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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기상하 메시야 왕국의 대망
(11) 하나님의 궤를 옮기다 역대상 13장 1-8절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왕이 되면 무엇부터 하실까요? 굳이 왕이 아니더라도, 노력이든 우연이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과 물질과 권세와 사람을 얻었다면 제일 먼저 어떤 일을 하시겠습니까?
엊그제 해미중학교 43회 동창 카톡방에 이런 글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자기가 산 로또 용지를 놓고, “월요일에 출근 안 하게 해주세요.” 답글로는 “출근 안할 것 같은데” “어~ 친구 기억할께!”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무슨 일부터 하고 싶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다윗이 왕이 되어 첫 번째로 했던 일을 소개합니다. 왕이 되어 처음으로 국무회의가 있었던 것이지요? 모든 지휘관들이 모인 전체 회의였습니다. 다들 대통령의 첫 행보, 첫 국정과제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때 다윗이 말한 것, 최우선으로 말하고 단 한 가지 말한 안건은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였습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1-3절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초원이 딸린 성읍에 사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을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대상13:1-3)
그렇다면 왜 다윗은 이 법궤를 옮겨야만 했던 것일까요? 오늘 본문 3절을 메시지 성경으로 읽으면 다윗의 마음을 조금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연인을 잃어버린 것 같은 심정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3절,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부분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the Chest that was out of sight, out of mind during the days of Saul."(대상13:3, MSG)
사울의 날들 동안, 하나님의 궤가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에서도 멀어지게 되었다. 오늘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멀어진 마음이고 이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른 하나님의 궤를 눈앞에 옮겨와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꾸 봐야된다는 것이지요. 다른 영어성경을 보니 “inquire”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께 묻고 조사하고 요청하지 못했다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 앞서 “면회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울왕 때에는 면회하질 않았다는 것이지요. 묻고 여쭙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찾지 않았고, 만나지 않았고, 홀로 계시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마음에서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의 궤가 어디에 있길래 사울은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면회조차 못하고,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에서도 멀어졌다는 말까지 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이전 법궤가 등장했던 마지막 구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사무엘상 7장 1-2절입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삼상7:1-2)
보세요. 아벡전투에서 블레셋에 법궤를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이 죽지요?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엘리의 며느리 역시 아기를 낳다가 죽습니다. 블레셋의 도시들을 벌하시고 7개월 만에 벧세메스로 다시 돌아오신 하나님은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그리고 사무엘의 초청으로 에벤에셀 미스바 대성회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나 사무엘이 늙고 사울이 왕이 됩니다. 40년간 통치한 사울이 죽고 다윗이 유다 왕이 되어 7년 6개월이 지나고 이제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도, 법궤는 여전히 어디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국경지역, 기럇여아림 산속,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자그마치 몇 년? 최소 70년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70년동안 이스라엘의 중심에 머물지 못했던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하나님 중심 다윗이 이스라엘 12지파의 임금이 되자, 제일 먼저 그는 법궤를 옮겨오는 것입니다. 나라의 중심, 예루살렘에, 신앙의 중심, 법궤를, 하나님을 모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립던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70년만의 상봉이니 얼마나 준비를 많이 했을까요? 오늘 본문 5절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에 다윗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고자 할새”(대상13:5)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7-8절)
다윗이 이스라엘 나라 남쪽 국경에서부터 북쪽 국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을 모읍니다. 사무엘하를 보면 3만 명을 선별했다고 기록을 하지요? 뽑고 뽑아서 나이든 어른들부터 어린아이들까지 선별하여서 오늘 이스라엘의 대표들이 하나님의 궤를 모시는 행진에 참여합니다.
이 행렬에 참여했던 이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준비하는 과정이나 오늘 이 모든 행렬에 몸가짐 마음가짐이 남다르지 않았겠습니까? 다윗이 얼마나 엄격한 기준으로 뽑은 사람들일까요? 그리고 이렇게 뽑힌 사람들은 자부심으로 기쁨으로 이 행진을 위해 여러 날을 합숙하며 준비했을 것입니다.
