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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2월 20일 금요일
[(자) 12월 20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예루살렘이 적군에 포위되었을 때 이사야 예언자는 한 아기의 탄생을 예고하며 하느님을 신뢰하라고 촉구한다(제1독서). 가브리엘 천사는 나자렛에 있는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한 아기의 탄생을 예고한다. 마리아는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복음).
제1독서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할 것입니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7,10-14
그 무렵 10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
11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12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13 그러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6-38
26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성모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스스로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하며, 지금 당장은 하느님의 뜻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지만,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며 ‘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순명과 함께,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태중에 잉태되셨습니다.
성모님처럼 하느님을 신뢰하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이기 쉬운 방법으로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실천하기 어렵고, 현실과 맞지 않는 말씀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순명하는 믿음으로 당신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믿고 있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성모님의 믿음을 본받아 우리도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는 믿음,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마리아는 부단히 성찰했고 또한 순종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태고지 복음을 천천히 묵상하다 보니, 주님께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하시고 총애하신 이유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보낸 메시지 앞에 그녀가 보인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몹시 놀라워하면서도 천사의 인사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는 아무 생각도 개념도 없는 철부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렸지만,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 앞에 나름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신비 앞에서 나름 이해하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마리아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던 의구심을 솔직히 표현했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마리아는 절대로 어수룩하거나 어리버리하지 않았습니다.
의심스런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따지는 당차고 야무진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적 의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대를 향해 활짝 열려있는 건전한 의심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의구심에 참으로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는 아무런 인간적 고민이나 갈등도 없이, 본인의 의지적 결단도 없이, 그저 힘 있는 존재가 시키는대로 응답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로 거듭나기까지 만만치 않은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의 고민은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동안에도 계속되었습니다. 하루는 아들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셨던 마리아께서 예수님 거처로 찾아갔습니다. 뜻밖에도 예수님은 밖에 한번 나와보지도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말씀 앞에 또 다시 마리아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기도하고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또 다른 영적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한 단계 한 단계 그녀의 신앙이 성장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마리아의 의문과 고민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위대한 성경 말씀이 우리 손에 쥐어졌습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비록 나약하고 무력하지만,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할 때, 하느님 권능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강건해집니다. 그분과 함께 할 때 불가능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어리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던 나자렛 산골 소녀 마리아가 위대해진 것은, 그분이 찾아오셨을 때 가장 진지하게, 가장 겸손하게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했습니다. 부단히 성찰했고 또한 순종했습니다. 틈만 나면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가 하느님의 어머니였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속세 사람들과 이렇게 구분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의 깊은 순간을 듣게 됩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시리라는 놀라운 메시지를 전합니다.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도 인간적으로 “이게 가능할까?”라고 의문을 품으셨을 것입니다.
천사는 그녀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그녀의 친척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이야기를 전하며,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나이가 많아 아들을 배었으니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 불리던 이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6-37)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사벳의 믿음과 하느님의 능력의 증거는 마리아가 구원의 역사 속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데 힘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여신 마리아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는 진리의 살아 있는 증인이 되십니다. 이 순간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과 세상의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세상은 “이게 과연 가능할까?”라고 묻지만, 믿음의 사람은 “아멘,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합니다.
이 점을 보여주는 예로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1967년, 젊은 시절 조니는 다이빙 사고로 목 아래가 마비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그녀는 생을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라는 선교사의 권고를 통해 조니는 고통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깊은 기도의 순간, 그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고, 그분의 고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조니는 나중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약할수록 더 많이 하느님께 의지해야 하며, 그분께 의지할수록 그분의 강함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이 경험은 그녀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그녀는 원망 대신 감사로 고통을 받아들이며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을 통해 조니는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을 이루었습니다. 깊은 고통을 기쁨과 용기의 원천으로 바꾼 것입니다.
또 다른 놀라운 예는 말랄라 유사프자이(Malala Yousafzai)의 이야기입니다. 1997년 파키스탄에서 태어난 말랄라는 마이완드의 말랄라(Malalai of Maiwand)처럼 용감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믿음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여자로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삶을 살았습니다. 이 이름은 탈레반의 억압 속에서도 교육과 정의에 대한 믿음은 말랄라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2012년, 그녀는 학교 버스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는 끔찍한 암살 시도를 겪었습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6세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그녀를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로 이끌었고, 높은 이상에 대한 믿음을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제 일생의 목표는 전 세계의 모든 여자아이가 12년 동안 안전하고 질 높은 교육을 받도록 돕는 것입니다.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한 여자아이들은 전 세계에 1억 3천만 명이나 있습니다.”
