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수기 연재]
나는 브로커였다 15
탈북자 유상준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 김성민(현 자유북한방송국 대표)형과 통일을 준비하는 탈북자 협회 허광일 회장님이 철민이 추모식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여 주시였다. 나는 성민형과 함께 철민이 유해를 가지고 오두산통일전망대로 향하였다.
우리가 나서 자라고 아름다운 꿈만 꽃피울 줄 알았던 우리의 고향은 김정일 독재의 신음하에 폐허가 되였고 살아서 돌아가려고 하여도 갈수 없는 한 많은 땅, 원한의 땅이였지만 회귀본능이랄까 죽어서도 묻히고 싶은 고향인지라 성민형과 허광일 형은 철민이가 죽어서도 잊지 못하였을 고향땅을 바라보며 편히 잠들기를 바라면서 북한 땅이 지척에 보이는 오두산통일전망대에서 추모식을 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오두산 통일전망대에는 벌써 수많은 탈북자들과 북한 인권관련 단체 회원님들이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추모식장은 어린 영혼의 평안을 기리며 정숙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추모식은 탈북자동지회 대외협력 부장 김민수님의 사회로 시작되였고 묵념과 천기원대표의 추모사와 성민형의 추모시로 막을 내리였다. 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철민에게 바치는 시.
봄내 가으내,
너를 기다린 사람이 있다.
하루 한시도 잊지 않고
네 이름 불러온 사람이 있다.
예쁜 신발이 보이면
마르고 터진 아들 녀석의 발이 떠오른다고
눈시울 적시던 사람,
학교길이나 학용품 가게 앞에선
그예 넋을 놓고 멍하니 북녘 하늘을 바라보던 사람,
그렇게 한시도, 단 하루도 너를 못 잊어하던 아비 앞에
무정한 녀석아, 너는 죽어서,,,,,,
죽어서야 돌아왔구나.
아버지를 찾는 길이 그렇게 힘들었더냐
자유를 찾는 길이 그리도 험악했더냐
단지 살아야겠다는 이유 하나로 고향을 떠난 너에게
삶의 길은 그렇게 꽉 - 막혀 있었더란 말이냐
제도는 무엇이고 이념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열두살 어린 너를 사막에 묻혀야 했는지
한치 한치 저 목타는 사막을 너 기어가는 동안
이 나라의 아비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철민아! 너 지금 준절이 묻고 있구나,
이제 눈을 감아다오
자식을 먼저 보내야 하는 이 슬픈 현실 앞에서
주먹을 틀어쥐는 아비들을 믿어다오.
더 이상 아비보다 먼저 가는 자식이 없게 하기 위하여
더 이상 굶어죽고 맞아죽고
얼어 죽는 자식이 이 땅에 업게 하기 위하여
자유의 제단에 맹세의 꽃 정히 얹는다.
불러도 불러도 답이 없는 철민아!
너 못 누린 삶의 무게만큼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지켜봐 다오. 너의 영혼
편히 눈, 감을 때까지 자유를 향한 우리의 맹세를 지켜봐 다오.
추모식장은 추모사와 철민에게 바치는 시 랑송으로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어린 소년의 비참한 죽음과 자신들이 걸어온 쓰라린 지난날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살아서 다시 만나볼 수 없는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과 애통한 심정에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성민형은 철민이 추모식을 위한 일정을 짜고 온밤을 자지 못하고 눈물로 추모시를 쓰고는 지우고 그렇게 하기를 수없이 하였단다.
나는 오늘 이 지면을 통하여 철민이의 추모식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도움을 주신 오두산 통일전망대 관계자분들과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여러 가지 일로 바쁘셨던 성민형과 허광일 형님께 무엇이라고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고마웠고 또 고마웠다. 이제는 내가 하여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하여 나가면 된다. 여권 발급문제는 국가 인권위원회에 진정 하였으며 인권위는 모든 것을 잘 알아서 처리하겠단다.
이번 중국 여행은 단순히 탈북자 실태조사와 일군을 어떻게 선택을 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내가 중국에서 숨어 지내던 때로부터 3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졌을 것이고 탈북자들의 지방 분포 정형도 대충은 감을 잡아야 다음 일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나는 부득이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원을 하지 않고 곧 돌아서 나올 것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내가 준비한 물품들은 탈북자동지회에서 잡지"탈북자들"과 황장엽 선생님의 저서 몇 권, 탈북자들에게 공급하여 줄 옷 30 Kg 정도를 준비하였다. 이미 중국에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 어느 곳에서 친척 확인 전화가 오면 당신의 친척이 중국방문을 온다고 대답하라고 미리 이야기는 하여 주었기에 친척방문으로 비자 발급은 별로 문제 될 것 같지를 않았다.
그때만 하여도 처음 중국으로 들어 가기에 비자 발급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하여 가장 손쉽고 또 몇 달 간의 기간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친척 방문 비자를 신청 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이후로 부터는 친척방문 비자를 신청하지 않고 별도로 1년 복수 비자를 신청하여 체류 기간의 제한이 없이 중국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있었다.
중국을 출발하기 전 김성민 국장님과 주선애 교수님이 몸 조심히 잘 다녀오라고 자신들의 정성이 담긴 후원금을 나의 손에 쥐여 주시였다. 나는 중국어도 모르고 통역도 없이 중국에서 다녀야 하기에 조금은 걱정이 되였지만 일단은 첫 걸음을 밟으면 그 다음 일은 어떻게 되는대로 맡기면서 하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인천 -대련행 배에 올랐다.
배가 대련항에 도착하자 나는 짐칸에 놓아둔 옷 지함을 찾아들고 세관으로 나가는데 검사대 까지의 거리가 멀고 경사가 가파로워 짐을 메고 나가기가 만만치 않다. 나는 세관을 빠져 나오자 급히 택시를 불러 세워 타고는 역전으로 향하였다.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중국의 각 철도 노선에 대한 열차 시간표를 미리 확인하고 있었으며 대련항에 내려 급히 서두른다면 대련-도문행 열차를 탈수가 있다고 판단 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아니 되지만 2003년경에는 배에서 내려 급히 서두르면 대련-도문행 열차를 능히 탈수가 있었던 것이다. 언어 소통이 아니 될 것 같아 걱정을 많이 하였는데 오래전에 듣고 자습한 덕분인지 그런대로 차표를 끊고 간단한 회화를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아 다행이였다.
내가 가는 목적지는 연변이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세월을 노예로 살았고 모진 매도 맞아 보았다. 그곳에서 탈북자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
[다음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