사람들만 정성으로 준비했을까요? 아뇨, 오늘 본문이 기록하지요? 새 수레를 준비합니다. 좋은 나무를 골랐겠지요. 최고의 목수들과 이스라엘 최고 기계공학과 박사들과 연구원들이 동원되었겠지요. 아주 정결한 소를 선택을 했겠지요. 이스라엘 중에 제일 좋은 소를 고르고 골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당시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동원되어서 하나님의 귀환을 환호했던 것입니다.
어떻게요?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가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이보다 어떻게 더 하나님을 모셔올 수 있으랴, 우리도 이렇게 기쁜데 하나님은 얼마나 기분이 좋으실까, 모두가 하나님께서 흐뭇해하시고 즐거워하실거라는 상상밖에 할 수 없었던 행진이었던 것이지요. 다윗도 기쁘고 사람들도 행복하고 보는 이들마저 그 웅장하고 화려하고 멋진 스케일에 나도 모르게 물개박수가 쳐지는 그런 행진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다고요? 오늘 그렇게 기쁨으로 시작한 행진이 곧, 멈춰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소들이 뛰고, 수레가 요동치고, 하나님의 궤를 붙들려고 했던 웃사라는 사람이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왜 하나님은 사람들이 정성으로 준비한 행진을 싫어하셨을까요? 왜 사람들이 정성으로 만든 수레에서 내리려고 하셨던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부터 문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함께 오늘 본문 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중략)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대상 13:2-3)
여러분도 눈에 보이시지요? “여호와께로 말미암아야 한다”는 조건이, “너희가 좋게 여기고”라는 조건보다 뒤에 있습니다. 여호와께로부터 말미암는 일은 우리가 좋게 여기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일은 그저 순종할 뿐입니다. 왜요? 그분은 ‘그것까지 보시는 하나님’(God-Sees-To-It)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지못하고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보시고 계획하시고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때요? 여호와께로부터 말미암음이, “너희가 좋게 여기고”에 밀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좋게 여기지 않으면, 여호와께로부터 말미암은 일조차도 중요하게 다뤄지지않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스며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결국 이 일이 어떻게 되지요? 4절입니다. “뭇 백성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그리고 나서 곧바로 사람을 모으고 수레를 준비하고 소를 준비하고 오케스트라를 준비한 것입니다. 무엇이 빠져있지요? 네, 여호와께로부터 말미암음이 빠져있습니다.
결국 다윗은 오늘 사람들이 좋다고 하니, 사람들의 눈이 이일을 좋게 여기므로, 일을 진행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시는지는 온데간데 없습니다. 하나님께 묻기 위해서 궤를 옮겨오려고 했는데, 이 일을, 사람에게만 묻고, 하나님께는 묻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일이 아니라, 다윗과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일이, 하나님의 말씀없이, 하나님의 허락없이, 하나님의 승인없이, 아니 하나님께 단 한 마디 구하지 않고 진행이 되었던 것이지요. 아니 성경책을 한 번이라도 떠들어보고, 아니 전국에서 제사장들을 레위사람들을 불러 모았으면 오늘 그들에게 자문이라도 한 번 구해야 했는데, 그들은 그저 다윗이 준비한 행진에 들러리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에이, 목사님, 써프라이즈~ 모르세요? 하나님께 써프라이즈 해드릴려고 그런 것 아닐까요? 여러분, 사람들 사이에서도 써프라이즈 많이 해보셨나요? 그 써프라이즈가 써프라이즈로 잘 받아들여지더냐는 것입니다. 아뇨, 대부분의 경우, 나만 신나고 나만 즐겁고 나만 실컷 김칫국 마시고 하는 일이 되고 말지요. 이런 거 하려고 했으면 “나한테 물어보고 하지!” 이렇게 서로 서운하고 서로 맘 상하는 일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일을 당사자인 나하고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할 수가 있냐고 싸우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지요.
