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신반의하던 때 연습서 홀인원… 아, 이제 샷감이 돌아왔구나 했죠 퍼팅 잘될 때의 얼굴 따로 있대요… 제가 무표정해도 선수들은 알죠 4년 뒤 도쿄서 또 金 따고 싶어요"
"예전엔 그냥 박인비 대 리디아 고의 경기다, 이런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올림픽은 다르더라고요. 이건 한국과 뉴질랜드의 대결이란 생각을 하면서 경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23일 새벽 3시 10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 박인비(28)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116년 만에 정식 종목으로 복귀한 여자 골프에서 한국에 금메달을 선사한 박인비는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침묵의 암살자'에서 인사성 밝은 이웃집
새댁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왼손 엄지 부상으로 40일 전만 해도 올림픽 출전을 양보하는 게 옳으니 아니니 하는 논란의 대상에서 180도 극적
반전을 이룬 그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손녀 박인비와 골프 치는게 소원이었던 할아버지 - 박인비가 23일 인천국제공항에서 할아버지 박병준씨의
품에 안겨 환하게 웃고 있다. 가족을 만난 박인비는 가장 먼저 리우올림픽 금메달을 할아버지 목에 걸었다. 박병준씨는“내 손녀 인비가 국민의 딸이
됐다”며 눈물을 흘렸고, 박인비는“할아버지 왜 우세요”라며 할아버지를 껴안았다. 박인비는‘손녀와 골프 치는 것이 소원’이라던 할아버지 덕에
골프를 시작했다. /오종찬 기자
제일 궁금한 건 5타 차 싱거운 결말로 끝난 여자 골프 세기의 대결 '박인비
vs 리디아 고'였다. 또박또박 실수 없이 치는 '닮은꼴' 플레이, 그래서 박인비도 늘 부담스러워하는 상대가 뉴질랜드 교포 리디아 고다. "셋째
날 리디아가 2타 차로 쫓아오니 '결국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2타 차이는 한 홀에서 뒤집힐 수 있는 스코어고, 상대가
리디아니까 긴장할 수밖에 없었죠."
국내 TV 중계에는 둘이 거의
대화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18홀 내내 중계가 따라붙는 건 아니잖아요"라고 한 박인비는 "저의 긴 퍼팅이 막 들어가니까 리디아가 '작년
브리티시 여자오픈과 똑같네요. (퍼터) 대면 다 들어가네요'라고 하더라"고 했다. 박인비는 "제가 퍼팅이 잘되면 표정이 좀 달라요. 무표정하다고
하지만 제가 자신 있을 때 얼굴이 따로 있거든요. 그러면 다른 선수들도 알아차려요"라고 했다. 박인비와 같은 조에서 경기하는 선수들을 떨게 하는
'인비 공포증'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리우에서 밤마다 드라이버
하나를 들고 남편 남기협씨랑 옥상에 올라갔다. "(공 없이) 빈 스윙 연습을 했어요. 제가 빈 스윙을 하면 남편과 스윙 코치로 합류한 남편
선배(김응진 코치)께서 분석을 해주고요. 그리고 두 사람이 빈 스윙하는 걸 제가 보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신기하게 빈
스윙할 때만큼은 아무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긴장감을 풀어주는 힐링이었어요. 첫날부터 스윙이 잘돼서 매일 같은 순서로
반복했죠."
새 식구 된 강아지 이름, 리우라고 지을까 봐요 - 귀국 직후 인천공항 주차장에서 찍은 박인비
가족사진. 왼쪽부터 남편 남기협씨, 아버지 박건규씨, 할아버지 박병준씨, 박인비, 어머니 김성자씨. 박인비가 안고 있는 강아지는 이날
남편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오종찬 기자
그동안 왼손 부상으로 쪼그라들다시피 했던 스윙이 커지고 임팩트가 제대로
이뤄지면서 샷감이 돌아왔다고 한다.
스스로도 "잘해낼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 간 올림픽이지만 올림픽 코스 연습 라운드 도중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했다. 연습 라운드에서 홀인원이 나온 순간 "이제
샷감이 돌아왔다"는 확신을 얻었다. 연습 라운드 돌던 시간 마침 남자 골프 시상식이 열렸다. 멀리서 들리는 국가가 애국가처럼 들렸다. 우승자도
마침 박인비가 2013년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할 때 US오픈에서 우승한 저스틴 로즈(영국)였다. 로즈는 1라운드에서 홀인원을 하고 우승까지
했다. "40일 동안 한계 상황까지 몰아붙이며 훈련했는데 이제 정말 준비를 마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올림픽을 끝내고 리우 하늘에
울려 퍼지는 애국가는 "이제까지 들어본 가장 감미로운 최고의 음악"이었다.
올림픽 금메달로 골든 슬램까지 했는데 이제부터는 정말 편안하게 칠 수 있지 않을까? 박인비는
"전환점은 맞지만 선수 생활 하는 동안 즐긴다는 건 쉽지 않네요. 전 명예의 전당 들어가면 세상 다 얻은 것 같고 즐기면서 칠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달라지는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선수 생활 하는 동안에는 긴장과 압박이 숙명 같아요. 섣불리 '즐기면서 한다'는 말을 못
하겠어요."
그는 이번 주 청와대 초청 행사 등을 마치면 통증을
참으며 쳤던 왼손 치료에 집중할 것이라고 했다. 외국에선 은퇴설이 돌고, 국내에선 당분간 대회에 나서지 않을 것 같다는 예상이 나온다. 하지만
박인비는 "메이저 대회가 된 뒤 로는 우승 못 해본 에비앙챔피언십(9월 15일 개막)도 나가고 싶고요. 장담은 못 하지만 선수 생활을
계속하면 4년 뒤 도쿄올림픽에서 2연패에 도전하는 것도 좋은 목표가 될 것 같아요"라고 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응석 부리던 박인비가 남편에게 강아지를 선물 받고는 얼굴을 비볐다. 그는 "리우라는 강아지 이름 어때요"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