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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4차 세미나
8장: 게르만인의 국가형성
○ 게르만 인들은 인구가 대단히 많았다. 기원 초기에 게르만인은 적어도 600만 명쯤은 되었을 것이다. 5대호 지방에서부터 오하이오와 포토맥 강에 이르는 전 지역을 공포에 떨게 만든 전성기 이로쿼이 인의 인구 총수를 훨씬 능가했다. 그들이 게르마니아에 정착한 후 인구는 빠르게 늘었다. 생산 발전의 진보만으로도 이를 능히 증명할 수 있으니, 슐레스비히 늪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같이 발굴된 로마 주화를 가지고 판단한다면 3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 로마의 세계 지배는 라틴어로 온갖 민족어를 굴복시켰다. 민족들 간의 차이는 모두 소멸되었다. 로마의 행정과 로마의 법률은 곳곳에서 고대의 씨족적 결합을 파괴했고, 그와 함께 지역적 및 민족적 자립성의 마지막 잔재까지도 없애버렸다. 로마 국가는 오로지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거대한 기계로 변질되었다. 조세, 국가 부역 및 각종 가렴주구 때문에 시민들은 점점 더 깊은 빈궁에 빠지게 되었다. 총독, 세리, 병사들의 강탈은 이 압박을 가중시켰다. 로마 국가의 존립권은 대내적으로 질서의 유지에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미개인에 대한 방위에 있었다. 로마 국가는 미개인을 물리치고 시민을 보호하겠다고 나섰지만, 바로 그 미개인이야말로 시민이 갈망하는 구원자가 되었다.
○ 각국 인민의 지배자로서 로마인들은 상공업에 결코 종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리대금업에서만은 전무후무할 정도로 뛰어났다. 한동안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상공업은 관리들의 강탈로 사라져버렸다. 전반적 궁핍화, 무역 및 수공업 그리고 예술의 쇠퇴, 인구의 감소, 도시의 황폐화, 더욱 낮은 수준으로 전락한 농업, 그러한 것들이 로마에 의한 세계 지배의 마지막 결과였다.
○ 고대 세계 전반에 걸쳐 결정적인 생산부문이었던 농업이 이제 다시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노예노동에 기초한 대규모 농업형태인 라티푼디아 체계(고대 말기, 이는 목장과 장원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이용되었다)는 더 이상 채산이 맞지 않았다. 소규모 경작이 다시금 수익성 있는 유일한 형태가 되었다. 장원은 잇달아 소규모의 분할지로 세분되어 일정액을 지불하는 세습소작인 또는 분익소작인에게 임대되었다.
○ 분익소작인은 소작인이라기보다는 관리인이었으며, 그는 자기의 노동의 대가로 연간 생산물의 1/6, 때로는 1/9밖에 받지 못했다. 이 소분할지는 주로 콜로누스에게 임대되었다. 이들은 일정한 돈을 지불했으며, 토지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그 분할지와 함께 매각될 수 있었다. 콜로누스들은 노예가 아니었으나 자유민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자유민과 결혼할 수도 없었으며, 자기들 간의 결혼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되지 않고 노예의 결혼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동거관계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중세기 농노의 선구자였다.
○ 고대 노예제는 대규모 농업에서나 도시의 수공업 작업장에서나 이미 지출된 노동을 보상할 만큼 수익을 내지 못했으므로 수명을 다했다. 사회적으로는 부자들의 가정 살림과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한 노예들만이 아직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노예가 해야 할 모든 생산적 노동은 로마의 자유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로마에는 남아돌아서 짐이 되어버린 해방노예들과 콜로누스와 영락한 자유민들의 수가 증대했다.
○ 고대 노예제가 사멸한 것은 기독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기독교는 수 세기 동안 로마 제국에서 노예제의 지지자였다. 그 후에도 기독교인들은 노예매매, 더 후의 흑인매매도 결코 방해하지 않았다. 노예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서 없어진 것이다. 노예제가 사라지면서 생산적 노동에 대한 경멸이라는 것만 남겨 놓았다. 콜로누스들과 함께 자유로운 소농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관리들의 폭압을 모면하기 위해서 종종 어떤 유력한 자의 파트로나트(후견인)에 의지했다.
○ 파트로나트는 보호가 필요한 자들이 토지 소유권을 자기에게 양도하면서 그 대신 토지를 일생 동안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신성한 교회는 이 관계를 이용해 9세기와 10세기에 하느님의 왕국과 자신의 토지재산을 확장하는 데 이용했다. 게르만의 미개인들은 로마인들을 그들 자신의 국가로부터 해방시켜 준 대가로 전 국토의 2/3를 빼앗아 자기들끼리 나눠 가졌다.