그래요. 오늘 이 일이 그러했습니다. 사람들끼리 의기투합해서, 사람들끼리 행복하고 사람들끼리 즐거운 행사였을 뿐, 하나님은 하나도 기쁘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물론 다윗과 백성들이 저 이스라엘의 변두리에 70년을 보내고 있는 하나님의 궤를 드디어 이스라엘의 한복판으로 모신다는 마음과 계획은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빠져있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지 않고 무시되는 행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요. 다윗이 보기에, 그리고 동원된 사람들이 보기에, 지나가는 길에 구경나온 백성들이 보기에, 오늘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는 방식은 엄지척!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손색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께 어울리도록 영광돌리는 화려하고 존귀함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보였던 것이지요. 3만명이나 되는 훌륭한 사람들이 뽑혔고, 최신형 새 수레에 법궤를 모셨으며, 그 앞에는 오케스트라가 하나님께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 예루살렘으로 가실지 말지, 이 행진의 여부에 대해서 여쭙지 않았고, 가신다면 어떻게 가야할지 행진의 방법에 대해서 여쭙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결정하고 자기들이 준비하고 자기들이 진행하니 하나님은 이 행렬을, 그리고 다윗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내 사람들의 잔치에 하나님의 징계가 임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짐짝이 되어버린채 진행되는 이 인간들의 행진을 멈춰 세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수레에서 내리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오늘 본문 모든 단어가 ‘bring to’입니다. 그래도 우리 성경을 번역하시는 어른들은 “메어오려고 메어오려고” 번역을 해두셨는데, 아뇨, 확인을 해보니, 전부다 ‘옮겨오려고’ 조금 더 정확하게 직역하면 ‘가져오려고’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권위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지요? 저 아벡전투 때와 비슷합니다. 가져다 놓으면 이기게 하시는 물건 같은 하나님 말이지요.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할 품목처럼 말입니다.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할 때 물어보기 위해서 데려다 놓는 어떤 그런 정도로 여김을 받고 계셨던 것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이 사건 이후로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묻습니다. 14장 9절 블레셋이 쳐들어 왔을 때를 확인해볼까요?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14절에는 전쟁의 여부와 함께 방법도 묻지요. 이렇게 답을 해주십니다. “다윗이 또 하나님께 묻자온대 하나님이 이르시되 마주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나가서 싸우라 너보다 하나님이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그래요. 하나님의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는 마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찌감치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다윗이 소홀히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윗만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이, 모든 제사장들이 레위인들이 소홀히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떤 말씀이요. 확인해보겠습니다.
민수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법궤를 메는 아론 자손, 레위지파 특별히 고핫 자손에게 몇 가지 지침을 주셨습니다.
15절,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
19-20절,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같이 하라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세 가지 지침을 주십니다. 만지지 말 것, 보지 말 것, 어깨에 멜 것, 그리고 당부하십니다.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같이 하라. 그러면서 이스라엘 지휘관들이 바친 소도 수레도 주지 않으십니다. 민수기 7장 9절,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친밀하게 대할 수 있는 특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요, 그 거룩하심에 도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요? 제사장들이 이렇게 메고 행진해갈 때 백성들은 이천 규빗, 약 1km미터를 떨어져 걸어야 했던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그렇게 자신과 사람들의 기대와 만족을 위해서 움직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꿇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3만명의 사람이나 새로운 수레, 거대한 오케스트라보다 무엇을? 예, 한 절, 성경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만큼 당신을 존중하고 사랑하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어깨로 메라고 하셨으면, 그 말씀을 바꾸지 않으신 이상,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수레로 운반하자고 해도, 어깨로 운반을 해야 했다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다윗의 인기정책에 저 포퓰리즘에 종지부를 찍어버리셨습니다. 그래요. 다윗은 3만 명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행하고 말았던 왕이었던 것입니다. 안그럴줄 알았던 다윗이 처음부터 사울왕 같은 일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왕이 된지 얼마 되지 않는 다윗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잘못을 그냥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눈감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정말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다윗의 뼈아픈 실수를 그냥 덮어주지 않으셨으며, 이 일로 인해서 다윗은 더 철저한 말씀 중심의 사람으로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요, 하나님이 정말로 사랑하시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한 번의 실수도 그냥 넘기시지 않고 철저하게 실패하게 하시는 사람입니다.