“어린 여자아이가 저런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해?” 믿음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이처럼 성녀 잔다르크(Joan of Arc)의 이야기도 믿음의 변혁적인 힘을 보여줍니다. 1425년, 어린 소녀였던 잔은 천사와 성인들의 환시를 경험하며 프랑스를 구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단지 농부의 딸에 불과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믿고 따랐습니다. 1429년, 잔은 군대를 이끌며 그 시대 여성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흔들림 없는 믿음은 그녀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세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믿음이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마지막으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초기 삶에서 부와 세속적인 즐거움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1205년, 그는 산 다미아노(San Damiano)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중 “내 교회를 다시 세워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미아노 성당을 물리적으로 재건하는 일에 집중했지만, 점차 예수님께서 가톨릭교회의 영적인 기반을 새롭게 하라는 부르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필요한 일부터 시작하라. 그다음에 가능한 일을 하라. 그러면 갑자기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가난을 받아들이고 복음을 철저히 실천하며 교회를 쇄신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을 이루게 했고, 세상에 가난과 사랑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심지어 개신교에서도 프란치스코 성인은 존경합니다. 놀랍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단순한 경배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세상의 기대를 초월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세상에 희망과 영감을 줍니다. 믿음의 사람은 결코 세상 속에 숨겨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사람들에게 “아!” 하는 탄성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그리고 성모 마리아에게 영감을 준 엘리사벳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아멘”으로 응답하며, 믿음의 힘을 세상에 놀라움으로 증거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라스 교구 시노드에 참석했습니다. 3박 4일 동안, 3년 동안 준비한 시노드 결의 사항에 대한 투표가 있었습니다. 투표는 아주 중요한 것, 중요한 것, 덜 중요한 것으로 나누어서 투표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본당 행사에서 간식을 주는 것에 대한 투표가 있었습니다. 아주 중요하다는 의견, 중요하다는 의견, 덜 중요하다는 의견으로 투표했습니다. 교리 교육에 시대의 상황에 관한 것들을 반영하는 것에 대한 투표도 있었습니다. 낙태, 인종차별, 이민자, 환경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필요한가에 대한 투표였습니다. 교구장님은 시노드의 투표를 참조해서 달라스 교구의 사목에 반영하겠다고 했습니다. 매일 아침 미사가 있었고, 미사 중에 주교님은 ‘희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희망은 절망 중에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했던 희망입니다. 메시아는 3번에 걸쳐 우리에게 오신다고 했습니다. 2,000년 전에 오셨고, 지금 우리의 마음에 오시고, 마지막 때에 오실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희망을 품고, 깨어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성서 말씀은 구약과 신약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하즈 왕은 유다 왕국의 위기에 직면했으나, 하느님께서 주신 징조를 거부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라는 표징(임마누엘)을 주셨지만, 아하즈는 이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정치적 계산과 외교적 전략(앗시리아와 동맹)에 의존했습니다. 아하즈의 의심은 하느님보다 세상의 힘을 더 신뢰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 역시 하느님의 약속 대신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에 기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계획을 듣고 놀라움을 표현하지만(“어떻게 그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곧바로 순명하며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상황(혼인 전 임신으로 인한 사회적 위험)과 이해를 넘어,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며 자신의 삶을 내어드렸습니다. 마리아의 순명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계획을 신뢰할 때 어떤 열매가 맺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야구 경기는 투수와 포수가 공을 던지고 받는 경기입니다. 그러기에 투수와 포수는 서로 호흡이 잘 맞아야 합니다. 포수는 투수가 던지는 방향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투수는 포수가 잘 받을 수 있도록 미리 던질 곳을 약속합니다. 던지는 공의 유형도 직구인지, 변화구인지 사전에 약속합니다. 이것이 투수와 포수가 함께 공유하는 사인입니다. 사인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유능한 포수도 공을 잘 받을 수 없습니다. 사인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투수도 정확한 곳으로 공을 던질 수 없습니다. 야구 선수들은 훈련을 통해서 서로 사인을 숙지합니다. 그래야만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상식과 양식이라는 사인을 공유해야 합니다. 관용과 인내라는 사인을 나누어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이라는 사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징표를 보여주시는 하느님과 그 징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하느님께서는 내 가족들을 통해서,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흘러가는 구름과 부는 바람을 통해서 표징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내 믿음의 눈에 이물질이 묻어 있으면 성탄의 기쁨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사랑의 눈에 먼지가 잔뜩 묻어 있으면 주님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내 희망의 눈에 고통의 비가 내리면 주님의 성탄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해마다 계절이 오고 가듯이, 매일 태양이 뜨고 지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순환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내 마음에 욕망의 먼지가 묻어 있다면, 내 마음에 분노의 이물질이 쌓여 있다면, 내 마음에 열등감의 비가 내린다면 우리는 늘 새롭게 다가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대림 시기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하즈처럼 의심의 눈으로 하느님의 표징을 보지 말고, 성모 마리아처럼 순명의 눈으로 하느님의 표징을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인
성 도미니코 (Dominic)
신분 : 수도원장
활동지역 : 실로스(Silos)
활동연도 : +1073년
같은이름 :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하느님께 속하다,하느님께 봉헌하다)
그는 피레네 산맥의 스페인 방향에 있는 나바레의 카냐스에서 태어났는데, 이곳 주민들은 모두가 농부였다.
그러므로 그도 얼마동안은 주민들의 습관에 따라 아버지의 양떼를 돌보는 등의 일을 하였으나,점차적으로 독수생활에 대한 매력에 이끌려서 산 밀란의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수도생활에 큰 발전을 이루었고, 수도회의 개혁사업에도 관여하게 되자, 곧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이 직책을 수행하던 중에 그는 수도원을 징발하려는 국왕 가르시아 3세와 갈등이 생겨서 그곳을 떠났다.
그는 실로스의 성 세바스챤 수도원으로 갔는데, 이곳에서 원장이 되었다.
이 수도원은 한적한 곳에 있었지만, 부르고스 교구의 중심지로 인정 받을 만큼 영적 은총이 충만하였다.
이 모두가 도미니꼬의 높은 성덕 때문이라고 한다.
그당시, 그에게 기도하여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 없고, 또 치유받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의 무덤은 유명하였다고 한다.
복자 빈첸시오 로마노 (Vincent Romano)
활동년도 : 1751-1831년
신분 : 신부
지역:
같은 이름 : 뱅상, 빈센트,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원선시오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 근방의 토레 델 그레코(Torre del Greco)에서 태어난 빈첸시오 로마노(Vincentius Romano)는 본당사제로서 단순한 삶과 고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기억되고 있다. 1831년 12월 20일 자신의 고향에서 선종한 그는 1963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