○ 분배는 씨족제도에 따라 이루어졌다. 정복자들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드넓은 토지가 분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일부는 전체 부족의 소유로, 일부는 개별적 부족이나 씨족의 소유가 되었다. 각 씨족 내에서는 경지와 목초지가 개별적 세대들 사이에 추첨을 통해 균등하게 분배되었다. 이후에는 재분배가 폐지되고 할당받은 토지는 양도할 수 있는 사유재산으로 되었다. 삼림과 목초지는 분배되지 않고 그전처럼 공동으로 이용했다. 씨족이 자기 촌락에서 오랫동안 거주하고, 게르만인과 로마인의 융합이 점점 더 강화될수록, 유대의 혈연적 성격은 희박해지고 지역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 씨족은 마르크공동체 속으로 용해되었다. 지역적 조직은 씨족제도의 특징인 원시적 민주주의 성격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었고, 최근까지도 씨족제도의 생생한 요소를 보존하고 있었다. 씨족의 혈연적 유대는 얼마 후 그 의미를 상실했는데, 피정복자에 대한 지배는 씨족제도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의 각 지방들을 지배한 게르만인들은 자기들이 정복한 이 지역들을 조직적으로 통치해야만 했다. 씨족제도의 기관들은 국가기관으로 전환되어야 했다. 군사령관의 권력은 왕권으로 바뀌었다.
○ 프랑크 왕국(5세기 말 게르만족의 한 부족인 프랑크족이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아우르는 지역에 세운 왕국)을 예로 들어 보자. 프랑크 왕국에서는 승리한 살리아인이 막강한 로마 국가의 직할지뿐만 아니라 아직 크고 작은 각 관구나 마르크공동체들에 분배되지 않은 모든 광활한 지대, 특히 비교적 광활한 삼림지대를 모두 독차지했다. 평범한 군사령관으로부터 진짜 군주가 된 프랑크 왕의 첫 사업은 인민의 재산을 왕의 재산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그것을 인민에게서 빼앗아 자기의 신하들에게 증여 또는 대여하는 것이었다. 인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새로운 귀족의 토대가 형성되었다. 수장평의회는 왕의 측근들로 교체되었고, 민회는 하급 지휘관들과 신흥 귀족들의 집회로 변질되었다.
○ 프랑크인의 대부분을 이루는 토지 소유 농민들은 부단한 내란과 정복전쟁 때문에 공화제 말기의 로마 농민처럼 피폐해지고 몰락했다. 카롤루스 대제(742~814,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의 왕으로서, 교황에 의해 서로마제국의 후계자로 인정받음) 사후 50년이 지나서 이 프랑크 왕국은 로마 제국이 400년 전 프랑크인들에게 유린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저항도 없이 노르만인(8세기 유럽 해안지방을 습격하여 파괴적인 약탈을 시작한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출신의 해적들이었으나 이후 프랑스어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들에게 유린당했다.
○ 프랑크 왕국의 자유농민들은 그 선행자인 로마의 콜로누스들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 수 세대 후에는 대부분 농노로 전락했다. 자유농민층의 급속한 소멸에 대해 이르미농이 작성한 셍-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의 토지대장이 잘 말해 주고 있는데, 이 수도원 주변의 광대한 영지에는 카롤루스 대제가 살았던 당시에도 거의 전부 게르만인의 이름을 가진 프랑크인들이 2,788세대가 살았는데, 그중에 2,080세대가 콜로누스이고, 35세대가 반자유농민, 20세대는 노예, 자유이주민은 8세대에 불과했다. 이리하여 주민들은 400년이 지난 뒤 자기가 출발했던 바로 그 상태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증명해 줄 따름이다.
①로마 제국 쇠퇴기의 사회적 분화와 재산 분배방식은 당시의 농업과 공업의 생산수준에 아주 걸맞는 것이었다.