직장에서 사장님께서 내가 하는 실수와 잘못들을 그냥 대충대충 넘겨주신다? 그러실 리는 없지만, 제가 보기엔 별로 기대 안하시는, 너는 그 정도만 해도 괜찮다고 대충 아끼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말 아끼고 곁에 두고 회사를 물려주고 싶은 사람이라면, 제대로 가르치고 제대로 세워내야 하기에 높은 기준을 가지고 그를 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못했다는 것을 지적해주고 고쳐주려 하고 바로 잡으려 하면, 싫어하지요. 좀 내버려 두라고 하지요. 내가 밉고 싫으냐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해서라는 것을 모르고 오히려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부모자녀 간에 연인 간에 성도 사이에 전부 다 말이지요.
우리는 지적도 잔소리도 책망도 사랑으로 듣고 사랑으로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승환씨가 노래했지요, 너무 많은 이해심은 무관심일 수도 있다. 우리의 이해심과 배려심은 무관심을 포장한 것이 아니길 축복합니다. 늘 가까이에서 관심을 갖고 사랑을 오해하지 않는 복된 관계, 서로를 이용해 먹으려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더욱 세우고 빚어내고 가꾸어가는 관계로 서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하일교회 성도님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다윗도 오늘 자기의 행진을 하나님이 멈추시자 분노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법궤를 오벧에돔에 집에 떠넘기고 돌아갑니다. 그 자리에서라도 엎드리고 그 자리에서라도 하나님께 여쭈었으면 어땠을까요?
우리의 시각은, 늘 우리의 마음을 몰라주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가 일쑤입니다. 내가 뭐 나 좋으라고 했나?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사람도 뽑고, 수레도 준비하고, 오케스트라도 연습시키고, 얼마나 죽게 고생했는데, 그렇다고 사람을 죽여? 이야! 정말 섭섭하네요!
그래요. 오늘 우리가 본문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불편함의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보기보다 온통 우리 마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수고하고, 얼마나 희생하고,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우리는 항상 이 쪽에, 우리의 공로와 정성과 수고와 섬김과 헌신에 우리의 눈과 마음을 다 빼앗겨 있습니다. 웃사가 얼마나 몸을 던져서 법궤를 받았는지에 그의 헌신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비극의 원인이 이것입니다. 언제나 사람 편에 서 있고, 언제나 사람의 입장이 우선입니다. 사람을 변호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 우리가 느끼기에 좋은 것, 우리가 만족하고 흡족할 만한 일을 하느라고 온갖 힘과 에너지와 정성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를 향한 가장 중요하고 엄중한 말씀을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법궤는 반드시 어깨에 메어야 한다고 하는 생명이 달려있는 이 엄청난 명령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 놓고 위기가 생기고 돌발상황이 생기니 뭐라고 해요? 우리가 말씀을 어겼습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늘 아닙니다.
어찌 이러실 수가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너무하신 것이다. 그렇게까지 하나님 가혹하셔야만 했는가? 어쩜 그래 우리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냐! 하나님이 이러셔도 되냐? 맞냐? 로 끝나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처음부터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첫 걸음을 말씀으로 떼어야 합니다. 우리의 시작은 늘 하나님의 말씀이시길 축복합니다. 모든 일의 유무를, 그리고 모든 방법을, 그리고 그 모든 순간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해보면서 우리의 걸음을 걸어나가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오늘 두렵고 분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더욱 감사하고 기쁘고 즐거운 하나님을 만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 삶에 경외감, 거리감을 회복해 내야겠습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던 우리였는데, 어느새 하나님보다 높은 재판관이 되어서 하나님에 대해서 판단하고 있는 우리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손자는 할아버지와 친구처럼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를 경외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시편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 좋겠습니다. 시편 2편 11절, 함께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며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Serve the LORD with fear and rejoice with tremb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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