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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 내릴 봄날 같고…… - 김수영의 「꽃잎 1」에 관하여 /이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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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환한 봄날들이 탄생의 의미를 뿌리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4월은 가을보다 오히려 죽음의 메타포에 가깝다. 이 계절 안에서, 나는 피어나는 것들보다 더 압도적인 지는 것들을 본다. 지는 것들은 대게 꽃잎들이다. 가을날 지는 것들이 대개 잎이라면, 이 봄날 꽃잎들의 추락은 훨씬 극적이고 자극적이며, 에로틱하다. 꽃잎들은 식물들의 징그러운 성기가 아닌가. 그 떨어져 내리는 꽃잎들에 관해서 한 시인은 "임종의 생명"이라는 직유를 붙여준다. '생명의 임종'이 아니라, '임종의 생명'이다. 왜 그런가?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는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이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이 시는 김수영의 대표작 목록에는 제외되어 있다. 김수영 시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일면적인 관심과 산문성에 관한 선입관이, 이와 같은 시를 읽지 못하게 만드는 문학 제도적인 장애들이다. 김수영은 시의 언어적 에너지에 대한 첨예한 의식을 지닌 시인이다. 정치성과 산문성은 그의 시의 기본 원리가 아니라, 그 시적 에너지의 미학적 부산물에 속한다. 이 시는 의미의 논리를 끊임없이 비껴 가는 모호하고 몽롱한 진술들을 반복한다. 이 작품을 논리적인 언어로 재구성한다는 것을 불가능해 보인다. 앞서서 이 시를 분석한 눈 밝은 평자들은 부정사군(不定詞群)에 주목한 바 있다. '아닌', '아니고', '조금', '모르고' 등의 반복되는 부정사들은 앞의 진술들을 지우고, 시의 진술을 끊임없이 부정형(不定型)의 상태 속에 미끄러져 들어가게 만든다. 꼬리를 무는 뒤의 진술들은 앞의 진술들을 교란시키고 불명확하게 만드는 효과를 산출한다. 이 교란적인 반복은 일정한 리듬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주술의 경지에 이른다. 주술적인 언어는 자연을 이인칭의 세계로 인식하며, 언어가 그 자연과 교통하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주술은 자연과의 유기체적 일체감과 통일성을 구현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시의 주술은 자연과 주체에 대한 분열증적인 공간으로 우리를 이끈다(특히 이 시의 모호한 시점을 보라).
언뜻 보기에는 임종의 생명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같고 혁명같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같고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같고
부정의 주술들은 직유의 주술들로 이어진다. 뒤따르는 직유들은 앞의 직유들 위에 축적되는 수사적 두께를 만들지 않는다. 뒤의 직유들은 앞의 직유들을 흔들어 놓는다. '임종의 생명'이란 '낙화'의 일반적인 의미인 '생명의 임종'의 전도이다. 그것은 '낙화'에 대해서 '죽음'보다는 '재생'의 의미를 재문맥화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 전도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먼저'와 '나중'과 '떨어져 내릴', '떨어져 내린' 등의 시간의 부사어에 주의해야 한다. 이 시간 부사어의 반복적 사용은 저 유명한 「풀」에서의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라는 시구를 탄생시킨다. 분열증적 비유법에는 끊임없이 순간을 '임종'으로 몰아가는 '생명'의 사건이 아로새겨져 있다. '혁명'이란 바로 그런 '생명'의 사건이 아닐까? 떨어지는 꽃잎은 죽음의 의미로도 재생의 의미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저 순간들의 임종 속에 처해 있는 존재들에 대한 주술일 뿐이다. 규정될 수 없는 생명의 사건들을 호명하려 하기 때문에, 그 주술은 불투명하고, 모호하다. 김수영이 서정성의 언어를 버리고, 혼돈을 이행하는 언어를 선택한 것은 이 모순된 생명의 동력을 시화하려는 욕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 시는 내게는, 무너져 내릴 봄날 같고, 무너져 내린 봄날 같다. * 이광호 : 평론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1963년생. 평론집 『환멸의 신화』『위반의 시학』『움직이는 부재』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