②이 생산수준이 그 이후 400년 동안에 본질적으로 낮아지지도 않았고 높아지지도 않았으며, 그리하여 똑같은 필연성을 가지고 동일한 재산분배와 동일한 계급 구성을 다시금 살펴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 이러한 전체 상황은 지배적인 대토지 소유자와 예속된 소농을 낳는다. 이 400년 동안 진보는 있었다. 로마 말기에 노동을 노예의 것으로 멸시하다 몰락해 버린 가난한 자유민들은 소멸했다. 9세기의 사회계급은 몰락해가는 문명의 늪 속에서가 아니라 새 문명의 진통 가운데서 형성되었다. 현대적인 민족을 준비하고, 다가오는 역사를 위해 서유럽의 인류를 새로이 형성한 성과가 있었다. 게르만 시기에 있었던 국가의 해체는 노르만인과 사라센인들에게 정복당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 은대지제도(중세 전기 유럽에서 봉건 영주가 가신에게 은대지를 주는 대가로 군역 따위의 봉사 의무를 요구한 제도)와 보호위탁제도(보호자를 위해 군무나 기타 봉사를 수행하며, 자기의 토지를 보호자에게 양도하고 그것을 소작지로 도로 받아 부치는 등 일정한 조건으로 농민이 봉건 영주의 ‘보호’를 받는 제도)가 봉건제도로 발전ㆍ성장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게르만인들이 빈사 상태의 유럽에 새로이 생명력을 불어넣은 힘은 바로 그들의 미개성, 즉 그들의 씨족제도였다.
○ 그들의 개인적 능력, 용맹성, 자유애호 정신과 일체 공적 사업을 자신의 사업으로 여기게 하는 민주주의적 본능, 한 마디로 말하자면 로마 인들은 이미 잃어버렸지만 로마 세계의 붕괴로부터 새 국가를 이루고 새 민족을 육성하자면 반드시 가져야 할 그 모든 품성들은 미개의 높은 단계 사람들의 특징, 혹은 그 씨족제도의 열매이다. 게르만 인들은 일부일처제의 고대적 형태를 개조하여 가정에서 남자의 지배를 완화하고, 일찍이 고전적 세계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높은 지위를 여자에게 부여했다.
○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모권제적 유습이다. 그들은 독일, 북부프랑스, 잉글랜드 등 주요 국가에 본래의 씨족제도 한 가닥을 마르크공동체의 형태로 봉건 국가에 도입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혹하기 그지없는 중세의 농노제의 조건하에서도 피억압계급인 농민들에게, 고대의 노예나 근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기존 형태로는 가질 수 없었던 지역적 단결력과 저항수단을 부여했던 것이다.
○ 그들은 자기 고향에서 실시했고, 로마제국에서도 노예제도와 점차 교체되어 갔던 보다 완호된 예속 형태를 발전시켜 보편적인 상태로까지 이끌었다. 이 형태야말로 푸리에가 처음으로 강조한 것처럼 예속된 자들에게 계급으로서의 점진적인 해방수단을 제공햇다. 이 형태는 개개인을 과도적 상태를 거치지 않고 즉시 해방시키는 것만이 가능했던 노예제보다는 우월한 것이었다. 반면에 중세농노들은 계급으로서의 자기 해방을 점차 실현했다
9장: 미개와 문명
○ 그리스, 로마, 게르만인의 예를 들어 씨족제도가 분해되는 것을 고찰했는데, 이 책을 마무리하기 위해 그것의 경제적 조건을 연구토록 한다. 여기에서는 맑스의 ≪자본론≫이 모건의 저서와 함께 필요한 저서이다. 미개의 낮은 단계에서 전성기에 이른 씨족제도는 거기에 지배와 예속이 있을 수 없다는 데에 그 위대성과 동시에 한계가 나타나 있다. 이 제도의 경제적 토대를 고찰하도록 한다. 인구는 매우 적었으며, 단지 부족의 거주지에만 조밀했다. 분업은 순전히 자연발생적인 것으로서 남녀 양성 간에만 있었다. 남자는 수렵이나 어로에 종사하며 먹을거리를 구해오고, 여자는 가사를 돌보며 음식과 의류를 만든다. 남녀는 각자 자기 영역에서 주인이다. 인간은 길들일 수 있는 동물을 발견했으며, 나중에는 길들여서 사육할 수 있는 동물을 발견했다. 목축부족은 다른 미개인들과 분리되었다.
○ 이것이 최초의 커다란 사회적 분업이다. 목축부족은 다른 미개인들보다 더 많이 더 다른 것들을 생산하였다. 이것이 처음으로 규칙적인 교환을 가능하게 하였다. 가축 떼가 개별 재산으로 되자 개인들 간의 교환이 점점 더 우세해졌으며, 마침내 그것은 교환의 유일한 형태가 되었다. 처음에 가축을 위해 재배되던 곡물이 얼마 안 가서 사람의 식료로도 이용되었다. 경작지는 여전히 부족의 소유였으며, 처음에는 씨족이, 나중에는 세대공동체가, 마지막에는 개인들이 이용하도록 양도되었다. 직기가 사용되고 광석이 용해되고 금속이 가공되었다. 목축, 농업, 가내수공업 등 모든 부분에서 생산이 늘어나자 인간의 노동력은 자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포로는 노예로 전락했다.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업은 주어진 모든 역사적 조건 아래서 필연적으로 노예제도를 가져왔다.
