조달되었다.
생활관 숙소부지는 신포시 호남리 동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발전소 건설부지를 기준으로 볼 때는 남동쪽 방향의 바닷가에 위치해 있다. 부지 동쪽에 인접한 바다에는 20~30m폭의 백사장이 있고 백사장 안쪽에는 방풍림을 보호하기위해 4~5m의 모래 뚝방이 길게 조성돼 있고 모래 뚝 안쪽에는 1~4m의 소나무 방풍림이 5~60m의 폭으로 융단처럼 촘촘히 잘 보존되어 있는 등 성당과 교회가 위치한 생활관 타운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명당자리에 조성돼 있었다.
수녀들과 남측 근로자들은 생활관 타운 안에서 모든 생활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숙소와 식당, 병원, 종교시설들이 들어서 있었고 은행과 슈퍼마켓, 노래방 등 각종 편의시설은 물론 골프연습장, 실내체육관 등을 골고루 갖춘 하나의 소도시처럼 보였다. 신기한 것은 이곳도 아침이 되면 남측 사회와 마찬가지로 근로자들과 공사 관계자들의 출근 전쟁이 시작된다. 생활관 부지에서 공사 현장까지는 무려 5.7㎞ 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한정된 출퇴근용 차량들을 타기 위해 줄을 서는 등 출퇴근하는 모습들은 대도시의 출퇴근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현장에 도착해 짐을 푼 수녀들은 평일에는 병원 의무실에서 근무하며 여가 시간이나 퇴근 후에는 컨테이너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거나 성경공부 등을 인도했으며 매주일이 되면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 20여명과 함께 미사대신 공소예절을 인도했다.
▲ KEDO 근로자를 태운 고려항공이 평양을 출발해 함흥의 선덕공항에 착륙한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 KEDO 근로자를 태우고 신포 양화항을 향하고 있는 386명 정원의 카타마란호. [사진제공 - 최재영] |
수녀들이 뿌린 성탄절 선물 때문에 벌어진 사건
경수로 의무실에 부임해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는 수녀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오래 전부터 성탄절 행사를 준비해왔다. 특히 이리저리 궁리하던 중에 크리스마스 전야에는 생활관 주변에 있는 여러 마을 주민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본국 대교구의 지원으로 산타클로스 선물처럼 양말 속에 선물을 넣어 주기로 했다. 성탄절 이브가 되자 수녀들과 신자들은 인근 마을 도로 여기저기에 양말에 담긴 선물 꾸러미들을 산발적으로 뿌린 것이다.
이튿날 이 사실이 북측 당국에 드러나게 되자 북측 관료들과 보위부는 성당 측과 KEDO 측에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수녀들이 곤경에 처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 북측 당국은 경수로 건설이 본격화되자 생활타운 주변에 있는 광천리, 금호리, 남흥리, 서흥리, 속후리, 오매리, 호남리, 호만포리 등의 여러 마을들과 주민들에게 남측이나 외국에서 방문한 외부인들과의 접촉시 주의사항 등을 교육했는데 이번 선물 사건으로 북 당국은 주민들에게 더욱 경각심을 부각시키며 예민하게 대응했다. 이번 사건은 부임한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현지 사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수녀들의 종교적 신심의 열정에서 빚어진 해프닝이었다.
필자에게도 성탄절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어느 무더운 여름 날 일행들과 점심식사를 하려고 평양의 어느 식당에 들어서니 입구 계단 벽면과 식당 내부는 물론 각 방안에도 여기저기 크리스마스 관련 장식들과 유사한 장식품들이 보이길래 지난 연말에 설치하고 일부러 더 철거를 안 한 것으로 혼자 생각했다. 알고 보니 장식들은 외국인과 해외동포 방문자들을 위해 1년 내내 장식돼 있던 것이다. 식사를 시중드는 여성봉사원에게 성탄절이 어떤 날인가에 대해 물으니 옆에 있던 안내원이 “우리는 성탄절(예수 탄생일)보다 태양절(김일성 주석 탄생일)이 더 소중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남과 북은 정치적, 이념적 차이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정서적 인식이 매우 달랐음을 목격한 것이다.
