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있다.”(요한 20:19-31)
김경준 안드레 신부 / 당진교회
두려움은 막연한 상상의 결과가 아니다. 하이데거는 공포스러워하고 있을 때, ‘위협적인 것’ 즉 ‘공포-거리’가 어떻게든 현재에서 우리 자신의 ‘코앞에서’ 나타나고 있어야 한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현재’ 그 공포거리로 공포를 느낄수 있다. 그러나 그 공포스러움은 ‘공포스러운 일’ 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 일은 미래에 속한 일이다. 우리의 공포는 우리들 자신이 ‘가까운 미래에 곧 일어날 것 같은’ 어떤 일을 공포스러운 일로서 기대하기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이다. 공포는 장차 기대되는 ‘그 자신에게 닥칠 때’ 자기 자신의 ‘있을 수 있음’에 대한 어떤 위협을 가해올 때 일어난다로 얘기한다.
우리가 공포거리로 예감될 때 우리 자신의 ‘있을수 있음’으로 ‘되돌아와 있어야 한다’ 되돌아옴은 우리가 이미 ‘있어온 곳’으로 돌아옴이라 말할수 있다. 우리가 이미 있었던 곳에서 떠남으로써 공포를 공포-거리로 만듦으로 불안한 상태로 되는 것이다.<하이데거의 기분 분석을 바탕으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불안 中 발췌>
예수의 제자들은 어떤이의 집에 모여서 예수의 죽음이 곧 나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두려움, 공포스러움,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들의 한가운데에 나타나신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신다. ‘평화가 있기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은 평온의 상태, 평화의 상태인 원래로 돌아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공포 혹은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그 공포에서의 떠남, 그리고 ‘되돌아옴’의 작동이 되어야 한다. 제자들이 가지는 공포는 예수님의 십자가형으로 인한 미래에 자기들에게 이루어질수 있는 공포-거리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 두려움에서 하느님의 원래 상태인 평화의 상태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제자들 중 토마는 확실한 것을 좋아한다. 자기가 눈으로 인지한 상태만 확실한 사실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 인지가 확실한 것이 맞을까? 우리가 인식하는 것의 오류는 없을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신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어라.” 너희는 눈으로 보지 않고 아직 겪지도 않은 죽음, 멸시, 조롱을 두려움에 빠져 떨고 있으면서 왜 하느님은 믿지 않는것이냐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미래는 단언하고자 한다면 죽음이라는 멸망을 향해 힘차게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잘 인지하고 있지만 죽음을 잘 인식하고 있지는 않으며 애써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확연한 현실이며 사실인 것이다.
모든 기분, 감정의 원래의 모습 평온의 모습을 되돌아옴을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있다”의 ‘되돌아옴’을 실천합시다.
우리에겐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는 하느님을 믿는 마음이 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다. 나의 안에는 하느님의 임재가 있다. 감정, 기분의 태초의 모습으로 되돌아 온 모습을 묵상하시고 나에게 있음을 찾아가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