○ 가축 떼와 기타 새로운 재부의 출현과 더불어 가족 내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다. 가축은 남자의 것이며, 가축과 교환해서 얻어온 상품과 노예들 역시 남자의 것이었다. ‘사나운’ 전사와 사냥꾼은 집에서 여자 다음가는 자리에 만족했지만, ‘조금 더 온화한’ 목축민은 자기의 재부를 뽐내고 첫 번째 자리로 올라서면서 여자를 두 번째 자리로 끌어내렸다. 여성의 해방, 남녀의 평등은 여자가 사회적 노동에서 배제되어 사적인 가사노동에만 종사하고 있는 한 불가능하며, 또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란 것이 이미 여기서 명백해진다. 여성의 해방은 그들이 사회적 규모의 생산에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그들이 돌보아야 할 가사가 아주 적을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 그런데 이는 근대적인 대규모 공업에 의해서만 가능해졌다. 가정에서의 남성 지배가 실제로 확립되면서 남성독재는 모권의 전복, 부권의 도입, 대우혼으로부터 일부일처제로의 점차적 이행에 의해 확인되고 영속화되었다. 이것은 낡은 씨족제도에 금이 가도록 만들었다. 개별 가족이 씨족과 대립하는 하나의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다음의 한 발자국은 미개의 높은 단계로, 철검과 철보습과 철도끼를 체험하는 시기로 내딛는다. 농업에서 수공업이 분리되는 제2의 거대한 분업이 발생하였다. 생산의 끊임없는 증가와 이에 따르는 노동생산성의 끊임없는 향상은 인간의 노동력의 중요성을 드높였다.
○ 노예제도가 이제 사회제도의 본질적인 구성요소가 되었다. 상품생산이 발생하고 귀금속은 화폐상품으로 정착되기 시작한다. 자유민과 노예 간의 차별과 함께 빈자와 부자의 차별이 나타났다. 경작지는 공동경작에서 완전히 사적소유로 전환되고, 대우혼이 일부일처제로 이행하는 것과 함께 개별 가족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 나타났다. 군사령관, 평의회, 민회는 씨족사회에서 발전하는 군사적 민주주의 기관을 형성했다. 전쟁이 상시적인 생업으로 바뀌고 최고 군사령관과 그 밑의 지휘관들은 선출직에서 세습직으로, 결국엔 찬탈된 세습권력으로 이행했다.
○ 문명은 이같은 과정을 통해 성립한 바, 문명 시기 고유의 결정적 의미를 갖는 제3의 분업을 추가했다. 문명은 생산에도 종사하지 않고 생산물의 교환에만 종사하는 계급인 ‘상인’을 낳았다. 상인층과 함께 금속화폐, 즉 주화가 출현하며, 비생산자가 생산자와 생산물을 지배하는 새로운 수단이 나타났다. 화폐를 주고 상품을 구매한 뒤부터 화폐대부가 나타났고, 이와 함께 이자와 고리대금업이 등장했다. 상품, 노예, 화폐의 재부와 함께 토지의 재부가 다시 나타났다. 토지에 대한 개인 소유가 발생하자 토지는 판매되거나 저당잡혀도 되는 상품이 되었다. 상업의 확대와 화폐 및 고리대금업, 토지 소유 및 저당권과 함께 소수 계급의 수중으로 재부의 집적과 집중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 씨족제도는 종말을 고하고, 국가로 대체되었다. 국가란 외부로부터 사회에 강요된 권력이 아니다. 국가는 헤겔(1770~1831, 독일의 철학자)이 주장하는 것처럼‘윤리적 이념의 현실태’나‘이성의 향상 및 현실태’가 아니다. 국가는 일정한 발전 단계에 있는 사회의 산물이다. 국가는 사회가 해결할 수 없는 자기모순에 빠졌으며, 자기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불상용적인 대립으로 분열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사회로부터 발생했으나 그 위에 올라서서 사회와는 더욱더 멀어져가는 권력이 바로 국가이다. 씨족적 조직과 비교해 볼 때 국가의 첫 번째 특징은 국민을 지역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자기 자신을 무장력으로 조직하는 주민과 더 이상 직접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공권력의 설립이다. 공권력은 국가 내부에 계급적 모순이 첨예화됨에 따라서 강화된다. 이러한 공권력을 유지하려면 시민의 납부금, 즉 조세가 필요하다. 조세가 부족하면 국채를 발행한다. 관리들은 공권력과 조세징수권을 가짐으로써 사회의 기관이면서도 사회 위에 군림한다.