수녀들에게는 성탄절 선물 배포 사건 같은 문화적 충돌의 기억만 있던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근 마을 주민들이나 북측 근로자들을 통해 그들의 다정다감한 인심과 동포애를 체험할 수 있었다. 남측 근로자들도 각자의 방식대로 저마다 북의 현실을 체험하며 주민들이나 근로자들과 좌충우돌했던 경우도 많았으나 감동적인 일화도 비일비재했다.
어느 날 남측 근로자 한 명이 자신이 속한 파트의 인부들과 함께 다리 건설공사를 하던 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자신들 바로 옆에 못 보던 광주리 하나를 발견하고 보자기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따끈한 감자와 옥수수가 가득 담겨있었다고 한다. 객지에서 고생한다며 인근지역에 사는 마을 주민이 당국 몰래 슬쩍 놓고 간 것이다.
▲ 성탄절을 맞아 대형 십자가에 네온싸인 장식을 한 종교동의 모습. 우측은 신포교회당이며 좌측 멀리 보이는 작은 건물이 금호성당. [사진제공 - 최재영] |
▲ 정결, 청빈, 순명이라는 세 가지를 삶의 원칙으로 살아가는 성모수녀회 소속의 수녀가 묵상기도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경수로 공사의 엄청난 기록들
KEDO 경수로 공사 관련 부지는 북측 영토 내에 세워진 특별구역으로서 자그마치 270만평 달하는 규모인데 이는 여의도의 약 3배 면적에 해당하고, 생활관 숙소는 서울 용산구 정도 규모의 광활한 곳이다.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라 시작된 경수로 건설사업은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건설 공사의 첫 삽을 뜬 후 약 10년간의 공사 기간에 건설중장비, 기자재 등이 무려 100만 톤에 달하는 물량이 소요되는 대규모 사업으로 시작했다. 이중 콘크리트는 70만㎥, 철근 양은 63빌딩에 들어간 양의 15배인 7만 1000톤, 전선은 서울, 부산간 거리의 약 10배가 넘는 4700㎞, 부품숫자는 보잉 747 점보제트기의 약 20배에 해당하는 분량인 500만종이 투입되는 엄청난 공사였다.
공사에 투입되는 인력도 원래는 장기간 단계별 공정계획에 따라 연평균 하루 3000명, 최대 작업시 약 7000명 정도의 인력이 투입돼 원전 건설기간 중 총 연인원은 1000만 명 이상이 소요된다. 원전 1,2호기를 비롯해 원전사업이 중단되지 않고 본 궤도에 올라 끝까지 마무리 됐더라면 남북이 공동으로 번영하는 통일시대가 도래했을 것이고 동북아 평화정착에도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창 진행 중이던 공사가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주춤하더니 북핵 문제로 인해 2006년 1월 8일 KEDO 직원과 남측 공사관계자 57명 전원이 강원도 속초항으로 모두 철수했고 이듬해는 남측 정부의 경수로 사업지원단이 공식 해체되면서 11년 3개월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 인공위성으로 내려다본 KEDO 경수로 공사장의 광활한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 중장비를 동원해 원자력 1호기 기초공사를 하고 있는 남북의 기술자들과 근로자들. [사진제공 - 최재영] |
200석 규모의 금호성당이 건축되다
생활관 타운에는 1999년 8월에 설치된 KEDO대표와 한전직원들을 비롯한 합동시공단 직원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이 있는데 이곳에는 보일러시설이 붙은 식당, 화장실, 발전기용 시설물, 지하수 관정과 각종 장비와 차량을 정비하기 위한 정비공장, 화약보관용 건물, 감시초소, 휘발유와 경유를 저장하는 대형저장탱크, 주유시설과 관리용 컨테이너 등의 생활을 위한 최소단위의 시설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중 사무실과 정비공장은 철골구조에 샌드위치 판넬로 지어진 건물이었고 나머지는 주문형 컨테이너로 조립하여 만들어진 시설물들이었는데 바로 이곳에 컨테이너에 입주한 신포교회가 가장 먼저 세워졌으며 뒤이어 천주교 금호성당과 불교 법당도 컨테이너에 입주해 나란히 이웃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00년에 접어들면서 금호성당은 컨테이너 시대를 마감하고 서울대 건축학과 출신 김정신 교수(현 단국대 건축학과 교수)가 성당 설계 작업에 착수해 2001년에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후 금호성당 건축은 착실하게 진행돼 2002년도에 준공을 마치고 봉헌 축성을 했다. 200석 규모의 본당은 일반 성당에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포근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으며 가족을 떠난 외로움과 고단한 작업 때문에 몸과 영혼이 지친 신자들이 충분히 위로를 받을 만한 구조로 지어졌다.
