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셉의 반전의 반전의 반전 인생
성경에서 요셉의 이야기는 드라마틱한 인생사의 백미다. 이야기는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면서 시작된다. 야곱은 자신이 지극히 사랑하던 라헬과의 사이에서 얻은 첫 아들 요셉을 다른 형제들보다 더 사랑하였다. 문제는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기의 꿈 얘기를 자꾸 형들에게 얘기했다는 데에서 꼬여갔다.
“내가 꾼 이 꿈 이야기를 들어 보셔요.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 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 […]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창세 37,6-7.9).
어느 형제가 이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겠는가. 이에 기분이 나빠진 형들은 벼른다.
“저 녀석만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고 말이야. 게다가 요상한 꿈 얘기나 떠벌리고. 저 녀석만 없으면 우리가 행복할 텐데….”
그러다가 결국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버린다.
이집트에 끌려간 요셉은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이집트 왕실 경호대장인 포티파르의 종이 되어 그의 집에서 일하게 된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는 꽃미남이었던 것이다. 이에 포티파르의 아내가 자꾸 그를 유혹하는 일이 생긴다. 끝까지 거절하던 요셉은 오히려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다. 따지고 보면 이 역시 하느님의 섭리였다.
요셉은 옥중에서 파라오의 두 관원의 꿈을 풀어준 것을 계기로, 파라오의 꿈을 해몽하게 된다. 7년 풍년 후, 7년 흉년이 될 것과 그 대책까지 알림으로써 요셉은 파라오의 큰 신임을 얻게 된다.
“너의 신이 너에게 지혜를 주었구나. 그 지혜를 가진 너에게 이 나라의 경영을 맡기노라”(창세 41,39-41 참조).
그리하여 요셉은 국무총리가 된다. 요셉의 나이 30세 때였다.
요셉의 해몽처럼 7년 풍년 후, 7년 기근이 가나안 땅에도 찾아왔다. “온 세상은 요셉에게 곡식을 사려고 이집트로 몰려들었다”(창세 41,57). 이리하여 요셉은 여차여차해서 형제들도 만나고 결국에는 야곱 일가를 대기근에서 구하고, 이것을 계기로 하여 70명의 야곱일가는 이집트 고센 지방에 이주민으로 정착하게 된다. 이것이 그로부터 400년 후 모세를 통한 이집트 대탈출의 전사(前事)가 되고!
■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
요셉의 형제들이 이집트에서 다시 요셉을 만났을 때 그들은 요셉의 보복이 두려웠다. 요셉은 까다로운 절차 끝에 용서의 뜻을 명확히 밝혔다. 하지만 형들은 끝내 두려워했다. “쟤가 말이 저렇지, 언젠가 아버지 돌아가시면 딴 생각을 먹을지도 몰라”(창세 50,15 참조).
이에 요셉이 말한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50,19-20).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다. 결국 이는 우리의 삶에서도 나타난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에 억울한 일, 잘 안 풀리는 일 등,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하느님께서 좋은 일을 하시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에 사도 바오로는 이 말씀을 묵상하고 이렇게 바꿔서 고백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이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한다. 하느님의 안목은 지극히 크고 높은 것이어서 인간의 제약된 이성으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다. 그냥 믿고 모든 것을, 심지어 역경까지도 송두리째 그분께 맡기는 것이 상책이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환경의 변화에 두려움과 의심 없이 굳건히 설 수 있다.
요셉의 입에서 나온 저 말씀이 창세기 전체의 결론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인식과 믿음인 것이다. 조금만 더 살펴보라. 그 뒤엣것이 보인다. 조금만 더 골똘히 보라. 그 속엣것이 보인다. 조금만 더 멀리 보라. 그 다음엣것이 보인다.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숨은 것을 누리는 이가 행복한 사람이다.
■ 구원경륜과 창조경륜
요셉의 저 극적인 이야기에 서려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우리는 ‘구원경륜’이라 부른다. 경륜(經綸)은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을 동시에 담고 있는 낱말이다. 경륜은 본디 ‘경제’를 뜻하는 영어 ‘이코노미’(economy)가 보다 넓게 우주적으로 적용되어 확장된 의미를 가리킨다.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경륜은 창조경륜과 구원경륜으로 나누어 언급된다. 창조경륜과 구원경륜은 현재도 같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 경륜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녹아 있다.
하느님의 구원경륜이 얼마나 높고 긴 안목에서 펼쳐지는지는 바로 앞에서 확인해 봤다. 당장은 이해 못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하느님의 높은 사랑과 지혜가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그저 경탄과 찬미를 올릴 뿐이다.
이제 창조경륜을 보자.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사랑이 충만할 때다. 사랑이 차고 차서 넘치면 창조를 하게 되어 있다.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혹은 자녀에게 자꾸 이것저것 만들어 주는 모습을 생각해 보자. 사랑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꾸 뭘 만들어 주고 싶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이처럼 하느님은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창조의 원인도 사랑이지만, 창조의 목적도 사랑이다. 결국 하느님이 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는가. 사랑을 주고받고 싶어서다. 우리를 당신 사랑의 파트너로 만드신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인간의 위상은 하염없이 격상된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느님 앞에만 가면 종인 양 죄인마냥 오그라든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한다. 특히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아예 고개를 떨어뜨리고 들지를 못한다. 그런데 당신 앞에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우리 죄인들에게 사랑의 하느님이 속삭이신다.
“고개를 들어라. 내 눈을 바라보아라. 나는 네 눈을 쳐다보고 싶지 네 머리통을 보고 싶은 게 아니야. 나는 너하고 사랑을 주고받고 싶어서 너를 만들었단다.”
그러니 하느님한테 자꾸 머리통만 보여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그분께 무엇을 보여드려야 할까? 바로 눈이다. 무슨 눈? 사랑이 그윽한 눈, 그것도 애인을 바라보는 눈을 보여드려야 한다.
실제로 이 영성을 깊이 이해한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칼 라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각자의 삶은 하느님과의 러브스토리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과 러브스토리를 쓰는 것이다. 언제 태어나, 언제 사귀어서, 언제 친해지고, 언제 토닥거리다, 언제 토라져, 언제 헤어졌다가, 언제 멀어졌다가, 언제 다시 재결합하고. 그렇게 다시 깨가 쏟아지고, 이제 둘이 하나가 되고…. 주님과의 이 관계가 더 드라마틱하고 아름다워진다면야!
이렇듯이 하느님 창조경륜의 키워드는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하느님께서는 태초의 축복을 선언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
이 축복이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축복으로 시작해서, 축복으로 끝나는 것이 창조주 하느님의 역사다. 이 창조는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간다. 우리는 이 창조의 협조자다. 우리는 함께 주님의 이 창조 사업에 심부름꾼으로 초대받은 것이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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