○ 이처럼,국가는 계급 간의 대립을 억제하기 위해서 생겨났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계급,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계급의 국가이다. 이 계급은 국가의 힘을 빌려 정치적으로도 지배하는 계급이 된다. 그리하여 피억압계급을 압박하고 착취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을 획득한다. 따라서 고대 국가는 노예소유자들의 국가였으며, 봉건 국가는 농노와 예농을 압박하기 위한 귀족들의 기관이었으며, 현대의 대의제 국가는 자본이 임금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도구이다.
유산계급은 보통선거권을 통해 직접 지배한다. 피억압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자기를 해방시킬 만큼 성숙하지 않는 한 그들 대부분은 현존 사회질서를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인정할 것이다. 또 정치적으로는 자본가계급을 따르면서 그의 극좌익을 형성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성숙해지고 자신을 해방시키려고 함에 따라, 그들은 자신의 정당을 조직해 자본가들의 대표가 아니라 자신의 대표를 선출할 것이다. 보통선거권은 노동계급의 성숙 정도를 보여주는 징표이다. 보통선거권이라는 온도계가 노동자들의 비등점을 가리킬 바로 그때,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 국가는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국가 없이도 사회는 존재했으며, 국가와 국가권력에 관한 개념이 없었던 사회도 있었다. 계급으로의 사회의 분열과 필연적으로 연결된 경제적 발전의 일정 단계에서 국가는 이 분열로 말미암아 필요한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계급의 존재가 필연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생산의 직접적인 장애가 되는 생산의 발전 단계로 급속히 접근하고 있다. 계급의 소멸은 과거에 계급이 생겨날 때처럼 불가피하다. 계급의 소멸과 함께 국가도 불가피하게 사라질 것이다.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결합에 기초하여 생산을 새로이 조직하는 사회에서는 전체 국가기구를 그것이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즉 고대 박물관으로 보내 물레나 청동도끼와 나란히 진열할 것이다.
○ 문명이란 분업과 이 분업에 발생하는 개인들 간의 교환, 그리고 그 두 과정을 결합시키는 상품생산이 전면적으로 발전해 이전의 사회 전체에 변혁을 일으키는 사회 발전 단계이다. 문명이 시작되는 상품생산 단계는 다음과 같은 경제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①금속화폐, 그와 함께 화폐자본, 이자 및 고리대금업의 도입 ②생산자들을 중개하는 계급으로서 상인들의 출현 ③토지의 사유 및 저당권의 발생 ④지배적인 생산형태로서의 노예노동의 출현이다.
○ 문명에 상응하여 또 문명과 함께 마침내 자기의 지배를 확립하는 새로운 가족형태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지배, 즉 일부일처제이며,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서의 개별 가족이다. 국가는 문명사회를 총괄하는 힘으로서 모든 전형적인 시기에 예외 없이 지배계급의 국가이며, 또 본질적으로 모든 경우에 업압받고 착취당하는 계급을 억압하는 기관이다. 문명에는 온갖 사회적 분업의 기초로서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고착화시키고, 소유주로 하여금 자기가 죽은 후에도 자신의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유언제를 도입했다.
○ 이 제도들로써 문명은 씨족사회에서 전혀 해낼 수 없는 일들을 해냈다. 그 추동력은 다름 아니라 탐욕적인 개인의 재부였다.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착취가 문명의 기초인 만큼, 문명의 발전은 끊임없는 모순 가운데 진행된다. 미개인들의 경우에는 권리와 의무 간에 차이가 없었다. 문명은 한 계급에게 거의 권리만을 주고, 한 계급에게 거의 의무만을 부담시킴으로써 아무리 미련한 자라도 권리와 의무 간의 차이와 대립을 알 수 있도록 만든다. 지배계급은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사회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마치 지배계급에게 좋은 것은 전체 사회에도 좋은 것처럼 말한다.
○ 문명은 진보하면 할수록 자신이 생산한 부정적 죄악을 점점 더 사랑의 보자기에 싸서 미화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기만적으로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명에 대한 모건의 판결문을 인용하면서 끝을 맺겠다.
“재부를 둘도 없는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그런 역사 과정의 결말로서 사회의 멸망이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왜냐하면 그런 역사 과정은 자멸할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치에서의 민주주의, 사회 내에서의 우애, 권리와 특권의 평등, 교육의 보편화 등은 경험, 이성 및 과학이 항상 지향하는 더 높은 다음 단계의 사회를 창조할 것이다. 그것은 고대 씨족이 지닌 자유, 평등, 우애의 더 고양된 형태의 부활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