성당, 교회를 비롯해 불교 법당이 위치한 종교동은 대부분 동해 바다를 향해 축조되었으며 금호성당의 제단 양쪽에 만들어진 유리창 밖에는 다른 건물들이 시야를 막았기 때문에 전망은 그리 좋지 않았다. 종교동 전체 면적은 모두 2500㎡(750평)의 규모로 매우 넓은 편이었으며 신포교회의 규모에 비하면 금호성당은 매우 작은 규모였다.
북측 영토라는 특수지역에 세워졌지만 성당 안팎은 의외로 성스러움과 경외심 등 다양한 심령 복합체가 느껴지도록 설계되었는데 평범한 외관과는 달리 자세히 보면 전통과 현대적 요소를 모두 지녔으며 반전의 매력도 지니고 있었다. 나지막이 울리는 신자들의 기도와 성가소리가 들리는 듯 그리고 고향을 떠나 이방인의 삶을 사는 신자들에게 고향의 대지와 모성을 느끼게 해주는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금호성당은 스페인의 가우디가 설계한 성당 위용은 아니어도 그 이상의 특별한 감명을 주기에 충분했다.
성당 정면에서 바라보는 외관은 마치 은총을 갈구하며 하늘과 동해바다를 향해 날개를 펼친 듯한 형상과 함께 막혔던 굳게 닫힌 남과 북의 장벽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듯한 문짝이 연상되도록 설계되었다. 특히 성당 출입구 위의 다섯 개의 구멍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구속을 형상화했다. 이처럼 성당은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 되어 성당에 들어서면 주변에서 들리는 소음은 사라지고 고요 속에서 묵상 기도와 은은한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신심을 유발한다.
▲ 2000년에 금호성당(KEDO 금호공소)을 설계한 김정신 교수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 제단 방향을 바라 본 금호성당 내부 모습. 2001년에 건축을 시작해 2002년에 축성(완 공)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 금호성당 출입문과 뒷 좌석 부분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금호사 불자들과 연등행사를 한 금호성당 신자들
종교동에 건축된 금호성당은 법당(금호사)과 나란히 위치해 있으며 평소에도 사이좋게 교류와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2005년 5월 15일 석탄일에는 금호사와 금호성당이 공동으로 석탄일 행사를 함께 치르기도 했다. 이날은 KEDO 현장 근로자들 중에 불교를 믿는 신자들 모임인 ‘금불회’가 주도해 석탄일 봉축법요식을 봉행했는데 이때 이웃종교인 금호성당의 수녀들과 신자들이 연등행사에 동참하는 것은 물론 순서도 함께 진행했다.
금호사가 태동된 것은 근로자들 중에 불교를 믿는 신자들 15명이 10여 평 정도의 컨테이너에 불단을 마련하고, 컴퓨터로 출력한 ‘佛’자를 불단위에 부착하고 1998년 1월 25일부터 매주 일요일 밤 8시 자체법회를 열면서 시작됐다. 열악한 소식을 파견근로자의 부인을 통해 접한 조계종 포교원측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지원과 협력을 시작했으며 컨테이너 법당에서 드려지는 법회는 당시 독실한 불자였던 김경철 과장(한국전력 원자력발전본부 과장)이 직접 주도했다.
