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과 봉사 나 주의 도움 받고자 214
E.H.Hamilton 작사 · lra.D.Sankey 작곡; 《통일 찬송가, 1983》 349장
1. 나 주 의도 움 받 고자 주 예 수님께 빕 니다
그 구 원허 락 하 시사 날 받 아 주 소서
2. 큰 죄 예빠 져 영 죽을 날 위 해피 흘 렸 으니
주 형 상대 로 빚 으사 날 받 아 주 소서
3. 내 힘 과결 심 약 하여 늘 깨 어지 기 쉬 우니
주 이 름으 로 구 원해 날 받 아 주 소 서
4. 내 주 님서 신 발 앞에 나 꿇 어엎 드 렸 으 니
그 크 신역 사 이 루게 날 받 아 주 소 서
후렴 내 모 습이 대 로 주 받 아 주 소 서
날 위 해돌 아 가신 주 날 받아 주 소 서 아멘
《새 찬송가, 1962 》 356장에 처음 채택된 이 찬송은, 매킨니가 편집하여 브로드만 출판사에서 펴낸 《브로드만 찬송가,1940 》 86장에서 채택한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엘리자 해밀턴이 작사하고 아이라 D. 생키(1840~1908)가 작곡한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소서」'TAKE ME AS I AM'이란 찬송을 번역한 것이다. 생키는 실명 후 구슬로 출판한 「생키의 복음 찬송 이야기,1906」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여러 해 전, 나는 스코틀랜드의 대도시에서 부흥집회를 하고 있었다. 이때 참석한 어느 소녀가 구원에 관한 간절한 소망을 안고 자기 교회에 돌아가, 구원받는 길을 자세히 알려달라고 담임목사에게 말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말아요. 간단해요.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세요. 그러면 구원받아요." 담임목사는 쉽게 대답하였다. 그러자 가엾은 소녀는 울면서 부르짖었다. "목사님. 저는 글을 몰라요. 기도할 줄도 몰라요!" 목사는 그를 위해 기도한 후 기도를 가르쳐주었다. 그러자 소녀가 이렇게 기도를 하였다. "주 예수님, 제 모습 이대로 받아주세요." "Lord Jesus, Take me as I am!" 이렇게 하여 그 소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 이 소녀의 얘기를 들은 어느 여성이 감동하여 이 찬송을 썼다. 나는 교회신문에서 이 시를 읽고 부르기 쉽게 작곡하였는데 금세 널리 퍼졌다. 비슷한 시기에 조지 스테빈스 목사도 이 시를 발견하고 작곡을 하여 내게 보내왔다. 나도 내 곡조를 그에게 보내었다. 이리하여 그의 곡과 내 곡이 《복음 찬송가》에 함께 실렸다.
후에 어느 영국 목사가 편지로 내게 이런 소식을 전해 왔다.
그 소녀는, 불신자로서 자기 집에 하숙하고 있는 구둣방 남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교회에 가자고 권했으나 듣지 않았답니다. 뿐만 아니라 좀 읽어보라고 마루에 놓아두었던 그의 성경을 찢어 놀기까지 하였습니다. 착한 그 여자는 화도 안 내고 정성 들여 도로 붙여서 제자리에 두며, 제발 좀 읽어보세요, 하고 권하였답니다. 그러나 남편은 소설이나 신문만 읽을 뿐 거들떠보지도 않았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봄 날, 그 늙은 이는 심한 기관지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 착한 여자는 혈혈단신인 그 늙은 남자를 정성껏 간호하였습니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영혼구원에 대해 애기해주고, 성경을 읽어주며 친절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 여자는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찬송을 읽어주었답니다. 그가 후렴을 읽자 그 늙은이가 소리쳤습니다. "그런 말은 책에 없잖아!" "왜 없어요?" 그 착한 여자는 대답하며 찬송을 거넸답니다. 남자는 그 구절을 읽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날 위해 돌아가신 주라니 … !) 그는 찬송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오! 날 받으옵소서 …, 몇 주 후 아침, 그 늙은이가 말하였습니다. "여보, 나 퇴원하럐, 난 이제 정말 행복하오. 정말 …." 집에 돌아온 지 두 시간이 채 못 되어 그는 새상을 떠났답니다.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라고 계속 중얼거리면서…. (Sankey, PP. 20~23)
작곡자 아이라D. 생키(1840~1908) 목사는 1840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그는 'Rian A. Dykes'라는 아호도 썼는데 자기 이름의 철자 바꾸기 곧 애너그램으로 만든 아호이다.
미국 남북전쟁 시절에 생키는 군복무를 하였는데 군종실에서 군목과 함께 찬송을 인도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국세청에 근무하면서 YMCA 사업을 도왔다. 그러는 동안에 성악가로 알려졌고 마침내 대 부흥사 무디 목사의 주목을 받았다.
1870년 6월, 두 사람은 인디에나폴리스에서 열린 YMCA대회에서 처음 만났다. 몇 달 후, 생키는 처음으로 무디 목사의 전도집회에서 찬양을 하였다. 무디 목사는 생키에게 함께 전도사업을 하자고 권하였고, 생키는 쾌히 이를 수락하고 국세청 일을 집어치웠다.
1871년 10월, 시카고 대화재가 발생했을 때, 도시 한복판서 생키와 무디는 전도집회를 하다가 겨우 겨우 탈출해 목숨을 건졌다. 생키는 마시건호의 보트 안에서 잿더미가 되는 시카고를 바라보았다.
생키는 평생 1,200편 가랑의 복음 찬송을 작곡하였다. 그는 녹내장으로 말년의 5년 동안 앞을 못 보며 살았지만, 찬송가 작가 친구들의 형제애보다 더한 보살핌과, 맹인 찬송작가 크로스비의 도움으로 걱정 없이 살았다. 그가 쓴 「생키의 복음 찬송 이야기」'Sankey's Story of tbe Gospel Hymns'는 생키가 맹인이 된 후 구술을 통하여 만든 책으로서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