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오랫만에 담임을 맡아 학교에서 살아내면서 내 뇌리를 떠나지 않은 회의.
"난쟁이를 만드는 데 골몰하는 교육"
거인이 나올까봐 전전긍긍한 제도화, 제도화, 제도화...
우파도 좌파도, 보수도 진보도 권력만 잡으면 혁신하고 온갖 제도를 만든다.
우후죽순으로 누적된 지향도, 가치도 잊은 온갖 제도의 더미에 깔려 교육은, 사람의 관계는, 가치는, 학교는 질식 직전이다. 그 혁신의 결과 교육은 메뉴얼이 되어 버렸고, 교사는 손발이 다 잘려 그저 최말단 집행자가 되어 학생들을 관리하기에 급급하다. 교사의 자율성, 권위, 자기 기획의 여지는 실종되고 급기야 학생들의 모욕에 자기를 방어할 힘조차 상실되었다.
학생은 학생대로 다 다른 본성을 존중받지 못하고 그저 활동적인 인간임을 증명해 내야만 생기부를 들고 수시의 관문을 통과한다. 이거해라, 저거해라... 그래서 창의적이고 리더쉽있고 자기효능감이 뛰어난 것을 증명해 보여라.
아마도 내가 요즘 고등학생이었다면 난 학교에 부적응한 낙오자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신기하다. 이 모든 활동적인 생활방식을 강요 받고도 미치지 않는게... 그래서 우리반 아이들은 스트레스성 위염, 장염을 안고 산다. 나도 위염과 체증은 고질병이 되었다.
그 온갖 제도의 더미가 쏟아지기 전, 발령받던 그 시절에도 교육은 학교는 잘 굴러갔다. 그 때의 아이들이 지금의 아이들보다 훨씬 더 거인이었다. 아니 19살에 독재정권과 싸운다고 감옥에 갔던 우리 세대가, 아니 14살에 독립군이 되었던 우리의 선조들이 훨씬 더 거인으로 자랐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요즘의 교육, 온갖 제도... 그 속에서 제도에 눌려 점점 더 난쟁이가 되어가는 교사, 학생들. 이 난쟁이들이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생각만해도 가슴이 답답하다.
혁신, 혁신... 이제 그만!!! 혁신의 성과를 제도로, 계량화된 수치로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도 이젠 그만. 진보에 대한 믿음, 진보에 대한 강박... 이젠 좀 돌아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진보를 증명하는 방식이 이렇게 복잡해야 하는 것인가? 간디도 말했다. 진보란 단순화라고..
현실화되지 않을 희망으로 고문하면서 촘촘하게 뺑뺑이를 돌리며 경쟁시키고 자기 관리를 시키는 감옥... 그게 학교는 아닌가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 몇 년전 읽었던 이 책에 격하게 공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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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은 시간의 위기를 초래한 조작 가능성의 세계관과 ''활동적 삶'의 절대화를 비판한다. 그가 활동적 삶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시하는 것은 '사색적 삶'이다. '사색적 삶'이란 행위를 통해 세계와 시간을 조작하고 변화시키는 활동적 삶의 대척점에 있는 삶이다. 그것은 정관하는 삶, 무위의 삶으로서, 행위를 멈추고 우리의 뜻대로 대상을 조작하고 바꾸어 버리려는 협소한 욕망을 잊어버리고 그 순간에 드러나는 세계의 모습을 가만히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리킨다. 그것은 어쩌면 기다림에 대한 감각을 복원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이를테면 열매를 숙성시키기 위해 천천히 나아가는 자연의 시간을 유전자 조작을 통해 단축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의 아름다운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기를 것, 이것이 바로 그가 전하는 메시지이다.
가속화라는 현상은 세계를 인간 의지에 따라 조작하고 지배하는 활동적 삶을 인간 존재의 유일무이한 가치로 보는 세계관의 파생적 결과일 뿐이다.
한병철은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을 구한다. 그는 어쩌면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경구,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그저 여러가지로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다.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경구를 다음과 같이 뒤집으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인간은 지칠 줄 모르고 세계를 변혁해 왔다. 하지만 문제는 세계의 뜻에 대해 사색하는 것이다."
---------한병철 <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역자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