그 후 2002년 5월 조계종 포교원과 민족공동체추진본부(이하 민추본)의 지원 하에 ‘금호사(琴湖寺)’라는 정식 사찰을 종교동에 준공했으며 민추본은 법당 준공식에 맞춰 불상과 불단, 현판과 주련 등을 지원했는데 법당의 규모는 154㎡(47평)이며 54㎡(16평)의 다용도실 2개와 사무실 부엌 화장실 등을 갖췄으며 불상 외에 지장보살탱화와 관세음보살 탱화도 모셔졌다.
법당이 준공된 이후로 금호사가 폐쇄되기까지 40여명의 회원들이 매주 일요일 정기법회와 목요일 염불 및 교리공부를 통해 활발한 신행활동을 해 왔으며 매년 부처님 오신 날 행사 때가 되면 바로 옆 건물에 있는 금호성당과 함께 적극적인 교류를 했다. 기독교 신자들과는 달리 천주교와 불교신자들은 생활관 타운에서 종교의 벽을 헐고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종교평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서와 문화의 차이로 인해 발생한 사건들
남측에서 금호지구를 들어가는 사람들은 북측 세관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때 디지털 카메라나 고배율 카메라, 컴퓨터 등은 반입이 금지된다. 평소 만두를 좋아하던 어느 근로자는 저녁에 만두를 쪄 먹기 위해서 방북하기 전에 미리 만두찜기를 구입해 들어갔다. 그러나 만두찜기 특유의 동그란 모양의 접을 수 있는 구멍 뚫린 받침대를 살펴 본 세관원이 위성 안테나로 오인해 혹독하게 심문을 해 압수를 당했고 그 후 다시 찾아오기까지 진땀을 뺀 적이 있었다. 금호지구에서는 이처럼 남과 북의 생활 문화 차이에서 비롯된 오해들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남북의 일꾼들은 함께 일하고 식사하며 함께 휴식함으로서 매우 친숙해질 수 있는 기회와 더불어 대화의 횟수도 많아졌다. 주로 북측 근로자들의 들려주는 이야기는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주체사상에 대한 주제가 많았으며 제국주의 관점에서 미국과 일본을 비난하는 대화가 주류를 이룬 반면 남측 근로자들은 북측 사회의 실상을 직접 듣고 싶어 하는 질문들로 이어졌다.
어느 날 미국 뉴욕에 있는 KEDO본부 측에서 현장의 품질, 안전 점검 목적 등으로 출장을 나온 엔지니어가 공사 진척 상황을 체크하던 중에 북측 근로자들의 사전 동의를 받지 않고 무단으로 사진 촬영을 하던 중 50명에게 둘러싸여 2시간 동안 억류된 적도 있었다. 또한 평상시 북측 체제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소수의 남측 근로자와 기능공들이 북의 체제를 비판하다가 여러 명의 북측 근로자들에게 몰매를 맞은 사건도 있었다. 이 같은 사건들은 북을 배려하지 않고 남측 근로자와 KEDO 측 미국인이 규칙을 위반하고 원인 제공을 한 것이다.
또한 건설 초창기 생활관 타운 게스트하우스에서는 김일성 주석 사진이 찢겨진 채 발견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일로 인해 선발진이 일주일 동안 북측 관계자의 조사를 받으며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공사를 위해 최초로 투입된 합동시공단의 인원은 10여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게스트하우스에서 숙식을 하며 초기 시설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차츰 체류 시일이 지나면서 남측에서 가지고 온 책자나 잡지 등의 읽을거리가 바닥이 났다. 하는 수 없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게스트하우스 프런트에 놓여 있던 노동신문을 각자의 방으로 들고 가서 정독을 하였고 그 방에는 이미 다 읽은 노동신문이 여러 부 쌓여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생활관 숙소 공사가 완공되어 직원들은 짐을 싸서 그곳으로 모두 이사를 했고 직원들이 떠난 빈 방들을 북의 여성 봉사원들이 청소를 하게 됐다. 그런데 쓰레기와 잡동사니들을 뒷정리 하던 여성 봉사원들의 눈에 구겨지고 찢겨진 노동신문들이 발견된 것이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선발진 직원들이 억류되었고 북측 조사 당국에서는 사건 당사자를 색출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조사를 하였으나 신문을 훼손한 당사자를 찾지 못했다.
결국 북측 조사단은 여성봉사원에게 신문을 가지고 간 사람들을 직접 지목하도록 했으며 결국 지목된 두 명중에서 합동시공단에 근무하는 간부급 1명이 남측으로 원대 복귀하는 것으로 그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이렇듯 북측은 최고지도자와 관련된 사건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중대한 사건으로 취급했으며 다른 부분은 용서와 타협이 있을 수 있으나 ‘최고 존엄(최고지도자)’과 관련된 사안은 끝까지 문책하고 색출한다.
▲ 생활관 타운 내 합동시공단 직원들의 숙소동. [사진제공 - 최재영] |
▲ 외국인 근로자(우주베키스탄인) 숙소동. [사진제공 - 최재영] |
▲ 생활관 부지 내 실내 체육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여기에 펜을 놓고 가면 언젠가 다시 올 때 그대로 있을 것
비록 경수로 건설은 40%도 못 미치는 공정률에서 중단됐지만 남북 관계에 있어 긍정적인 효과를 냈고 이것이 밑거름 되어 결국 금강산관광 사업과 개성공단 사업의 결과물이 탄생했으니 경수로 공사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협력의 효시였던 셈이다. 그러나 경수로사업이 중단된 이후에도 계속 개최된 북핵 관련 6자회담이 잘 풀렸으며 경수로 연장 공사와 더불어 설비의 활용이 가능한데 2016년 현재 다시 재개된다 해도 중단된 원자로 공사 현장은 활용이 힘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할 최악의 상황이다.
북측이 아무리 보존을 잘해 놓았다 하더라도 공사가 재개되어 설비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기한은 최장 3년 정도로 예상하는데 이미 10년 이상이 지났기 때문이다. 나는 마지막 철수진에 속해있던 KEDO의 요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남측 KEDO 요원들이 완전히 철수할 때 북측 KEDO 책임자가 숙연한 표정으로 “선생들이 여기 이 책상 위에 펜을 놓고 가셨다면 언젠가 공사가 재개돼 다시 오시면 이 펜이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라면서 이곳을 잘 관리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잘 지킨들 너무 오랜 기간 방치되었기 때문에 발전소 공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이지만, 그래도 공사가 재개되어야 한다.
아울러 성당과 교회도 다시금 문을 활짝 열고 신자들이 미사와 예배를 드리는 날을 상상해 본다. 분단 50년 만에 북측 영토에 건축한 교회와 성당에서 10년 동안 벌어진 많은 이야기들은 현장에서 일한 남측의 신자들이 북 인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 보고 들은 생생한 체험들이었다. 이들의 증언들은 사목적, 목회적 차원을 뛰어 넘어, 분단 조국의 아픔과 우리들이 나아갈 길, 그리고 하나 된 조국을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와 마음가짐을 절절히 호소하고 있는 통일지침서가 되고 있다.
해방 전후의 국제정세 속에서 당사국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루어진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며 지금까지 지속된 남북 대치상황,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희망과 국가관, 생활상을 남과 북의 근로자들은 금호지구라는 한 공간에서 여실히 보여주었다. 특히 고난의 행군 시기를 막 지나면서 굶주리지 않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북녘 동포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통해 오히려 민족의 생존력을 보았으며 하나의 코리아(Korea), 하나의 민족으로 통일국가를 이룩해 세계 속에 우뚝 서기 위해서라도 남과 북은 이 금호지구에서 다시 만나고 뭉쳐야 한다.
▲ 좌측 섬은 개암도, 우측 상단 끝 부분이 생활관 부지가 있는 위치. [사진제공 - 최재영] |
▲ 신북청-북청간 정기 운행하는 덕성선에는 2003년까지 증기기차가 운행됐다. [사진제공: 이만근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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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호지구 호남리 생활부지에서 다정하게 북측 근로자들과 대화하는 남측 근로자(좌측). [사진제공: 이만근 사진첩] |
▲ 인공위성에서 찍은 경수로 원자력 발전소 공사 현장과 그 주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남북 협력의 상징으로 기념해야 할 건물들
필자가 보기에 그동안 남측에서 발생했던 북한 문제를 둘러싼 갈등의 본질은 좌우 이념 대립이라기보다 진실과 거짓의 문제였다. 그래서 북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북에서 겪은 일상적 체험에 관한 다양한 형식의 기록들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이제는 이념이 아닌 진실의 차원에서 북의 현실에 접근해야 한다. 어느 하나의 관점에서만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북의 여러 얼굴을 폭넓은 관점에서 객관적 시각으로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남측은 그동안 북에 대한 종교적 상황에 대해 왜곡된 자료와 의도적으로 생산된 거짓 정보를 가지고 무조건 비난했다. 정치인들과 달리 종교인들은 진실에 가까운 팩트(FACT)와 정확한 정보를 잘 정리해 북을 바로 알리는데 충실해야 하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남측의 일부 목회자들은 북을 왜곡하는데 앞장서며 일반인들보다 더 반북적, 반통일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사실을 부풀리거나 축소하지 않고, 직접 겪은 일과 들은 이야기들을 따뜻하게 민족의 앵글로 가슴 찡하게 그려내는 일들을 종교인들이 앞장서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럽에는 지난 500년간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던 소피아성당을 각국의 반환 요청과 종교적 복원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특정 종교가 아닌 인류 모두의 공동유산인 박물관으로 지정하고 그곳에서의 모든 종교 행위를 금지했다. 금호성당과 신포교회당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동안 벌어진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금호지구 한켠에서 굳세게 자리를 지켜온 성당과 교회는 폐쇄된 이후 인적이 끊긴 10년 동안에도 적막함 속에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수로 건설이 2006년 공식 종료된 후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연의 불길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고목처럼 우뚝 서 있는 성당과 교회는 나름대로 민족공조와 남북통일을 꼭 해야만 하는 타당한 이유와 상징을 유지하고 있는 건축물들로 보여지며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당시 신포에서 근무했던 남측의 어느 근로자는 아직도 벽돌공장 돌격대 작업반장이던 북측 동료를 잊지 않고 있었다. 또한 수녀들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민둥산 소나무 숲에서 솔잎을 따거나 소나무 껍질을 칼로 긁어모으는 할머니와 손자의 모습을 정지된 화면처럼 잊지 않고 있었다.
또한 공사 초창기에는 인원이 적어 남북이 함께 단출하게 식사를 했지만 체류 인원이 증가됨에 따라 식당이 두 곳으로 분리되어 따로 식사를 했다. 사실 따로 식사를 했던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북측 근로자들의 왕성한 식사량과 고기 음식을 좋아하는 식성 때문이었다. 특히 북측 근로자들은 양말 대신에 압박붕대 형태의 발싸개를 신었는데 여름에도 추위를 느껴서인지 바지 안에 내복을 입고 작업을 했다. 이런저런 안타까운 기억들을 가슴 저리게 추억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기약 없이 헤어졌고 그 가슴 아픈 이별의 기억들도 이젠 아련한 추억의 편린으로 남게 되었고 공사 현장은 점차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생활관 숙소 지역은 원전 공사가 완공된 이후에는 북측 당국에 모두 인계되어 발전소 운영 직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뉴타운 형식이었다. 독신자용 10평형부터 대가족용 30평대 까지 여러 종류의 숙소가 건설되었는데 지금은 누가 그곳에 살고 있는지 사뭇 궁금하다. 남북의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내일을 위한 국가비전을 세우는 그날을 위해 다시 공사가 재개되어 함께 먹고 마시며 땀 흘려 일하는 그날이 다시 오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